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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3 18:00:38

산악 베이스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山岳ベース事件

1. 개요2. 사망 멤버3. 창작물에서

1. 개요

1971년부터 1972년에 걸쳐 적군파 게릴라인 연합 적군(連合赤軍 United Red Army)이 일으킨 집단폭행 살인사건.

본 사건으로 희생자, 탈주자, 체포자가 속출하면서 최종적으로 5명이 된 멤버들은 경찰 추적을 피하는 과정에서 아사마 산장 사건을 일으켰다. 아사마 산장 사건 이후 연합 적군의 이미지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사실상 일본 내에서의 '신좌익'[1] 활동은 끝장났다고 할 수 있다. 산악 베이스 사건과 아사마 산장 사건을 묶어 연합적군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사마 산장에서 경찰들이 포위할 무렵인 초기에는 이상주의자들의 과격한 행위로 보는 대중의 동정적 시각도 있었으나 이후 조사로 드러난 내부 살인 사건 등의 실체와 진상 앞에 여론이 급변했고 일본 사회가 운동권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아사마 산장 사건 이후 범인들에 대한 심문 과정 중에서 산악 베이스에서 벌어졌던 집단 살인에 대해 자백한 내용이 공개되었다.

연합 적군의 모체 중 하나인 혁명 좌파는 멤버들의 대부분이 지명수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시에서 자유롭게 행동하지 못하게 되자 경찰의 눈이 안 닿는 산악 지대에 아지트를 만들고 군사훈련을 하면서 향후 테러 작전을 위한 거점을 구축하고자 하였고 멤버 중 몇몇이 도망을 가거나 발각되면서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다시 아지트를 만들었다. 연합 적군의 또 다른 모체인 적군파 역시 산 속 아지트 설치를 목표로 하게 되었고 1971년 7월 둘은 연합 적군을 결성했고 같은 해 12월 초에는 야마나시현의 적군파 베이스에서 첫 합동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이 무렵 의견 충돌로 혁명 좌파들끼지 분파로 나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최종 연합 적군 29명이 군마현의 산 속에 설치한 산악 베이스에 모였다.

당시 경찰의 포위망을 피해 산속으로 도주 중이었던 연합 적군 단원 29인(남자 19명 여자 10명)이 산악지대에서 집단생활을 하면서 군사 훈련과 비슷한 것을 실시했는데 대원들끼리의 위계질서나 사상성 따위를 지나치게 강조하였으며 산중 생활이나 집단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대원들을 골라 소위 '총괄(総括)'[2]이라는 명목으로 자아비판을 강요하거나 너의 몰지각한 행동이 사상성이 부족하다는 얼렁뚱땅한 논리로 매도하여 선동,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히게 "총괄"하게 만든다며 같은 조직원에게 폭행이나 가혹행위 등으로 12명을(남 8명, 여 4명) 구타하여 살해하였다. 희생자 중에는 연인관계였던 자, 형제였던 자도 있었고 임신 8개월이었던 여성 멤버도 있었다. 증거 인멸을 위해 시신은 모두 알몸으로 땅에 묻었다.



영화 실록 연합적군에 묘사된 총괄.[3]

당시 이들을 둘러싼 외부적 상황이 좋지 못했는데 민가는 경찰의 대대적인 단속과 수배 중이라 대원들은 경찰에 쫓기고 있었고 이를 빌미로 사상을 버리고 이탈하거나 경찰에 검거되는 등 인원 감소가 계속되었으며 그러다 보니 생활수준이 열악해지고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어 대원 한 명이 아쉬운 판에 단합력의 부재와 똥군기에 의한 대량살상이 발생하여 남은 적군파마저 자멸했다. 처음에는 밥을 굶기거나 줄로 결박해 두어 "총괄"하게 만드는 식이었으나 점점 도가 심해져서 기둥에 묶은 뒤 집단 폭행을 하거나 화장실도 못 가게 방치해서 분뇨 투성이의 빈사 상태로 만들고 마구 구타한 뒤 영하의 날씨에 밖에 묶어두어 동사하게 만들거나 얼음 송곳이나 칼 등의 도구로 시신을 마구 찌르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특히 단원 중 우두머리 격 인물인 모리 츠네오(森 恒夫, Mori Tsuneo)[4]가 "총괄"을 주도하면서 뱉어낸 소리가 '두들겨 패는 것이야말로 지도(殴ることこそ指導)'였다. 즉 이 인간은 "맞고 깨어난 즉시 제대로 된 인민이 되어 있을 거다"라고 했으며 결국 사망자가 나오게 되자 죽은 사람들을 "저들의 부주의로 패배사했다"고 자기합리화하고 이윽고 총괄하지 못한 것 같은 사람을 차례차례 구타해 죽이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더군다나 그렇게 죽은 시신을 본보기로 살아남은 동료들에게 시신에게 비난하거나 때리고 찌르도록 요구하면서 시신 훼손까지 시키기까지 했다. 그렇게 결국 아무도 그의 "총괄"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차례차례 죽어나가자 생존자들은 자신도 결국 저렇게 허무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다들 패닉에 빠져 미쳐 갔고 궁지에 몰리면서 이렇게 죽임을 당할 바에 기념비적인 사건이라도 저지르고 죽자는 심정으로 아사마 산장 사건을 일으켜 버렸다.

