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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공화국 제29대 대통령 아우구스토 호세 라몬 피노체트 우가르테 Augusto José Ramón Pinochet Ugarte | |||
<colbgcolor=#d52b1e><colcolor=#ffffff> 출생 | 1915년 11월 25일 | ||
칠레 발파라이소 | |||
사망 | 2006년 12월 10일 (향년 91세) | ||
칠레 산티아고 | |||
직업 | 정치인, 군인 | ||
재임기간 | 군사평의회 의장 | ||
1973년 9월 11일 ~ 1981년 3월 11일 | |||
제29대 대통령 | |||
1974년 12월 17일 ~ 1990년 3월 11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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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칠레 전쟁 학교(졸업) | ||
국적 | 칠레 | ||
신장 | 178cm | ||
종교 | 가톨릭 |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군사 경력 | |||
복무 | 1931년 ~ 1998년 | ||
최종 계급 | 육군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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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칠레의 제29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1973년 9월 11일 헨리 키신저를 비롯한 당시 미국 닉슨 행정부와 CIA의 지원을 받고 쿠테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았다.
2. 생애
2.1. 초년 생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1915년 11월 15일에 발파라이소에서 세관 관리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베라(Augusto Pinochet Vera, 1891~1944)와 아벨리나 우가르테 마르티네스(Avelina Ugarte Martínez, 1895~1986)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8세기 초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칠레에 온 브르타뉴계 프랑스인 이민자의 후손이었고,[1][2] 어머니는 바스크인의 후손이었다.어린 아우구스토는 '티토'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그런 티토는 4살을 맞이했을 때 마차에 치인 적이 있었다. 가족들은 가벼운 찰과상 정도로만 여겨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자 상황이 악화되어 독일까지 가서 진단한 결과 백색 종양에 곧 결핵으로 발전할 거라 다리를 절단해야만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다시 진단해보니 골관절염이었기 때문에 절단할 필요는 없었고, 3개월 만에 회복되었다. 1년 뒤부터 학교 생활을 시작했는데, 학창 시절 피노체트는 평범한 성적을 기록했다고 하며, 일부 과목은 겨우 낙제를 면한 것과 달리 예술 분야에는 상까지 받고, 수학에는 1등상까지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피노체트가 의사가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1931년부터 산티아고 소재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사관학교(Escuela Militar del Libertador Bernando O'Higgins)에 지원해 나이와 키 자격 미달로 두 번이나 떨어졌지만, 1933년에 합격한 후 1937년에 군에 입대하였고, 육군 장교로서 두드러진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1943년 변호사의 딸인 루시아 이리아트[3]와 결혼하여 63년간 결혼생활을 했고, 3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낳는다.
1948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복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학력을 1년 연기해야 했고, 이후 군사와 지정학을 전공한 후 1951년부터는 사관학교에서 군사지리학 및 지정학 분야의 조교수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1953년에는 소령으로 진급한 후 사관학교의 정교수가 된다. 1953년 칠레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지만, 1956년 초에는 에콰도르의 육군사관학교 조직에 참여해야 하는 임무를 맡아서 법학 공부를 중단해야만 했다.
1960년 중령, 1967년 대령, 1969년 소장, 1970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직책도 1960년 제7연대장, 1968년 제2사단 참모장, 1968년 말 제6사단장, 1971년 산티아고 수비대 사령관, 1972년 육군참모차장, 1973년 8월 23일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속 높아졌다. 이때까지 피노체트는 '비정치적이고 전문적인 군인'으로 여겨졌으며,[4] '지정학'(1968)과 '태평양 전쟁'(1972)라는 2권의 책을 저술해서 큰 호평을 받으면서 칠레 군사 문학의 주요 인물로 유명했다고 한다.[5] 1973년 6월 29일에는 로베르토 온프라이(Roberto Onfray, 1927~2015)라는 육군 중령이 대통령궁을 습격하며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22명의 민간인만 죽인 채 실패로 끝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카를로스 프라츠(Carlos Prats, 1915~1974)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쿠데타를 진압했다.
2.2. 쿠데타와 집권
관련 문서: 1973년 칠레 쿠데타"민주주의는, 때론 피로 목욕을 해야하는 것이다."
(Muchas veces la democracia ha de ser bañada en sangre.)
- 피노체트가 쿠데타에 성공 직후에 한 발언으로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야사에 불과하며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는 근거는 없다.
(Muchas veces la democracia ha de ser bañada en sangre.)
- 피노체트가 쿠데타에 성공 직후에 한 발언으로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야사에 불과하며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는 근거는 없다.
쿠데타로 칠레 사회당 소속의 대통령이었던 살바도르 아옌데가 이끌던 사회주의 정부가 무너졌고, 정권을 잡은 피노체트는 곧이어 칠레 좌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였다. 이후 17년 동안 피노체트는 "내가 움직이지 않는 한 이 나라는 한 그루의 잎사귀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며 칠레를 통치했다.[6] 아옌데를 싫어하던 미국은 그의 측근이 도망쳐 왔다고 받아주기는 커녕 바로 붙잡아서 칠레로 보내 주었다.
쿠데타 직후에는 가장 고령이었다는 이유로 우두머리에 오른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여러 명의 군인들이 운영하는 훈타가 입법부와 행정부의 역할을 모두 수행했고, 퇴역 군인들이 대학 총장에 올라갔으며, 의회와 헌법재판소는 폐쇄되었으며 모든 정치 활동이 금지된 것은 물론, 1925년에 제정된 헌법의 효력도 정지되었다. 다만 사법부는 훈타 밑에서 계속 운영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4년 12월 17일에 피노체트는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원래는 육해공군의 각 참모총장 3명과 경찰사령관 1명이 1년씩 돌아가며 대통령직을 맡으려고 했지만, 피노체트가 자신을 군부의 단독 의장 -> '국가의 최고 수장'(사실상의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한 뒤,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지위를 변경했다고 한다. 참고로 훈타 회원이던 칠레의 공군참모총장 구스타보 리(Gustavo Leigh, 1920~1999)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피노체트의 대통령 취임에 반대하는 의견을 날리자 피노체트는 극도로 분노한 나머지 '보드를 치고 유리를 깨뜨려 손을 약간 다쳐서 피를 흘렸다'고 한다.[7]
쿠데타 당일에는 오후 3시부터 통행금지령이 내려졌고, 쿠데타 하루 뒤에는 24시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졌으며, 9월 15일부터 이틀간은 오후 5시부터 오전 6시까지 통행이 금지되었고, 동년 10월 3일까지는 저녁 7시에도 통행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피노체트는 대통령 자리에 오른 직후인 1975년부터 통금을 경감했고, 1978년부터 1987년까지는 '일반적으로는' 0시부터 6시까지 통행이 금지되었다. '일반적으로는'이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는 후술.
피노체트의 대통령 집권 당시에는 군부가 입법부의 역할을 대체했고, 좌파 정당들을 포함한 다른 정당들의 활동도 모두 금지되어 사실상의 일당제 국가로 굴러갔다. 해외 라디오 전파 역시 차단되었으며, 법적인 처벌로서의 연좌제가 시행되었고, 칠레 대중에게 좌파로 의심되는 행동을 보인 이웃들을 감시하고 고발하도록 강요했다. 물론 정권의 입맛에 안 맞는 책들은 죄다 불태워지거나 금서로 지정되었는데, 심지어 쿠바 혁명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되어 입체파 관련 서적까지 소각된 데다가 방송국에 군대가 침입해 필름을 불태우는 일까지 발생하는 등 당대 칠레의 문화 검열은 '문화 정전'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극심했다. 동성애도 금기시되며 탄압당했으나 1979~1980년에 LGBT 나이트클럽 2곳이 군의 승인을 받고 개설되는 등 유화책도 일부 펼쳤다.
여담으로 프리덤 하우스가 1972년부터 매년마다 발표하는 세계의 자유 지수에 따르면,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부터 DINA가 CNI로 개편된 1977년까지 칠레의 자유 지수는 PR 7+CL 5였고,[8] 1978년부터 1987년까지 칠레의 자유 지수는 PR 6+CL 5여서 14년 동안 '부자유'를 기록했다. 다만 1988~1989년에는 칠레의 자유 지수가 상승하여 '부분 자유'를 기록하게 되었고, 피노체트가 퇴임한 1990년에 칠레의 자유 지수는 PR 2+CL 2로 '자유'를 기록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피노체트에 대한 개인숭배도 행해졌다. 1982년 피노체트는 사실상 폐지 상태였던 칠레군 원수(Capitán general) 자리에 스스로 올랐고[9] 피노체트의 제복 모자는 다른 장교들보다 높게 재단되었으며, 피노체트는 '군대와 국가의 수호신인 성모 마리아의 은총을 받은 존재'로 선전되었다. 신문은 피노체트가 '좋게 보이는' 사진만 실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80년 9월 11일에는 국민투표를 거쳐 55년간 유지된 헌법을 하원 해산을 위시한 대통령에 대한 막대한 권한과 연임 가능한 임기 8년을 보장하는 새로운 헌법으로 바꾸었다. 비록 부정선거 의혹도 있긴 했지만 어쨌든 헌법은 1981년 3월 11일에 발표되었고, 일부 야당을 포함한 정치단체들은 다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로 비록 군부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협력은 하긴 했으나, 칠레군도 육해공군 및 헌병, 경찰 간의 알력이 심해, 디나 외에 각 군경이 별도의 정보기관을 운영하고 국민을 탄압했다. 서로 정보 공유도 제대로 안 해서, 어떤 사람은 해군 정보부에 끌려가 몇 년간 수감생활 후 풀려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육군 정보부에선 자신을 체포하자마자 사살해야 할 대상으로 분류해 놓았고(해군은 단지 잡아다 고문하고 징역만 부과할 대상으로 분류) 해군에서 그가 잡혀 있다는 정보를 타군에 제공 안 해 육군이 계속 자신의 행방을 추적하느라 본의 아니게 목숨을 건졌다는 증언을 다큐멘터리에서 하기도 했다. 칠레 역시 육군의 힘이 센 편이지만, 쿠데타 당시 해공군 참모총장과 경찰사령관이 공동 명의로 성명을 내는 등 타군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3. 집권 기간의 행적들
2.3.1. 인권탄압
오늘은 악마들에게 나쁜 날입니다. 왜냐하면 피노체트가 악마들에게서 지옥의 대통령직을 빼앗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멕시코의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Carlos Fuentes, 1928~2012). 피노체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멕시코의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Carlos Fuentes, 1928~2012). 피노체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국가)폭력 면에서 (박정희 시기 대한민국과 피노체트 시기 칠레) 두 나라를 비교하면 한국은 유치원 수준에 불과했다. 한국에서는 미국 신부로서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었지만 칠레는 말하는 것조차 위험한 일이었다.
제임스 시노트(James P. Sinnott, 1929~2014) 신부. 2006년 4월 20일에 한국 기독교방송과의 인터뷰에서[10]#
제임스 시노트(James P. Sinnott, 1929~2014) 신부. 2006년 4월 20일에 한국 기독교방송과의 인터뷰에서[10]#
원래 칠레는 군대가 경찰 역할을 대신하고, 경찰도 군대처럼 기관총 들고 설쳐온 나라인데, 피노체트 치하에서는 역사에서도 그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폭압적인 통치가 자행되었다.
피노체트는
마르크스주의는 파괴적이고 또한 위선적이며, '사회를 유지해야 하는 도덕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
고 굳게 믿었고, 이 믿음에 따라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한다고 간주되는 칠레 국민들에게 무자비한 탄압을 퍼붓게 된다. 실제로 피노체트가 집권한 17년간 칠레 국민 1,031만 명[11] 중 추방당하거나 정치적 이유로 망명한 사람은 최소 20만 명에 달했고[12] 10만여 명이 연행되었으며, 40,000여 명의 사람들이 정치적 이유로 불법으로 구금되며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당했으며, 피살자와 실종자는 3,225명에 달한다고 한다.출처 또한 2004년 11월에 작성된 발레히 보고서에 따르면 34,690명의 정치범 중 28,459명이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고, 여성 정치범 3,621명 중 3,200명이 성폭행을 당했으며, 심지어 18세 미만의 미성년자 정치범도 1,244명(13세 미만의 아동들 176명 포함)이나 있었다고 한다.거기다가 라틴 아메리카 정신 건강 및 인권 연구소(Latin American Institute on Mental Health and Human Rights)에 따르면 피노체트 집권 16년 동안 약 20만 명의 칠레인이 '극심한 외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수치는 처형, 고문은 물론 강제 추방과 직계 가족이 구금된 사람까지 포함한 수치이다.
