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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9 13:46:22

워털루 전투

워털루 전투
영어: Battle of Waterloo
프랑스어: Bataille de Waterloo
독일어: Schlacht von Waterloo
파일:Battle_of_Waterloo_1815.png
일시
1815년 6월 18일
장소

네덜란드 워털루 인근
벨기에 브렝라뤼드(브라방왈롱)
이유
대프랑스 연합군을 격파하기 위한 나폴레옹의 출전
교전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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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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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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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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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미셸 네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에마뉘엘 그루시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장드디외 술트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장바티스트 주르당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에두아르 모르티에[1]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제롬 보나파르트
병력 113,000명 105,000명
결과
영국·네덜란드·프로이센 왕국 연합군의 승리
영향
20여 년에 걸친 나폴레옹의 유럽 지배 종식
1. 개요2. 배경3. 양군 편제4. 경과
4.1. 개전4.2. 진행
4.2.1. 전투의 시작4.2.2. 네 원수의 기병돌격4.2.3. 블뤼허의 진격4.2.4. 나폴레옹의 근위대
4.3. 절정4.4. 결과
5. 평가
5.1. 연합군5.2. 프랑스
5.2.1. 인사기용5.2.2. 아서 웰즐리에 대한 과소평가5.2.3. 블뤼허의 증오심에 대한 과소평가?5.2.4. 결론
5.2.4.1. 나폴레옹, 본인의 회상
6. 만약 나폴레옹이 승리했다면?7. 이야기거리들8.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워털루 전투는 1815년 6월, 벨기에워털루에서 나폴레옹프랑스 제1제국영국, 프로이센, 네덜란드의 대프랑스 연합군 간의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로 나폴레옹은 완전히 몰락하고, 길었던 나폴레옹 전쟁의 종식을 맞았으며, 백년 평화가 시작되었다.

이름과 달리 실제 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워털루'가 아니다. 워털루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남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연합군이 작전 본부를 설치한 곳이다. 실제적인 전투지는 플랑스누아 마을과 몽생장 마을 사이에서 남쪽으로 약 6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2. 배경

실제 전투가 일어난 브렝라뤼드(Braine-l’Alleud) 지휘소가 설치되었던 워털루

엘바 섬에서 탈출한 뒤 강력한 카리스마로 군대와 정부, 그리고 민심을 장악하고 재집권한 나폴레옹은 일단 유럽 각국에 화평 교섭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대신에 당시 네덜란드 브뤼셀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과, 나폴레옹에게 지겹게 패배를 당하여 악감정이 극도로 올라가 있던 프로이센군이 프랑스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에 나폴레옹은 대불동맹군이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할 생각으로[2] 기존의 정예부대에 급조한 부대를 추가한 12만 8천 명의 군대를 통솔하여 급히 벨기에로 전진시켰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을 브뤼셀에 있는 웰링턴과 동쪽에 있는 프로이센군의 사이에 프랑스군을 밀어넣어서 둘을 단절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가짜 명령을 만들어서 프랑스군이 서쪽에서 캄브레 강을 건너는 척하면서 웰링턴을 유인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배신자가 나오면서 나폴레옹이 동쪽에서 강을 건너올 것이란게 알려졌다. 이에 따라 연합군은 재빠르게 해당 다리가 있는 도시로 집결하려고 하는데, 나폴레옹이 생각보다 빠르게 강을 건너서 북진해 오면서 웰링턴과 프로이센군이 합쳐지기 직전에 각각 프랑스군을 맞딱뜨리게 된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본대는 6월 16일 리니 전투에서 블뤼허 원수의 프로이센군을 격파한다.[3] 하지만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얕보고 추격 지시를 너무 늦게 내린 탓에 프로이센군이 퇴각하여 병력을 보존하면서 중요한 기회를 놓치게 된다. 한편 같은 날 미셸 네 원수가 이끄는 부대도 카르트 브라에서 웰링턴의 연합군을 우연히 기습하는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이 역시도 실책으로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만다.[4]

퇴각한 웰링턴은 브뤼셀을 향하는 나폴레옹의 길목에 놓인 작은 언덕지대를 눈여겨보고 방어준비를 하는데 이곳이 브렝라뤼드다.

3. 양군 편제

영연합군
총사령관(Commander-in-Chief): 육군 원수 아서 웰즐리, 1대 웰링턴 공작
제1군단 (I Corps): 오라녜 공 빌럼 2세제2군단 (II Corps): 육군 중장 롤랜드 힐 경
영연합군은 총합 11만에 가까운 인원으로 편제되었는데, 거의 절반 가까이가 이런저런 이유로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일부 영국군 여단들과 대다수의 네덜란드-벨기에 여단들은 보급선 보호를 이유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하노버군의 대다수도 후방에 남았다.

프랑스군에 비교하면 영연합군은 전체적으로 숙련도가 떨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웰링턴과 반도 전역에서 싸웠던 영국군의 대다수는 전역한 상태였고, 현역에 남아 있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으나, 이들중 1만 가량이 미영전쟁에 참가한 상태였다. 물론 하이랜더 등은 반도 전역에서 싸우며 그들의 가치를 증명해 보였지만, 나머지 보병연대들은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기병연대들은 더 심해, 14년간이나 실전을 경험하지 못한 연대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병사들이 훈련이 상당히 잘 되어 있었고, 영국군의 외인부대인 국왕의 독일군단(이하 KGL)은 부대원의 상당수가 반도전역에 종군한 경험이 있기에 사정이 조금 낫기도 하였다.

영국군을 제외한 네덜란드-벨기에군의 숙련도는 믿기 힘들었다. 22세밖에 안된 오랑주 공의 지휘력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병사들의 사기가 상당히 낮았다. 그 결과 전역 중 집단탈영 사태가 상당히 많이 발생하였고, 웰링턴은 그들의 전열 이탈을 막기 위해 일선에 배치하는 일은 최대한 피하려 했다.

또다른 동맹군들인 하노버와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의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워털루 전투 전에 일어났던 카트르 브라 전투에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전사해 브라운슈바이크 병사들은 사기 역시 저하되어 있었다. 네덜란드-벨기에군과 마찬가지로 브라운슈바이크 병사들은 되도록 예비대로 배치되었으며, 포병대와 함께 후방에 위치하였다. 하노버군은 영국군과 같은 복장을 하고 있는 군대로, 숙련도는 낮았지만 젊고 쓸만한 병사들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낮은 사기 때문에 일선에 배치되지 않았고, 요새주둔군이나 예비대로 편제되었다.

영연합군 중 하노버군이 2만, 브라운슈바이크 군단-나사우군이 1만, 네덜란드-벨기에군이 3만에 이르렀다. KGL을 합친다고 해도 영국군은 4~5만 정도에 불과하였으니, 웰링턴에게 믿을만한 병사들의 수는 상당히 적었던 것이다.

4. 경과

4.1. 개전



프로이센군이 격퇴당했다는 것을 들은 연합군 사령관 웰링턴 공작은 일단 부대를 워털루 인근으로 후퇴시키고, 위고몽과 라에상트 두 곳의 대형 농장을 요새화하며 프랑스군의 진격을 방해할 준비를 한다.

나폴레옹은 퇴각한 프로이센군이 다시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네덜란드-벨기에 연합군에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뒤늦게나마 에마뉘엘 그루시 원수에게 병력 33,000명을 맡겨서 다시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게 한다. 그러나 그루시는 프로이센군이 미끼로 분리시킨 소부대를 본대로 착각하고 이를 추격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그동안 프로이센 본대는 유유히 워털루로 향한다. 결국 나폴레옹은 전체 병력의 1/3을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끝까지 쓰지 못한다.[19]

나폴레옹은 분할한 병력 33,000명이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는 사이에 나머지 병력 주력을 연합군에게 집중시켜 섬멸할 생각으로 6월 17일까지 연합군 진지 근처로 이동, 6월 18일 아침부터 공세를 개시하려 했다. 그러나 6월 17일 밤 동안 많은 비가 내려 진창이 많이 발생했고,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포병대 방열과 포격 효율을 위해[20] 땅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작전 개시 시간을 네 시간 미루면서 워털루 전투는 오전 11:30에 개시된다. 이 네시간은 나중에 결정적인 아쉬움으로 다가오는데, 그 사이에 프로이센군이 점차 다가왔기 때문이다.

