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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01:33:06

이오시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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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인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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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d700> 국가원수
<rowcolor=#ffd700> 소비에트대회 중앙집행위원회 주석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초대 초대 제2대 제3대
미하일 칼리닌 미하일 칼리닌 니콜라이 시베르니크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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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제5대 제6대 제7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아나스타스 미코얀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rowcolor=#ffd700>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제8대 제9대 제10대 제1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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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d700> 소련 최고회의 주석 소비에트 연방 대통령
초대 초대
미하일 고르바초프 미하일 고르바초프
<rowcolor=#ffd700> 정부수반
<rowcolor=#ffd700> 소련 인민위원장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블라디미르 레닌 알렉세이 리코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이오시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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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제5대 제6대 제7대
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말렌코프 니콜라이 불가닌 니키타 흐루쇼프
<rowcolor=#ffd700> 소련 장관회의 주석 소비에트 연방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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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d700> 서기장
<rowcolor=#ffd700>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술서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주석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책임서기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옐레나 스타소바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옐레나 스타소바 니콜라이 크레스틴스키
<rowcolor=#ffd700>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책임서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이오시프 스탈린 니키타 흐루쇼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rowcolor=#ffd700>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제8대 제9대 제10대 제11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넨코 미하일 고르바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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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e400> 육해군인민위원 (1917-1934)
<rowcolor=#ffe400> 초대 제2대 제3대
평의회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 레프 트로츠키
<rowcolor=#ffe400> 제4대 제5대
미하일 프룬제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rowcolor=#ffe400> 국방인민위원 (1934-1946) 해군인민위원 (1937-1946)
<rowcolor=#ffe400> 초대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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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e400> 제2대 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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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e400> 제3대 제3대
이오시프 스탈린 미하일 프리놉스키
제4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rowcolor=#ffe400> 군무인민위원 (1946)
<rowcolor=#ffe400> 초대
이오시프 스탈린
<rowcolor=#ffe400> 군무장관 (1946-1950)
<rowcolor=#ffe400> 초대 제2대 제3대
이오시프 스탈린 니콜라이 불가닌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rowcolor=#ffe400> 전쟁장관 (1950-1953) 해군장관 (1950-1953)
<rowcolor=#ffe400> 초대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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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e400> 제2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rowcolor=#ffe400> 국방장관 (1953-1991)
<rowcolor=#ffe400>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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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우스티노프 세르게이 소콜로프 드미트리 야조프 예브게니 샤포시니코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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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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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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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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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P : 정치장교, AD : 방공군, SRF : 전략로켓군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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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국 주요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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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러시아 국영방송 로시야 1이 러시아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러시아인’을 선정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해 투표가 진행됐으며 러시아 인구 1억 4,300만 명 중 5천만 명 이상이 투표에 참가했다.
1위2위3위4위
알렉산드르 넵스키 표트르 스톨리핀 이오시프 스탈린 알렉산드르 푸시킨
5위6위7위8위
표트르 대제 블라디미르 레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9위10위11위12위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이반 4세 예카테리나 2세 알렉산드르 2세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wiki style="margin: -12px 0px; word-break: keep-all"<tablebordercolor=#e90606> 파일:타임지 로고 화이트.svg 올해의 인물 (1930년대)
Time Person of the Year 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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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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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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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937년

1938년
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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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Person of the Year 194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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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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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투하종전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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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авалеры ордена «Побед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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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장 수훈자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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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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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주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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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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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안토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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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코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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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온 말리놉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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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릴 메레츠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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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로코솝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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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묜 티모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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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톨부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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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트 고보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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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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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로 몽고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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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우 롤라지미에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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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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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프 브로즈 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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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초대 서기장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Joseph Vissarionovich Stalin
파일:이오시프 스탈린_흑백 사진 4.png
<colcolor=#ffe400,#ffe300> 출생 1878년 12월 18일[1]
러시아 제국 티플리스현[2] 고리
(現 조지아 시다카르틀리주 고리시)
사망 1953년 3월 5일 (향년 74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주 쿤체보군 볼린스코예
(現 러시아 모스크바 연방시 서부 행정구 쿤체보구)[3]
재임기간 초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서기장
1922년 4월 3일 ~ 1952년 10월 16일[4]
제4대 소련 인민위원장
1941년 5월 6일 ~ 1946년 3월 15일
제4대 소련 장관회의 주석
1946년 3월 19일 ~ 1953년 3월 5일
서명 파일:이오시프 스탈린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본명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
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Ioseb Besarionis dzе Jughashvili
부모 부친 베사리온 이바네스 제 주가슈빌리
모친 케케 겔라제
형제자매[5] 큰형 미헤일 주가슈빌리
작은형 기오르기 주가슈빌리
배우자 카토 스바니제 (1906–1907, 사별)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1919–1932, 사별)
자녀 장남 야코프 주가슈빌리
차남 바실리 스탈린
장녀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양자 아르툠 세르게예프[6]
학력 트빌리시 신학교 (중퇴)
종교 정교회 (조지아 정교회)무종교 (무신론)[7]
신체 165cm,[8] A형
소속 정당
[[소련 공산당|]]
주요 서훈 소비에트 연방 영웅
사회주의노력영웅
전승훈장 (2회)
레닌훈장 (3회)
적기훈장 (3회)
수보로프 훈장 1등급
}}}}}}}}}
1. 개요2. 생애3. 평가4. 당대 각국 정상들과의 관계5. 가족사
5.1. 아내들5.2. 장남 야코프 주가슈빌리5.3. 차남 바실리 스탈린5.4. 장녀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5.5. 사생아 설
6. 인명 표기7. 여담8. 스탈린을 다룬 저작
8.1. 국내 정발된 저작8.2. 국내 비정발 저작
9. 매체에서10. 스탈린주의11.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12. 어록13. 소속 정당14.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소련정치인이자 독재자. 1922년부터 1952년까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을 지내면서 30년 동안 소비에트 연방 제2대 최고지도자를 지냈으며, 1946년부터 1953년까지 소련 장관회의 주석에 재임했다.

블라디미르 레닌 휘하에서 러시아 혁명에 동참해 러시아 제국을 전복하고 소비에트 연방을 건국하는 데 일조한 볼셰비키 출신이다. 레닌 사후 권력을 잡아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되었고, 1930년대 이후 자신의 일인 독재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대숙청 등으로 자국민 수천만 명을 학살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 시절 낙후된 농업 사회 기반의 소련을 5개년 계획으로 중공업과 화학공업 위주의 공업 국가로 전환시켜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과의 독소전쟁을 소련의 승리로 이끌어 초강대국으로 도약시키는 동시에 종전 후엔 미국과의 냉전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중공업 최우선정책은 지금까지도 러시아 경제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부진한 경공업이라는 허점을 남겼다. 북한 김일성의 대남 적화통일 야욕을 용인하여 6.25 전쟁을 발발케 한 책임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는 등 극단적인 명암이 존재하는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강철의 대원수 혹은 그루지야의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그가 정립한 레닌주의 계열 사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전 세계의 공산주의 혁명가들에게 스탈린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지며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오시프 스탈린/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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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3. 평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오시프 스탈린/평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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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당대 각국 정상들과의 관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이오시프 스탈린/각국 정상들과의 관계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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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족사

파일:JJhtv48.jpg

5.1. 아내들

파일:에카테리나스바니제.jpg
파일:나데즈다알릴루예바.jpg
스탈린에게 아내가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인데 소련 관영매체는 나데즈다의 사망을 알리면서 처음으로 스탈린에게 아내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사망 원인은 공표되지 않았으나 NKVD는 나데즈다가 맹장염으로 죽었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렸다.