피노체트는 옆동네 호르헤 비델라와 마찬가지로 자국 내에서 쿠데타를 비판하거나 친 아옌데 성향이었던 자국민 들을 해외에 정보원을 보내서 무단으로 납치해온 뒤 재판 없이 고문하고 총살했다. 그렇게 좌파정당에 가입한 자들과 많은 지식인들, 예술인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는데, 그 일례로 아옌데를 지지했던 유명 가수 빅토르 하라는 쿠데타 직후에 반역자로 몰려 군부에게 끌려간 후 살해되었고,[13] 전립선암 투병중이었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14]는 쿠데타 직후에 병사들이 집에 침입해 장서가 불태워진 일을 겪은 후, 9월 23일에 병원으로 이송되는 중에 사망했으며, 공식적으로는 병사했다고 알려졌지만 독을 주사받고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미국 워싱턴 D.C.에 망명해 있던 아옌데 정부의 외무장관인 오를란도 레텔리에르(Marcos Orlando Letelier del Solar, 1932~1976)는 한술 더 떠 피노체트의 지시를 받은 DINA에 의해 자동차에 설치된 폭탄으로 미국인 여성 조수와 함께 폭살당했으며, 쿠데타 직전에 다른 쿠데타를 피노체트와 함께 막았던 카를로스 프라츠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무선 조종되는 자동차 폭탄으로 아내와 같이 살해되었다. 그외에도 해외에서 피노체트의 정적들이 암살당할 뻔하다가 미수에 그친 일이 부지기수였다. 의회 내 좌파세력을 척결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이 조치는, 정당정치의 활성화라는 칠레 고유의 정치 특성과 배치되는 학살이었다.
피노체트는 반정부세력 탄압을 목적으로 비밀경찰들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 스페인, 포르투갈의 군부 독재자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또한 좌익분자들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이런 국가들 간에 반정부 인사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콘도르 작전'으로 알려진 합동작전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국제 협력에는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등의 자본주의 국가들도 참여하였기 때문에 유럽인, 미국인이라도 남미에서 반정부 운동 시 고국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처벌되었다고 하며, 심지어 운 좋게 유럽으로 망명한 남미인들이나 귀국한 미국인, 유럽인들도 본국으로 강제송환되어 처벌되었다. 이는 냉전 분위기 탓에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데다 남미 국가들과의 경제, 외교, 안보협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으레 그렇듯 탈출을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탈출 시 발각되면 처벌은 당연했다. 이것 때문에 분노한 피노체트는 공산권과 관계를 대거 단절해 버렸다.
더욱 심한 것은 외국에서 외국인이 피노체트를 비판하는 경우에도 해당이 돼서 외국인도 예외없이 납치되거나, 해당국가에 의해 송환이 되어 자국민과 똑같이 고문이나 처형을 당한 경우도 있다.
▲피노체트가 정적들을 감금하고 고문하던 산티아고 월드컵 경기장.
쿠테타 직후부터 약 3개월 동안 칠레에는 엄청난 피바람이 불이닥쳤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칠레 정부 보고서에 기록된 피노체트 정권하의 인권 침해 사례 중 2/3가 1973년 한 해 동안 일어난 일이였을 정도였다고 한다.[15] 군정 기간 동안 일어났던 사건 중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이 1973년 9월 30일부터 10월 22일까지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에는 헬리콥터를 타고 칠레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날아간 칠레 육군 소속의 분대가 전국 각지의 군대에서 구금된 정치범 97명을 처형한 '죽음의 캐러밴(Caravana de la Muerte)' 사건인데, 당시 증언에 따르면 처형된 정치범들의 시체는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군정 기간은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또한 피노체트는 쿠데타 직후 좌익분자 색출을 명목으로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의 사진에서처럼 대량으로 산티아고 데 칠레 월드컵 경기장에 감금하고 고문했다. 실제로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9월 11일부터 11월 7일 사이에 수백 명의 외국인(언론인도 포함)까지 포함한 12,000명이 이곳에 감금되었으며 공식 기록으로만 41명, 여러 정황으로 봐서는 수백명이 경기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경기장 옆의 마포초 강이 피로 붉게 물들었을 정도였다. 군정 기간 동안 무려 4만 명 정도가 이 경기장에 구금되었으며, 피노체트를 위시한 군정 지도자들은 경기장의 확성기로 수감자들에게 막말을 퍼부었다고 한다. 군정 자체가 끝난 1975년에도 3811명이 이 경기장에 구금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74년 6월 14일에는 기존의 칠레 육군 정보부를 개편한 국가정보부(DINA, Dirección de Inteligencia Nacional)가 창설되었는데, DINA는 쥐도 새도 모르게 밤에 급작스럽게 찾아와 사람들을 잡아가서 당시 칠레에서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만약 어느 마을에서 '호세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 호세는 다음날 고문받은 시체의 몰골로 칠레 앞바다에 떠밀려 오는 경우가 흔했다. DINA는 자신에 반대하는 반정부 조직을 철저히 탄압한 것은 물론 전국 각지에 강제 수용소들을 운영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감금, 고문했으며, 망명 온 나치 전범들을 국가정보국에 등용시켰다. 1975년에는 해외에 있는 반정부 인사를 최소 119명을 납치한 후 살해하는 '콜롬보 작전(Operation Colombo)'을 시행한 후 이들이 해외에서 서로 총격전을 벌이다가 죽었다고 사인을 날조하기도 했다. 이렇게 3년 동안 횡포를 부린 DINA는 1977년 8월 13일에 국가정보센터(CNI)로 대체되었는데, CNI는 DINA보다는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고 한다. 이후 CNI는 피노체트의 퇴임 직전인 1990년 2월에 해체되었다.
피노체트 시기부터는 60년대 중반부터 성행하던 극좌 마르크스주의 게릴라 단체가 더욱 열성적으로 무장 운동을 자행했는데, 피노체트 정권은 이 단체들을 탄압했다. 먼저, 혁명적 좌파 운동(MIR, Movimiento de Izquierda Revolucionaria)[16] 한 단체에서만 최소 663명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고, MIR 사무총장 말에 따르면 1500~2000명으로 그 수치를 잡아야 한다고 한다고 하며, 후술할 피노체트 암살 미수 사건을 벌인 마누엘 로드리게스 애국전선(MRPF, Manuel Rodríguez Patriotic Front)[17]은 49명의 게릴라가 살해되고 수백 명이 고문당했다.
당시 가장 악명이 높았던 강제 수용소로는 산티아고 인근에 있는 '비야 그리말디(Villa Grimaldi)'였는데, 수용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수용 인원이 한계치를 초과하면 새로 건물을 지을 정도였다고 한다. 죄수들은 무릎을 꿇고 기어 들어가야 할 정도로 좁고 극도로 비위생적인 공간 속에서 수감당했고, 손과 발을 묶어놓은 뒤 트럭으로 이를 깔아뭉게는 등의 엽기적인 가혹행위도 이루어졌으며, 이렇게 1974년부터 1978년까지 4년간 수감자 4500여명 중 최소 226명이 사망했다.[18] 그리고 콜로니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한 나치 출신 독일인[19]이 자신이 운영하던 사이비 종교 단체를 피노체트 정권의 정치범 수용소로 내주기도 했다.
피노체트 정권 하의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고문은 극도로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과장 안 보태고 전근대 고문 관련 글을 무사히(?) 읽을 수 있는 사람도 피노체트 시기 칠레의 고문 보고서는 맨정신으로 읽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20] 피노체트의 고문 메커니즘은 잠재적으로 전복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적들을 '사라지게' 하는 전술은 집권 초반 4년 동안 매우 활성화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후에는 첫 4년에 비해서는 비교적 줄었을 뿐이지, 이때에도 고문은 성행했다.
이런 참혹한 고문 등의 가혹행위로 사망한 시체들은 은폐를 위해 헬리콥터로 이송되어 태평양과 안데스산맥의 고지에 버려졌는데, 최소 40여건의 비행으로 400~500여구의 시신이 이렇게 투하당했다. 심지어 1970년대에 산 채로 바다에 투척당한 반정부 인사들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120명에 달한다. 이 '죽음의 비행'에는 피노체트의 개인 헬리콥터 조종사도 가담했다고 한다.
피노체트 정권에서 자행된 고문과 가혹행위들은 21세기에도 계속 드러나고 있는데, 피노체트가 죽기 직전이었던 2006년에는 DINA 직원에 의해 정적 암살을 위한 사린가스와 탄저균 등의 생화학 무기를 생산했다는 사실까지 폭로되었는데, 2009년에 나온 자료에 따르면 위 수술 중 패혈성 쇼크로 사망했다고 알려졌던, 아옌데 직전에 대통령을 역임한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도 DINA에 의해 독극물로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2013년에는 피노체트 정권이 반정부 인사들을 고문하면서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주기 위해 높은 볼륨의 노래를 수일간 계속 듣게 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고문 당시 배경음악처럼 쓰인 음악은 비틀즈의 멤버 조지 해리슨의 '마이 스위트 로드'와 스페인 출신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노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사운드트랙도 있었으며 해리 닐슨의 '당신 없이는 못살아'(Without You)와 아일랜드의 싱어송라이터 길버트 오설리반,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캣 스티븐스의 노래도 들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조사실로 데려가 고문하면서도 노래를 계속했다고 말한 것으로 확인되며 또다른 수감자들은 피노체트 정권이 고문을 하기 전에 고문을 더 잘하라고 음악을 틀었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기사
1986년 7월 2일에는 산티아고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던 두 10대 남녀들을 군인들이 붙잡아서 폭행한 다음 남녀에게 휘발유를 뿌린 뒤 라이터로 그들의 몸에 불을 붙였으며, 끔찍한 화상을 입은 두 사람은 군 트럭으로 짐짝처럼 실려갔고, 군인들은 이들을 산티아고 국제공항 주변에 버린 뒤 달아나는 일까지 있었다. 피해자들은 칠레에서 태어나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했던 19세의 사진작가 로드리고 드네그리였는데 드네그리는 이 사건 이후 나흘 만에 숨졌다. 또 한 명의 피해자인 18살 소녀 카르멘 퀸타나는 전신에 화상을 입고 수차례 대수술을 받은 뒤 간신히 목숨을 건져 캐나다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젊은 남녀에게 저지른 끔찍한 백색테러는 당시 피노체트 정권의 잔혹성을 전 세계에 알렸으며, 여기에 가담한 군인 7명은 2015년에 유죄가 인정되어 구속되었다. 기사
그리고 피노체트는 아동 빈곤율을 낮춘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강제로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서구 국가에 입양시켰는데, 실제로 가난한 미혼모들의 자식들이 주된 피해자였다고 한다. 여기에 관련된 아이들은 '침묵의 아이들(Children of Silence)'이라고 불리는데, 강제 입양이 의심되는 아이들은 약 8천 명 정도로 추산되며 이들 중 친부모를 찾은 아이들은 2019년 9월 기준으로 2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참고자료
2.3.2. 경제정책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와 극단적 국가 자본주의에서 벗어나 보다 시장 지향적인 구조와 정책으로 과거와의 중대한 단절을 단행한 국가는 1970년대 후반 덩샤오핑의 중국이나 마가렛 대처의 영국, 1981년 로널드 레이건의 미국, 다른 어떠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도 아니었다. 1975년 피노체트의 칠레였다.
로버트 패크넘과 윌리엄 랫리프가 2007년 1월 30일에 후버 연구소에서 발표한 논문 '피노체트는 칠레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중
로버트 패크넘과 윌리엄 랫리프가 2007년 1월 30일에 후버 연구소에서 발표한 논문 '피노체트는 칠레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중
▲아옌데 시기인 1971년부터 2007년까지의 칠레의 경제성장률과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평균 경제성장률 비교
정치적 악행과는 별개로, 집권 1년 후인 1974년에 시작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나름 좋은 평가를 받는다. 의외로 1973년 쿠데타 당시 피노체트는 딱히 신자유주의적인 인물이라고 보기 힘들었는데 집권 직후 1년간 피노체트의 경제정책은 케인스주의였지 신자유주의는 아니었다. 1974년에 신자유주의로 경제정책 노선을 수정한 것도 피노체트가 신자유주의를 신봉했다기보단 1년간 펼쳤던 케인스주의 정책의 성과가 지지부진했기 때문에 마지못해 한 것이었다. 1974년 신자유주의 정책 실시 전에는 아옌데 시절보다 어느 면에서는 더욱 악화되었고, 신자유주의 정책 실시 초반에는 실업률과 빈부격차가 증가하는 등의 온갖 시행착오를 겪었고 나름 적응한 후에는 경제 호황을 누렸다. 1982년에 심각한 경제 위기로 국가 부도 직전이라는 큰 위기 상황을 겪었던 시기를 제외하면 다른 남아메리카 국가들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여 오늘날 칠레의 부흥의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된다.