4.2. 진행

4.2.1. 전투의 시작

파일:external/2.bp.blogspot.com/map-2pm-600.jpg

전장을 관찰한 나폴레옹의 눈에는 연합군의 포병만 보일 뿐이었다. 웰링턴이 일부러 병력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언덕 뒤에 숨겼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그중 비교적 노출이 된 연합군 우익에 주목했는데, 이곳이 약점이라 여기를 공격하면, 연합군이 달려올 수밖에 없다고 봤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연합군의 우익을 공격하여 그곳으로 연합군이 몰리게 한 다음, 얇아진 좌익과 중앙으로 대병력을 밀어넣는다는 성동격서식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11시 25분, 프랑스군은 연합국 우익에 대한 집중포격을 시작으로 데를롱의 제1군단이 연합군에 대한 파상공세를 시작한다.

그런데 연합군의 우익과 중앙에는 농장이 하나씩 있었는데 이 두 농장은 모두 프랑스의 주 진격로에 떡하니 놓여있었다. 특히 연합군 우익에 놓인 위고몽은 워낙 넓은 면적을 담장이 두르고 있어서 우회도 어려웠다. 이 두 거점의 중요성을 간파한 웰링턴은 위고몽에는 콜드스트림 근위연대, 라에상트에는 왕립 독일인 군단이라는 정예부대들을 수비대로 각각 배치해 놓았다. 반면 이곳 공격에 나선 프랑스군은 급조한 부대로 질이 낮았고 위고몽 공략을 맡은 제롬 보나파르트의 영 좋지 않은 지휘까지 겹쳐서 위고몽을 뚫지 못한다.

파일:external/i0.wp.com/Hugomont.jpg

그래도 한때 도끼로 위고몽 농장의 북쪽 대문을 때려부순 프랑스 보병들이 마당으로 난입하여 농장을 거의 함락시킬 뻔하였으나, 농장 담 안쪽도 따로 분할하는 담이 있었기 때문에 콜드스트림 근위연대의 맥도넬 대령과 4명의 연대원들이 농장 안쪽의 문을 닫아 간신히 프랑스군을 막는 데 성공했다.[21] 그 후 위고몽 농장의 저택은 프랑스군 곡사포대의 맹렬한 포격을 받고 불타버렸지만, 콜드스트림 근위연대는 강철 같은 군기와 증원병력에 힘입어 전투가 끝날 때까지 거점인 나머지 건물들을 사수해냈다. 결국 프랑스군은 연합군에 속해있던 네덜란드 부대를 괴멸시키고, 위고몽을 포위하는 정도의 성과만 거둔다.

위고몽과 연합군 우익에 대한 공격시작 2시간 뒤 프랑스군은 진짜 목표인 연합군 좌익과 중앙에 모든 대포를 동원하여 집중포격을 한다. 그런데 연합군 병력은 언덕 뒤에 숨겨져 있어서 그다지 피해는 없었다. 프랑스군은 이어서 연합군 좌익과 중앙에 대병력이 겹겹이 전진하며 공격에 나선다. 가는길에 연합군 중앙에 라에상트 농장이 있었는데, 이곳도 위고몽과 마찬가지로 골치를 썩혔지만, 병력을 나누어서 프랑스군 나머지는 그대로 연합군 좌익을 향한다.

연합군 좌익의 언덕에 다다른 프랑스대군은 언덕 뒤에 숨어 있던 연합군이 일제히 달려들면서 이에 맞아 치열하게 싸운다. 하지만 공격하는 프랑스군의 숫자가 많아서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에 연합군은 예비 전력인 토마스 픽튼의 제5사단이 출격, 라에상트를 포위하던 프랑스군을 쫓아내는데 성공하지만, 사단장인 토마스 픽튼이 전사한다. 영화 워털루에서 혼자 군복이 아닌 사복 정장을 입고 참전했다가 전사한 사람(잭 호킨스 분)이 그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로, 급히 전투에 참여하느라 군복 등의 개인 물품을 챙기지 못해서 사복을 입고 싸운 것이었다.

파일:기병2.jpg

사단장의 전사와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제5사단이 괴멸위기에 빠지자, 옥스브리지[22] 백작[23] 휘하의 영국 기병 2개 여단[24]이 프랑스군을 급습, 제5사단을 구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기세가 올라버린 영국 기병대는 그대로 프랑스군 주력을 향해 돌진하고 만다.

파일:기병4.jpg
이 돌격으로 프랑스군 보병과 포병은 5,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군기 2개를 탈취당했고 일부 포대가 피해를 입었지만, 그러는 동안 프랑스군의 퀴레시어와 경창기병들을[25] 중심으로 한 기병대가 편성되어 반격, 연속된 돌진으로 지쳐있던 영국 기병대의 40%를 쓸어버린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옥스브리지는 다리를, 폰손비는 목숨을 잃었다. 이 손실로 영국 기병대는 이후 이날의 전투에서 더 이상 눈에 띄는 활약을 보이지 못한다. 거기다 그 피해 입은 40%는 영국군 중기병의 대부분이었다.[26]

한편 오후 3시가 되자, 몸이 좋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약간의 휴식을 갖기로 하고 네 원수에게 지휘를 맡기고 막사로 돌아간다. 최상의 컨디션에서도 승패를 가늠하기 힘든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동안 토막잠을 자며 폭식과 속식(빨리먹기)을 하고 거친 야전생활을 한 결과로 인해 몸이 망가져서 여러 가지 잔병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나폴레옹은 치질을 앓고 있었는데, 그 전날 밤 고통이 심해지자 주치의는 아편을 처방했다고 전한다. 아편의 과다한 복용으로 그날 나폴레옹은 반 혼수 상태가 되어버리는 궐위 상황이 터졌던 것이다. 일부에서는 고혈압이었다는 말도 있다.

4.2.2. 네 원수의 기병돌격

네 원수는 라에상트에 공세를 가했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라에상트에 주둔한 연합군은 습격한 프랑스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었지만 브라운 베스보다 훨씬 명중률이 높은 베이커 라이플로 무장한 소수 정예부대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무렵 연합군이 프랑스군과의 전투로 피해가 큰 부대를 비교적 피해가 적은 부대와 교대하는 것을 "연합군이 흔들리는 것으로" 오판한 네는 보병포병을 기다리지 않고, 퀴레시어 2개 사단에 근위대 기마 샤쇠르들까지 더해 40개 대대에 달하는 거의 대부분의 프랑스군 기병대를 이끌고, 사각형의 대기병 방진을 완성하고 기다리던 대규모의 보병대 속으로 돌격해 들어간다.

