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 전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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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핑크스 앞의 나폴레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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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혁명 전쟁(제2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의 일부이다. 나폴레옹 전쟁의 두 번째 국면으로, 1798년부터 1801년까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집트와 시리아를 원정한 전쟁. 다만, 나폴레옹 자신은 1799년에 몰래 전선을 빠져나와 프랑스로 돌아간 뒤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다.2. 진행
이탈리아 원정을 완료한 뒤 나폴레옹은 인도에 식민지를 가진 영국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이집트로 당시 이집트는 인도와 영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를 정복할 수 있다면 영국과 인도의 연결을 차단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본국의 힘이 닿지 않는 인도를 프랑스의 식민지로 삼을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었고 때마침 이탈리아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인기가 드높아진 나폴레옹을 견제하고자 그를 프랑스 멀리로 보내고 싶어했고 국고가 고갈되어 가던 참이라 어떻게든 자금을 수급할 필요가 있던 총재 정부의 입장도 맞아떨어지면서 이집트 원정이 시작된다.
이러한 속셈은 감춘 채 원정에 대해 나폴레옹이 공식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오스만 제국 파디샤의 명을 받들어 맘루크의 학정에서 고통받는 이집트 민중을 구한다"는 것이었다.[1]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200년의 혈맹관계였기 때문에 '동맹국을 대신해서 반란을 진압하러 왔다'는 대의명분이 설득력이 있다고 프랑스 내부에선 여겨졌다. 정작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는 이러한 명분을 궤변으로 받아들였지만.
2.1. 하이집트 장악
1798년 7월 3일, 아부키르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다음날 알렉산드리아에 침공해 손쉽게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고 카이로를 함락시키기 위해 사막으로 행군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군은 유럽에서 입던 두꺼운 군복을 그대로 입고 왔고, 사막에서 꼭 필요한 식수와 신선한 식품을 준비하는데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는 등 사막 행군에 필요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로 인해 더위와 갈증, 식중독으로 사망하거나 낙오하는 병사들이 늘어나면서 전체 행군 속도도 매우 느려졌다. 따라서 처음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한지 18일이 지난 7월 21일이 되서야 카이로 근처의 나일 강변의 마을인 엠바베에 도달할 수 있었고 엠바베에서 기다리고 있던 맘루크군 수비대를 격파했다.훗날 프랑스 제국 근위대에 편입된 맘루크 기병들
제군이여. 수천 년의 역사가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나폴레옹이 남긴 말[2]
기자의 피라미드가 보이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인 탓에 "피라미드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맘루크군은 오래 전 몽골 군대를 격파한 경험이 있는 당대 최강의 기마병으로 영국제 신형 기병총으로 무장했던 상태였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변해버린지 오래였고 나폴레옹군의 머스킷 총검으로 만든 방진을 돌파하지 못한 채 격파당했다. 결국 무려 3,000기에 달하는 맘루크군 기병이 전사하고 아랍 보병대도 수천명의 사상자를 낼 동안 프랑스군의 사망자는 29명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이 남긴 말[2]
이 전투의 결과로 카이로는 나폴레옹에게 항복했고 나폴레옹은 7월 25일 카이로에 입성하여 이집트 정복은 3주 만에 끝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한 것에 격분하여 대프랑스 동맹에 가세하고 나폴레옹에 선전포고를 단행했다.[3] 나폴레옹의 뒤를 쫓던 호레이쇼 넬슨은 8월 1일, 아부키르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해군을 습격해 섬멸시켰고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보급로 겸 퇴로가 막히고 말았다.