사실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직전 칠레의 상황은 매우 처참했다. 1973년 4월 15일에 엘 테니엔테(El Teniente) 구리 광산 캠프의 노동자들은 고임금을 요구하며 76일간 파업을 했고, 동년 6월 29일에는 전술한 것처럼 쿠데타 미수 사건도 있었고, 7월 말에는 4만명의 트럭 운전사들이 37일 동안 지속된 전국적인 파업을 지속하며 교통을 마비시키고 당시 가치로만 하루에 600만 달러의 피해를 입혔으며, 쿠데타 2주 전에는 300%에 달하는 물가 상승률과 식량 부족에 대한 항의 시위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정당성 없는 쿠데타로 집권한 피노체트는 정부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국가 경제 안정에 힘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3.2.1. 신자유주의
피노체트는 경제 자유화, 국유 기업의 민영화, 인플레이션 안정화라는 세 가지 주요 목표를 가진 경제 모델을 구현하며 세계 최초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21] 실행한 지도자이기도 하다.[22] 자유시장과 금융개방, 통화정책을 중시하는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에서 사사한 유학파 출신들(소위 시카고 보이즈)을 경제 관료로 중용하면서 이전 살바도르 아옌데 인민전선 정부의 토지개혁, 의료체계 개편과 같은 사회주의적 개혁 정책들이 상당수 취소되었고, 주요 국영기업의 민영화, 규제 철폐, 무역장벽 완화 등의 정책들이 그의 집권기에 실시되었다. 실제로 세계은행에 따르면 1990년까지 칠레는 무역 자유화 지수가 가능한 최대치인 20에 도달한 유일한 국가였다고 한다. 이렇게 대외개방을 추구했기 때문에 의외로 경제 엘리트들과 사이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개방 정책으로 경제 엘리트가 가지고 있던 기득권이 침해를 당했고 이것이 양자간 관계악화로 이어졌다.[23]피노체트 정권 시절 칠레 경제는 시기에 따른 등락이 있다. 사실 전술한 것처럼 군정 초기에는 아옌데 시절보다 나아진 것이 없었는데, 그 일례로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에 352.8%였던 물가상승률이 피노체트 집권 1년차인 1974년에는 504.7%로 오히려 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밀턴 프리드먼은 칠레 정부에게 "먼저 '환자(칠레)'의 느린 회복을 중점적으로 해야 하지만, 환자가 너무 오래 기다리면 죽을 수 있다. 그 다음에는 '환자'에게 충격 치료를 주어 활력을 되찾게 하라"고 조언했다. 피노체트는 이에 따라 공공지출을 27% 낮추고 공무원 30%를 해고하면서 500개의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충격 요법'을 취했지만 실행 초기인 1975년에는 오일쇼크와 구리가격 하락, 가격통제 해제의 여파로 GDP 12% 감소, 실업률이 16%로 증가[24], 수출액 40% 하락이라는 대실패를 맞이하는 듯했다. 그러나 1977년부터 이 정책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고, 20% 이상에 달하던 실업률을 제외한 모든 수치가 높게 나와 5년여간은 경제 호황을 누렸고, 프리드먼은 이를 보고 1982년 1월 25일에 뉴스위크에 '칠레의 기적'에 대해 찬미하는 칼럼을 썼다. 그러나 당시 칠레의 실제 경제 성장률은 칠레의 잠재적 경제 성장률보다 낮았지만 어쨌든 당시 경제 호황은 '붐'에 가까운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무렵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인 폴 볼커가 인플레이션 억제를 목적으로 한 초고금리 정책을 펼치며 달러 가치가 폭등했고, 이는 아예 소련 붕괴에 영향을 줬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달러 부채를 진 남미 국가들은 소위 '볼커 쿠데타' 때문에 전부 다 부채 위기에 시달리며 엄청난 경제위기가 몰려왔는데, 그 중 경제개방을 하겠다고 외채를 마구잡이로 끌여들이는 방식으로 호황을 누려온 칠레는 다른 남미 국가보다도 부작용이 더 컸다. 23.7%의 실업률을 기록한 데다가 급여 수준은 1970년 대비 14%로 떨어졌고 GDP는 무려 -14.3%나 급락하여[25] IMF의 구제 금융까지 받는 등 칠레 경제가 완전히 작살날 뻔 했고, 마이너스 성장은 1983년에도 이어졌고, 칠레의 외채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 중 5번째로 높게 나왔으며, 그 결과 세계적으로 피노체트의 경제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고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피노체트는 시카고 보이즈를 경질하기 시작했고 1984년에는 일시적으로 신자유주의 사상과 거리가 먼 재무장관을 임명했지만, 고작 1년 뒤에 국가가 위기에서 회복되었다 판단하여 다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돌아갔고, 이후에는 몇몇 은행들과 사업들을 국유화하고 나중에 민영화를 하는 등 이전에 비해 온건한 신자유주의 정책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피노체트 정부는 보조금과 크레딧을 대주어 사업들의 성장을 촉진시켰으며, 이렇게 다른 중남미 국가들과는 달리 구조조정에 성공을 거둔 것과 동시에 1985년부터 1990년까지는 칠레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남아메리카 최고 수치인 5.9%를 기록하면서 80년대 후반에는 과일과 공산품 수출이 증가하며 드디어 경제 위기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빈곤층의 소득도 이전보다 30% 증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피노체트 정권이 채택한 실용적인 경제 정책과 당시 등용된 경제 관료들의 활동은 민주화 이후 정부들에서도 계속되었고, 그 결과 칠레는 오늘날에는 남미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로 여겨질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다.[26]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피노체트 이전 미국 정권과 갈등을 빚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 당시 미국의 철저한 경제적 고립정책과 제재가 뒤따랐고, 반대로 자신들이 사주한 피노체트에는 미국이 이곳저곳에 통 큰 지원을 쏟아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 여하튼 이 때문에 당시에는 물론 지금도 피노체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상당하며, 1988년 피노체트의 집권 연장 찬반을 묻는 투표를 피노체트 측이 수락한 것도 이 지지기반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투표 결과 상당한 표차로 피노체트 측이 졌다는 것이 함정이지만. 하여튼 민주화된 90년대 이후 정권은 20년 연속 중도좌파쪽으로 넘어갔지만 칠레의 경제성장은 이때도 꾸준히 이어져 1인당 GDP는 남미 최정상급이 되었다. 다만 민주정권 시절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심각한 양극화 문제는 칠레의 골칫거리로 남아있다.
한편 1990년에 집권한 중도좌파 정당 콘세르타시온(Concertación Democrática)은 90년대 이래 칠레 정치사에서 대부분 과반 내지 제1당 자리 및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면서 주류세력을 차지했다. 물론 피노체트 쪽의 우파들도 4할 정도의 지지는 확보하여 완전히 기반을 잃은 것은 아니라, 상원이나 군부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콘세르타시온 민주 정권은 급격한 노선 수정 대신 시장친화적 경제정책 기조를 이어나갔으며, 대신 복지에 대한 지출을 늘림으로서 빈부격차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하거나 노동조합들의 이익 추구를 도와주는 법을 통과하는 등 실용적인 노선을 추구하였다.
다만 2000년대 리카르도 라고스 전 대통령은 시카고 보이즈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부정적인 입장을 띄었고, 후임인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 역시 이런 기조하에 경제성장을 이뤄내 결과적으로 1987년부터 2007년에 이르기까지 칠레의 평균 GDP 성장률은 당시 라틴 아메리카 평균 GDP 성장률인 2.8%를 상회하는 6%를 유지했다. 빈곤율도 1987년 45%에서 노동조합 법이 통과되고 피노체트가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해인 1990년에는 38.6%으로, 2007년에는 13.7%로 떨어지고 소득 격차도 소폭 감소하긴 했다.[27] 물론 빈부격차 문제는 칠레 역시 다른 남미 국가들처럼 여전히 골칫거리긴 하다.
칠레의 경제성장이 수출 주도 정책 등의 결과라고 보기도 하는데 이 말은 보기에 따라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규제 완화를 정책이라 볼 수 있으면 어느 정도 맞을지도 모르나, 만약 국가의 개입을 시장 자유의 축소라는 관점에서 볼 경우 이 말은 명백히 문제가 있다.
그리고 칠레의 경제성장은 사실 구리 자원에 힘입은 것도 크지만, 칠레 내에서 나름 구조 개혁을 철저히 수립한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 또 1989~2000년까지만 해도 구리 가격이 꼭 그리 상승세이지만도 않았다. 오히려 89년부터 90년대 초까지는 구리 가격이 하향세였다. 거기에 더해서 선진국 기업들의 생산기지가 칠레만 그런 것도 아니다. IT에서 잘나가는 인도 역시 자국의 해당 산업에서 외국계 기업의 비중이 족히 절반은 된다.# # 말레이시아 역시 제법 괜찮게 성장하는 축에 속하는데 이들 역시 제조업 분야에서 외국계의 비중이 크다.
2.3.2.2. 농지개혁
신자유주의 이미지가 너무 강한 나머지 피노체트 집권 후 이전 60~70년대 농지개혁이 모두 무효화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농지개혁의 유산을 상당히 유지시키고 농지개혁 방향을 올바르게 수정한 것이 피노체트이다. 실제로 60~70년대 농지개혁 당시 수용된 농지의 33%만이 이전 소유자에게로 되돌려졌고, 41%는 소농가에게로, 그리고 나머지는 경매로 처분(16%)되거나 공공기관(10%)으로 이전되었다. 다만 농지개혁을 주관하던 기관인 농업개혁공사(CORA)는 1978년 해체했고, 농정의 방향도 집단농장화를 추구했던 아옌데와 달리 자영농 육성으로 전환했다. 마푸체 원주민 농민에 대한 정책도 수정되어 마푸체의 농지 점거 시도에 단호하게 대처하고 대신 마푸체 농민에게 재산권을 부여하여 자영농을 육성하고자 했다. 1980년에는 농지 임대와 분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농지시장에 대한 유연성을 제고했고, 포스트 피노체트 정권들도 피노체트 시절의 농정을 별다른 수정 없이 유지하고 있다.[28]2.3.2.3. 경제지표
피노체트 시기의 경제지표를 논하자면 다음과 같다.(pdf 문서)실업률은 80년대 당시 위기를 겪으면서 20%대로 급상승했지만, 80년대 피노체트 정권 말년에는 10% 밑으로 겨우 회복되었고, 민주화 이후 90년대 중반에 6%대로 내려갔다가 10%대로 다시 올라갔다. 당시의 경제 성장률은 70년대 초 아옌데 시절의 경제성장률보다 높았다.[29]
그리고 물가상승률은 아옌데 정권 시기에 비해서 놀라울 정도로 억제되었는데, 이는 초기에 피노체트가 경제를 통제하면서 인플레이션을 제어하기 위해 고정환율제를 펼쳤기 때문이다. 다만 이때 고정환율제에 집착한 것이 1982년 위기로 국가부도 직전까지 가는 원인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30]
그 결과 1974년에는 504.7%였던 물가상승률이 4년 뒤인 1978년에는 40.1%가 되었으며, 또 4년 뒤인 1982년에는 9.9%가 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다. 다만 이게 상승과 하락을 반복했다가 피노체트가 퇴임한 1990년에는 26%로 상승했다. 물론 26%의 물가상승률도 상당히 높긴 하지만, 처음 집권했을 때에 비하면 무려 1/14 정도로 줄어든 것이다.[31] 칠레의 GDP 대비 국가부채도 피노체트가 퇴임한지 1년이 지난 1991년 37.4%를 기록했는데, 이 또한 아옌데 시절보다는 훨씬 낮아진 거다.
그리고 공공주택도 사유재산으로 보고 강력하게 방어하며 주택 건설도 민간 건설 회사가 저소득 가정을 위한 주택 보조금 시스템으로 자금을 조달하여 짓게 하였으며, 1977년에 여러 국영 기업들을 통합해 만든 국립 위생 공사 서비스(SENDOS)는 민간 기업에 서비스를 점진적으로 아웃소싱하고 구조조정하는 방식으로 하수 처리율과 식수 접근성도 놀랄 정도로 좋아지게 만들었다.[32] 또 평균 수명은 1970년의 64.8세부터 1985년의 68.3세로 증가했고, 유아사망률은 1970년과 1985년을 비교해볼때 1000명당 82.2명에서 19.5명으로 하락하며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최저치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리고 피노체트는 육로를 통한 칠레 남부로의 이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지정학의 대가로 유명했던 경험을 살려 1976년부터 아우스트랄 도로(Carretera Austral)라는 약 1,240km 길이의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고속도로는 칠레 중부 로스라고스의 푸에르토몬트와 칠레 남부 아이센의 비야오이긴스를 이었는데, 비야오이긴스 지역은 냉대기후였기 때문에 아우스트랄 도로의 개통 전까지는 해로와 항로를 통한 접근도 어려울 정도였으며,[33] 심지어 아우스트랄 도로는 416km 정도의 경부고속도로의 약 3배나 되는 엄청난 길이였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3억 달러에 가까운 비용과 1만 명 이상의 군인을 동원해서 1988년에 '칠레 역사상 가장 비싸고 어려운 작업'을 완성했다.[34]
그리고 1982년 10월에는 가장을 위한 직업 프로그램(POJH)라는 시립 고용 프로그램을 만들어 극빈층 가정을 돕기 위해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여 23.7%에 달하는 실업률을 20%까지로 줄인다는 계획을 짜기도 했다. 비록 광장 청소나 벽 페인팅 등 비효율적인 저임금 업무 위주로 편성되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여하튼 이 정책은 1984년에만 약 20만 8천명의 직원을 고용하는 등 나름 성공적으로 운영되기는 했다. 이후 1988년 12월에 국가 경제가 안정되었다고 판단되어 해체되었다.