5.2. 장남 야코프 주가슈빌리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야코프 주가슈빌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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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차남 바실리 스탈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바실리 스탈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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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장녀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

파일:알릴루예바.jpg
말년의 알릴루예바

스베틀라나 이오시포브나 알릴루예바(Светла́на Ио́сифовна Аллилу́ева, 1926년 2월 28일 ~ 2011년 11월 22일)[10]는 스탈린의 후처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Надежда Аллилуева)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스탈린 생전에는 바실리 스탈린과 같이 스베틀라나 스탈리나(Светлана Сталина)라고 불렸지만, 스탈린 사후에는 어머니의 성씨인 알릴루예바(Аллилуева)로 바꿨다.

어린 시절에는 고명딸이라는 이유로 스탈린에게 귀여움을 받고 자랐고, 성장한 후에는 소련 최고의 대학인 모스크바 대학에 진학했다. 언어에 재능을 보여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가 매우 유창했고[11], 이를 통해 번역가 겸 교수로 일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처음에는 매우 좋았지만 첫사랑이었던 알렉세이 카플레르와 관련된 사건으로 틀어졌다. 알렉세이 카플레르는 작가로 스베틀라나보다 나이가 두 배 많고, 유대인인 데다[12] 서방 문물을 밀수해서 즐겨 보는 불온분자였다. 스탈린은 경호대장 블라시크를 통해 딸에게서 꺼지라 경고했지만 카플레르는 강경하게 거절했다.

이후 카플레르는 스탈린에 의해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종군기자로 파견됐지만 살아돌아와서 다시 스베틀라나와 연애를 했다. 결국 스탈린은 카플레르를 굴라그로 보내버리고, 스베틀라나를 불러 카플레르가 영국 스파이라고 말하며 그동안의 도청기록을 보여주었다. 스베틀라나는 자신은 카플레르를 사랑한다며 울었고, 스탈린은 스베틀라나의 뺨을 후려갈기고 '지금은 전시인데 넌 너무 약해빠졌다'고 비난했다. 스베틀라나는 자서전에서 이때부터 아버지와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후 스베틀라나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아들 세르고 베리야와 연애를 해서 스탈린의 눈밖에 났고 스탈린의 불만을 알아챈 베리야가 세르고에게 "스베틀라나는 너에게 감정이 없으니 접어라."라고 말해 관계가 끝났다. 그 뒤로도 스탈린이 탐탁찮아하던 야코프의 친구 그리고리 모로조프와 만나 결혼했다. 스탈린은 결혼에 반대는 하지 않았지만 사위를 자신의 별장에 초대하지 않는 방식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얼마 안 가 스베틀라나는 모로조프와 이혼했고, 스탈린이 사후 독재자로 격하당하자 자신의 성인 스탈리나를 어머니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의 성에서 따온 알릴루예바로 바꾸었다. 이후 아버지의 심복이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아들 유리 즈다노프와 두 번째로 결혼했으나 자식을 낳고 얼마 안 가 이혼했다.

이후 인도공산주의자와 동거하다가 그가 병사하자 각지를 거친 끝에[13] 1967년 미국으로 망명해[14] '나의 아버지 스탈린'이라는 글을 써 큰 돈을 벌고, 세 번째 남편 윌리엄 피터스를 만나 '라나 피터스(Lana Peters)'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둘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사기와 사업 실패로 인해 재산을 탕진하고, 본인 주장에 의하면 CIA에 의해 감시를 당하는 등 악재가 겹쳐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1984년 두 명의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딸이 있는 소련으로 다시 귀국해 소련 국적을 회복한 후,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미국에서 하루도 자유로운 날이 없었다." 라고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난했다. 그러나 2년도 못 돼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고, 1980년대 말에는 영국에서 잠시 살다가, 말년에는 미국의 위스콘신주의 소도시 리칠랜드센터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피해 고립된 생활을 하다 2011년 11월,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사망 1년 전, 미국 일간지 위스콘신 스테이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어딜 가든 나는 아버지의 이름 아래 정치범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말을 남겼다.

''책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공산주의자가 되고 몸으로 공산주의를 배우면 반공주의자가 된다"는 말을 남겼다는 소문이 도는데, 실제로 스베틀라나가 그런 말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스베틀라나가 스탈린의 딸임에도 소련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점에서 착안해 다른 반체제 인사들의 유사한 발언을 갖다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친오빠인 바실리 스탈린과는 사이가 나빴지만 나이 차가 큰 이복오빠인 야코프 주가슈빌리와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야코프의 아들이자 강경파 스탈린주의자였던 조카 예브게니 주가슈빌리(1936년 ~ 2016년)와는 관계가 그야말로 원수 지간이라 고모 스베틀라나가 죽을 때까지 예브게니는 자신의 고모를 배신자이자 패륜아라고 욕했으며 장례식 참석은 물론이고 추모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5.5. 사생아 설

스탈린이 권력을 얻기 전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사생아 여럿을 두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중에는 자신이 조선에서 태어난 손자 유리 다비도프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있다. 이 인물은 현재 노보쿠즈네츠 지역의 건설기술업자로 살고 있으며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시베리아 쿠레이카 마을에서 혼외 정사로 자신의 아버지 알렉산드르가 태어났다. 이후 스탈린은 금방 떠났고, 증조모는 마을에 살던 '다비도프'란 성을 가진 남성에게 시집가 알렉산드르 다비도프란 이름으로 자랐다. 시간이 흘러 스탈린은 아들을 모스크바로 부르려 했으나 증조모가 반대했다."

그리고 1941년 자신의 아버지가 모스크바 전투에 참가했으며, 이후 일본군의 침공을 대비해 극동지방으로 부대가 이동하면서 "한반도 해방전투(만주 작전)"에 참가했고, 1948년 4월 22일에 조선에서 아들인 자신을 보았다는 것, 이후 1955년 노보쿠즈네츠크에 영구적으로 정착했다고 주장한다. # 콤소몰스카야 프라프다 러시아신문의 보도.

또한 러시아 대중역사가 에드바르트 라진스키(Эдвард Радзинский)[15]의 주장에 따르면, 두번째 아내 알릴루예바가 사망한 한 뒤로는 가정부였던 발렌티나 이스토미나와 사실혼 관계였고, 슬하에 두명의 사생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라진스키는 학계에서 스탈린을 무근거 비판해 역풍을 맞은 볼코고노프조차 스탈린을 부분적으로 옹호하는 회색분자라고 욕하는 극단적 반 스탈린주의자로 평가되며, 대중의 관심을 끌기위해 자신의 뇌피셜을 가미하는 행동으로 유명하니 일부 걸러 들어야 한다.

6. 인명 표기


조지아어 초명은 '이오세브 베사리오니스 제 주가슈빌리(იოსებ 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 ძე ჯუღაშვილი, Ioseb Besarionis dze Jughashvili)'이다.[17] 조지아어로 '제(ძე)'는 '아들'이라는 의미이고, '베사리오니스(ბესარიონის)'는 부칭(父稱)인 베사리온(ბესარიონი)에 관형격 조사가 붙은 형태이다.

조지아어 표기를 러시아어로 바꾸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슈빌리(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Джугашвили, Iosif Vissarionovich Dzhugashvili)가 된다. 이오시프의 두 아들인 야코프 주가슈빌리바실리 스탈린의 본명 바실리 주가슈빌리의 성이 주가슈빌리인 이유가 이 때문이다.