보병 사각대형은 기병 돌격을 저지하기 위한 대형인데, 여기에 그냥 돌격해 들어가는 것은 당대 전투에서 하지 말아야할 미친 짓 중 하나였다. 매우 기다란 총검이 달린 당대의 총을 창으로 삼아서 밀집한 보병은 거대한 고슴도치와 같아서 말들이 겁을 먹고는 갑작스럽게 멈추거나 방향을 마구잡이로 틀어 돌격 대오가 흐트러지고 충격력이 크게 약해져 방진에 감히 충돌하지도 못하거나 충돌 하더라도 느릿한 속력과 겁에 질려 통제를 따르지 않는 말 탓에 피해도 못 주고 되려 총검질에 꿰여 죽기 쉬웠다. 그렇게 들이받을 수도 없고 뒤에서 돌진 중인 다른 기병대 탓에 후퇴할 수도 없는 난장판에 돈좌된 기병들은 보병들의 일제사격과 총검의 벽에 부딪혀 죽어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27]

사각 밀집대형을 깨기 위해서는 포병대를 동원하여 미리 진형을 깨놓아야 한다. 굳이 돌격으로 진형을 무너뜨리고 싶다면 반드시 보병기병이 동시에 취약점인 모서리를 노려 돌격해 들어가야만 했다. 기병만 돌격해 들어갔다가는, 설령 모서리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더라도, 반대편쪽 보병들이 등을 돌려 총검으로 쿡쿡 쑤시는 결과만 나올 뿐이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복구되어 있는 사각 대형을 보게 될 것이다.[28]

결국 프랑스 제국군은 단 몇 시간 전 연합군이 그랬던 것처럼 기병대의 상당수를 잃는다.
영화 워털루에서 재현한 프랑스 기병대의 돌격

이러한 프랑스군의 성급한 기병 돌격은 네 원수의 역사를 바꾼 실책으로 불리곤 하는데 여기에 의외의 반론이 있다.
프랑스 역사가들이 선호하는 음모론이 아니라 실수 이론에 근거를 둔 스미스의 설명에 따르면, 핵심 인물은 2근위 기마 창병 연대의 대위 프르튀네 드 브라크다. 경기병 연대에서는 비교적 말단에 속했던 브라크는 폰슨비의 유니언 여단을 분쇄하는 데 참여했다. 전투가 끝나고 20년이 지난 후, 브라크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네가 너무 이르게 돌격하여 재앙을 불러온 데는 자신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고백했다. 유니언 여단에 맞서 성공을 거둔 데 과도하게 흥분한 브라크는 연합군 전선의 움직임을 퇴각으로 오인하고 큰 목소리로 공격을 요구했다. 그러자 브라크 주변의 장교들이 직접 확인하기 위해 앞서 나왔다. 브라크의 말을 빌리자면, 그 결과 “우리 연대의 우측 대열이 장교들의 뒤를 따랐다.” 연대 전체가 자동적으로 이 이동을 따라했는데 이는 단순히 “대열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접 연대인 근위대의 기마 추격병 연대도 똑같이 이동하고 나니, “오른쪽에서 겨우 몇 걸음” 더 나갔을 뿐이었으나 말의 정렬선 아래로 더 내려가 전진은 “더욱 명확해졌다.” 그래서 네 원수가 돌격 명령을 내리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용기병 연대와 근위 기마 척탄병 연대까지 이를 따라할 즈음이면, 이들은 실제로 그 명령이 내려졌다고 믿었다. 브라크가 설명했듯이, “그들은 출발했고, 우리는 뒤따랐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도박』, 앤드루 로버츠 저 p77.

이 설에 따르면 연합군이 후퇴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 장교들이 열을 맞추어 앞으로 조금 걸어갔고 인접한 연대가 같이 움직인 것을 전진 명령이 내려진 것으로 착각하고 돌격 명령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용기병대가 이때다 하고 멋대로 닥돌해버린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겠지만 통신기 같은 게 없던 전근대의 전쟁에서는 명령을 전달하는 수단이 매우 열악했고 그 때문에 명령이 잘못 전달되어 일이 망하는 경우가 흔했다.[29] 사실이라면 역사를 바꾼 착각(혹은 실수)이라 해야 할 듯.

오스프리에서 발간한 워털루에서는 네 원수가 기병 1개 여단만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라고 했는데 무슨 일인지 기병대 전체가 극도로 흥분하며 나머지 기병대까지 명령이 없는데도 돌격했다고 적혀있다. 위에서 말한 통신의 부재와 심리가 겹쳐 일이 완전히 망가진 사례라고 하겠다.

어쨌든 프랑스 기병들은 고지 점령 자체는 성공했다. 하지만 후속 보병부대가 없으니 연합군 대포를 탈취해서 쓰지도 못했다. 이럴 때에는 대포의 심지를 넣는 부분에 머리 없는 나무못이나 구리못을 박아넣어서 대포를 못 쓰게 만드는 방법이 있었다. 이를 위해 기병대에서는 몇몇 병사가 못과 망치가 들어있는 가방을 가지고 다녔는데 하필이면 이 사람들이 전부 전사했다! 결국 대포를 그대로 놔두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 기병대의 돌격을 피해 블랙와치 연대와 브라운슈바이크 보병연대 등이 짠 방진 속으로 피신했던 연합군 포병들은 다시 기어 나와서는 프랑스 기병대에게 맹렬히 포격을 퍼부었다.[30] 결국 프랑스 기병은 연합군의 반격을 받아서 대부분 박살이 나버렸다. 의무실에서 전선으로 돌아오다가 이걸 본 나폴레옹은 너무나 기가 막혀서 정말로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기병이 보병과 포병의 지원도 없이 단독으로 공격하면 어떡하냐며, 자신이 모든 일을 직접 전부 처리해야 하냐며 네 원수를 크게 질책했다.

4.2.3. 블뤼허의 진격

이 무렵, 격파되었던 부대를 수습한 블뤼허는 와브르에 견제할 부대를 놔두고 워털루 방면으로 진격, 17:00경에 전초부대가 프랑스군의 우익 후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프로이센군 전초부대는 프랑스의 급조 부대인 청년 근위대와 교전했는데, 급조된 부대이지만 사기는 높았던 이들은 프로이센군의 선두 부대는 격파했으나 프로이센군이 계속 증원되자 밀렸으며 프로이센군은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프랑스의 전략 예비대였던 프랑스 제국 근위대가 급파되었고, 이들 단 두 개 대대에게[31] 프로이센군은 14개 대대가 완전히 박살이 나면서 후퇴했다. 하지만 재차 이은 공격으로 블뤼허의 1군이 전장에 도착할 길을 여는데 성공했다.

18:00 무렵, 기병대만으로 들이밀었다가 실패했던 네 원수는 뒤늦게 보병-기병-포병을 제대로 조합한 전력으로 연합군 본대를 압박했고, 라에상트 농장을 지키던 연합군 400명 중 40명만이 살아남았을 정도로 처절한 육박전 끝에 드디어 라에상트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32] 이번 프랑스군의 공격은 효과적이어서 연합군은 중앙에서 효과적으로 프랑스군을 막아주던 요새를 잃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군의 포격에 피해가 누적되어 위기 상황이었다.[33]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기병대가 대파된 후에 프랑스군은 제대로 공격도 못하다 프로이센군이 오면서 패한 것으로 알지만 실제로는 이 무렵만 하더라도 프랑스군이 우세했다. 도착한 프로이센군은 분리된 프랑스군 우익이 잘 막고 있었고, 연합군을 향한 공격은 잘 되는 중이라 강하게 밀면 연합군을 무너트릴 수도 있을 법했다. 네 원수도 다혈질에 성질 급한 성격이라 실책은 많이 했지만 바보짓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점에 그루시는 여전히 프로이센 본대를 찾아 해매고 있었다. 다만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워털루에서의 전투가 한창 절정에 달할 즈음에 블뤼허의 4개 군단 중 1개 군단과 교전을 벌이기는 했다. 문제는 블뤼허가 후위부대로 남겨둔 군단인데도 이들과 교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휘하 장교들이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을 듣고 한참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황제를 도우러 가자고 애청하고 있었으나, 그루시는 "임무는 끝까지 수행해야지." 라며 가망 없는 추격을 지속한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뒤늦게 그루시에게 당장 돌아오라는 전령을 이미 보냈다. 문제는 전령을 한 명만 보냈고 이 사람이 중간에 전사하는 바람에 연락이 안 갔다. 원인은 전령을 보낸 참모총장 술트였으며 나중에 "베르티에라면 20명은 보냈을 거라고!" 라며 질책했다지만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은 출중해도 참모총장으로서의 능력은 절대 기대할 수 없었던' 술트를 참모총장에 임명한 게 바로 나폴레옹 자신이다. 뭐 그루시도 마찬가지이지만. 결과적으로 전세를 바꿀 수 있는 33,000명의 귀한 대군을 데리고, 와브르에서 해맨 것이다.[34]

실제로는 나폴레옹이 그루시 원수에게 보낸 최종 명령서에는 본대와 합류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최종적으로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다. 거기에 시점으로 볼 때도 현실적으로 합류하러 가기는 늦은 상태였다.