그러나 소득분배 관련 지표의 경우는 대부분이 아옌데 시절보다 악화되었다. 이는 공공부문에 대한 지출 축소, 각종 복지정책의 후퇴, 그리고 80년대 외채쇼크 등에 기인한다. 특히 의료와 교육부문의 부실화는 지금까지도 과도한 교육비와 의료비 부담 등 많은 사회문제를 안고 있으며 칠레의 빈부격차 문제를 지속시키고 있다고 평가될 정도다. 피노체트 군사정권 당시 이뤄졌던 공공지출 감소와 무분별한 민영화는 빈부격차를 증가시키고, 칠레의 복지 수준을 나락으로 이끄는 등 부정적인 영향에 한몫 했다. 현재 칠레의 GDP 대비 1인당 교육비 지출이 대한민국을 넘어섰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이고, 의료계급화도 뿌리박혀서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일이 종종 생기고는 한다. 관련기사. 그나마 빈곤율 자체는 상기했듯 87년의 45%부터 90년까지 38%로 하락한 것을 시작으로[35] 민주화 이후에도 콘세르타시온 정권이 최저소득계층에 대한 복지를 강화하면서 급락했다. 그런데 피노체트의 경제 성과들은 국민들에게 불균등하게 분배되어 빈부격차는 심해졌다. 애당초 피노체트는 "부자들은 부를 창출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이 계속해서 부를 줄 수 있도록 그들을 잘 대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남긴 것처럼 빈부격차 해소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2.3.3. 외교정책
피노체트 본인이 친미, 친서방 성향이라 서방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미국의 지원으로 집권한 만큼 집권기간 동안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근본이 쿠데타 독재정권이다 보니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도 임기 후반기 갈수록 피노체트와 사이가 서먹해지긴 했다. 다른 중남미 국가들은 민주국가로 향해가고 있었는데 독재국가 칠레를 무조건적으로 지원해주긴 난감했던 것도 사실이었다.영국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나 이게 되레 치명타가 되기도 하는데, 아르헨티나와 영국간 포클랜드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에 칠레의 영공을 개방한 것. 말이야 영공 개방이지만 당시 남미 대 유럽의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던 대부분의 남미 국가에게는 제대로 된 역적, 팀킬로 보일만했다. 결국 칠레는 전쟁을 일으킨 아르헨티나는 물론이고 아르헨티나의 영구 우방국인 우루과이, 그리고 안 그래도 칠레와 사이가 나쁘던 볼리비아와 페루 기타 브라질, 콜롬비아, 파라과이 등 남미 국가들에게 격렬한 항의를 당하고 오랜기간 칠레를 남미의 왕따 국가로 전락시켰다. 다만 이건 칠레 입장에서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국경지대의 마가야네스 지역의 비글 해협에서 레녹스, 누에바, 픽톤 섬의 영유권을 두고 양국간의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분쟁 때문에 아르헨티나는 1978년 비글 해협을 침공하려는 작전도 계획할 정도였고 바티칸이 중재했음에도 그 중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전쟁 때문에 따라서 칠레는 포클랜드 전쟁 당시 영국을 지지했고 포클랜드 전쟁으로 영국이 승리한 후 아르헨티나는 민주화 이후 라울 알폰신 정부 하에서 칠레와 조약을 체결하여 해당 지역에 대한 칠레의 영유권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엄밀히 말해, 포클랜드 전쟁 당시만 놓고 보면 아르헨티나를 지지해 준 나라는 페루뿐이었고 다른 남미 국가들은 별로 아르헨티나를 지지하진 않았다. 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칠레 영공 개방 행위로 인해 전쟁이 남미 대륙 전체로 확대되고 남미 전체가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는 문제는 있었고, 남미 국가들이 항의했던 것도 그런 문제였던 측면이 컸다. 결국 가만히 있음 중간이라도 갔을텐데 괜히 남의 나라 전쟁에 숟가락 얹었다 욕만 먹은 셈.
90년대 이후 칠레 민주 정권에서는 포클랜드 영유권 문제에 있어선 아르헨티나를 지지해 오고 있으며,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외교 관계도 우호적인 관계로 개선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볼리비아와의 관계는 여전히 좋지 않은 모양.[36]
소련과는 매우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973년 9월 22일부로 칠레와 소련은 국교를 단절했고, 피노체트가 물러나는 1990년 3월 11일까지 외교관계가 없었다. 소련은 당시 칠레 정부를 파시스트라고 비난했다. 피노체트 역시 비교적 친서방이던 루마니아와 중화인민공화국[37]을 제외한 모든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를 단절해버렸다.
집권 기간 동안 내한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사실 현지 시간으로 1982년 12월 15일에 김상협 국무총리가 칠레를 방문해 피노체트에게 방한을 요청했고, 피노체트는 이를 승낙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2.4. 임기 후반
1987년 군사 퍼레이드에 참여한 피노체트.
폭압적인 피노체트 군부정권에 대항하여 1983년 기독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연합(AD)이 결성되었다. 피노체트는 1984년 6월, 점점 거세지는 반정부 투쟁에 대처하기 위해서 더욱 더 큰 탄압을 했으나 이러한 피노체트의 강압조치에도 불구하고 반정부세력의 민주화 요구는 더욱 커져만 갔다. 1982년에 있던 경제 위기를 기점으로 반정부 여론은 들끓어올랐고, 1983년 5월 11일에 있던 피노체트 집권 이래 최초의 반정부 시위를 시작으로 칠레 민중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피노체트는 이 요구를 잔혹한 진압으로 화답했다.
특히 1983년 8월 11~12일에 있던 4차 시위에서는 피노체트가 직접 18,000명의 군인들에게 경찰을 도와 시위를 진압하라고 지시했으며, 이들은 곤봉, 최루탄, 기관총으로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시위대를 진압했고 심지어 주택가에게까지 총탄을 퍼붓는 등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그 결과 8살 소녀 1명[38]을 포함한 29명 사망, 200명 부상, 1천명 정도 구금이라는 참상이 벌어졌다. 거기에 1986년 7월 2~3일에 있던 전국적 대규모 시위에서는 산티아고에서만 군의 발포로 5명이 숨졌고 전술한 10대 분살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 분살 사건으로 인해 피노체트를 지원하던 미국 내에서도 여론이 악화되어 미국의 대칠레 지원이 대폭 줄게 되었다.[39]
1986년 9월 7일에 피노체트는 작은 산악 마을의 별장에서 주말 휴가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10살짜리 손자 로드리고와 차를 타고 가다가 산티아고 인근 도로에서 좌익 성향의 반피노체트 게릴라 단체인 마누엘 로드리게스 애국 전선(FPMR)에게 총기 공격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경호원 5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다쳤는데, 피노체트는 방탄차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한쪽 손만 약간 다쳤다고 한다.[40] 그러나 피노체트는 이전에 있던 반정부 시위 진압에 대한 국제적 비판 여론을 의식했는지 대놓고 시위대에 발포하고 수백 명의 시민들을 잡아들이지는 않았다. 물론 뒤로는 반정부 인사 40명 이상을 구금하고 암살 시도 바로 다음 날에 정부 인사 4명을 비밀리에 처형한 후, 1987년 6월 15~16일에 FPMR 조직원 12명을 CNI 조직원들이 집에 침투하여 암살하는 방식으로 보복했다.
민중들의 거센 민주화 요구로 마지못해 선거가 치러졌을 때에 피노체트 반대 진영에서는 텔레비전 광고와 토론 프로그램 참여 등으로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의 언론의 자유 통제로 감추어졌던 인권 탄압 문제를 부각시켰다. 이로 인해 그동안 그를 지지했던 미국도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고 칠레의 유권자들도 피노체트에게 표를 주지 않는 비폭력저항을 벌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피노체트는 집권 후반에는 집권 초기에 비해 인권 탄압을 상당히 줄이며 유화책도 일부 펼쳤는데, 일례로 전술한 것처럼 첫 반정부 시위가 발생한 1983년에는 도서 검열을 폐지하고 언론 자유를 일부 보장하기 시작했으며 1987년 1월 2일에는 13여년간 지속된 통행금지령이 완전히 해제되었으며, 심지어 1987년에는 야당의 설립도 허용하게 되었다. 사실 피노체트가 집권 초반에 무자비한 국민 탄압을 저지를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과 자국의 대규모 자본가라는 거대한 지지 세력을 등에 엎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러던 게 집권 말기로 갈수록 폭정의 실상이 세계 여러 곳에 알려지며 여론이 나빠지자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력들의 지원이 끊겨버렸고, 자국의 자본가들마저 피노체트 및 군부의 협박에 질렸는지 지원을 끊어버렸다. 이에 따라 군부내에서도 피노체트에 대한 불만이 쌓여만 갔고 결국 모든 세력에게 배척당한 피노체트는 집권 말기로 갈수록 국민들에게 유화책을 쓰며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41][42]
그리고 당시 미국이 피노체트에 대한 지원을 철회할 수밖에 없던 것이 당시 아르헨티나, 브라질, 페루,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 여타 남미국가들이 잇따라 민주화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피노체트를 감싸줄 명분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1970년대 당시에야 그나마 도미노 이론이 먹혀서 군사독재정권을 지원보낼 명분이라도 있지만, 이웃나라들이 속속 민주화되고 있던 데다가, 소련도 세계 혁명은커녕 내부 신경쓰기 바빴는데 그 와중에 학살과 야당 탄압으로 악명높은 독재자에게 친미정책을 편다는 이유만으로 지속적으로 지원을 보내주는 것은 그냥 명분없는 바보짓이었다.[43] 그래서 미국도 슬슬 발을 빼려고 했고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피노체트에게 압력을 가하게 되었다. 애초에 소련에 반대한 68혁명 지지한 인물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는 데 일조한 것 자체가 어리석은 행위였지만 말이다.
이후 라울 실바 엔리케스 추기경 등의 주도로 가톨릭교회와 여러 단체들이 서로 힘을 모아서 1985년에 11개 이상의 야당들이 완전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합의서를 발표했고, 1986년 4월에는 200여 개의 사회단체가 '시민회의'를 결성했다. 거기다가 1987년 4월 1일부터 6일까지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칠레에 방문했고, 교황은 피노체트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당부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노체트는 1988년 10월, 자신의 집권 연장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중도와 좌파성향 정당들이 '아니오를 위한 정당연합(Concertación de Partidos por el 'No')'을 결성하여 국민을 상대로 피노체트의 집권 연장에 반대하는 운동을 폈고, 1980년 국민투표의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칠레와 해외 각지에서 수만 명의 참관인들이 선거를 감시했다. 이 선거에서 54%의 국민이 이에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피노체트는 국민투표에서 패했지만 꼼수를 써서 1998년 3월까지 군 통수권자로서 역할을 인정받았고, 그 이후에는 종신 상원의원[44]으로써 면책권도 부여받았다.[45] 그리고 군부가 국정에 다양하게 개입할 수 있도록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존속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47명의 상원의원 가운데 9명의 상원의원을 자신이 임명할 수 있게 했다. 또한 피노체트는 1973년부터 1978년 동안 군부가 저지른 심각한 인권침해에 면죄부를 주는 것을 틀로 하는 사면법을 제정하여, 자신과 추종자들에게 형사상의 기소를 할 수 없게 했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보호해줄 인물들을 대법관에 임명했다. 이처럼 칠레의 민주주의는 피노체트에 의해 감시받고 억압받는 민주주의일 뿐이었다.