영미권에서는 '이오시프'의 영어 표기인 조셉 스탈린(Joseph Stalin)으로 부르는 사람도 제법 있으니 참고하자. 주로 영미권 제작 2차대전 관련 다큐멘터리 등지에서 이 이름으로 자주 나온다.

가명으로 코바(კობა)가 있는데, 조지아 스테판츠민다 출신의 작가인 알레크산드레 카즈베기(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ყაზბეგი, 1848년 1월 23일 ~ 1893년 12월 22일)가 쓴 소설 《아버지 살인(მამის მკვლელი, 마미스 므크블렐리)》의 주인공 코바에서 따왔다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일종의 로빈 후드 같은 인물이다. 스탈린의 친구이자 혁명동지였던 니콜라이 부하린은 숙청으로 처형 직전에 "코바, 왜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Коба, зачем тебе нужна моя смерть?)라는 마지막 전문을 보냈다고 한다.[18][19] 이를 보아 주변인들은 그에게 애칭으로 자주 쓴 모양이다. 레닌이 다른 사람들에게 스탈린의 성을 물을 때 레닌은 그를 코바라고 불렀다.

그 밖에도 '랴보이'(Рябой, 마맛자국)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아 마맛자국이 있었기 때문. '가이오즈 니자라제(გაიოზ ნიჟარაძე, Gaioz Nizharadze)'라는 별칭도 조금 쓰였다.

또 여러 번 쓰인 가명인 베소와 베소시빌리라는 이름은 자신의 아버지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동네 친구나 가족들은 그를 소소라고 불렀다.

그 외에도 여러 가명과 작가로서의 필명을 사용했다. 문필가로서 작품을 발표할 땐 소셀로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페트로프, 이바노비치, 갈리아시빌리, 세묜 즈벨라야, K. 카토, 곰보 오스카, 오시프 코바, 괴짜 오시프, 캅카스인, 우유장수, 곰보, 게자(절름발이), 쿤쿨라(비틀거리는 사람), 코바 신부 등 이것저것 많이 쓴 것을 알 수 있다. 나중엔 그의 캅카스적 정체성을 대표해주는 코바의 사용 빈도가 늘긴 하지만.

그래도 가장 유명한 별명은 스탈린으로 스탈(сталь)은 러시아어로 '강철'을 뜻하며 스탈린은 러시아어 소유접미사가 붙은 성씨 형태이다. 그 때문에 스탈린은 강철의 대원수라는 이명으로 불리게 된다. 몇몇 미국매체에서 이 인물을 패러디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 이오시프 스탈린의 이름을 번안하여 존 스틸(John Steel)로 쓰는 경우도 있다.

성씨 스탈린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스탈린 본인은 "동지들이 나에게 그 이름을 주었다."고 말했지만 바쿠에서 사귀었던 여자친구 류드밀라 스탈이 지어준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스탈린의 평생 심복이었던 몰로토프는 "그건 그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수없이 많은 가명 중에서 본격적으로 '스탈린'의 사용빈도가 늘어나는 것은 스탈린을 당내에서 유명하게 만들어준 저작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 문제(Марксизм и национальный вопрос)》에 필명으로 이 이름을 쓴 이후부터다.

비밀문서의 서명은 필리포프(Филиппов, Filippov)라는 가명을 썼다.

7. 여담

바이바코프 동지, 배신자 히틀러가 카프카스를 향해 돌진하고 있소!

는 카프카스를 손에 넣지 못하면 전쟁에서 진다고 선언했지. 따라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석유가 독일군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하오. 명심하시오!

석유가 한 방울이라도 독일군 손에 들어가면 당신은 총살이오. 하지만 너무 서둘러 유전을 파괴해서 독일군도 석유를 얻지 못하고 우리도 연료를 얻지 못한다면, 그때도 당신은 총살이오.[41]
파일:external/totalitarism.ru/stalin_icon_large.jpg
* 스탈린의 이콘

파일:mausolee_lenine_staline.jpg* 사후에 레닌과 마찬가지로 엠버밍 처리되어 훗날의 김정일 마냥 붉은 광장레닌 영묘에 합장되었으나,[47]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후에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석방된 도라 라주르키나라는 나이 많은 볼셰비키가 크렘린에서 "꿈에 레닌이 찾아왔는데 스탈린 보고 방 빼랍니다."라고 연설을 하자 스탈린을 빼는 것이 심각하게 고려되었다. 결국 시신은 화장되어 레닌 영묘 바로 뒤에 있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됐다. 모욕하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방부 처리를 중단한 후, 바로 화장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 바람에 스탈린의 시체가 많이 부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크렘린 벽 묘지도 국가에 기여한 인물들에만 수여되는 상당한 영예인데,[48] 스탈린의 업적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급진적이라는 평을 받는 20차 전당대회 연설에서조차 시도되지 않은 것이다. 이후 1970년 브레즈네프 집권기에 흉상이 제작되어 벽 묘지 앞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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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탈린의 동상은 1960년대 초중반에 걸쳐 대부분이 철거되었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철거가 중단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조지아에서 스탈린이 조지아 출신에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동상 수십개가 제작된 시절이 있었다. 위 사진과 같이 모스크바 크렘린 벽 묘지에는 스탈린의 석상이 하나 남아있으며, 그의 고향인 조지아 고리 시청 앞의 거대 동상은 철거되었으나 스탈린 박물관[49] 내에도 또 다른 스탈린의 동상이 있고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 전투 파노라마 박물관에도 버젓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도 스탈린의 벽 묘지 앞에는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참배객들이 매일 찾아와서 꽃을 놓고 간다고 한다.
Стаљину
прекини са слањем људи да ме убију. Ухватили смо их већ пет, једног од њих са бомбом, другог са пушком... ако не престанеш слати убице, ја ћу послати једног у Москву и нећу морати да шаљем другог.
스탈린 씨에게
이제 날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벌써 다섯 명을 체포했는데, 하나는 폭탄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는 소총을 가지고 있었더군요... 만일 또 다시 살인자를 보낸다면, 그때는 내가 모스크바로 하나 보낼 건데, 나는 두번 보낼 필요는 없을 겁니다.[57]
Коба, зачем тебе нужна моя смерть?
코바, 어째서 나의 죽음을 원하는 거지?
Уважаемый т. Сталин,
Вы имели грубость позвать мою жену к телефону и обругать ее. Хотя она Вам и выразила согласие забыть сказанное, но тем не менее этот факт стал известен через нее же Зиновьеву и Каменеву. Я не намерен забывать так легко то, что против меня сделано, а нечего и говорить, что сделанное против жены я считаю сделанным и против меня. Поэтому прошу Вас взвесить, согласны ли Вы взять сказанное назад и извиниться или предпочитаете порвать между нами отношения.
С уважением, Ленин.
5-го марта 1923 года.
존경하는 스탈린 동지.
당신은 내 아내에게 전화하여 욕설을 하는 무례를 범했소. 비록 아내가 그 일을 잊자는 당신의 말에 동의했을지라도, 이 사실은 그녀에 의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게 알려졌소. 나는 내게 적대적인 행위를 그렇게 쉽게 잊을 생각이 없는데, 아내에게 적대적인 행위는 내게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소. 그러므로 동지에게 청하건대, 동지가 했던 말을 취소하고 사과하든가, 아니면 우리 사이를 끝내는 것을 선택하든가를 저울질해보기 바라오.
경의를 표하며, 블라디미르 레닌.
1923년 3월 5일
각각의 편지에 관해 로버트 서비스는 티토의 편지를 보관한 이유는 배짱이 마음에 들어서, 부하린의 편지는 애정 때문이 아니라[58] 부하린을 숙청할 때의 만족감을 되새기기 위해서, 레닌의 편지는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였을 거라고 평했다.
이에 관해 티토와 레닌의 편지는 대부분이 서비스의 평에 동의하지만, 부하린의 경우에는 스탈린이 부하린의 유언만 보관한 것이 아니라 굳이 보관할 이유가 없었던 회고록도 같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서비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로버트 서비스가 '부하린에 대한 스탈린의 애정 때문이라는 평가를 거부했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 스탈린이 이 편지를 굳이 간직한 이유는 부하린에 대한 특별한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부하린은 스탈린과 매우 절친한 친구이자 혁명 동지였으며, 편지에 나오듯이 죽임을 당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분노나 억울함을 호소하기 보다는 왜 굳이 나를 죽이려 하냐는 당혹감을 보일 정도였다.
애정 설의 논거는 부하린을 숙청했을 당시의 만족감을 되새기는 용도로는 유언장 하나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도 아닌 부하린이 선택된 이유는 바로 정치국 내 주요 경쟁자들을 하나씩 쓰러트리며 절대권력을 향해 달려가던 스탈린의 행보에서 마지막으로 쓰러트린 적이 바로 부하린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레닌의 편지에 대해서는 흐루쇼프의 회고록에도 언급되는데 스탈린이 죽은 후 서랍에서 그 편지가 나온 것을 보고 정말 놀랐으며 스탈린이 그걸 끝까지 보관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고 써놨다. 그리고 스탈린이 아마도 그 편지를 없애버리지 않은게 그 편지의 존재를 까먹어서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남겼다.
스탈린의 죽음을 다루면서 관련 도시전설과 야사들을 거의 다 써먹은 블랙 코미디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에서는 이를 좀 더 각색해서 마리아가 '당신은 조국을 배신하고 인민을 짓밟았다. 이 폭군아.'라고 대놓고 독설하고, 스탈린은 이 편지를 읽고 기가 막혀서 실소하다가 쓰러져 죽는다.