네 원수는 라에상트 점령 후에 궁지에 몰린 연합군을 확실히 제압하려고 나폴레옹에게 보병의 추가 지원을 요청하지만 네 원수의 앞선 실책으로 단단히 화가 나있고 측면에서 프로이센군의 견제를 위해 제국 근위대를 배치해야 했던 나폴레옹은 결정타를 날리려는 네의 병력 지원 요청에 "보병을 더 지원해 달라고? 대체 어디에서 보병을 데려오라는 말이냐? 너는 내가 보병을 만들어내는 줄 아느냐?"며 거부했다고 한다. 거기다 이미 프로이센군이 가까이 접근하고 있어서 그 부분을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4.2.4. 나폴레옹의 근위대

프랑스군은 거의 전 병력을 전투에 투입되어 있었는데, 전세는 아주 팽팽하게 맞서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이센군이 계속 도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끌수록 불리할것이 분명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아껴 두었던 최후의 예비대인 제국 근위대로 승부수를 띄우기로 결심한다. 곧장 연합군의 중앙을 돌파하기로 하고, 부대의 사기 유지를 위해 접근해 오는 프로이센군 본대를 "추격나갔다가 귀환 중인 그루시의 부대"라고 거짓 소문을 퍼트리게 했다. 당시 전장에서 양쪽 보병은 흔히 아는 화려한 군복 위에 어두운 회색 롱코트를 껴입었기 때문에 멀리서 봐서는 잘 분간이 안갔다. 하지만 나중에 이 거짓말은 역효과로 돌아온다.

근위대 6개 대대를 중심으로 삼은 돌파부대가 연합군의 중앙을 돌파하기 위해 전진해 나갔다. 다만 나폴레옹이 공격 결단을 늦게 내린 바람에 이전 공격과의 시간차가 좀 있었고, 그 사이에 연합군은 프랑스군의 중앙공세를 이미 예감하고 가져올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중앙에 집결시켜 저항했다.

하지만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프랑스 제국 근위대의 전투력은 일반 전열보병으로 어찌 해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연합군불도저에 밀리듯 무너져갔다. 연합군 사령관 웰링턴은 블뤼허의 본대가 당장 오지 않는다면 모두 저세상에서 만날 거라고 말할 정도로 심각했다.

파격지세로 중앙을 진격한 근위대는 언덕 앞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때 본대 앞에서 산개하여 정찰하는 척후병이 이미 다 소진되어서 밀집진형을 한 본대만으로 진격하는 중이었다. 때문에 언덕 뒤에는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아 아무것도 모른 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한 프랑스군을 맞이한 것은 언덕 뒤에서 대기하던 연합군의 폭풍같은 일제사격이었다. 웰링턴은 4개로 조를 나누어서 앉아있다가 순서대로 일어서서 쏘는 방식으로 좁은 공간에서 엄청난 화력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이 단 한번의 일제사격으로 무려 근위대 1/4이 쓰러졌다.

산전수전을 겪어온 역전의 고참병들인 근위대원들 조차 이같이 짧은 시간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자 크게 술렁거렸다. 프랑스군은 예비대가 없어서 반토막난 19보병 연대까지 투입했으나 그대로 소모되어 버릴 정도였다. 그리고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천천히 뒷걸음을 친다. 결국 이렇게 연합군 근위 보병대와 52경보병 연대의 맹공에 전진이 막히고 말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attle_of_Waterloo_1815.png

4.3. 절정


이로써 나폴레옹이 가진 모든 카드가 바닥나고, 모든 전선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은 막혀버렸다. 그래도 프랑스군은 일진일퇴를 하며 연합군과 싸웠으며 조금씩 연합군을 밀어붙였으나 때맞춰서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의 측면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전세가 완전히 뒤집혀 나폴레옹의 거짓말이 들통나, 전 프랑스군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특히 프로이센군을 그루시 부대로 속인 탓에 "그루시가 배신했다"는 소문이 퍼져 프랑스군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35]

프로이센 블뤼허의 본군인 1군단이 전선에 도착하여, 프랑스군은 앞뒤로 포위당한 상태로 패배했다. 피에르 캉브론이 지휘하는 나폴레옹 근위대의 잔여 병력들은 나폴레옹과 주요지휘관/참모들의 퇴각로를 열기 위해 끝까지 싸웠지만 결국 괴멸되었다.이 당시의 야사로 다음의 이야기가 있다. 완전히 포위된 근위대 부대에게 영국군이 항복을 권유했는데, 캉브론은 이를 거절하고 결국 집중사격에 괴멸했다. 그 와중에도 정작 캉브론 본인은 살아남았다. 캉브론이 항복을 거절할 때 한 대답은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그나마 점잖게 "근위대는 죽어도 항복하지는 않는다! (La garde meurt et ne se rend pas!)"라고 대답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대놓고 "Merde!"[36]라고 외쳤다는 설이다. 'merde'설도 둘로 나뉘는데, "그대의 질문에 다섯 글자로 대답하겠다. M.E.R.D.E."라고 끊어서 말했다는 설과, 말 그대로 단말마 적인 'merde!' 설.
빅토르 위고는 작품인 레 미제라블에서 워털루 전투를 묘사하면서, 캉브론이 후자의 'merde'를 외쳤다고 보고 이에 대해 프랑스인이 한 말 중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운 말[37]이라고 평가를 내렸다.

22:00에 웰링턴과 블뤼허가 만나, 이후 추격은 지친 연합군 대신 별로 안 싸워서 체력이 충분한 프로이센군이 맡기로 합의를 하는 것으로 워털루 전투는 영연합군과 프로이센군이 간발의 차로 간신히 승리를 따내며 막을 내렸다. 간발의 차로 라는걸 강조하는 이유는 상황을 보듯이 나폴레옹의 의지와는 다르게 난장판인 전투가 되어가는데 불구 웰링턴은 블뤼허가 오지 않으면 죽음뿐이라고 초조해 하고 있었고 실제로 상황이 연합군에게 불리했다. 그리고 간발의 차로 그루시보다 블뤼허가 도착, 전투는 끝났다. 만약 그루시 원수의 33000명의 프랑스군이 최소한 프로이센군과 비슷하게라도 워털루에 도착했다면 워털루 전투는 프로이센군의 합류에 관계없이 정말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이겼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전투였다.[38]

4.4. 결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본군이 영국군과 치열하게 싸우다가 프로이센군의 통수를 맞아 패배하는 그동안 그루시는 와브르에서 프로이센의 유인부대를 섬멸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건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39]

이후 나폴레옹은 파리로 귀환하지만 다시 싸워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40] 다시 병력을 소집하고 정치적 반대를 억누르기에는 나폴레옹에게 그러한 권력이 남아있질 않았기 때문이다. 애당초 복위한 나폴레옹은 이전과는 달리 국민회의의 상설 설치를 허가하는 등 정치적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폴레옹의 패보가 전해지면서 도끼눈을 뜨고 벼르던 라파예트 등 반대파들에게 여론의 힘이 쏠렸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승전만이 이런 사태를 무마할 수 있었고, 나폴레옹은 출정 전에 의회를 해산시켰어야 했다고 이를 갈았으나 결국 의회의 압력에 6월 22일, 퇴위를 발표한다. 영국 왕 조지 3세에게 선처를 호소하는 편지를 써 영국이나 미국으로의 망명을 희망했으나, 영국 정부는 그를 남대서양의 오지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보냈고, 나폴레옹은 거기서 사망했다.

