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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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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관점3. 성질
3.1. 민간인 학살3.2. 포로 학살
4. 목록5. 기타6. 실제 학살을 소재로 한 작품
6.1. 영화6.2. 만화
7. 관련 문서

1. 개요

가혹하게 마구 죽임을 뜻한다. 살육(殺戮)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량살인을 의미한다. 학살을 일으킨 자는 학살자라고 한다. 한자는 虐殺, 영어로는 Massacre, Bloodbath라고 한다.

민족 등 특정 집단을 향한 학살은 제노사이드라고 한다.

과거 고대에는 학살이 자주 자행되어 왔고 무수히 많은 역사 속 전쟁 영웅들도 학살자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과거 일반적인 전쟁의 모습이었으나 근대에 전쟁에 관한 법이 확립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비판과 비난을 받는 행위 중 하나로 간주된다.[1]

다만, 드물게 학살자라는 칭호가 군주의 공식 칭호 중 하나로 등재된 경우도 있다. ‘불가르인의 학살자’ 칭호를 얻은 바실리오스 2세가 대표적. 이는 비유적인 표현으로,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를 정복하면서 불가리아 군인을 많이 죽여서 이 칭호를 받은 것이지, 민간인을 죽여서 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민간인 학살을 꺼렸고 점령지 주민들을 예우해준 편이었다.

2. 관점

국제형사재판소 관할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13조(금지된 방법에 의한 전쟁범죄)
① 국제적 무력충돌 또는 비국제적 무력충돌과 관련하여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 사람은 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1. 민간인 주민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거나 적대행위에 직접 참여하지 아니한 민간인 주민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
2. 군사목표물이 아닌 민간 대상물로서 종교·교육·예술·과학 또는 자선 목적의 건물, 역사적 기념물, 병원, 병자 및 부상자를 수용하는 장소, 무방비 상태의 마을·거주지·건물 또는 위험한 물리력을 포함하고 있는 댐 등 시설물을 공격하는 행위
3. 군사작전상 필요에 비하여 지나치게 민간인의 신체·생명 또는 민간 대상물에 중대한 위해를 끼치는 것이 명백한 공격 행위
4. 특정한 대상에 대한 군사작전을 막을 목적으로 인도에 관한 국제법규에 따라 보호되는 사람을 방어수단으로 이용하는 행위
5. 인도에 관한 국제법규를 위반하여 민간인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물품을 박탈하거나 그 물품의 공급을 방해함으로써 기아(飢餓)를 전투수단으로 사용하는 행위
6.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예외 없이 적군을 살해할 것을 협박하거나 지시하는 행위
② 제1항제1호부터 제6호까지의 죄를 범하여 인도에 관한 국제법규에 따라 보호되는 사람을 사망 또는 상해에 이르게 한 사람은 다음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1. 사망에 이르게 한 사람은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2. 중대한 상해에 이르게 한 사람은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형법 제88조(내란목적의 살인)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2]에 처한다.
학살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다 보니 지탄받을 수밖에 없다. 전근대에도 신안대학살서주대학살 등은 매우 문제시되었다. 다만 현대 사회에서 학살 자체가 용납 불가한 전쟁범죄인 것과는 달리 과거에는 상대적으로 인권의 개념이 약하다 보니 정당한 명분만 있었다면 정도를 넘은 학살이 아니라면 상대적으로 오늘날에 비해서는 비판을 적게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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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환 : 어떤 역사학자들은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보기도 해요. (리처드와 십자군이) 2,700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먹여 살려야 했잖아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급이 조금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몇천 명의 포로를 먹여 살린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거든요?
허준 : 그렇지만 그래도 존경받는 리처드 왕께서 밥 하나 나눠주기 아쉬워서...
임용한 : 포로를 안 죽여야 한다는 거는, 20세기 전쟁 때에 간신히 말로 나왔어요. 말로. 우리가 독소전쟁도 다루고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말했지만, 2차 대전 때도 기사도가 지켜진 전쟁이 몇 개 없어요.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전쟁 포로를 죽이면 범죄야, 도시를 폭격하거나 방화를 저지르면 범죄야."라고 말한 지 불과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살고 있는 거에요.
이세환 : 지금 (인권이라는) 이런 개념이 나온 지가 50여년밖에 안 됐어요.
허준 : 죄송합니다. 중세임을 잊고 있었습니다.
임용한 : 아니, 중세라서가 아니고 지금도 그렇다니까요. 지금도 쿠르드 족에게 가스 뿌리고, 아프가니스탄에 독가스 뿌리고, 지금도 그런 짓을 해요. 안 하는 나라가 적어요. 지금도.
토크멘터리 전쟁사 42부, 십자군 전쟁 4편 리처드 1세의 포로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며. 현대의 관점으로 중세의 포로 학살을 비난하는 것에 대한 임용한의 주장.