참고로 1989년에 한 인터뷰에서 기자들이 정적들과의 화해에 대해 언급하자 피노체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후 기자들이 '그리고 더러운 전쟁의 희생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피노체트는
"그것은 '더러운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싹트고 있는 내전의 낙태였습니다. 잊어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2.5. 민주화 이후
2.5.1. 하야
'아디오스 헤네랄!(Adiós! General!, 장군이여 안녕!)' 1988년 국민투표에 앞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퇴진을 요구하는 벽보가 칠레의 산티아고 시내에 붙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1989년 12월 피노체트와 공산당이 참여하지 못한 대통령 선거에서 기독민주당의 파트리시오 아일윈 후보가 당선되었다.[46] 17개 야당연합의 단일 후보로 출마한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연합'의 아일윈 후보가 1차 투표에서 55.2%를 획득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일윈은 집권하자마자 400명의 정치범 가운데 43명을 특별사면했으며, 칠레 공산당을 합법화하고, 1973년 이후 단절되었던 소련, 동독, 체코 등과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그는 또한 멕시코와의 관세장벽 제거와 임금인상, 전신, 철도 및 송유관 건설사업 등을 통해서 1992년에 칠레의 경제성장률을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중 가장 높은 9.7%로 끌어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아일윈 대통령은 1990년 9개월 동안,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쿠데타와 17년간의 피노체트 군부 독재 기간에 벌어진 인권유린 사례들에 대한 조사를 담당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장의 이름을 따서 '레틱(Rettig) 위원회'라고 불린 이 위원회는 "레틱 보고서"를 발간하여 피노체트 정권이 자행했던 4,000건이 넘는 인권침해 사례를 수집하여 공개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진실규명보다는 과거의 상처에 대한 화해만을 강조하여, 가해자들이나 인권침해에 개입했던 국가기관과 그 인권탄압 책임자들의 책임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또 사망이나 실종 사례만 조사했을 뿐, 체포, 구금, 고문, 추방 등 그 이상의 인권침해 사례를 다루지 않아, 피해 관련자들과 인권단체가 주장한 과거사 청산 요구의 기대에는 매우 미치지 못했다. 피노체트는 본인이 만든 사면법과 지지세력을 통해 오히려 정권에 협박을 하면서 평생 잘 먹고 잘 살았다.
이에 아일윈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희생자와 그 유가족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사죄하고 범죄를 저지른 군 관계자가 사과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대화를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아일윈 대통령의 요구를 한마디로 거절했다. "나는 보통 협박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단 한 번만 경고한다. 그들이 내 부하들 중 한 명을 건드리는 날, 헌법 질서는 끝난다." 이것은 자신을 건드리면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고 협박을 하며 위협한 것이다.[47] 이처럼 레틱 위원회의 활동은 완벽한 과거사 청산을 끝내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를 통한 과거사 청산이 피해자들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하자, 인권단체와 피해자들은 법적인 방법을 통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1978년 피노체트 정권이 정한 사면법은 이러한 해결에 많은 제약을 생기게 했으며, 1998년 8월, 레틱 위원회 이후 정부와 군, 민간 인사 등으로 구성된 대화위원회가 소집되어 활동했지만 정작 이 위원회에는 피해자 가족들의 목소리가 배제되어 있었고 군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될 수 있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98년 3월 10일에 피노체트는 칠레 육군사령관직에서 은퇴하며 65년에 걸친 기나긴 군대 생활을 끝마친다. 당시 피노체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역 군인이었다고 하며 이걸 기념하는 행사에서 피노체트는 "고마워요, 나의 조국. 당신의 군인이어서 행복했습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대중들 앞에서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었다고 한다. 피노체트는 비판 여론을 의식했는지 친피노체트 성향이었어도 인권 탄압과는 무관했던 군인인 리카르도 이수리에타(Ricardo Izurieta)를 후임 육군사령관으로 앉혔으며, 전역 후 피노체트는 칠레 역사상 최초의 '종신 상원의원'으로 칠레 의회에 입성했지만, 의회에는 잘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5년경의 피노체트.
2.5.2. 체포
1998년 10월 17일 디스크 치료로 방문했던 런던의 한 병원에서 스페인 국민 살해 문제[48]로 영국에서 체포되었다. 스페인의 가르손 판사가 영국과 스페인이 체결한 범죄인 인도협정과 유럽테러협약에 의거, 피노체트를 과거 집권 때 스페인 시민 등 94명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하고 신병을 인도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결국 영국 귀족원[49]까지 갔다. 국제법상 중요한 판례로 꼽혀 국제법을 배우는 사람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사건.[50]이 사건은 칠레에서 피노체트를 보호하고 있었던 다양한 보호막이 무용지물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피노체트는 재임시절 한 일에 대해 국가원수로 한 행위로서 외교면제 중 물적면제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내세워 영국정부에 강력히 항의했지만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스페인의 요구가 법적인 하자가 없음을 확인했고, 영국의 상원 5인 재판부 역시 피노체트가 면책특권을 갖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영국 상원의 판결에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스페인 상원 재판부는 피노체트의 이의를 받아들여 결국 5인 재판부에서 인원을 추가하여 7인 재판부를 구성하고 피노체트를 심리한 끝에 피노체트가 치매라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피노체트의 귀국을 허용했다. 이에 잭 스트로 내무장관은 2000년 3월 피노체트를 석방한다.[51]
죽기 보름 전인 2006년 11월 25일 생일 때
손녀와 함께. 위아래 다 2006년 생일 때다.
이렇게 간신히 칠레로 돌아왔는데, 휠체어에 2002년부터 앓고 있던 치매기까지 있던 그는 놀랍게도 휠체어가 고국의 땅에 닫자마자 두 발로 걸어 일어서고 공항 활주로를 걸으며 모여 있던 친구들과 수다를 떨었다.[52]
생일 무렵에는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내용은 대충 "내 인생이 끝날 무렵, 나는 누구에게도 원한을 품지 않고 무엇보다 조국을 사랑하며 칠레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고 칠레를 멸망에서 피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집권 기간에 발생한 모든 일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진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2.5.3. 드러나는 부패 행각
1999년 집권한 라고스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보상을 강구함과 동시에 피노체트가 임명한 대법관 상당수를 교체했다. 2000년 3월, 칠레 대법원은 영국에서 칠레로 돌아온 피노체트의 면책권을 박탈해 피노체트에 대한 사법처리 가능성을 열었으나 치매라는 건강상의 이유로 재판을 종결시켰다. 다만 재판조차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치매가 심하다면 그의 종신상원의원 자리도 유지할 수 없음이 분명했기 때문에 사면과 권력 두 가지를 모두 취할 수 없었던 피노체트는 결국 2002년 7월 4일에 종신 상원의원을 사임했다. 그러나 칠레 사법당국은 남미지역에서 반체제 인사 9명을 납치해 그중 1명을 살해한 혐의로 피노체트를 재판에 회부하여, 피노체트를 가택 연금시켰고, 막대한 횡령을 저질렀던 사실도 밝혀져 '청렴한 독재자'란 이미지도 잃어버렸다.밝혀진 바에 따르면 피노체트는 1973년부터 1990년 동안 공금을 횡령하고 무기 밀수출을 통해 2600만 달러를 빼돌렸고, 그 돈을 레드 폭스라는 코드명으로 9개 정도의 미국 은행에 최소 128개나 되는 차명 계좌에 분산해 미국 워싱턴시에 본점이 있던 릭스은행에 보관했다. 그런데 9.11 테러가 발생한 뒤 미국 안 은행들에 은닉되어 있던 외국 테러단체의 자금을 미국 상원이 조사하던 중 피노체트의 비자금이 드러났고, 이 중 800만 달러가 5만 달러짜리 수표 다발 형태로 칠레로 재반입된 정황까지 포착되었다. 피노체트가 빼돌렸다고 확인된 돈은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260억 원 정도. 하지만 피노체트는 이번에도 3,500달러의 보석금으로 가석방되어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갔다. 물론 계속해서 비리행위는 캐도 캐도 나오고 있는데, 피노체트의 아내 루시아 이리아르트는 탈세로 두번이나 구속되었고, 피노체트의 다섯 자녀들도 공금횡령 등으로 조사를 받았다. 심지어 피노체트가 죽기 직전인 2006년 10월 25일에 칠레 수사관은 홍콩 은행에서 피노체트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1억 6천만 달러 상당의 금 9톤을 발견했다는 발표를 했으며, 심지어 피노체트가 코카인을 유럽과 미국에 밀매해 이 수익을 은행 계좌에 은닉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피노체트의 수많은 미국 은행 계좌 중에서 일부 문서들.
2.6. 사망
생일 이틀 뒤인 2006년 11월 17일에 피노체트는 쿠데타 당일에 체포되어 '죽음의 캐러밴' 시에 사살된 아옌데의 두 경호원에 대한 납치, 살해 혐의로 가택연금을 선고받았다. 그러다가 12월 3일에 급작스럽게 심장마비가 발생하여 다음 날인 12월 4일에 가택연금이 해제되어 군병원의 중환자실로 이송된다. 그리고 현지 시간으로 2006년 12월 10일[53] 오후 2시 15분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91세로 사망한다. 가족들 말에 따르면 피노체트의 유언은 그날 생일을 맞이한 아내와 관련된 말이었다고 한다.
칠레 정부에서는 피노체트의 국장은 불가함을 밝혔고 따라서 국가애도일 선포나 조기 게양도 없었다. 다만 병영에서 조기를 게양하는 건 막지 않았고 전직 군사령관이었으므로 군장을 치르는 건 허락했다. 아버지가 피노체트 정권 당시에 감옥에서 심장병으로 죽은 아픔을 겪은 당시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는 "피노체트의 국장에 참여하는 건 양심에 위배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피노체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악행에 대해 전혀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기 3년 전인 2003년에 있었던 88세 생일 무렵에는 자신을 '천사'라고 지칭하며 자화자찬하기도 했으며,[54] 죽기 1년 전인 2005년 11월 16일에 DINA와의 연관성에 대해 물어본 인터뷰에서도 "기억이 안나지만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아니고 사실이었다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취지를 시종일관 유지하는 등 엄청난 망언들을 남겼다.[55]
그가 죽었을 때 칠레 현지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민주화 세력과 이들의 지지자들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고,
피노체트의 지지자들은 침통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심장마비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이 칠레 전역에 방송을 통해 알려지자 피노체트가 입원한 병원 정문 앞에는 경찰 수십 명이 배치되었고, 정문 앞 인도에는 피노체트의 열성 지지자 수십 명이 피노체트 사진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고 한다.[56] 병원 정문 앞 잔디밭에는 장기간 취재할 마음을 먹었는지, 칠레 취재진들이 아예 짐을 풀어놓고 대기하고 있었고, 병원에서는 취재진의 병원에 출입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했다. 취재진들은 피노체트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출입하면 모두 이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몰려갔으며 이런 지루한 기다림 끝에 피노체트가 그날 정오에 사망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그러자 그가 위독하다는 방송이 처음 나갔던 이틀 전과는 달리 병원 앞에는 수백 명의 시민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었으며 병원 주변은 아예 이동하는 것이 차단됐다. 심지어 기마경찰까지 동원된 수백 명의 경찰들이 계속 불어나는 인파를 통제하고 있었으며 피노체트 지지자들은 대부분 칠레 국기와 피노체트의 사진을 들고 병원 앞에 모여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고마워요, 피노체트’라고 쓴 피켓을 든 여성들과 ‘고마워요, 나의 장군’이라고 쓴 머리띠를 두른 젊은 남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궁이 위치한 시내 중심가에서는 수천 명의 시위대가 피노체트의 죽음을 환영하는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경찰과 충돌했고 거리 곳곳에서 타이어나 나무를 태우거나 시위대가 보도블록을 깨서 경찰들에게 던지기도 했다. 시위는 밤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피노체트의 장례식이 열리던 12월 12일에 산티아고 거리는 시위로 인한 다툼 하나 없이 평온했다고 한다. 오전부터 대통령궁인 ‘모네다’앞의 광장에서는 약 5천 명이 모였는데, 그들의 상당수는 피노체트 시기 가장 집중적인 탄압을 받은 칠레 공산당의 당원 및 지지자들이었다.[57] 피노체트 정권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늙은 공산주의자들은 피노체트 사망 축하 집회를 열면서도 죽어갔던 동료들로 인한 슬픔이 배어있었다고 취재진은 전했다. 집회가 끝나자 이번에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모여서 피노체트의 사망을 축하하는 춤판을 벌였다.
한편, 칠레의 육군군사학교에서는 피노체트의 장례식이 군인장으로 치러졌다. 많은 군인들이 여전히 피노체트를 군의 최고지휘자로 예우하는 모습이었으며 그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약 5만여 명의 인파가 모였다. 칠레의 국방장관이 장례식장에 도착하자 피노체트 지지자들은 정부가 국장을 반대했다는 것에 분노하며 국방장관에게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 또한 장례식 도중에는 피노체트의 가족들이 나와 피노체트를 "칠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 피노체트의 유족들은 피노체트의 유해를 군부대에 안장하기를 원했지만, 군 당국이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때문에 피노체트의 유해는 자기 무덤이 정적들에게 파헤쳐질 것을 염려했던 피노체트의 유지에 따라 화장된 후 산토도밍고 로스볼도스의 가족 땅에 묻혔다.