2.2. 카이로 학살
더욱이 카이로에서 도망친 맘루크군은 나일 강 상류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었고, 프랑스군과 카이로 시민들과의 관계도 험악해져 갔다.[4] 결국 10월 21일, 카이로에서 폭동이 일어나 프랑스군 300명이 살해당했고 프랑스군은 보복으로 카이로 시민 2,500명을 학살했다. 반란군의 거점이었던 알 아즈하르 모스크는 이슬람 교리 상 무기를 든 채로 들어갈 수 없었으나[5] 그딴거 알바 아니었던 프랑스군은 모스크 내부로 기병대를 투입시켜 반란군을 쓸어버렸고 자신들의 문화가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이집트인의 반감은 더욱 심해졌다.2.3. 팔레스타인 원정과 실패
1799년 아크레 공방전
나폴레옹은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나일 강 상류에 별동대를 파견하여 맘루크군을 격파하게 하고 자신은 본군을 이끌고 오스만 제국을 치기로 결심한다. 그는 시리아 원정을 통해 오스만 제국의 압제에 시달리던 현지인들의 봉기를 예상했고, 이로써 시리아 지역이 완전 평정되면 더 나아가 이라크나 아나톨리아까지 진출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시나이 반도를 지나 북상한 나폴레옹은 1799년에 팔레스타인에 진입하여 야파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제자르 파샤가 이끄는 니자므 제디드 군대의 분전과 시드니 스미스 경이 이끄는 영국 해군의 공격으로 아크레에 대한 공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해안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선박에 공성포를 실어갔는데, 반짝 등장한 영국 해군이 나폴레옹이 보는 앞에서 공성포를 나포해버린 덕에 공성포들은 그대로 요새포로 변신했고, 나폴레옹은 공성포 없이 + 영국 해군 함포-요새포를 맞아가며 요새에 닥돌하다 결국 포기한다) 설상가상으로 야파에 주둔한 프랑스군 사이에 페스트까지 창궐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페스트에 걸린 병사들을 방치한 탓에 오늘날에도 논란이 되고 있다. 심지어 군의관에게 환자들에게 아편을 치사량으로 먹여 죽여버리자고 제안했으나 의사로서의 사명감 때문에 길길이 날뛰는 군의관 때문에 결국 취소했을 정도. 나폴레옹 본인도 이에 대한 비난을 걱정했는지 야파의 페스트에 걸린 병사들을 방문하는 자신을 그리게 하기도 했다(안토닌 얀 그로스가 그린 "'야파의 페스트 환자들을 방문하는 나폴레옹"'이 바로 그 그림이다). 아크레 공성전이 실패하고 이집트로 패퇴할때 이 병자들과 부상병들은 안그래도 사막을 건너가야 할 병사들에게 짐밖에 되지 않았고, 환자들을 수송할 최후의 희망이였던 프랑스 소함대 [6] 도 나폴레옹의 명령을 무시하고 본국으로 탈출해버렸기 때문에 결국 환자들은 대부분 내버려지거나 안락사하거나 그냥 쪽배에 실어 바다에 내버렸다 [7]. 그렇게 개고생 끝에 복귀한 병사들의 추한 모습을 이집트인들에게 보여줬다간 도로 반란이 터질 판이라 병사들은 대기하다가 새로운 군복을 받고 총기를 깔끔하게 정비한 후에야 마치 개선한듯 복귀를 할수 있었다.
2.4. 오스만-영국군의 반격
7월 25일, 노장 세이드 무스타파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아부키르에 상륙하자 장기간의 항해에 지친 오스만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프랑스군은 급히 이곳으로 병력을 전개해 공격했다. 조아킴 뮈라는 기병 부대를 이끌고 닥돌을 감행해서 오스만군의 방어선을 돌파해 무스타파와 직접 맞닥뜨렸고 그를 생포하는데 성공했다. 뮈라도 무스타파가 쏜 권총에 턱을 맞았는데 운이 좋게도 피부만 좀 다친 경상이었다. 이때 뮈라가 한 발언이 명언이다. "파리의 여자들은 안심해라, 내 입술은 멀쩡하니."본래 나폴레옹은 프랑스 내의 이집트 학자들을 만나서 나름 치밀하게 연구를 하여 수지타산을 계산해보았고, 로마 시대부터 부유하기로 유명했던 이집트의 명성을 곧이 곧대로 믿으며, 여기를 점령하면 자체적으로 보급도 가능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 부유한 이집트는 이미 옛말이 되었던 지라[8] 세금도 제대로 걷히지 않아 오히려 적자만 지속되었다. 다만 과거에 비해 줄긴 했다지만 곡물 생산량은 당대에도 유럽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식량이 넘쳐나서 프랑스군은 굶주리지는 않았다.