산악 베이스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패트리샤 스테인호프가 쓴 "적군파" 역시 참고할 만한 서적이다. 이 서적에 의하면 연인 관계였던 모리 츠네오와 나가타 히로코(永田洋子, Nagata Hiroko)[5]경찰에 체포되어 왜 죽였냐는 질문을 받고 나서야 자신들이 살인을 했음을 "자각"했다고 한다. 어처구니없지만 캠프 안에서는 혁명이니 공산화니 온갖 정당화를 해 가면서 동료들을 때려죽여 놓고 그게 잘못된 건지 자각도 못 하더니만 경찰에 잡히면서 그렇게 자신들이 정당화하는 데 써먹던 조직이고 캠프고 나발이고 박살나니 그제야 잘못이었다고 자각한 것.[6]

사건이 발생한 순서는 산악 베이스 사건 → 생존자들의 도주 → 아사마 산장 사건이지만 아사마 산장 사건 이후 체포된 범인들에게서 산악 베이스 사건의 진술을 듣고 세상에 밝혀지면서 당시 일반 대중한테는 아사마 산장 사건 → 진술 → 산악 베이스 사건 순으로 알려진 것이다. 당대에 이 집단 린치와 인질극이 준 충격이 어마어마해서 사실상 일본의 좌익 운동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이들의 팀원을 향한 살인은 이 사건이 처음이 아니었는데 1971년 조직에서 탈주하려던 남녀를 교살한 후 치바현의 한 늪에 매장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사건을 인바늪사건(印旛沼事件)이라고 부른다.

이후 아사마 산장 사건까지 일으키면서 다수의 사람을 살해한 이들은 주범 사카구치 히로시는 사형, 요시노 마사쿠니는 무기징역 등 전원 중형을 선고받았다. 사카구치는 사형수 신분이지만 다른 범인들이 생사불명이라 재판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사형 집행이 되지 않은 채로 사실상 무기수로 생활하고 있다.[7]

2. 사망 멤버

파일:attachment/산악 베이스 사건/mountain_base.jpg

린치에 희생된 12명의 피해자 사진.

'총괄'을 통해 사망한 12명의 멤버들의 출생 연도와 피살 날짜, 학적, 원래 파벌, 총괄 사유, 사인(死因)은 다음과 같다. 출처는 나가타 히로코의 옥중 출판물인 '속 16의 묘표(続 十六の墓標)'. 당연하지만 총괄 사유나 사인 같은 부분은 철저하게 가해자인 나가타 히로코 입장에서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8] 걸러서 보는 편이 좋다.

원래 출처에서 나가타는 피해자들의 실명을 이니셜로 처리했고, 아래 피해자 목록의 실명은 위 사진 및 타 문헌들의 내용과 대조해서 맞췄다.[9] 피해자들의 실명은 전부 알려져 있음에도 일본어 위키백과는 법적인 문제 같은 것이 있는지 피해자들은 마찬가지로 나가타가 서술한 이니셜로 처리되어 있다.

3. 창작물에서



[1] 일본의 신좌익(新左翼)이란 구 일본 사회당이나 일본 공산당 등을 가리키는 기성 좌익과는 대비되어 대학생들을 중심으로한 좌익 제파를 말한다.[2] 본래 과거를 되돌아보는 '반성'을 의미한다. 당시 좌익 정치 운동가들 사이에서 유행한 사고법이었다.[3] 30초 부근부터 시작된다.[4] 1944~1973. 오사카 시립대학. 도쿄 구치소(東京拘置所) 독방에서 28세 나이로 목을 매 자살했다. 유서에는 "자기 책임 무거움에 절망... 스스로 사형 판결을 내리겠다."(自己の責任の重さ… 自らに死刑を下す)자업자득고 적었다. 사건 한참 전에 도망갔던 전적이 있는데 대보살 고개 사건으로 쓸만한 멤버가 부족해서 복귀 허락을 받았다.[5] 1945~2011. 교리츠 약대(現 게이오 대학 약학대학) 출신. 모리 츠네오가 죽은 곳이면서 같은 장소인 도쿄 구치소(東京拘置所)에서 65세에 뇌종양으로 죽었다.자업자득 2[6] 나가타 히로코는 동료가 이성끼리 연애를 하였단 이유로 구타해 죽인 자였으나 나중에 애인이었던 사카구치 히로시를 버린 뒤 모리 츠네오로 갈아타 놓고 "공산주의적 관점으로 봐도 올바르다."는 소리를 하였다.[7] 일본 법률에 따르면 사형 집행은 공범들까지 재판이 완전히 끝나고 나서 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7명의 공범들 모두 재판이 끝나거나 사망이 확인되어야만 사형 집행이 가능하다. 옴진리교 사형수들도 원래 바로 사형시키고 싶었지만 오래도록 공범들의 재판이 끝나지 않아서 모든 재판이 끝난 2018년 7월에야 사형을 집행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사카구치의 사형은 아마 집행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8] 당장 "질식사"라고 표현된 사인들은 실제로는 멤버들이 처형이라는 명분으로 직접 교살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뻔뻔한 말장난이다.[9] 위 사진은 오자키와 신도의 사망 순서/일자가 다른 문헌들과는 반대로 나와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불명이다.[10]도쿄해양대학[11] 칼 마르크스가 사용한 용어. 계급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계급 투쟁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유용한 생산을 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트. 무계급 사회 실현에 장애가 되는 층[12] 전술한 인바늪 사건의 운전 담당이었다고 한다.[13] 現 나고야 경제대학 단기대학부, 2018년에 폐지되었다.[14] 자본가 계층과 무산자 계층 사이의 계층[15] 正時이 읽는 방법에 따라 '마사토키'일 수도 있어 확실치 않다.[16] 당시 일본의 대학 내 연합체들 중 한 분파[17] 영화 "실록 연합 적군"의 구성과 내용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마지막에 외치는 대사도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