그리고 40년간 유지된 칠레 헌법은 2019년 10월에 산티아고 지하철 요금 인상에 항의하는 시위가 사회적 불평등에 항의하는 시위로 확대되며 민심에 의해 불평등의 씨앗으로 지목되었고, 결국 현지시간으로 2020년 10월 25일에 부쳐진 국민투포에서 78%의 압도적 지지율로 개헌이 결정된 후 2022년 5월에 새 헌법 초안이 발표되었으나, 사실상 강요에 가까운 급진적인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론이 악화되어 결국 2022년 9월 5일자 국민투표 결과, 게헌 찬성 38%에 개헌 반대 62%로 개헌은 부결되었다.
3. 평가
칠레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었던 정치인 중 한 명으로, 대표적인 개발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어지간한 아프리카 최빈국 독재자들에 버금가는 학정을 저질러 큰 비판을 받으나 그에 반해 경제 발전과 마약 조직 소탕 등 전 계층에서 인정받을 만한 공 역시 확실하기에 호불호가 갈린다. 살바도르 아옌데와 함께 현대 칠레의 역사를 바꾼 인물이기 때문에 실제로 칠레 사람들 사이에서도 굉장히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다. 피노체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피노체트를 할아버지라는 뜻의 '타타'(el tata)라고 부르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개새끼 피노체트라는 뜻의 '페로체트'(perrochet)라고 부른다.[58][59] 어찌보면 스펙트럼은 정반대이나, 이오시프 스탈린, 엔베르 호자와도 유사한 면이 있는 셈이다.[60][61]수많은 사람들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사살하는 폭정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말년에는 진지하게 양심이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시종일관 뻔뻔한 태도로 보여줬기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집권 기간 동안 칠레 경제를 안정화시키고 경제 성장의 기반을 닦아 피노체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상당하다. 물론 피노체트 옹호는 칠레 현지 내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어서 피노체트 찬양 앨범이 Rate Your Music 최하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 경제 발전을 성공시켰다는 점이 동시대의 다른 남미 독재자들이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같은 막장 사례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62]
사실 피노체트가 칠레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칠레 내의 마약 조직을 완벽하게 소탕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건 피노체트 특유의 전체주의 폭정에 따른 효과라 할 수 있는데, 피노체트가 자국민을 학살하였다는 비판이 있으나 동시에 마약 운반자들과 생산자들 역시 쥐 잡듯이 잡아죽였다. 피노체트가 마약 생산처를 때려잡은 것은 공산 반군을 소탕하기 위한 목적인데, 그 덕에 칠레에서 코카인 생산하던 마약 조직들이 대거 콜롬비아와 멕시코로 탈출해서 마약 카르텔을 형성하는 씨앗이 되어 그 두 국가는 국가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고생하고 있다. 남미 마약 문제의 특징은 반군과 엮여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인데, 남미의 공산반군은 조직의 운영자금을 마약 재배를 통해 이루는 경우가 많아서 피노체트는 공산반군을 절멸시킬 방안으로 마약 생산의 씨를 말리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사회 보수주의자인 피노체트는 개인적으로도 마약을 극도로 혐오했다. 당시에도 칠레의 마약 범죄단체는 충분한 문제가 되는 정도였지만 피노체트 같은 인간백정이 군대를 동원하는데는 범죄조직이라도 별 수 없었다. 마약 재배하는 농부들마저 단체로 총살하는 식으로 마을 단위로 묻어버리는 잔혹한 탄압을 해서[63] 마약 생산과 유통의 씨를 말려버렸고 민주화 이후에도 주변국가의 예를 보고 마약 조직에 대한 대처는 똑같이 강경하게 하고 있어서 칠레는 아직까지도 치안 문제에 한해서는 피노체트의 덕을 보고 있었다. 최근 칠레 내 원주민 반군조직이 다시 대마초와 코카나무를 통한 마약 생산을 하고 있어서 이에 대한 강경한 대응 여론이 일고 있지만 독재정이었던 피노체트 시기처럼 무자비한 탄압을 할 수는 없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물론 이후 20년간 중도좌파연합이 연속 집권해왔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칠레 역시 反피노체트 여론이 더 우세하기는 하지만, 매년 피노체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여론 조사를 실시할 때마다 계속 찬반 비율이 바뀐다. 일례로 쿠데타 45주년에 해당하는 2018년 9월에 실시한 역대 대통령에 관한 지지율 조사에 있어서, 피노체트를 좋게 평가하는 의견은 20%,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의견은 17%,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은 48%나 되었다고 한다.[64]
구체적으로 따져보자면 그가 하야한 1989년부터 2009년까지 누에바 마요리아(중도좌파연합)이 계속 집권했고, 4년 정권을 뺏겼다 2013년 다시 재집권했을 정도로 전체적으로는 반피노체트파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피노체트 정권에서의 각료를 역임한 인원이 많은 우파연합도 아주 집권을 못 하지는 않았고 두번은 집권했으니 피노체트의 지지자들도 아예 소멸한 수준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65] 많은 사람들이 죽고 민주적 권리가 봉쇄되고 양극화가 심해졌다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어느 나라든 정치 얘기는 민감한 소재이므로, 칠레에 가거나 칠레인을 만날 일이 있다면, 말다툼의 소재가 될 수도 있으니 꼭 이야기하고 싶다면 사람 봐 가면서 하도록 하자. 피노체트가 독재자라는 이야기만 전해들은 한국 관광객이 칠레 식당에서 영어로 피노체트 험담을 했더니 곧바로 그 사람 멱살을 잡으려는 사람과 틀린 말도 아닌데 왜 이 사람 갖고 그러냐고 관광객을 편들어주는 사람이 동시에 나타났다는 말도 있다.
피노체트가 이룩한 경제적 성과들은 저소득 국가의 잠재적 모델로 여겨지며 해외에 수많은 추종자들을 양성했는데, 대표적으로 브라질의 군인 출신 국회의원인 자이르 보우소나루[66]는 1998년에 "피노체트가 더 많은 사람을 죽였어야 했다"는 말까지 했으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내세운 페루의 대통령인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치노체트(chinochet)'라는 별명으로 불렸다.[67]
유명한 일화로 피노체트 집권 이전에 구걸하는 소녀에게 돈을 줬더니 그 돈으로 우유를 사마셨는데, 피노체트 집권 후 구걸하는 소녀에게 돈을 줬더니 그 돈으로 요구르트를 사마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피노체트의 악랄한 방식의 통치와는 별도로, 피노체트 시기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성장을 거뒀다는 공감대가 현지에 존재하는 듯.
4. 대중매체에서
피노체트의 집권기는 칠레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였고, 수많은 이들이 죽고 또 사라진 만큼 그 시절을 조명하는 영화 및 드라마는 군부 정권 당시[68]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자국 뉴웨이브를 작살낸 사람이기에 당연히 언급되면 엄청나게 까인다.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영화로 1975년작 프랑스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가 있다. 프랑스로 망명한 칠레인 감독 헬비오 소토가 감독했으며 쿠데타 당시의 학살도 제대로 다루고 있다. 위에도 언급한 빅토르 하라가 죽는 장면도 나온다.
또 다른 영화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1982년작 의문의 실종(Missing)이 있다. 아카데미 각본상, 칸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73년 칠레 쿠데타 당시 실종된 미국인 기자 '찰스 호먼'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미국인 젊은이가 칠레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행방불명 되고, 그의 아내와 아버지가 아들의 행방을 찾으러 칠레에 왔다가, 그가 쿠데타 군에 의해서 살해당했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미국 외교관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아무 소용도 되지 못한다. 이는 칠레와 미국 간 협약으로, 미국인일지라도 칠레에 반정부 활동을 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당연한 수순이다. 결국 범인은 밝혀내지 못한 채, 아들의 시신과 함께 공항을 출발하면서 아버지는 미국 외교관에게 "당신을 반드시 고소하겠다"고 분노를 토하며 영화는 끝난다. 이 사건의 전모는 여태껏 밝혀지지 않다가 최근에야 드러났다. 뉴스 미군, 정확히 말하자면 미 해군의 데이비스 대령이 살해 사건의 종범(從犯)이었던 것.
2010년대에 제작된 영화로는, 2012년에 나온 칠레 영화 파블로 라라인의 NO와 2016년에 나온 독일 영화 콜로니아가 있다. NO는 윗단락에 기술된 피노체트의 재신임 국민투표에서 있었던 반대투표 광고 캠페인을 소재로 삼은 정치픽션 영화이고, 콜로니아는 피노체트 정권 시절 사이비 종교집단과 결탁하여 반정부 인사들을 수용했던 수용소의 이야기를 다룬 실화 바탕의 영화. 칠레 뉴웨이브의 일원이자 아옌데 정권의 지지자였던 파트리스오 구스만 역시 빛을 향한 노스탤지어와 자개 단추에서 칠레 원주민들을 주 소재로 피노체트 정권의 악행과 피해를 담담히 고발하기도 했다.
피노체트의 독재정권 당시 칠레 상황을 우화 형식으로 표현한 Bear Story라는 제목의 단편 3D 애니메이션이 존재한다. 이 애니메이션은 2016 오스카상 단편 애니메이션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었고, 감독 Gabriel Osorio는 오스카 수상소감에서 "1973년 체포되어 2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던 자신의 할아버지의 실제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고 밝혔다.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 후드의 퍼즐에서는 피노체트의 쿠데타 자체가 성전 기사단의 계획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앱스테르고 사의 밥통을 차 버리려 하자 키신저와 피노체트를 이용해 쿠데타를 배후 조종했다. 다만 피노체트가 기사단원인지 아니면 그저 협력자인지는 불명이다.
2023년 넷플릭스로 나온 영화 〈공작〉[69]에서는 피노체트가 프랑스 혁명기 때부터 활동해온 진짜 뱀파이어로 나온다.[70]
5. 기타
- 피노체트 유머 시리즈란 게 유행하기도 했다.
쿠데타 직후 연설 중 피노체트 가라사대:
지금까지 우리는 낭떠러지 앞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정권의 탄압에 대한 비판에 피노체트 가라사대:조금도 독재(dictadura)였던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건 순재(dictablanda)입니다![71]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로 피노체트 가라사대:꼼짝마라! 내 허락 없인 낙엽 하나도 떨어질 수 없다!
(마당 앞에 심어둔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지지 않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음.)
(마당 앞에 심어둔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지지 않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음.)
이 말고도 많은 베리에이션이 존재한다.
- 피노키오라는 별명도 있는데, 그의 망언이 나올 때마다 코가 길어지는 연출도 빠지지 않는 모양.
- 개인적으로 마거릿 대처 총리를 좋아했는지 매년 런던을 방문하는 동안 항상 대처에게 꽃과 초콜릿 한 상자를 선물했다고 하며, 가능하면 둘이 만나서 함께 차를 마셨다고 한다.
- 1943년에 태어난 피노체트의 딸 루시아 피노체트는 아버지와 비슷한 길을 걸었는데, 친피노체트 세력들을 이끌며 정치를 하고 있으며 2006년 피노체트의 장례식에서는 "아버지는 자유의 불꽃을 태우셨다"는 말을 남기며 아버지를 찬양했다. 그녀는 국회의원 선거에 나오려다 탈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포기했지만, 2008년부터 4년간 산티아고시 비타쿠라구의 구의원을 지냈고, 임기 만료 후에는 정계에서 은퇴해 뉴욕으로 이주해서 현재까지도 뉴욕에 거주 중이라고 한다.