2.5. 나폴레옹의 탈출과 항복
그런 가운데 프랑스에서는 오스트리아가 공세를 재개했고 나폴레옹의 정치적 입지도 좁아지자 결국 나폴레옹은 이 전쟁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아부키르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한 뒤인 8월 22일, 나폴레옹은 소수의 부하들만을 이끌고 프리깃 두 척에[9] 나눠타서 이집트를 탈출하여 프랑스로 귀환했다. 그리고 클레베르 장군이 남은 프랑스군을 지휘하게 되었다.나폴레옹이 탈출한 뒤, 지휘권을 인계받은 클레베르는 나폴레옹의 인수인계 사항[10]을 읽어보고 나서는 '그 빌어먹을 땅꼬마 새끼가 우리를 버렸다!'라고 외치며 광분했다. 아닌게 아니라, 나폴레옹은 클레베르의 얼굴도 안 보고 그냥 편지 한장만 달랑 놓고 떠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막에서 조금씩 죽어가게 생긴 클레베르는 나폴레옹의 지시대로 바로 영국군을 통해 오스만 군과 항복 협상을 벌였다.
한편, 드제가 이끌던 나일 강 상류의 별동대는 맘루크의 수장 무라드 베이의 잔존 병력을 끈질기게 추격하여 격파하는데 성공하는 등 선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클레베르는 오스만 제국의 증원군이 항복 요청을 묵살하고 계속 전진해오자, 오히려 헬리오폴리스 전투에서 10,000명의 프랑스군으로 60,000명의 오스만 군을 전멸시키는 등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클레베르 장군은 얼마 가지 않아 암살당했고, 후임자는 현지 여성과 결혼하며 이슬람으로 개종한 장프랑수아 드 므누 (압둘라)가 임명되었으나 행정가로서는 나름 능력이 있어도 군사적 능력은 폐급이었던 탓에 군대를 제대로 이끌 수 없었고 이전과 달리 뛰어난 전투력을 가진 영국군까지 합세해서 쳐들어 오자 더 이상은 버틸수 없었던 이집트 원정군은 결국 1801년 오스만 제국에 항복했고 살아남은 15,000명의 프랑스군은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3. 의의
주로 트리팔가르 해전 등 유럽 전쟁사에서 다뤄지는 항목이지만 의외로 중동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은 12-13세기의 십자군 이후 최초로 대규모의 유럽 군대가 아랍 지역을 침공한 사건이었고, 여기서 이슬람 군대가 크게 패배하며 상대적으로 길고 긴 안정기를 보내던 아랍권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에 대한 위기 의식과 반감으로 메흐메드 알리 파샤의 근대화가 일어나 이집트는 아랍권의 첫 근대 국가 체제를 갖추게 된다. 현재는 폐기되는 경향이지만 근대화론자들은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비로소 아랍권이 유럽 문명을 체감, 서구화에 노출되며 중동의 '근대'가 시작된 해로 1799년을 내세우기도 한다.4. 기타
괴담 같이 전해지는 이야기지만 피라미드 전투가 끝난 직후 나폴레옹은 그 특유의 허세로 피라미드 안에서 잠을 자러 들어갔는데 다음날 새벽에 무엇을 봤는지 혼비백산한 얼굴로 피라미드 입구에 나왔는데 완전 뭔가에 혼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시 이런 나폴레옹을 곁에서 지켜본 한 명이 그날 새벽에 피라미드에서 무엇을 보셨냐고 묻자 뭔가를 말하려다가 말해봤자 너희들이 믿을 수 있겠냐며 관둔 일화가 있다고 전해진다.비록 영국과 인도 사이를 차단해 영국을 견제한다는 나폴레옹의 본래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동행한 학술 조사단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집트 신성문자를 해독해내는 결정적 역할을 한 유물인 로제타 석을 발견했고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과 왕가의 골짜기 같은 곳에서 처음으로 학술 조사를 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런 성과와 별개로 프랑스군은 로제타석을 비롯해 수많은 이집트 유물을 약탈하여 본국으로 가져갔다.[11]
이집트 입장에서는 모스크까지 들이닥쳐 공격하는 것도 모자라 페스트까지 전파시켰으니 이가 갈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사막을 지나가다 지친 프랑스 병사들이 낙오되면 그 뒤를 따르던 베두인 무리들에게 붙잡힌 다음 동성 강간을 당하고 사지육신이 분해된 채로 발견되었다는 등의 일화가 많이 남아 있다.