찰리 채플린[3]이 남긴 "한두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100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격언[4]도 있다. 비슷하게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이다"는 어구도 있다. 한두 사람의 죽음은 비극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대량학살은 그 피해 규모가 훨씬 막대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략적 · 통계적인 판단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적국에서 그러한 학살을 저지른 사람들이 영웅화되기 쉽다는 의미이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학살을 막기 힘든 이유는, 전쟁을 일으킨 이상 복속 지역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긴 어렵고, 이후 끊임없는 반란에 시달려야한다. 그러니 해당 지역을 아예 삭제시켜버리는 것. 특히나 전쟁의 원인이 자원 등 실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양국 간의 갈등이 깊어져 발생한 경우, 패배한 쪽을 확실히 짓밟아야 후환을 방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간인 학살은 윤리적인 문제를 떠나 전략적으로도 불리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조조항우의 학살은 민심을 이반시켜 자신들의 패도를 이루는 데 엄청난 걸림돌이 되었다. 항우의 경우 점령지역에서 그 당시 학자들도 경악할만한 엄청난 학살을 계속해서 일으키자 무엇을 해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민중들이 유방에게 붙어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항우가 없는 전장에서는 계속해서 밀리다가 끝내 망했다. 반대로 칭기즈 칸은 대항하는 자에겐 학살을, 저항하지 않고 항복하는 도시에겐 어느 정도의 관용을 베풀어 무의미한 싸움을 줄이는 목적으로 학살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5]

근대 이전의 전쟁에서는 학살을 통해 군중을 굴복시키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다. 전근대 전쟁은 대개의 경우 영주와 귀족, 국왕들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별다른 소속감이나 결사항전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에 사용된 냉병기는 숙련도를 갖춘 전문적인 인력이 아니면 사용이 어려운 만큼 군중의 저항 능력이 극도로 약했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화기가 보편화된 현대 전쟁에서는 개별 시민들이 자국의 주권자라는 자부심을 갖고 싸우기 때문에, 학살극으로 인한 공포는 오히려 상대에 대한 혐오감과 항전 의지를 높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민족주의로 인하여 점령이 바로 영유권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점령지 관리에 있어 현지인의 협조가 필수적인데, 학살로 인한 반감을 일으키면 오히려 해가 될 뿐이다. 또한 제한전이 주류가 된 현대전에서는 자원과 화력이 한정되어 있기에 학살과 같은 행동으로 비전투집단에 자원을 낭비하게 되면 전략적으로 우위를 점하기 어렵다. 대표적으로 나치 독일동유럽에서 온갖 학살을 저질러서 잠재적 지원세력이 될 수 있었던 소련에게 억압받던 슬라브족까지 적으로 돌렸으며, 전쟁 말기 물자난에 시달리면서도 홀로코스트와 인종절멸작전에 국가 자원을 소모한 끝에 결국 패전했다.

3. 성질

산업 혁명 이후에는 강대국들 간 총력전 형태의 전쟁이 빈발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무수한 학살극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예들만 꼽아도 독일 제국벨기에 학살 나치 독일이 저지른 홀로코스트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소비에트 연방이 저지른 카틴 학살, 일본 제국난징대학살신멸작전 등이 있다.

특히 소련 붕괴와 함께 냉전이 끝난 후 서구 사회의 지식인들이 모여 20세기 공산주의 정권에 의한 폭정과 학살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는데, 공산주의 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의 수는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의 2500만명의 4배에 달하는 1억명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어 유럽의 지식인들을 경악시키는 일도 있었다.#

또한 소련에서 1921-22년 사이의 대기근이나 홀로도모르, 대약진 운동, 고난의 행군처럼 정부가 반쯤은 의도적으로 기근을 유도하거나 고의성은 없었을지라도 이를 적극적으로 구제하지 않고 방관, 조장하는 경우에도 학살로 보는 시각이 있다. 실례로 소련에서 1921년에 대기근이 일어났을 당시 노르웨이의 탐험가 프리드쇼프 난센은 러시아인들을 기근에서 구할 구제금을 송환하려 했으나 레닌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으며, 중국의 마오쩌둥 정권은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일어난 대기근을 직시하고 있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자신의 체면으로 인하여 인민들을 더욱 쥐어짜 해외로 식량을 수출시켰다. 저명한 역사학자 디쾨터 교수도 대약진 운동으로 인한 대기근 희생자들은 단순한 기근 피해자들이 아닌 마오쩌둥 정권의 대량 학살 희생자들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

경우에 따라 군경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등 폭동적 시위진압을 할 때 학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게 3.1 운동 당시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의 학살이나, 광주 5.18 민주화 운동, 천안문 6.4 항쟁.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도 학살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다.