5. 평가

워털루는 19세기의 돌쩌귀다. 위대한 시대의 도래를 위해서, 위대한 사람의 소멸이 필요했다.
빅토르 위고 - 레 미제라블

5.1. 연합군

연합군은 애초에 웰링턴의 심각한 오판으로 꺄트르 브라(Quatre bras)에서 기습을 당했지만, 프랑스군 역시 의도한 기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력의 손실이 비교적 적은 상태로 계획했던 전장인 워털루 지역에서 프랑스군을 맞아 싸울 수 있었으며, 이전의 전쟁에서 비교적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패배가 적어 정예부대가 많이 유지되었으나 영국군 역시 반도전쟁에서 싸웠던 수준의 정예부대는 아니었다. 나폴레옹이 엘바로 유폐된 직후 많은 부대가 해체 되고, 일부 부대는 북아메리카로 파견되어 미영전쟁에 투입되어 있었으며, 고참 정예병들은 제대하거나 예비역이 되었다. 워털루 전투에는 이런 예비역들이 다 복귀 하지 않아서 상당수의 부대들이 전투를 경험한 적이 없는 신병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위고몽과 라에상트의 두 요새가 엄청나게 잘 버텨준 덕에 프로이센군이 올 때까지 프랑스군을 막아낼 수 있었다.

5.2. 프랑스

5.2.1. 인사기용

프랑스군은 인사 기용에서부터 난항을 겪었다. 나폴레옹의 퇴위에서 복위까지 불과 1년이 흘렀을 뿐이었지만, 많은 원수들이 부르봉 가문 편으로 돌아섰거나, 중립을 지켰고, 몇 명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있는 터라 기용할 수 있는 선수들이 상당히 줄어들었다[41]. 더 큰 문제는 남은 인물들 중에서도 충성 면에서건 능력 면에서건 신뢰할 수 없는 이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초한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해하 전투에서, 유방의 참모들 중 소하, 장량, 한신이 전부 죽고 번쾌, 조참, 하후영 정도만 남았는데, 유방 본인은 병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로 범증이 곁을 지키는 항우의 대군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한편 나폴레옹의 생각으론 1814년 전역의 패인은 나폴레옹 자신은 잘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부대를 지휘한 원수들이 적에게 참패하거나, 심지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추태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비록 오늘날에 많은 비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당시 나폴레옹의 인선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일단 가용한 최고의 원수들을 프랑스 방어에 투입해서 본토가 멋대로 항복하는 사태만 막으면, 남은 문제는 자신의 전술로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인선은 완전한 실패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따라서 그들의 장점을 살리기는커녕, 오히려 단점들이 시너지를 내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후대에는 이들의 직책을 바꾸었어야 한다는 평가가 많다. 오스프리 출간도서인 워털루에서는 유럽 최강의 기병 지휘관인 뮈라가 없는 상황에서 그루시는 차라리 예비 기병대 지휘관을 맡겨야 했다고 하며 네와 그루시의 배치를 바꿔서 다혈질에 충동적인 네가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게 하고 신중하고 정밀한 전술을 구사하는 그루시가 연합군을 상대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확신은 못해도 어느 정도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5.2.2. 아서 웰즐리에 대한 과소평가

여기에 나폴레옹은 아서 웰즐리와 그가 이끄는 영국군과 싸워본 적이 없었는데도 예전 웰링턴이 지휘하기 전의 영국군을 격파했었던 기억만으로 얕보고 작전을 세웠던 것도 문제였다. 영국군에게 패한 적이 있었던 장군들의 말에 조금만 더 귀기울였더라면 웰즐리의 의도를 파악하거나 적 전력을 평가하고 아군의 용병술을 지도·결정하는 데에 더 집중했을 수 있었다.

요새화한 두 농장의 방어태세를 얕잡아보거나 언덕 뒤 매복의 가능성,[43] 영국군의 훈련도 차이를 간과하지 않았을지도 몰랐고, 네에게 지휘를 전담하거나 그루시에게 과도한 추격부대를 주는 실수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니면 나폴레옹 자신이 리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끝까지 추격하여 철저하게 전멸시켰거나 네 원수를 잘 통제하고 제대로 군대를 지휘했다면[44] 이렇게까지는 결코 일을 망치치 않았겠지만 알다시피 질병과 폭우가 그것을 방해했다.

5.2.3. 블뤼허의 증오심에 대한 과소평가?

그리고 블뤼허의 나폴레옹에 대한 증오심을 그까짓 것으로 너무 경멸하고 무시했던 것은 또 다른 화근이 되었다. 실제로 영국군 혐오증이 있던 부관 그나이제나우는 리니 전투에서 패한 후 후퇴하려 했으나[45] 블뤼허가 뒤늦게 돌아오며 돌아가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공격하자고 했다. 나폴레옹에게는 불행히도 70세가 넘는, 현대의 기준에서도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블뤼허는 프랑스군과 나폴레옹에 대한 증오심으로 다시금 군에 복귀하여 프로이센군을 규합한 뒤 그루시의 추격군을 따돌리고 본대는 워털루 전투의 적당한 시점에 나타나 영국군을 지원하여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블뤼허의 증오심에 대해서 과소평가를 했다는 말은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항변할 말이 있을만한 의견이다. 블뤼허는 당시 72세의 고령이었던 노인에다가 이전 14년 프랑스 본토 침공 전역에서도 우월한 병력을 가지고도 나폴레옹에게 6일 전역 동안 각개격파를 당했고 당장 리니 전투에서도 패했던, 나폴레옹 개인에게는 한낱 먹잇감에 불과했던 패장이었고 블뤼허 개인의 증오심을 알았다고 한들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그루시에게 대규모의 추격부대를 할양함으로 프로이센군에 대한 준비를 나름대로는 단단히 했었다고 볼 수 있다. 덕분에 병력이 줄어든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리니에서 격파했음에도 추가로 프로이센군을 감시하고 추적할 부대를 내보내느라 그 수가 꽤 줄어 워털루에서는 영국군과 거의 대등한 병력으로 싸워야했다. 그럼에도 프로이센군은 워털루 전장에 도달했고 그루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은 블뤼허가 그 명성을 운으로만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나폴레옹의 방심을 욕하기보단 블뤼허의 뛰어난 감과 끈질김, 리더쉽을 칭찬해야하는 것이 알맞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5.2.4. 결론

결국 워털루의 패배의 원인은
* 나폴레옹 자신과 부하들의 실책
* 웰링턴의 영국군을 과소평가한 것
* 블뤼허가 가진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에 대한 투지
* 질병과 폭우가 복합적으로 겹친 것
정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웰링턴의 승리는 그저 블뤼허의 지원빨이라며 폄하하는 의견이 간혹 보이는데, 물론 블뤼허가 오기 전까지 웰링턴 스스로가 후퇴 타이밍을 재고 있을 정도로 수세에 몰린 것은 사실이나 프랑스군도 만만치않게 피해가 누적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전투의 승패여부는 목표의 달성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에겐 그저 웰링턴을 꺾는 것이 아니라 제한시간 안에 웰링턴을 꺾는 승리조건이 주어졌고 결국 이에 실패해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에게 측면을 허용하며 패배했다. 블뤼허가 오더라도 만약 그루시도 함께 왔다면 만만치않게 피해를 입었어도 몰아붙이는 상황에서 기세를 탄 프랑스군이 유리했겠지만, 그루시는 천금같은 병력을 데리고 삽질을 푸고 있었으며, 그루시의 삽질에 모든 책임을 떠맡기기엔 그 그루시를 기용한 총사령관 나폴레옹 본인의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없다. 보직 선정도 엄연한 총사령관의 자질이기에..

