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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포병, T: 기갑, Si: 통신, Sa: 공병, AAF: 항공
※ 문서가 있는 인물만 종전 당시 계급으로 서술
※ 병과원수랑 병과상원수는 대장과 동급이나 의전서열상 대장과 원수 사이에 있었다
※ 포병·기갑·통신·공병·항공 장교는 상장→대장이 아닌 상장→병과원수로 진급
※ 윗 첨자 : 전사
1. 반공 및 지시불이행 혐의로 총살당했으나 전후 1957년 7월 31일 무죄로 판결나면서 복권
2. 1944년 4월 20일 대장에서 상장으로 강등, 전후 1953년 8월 3일 대장 계급 복권
3. 1942년 3월 17일 원수→소장으로 4계급 강등 및 1945년 7월 19일 중장→소장으로 강등
4. 1942년 7월 12일 독일군에게 생포당한 이후 나치 독일에 전향, 종전 후 체포되어 나치 부역 혐의로 사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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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초대 제1기병군 사령관
세묜 부됸니
Семён Будённый | Semyon Budyonny
파일:Semyon_Budyonney.jpg
본명 세묜 미하일로비치 부됸니
Семён Миха́йлович Будённый
Semyon Mikhailovich Budyonny
출생 1883년 4월 25일
러시아 제국 돈보이스코주 칼미크구 플라톱스카야 마을
(現 러시아 남부 연방관구 로스토프주 프롤레타르놉스키군 부됴놉스카야)
사망 1973년 10월 26일 (향년 90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묘소 크렘린 벽 묘지
재임기간 초대 제1기병군 사령관
1919년 11월 ~ 1923년 10월
제14대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1937년 6월 ~ 194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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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아버지 미하일 이바노비치 부됸니
어머니 멜라니야 미키토브나 부됸나야
배우자 나데즈다 이바노브나 부됸나야 (1925년 사별)
올가 스타페노브나 미하일로바[1] (이혼)
마리아 바실리예브나 부됸나야[2] (두 번째 재혼)
자녀 아들 세르게이,[3] 미하일[4]
딸 니나[5]
복무 러시아 제국 육군
1903년 ~ 1917년
노농적군
1918년 ~ 1946년
소비에트 지상군
1946년 ~ 1973년
최종 계급 소령 (러시아 제국 육군)
원수 (소비에트 지상군)
병과 기병
주요 참전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독소전쟁
주요 서훈 소비에트 연방 영웅 (3회)
레닌훈장 (9회)
수보로프 훈장 1등급
적기훈장 (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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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름 표기3. 생애
3.1. 젊은 시절3.2. 러시아 내전 시기3.3. 전간기3.4. 키예프에서의 실책3.5. 전후
4. 평가5. 기타6.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 내전, 독소전쟁까지 활약한 소련군 군인이다. 초기 소련군의 대표적인 보수파로 알려져 있으며 독소전쟁 초반에 남부전선군 사령관을 맡았다가 키예프 포위전에서 대패했다.

2. 이름 표기

모음 약화가 반영된 러시아어 발음은 '[sʲɪˈmʲɵn mʲɪˈxajləvʲɪt͡ɕ bʊˈdʲɵnːɨj](시묜 미하일러비치 부됸느이)'에 가까우며, 국립국어원러시아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세묜 미하일로비치 부됸니'이다. ([ɯj\], [ɰi\])는 현대 한국어에서 발음이 불안정해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채택되지 않으며, 어미의 '-ый'를 단일한 모음 음소로 취급하여 '의'가 아닌 아닌 '이'로 표기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어의 ё [jɵ\]는 부호가 생략된 е로 쓰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에'로 옮겨 부덴니로 잘못 표기하기도 하였다.

3. 생애

3.1. 젊은 시절

기마 민족인 카자크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진짜 카자크는 아니고 그냥 카자크 마을에서 자랐다고 한다. 스무 살 때까지는 농부로 일했지만, 을 굉장히 좋아해 잘 부리고 잘 탔다.