- Mi General Augusto Pinochet라는 제목의 피노체트 찬가도 있는데, 집회에서 연주되는 경우도 있다. 영상
- 2022년 1월 3일자 사이언스지 기사에 따르면, 1930년경에 심어진 나무에서 피노체트의 쿠데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노체트가 퇴임한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칠레는 대기 오염이 심했기 때문에 이 나무의 나이테에서 미량의 중금속이 검출되었는데, 쿠데타가 일어난 해인 1973년자 나이테는 신체제 하에서 경제 활동이 일시 중지되어 중금속이 검출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일은 시대에 따른 대기의 질을 재구성하기 위해 나무를 사용한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참고자료
- 중남미 극우 군사정권 개발독재자의 전형으로 남나 했으나 죽은 지 시간이 꽤 지난 최근에는 다른 의미로 크게 유명해졌다. 미국의 대안 우파들이 가끔 "헬리콥터에서 던지기" 드립을 치고는 하는데, 이는 피노체트가 칠레 공산주의자 등 정치범들을 헬리콥터에 태워 바다 한가운데에서 투척한 것[72]에서 유래했다. 피노체트의 정적 처형 방식이 대안 우파들 사이에서 유행어로 정착된 계기는 /pol/에서 버니 샌더스 지지자의 게시판 도배에 반감을 가진 대안 우파 4chan 유저들이 '저 샌더스빠 헬리콥터에 태워주자'라고 말한게 그 시작이면서 좌익 세력을 혐오하며 좌파, SJW, 버니 샌더스를 헬리콥터에서 내던지는 합성 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대안 우파 네티즌들이 티셔츠 주문제작 사이트에 수주 혹은 자체적으로 제작한 티셔츠들 중에 이 밈을 차용한 티셔츠도 만들었는데, Free Helicopter Rides 수제 티셔츠가 아마존닷컴에도 팔려서 물의를 일으킨 끝에 아마존닷컴에서 부랴부랴 해당 티셔츠 판매 페이지를 내렸다.
-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의견과 감정을 거의 표출하지 않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고 하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루이 14세를 존경했다고 한다. 또 피노체트는 평생 개인 도서관에 55,000권의 책을 소장했다.[73] 이 도서관의 책들은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의 친필 편지 등 칠레의 국립 도서관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한 자료들 위주였으며, 즐겨 읽던 책은 어릴 때부터 쭉 역사, 지리, 사상 관련 서적이나 사전들이었고 시나 소설 등 문학 작품들은 거의 읽지 않았다고 한다. 젊었을 적에는 손자병법을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74] 이에 대해서는 피노체트가 문화적인 소양이 결여되어 이러한 콤플렉스가 책 수집에 자극을 주었을 거라는 추측이 있다. 또한 피노체트는 편집증을 앓고 있어 암살과 권력 박탈에 대한 두려움에 늘 시달렸다고 한다.
- 정치적 악행과 무수한 망언들을 양산한 것과는 별개로 딸 루시아의 증언에 따르면 인간 피노체트는 '친절하고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또 잘 웃었는지 그의 눈 주위에 있는 많은 선들은 그의 미소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피노체트의 미소는 '갑자기 나타났지만 금방 사라졌다'고 한다. 또 막내 여동생 테레사에 따르면 '오빠는 우리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자식이었고, 오빠도 어머니를 매우 사랑했다. 오빠는 매일 일하기 전에 그녀를 방문했다. 그들은 정말 잘 지냈고 이는 평생 지속되는 유대와도 같았다.'고 한다.
- 아내인 루시아 히리아트는 성격이 어느 면에서는 남편 이상으로 악랄한 인물이었는데, 피노체트의 회고록에 따르면 쿠데타 전날에 남편에게 손주를 인질삼아 쿠데타를 부추겼으며,[75] 남편의 집권 기간 동안 공직 임명과 장관 해고에도 직접 관여했으며, 1400만 달러(약 167억원)를 들여 수도 산티아고 데 칠레가 한눈에 보이는 안데스 산기슭에 대규모 저택을 지었지만, 여론의 반대 탓에 거주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총 235만 달러를 탈세했다고 하며, 불법적으로 2700만 달러(약 300억 원)을 피노체트의 외국 은행 계좌로 빼돌렸다고 한다. 무려 63년간 결혼 생활을 한 것과 유언도 아내 관련된 말이었다는 것을 보면 아내를 굉장히 아끼는 애처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6. 같이 보기
[1] 스페인 왕위 전쟁 이후 부르봉 가문이 스페인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을 계기로, 스페인의 식민지 내 항구들이 프랑스인들에게 개방되었다.[2]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피노체트의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오귀스트 조제프 라몽 피노셰'라고 읽기도 하며, 피노체트 본인도 생전에 '피노셰'라고 불러주는 것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어권 외신에서는 '피노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3] María Lucía Hiriart Rodríguez, 1923년 12월 10일 ~ 2021년 12월 16일. 아이러니하게도 생일이 남편의 사망일이다.[4] 피노체트의 사촌의 말에 따르면 순수 군인 시절의 피노체트는 정치적 논쟁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이념적 성향이 수수께끼였다. 만약 있었다면 공개적으로 표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5] 그러나 전자는 그의 선배 장군인 그레고리오 로드리게스 타스콘(Gregorio Rodríguez Tascón, 1901-1980)이 쓴 책을 표절한 것이었다.[6] 다만 이 말은 군정 시기가 아니라 개헌 후인 1981년 10월에 남긴 한 연설에서 비롯된 말로, 더 정확히는 이미 잉카 제국의 아타우알파 황제가 1531년에 한 말이었다.[7] 후에 후술할 피노체트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다가 1978년에 해임되었다.[8] 참고로 쿠데타 직전인 1972년 당시 칠레의 자유 지수는 PR이 1이었고, CL이 2였으며 평균 자유 지수는 1.5였다.[9] 역사적으로는 칠레의 독립영웅인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와 라몬 프레이레(Ramón Freire) 단 둘만이 칠레군 원수로 진급한 바 있다. 근데 그게 각각 거의 2세기 전인 1817년, 1823년의 일이다.[10] 시노트 신부는 칠레 등 남미 여러 나라에서 반독재 투쟁에 참여한 바가 있다. 참고로 시노트 신부는 박정희 시기 대한민국에서 인민혁명당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는 이유로 조지 오글(George E. Ogle, 1929~2020) 신부와 함께 추방된 경험이 있었던 만큼 박정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라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나치 독일과도 같다"고 평했을 정도였는데, 그런 사람마저도 이런 말을 남겼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도 외국인을 대놓고 탄압한 게 전술한 두 신부의 추방과 민청학련 사건 때 일본인 2명에게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가 일본의 압박 속에 불과 10개월 만에 풀어준 것이 사실상 전부일 정도로 드물었는데, 피노체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외국인들도 단순 구금, 고문을 넘어 문자 그대로 UN 소속 외교관까지 닥치는 대로 살해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2세계와 제3세계의 기라성 같은 독재자들과 비교할 때 대한민국의 군사정권의 통치는 굉장히 '유순'한 편이었다. 당시 해외 독재자들과 비교하자면 유신 독재는 그냥 당대에 흔해빠진 개발도상국의 독재자 A 수준. 물론 이는 당대에 독재자 평균값이 매우 높았던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11] 1973년 기준[12] 이들은 여권에도 따로 표식이 있었고 칠레 입국 전에 허가를 받아야만 했으며, 당시 칠레를 떠난 약 80만 명은 쿠데타 직후와 80년대 중반의 경제 위기로 인해 이민을 선택했다.[13] 끌려가서 3일 뒤에 산티아고 공동묘지 바깥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손가락이 전부 뭉개졌으며, 잔혹한 고문 흔적과 44발의 총상이 온몸에 남아있었다.[14] 칠레 공산당원이었다.[15] 정확히는 1991년에 작성된 레틱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칠레에서의 인권탄압 피해자 27,255명 중 약 67% 이상이 1973년 9~12월에, 약 19%는 1974~1977년에, 나머지 13%는 1978~1990년에 인권탄압을 당했다고 한다.[16] 1965년에 세워진 단체인데, 이후 여러 유력 군부 인사들을 사살했다. 오늘날에도 칠레의 공산당으로 존속하고 있다.[17] 1983년에 칠레 공산당 산하로 세워진 단체다. 이쪽은 피노체트 퇴임 후에도 게릴라 운동을 지속하였으며, 미 국무부와 MI6에게 테러 단체로 규정되고 1999년에 무장 투쟁을 중단하고 지금은 칠레 공산당과 분리되어 정당으로 활동하고 있다.[18] 오늘날에는 추모 공원으로 전환된 상태다.[19] 파울 섀퍼(Paul Schäfer, 1921~2010)라는 인물로, 나치 출신이라고는 하나 2차 대전 당시에는 야전 병원에서 근무하던 의무병이었기에 전쟁 범죄와는 관련이 없었다. 진짜 문제는 전후에 설교자로 활동하며 연쇄 동성 아동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것인데, 칠레로 도피한 것도 그로 인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섀퍼가 콜로니아에 요제프 멩겔레 같은 악랄한 나치 전범들을 넣어 보호해줬다는 것과 나치 잔당들의 재산으로 무기를 밀매했다는 것 등을 감안하면 나치에 동조했다고 봐도 별 무리는 없다.[20] 참고로 이런 고문들은 옆동네인 아르헨티나 군사정권도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썼는데, 이는 남미 군사정권의 고문기술들이 CIA 요원들이 전수해 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아르헨티나의 고문 강도보다 칠레의 고문 강도가 훨씬 심했다.[21] 쿠데타 성공 이후 70년대 경제 위기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던 데다가 경제난을 해결할 전문 지식이 없던 피노체트 정권은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 이론을 따르는 미국 유학파 경제학자들을 기용했는데, 때문에 칠레에선 여러 의미로 이곳이 신자유주의의 고향이라는 말도 한다. 다만 이때 기용한 시카고 학파 재무부 장관도 고정환율제 등 삽질을 하다 정작 다른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들이 주로 요구한 변동환율제는 라이벌 케임브리지대 출신이 하게 된다.[22] 물론 이론적으로 보면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만 일컫는 게 아니기 때문에 독재정권에 붙일만한 단어는 아니긴 하다.[23] 2000년대 초 중남미를 방문한 어느 교수에 따르면 똑같이 군사독재를 겪고 똑같이 "신자유주의" 처방을 했던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운명을 가른 부분이 이 지점에 있다. 칠레는 피노체트 개인을 정점으로 한 일인독재를 수립하여 독재자 개인의 결단으로 경제정책을 강단있게 추진했기 때문에 경제정책의 과실이 고스란히 칠레 경제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반면에 아르헨티나는 군부정권과 정재계 인사들이 권력을 공유하는 과두정으로, 과두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경제정책의 과실을 서로 나눠먹었기 때문에 칠레와는 달리 개혁의 성과마저 허공으로 사라졌다고 한다.[24] 1973년 당시 실업률은 4.3%였다.[25] 참고로 당시 다른 남미 국가의 평균 GDP 성장률은 -3.2% 정도였다.[26] 실제 피노체트식 경제정책들은 비슷한 시기 또 비슷하게 군사정권들이 들어서있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등지로 수출되었는데, 나름 성과를 거두었던 칠레와는 달리, 다른 중남미 국가에선 처참하게 실패해 버렸다. 게다가 다른 나라들의 군사 정권들은 피노체트와 달리 이런 위기도 해결하지 못해 다른 지역의 군사정권은 오늘날에도 옹호의 목소리 없이 악평만 받는다.[27] 때문에 사실 칠레 경제를 이만큼 키워놓은 건 피노체트보단 민주 정권의 공이 더 크다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실제 수치로만 보면 틀린 주장은 아니고, 피노체트 기간 칠레의 기적 운운하던 학자들은 규제 철폐에 따른 금융 투기 때문에 일어난 80년대의 산업 붕괴를 고려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2007넌 당시 칠레의 실업률은 7%에 빈곤율은 18.2% 정도였는데, 둘 다 남미 지역에서는 비교적 낮은 수치였다고 한다.[28] KIEP-KOTRA 유망국가 산업연구 08-06: 칠레의 주요 산업(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8)[29] 이에 대해 비판론자들은 미국의 비합리적 경제 탄압과 역으로 비합리적 지원을 받은 정권을 비교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라 하고, 옹호론자들은 피노체트 역시 80년대 초 외채위기를 겪었기에 외부 상황이 마냥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고 옹호를 치기도 한다.[30] 당시 재정부 장관은 시카고 학파였지만, 정작 프리드먼을 위시한 다른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들은 고정환율제를 반대했고 변동환율제 이행을 촉구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시카고 학파의 주문사항을 성실하게 이행한 사람은 시카고대 출신이 아니라 케임브리지대 출신 재무장관이었다. 이 때문에 사실 칠레에서 소위 시카고 보이즈가 주류를 점하고 활약하게 된 때는 80년대 경제위기 극복 과정 이후부터란 주장도 있는데, 알아서 판단할 부분이다.[31] 참고로 이후 칠레의 물가상승률은 상승과 하락을 반복한 끝에 2021년 현재에는 3.5%로, 이는 피노체트가 집권한 해의 1/100이다.[32] 1974년부터 1990년까지 도시의 하수 처리율은 35%에서 75%로, 도시 가정의 식수 접근성은 60%에서 95%로 증가했다.