그리고 웰링턴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나폴레옹을 상대로 이만큼이나마 버텨낸 것이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뚫렸을 것을 버텨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다.[46] 더군다나 프로이센군과 영국군을 합치면 프랑스군보다 많지만 영국군 단독으로는 전력상 프랑스군에게 열세였다.
5.2.4.1. 나폴레옹, 본인의 회상
<세인트헬레나의 회상>에서 나폴레옹은 워털루에 대해 이런 구술을 남겼다.
"패자의 명예도 타격받지 않았고, 승자의 명예도 드높아지지 않은 이상한 승리였다. 패자는 그 파괴를 뛰어넘어 기억될 것이고, 승자는 어쩌면 잊힐 것이다."

실제로 워털루 전투가 유명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웰즐리나 블뤼허의 활약보다는 나폴레옹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투이기 때문이다. 반면 웰즐리는 영국 육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하나로 아직까지 회자되며 이베리아 전역에서 큰 기여를 했으나, 그보다는 나폴레옹과 워털루 전투에서 딱 한번 싸웠다는 이유로 나폴레옹을 물리친 라이벌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나마 웰즐리는 최후의 승리자인 영미 위주의 역사관[47] 덕을 보았기 때문에 더 알려져 있는 편이고, 동시기에 만만치 않게 큰 활약을 했던 블뤼허나 카를 루트비히 대공, 쿠투조프는 이름이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편이다. 그나마 워털루 전투에 참전했던 블뤼허는 그나마 좀 더 알려져 있지만 나머지 둘에 이르면 어지간한 역사 매니아가 아닌 이상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쿠투조프의 이름을 읽을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문서는 아마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일 것이다.

6. 만약 나폴레옹이 승리했다면?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서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았기에 결국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간과하기 쉬운 점은 나폴레옹이 아쉽게 패배했다는 것이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 연합군이 간신히 이겼다. 나폴레옹이 겨우 끌어모은 병력으로, 그렇게 뻘짓을 많이 했음에도 말이다.[48]

일부 학자들은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을 하고 있다. `제프리 우텐`의 세계의 전쟁 시리즈에서는 워털루 전투에서 이겼더라면 저지국가들(베네룩스 3국)을 확보함으로써 자원과 새로운 군사 징발을 통해 힘을 강화할수 있었으며, 영국은 웰링턴의 패배와 함께 국채 및 주식시장이 폭락해 재정적자에 깊이 빠져 전쟁에서 손을 뗄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대륙은 다시 한 번 프랑스의 주도권하에 질서를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의견.

하지만 일반적인 견해는 "워털루 전투에서 이겼더라도 나폴레옹은 결국은 제2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망하였을 것이다"라는게 중론이다. 웰링턴의 연합군과 블뤼허의 프로이센군을 간신히 이기더라도, 워털루에서 이겨봤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수십만의 군대가 추가로 대기중이었던 걸 고려하면,[49] 프랑스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등 당대 유럽 강대국들을 맞아 전부 홀로 맞서 싸워야만 했으며 러시아, 오스트리아를 또 쳐부수더라도 그 사이에 군대를 재정비한 영국, 프로이센과 다시 맞싸우고, 이들을 이겨도 그 사이에 다시 군대를 재정비한 러시아, 오스트리아 및 기타 대프랑스 동맹국가들과 전투가 있었기에 결국 프랑스의 패배는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가 우세하긴 했어도 그 프랑스도 엄청난 손실을 입고 간신히 밀어붙이는 중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겼다한들 전쟁을 더 이어가기는 어려웠다.

나폴레옹 역시 워털루 전투에서 이겨봤자 대세는 유지되었을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나폴레옹도 수적 우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퇴위 때도 돌이켜보면 나폴레옹 본인은 파리 동부의 마른 일대에서 연합군을 열심히 깨부수고 다녔지만 연합군이 작정하고 파리 진공을 밀어붙이자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단지 나폴레옹이 원하던 것은 워털루 전투의 승리를 통해 연합군과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하는 것이었다. 워털루에서 연합군을 쳐부순다면 비록 나폴레옹이 불리하겠지만 또다시 지겨운 전쟁이 시작되어 온 유럽이 불바다에 빠질 것이며, 연합군도 이를 원하지 않을 거란 것을 나폴레옹도 알았기에 그는 워털루에서의 결정적인 승리가 필요했다. 적어도 세인트 헬레나같은 격오지에서 고통받다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국에게도 워털루 전투의 승리가 매우 중요했다. 만약에 여기서 웰링턴이 패하고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나 러시아군에게 최종 패배했다면, 영국은 이후 유럽에 대해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워털루는 오히려 프랑스보다 영국에 장기적인 영향을 크게 끼친 전투이다.

7. 이야기거리들

8. 대중매체에서

* 워털루 전쟁을 묘사한 길먼 앤더슨(Gilman Anderson) 작곡의 짧은 피아노 소품곡이 유명하다.[57] 피아노 명곡집에도 꼭 실려있는 인기 높은 곡으로 간결하고 연주하기 쉬운 멜로디로, 김태희, 김준현의 LG 디오스 김치톡톡 냉장고 CM송으로도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LG그룹의 또다른 브랜드인 LG사이언스랜드의 과학송인 최고동물송도 이것을 개사한 것으로 CM송에 나온 '세상에서 제일~'이 가사에 반영되었다. 원곡보다는 CM송을 염두에 두며 만든 노래로 보인다. 삼성전자의 일부 휴대전화에도 기본 벨소리로 들어가 있다.[58]