8. 스탈린을 다룬 저작

8.1. 국내 정발된 저작

8.2. 국내 비정발 저작

9.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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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스탈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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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스탈린의 이름을 딴 지명

대부분은 1961년에 스탈린이 격하된 이후로 원래 이름으로 다시 개명된다.

12. 어록

이중에는 실제 스탈린이 했는지 의심스러운 출처가 없는 말들이 있으니 유념하고 보길 바람.
"나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당의 결정을 따르는 일꾼일 뿐이죠."
ㅡ 1931년 영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현대군은 공격부대다. 붉은 군대는 현대군이다!"

"히틀러라는 친구 굉장해! 정적은 그렇게 다뤄야 해!!"
ㅡ 1934년 장검의 밤 소식을 듣고[출처1]

"지도자들은 왔다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인민들은 남습니다. 오직 인민만이 영원합니다."
ㅡ 1937년 대숙청 중 연설

"현명한 자는 보는 걸 믿고 겁쟁이는 믿는 걸 본다."

"정직한 외교관은 나무로 만든 철이나 마른 물과 같다."[출처2]

"어떤 나라의 외무장관이 평화 협정에서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계 평화를 지키겠다고 말한다면, 그 시간에 본국에서는 최신 군함과 전투기들을 만들고 있다고 보면 된다."[출처3]

"감사하는 마음은 개나 앓는 질병이다."[출처4]
또는 "예의나 배려는 개나 앓는 질병이다." 라고도 전해진다. 정작 스탈린은 별에별 시시콜콜한 호의도 잊지 않고 모두 갚아주고,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물론 악감정 역시 사소한 것까지도 되갚았다.
"우리의 적들이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다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직접 해버리면 된다."[출처5]

트로츠키는 이 말을 카메네프가 스탈린, 펠릭스 제르진스키와의 대화 내용을 말해준 것을 회상한 것이라고 했다.
"교황이라! 그런데 교황은 몇 개 사단이나 갖고 있답니까?"
1935년에 프랑스 외무장관 라발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회담하다 "소련에서 종교 탄압이 줄면 저희가 교황과 일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하자 스탈린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출처들] 이 말의 출처는 윈스턴 처칠인데, 처칠은 라발이 뭐라 답했는진 모르지만 열병식에 보이지 않는 종류의 군단(legion)이 있다고 답했을 것이라 추측해 적었다. 이는 극단적인 관념론적 존재인 교황과 반대되는 극단적 유물론자인 공산주의적 반종교주의자의 관점을 한 마디로 보여준다.
"내가 죽고 나면 사람들은 내 무덤에 쓰레기를 집어던지겠지만, 결국 역사의 바람이 그 쓰레기들을 전부 쓸어낼 것이다."[출처7]
몰로토프와 대화를 나누다 나온 말이라고 한다. 여담으로 스탈린 사후 그의 평가는 진짜 저 말대로 되었다.[78][79]
"표를 던지는 사람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다. 표를 세는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출처8]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러시아는 몽골의 칸에게 패하고, 터키의 파샤에게 패하고, 스웨덴의 봉건 영주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주들에게 패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에게 패하고, 일본 남작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가 뒤떨어진 탓에 모든 사람에게 패했습니다. 군사적으로 뒤떨어져서, 농업이 뒤떨어져서 패했습니다. 그들이 러시아를 친 것은 그게 이익이 되고 그러고도 무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혁명 전의 시인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비참하다, 너는 풍요롭다, 너는 강력하다, 너는 무력하다, 나의 조국 러시아여.'"
- 1931년 2월 5일 산업 관리와 경영자 협의회에서 한 연설[출처]

"이탈리아 파시즘이나 독일의 국가사회주의는 그러한 소비에트 사회주의와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로 공장, 토지, 은행, 운송수단 등의 사적 소유권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자본주의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 1936년 4월, Roy W.Howard와의 인터뷰

"인류 역사상 무적의 군대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1941년 7월 3일, 라디오 연설에서.

"붉은 군대에서는 전진할 때보다 후퇴할 때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 당시 미국 대사 Averell Harriman과의 대화 중.[출처9]

"교육은 누구의 손아귀에 쥐어졌는지,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에 따라 효과가 결정되는 무기다."
- 1937년 9월, 허버트 조지 웰스인터뷰에서.

"신이 당신의 편이라고? 그가 보수당원인가? 악마는 나의 편이며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다."
-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윈스턴 처칠에게.[83]


"열린 마음은 문지기 없는 요새와 같다."

"인간에겐 막역한 사이란 없다. 막연한 사이만 있을 뿐이다."

"악인의 무관심은 선행이 되지만 선인의 무관심은 악행이 된다."

카이로 회담 당시 윈스턴 처칠은 스탈린에게 충성을 다하는 부하들의 모습을 보면서 같은 우두머리로서 자신과 많은 비교가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것에 대해 믿고 따르기보단 어떻게든 그 결정을 막을려고만 드는 자신의 부하에 비해 스탈린의 부하들은 겸손하며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탈린의 통솔력의 비법이 궁금했던 처칠은 스탈린에게 통솔력의 비법을 물어봤다. 그러자 스탈린은 특유의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포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지요."