맘루크 베이에게 삼색 스카프를 주는 나폴레옹 삽화 |
나폴레옹을 비롯한 프랑스군들은 원정기간 동안 '오스만 술탄을 도와 역적 맘루크를 몰아낸다'라는 대의명분을 충실히 따라서 최소한 겉으로라도 친 이슬람적인 면모를 보였다. 처음에는 이를 믿은 현지인들이 술탄 엘케비르 (대술탄) 존호를 바치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장군은 마을의 촌장이 자신들의 정체를 묻자, "유일신과 그 분의 예언자께서 보내셨다"라며 쇼맨십 넘치는 거짓말을 했다.
나폴레옹은 '문명의 발상지에 문명을 돌려주려 간다'는 명분으로 인쇄기를 가져가 신문도 발행했고, 프랑스의 발명품을 대중들 앞에서 시연도 했다. 특히 당대 프랑스 과학기술의 결정체였던 열기구도 가져갔는데, 첫번째 시연은 실패해서 기구가 불타버렸다. 이때 이집트인들은 이 상황을 보고 '적에게 화공을 가하는 무기'로 착각했다 한다.
한편 프랑스군이 이집트를 떠나고 프랑스군을 몰아낸 영국군마저 떠난 이집트에는 군인들이 봉급 문제로 폭동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등 혼란한 상태가 되었고, 이때 이집트로 파견된 그리스 출신 군인 메흐메드 알리가 권모술수를 발휘해 쇠락한 맘루크를 숙청하고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이집트의 주인이 되었다. 이후 그는 술탄 압뒬메지드 1세에게 후손들의 총독직 세습을 인정받아 사실상 독립국을 세웠고, 이는 이집트의 마지막 왕조인 메흐메드 알리 왕조의 개창으로 이어졌다.
여담으로, 이 전쟁을 목격한 사람이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살아있었다는 도시전설이 존재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금의 시리아 지역에서 살다가 프랑스군에게 포로로 잡힌 어린 소년이었는데, 자신에게 인종차별적인 모욕을 가하는 병사들에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벌컥 화를 내고는 그를 풀어주었고, 그때 한 프랑스군 장교에게 편지 하나를 전해달라고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문제는 이 소년이 그 장교가 있는 곳을 찾지 못해서 편지를 노인이 될 때까지 계속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나서 우연히 편지의 주인과 동명이인인 프랑스군 장교를 발견하고서야 그에게 편지를 전달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장교에게 전달할 편지를 하필 적군 소년에게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이 자체만으로는 의외로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다.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군에서 쫒겨나거나 탈영한 군인들이 해외로 망명한 경우가 상당히 많았고, 특히 프랑스 장교 출신으로 제자르 파샤 군대에 군사고문으로 있었던 펠리포란 인물은 나폴레옹의 사관학교 시절 동문[13]이었다. 하지만 소년이 1차 세계대전까지 살아남아 편지를 전달했다면, 당시 나이가 130살 무렵, 혹은 그 이상이 되는데 이는 공인된 최장수 기록을 뛰어넘는다. 결국 도시전설일 뿐 사실일 가능성은 낮으나,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개인에 대한 현지인의 평가는 의외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1] 당대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지만 코스탄티니예에서 파견된 파샤가 맘루크들의 입김을 크게 받으면서 통치를 해야 했던, 사실상 자치령이었다. 맘루크들은 파샤와 뜻이 안맞으면 축출하는 일이 빈번했고, 오스만 제국도 이들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파샤를 보내는 등 유화책을 많이 썼다.