[1] 신경통으로 참전 못함[2]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군은 프랑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오는데 한참 걸렸고, 가깝던 네덜란드 주둔 영국군과 당시 베스트팔렌과 라인란트에 주둔하던 프로이센군이 가장 먼저 전역인 벨기에에 도착했다.[3] 블뤼허는 강을 따라 방어선을 펼쳤다. 늪이 많은 하천이라 건너기 어려운 지역이기에 방어하기 좋았지만, 문제는 중앙이 돌출돼서 포격에 취약한 진형이 만들어졌다는 점이었다. 나폴레옹은 이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집중포격을 퍼부어 방어선을 만신창이로 만들고 돌파해 프로이센군을 격파했다.[4] 허나 네는 병력의 차이를 감안하면 웰링턴 상대로 상당히 잘 싸운 편이고, 잠깐이나마 웰링턴을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웰링턴이 직접 전장에서 네덜란드군 및 브라운슈바이크-나사우군을 이끌고 분투하는 사이 증원군인 영국군이 차례대로 도착했고, 네의 지원군인 데를롱의 1군단은 끝내 전장에 도착하지 못해 결국 네는 철수했다.[5] 95 소총연대 등 경보병으로 구성[6]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보급선 보호를 위해 잔류하였음.[7] 서인도 제도 등 식민지 주둔군으로 편성[8] 영국 근위 기병대로 구성.[9] 스코츠 그레이를 포함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기병대로 구성됨.[10] 영국군과 KGL 기병대로 구성.[11] 영국군과 KGL 기병대로 구성.[12] 영국군과 KGL 기병대로 구성.[13] 영국군과 KGL 기병대로 구성.[14] 영국군과 KGL 기병대로 구성.[15] 전투에 참가하지 않음.[16] 하이랜더 등 스코틀랜드 보병으로 구성.[17] 항구등에 주둔하며 영연합군의 보급로를 보호하는 임무를 맡는다.[18] 예비군을 중심으로 편성,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음.[19] 하지만 리니 전투 후에 곧바로 프로이센군을 여러 차례 추격하여 섬멸해야 된다고 적극 권유한 지휘관은 그루시였다. 비록 워털루에서 큰 실책을 했고 융통성이 부족했지만 분명한 것은 그루시도 실전 경험이 많고 많은 전공을 세웠던 뛰어난 기병 지휘관이었으며 바보는 분명히 아니었다. 단지 기병 지휘에 적합한 지휘관이었다는 점과 부적합한 자리에 배치된 게 문제점이었다.[20] 당시의 대포는 한 번 쏘면 반동으로 원래의 포격 위치에서 한참을 이동하고, 그걸 인력으로 제자리에 돌려 놔야 한다. 그걸 진창에서 한다면 포병들은 몇 발 쏘기도 전에 나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어느 연구팀에서 12파운드 대포로 당시 워털루 진흙 지대에서 실험한 결과 건장한 남자들이 했는데도 혈액에 피로물질인 젖산이 누적되면서 피로도가 너무 올라가 금방 완전히 지쳐서 주저앉았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의 포탄은 구형의 금속 덩어리일 뿐이어서 파편을 만들지 못하며 볼링공으로 볼링핀을 때리는 식으로 적병을 때려 눕혔다. 만일 사람을 맞추지 못하고 땅에 떨어질 경우 마른 땅이면 튕겨 나오면서 다시 적병을 쓰러뜨리겠지만 진창일 경우 대부분 그냥 땅에 박히고 끝이었다.[21] 이들의 영웅적인 활약은 전투가 끝난 뒤 웰링턴에게 승패를 좌우한 결정적인 활약이었다는 극찬을 받았다.[22] 대학 얘기할 때의 옥스브리지가 아니라 'Uxbridge'이다. 옥스브리지는 웰링턴 같은 작위명이며 성명은 헨리 페짓이었다.[23] 웰즐리 공작의 부사령관이자 기병사령관이었으나 수년전 웰즐리의 제수씨와 간통을 저지른 바 있어 웰즐리는 그를 매우 싫어했으며 그가 부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은 웰즐리가 바란 바 아니었다. 여하튼 옥스브리지는 웰즐리의 제수씨의 오라버니하고 결투까지 한 끝에, 결국 부인과 이혼하고 그녀와 재혼했다. 전 부인과 8명, 웰즐리의 전 제수씨와는 10명의 자식을 낳은 능력자로, 그의 아들은 역시 기병지휘관으로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그 유명한 '경기병대의 돌격'에 참여해서 이쪽도 살아남았다.[24] 서머셋 소장 휘하 제1 근위 기병 여단, 폰손비 소장 휘하 제2 혼성 여단. 제2 혼성 여단은 제1 근위 용기병 연대, 제2 용기병 연대 "스카츠 그레이", 제6 용기병 연대 "이니스킬링스"로 구성되었다.[25] 영국 중기병대를 박살내고 지휘관인 폰슨비 소장을 전사하게 한 부대는 제국 근위대의 폴란드 울란이 아니라 프랑스 경창기병들이다.(일반 창기병) 영화 워털루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낚이곤 하는 부분.[26] 다만 제1근위 기병여단은 전력을 온존하게 유지해, 4명의 원수 기병돌격을 보병들과 함께 저지하기도 했다.[27] 다만 이런 방진들은 기병대가 방진 사이로 들어오면 사방에서 쏘아대는 총알에 맞은편 방진의 아군이 오사하는 피해도 발생하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런 요소는 그냥 전열로 서 있다가 기병들에게 들이받혀 박살나는 것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였다.[28] 거기에 영국 기병대도 놀고만 있지 않았고 제1근위기병여단과 네덜란드 중기병대, KGL 기병대도 반격을 가했다.[29]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크림 전쟁 당시 벌어진 발라클라바 전투. 심지어 이는 전근대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잘 싸웠다는 소리를 들은 동부전선에서도 한 소대가 부득이하게 철수하는 것을 전면적인 철수명령으로 착각해 인근의 다른 부대들까지 덩달아 철수하다가 전선이 밀려버린 사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현리 전투였다. 그나마 현대전이라면 통신기술을 이용하여 실시간에 가까운 상황전파 및 명령전달이 가능하지만 통신 수단이 극히 제한적이던 전근대 전장이라면 일선의 전투원(병사나 단위부대 지휘관)이 파악할 수 있는 범위는 자기 시야가 닿는 범위로 한정되고, 반대로 총지휘부 입장에서도 교전중인 일선 부대들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게 된다. 또한 이들 사이의 보고와 명령 전달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일선 부대 지휘관들로서는 일단 자기 재량껏 판단하여 행동해야 하는데, 그 판단의 근거가 될 정보는 거의 없는 상황이 비일비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위에 예시로 든 전투들 이외에도 비수대전이나 가우가멜라 전투등 역사적으로 비슷한 사례는 상당히 많은데, 전근대 전투 중 소수 정예병력으로 압도적 다수의 적을 격파한 전투들은 대부분 이와 비슷한 전개를 거친 것이다. 수백~수천정도의 병력이 아무리 정예라도 수만~수십만의 적과 정면으로 맞붙어 모조리 격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소수 정예병의 공세가 집중되는 지점에 있는 부대는 견디지 못하고 패주할 수 있고, 이 때문에 주변의 다른 부대들이 '아군 불리. 전선 붕괴중' 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받아서 따라 도망치게 되면 전선이 진짜 전면적으로 붕괴되어버리는 참사가 일어날수도 있다.[30] 출처는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와 'KODEF 세계 전쟁사 나폴레옹 전쟁'[31] 이들은 고참 근위대로 추정된다.[32] 이때 라에상트 주둔군의 탄약이 바닥났다. 보급은 프랑스군 때문에 불가능했었다.[33] 포격을 받으면서도 방진을 유지한 것은 포격에 대비하는 틈을 타서 보병과 기병이 공격해올 것이었기 때문이었다.[34] 이 백일천하 당시, 나폴레옹의 휘하에 있는 원수들 중 가장 능력자는 루이니콜라 다부였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그를 전쟁장관에 임명해 파리에 남겨두고 술트, 네, 그루시 이 3명을 데려왔다. 참고로 여요전쟁 당시 벌어진 귀주대첩에서도 김종현이 이끄는 기병대가 엉뚱한 곳에서 허송세월을 하는 바람에 전투 양상이 바뀔 뻔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김종현은 기가 막힌 타이밍에 거란군 뒤쪽에 나타났고, 결국 고려군 승리의 1등 공신이 된다.[35] 심지어 영국군조차도 '그루시가 배신했다' 고 생각했다고 한다.[36] 직역하면 ''. 영어로 'Shit!' 정도의 욕설이다. 우리 말로는 'X발!'이라고 외친 셈.[37] 물론 이것은 다소의 역설을 의도한 표현이다. 위고 자신도 '점잖은 프랑스 독자는 좋아하지 않을 말'이라고 썼다.[38] 만약 여기서 이겼다면 파리가 일시적으로 안전해져 나폴레옹이 파리에 남아있던 다부까지 불러 합류해 프랑스 본토로 들어오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했을 수도 있었다.[39] 그러나 섬멸도 섬멸이 아닌 것이 와브르에 있던 프로이센 병력은 17,000명 정도였고 대포숫자도 그루시가 40문 정도 많았고 병력은 이미 1만6천이나 많았다. 