학살이 또 다른 학살을 부르는 일도 있다. 굳이 분류하자면 '보복성 학살' 이 될 터인데, 학살을 당한 측이 힘을 얻었을 때 앙갚음을 하는 경우. 보통은 당한 것보다 몇 배 내지 몇십 배로 갚아주는 경우가 흔하고, 결국 애먼 사람들에게 다시 재보복의 원한을 심게 되기도 한다. 여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 그나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처럼 일방적인 침공이고 전장이 침략한 국가와는 별개의 한 국가로 한정되면 민간인을 향한 재보복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만, 전쟁이 내전의 성격을 띄고 상대국과의 경계가 모호해지면 서로 닥치는대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민족주의, 종교 극단주의, 이념과 결부되면 더욱 더 잔혹해진다. 대표적으로 동유럽유고슬라비아 내전, 중동시리아 내전, 아프리카르완다 내전, 한반도6.25 전쟁, 스페인스페인 내전 등이 있다.

또한 내전이 일어나거나 나라에 게릴라가 활동할 때 정부군이 반군 토벌과 청야 전술, 반군 협조자&반군에 협조할 것 같은 사람 제거를 명목으로 반군이 학살한 민간인보다 몇 배나 되는 민간인을 학살하는 일도 많다. 대표적으로 제주 4.3 사건[6], 비아프라 전쟁,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1972년 부룬디 학살, 하마 학살, 70년대 말~80년대 중남미 지역에서 일어난 내전들, 1988년 안팔 학살, 1988년 하르게이사 학살, 체첸 분쟁, 다르푸르 학살 등이 있다.[7]

3.1. 민간인 학살

구체적 혐의가 없는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을 지칭한다. 특정 이념이나 사상을 지지하거나 지지했던 민간인을 구체적 혐의 없이 살해하는 것도 민간인 학살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양상에 따라 다르긴 하나 일반적으로 인도에 반한 죄로 규정된다.

최전선에서 개별적으로 행해지는 학살은 소속 국가나 사회의 상황과 무관하게 감정적인 이유에서든 현실적인 이유에서든 일어날 수도 있지만, 체제에 속해있는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은 인권 개념 이전에 절대적으로 비효율적인 짓이기 때문에 민간인 학살의 발생 여부가 그 국가나 사회의 극단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거기다 어떠한 집단에 대해서도 명확한 혐의도 없이 특정 사건을 이유로 체포나 색출과 같은 합법적 치안, 보안방첩활동도 없이 물리력을 행사하여 폭동적 시위진압으로 학살을 저지르면 망한다. IS나 탈레반 같은 이슬람 무장단체 정도로 소요를 넘어선 전쟁을 그냥 밥 먹듯이 일으킨다면야 어떤 대접을 해도 체제의 국민들과 주변국들이 용인해줄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것도 아닌 사회적 시선이 따갑고 사회의 분란을 초래하는 단체라도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이기에 함부로 죽였다간 국제적으로도 큰일 나는 셈이다.

다만 현대와는 달리 과거에는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았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민간인 통제가 이루어져 민간인은 비전투원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나 과거에는 민간인이면서도 군인을 죽이는 경우도 매우 많았다. 사실 현대전에 일어나는 민간인 학살 역시 민간인으로 위장한 게릴라로 오인하고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과거엔 '양민학살'이라고 표현되었다. 21세기인 현재는 일반적으로 양민학살 대신 민간인 학살이란 표현을 쓰는 편이다. 양민학살이 학살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오살, 즉 죽여야 할 대상을 고르는 데에서 잘못을 범한 것만을 비판하는 소극적인 개념이라면, 민간인학살은 국가권력이나 그 비호를 받는 무장집단이 비무장 민간인에 대해 일방적인 학살을 행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적극적인 개념이다. 출처

3.2. 포로 학살

저항하지 못하는 포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살해를 당했다면 비록 군인이더라도 학살 대상이 된다. 군경 및 그 가족을 살육한 6.25 때의 인민재판이라든가, 자리에 누워 있는 부상병들을 죽여버린 서울대병원 학살사건 같은 게 대표적인 사례다. 말메디 학살이나 슈노뉴 학살과 같이 무장 해제된 적군 포로를 죽인 사건이 있다.

