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역사 Norges histori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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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22e2b> 노르웨이 |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 | 요제프 테르보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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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 | 에리히 코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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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00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 Reichskommissariat Norwegen[1] Rikskommissariat i Norge[2]}}} | ||
국기 | 국장 | |
1940년 ~ 1945년 | ||
성립 이전 | 해체 이후 | |
노르웨이 왕국 | 노르웨이 왕국 | |
국가판무관 | 요제프 테르보펜 헤르만 뵈메 | |
수도 | 오슬로 | |
위치 | 노르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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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세운 국가판무관부다. 임명된 국가판무관은 에센 대관구 지휘자 요제프 테르보펜. 요제프 테르보펜이 대전 말기 자살한 후 헤르만 뵈메 장군이 맡았다.2. 역사
1940년 덴마크를 침공한 독일이 노르웨이 침공을 개시하고 수도인 오슬로를 함락시키고 전역을 점령하자 노르웨이 왕실과 정부가 영국 런던으로 피신하고 노르웨이 본토에는 국가판무관부가 세워졌다.1942년, 비드쿤 크비슬링과 국민연합이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 내에 자치 정부를 세운다.(크비슬링 정권) 해체된 건 1945년 5월 9일이다. 노르웨이는 나치의 레벤스보른으로 인해 독일군 아버지를 가진 노르웨이인 아이들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들은 이후 조국에서 침략자의 자식들이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다.
이후 소련군이 도달한 노르웨이의 최북단 일부를 제외하고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는 1945년 독일 항복 시 까지 유지되었다.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가 이리도 오래 버텼던 이유는 나치 독일이 연합국의 노르웨이 상륙 뒷치기를 우려해 무려 20만의 병력을 주둔시켰기 때문이다. 독일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그제서야 이들을 독일 본토로 보내려고 했지만 그때는 배나 비행기가 싸그리 파괴된 탓에 이들을 독일 본토로 수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소규모의 병력들이 고속 수송함 등을 타고 어찌어찌 독일 본토로 수송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베를린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당시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에 주둔했던 병력들은 결과적으로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 단 한 번의 교전도 치르지 않았다고 한다.
1945년 당시 항복 직전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의 인구는 독일군을 제외하면 약 300만 명이었다. 15명 중 1명의 독일군이 주둔했기 때문에 프랑스나 유고에서 나름대로 잘 먹혔던 게릴라나 레지스탕스 등 민간의 저항 활동은 이곳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소련이 노르웨이까지 진격하는 걸 원치 않았던 윈스턴 처칠이 소련군의 진격에 제동을 걸어 핀란드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하고 노르웨이 주둔군은 영국에 항복케 했기에, 이들은 전후 소련으로 끌려가는 신세도 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