그럼에도 피해는 둘 다 비슷비슷했고 프로이센군이 패배하고 이리 저리 도망치긴 했지만 전사자나 부상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1만 6천의 병력이 더 많았다면 아예 완벽히 쓸어버릴 수도 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는 건 그루시가 역시 원수라는 직책을 수행하기엔 부족한 인물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 물론 워털루 전투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었지만 최소 그루시는 당시 휘하의 병력들을 안전하게 살려서 프랑스 영토 내로 무사 귀환시키기는 했다. 당연히 절망에 빠진 나폴레옹은 이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졌거니 생각했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어졌고 제국 의회나 수많은 기회주의자들의 훼방과 자기 자신의 의욕결여로 인해 포기했다.[40] 이후에 큰 전투가 한 번 더 전투가 벌어지기는 했다. 이시 전투로, 블뤼허가 웰링턴과 함께 파리로 진격해왔고 국방장관이었던 다부가 휴전협정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이 되기 위해 방담 휘하의 병력을 보내 블뤼허군과 전투를 벌인 것. 프랑스군이 공격을 펼쳤지만 블뤼허군이 이것을 막아냈고, 웰링턴과 연결이 이어진 후 프랑스가 휴전을 제의해서 전투가 종료되었다. 다만 이 전투는 나폴레옹이 퇴위한 후(7월 2-3일)에 싸운 전투이다.[41] 실제로 온 우주의 기운이 나폴레옹을 향할 정도로 최고의 순간이었다 할 수 있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워털루의 선발진 로스터를 비교해보면, 정말 이 사람의 운세가 다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비참한 수준이다. 그나마 나폴레옹의 짐을 덜어줄 역량 정도는 있었던 다부와 쉬셰는 워털루에 데려가지도 않았다. 물론 최전성기를 함께 했던 베테랑 참모진 중 워털루까지 함께했던 네, 술트, 그뤼시 정도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이들은 아래 서술하듯 역량에 한계가 명확해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일일이 컨트를을 해줘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문제는 이들을 컨트롤할 나폴레옹 본인부터가 지병으로 상태가 메롱이었다는 것. 오죽하면 워털루에서 란, 베시에르, 베르티에 딱 셋만 살아있었으면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이들이 살아있었다면 이렇게까지 허망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 중론.[42] 전임자 베르티에의 경우, 다른 원수들보다 사실상 높은 권위를 가졌던 반면, 술트는 배반했다 돌아온 객장 격이었다.[43] 이미 웰즐리는 이베리아 반도 전쟁의 여러 전투에서도 지형을, 그중에서도 언덕을 적극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보통 능선 뒤에 병력을 배치하였는데, 이는 포격을 피하는 것도 이점이지만, 필요시 바로 고지를 점령하여 방어자로서 고지에서의 역공세를 통한 격퇴를 하거나 특히 시야 차단을 통해 아군 병력의 규모와 배치, 기동, 전투태세 등을 숨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44] 이 말은 어폐가 있는 것이, 나폴레옹의 목적은 프로이센군과 영국군을 격파하여 벨기에의 중요 도시인 브뤼셀로 가는 길목을 확보하는 것이라 후방의 영국군 본대를 내려버두고 프로이센군을 쫓는 일에만 매달리는 것이 좋았겠다는 말은 사실상 말이 안되는 소리다. 애초에 나폴레옹 본인도 프로이센군의 추격과 와해를 중요시했기에 그루시에게 대규모 부대를 할양한 것이다. 허나 그루시는 그 추격 임무도 실패하고 아군을 구원하지도 못했다. 또한 네에게 지휘를 전담한 이유는 나폴레옹 본인이 치질 등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도저히 견디지 못해 의무실에 잠깐 쉬러간 사이 발생한 일이므로 실수라고 폄하하는 것은 상당히 억울하다.[45] 하지만 그나이제나우가 단순히 영국군을 혐오해서 후퇴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리니 전투 당시, 프로이센군을 도와주기로 약속한 영국군이 오지 않았고 프로이센군은 프랑스 제국근위대 3개 대대에 14개 전열보병 대대가 패주하고 난전 중에 블뤼허가 낙마하는 등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 이런 혼란 속에 그나이제나우는 블뤼허가 전사했다고 생각했고, 영국군이 프로이센군을 총알받이로 쓰려고 한다고 판단해서 후퇴를 결정한 것이지 단순히 영국군이 싫어서 후퇴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소수정예를 추구했던 영국군에게는 동맹국들을 총알받이로 쓰는 경향이 분명히 있었으니, 그나이제나우의 이런 판단은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46] 실제로 나폴레옹이 최후의 예비대로 남겨둔 황제 근위대가 영국군의 중앙을 돌파하는 일에 성공했으면 오히려 영국군이 먼저 무너져서 프로이센군의 지원이 의미없게 되버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웰링턴에겐 반도 전쟁 동안 실력을 갈고 닦은 역전의 베테랑 용사들이 있었고 그들이 언덕 경사면에 숨어있다가 쏜 필살의 일제사격에 맞아 근위대가 패퇴함으로써 오히려 아군의 전체 사기에 악영향을 줘버렸다.[47] 영란전쟁이나 잉글랜드-스페인 전쟁이 대표적인데, 대중들에게는 영국의 해상패권을 확립시킨 위대한 승리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무승부거나 오히려 영국이 굴욕적으로 대패한 전쟁이었는데도 영미 위주의 역사관 때문에 거꾸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48] 워털루 전투에서는 양측 모두가 자기들 나름의 전술적 실책들을 저질렀고, 그루시가 해매지 않았다면 블뤼허의 독일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웰링턴은 대패하고 이어서 블뤼허도 라인강 고깃밥이 됐을 것이다.[49] 실제로 워털루 전투가 벌어지던 순간에도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수십만 군대는 계속해서 벨기에와 프랑스 내부로 진격중이었으며, 특히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 동부 알자스 로렌의 유낭그 요새를 함락시키고 본토로 쳐들어가는 중이었다.[50] 007 리빙 데이라이트에서 메인 빌런인 휘태커가 웰링턴 공작의 동상에 깔려죽자, 제임스 본드"He met his Waterloo."라고 조롱하는 장면이 있다. 휘태커가 워털루 전투에서 죽었다는 뜻과, 자기에게 대패했다는 뜻의 중의적 표현이다.[51] 여기서 승부수를 띄을수 있던 배경에 중국에서 전서구(통신용 비둘기) 기술을 배워왔다는 설이 있다. 전서구는 중화문명권에서는 일반적 기술이지만 서양에선 생소한 기술이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로스차일드가문은 마지막 승부수에 성공했다고 한다.[52] 그런데 당시 빌럼 2세는 군지휘관으로서의 경험도 재능도 없으면서 단순히 왕위 후계자라는 이유로 네덜란드 지휘관을 맡고는 지휘권을 포기하지 않아 연합군의 위험요소였는데, 부상을 당해 결국 지휘권을 내려놓음으로써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53] 현 웰링턴 공작의 장남이며 계승 1순위. 그의 아버지인 현 웰링턴 공작은 같은 날 영국에서 열린 기념 행사에 참석했다.[54] 1932년생으로 2015년 기준 83세! 참고로 켄트 공작 에드워드가 1935년생이다.[55] 이 인물은 나폴레옹의 막내 동생 제롬의 자손으로, 나폴레옹의 직계는 아니지만 나폴레옹 3세와는 달리 나폴레옹과 혈연관계가 있고, 제롬도 이 전투에 참전했다. 그가 프랑스 좌익방면을 졸렬하게 지휘하여 농장 하나를 점령 못한 것이, 결국 프랑스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는 점 역시 아이러니하다. 여담으로 장크리스토프의 부친인 샤를 역시 수장으로 인정받고 있는데, 원래 샤를은 귀천상혼 문제로 계승권이 없지만 샤를은 여전히 수장을 칭하고 있고 장크리스토프도 묵인하고 있는 상황이다.[56]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 때 얻어 가장 아껴온 애마라고 하는데, 보통 말은 4~5세 때부터 20세까지가 잘 부려먹을 수 있는 시기라고 하니 나폴레옹이 마렝고를 구했을 때 4~5세의 어린 나이였다면 워털루 전투에서는 퇴역을 고려할 나이가 된다. 다만 워털루에서 잡혀간 마렝고가 이집트에서 구한 마렝고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름의 기원으로 보이는 마렝고 전투는 정작 이집트 원정 한참 후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은 덤이었다.[57]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며 미국에서 출판되었다.위키피디아[58] 권상우폰/애니콜 스르륵 슬라이드/애니콜 인테나 슬라이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