"결국 죽음이란 나쁜 것을 잃는 거다."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죽은 사람은 어떤 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콜 오브 듀티 시리즈에서 게임 오버 시 나오는 문구 중 하나로 나온다.
"공포 앞에 논쟁이란 없다."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상황은 단지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지금 우리의 혁명은 적들에 의해 죽어가고 있다. 적에게 죽느니 차라리 우리가 흘린 피에 익사하는 길을 택하겠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마라."

"인민은 낙엽과 같다. 하나씩 밟을 때는 바스락거리지만 한데 긁어모아 불을 붙이면 매우 잘 탄다."
소수의 인민들이 저항하는 것은 별 것 아니지만 다수의 인민들이 들고 일어나면 막을 수 없다는 말이라는 해석도 있고, 인민들을 적당히 탄압하면 저항하지만 본보기로 다수를 모아 처리하면 겁 먹어 찍소리도 못한다는 말로 해석하기도 한다. 스탈린이 두 가지 을 모두 경험했던 인물인만큼 어느 쪽으로 받아들여도 말이 되기 때문에 이래저래 애매하다.
"사단을 시장에서 판다면 사주겠지만 시장에서는 사단을 팔지 않는다. 증원은 불가능하다."
- 1942년 5월,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도중 포위섬멸 위기에 처한 티모셴코 원수의 증원 요청에 대한 답신.
소련군이 섣부르게 시작한 공세는 이 때의 독일군 역습을 받아 대참사로 끝났다. 마침 캅카스를 향한 하계 공세를 계획하던 독일군은 전투 종료 1달 만에 청색 작전을 발동했다. 티모셴코는 이후 일선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된다. 사실 스탈린의 책임이 워낙 컸던 패배다 보니 면피성 인사 조치이긴 하지만 이를 계기로 스탈린이 군부의 구체적인 작전 수행에 시시콜콜 간섭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현대전에서 총포탄을 아껴서는 안됩니다. 탄약을 아끼는 것은 범죄요."
- 1940년 4월 15일, 겨울전쟁에 관한 고위 지휘관 회의.
포병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상당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인력은 아껴도 포탄은 아끼지 말라거나, 공세에는 반드시 포를 동원하라거나 하는 발언을 전략회의에서 했다.

"석유 없이 전쟁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장차 다가올 전쟁에서는, 석유에서 우위를 점하는 자가 전쟁에서 승리의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 1927년 12월 3일 연설에서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 1935년 5월 4일 붉은 군대 사관학교 졸업식 연설.
간부가 제일 중요하다는게 아니라 간부 집단의 질적 향상이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 한다는 뜻.
"넌 스탈린도 아니고 나도 스탈린이 아냐! 스탈린은 소련 권력이야!"[출처11]
둘째 아들 바실리 스탈린이 자신의 성을 쓰자 이렇게 일갈했다.
"이제, 우리는 누가 진정한 공산주의자인지, 그리고 누가 공산주의자인 척 말하고만 있는지 보게 될 것이오. (중략)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권력을 얻었으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권력을 행사하는 능력은 부족하오."
- 1928년 시베리아의 바르나울에서, 대대적인 농업 집단화를 시행하기 전에.

"동지 여러분, 삶이 좋아졌습니다. 삶이 더 행복해졌습니다. 그리고 인생이 즐거울 때 일도 좋습니다. 우리의 삶이 나쁘고, 보기 흉하고, 불행했다면 스타하노프 운동이 있었겠습니까?."
-1935년 스타하노프 노동자 회의에서.

"포화 속에 수천 킬로를 달린 병사들에게 그런 즐거움(강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합니까?"
-구 유고슬라비아를 탈환하며 주둔해 있던 소련군이 현지 여성들에 대해 강간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항의했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자 '밀로반 질라스'에게 한 말.[85][86][87]

"강한 군대를 가진 나라는 언제나 존경받는다. 핀란드군의 강인함에 경의를 표한다."
-1951년에 했다고 전해지는말.[88]

"왜 전차에다 을 차리려고 하나!"
-1938년 5월 4일 신형 다포탑 전차의 목업모델을 보고 포탑 한개를 부러뜨리며 한 말.[출처12]
스탈린은 다포탑 전차인 T-28이나 T-35를 매우 싫어했다. 그리고 그러한 다포탑 전차들이 실전에서 완벽한 실패작으로 판명된 걸 보면 비록 스탈린이 전술, 전략적으로는 문제가 많았지만 무기를 보는 눈 하나는 있던 모양이다. 한편 이 말 때문에 밀덕들은 어떤 무기에 뭔가를 덕지덕지 붙여놓는 걸 "백화점을 차린다" 고 표현하곤 한다.
한편 저 백화점 드립을 두고 자본주의의 상징이라서 백화점을 싫어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당시 소련에도 백화점이 엄연히 있었다. 즉 자본주의의 상징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백화점처럼 여러가지를 놓았다는 직접적인 비유법에 더 가깝다.[90]
제국주의는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자본주의에서 시작되었다. 파시즘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역시 자본주의에서 시작되었다. 민주주의란 한 줌의 자본가들을 물리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 당시 소련의 경제 체제는 클리프주의 계열 좌파 학자들의 평가에 의하면 국가 자본주의이며 스탈린주의는 제국주의, 전체주의의 성향을 어느정도 겸하고 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세상에, 이게 무슨 마르크스주의라는 건가. 이건 완전히 봉건주의잖아.
-마오쩌둥이 쓴 이론을 읽고[출처13]

"아니오!"(нет!)
-포츠담 회담, 얄타 회담에서 윈스턴 처칠의 양보 요구에 스탈린이 자주 내뱉었던 말.[출처14]

조선 사령부가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귀관은 전혀 통보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전진할 생각인가? 아니면 전진을 중단하기로 했는가?[93]
1950년 7월 1일, 북한군이 남진을 멈추자 김일성에게 보낸 편지출처(2분 부터)
나로서는 굶주린 인민들과 실직한 사람들이 누리는 개인적인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진정한 자유란 착취와 다른 사람에게 억압받지 않는 곳, 실업이 없으며 직장과 집 그리고 빵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오직 그러한 사회에서만이 탁상공론이 아닌 실질적인 개인과 자유가 존재할 수 있다.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강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조합을 지주로 한다는 점이다. 서구에 있는 여러 공산당들의 약점은 무엇인가? 그것이 노동조합과 결합되어 있지 않고, 또한 이들 공산당의 몇몇 분자가 노동조합과의 결합을 바라고 있지 않은 점이다. 때문에 현 시점에서 서구 공산당의 기본적 임무는 노동조합운동의 통일을 위한 캄파니아를 발전시키고 철저하게 추진하며, 전 공산당원이 빠짐없이 노동조합에 들어가 자본에 대항하여 노동자계급을 결집시키는 체계적이고 끈질긴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공산당이 노동조합을 지주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식민지를 프랑스에 반환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전략거점을 그들에게 맡기는 것은 미친 짓이다.
1945년 얄타회담에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 지배에 관해 한 말

1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1901 - 1903 -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1903 - 1918 -

