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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기 | 국장 | |||||
Brödrafolkens väl 형제 민족의 복지[2] | ||||||
상징 | ||||||
국가 | 유구한 그대, 자유로운 그대 (Du Gamla, Du Fria)(스웨덴) | |||||
노르웨이의 건배 (Norges Skaal, 1814–1820) 노르웨이의 아들들 (Sønner av Norge, 1820–1864) 그래, 우리는 이 땅을 사랑한다 (Ja, vi elsker dette landet, 1864–)(노르웨이) | ||||||
지도 | ||||||
1814년 ~ 1905년 | ||||||
성립 이전 | 해체 이후 | |||||
스웨덴 왕국 | 스웨덴 왕국 | |||||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 노르웨이 왕국 | |||||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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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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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스톡홀름 (스웨덴) 크리스티아니아 (노르웨이) | |||||
면적 | 774,184km² | }}}}}}}}} | ||||
인문 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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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 스웨덴인, 노르웨이인 | |||||
언어 |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 |||||
종교 | 스웨덴 교회, 노르웨이 교회 | }}}}}}}}} | ||||
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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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수 | 스웨덴 국왕 | |||||
정부수반 | 총리[3][4] | |||||
주요 국왕 | 칼 14세 요한 오스카르 2세 | }}}}}}}}} | ||||
경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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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14년부터 1905년까지 존속했던 북유럽의 연합 왕국이다. 스웨덴이 우위에 서서 병합해서 그냥 스웨덴 연합 왕국이라고도 불린다. 당시 수도는 각각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수도인 스톡홀름과 오슬로[5]였는데, 왕은 몇 달마다 번갈아가며 두 곳에 거주했다.[6]2. 국기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명목상 별개의 국가였기 때문에 자신들만의 깃발이 있었으며 선박에 게양하는 민간 상선기를 겸했다. 정부기와 해군 상선기는 오른쪽이 세 갈래로 갈라진 것을 썼다. 지금도 이들 나라에선 사각형 깃발이 국기 겸 민간 상선기고 오른쪽이 갈라진 깃발이 정부기 겸 해군 상선기다.1814년 ~ 1821년 | 1821년 ~ 1844년 |
노르웨이는 1814년 킬 조약이 체결되자 노르웨이 의회의 반발로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덴마크의 크리스티안 8세)를 독립적인 군주로 세웠을 때 덴마크 국기 왼쪽 위 캔턴(Canton)에 사자 문장을 넣어 국기로 사용했고 스웨덴으로 넘어간 후에도 계속 사용하였다. 그러다 1821년 프레드리크 멜체르(Fredrik Meltzer)가 지금의 노르웨이 국기를 만들었으나 당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이었던 칼 14세 요한은 이 깃발을 노르웨이의 국기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노르웨이의 시민기(市民旗)로 인정하였다. 상선기로도 사용되었는데, 노르웨이는 북아프리카 국가들과 조공관계가 없어서 북아프리카 해적의 공격을 받기 쉽다는 이유로 스페인 서쪽 해안에 있는 피니스테레 곶(Finisterre)[7] 남쪽에서는 스웨덴 국기를 사용하고 피니스테레 곶 북쪽에서는 노르웨이 시민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1815년 ~ 1844년(국기) | 1818년 ~ 1844년(상선기) |
스웨덴은 1815년에 지금의 국기보다 파란색이 진한 깃발을 국기로 쓰다가 1818년에 국기의 캔턴에 노르웨이를 상징하는 문장을 넣어서 상선기로 썼다. 노르웨이의 남쪽바다 상선기는 1822년까지 왼쪽의 스웨덴 국기를 쓸 수도 있었으나 1822년에 노르웨이와 스웨덴 모두 연합기를 쓰는 것으로 통일했다.