4.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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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공매체에서 학살은 학살/가공매체 문서 참조.

5. 기타

학살 피해자의 숫자는 축소되거나 과장되곤 한다. 대체로 가해자는 학살의 규모를 축소하려 하고, 피해자는 과장하려 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학살이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전시의 혼란으로 인해 정확한 기록이 남기 어려우며, 과거의 학살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가해국과 피해국 모두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때문에 학술적인 연구에서는 대체로 양쪽 극값을 일부 쳐내고 나머지 값들을 평균낸 것을 실제 희생자의 숫자와 가깝다고 추산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어느 쪽이든 적은 수는 아니며, 감춘 사실이 새어 나오기에 어지간해서는 심증과 확증 일부가 아주 풍부하게 남는다.

사실 워낙에 많은 사람이 죽기 때문에 생존자의 비율도 낮고 정확한 관찰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단적인 예로 특정 지역의 모든 인간을 살해했다면 목격자는 1명도 없을 수 있다. 다만 학살이 광범위하면 광범위할수록 누군가는 도망쳐서 생존하기 마련이고, 학살 참여자 중에도 입이 가볍거나 가책을 느끼는 등의 이유로 학살을 증언하여 사실이 밝혀지곤 한다.

중국에서는 도살(屠殺)이라고 하는데, 한국어와 달리 학살의 뜻으로도 쓴다. 난징대학살 박물관을 남경대살기념관(南京大屠杀纪念馆)이라고 써놓은 것이 그 예이다. 과거 한자 문화권전쟁 기록에서도, 특정 지역을 점령했을 때 도성, 도+지역단위, 도+지역명등 도(屠)자가 붙어 나오면 지역 단위의 조직적인 학살이 벌어졌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한국어에서 도살은 주로 가축을 도축하는 행위를 일컬으며, 사람에 대해 쓰더라도 피해자를 가축처럼 취급했다는 뉘앙스가 강하며 대량학살의 의미는 담고 있지 않다.

학살을 방관한 지휘관에 대한 처벌 역시 규정되어 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이를 지휘관 등의 직무태만죄로 규정한다.

6. 실제 학살을 소재로 한 작품

6.1. 영화

6.2. 만화

7. 관련 문서



[1] 단, 과거에도 신안대학살처럼 지나친 학살은 비판을 받았다.[2] 대한민국에서 살인으로 무기금고를 선고받은 사례는 없다.[3] 친공적인 성향을 보여 살아생전 공산주의자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으나,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성향은 오히려 무정부주의에 가깝다. 위대한 독재자의 마지막 힌켈이 남긴, "모두가 무기를 내려놓고 정부에 저항하라"는 대사만 봐도 당대의 권위주의 공산 독재국가를 추종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표현이다.[4] 1947년작 <살인광 시대>의 종반부에 등장한 대사. 참고로 원제는 프랑스어로 Monsieur Verdoux, 베르두 씨라는 별 뜻 없는 이름이며, 해당 제목은 국내로 들어오면서 의역된 것이다.[5]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일도 많았다. 몽골의 성공적인 팽창은 전근대 시대 한정 압도적인 군사력을 만들 수 있는 유목민의 장점이 칭기즈 칸 아래 분열을 끝내고 결속하면서 일어난 일에 가깝다.[6] 반군 진압 외에도 폭동적 시위진압, 이념과 종교적 신념에 입각한 학살, 특정 지역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 보복성 학살의 요소가 모두 포함되었다.[7] 6.25 전쟁 당시 한국 이승만 정부의 좌익 학살도 어떻게 보면 전술한 '대(對)반군 학살'들과 본질적으로는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마침 분단국가에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진 게 6.25 전쟁 외에는 베트남 전쟁밖에 없어 유사 사례가 사실상 없다시피하기도 하고. 예멘에서도 1972년, 1979년 남예멘북예멘 사이에 2차례 내전이 일어났으나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국경분쟁에 더 가까웠고 고의적인 민간인 학살도 없었다.(1979년 내전에서 민간인들이 죽은 바가 있지만 이는 오폭에 가까웠다)[8] 폴란드의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을 때, 러시아에서는 애도기간 동안 TV 시청 황금시간대에 이 영화를 집중 방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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