[[소련 공산당|]]
1918 - 1953 -

1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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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기타 스탈린 선 · 명령 제227호 · 각국 정상들과의 관계 · 스탈린 전차 · 스탈린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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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79년생 이라는 말도 존재한다[2] губерния. 러시아 제국의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 당국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하위 행정구역인 주(область), 구(округ), 군(район) 등으로 대체되어 사라졌다. 엄밀히 따지면 최상위 행정구역인 губерния는 '주(州)'로 번역하는 것이 옳으나 보통은 область를 '주(州)'로 번역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현(縣)'으로 번역한다.[3] 1960년 모스크바 연방시에 편입되어 현재는 모스크바 연방시의 일부이다.[4] 1952년 19차 당 대회에서 서기장직을 폐지하고 '서기국 서기'로 남았다.[5] 둘 모두 스탈린이 태어나기 전 어릴때 사망했다.[6] 볼셰비키 계열 정치인이었던 표도르 세르게예프(Фёдор Сергеев, 1883–1921)의 아들로 표도르 세르게에프의 사후 스탈린의 양자로 들어갔다. 스탈린의 장남인 야코프 주가슈빌리와 같이 독소전쟁에 참전했고 수용소에 수감됐으나 사망한 야코프와 달리 본인은 탈출에 성공했다.[7] 일각에서는 스탈린이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러시아 정교회의 탄압을 중지한 것과 엮어서 스탈린이 전쟁의 승리를 기도하며 정교회 성당을 몰래 다녔다는 식의 출처가 불분명한 낭설을 퍼뜨리기도 하나, 러시아 정교회의 부활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러시아인들의 민족주의를 자극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스탈린 실제로 모스크바 총대주교를 다시 임명할 때 사도헌장을 고의로 무시한 채 세웠으며 정교회의 탄압을 완화한 뒤에도 즈나니예(Всесоюзное общество «Знание»)와 같은 무신론 단체를 지원해주기도 하였다.[8] 많은 해외 자료에서 165cm로 나와 있으나 163cm나 168cm로 나온 것도 있다. 168cm 정도로 알려진 윈스턴 처칠과 찍은 사진을 보면 대략 엇비슷하거나 스탈린이 조금 더 작다.[9] 경우에 따라서는 에카테리네(ეკატერინე)로 표기하지만 본 문서에서는 조지아 국립 의회도서관의 관련 자료에 따라 에카테리나(ეკატერინა)로 표기한다. 관련 자료.[10] 공식적으로 알려진 스탈린의 자식 중에서 유일하게 레닌아버지가 만든 소련의 끝을 보기도 했다.[11] 한번은 스베틀라나에게 스탈린이 루스벨트가 보내온 편지를 건내주면서 한번 번역해볼 수 있겠냐고 했는데 스베틀라나가 능숙하게 번역하자 스탈린이 놀라면서도 매우 흡족해했다고 한다.[12] 스탈린은 유대인에 관해 차별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13] 이 과정에서 죽은 동거인의 화장한 유골을 갠지스 강에 뿌려주려던 시도가 소련의 눈치를 본 인도 당국에 의해 거부당하고, 로마 등 각지를 전전하면서 살았다. 그 과정에서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각종 종교인과 만남을 가졌다고 한다.[14]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스베틀라나의 망명으로 스탈린과 가족의 명예와 영향력이 실추되길 바랐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스탈린 격하를 하던 흐루쇼프와 달리 당내 보수파인 브레즈네프는 어느 정도 스탈린을 대우해 준 편이었다.[15] 니콜라이 2세의 전기를 써서 아주 유명해졌는데, 나중에 라진스키에게 자신이 알렉세이 황태자라거나 아나스탸샤 공주라고 주장하는 사기꾼들이 줄줄이 연락을 할 정도였다.[16] 다만 본명 표기와는 별개로 일반적인 영어 이름은 Joseph Stalin이므로 참고.[17] 《크렘린의 수령들》에 따르면 레닌은 1915년 지노비에프에게 보낸 자신의 서한에서 이런 질문을 했다. "코바의 성을 기억하시는지요?" 지노비에프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레닌은 그에 대해 재차 카르핀스키에게 묻고 있다. "부탁이 있습니다. 스티프코나 미하에게 코바의 성을 알아 봐 주십시오. 우리는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시프 드주…뭐라고 했는데…"[18] 스탈린은 이 편지를 죽을 때까지 자기 책상 서랍 안에 보관하고 있었고 그가 죽은 후에 발견되었다.[19] 출처: Медведе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메드베데프 알렉산드로비치). (Unknown Stalin) 참고로 부하린은 러시아 혁명에 동참한 혁명 영웅 중 하나다. 블라디미르 레닌과 설전을 벌일 정도로 수준 높은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레닌의 유언장에 언급되는 차기 국가원수 후보자이기도 했다. 대숙청 말기에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이후 1988년 복권됐다.[20] 스탈린이 최고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이후로도 스탈린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대숙청이 한창 진행되었을 때 재판을 직접 참관하면서 이런 재판이었으면 남편도 처형되었을 것이며 대놓고 쓴소리를 날리기도 했다. 그나마 레닌의 아내였기 때문에 시베리아로 추방당하거나 처형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이러한 불편한 관계때문에 크룹스카야가 사망했을 때 스탈린이 독살했다는 음모론이 나돌기도 했다.[21] 순혈 러시아인이 아닌 러시아 제국 치하의 조지아 출신이기 때문에 모어가 러시아어가 아니라 억양이 없었으며 항상 조지아어 후음성이 나왔다고 한다.[22] 미하일 불가코프의 팬으로, 미하일 불가코프가 소련 당국을 비판하는 성향의 작가였음에도 어느정도 봐주어서 용케도 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극장에 취직시키고, 말년을 침대에 보낼수있게 했다. 다만 작품 여러개는 출판을 금지시키기는 했다.[23] 마부 사건이 스탈린 특유의 편집증 끝판왕인데, 스탈린은 처음에 누군지 모르겠다고 더 자세히 얘기해보라고 뜸을 들였다. 근데 사실 스탈린은 이 마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뜸을 들였냐면은 이 마부가 처음에 스탈린이 태워달라고 했을때 바로 안태워주고 개겼기 때문. 그래서 자기도 조금 뜸 들이다가 구해준 것이다.[24] 실제로 갱년기 성인 남성들은 이 시기 여성 호르몬이 많이 나오는 경향이 있는데 여성호르몬은 수염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여성이 수염이 안 나는 이유가 바로 이 여성 호르몬이 수염을 못 나게 억제하기 때문. 따라서 이 시기 중년 남성들은 수염 탈모에 걸리는 사례들이 있다.[25]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시절에는 "조지아 민족주의자"라는 비난 섞인 공격을 당 내에서 받은 적이 있었다. 실제 스탈린은 공산주의에 입문하기 이전에는 조지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 조지아 민족주의를 찬양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26] 주로 술리코 (სულიკო)라는 연가를 즐겨 불렀다고 전해진다. 스탈린의 애창곡이라는 연유에서 붉은 군대 합창단에서도 자주 불리웠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불리기도 하였다.[27] 물론 대숙청 기간 중에 얄짤없어서 조지아에서도 수만명 가량이 죽거나 시베리아로 끌려갔다.(...)[28] 20세기 후반에서야 동북아 국가들의 경제성장이나 중동권 산유국들로 인해서 낙후된 이미지가 어느정도 희석된 것이지, 20세기 초중반 기준으로는 자체적으로 식민지를 만든 일본 정도를 빼면 아시아 국가들 자체가 식민지였거나 식민지가 되지 않더라도 열강들에게 휘둘렀기 때문에 더더욱 비하의 이미지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헝가리와 핀란드도 조상이 아시아에서 오고, 우랄계 언어를 쓴다는 점 때문에 아시아라고 비하되었고, 발칸국가들이나 폴란드 등도 낙후되었다거나 오스만제국이 영향을 받았다는 이유 등으로 아시아 국가라고 많이 비하되었다. 