[33] 지금도 복잡한 지형 때문에 대부분의 경로가 운영 중임에도 보수가 잦다고 한다.[34] 다만 경제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 카레테라아우스트랄은 무용지물에 가깝다. 카레테라아우스트랄로 칠레 본토와 칠레 남부 아이센 일대를 육로로 이었다고 하지만 애초에 그 아이센 일대에 사는 주민은 10만 남짓에 불과했다. 아이센 일대가 다도해인데다 대륙에 붙은 지역도 워낙 교통이 불편해서 주민들은 차라리 해로를 더 많이 이용한다. 카레테라아우스트랄 건설은 경제보단 정치적 시각에서 분석해야 하는데, 칠레 북쪽에서 남쪽까지 국토 전역이 도로로 이어졌다는 상징적인 성과를 내세우고 여기에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울 것이 필요했던 피노체트의 정치적 욕망이 결합된 결과라는 것이 중평이다.[35] 참고로 1986년까지의 정확한 빈곤율 수치는 불명인데, 이는 피노체트 정권 시대의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지표의 통계가 칠레 정부의 웹 사이트에서도, 유엔 등의 국제 기관의 웹 사이트에서도 나와 있지 않아 검증이 어렵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독재 정권 하의 국가적, 사회적 통계는 비공개 상태라고 한다.)[36] 사실 이는 태평양 전쟁의 영향인데, 이 전쟁으로 인해 볼리비아는 해안과 접하는 자국 영토를 잃고 내륙국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37] 칠레는 1971년 아옌데 정권시절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대만과 단교하였으나 피노체트 집권기인 1975년 산티아고 데 칠레에 대만 대표부가 설치되었고 1988년에 타이베이시에 칠레 경제 문화대표부가 설치되어 비공식교류가 빈번하게 되었다.[38] 집의 침실에서 놀다가 정체불명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39] 이 '국가 항의 날' 기간에 속하는 1년 8개월 동안은 20시부터 24시까지 통행이 금지되었다.[40] 손을 다친 이유에 대해 피노체트 본인은 '처음에는 차에서 내리려고 했는데 옆에 있는 손자가 생각나서 손으로 손자를 가리다가 총에 맞은 거다'라고 설명했다.[41] 참고로 독재자들 중에서는 초반에는 멀쩡했다가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폭압적인 정치를 행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상당히 특이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42] 그런데 정반대로 반피노체트 게릴라들은 80년대에 더욱 과격화되어 지하철역과 시내 버스들을 폭파시키는 건 그나마 양반이고, 송전탑을 폭파해 전국적인 대정전을 야기하거나, 철교를 폭파해 열차 충돌로 600여명의 사상자가 나오게 하거나, 백만장자의 11살짜리 아들을 유괴한다던가(그나마 다행히도 이 아이는 150만 달러의 몸값을 받고 풀려났다.) 심지어 병원에 폭탄을 설치해 애꿎은 64세 할머니를 죽이거나 어린아이들이 탄 버스에 황산을 던지는 등 도를 넘은 행동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물론 피노체트도 정권 내내 하던 악행들을 보면 게릴라들의 선을 넘은 행동들을 비난할 자격은 전혀 없었다.[43] 하지만 그렇다고 새로 출범한 민주정부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충분히 내보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로도 중남미에서 엄청나게 까였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경제적인 지원을 보내주기는 주었는데 그것이 구조조정과 시장 자유화를 대가로 지원을 보내준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정책을 펼친 대가로 빈부격차는 줄어들기는커녕 되려 늘어나서 빈민층들은 상당기간 동안 민주화의 혜택은커녕 그 이전과 별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생활을 누려야 했다. 다만 미국은행들이 중남미 국가들과 동유럽 국가, 아프리카 국가들이 고이율로 빚을 못갚게 되면서 여러모로 채권회수가 난감했던 참이고 미국정부 자체도 대규모 감세로 인해 쌍둥이 적자에 시달렸던 때라서 여유가 없었던 걸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전 군사독재정권 때 좌파 때려잡으라고 대대적인 경제적인 지원을 내보냈던 걸 생각하면 까일 수밖에 없었기는 했다.[44] 피노체트가 만든 헌법에 따른 것이다. 칠레는 사실 아직도 상당 부분 피노체트 헌법을 따르고 있다. 이는 반 피노체트파가 20년간 장기집권했어도 의회 개헌선까지는 넘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교하긴 어렵지만 이탈리아도 전임 대통령이 종신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다. 다만 이탈리아 대통령은 의원내각제라는 국가 특성 상 국군통수권과 국회 해산권을 제외하면 사실상 명예직에 불과하다.[45] 1973년과 1979년 사이에 저지른 정치 범죄를 모조리 사면했다.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사면한 것이다![46] 1970년대 초반 당시에는 우파정권의 당수로서 사회당 지도자였던 아옌데의 정적으로 손꼽히던 인물이었지만, 피노체트의 독재가 시작되자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고 좌파, 민주화 세력과 연대하기 시작하면서 피노체트와 각을 세우게 된다.[47] 한국도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이런 꼴이 났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1987년, 1992년 대선 당시 군의 개입설 등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던걸 보면, 김영삼이 1994년~1996년 사이 하나회와 민정계를 아예 숙청시킨 것이 정의구현뿐만 아니라 군의 문민통제 확립이라는, 신의 한 수가 된 셈.[48] 반정부 인사들을 스페인 대사관으로 피신시킨 스페인-칠레 UN 외교관 카르멜로 소리아(Carmelo Soria, 1921~1976)를 DINA(칠레 보안군)가 납치해서 고문하고 살해한 뒤 시체를 차에 태운 뒤 절벽에서 떨어뜨려 운하에 침몰시키고는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망'으로 조작했다. 이를 근거로 '정의감이 넘치는' 한 판사와 검사가 수동적 속인주의를 근거로 피노체트에 대한 영장을 발부했고 집행했다.[49] 2009년 이전까지 영국은 귀족원(상원)이 대법원의 역할도 수행했다.[50] 당시 전 세계의 인권운동가들은 사악한 국가 지도자들이 더 이상 자신이 조작한 법률 뒤로 숨을 수 없게 되는 선례가 생기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칠레의 좌파들도 "잘됐네. 이대로 영원히 칠레에 돌아오지 마라"라는 입장이 대다수였다. 다만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리카르도 라고스는 독재자를 우리 법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현실에 한탄하였다고 한다.[51] 이런 배경에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공식적으로 피노체트의 칠레는 중립이었지만 개전초 아르헨티나군의 공습 출격을 영국에 알려준다거나 영국 전투기 폭격기 편대가 칠레 공군기지에 대기하도록 허용해 아르헨티나 공군전력을 분산한다거나 하는 등의 지원으로 영국이 승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런 이유로 피노체트와 마가렛 대처의 보수당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블레어의 노동당 집권기에 체포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역시 석방되었다. 독재 이후 1999년까지는 기독사회당, 2000년부터 2009년까지는 사회당이 집권하던 시기이다. 두 당 모두 중도좌파 성향의 당이지만 군을 중심으로 하는 피노체트의 세력은 당시에도 막강한 권력을 유지 중이었고 군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으로도 여전히 큰 지지 세력을 보유 중이었다. 그 권력은 피노체트 사망까지도 이어지고 사망한 이후 현재까지도 그 유족들과 지지 세력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52] 참고로 피노체트는 저 기적(?)을 벌인지 1달도 채우지 못하고 죽었다.[53] 아이러니하게도 이날은 세계 인권의 날이자 아내의 생일이었다.[54] 물론 칠레에서는 '죽음의 천사'라고 비꼬는 반응이 많았다고 한다.[55] 피노체트는 이외에도 "인권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매우 현명한 발명품이다.", "인권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망각이다."라는 말도 남겼으며, 자신의 인권 탄압으로 인한 희생자들에게 사과할 거냐는 질문에 "용서를 구하라? 용서를 구하게 하라."는 막말도 남기기도 했다. 여담으로 피노체트의 변호사도 유유상종인지 1999년 1월에 고문은 반인도적 범죄가 아니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겼다.[56] 그들은 피노체트 사진 위에 ‘INMORTAL’(불사)라는 글씨를 보이면서 피노체트를 영원히 죽지 않는 신으로 믿고 있었다고 취재진들은 증언했다.[57] 피노체트가 정권을 잡은 뒤 죽인 공산당원 수는 1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58] 페로(perro)가 스페인어로 "개"라는 뜻이다. 즉 perro와 pinochet의 합성어.[59] 한국으로 치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옹호론자들이 '전 장군님', '엔젤두환'(다만 이 용어는 은근히 비꼬는 의미도 담겨있다.), 비판론자들이 '전대갈', '전대가리'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전대가리라는 용어는 청년기 유시민이 감옥에 잡혀가면서 "전대가리 깨져라"라고 외치면서 유행화 및 보편화되었다.[60] 피노체트가 경제 성장과는 별개로 잔혹하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국민들을 학살하고 자국의 정치에 방해된다면 외국인들까지 서방 국가들의 암묵적 허락 속에 납치 후 살해하는 정치 테러로 악명이 높았다면 스탈린은 의심되는 사람들을 기계적으로 학살하고 이후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 계층을 굴라크로 보내서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써먹었다. 스케일의 차이가 있지만 이 둘 모두 학살을 하기는 했으나 전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확실한 업적이 있어서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지지 계층이 상당하다는 공통점이 있다.[61] 호자의 경우 학정의 수위로만 보면 피노체트와 비슷하거나 더 심하고, 국가를 지나치게 쇄국 정책으로 틀어막은 탓에 경제 발전은 못했으나 국가를 내부적으로 경영하는데 성공해 나름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기반을 만들어서 현대 알바니아인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나 좋은 평을 받는다. 피노체트의 경우 부정평가가 대체로 우세하나, 호자는 박정희처럼 긍정평가가 더 우세하다.[62] 예외적으로 볼리비아에서는 군부 독재자였던 우고 반세르 수아레스가 선거를 통해 복귀한 적이 있기는 했다. 1970년대 볼리비아가 여러 명의 군사독재자들이 쿠데타를 수시로 일으키던 혼란스러운 시기였기는 해도 경제적으로는 자원값 상승으로 그나마 제법 윤택했던 시기였었기 때문에 향수가 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대에 직면한 경제위기를 해결하지 못 했고, 2000년대 중반 이후로 에보 모랄레스 집권 이후로 어느 정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하면서 없던 일이 되다시피했다.[63] 이는 넷플릭스 드라마 나르코스에서도 등장하는 장면이다.[64] 참고로 이 조사에서 나머지 15%는 무응답이었다. 참고로 이 조사에서 아옌데를 좋게 평가하는 의견은 20%,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의견은 20%,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31%, 무응답은 29%였다.[65] 2008년 조사한 위대한 칠레인 목록에서 피노체트에 의해 죽음을 맞았던 살바도르 아옌데는 1등을 차지한 반면, 피노체트 본인은 순위권 밖에 있으니, 실제로 칠레인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4위와 9위를 차지한 빅토르 하라와 파블로 네루다도 반피노체트 운동을 펼쳤다.[66] 이후 2019년에 브라질의 대통령으로 당선된다.[67] 여기서 '치노(chino)'는 중국인을 의미하는데, 정작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성씨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듯 일본계이지만, 여기서는 한국의 양키 같은 느낌으로 치노가 쓰였다고 보면 된다.[68] 물론 칠레 본국에서 제작할 수는 없으니, 해외에서 제작된 매체물이 대부분이다.[69]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촬영상 후보에도 올랐다.[70] 실제 피노체트의 면모를 반영해놓은 설정이 꽤 있는데 루이 14세를 존경한 건 젊을 때 프랑스 왕정을 모시는 군인이라서 그렇고, 흡혈귀라는 설정은 그의 멸칭 중 하나에서 따왔다든지 등등.[71] 스페인어로 독재는 dictadura인데, 하필 끝부분이 형용사 dura(단단한, 강고한, 혹독한)와 철자가 같다보니, 이걸 반의어인 blanda(부드러운, 유약한, 온순한)로 바꾼 말장난이며, 1930년대 스페인의 프리모 데 리베라 정권 이래 스페인어권에서 약간 느슨한 독재체제를 지칭하는 의미로 곧잘 쓰여온 표현이다.[72] 동시대 옆나라 아르헨티나도 독재자 비델라가 똑같은 걸 했다. 이쪽은 컨테이너에 사람들을 가둬서 비행기로 투척하는 건데, 도구가 비행기냐 헬리콥터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을 바다에 던져 죽인다는 비윤리적 살인의 끝판왕이라는 게 중요하다.[73] 2006~2007년 화폐 가치로 2,840,000달러이다.[74] 물론 피노체트도 이렇게 많은 책들을 다 읽지 못했으며, 아예 읽어보지도 않은 책들이 가득찬 상자들도 많았다고 한다.[75] 피노체트는 쿠데타 하루 전에 쿠데타가 실패하면 도피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국경 인근에서 밤을 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