그러다 1844년에 스웨덴 국기와 노르웨이 시민기를 합쳐 놓은 연합 마크(영어: union mark, 스웨덴어: unionsmärket 또는 unionstecknet, 노르웨이어: unionsmerket)가 등장하였다. 여러가지가 뒤섞인 모양이라 별명은 청어 샐러드(영어: the herring salad, 스웨덴어: sillsalladen, 노르웨이어: sildesalaten)였다. 본래 스웨덴 측에서 모양이 맘에 안 든다며 비난하기 위해 쓴 말이었지만 노르웨이에서는 오히려 연합 마크를 좋아했다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짬뽕, 잡탕 정도의 느낌인 셈이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연합 마크를 자국 깃발의 캔턴에 넣어서 사용하였다. 특히 노르웨이는 캔턴 넣은 시민기를 모든 바다에서 상선기로 쓸 수 있었다. 1830년대에 북아프리카 해적이 프랑스에 의해 소탕되었기 때문.
시간이 흘러 1899년 노르웨이는 캔턴을 떼 버린 지금의 국기로 바꾸었고, 스웨덴은 1905년 동군연합 해체 이듬해인 1906년에 캔턴을 떼고 현재의 연한 파란색을 국기로 쓰게 되었다.
노르웨이(1844~1899) | 스웨덴(1844~1905) |
1840년대에 나온 범스칸디나비아주의를 상징하는 그림. 가운데는 덴마크 국기로, 끝이 뾰족한 정부기다.
1899년 10월 18일에 스웨덴 외무부가 만든 자료. 노르웨이 국기에 연합 마크가 빠져 있다. 오른쪽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기는 정부기 겸 해군기다.
3. 역사
나폴레옹 전쟁 중 체결된 킬 조약으로 본가인 올덴부르크 왕조가 다스리던 덴마크-노르웨이 왕국의 일부였던 노르웨이는 분가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이 다스리던 스웨덴으로 할양되었다. 이 병합은 양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니었고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서로 다른 역사, 고유의 전통과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보니 결속력이 그렇게 강하지는 않았다.[8]덴마크 지배 시절에 비해 좀 나아졌지만[9] 외교부와 국방부가 없어 여전히 속국 취급을 당했던 노르웨이는 분리 독립운동을 펼쳤고, 1905년에 국민 투표에서 독립을 결정하면서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8세와 왕후 스웨덴의 루이세[10] 부부의 둘째 아들 크리스티안 칼 왕자를 호콘 7세로 선출하였다. 오스카르 2세는 노르웨이의 독립을 최대한 저지하려 하였으나 스웨덴 정부는 노르웨이 독립을 수용하였고 두 나라는 자연스럽게 결별하였다.
[1] 참고로 영어 명칭은 'United Kingdoms of Sweden and Norway', 줄여서 'United Kingdo[2] 오스카르 2세 때 표어. 형제 민족을 넣어 스웨덴과 노르웨이 둘을 다스린다는 것을 강조한다.[3] 스웨덴, 노르웨이 각각 1명[4] 1870년대부터 신설.[5] 당시 오슬로는 17세기에 불타버린 도시를 재건한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의 이름을 따 크리스티아니아(Christiania 혹은 Kristiania)로 불렸다.[6] 보통 하절기에는 크리스티아니아에서, 나머지는 스톡홀름에서 머물렀다.[7]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피니스테레 해전이 일어났던 곳이다.[8] 다만 이와 별개로 노르웨이가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후에도 그대로 노르웨이에 남은 스웨덴계 이주민들이 의외로 적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오늘날 노르웨이에 스웨덴식 ~손(son) 돌림 성씨가 많이 존재하게 되었다. 사실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서로 다른 역사, 전통, 언어를 가지긴 했어도 일단 같은 북게르만계 국가이다 보니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시절 기준으로도 언어·문화적 유사점은 적지 않았다.[9]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시절에는 코펜하겐이 노르웨이 수도까지 겸했으며, 덴마크 왕들은 코펜하겐에서 노르웨이 왕위 대관식까지 퉁쳐버리고 노르웨이에 방문하지도 않았다. 덴마크에서 파견된 총독 혹은 부왕들이 노르웨이를 통치하였다.[10] 스웨덴 국왕 칼 15세(노르웨이 국왕으로서는 칼 4세)의 딸이며, 오스카르 2세는 그녀의 숙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