러시아도 예외는 아니라서 영토 자체가 아시아에 걸쳐있는데다가 서유럽에 비해 낙후되었기 때문에 아시아로 폄칭되었다.[29] 당연하지만 지금도 유럽인에게 아시아인이라고 하면 싫어하는게 보통이다. 애초에 어느 특종 인종더러 다른 인종같다고 놀리는건 그것 자체로 존재를 부정하는 비하성 / 인종차별성 욕이다. 특히 이러한 욕에 내포된 역사적 뜻은 "너희는 유럽인들과 같은 교양있는 민족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온 미개한 야만인들"이라는 우월의식이 깔려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유럽에서 이러한 욕은 동유럽 뿐만 아니라 훈족이라 비하당했던 독일인들이나 하얀 흑인으로 비하당했던 아일랜드인처럼 시대와 민족을 가리지 않고 타민족을 비하하는데 즐겨 사용되었다.[30] 정작 레닌 자신은 할머니가 칼미크인이었다.[31] 소련 도시민들이 방 여러개 있는 아파트에서 살게 된것이 1950년대 이후의 일이었고, 스탈린 당시에는 도시 지역에서 방 하나 정도를 배정받아 사는 것이 일반적으로 많은 경우에는 화장실과 욕실, 주방을 이웃집과 공유했다.[32] 다만 말년에 그 주치의들을 감옥에 보내버렸고, 정작 이 때문에 쓰러졌을 때 응급처치에 실패해서 더 일찍 사망하는 계기가 되었다.[33] 스탈린은 서기장 시절을 제2차 세계대전냉전으로 보냈다. 굳이 그의 의심병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그를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34] 냉전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체제 대결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리 독재와 공포정치에 학을 뗴고, 사회주의 평등을 주장하던 소련인들이라 해도 자신들의 지도자인 서기장이 미국 대통령보다 형편없이 살고 있다는 것을 용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35] 한 번은 측근들과 함께 모스크바 시내를 순방하던 중 길을 건너려던 노파를 도운 적이 있는데, 노파를 불쌍히 여긴 스탈린이 돈을 주려다가 자신을 포함한 측근 전원이 평소에 돈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서 결국 주지 못한 일이 있었다.[36] Герцеговина Флор. 직역하면 '헤르체고비나의 꽃'이란 뜻이다. 이름과는 달리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모스크바에서 생산한 담배이다.[37]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파이프가 망가질 것을 대비해 예비용 파이프를 몇 개 구비해 놓는다. 스탈린이 사치를 한게 아니라, 파이프 흡연자로서 당연한 행동을 한 것이다. 일례로 더글라스 맥아더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콘파이프' 또한 이런 경위를 거쳐 더글라스 맥아더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38] 이와 비슷하게 에리트레아의 독재자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도 에리트레아를 북한도 능가한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억압적인 독재국가로 만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사치를 거부하며 검소하게 살고 있다.[39] 보시라이의 창홍타흑, 시진핑의 '호랑이 때려잡기',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사회정화운동, 신군부삼청교육대 등이 이와 궤를 같이 한다. 박정희가 유일한 박사를 세무조사로 공격했다가 결국 아무 혐의점도 찾지 못하고 오히려 상을 준 것이 대한민국 역사의 아이러니로 남아있을 정도이다.[40] 그 외에 장제스는 비교적 다른 평을 받는데, 부패 때문에 중화민국이 망했기 때문이다.[41] 다행히 바이바코프는 97세가 되는 2008년까지 살았다.[42] 엄밀히 말해서 히틀러의 경우, 연설 자체의 내용은 매우 단순했다. 그는 제스처, 말의 톤과 투, 특히나 무대설정이라는 연설 내용 외적인 요소를 이용해 청중들의 감정적 자극을 이끄는데 능숙했다. 요즘 언어로 청중들이 원하는 "사이다"적 발언과 메세지 내용을 전달하는 능력 및 개인의 카리스마로 청중들을 선동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 따라서 히틀러의 연설들은 이러한 연설 내용 외의 요소들을 배제한 상태로는 그다지 특기할 만한 것이 없고 오히려 말이 산만한 경우가 많다. 파시즘 진영에서는 히틀러보다도 베니토 무솔리니괴벨스가 연설 구성과 내용이 더 나았다[43] 원래는 러시아 서남부 일대에 만들려고 했지만 현지인들의 반발이나 극동지역 개발을 고려해서 극동지역에다가 설치했다. 그러나 인구밀집 지역인 소련서부와 너무 멀리 떨어진데다 유대인들을 유대인 자치주로 강제이주를 내보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많이 오지 않았다. 그나마 있던 유대인들도 현대에는 대다수가 해외나 대도시로 이주한지라 말로만 유대인 자치주인 상황이다.[44] 실제 스탈린은 농원이 있었으나, 다차에 달린 조그마한 텃밭 정도로 소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다.[45]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32쪽, 올렉 V. 흘레브뉴크, 유나영 역, 삼인, 2017[46] 생애 항목에서 알 수 있듯 스탈린은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던 모친 앞에서는 여전히 정교회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본인의 경험을 투영해서 한 조언인 것으로 보인다.[47] 이 때 묘의 이름도 레닌 스탈린 영묘로 바뀌었다가 1962년에 다시 레닌 영묘라는 이름을 되찾았다.[48] 스탈린 외에도 막심 고리키, 유리 가가린, 게오르기 주코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등 소련의 쟁쟁한 위인들이 다수 묻혀 있다.[49] 스탈린의 생가가 있던 자리이다.[50] 실제 소련의 인구복구는 1955년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사회주도층의 성비는 1960년대까지도 여성이 우위로 1930년~40년대 초반생이 주류를 이루고 거기에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이 사회활동을 시작할때가 되어서야 겨우 균형을 이룬다.[51] 2대 총선에서 친 이승만파의 의석이 210석 가운데 1/4 수준인 57석에 그쳤을 정도였다.[52] 문제는 전투 중 급박한 상황에서 이들이 무전기 너머로 내뱉는 러시아어가 UN군 측에도 감지되었고, 공중전 중에 전투기 콕핏안의 탑승자가 보일 정도로 접근했던 몇몇 미군 조종사들이 러시아인인 것 같다고 증언하여 미국 역시 소련 공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은 알게 된다. 그러나 미국 역시 소련과의 직접적인 대결은 원하지 않았기에 비밀로 처리하고 일부러 모른 척했다.[53] 1928-1995. 정치장교이자 구소련 심리전부서의 책임자였으며 장성까지 승진했던 인물로, 후일에는 역사가로서 맹활약하였다. 만나본 사람의 평가에 의하면 꽤나 공산주의 사회의 고위층답지 않게 자유롭고 유연한 사상을 가졌다고 하며 나중엔 스스로도 공산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근데 이 사람은 아버지가 대숙청 때 숙청되었기 때문에 원래 공산주의를 좋게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원래 공산권은 북한을 빼고 연좌제가 없고 아주 중요한 고위직의 경우에나 예외적으로 이용되었다.[54]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왕이 이러기도 했다. 또는 조선 태조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의 만찬에서 공신인 정도전, 조준 등게 함께 신나게 춤추며 놀았다는 기록도 있다. 용의눈물에서 잘 묘사된다.. 차이점이라면 꽐라가 되는게 목표라서 왕과 주변 인물들은 춤은 커녕 몸겨누기도 힘들어 했다랄까.[55] 레드얼럿 1편의 소비에트 미션9 오프닝 컷신에서 이게 패러디되었다. 그라덴코 장군과 함께 보드카를 들이키며 화기애애하게 유배문서에 서명했지만 다음미션에서 쿠코프와 정부인 나디아에게 독살당했다.[56] 이런 평은 동서를 가리지 않고 인정하는 사실이다. 