[2] 이 발언은 조작설로 유명한데 곽민수 박사의 견해에 따르면 조작일 확률은 높지 않다고 한다. 조작설의 근거가 전투가 벌어진 곳은 10~15km 떨어진 곳이라 피라미드가 거의 보이지 않는 곳이라는 것인데 실제로 가면 잘 보인다는 것을 본인이 기자 피라미드에서 15km 떨어진 곳에서 직접 사진을 찍어 공개하면서 증명해냈다.25분 40초부터 참조[3] 사실 대의 명분을 위해 오스만 쪽에 미리 협조를 요청해놨는데, 이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 입장에선 좀 문제가 있긴 해도 멀쩡한 땅을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뜯어가는 거니 화가 안 날 수가 없었으며 결정적으로 코스탄티니예의 관리들에게 해명을 하러 갔던 탈레랑이 맞아 죽을까봐 도망가버렸다.[4] 변방이긴 하지만 이들도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의 동맹국이라는걸 대충이나마 알고 있어서 처음에는 덤덤 했으나, 나폴레옹이 이집트인들에게 유럽식 문화를 강요했고, 자유로운 성문화를 가진 프랑스군들이 부르카를 입은 이집트 여인들을 희롱한 것이 문제로 작용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프랑스군 종특이었던 현지징발(이라 쓰고 약탈이라 읽는 것)이었다.[5] 이슬람 교리상 비무슬림의 모스크 출입은 딱히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무기를 지닌 자, 술에 취한 자의 출입만큼은 엄격히 금지한다. 때문에 몽둥이라 하더라도 무기는 무조건 모스크 밖에 내려놓고, 술에 취한 자는 술이 깰 때까지 기다렸다 들어가야 한다.[6] 앞서 말한 공성포를 수송한 함대중에서 탈출에 성공한 프리깃들[7] 다행히도 바다에 내버려진 환자들 만큼은 영국 해군의 측은지심 덕분에 안전하게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8] 로마 시대 이후로 지속된 사막화의 영향도 있는데다가 중세부터 주기적인 흑사병 때문에 인구가 13-14세기 아이유브-맘루크 시절 전성기때의 절반 이하인 300만명으로 이미 인구가 2,600만명이었던 프랑스에 비해 한참 적었다. 지금의 이집트는 중국이나 인도만은 못해도 인구 1억으로 프랑스를 뛰어넘는 상당한 인구대국이지만 이렇게 인구수가 많아진 것은 20세기 내내 이어진 폭발적인 인구증가에 기인하기 때문이지, 1980년대 이전만해도 이집트는 프랑스보다 인구가 월등히 적은 나라였다.[9] 참고로 이 배들은 이탈리아 전쟁에서 베네치아를 점령했을 때 빼앗아 온 배다.[10] 세금은 꼬박꼬박 걷고, 개길 시 좀 강하게 나가줘라. 만약 병사자가 1,500명이 넘을 땐 항복해도 좋다. 그리고 병사들 사기 증진을 위해 본국에서 우편물과 희극배우를 보내줄테니 잘 버텨라.[11] 사실 이때만 해도 이집트인들 다수는 자국 고대 유물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나폴레옹의 병사들이 유물을 파내는 것을 본 현지인들은 '저런 돌덩이들 왜 캐내지?' 같은 반응이 대다수였다. 훨씬 이후 시대인 메흐메드 알리 시절에도 유럽 각국에 인심쓰듯이 발굴권을 팔아넘겼다. 그때 이집트는 이슬람교가 정착했기 때문에 선조들의 유산은 이교도의 흔적 정도로만 여겨서 중시하지 않았다. 이집트에서 자국 유물 보호에 본격적으로 신경쓰기 시작한 시기는 20세기 초 민족주의가 발흥한 이후였고 그래서 투탕카멘의 영묘만큼은 철저하게 지켰으며 그 결과 투탕카멘의 영묘에서 나온 유물들은 오늘날도 이집트의 밥줄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12] 대신 장프랑수아 드 므누 장군(Jacques-François de Menou)의 경우 진짜로 개종해서 이름을 압둘라로 바꿨으며, 현지인 여자와 결혼했다.[13] 하지만 나폴레옹과 사이가 상당히 나빴고, 결국 야파가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하지 않고 버티는데 큰 공헌을 세우고 바로 병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