예: 리처드 오버리著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57] 티토의 모국어였던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된 편지이다. 러시아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Сталину: перестань подсылать мне убийц. Мы уже поймали пятерых, одного с бомбой, другого с винтовкой… Если не перестанешь присылать убийц, то я пришлю в Москву одного, и мне не придётся присылать второго."[58] 서비스는 애정 설을 "거부"한다고 밝혔다.[59] 퇴짜를 맞자 비서를 하나 더 불러서 했다는 설도 있다.[60] 나데즈다의 친모가 사실 스탈린의 연인이었고, 후에 이 사실을 안 나데즈다는 우울증에 걸려 자살했다는 설.[61] 생전은 물론 격하된 사후에도 이런 논란에 관한 기록 자체가 없고, 나데즈나 친딸 설은 스탈린과 나데즈다의 친부모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나데즈다는 3살이었다는 것으로 쉽게 반박된다. 또한 살해 설은 나데즈다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에 스탈린과 성격차도 심해 스트레스가 쌓이다 우발적으로 그랬다는게 정설이다. 페도필리아 설은 실제 스탈린의 외동딸 스베틀라나가 죽기 얼마 전부터 소년 소녀의 사진을 모았다는 증언과 그 이전에도 10대 여성들과 성관계를 여러번 가지기도 했고 두번째 아내는 그녀가 16세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2년 결혼한 걸 보면 일부 신빙성이 있다.[62] 그러자 제임스는 자신이 굴라그에 갈 거라고 농담 했다.[63] 레닌은 음식에 대해서 크게 따지는것이 없아서 주는대로 먹는 편이었고, 흐루쇼프는 토속적인 음식을 주로 즐겨먹었다한다.[64] 출처: 초원, 내 푸른 영혼/ 아나똘리 김 지음/ 김현택 번역/ 뿌쉬낀하우스[65] 스탈린 평전은 riss에서 서비스하고 있어서 정 읽고 싶다면 볼 수는 있다.[66] 책에 달린 해설에서 노경덕 교수는 흘레브뉵이 대숙청 수정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소 전통주의적으로 접근한 점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의 역할을 무시한 점에 대해 비판을 했다. 흘레브뉵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의 실책만 잡아내기 급급하여, 파시스트의 침략을 무찌르고자 했던 소련인들의 의지를 스탈린이 어떻게 잘 이끌어냈는지를 전혀 보지 않았다는 것. 그러나 그와 동시에 노경덕 교수는 논리적 분석을 통한 스탈린의 키예프 암살론에 대한 반박과 스탈린의 인종청소 부분에 대한 반박 등을 흘레브뉵의 특징으로 뽑기도 했다.[67] 사실 올레크 흘레브뉵의 경우 러시아 학계에서 우익 성향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68] 역사학자로써 프랑스어권의 아프리카와 소련에 대해 연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기 전에 최후로 만난 외국인이기도 하다.[69] 1960년대에도 쓰탈린 거리라는 명칭을 사용했다.[출처1]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출처2] Speech "The Elections in St. Petersburg" (January 1913)[출처3] Speech "The Elections in St. Petersburg" (January 1913)[출처4] The Memoirs of former Stalin's secretary (1992) by Boris Bazhanov[출처5] The Political Report of the Central Committee, The Fifteenth Congress of the C.P.S.U.(B.) (7 December 1927)[출처6] 1923년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와 잡담 중. Trotsky's Diary in Exile, 1935, p. 64.[출처들] 1차 출처, 2차 출처 Churchill, Sir Winston. The Gathering Storm : The Second World War Vol.1. Houghton Mifflin, 1948(Houghton Mifflin Harcourt, 1986). p.121.[출처7] 출처: Felix Chuev's 140 Conversations with Molotov Moscow, 1991.[78] 후임자가 주도적으로 격하해서 소련 해체까지 소련흑역사로 남아있었으나, 세월이 흐른 현재의 러시아 연방에서는 그가 이끌었던 국가적 승리에 초점을 맞춘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해졌다.[79] 하지만 러시아 밖에서의 평가는 매우 나빠 히틀러와 마오쩌둥 급이다. 큰 업적을 이루었지만 엄청난 범죄로 인해 대부분의 쓰레기를 치우지 못했다.[출처8] Said in 1923, as quoted in The Memoirs of Stalin's Former Secretary (1992) by Boris Bazhanov[출처] 스탈린 강철권력 p.478~79[출처9] Truth about the Great Patriotic war by B. Sokolov (in Russian)[83] 출처10 Fallen Eagle: The Last Days of the Third Reich (1995) by Robin Cross, p. 21[출처11] 젊은 스탈린, 496p[85] 당시 소련군에 의한 강간 사건은 동부 유럽 140만 건, 베를린 60만 건이나 된다. # 심지어 여성 소련군이 젊은 남성 독일군을 강간한 일도 많았다. #[86]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티토 시기 반체제 운동을 한 밀로반 질라스의 62년 회고록뿐이고, 밀로반 질라스는 반공주의로 전향하여 56년에 투옥되기도 한 인물이므로 이것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 질라스는 냉전 이후 미국 네오콘과의 인터뷰에서 공산주의는 19세기 유물이자 재앙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의 극성 반공주의자로 변모한 인물이다. 또한 1945년 1월 19일자 스탈린의 이름으로 내린 명령에는 강간을 금지하는 조항과 이를 어길 시 총살할 수도 있다는 경고가 들어가 있기도 하다.# 이것이 이후 일어난 강간들에 대한 완벽한 반박이 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러한 발언들이 맥락적으로 삭제되는 반면에, 밀로반 질라스의 일부 증언은 과하게 인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87] 이에 대해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한정숙 교수는 소련의 최고지도자였던 스탈린은 나치와 독일 인민은 구분되어야 하며 인민은 생존해야한다고 공언했고, 군에 전달된 스탈린의 명령 자체는 교전국 여성들에 대한 강간을 엄금하는 것이었다고 책에서 언급했으며, 그와 동시에 스탈린이 남성주의자여서 밀로반 질라스와 나눈 대화에서 원정군 군인들이 전시에 현지 여성들과 관계를 맺어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입장을 표명한 적도 있다고도 언급했다. 그러나 관련 각주에서 이 기록 자체가 스탈린 정권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던 질라스의 회상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 필요도 없다고 언급했다. 한정숙 외 지음, 독일 통일과 여성 - 젠더 관점에서 조망한 독일의 분단과 재통일,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2, 26~27쪽.[88] 출처: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출처12] Zaloga 2015: 94 Zaloga, Steven(2015), Armored Champion: The Top Tanks of World War II.[90] 나중에 대한민국BLACKPINK뮤직비디오에서 진짜로 스탈린이 살아있던 시절에 나온 소련 전차를 백화점마냥 꾸몄다.[출처13] The Coldest Winter, 데이비드 핼버스탬, p.532[출처14] 존 루이스 개디스, 냉전의 역사(2010)[93] 당시 북한군은 춘천 전투의 여파로 큰 타격을 받았고 작전 계획 자체가 틀어져 서울에서 3일 동안이나 진격을 멈춰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