파일:external/img15.nnm.ru/6fd2050c316348d5de1951a8367.jpg
1903년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으나 적기훈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닌 듯하다. 게다가 그놈의 수염 탓인지 게다가 20세가 아니라 40세로 보이니 더더욱 그렇다(...).[6]

1904년,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에 징집되어 기병으로 복무했다.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군에 남아 있었고, 1907년에는 뛰어난 기마술 덕분에 병사에서 부사관으로 올라갔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기병학교를 졸업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는 정예 용기병 연대상사였으며, 동부전선에서 카자크들로 이뤄진 기병을 이끌고 독일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다. 이후 캅카스 전선에 파견되어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도 용맹을 보여 성 게오르기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용맹했을 뿐만 아니라 인품도 훌륭해서 병사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그런데 병사에게 가혹행위를 하던 선임 부사관과 언쟁을 벌이다가 화를 못 참아 병사들 앞에서 싸웠고, 이후 상관에게 불려가 심문을 받았다. 병사들은 부됸니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지만 부됸니는 결국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부됸니에 대한 징계는 이 훈장 박탈로 끝났고, 상관도 그의 군사적 재능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군법회의에 회부하지는 않았다.

이후의 전투에서도 용맹을 떨쳐 다시 성 게오르기 훈장을 급수별(1~4급)로 4개 더 받았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러시아군은 독일군에게 연패해 거의 그로기 상태였고, 결국 지휘 계통이 무너지자 병사들은 스스로 소비에트(평의회)를 구성하고 투표로 지휘관을 선임했다. 병사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던 그는 당장 지휘관에 선임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좌경화되어 공산주의 지도자가 되었다. 1919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하였으며 이 때 스탈린, 보로실로프와 친구가 되었는데, 이것이 훗날 정치적 출세와 보신의 지름길이 되었다.

3.2. 러시아 내전 시기

파일:부됸늬적백내전기.jpg
카자크 기병 삘이 나는 사진. 붉은 군대 초창기 때 촬영된 모습이다. 오른쪽부터 보로실로프, 부됸니, 티모셴코.

부됸니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새롭게 구성된 붉은 군대에 가담해 제1기병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곧 내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 대표적인 활약상으로는 모스크바 공세가 실패한 데니킨의 남러시아군에 막타를 넣으며 남러시아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 우크라이나를 원조한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붉은 군대를 몰아내고 1920년 5월에 키예프를 해방시키자, 부됸니의 부대는 이에 맞서 싸웠다. 부됸니는 처음에는 승기를 타고 폴란드군을 격파하면서 폴란드 영내까지 진입했지만, 크라쿠프에서 대패하고[7] 다시 러시아 영내로 후퇴하였다. 이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대체로 기병으로 승부가 갈렸으며, 이 때문에 양국이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기병에 집착하게 되는 나쁜 영향을 끼쳤다. 부됸니도 소련이 공업화를 이루고[8] 전차를 생산할 수 있게 된 시점에서도 기병을 고집하며 투하쳅스키의 군 기계화를 강하게 반대했다.

어쨌든 부됸니가 이끄는 붉은 군대 제1기병군의 명성은 당시 신화적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하일 숄로호프가 쓴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소설 '고요한 돈강'에도 잘 묘사된다. 그리고 부됸니를 우상화하는 군가들이 작곡되기도 했고, 붉은 군대가 쓰던 뾰족모자는 그의 이름이 붙어 부됸노프카라고 불렸다.

3.3. 전간기

파일:external/img.beta.rian.ru/105892663.jpg
1938년 병영에서.

내전이 끝나자 부됸니는 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을 시작으로 여러 군관구들의 사령관을 역임했다. 기병 전문가답게 그는 기병에 관련된 여러가지 장비나 말의 종자 개선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1924년부터는 기병총감을 맡아서 전반적인 기병을 감독하였다. 이렇게 기병에 큰 공을 들이는건 좋았는데, 문제는 기병이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져 있었다는 점이다. 붉은 군대에는 기병 대신 기갑부대가 전장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고 기계화를 추진한 선견적인 이론가들이 많았지만 부됸니는 이를 크게 반대해 수시로 제동을 걸었고 결국 소련군 현대화의 장애물이 되었다.

하지만 실책만 있던건 아니다. 기병 전문가답게 부됸니는 말에 큰 관심이 있었는데 소련의 말 개체수를 늘리고 훈련시킨 것도 부됸니의 공로다. 스탈린의 중공업 계획이 진행되자 소련의 말은 그 수가 반이나 줄었으나 부됸니는 직접 예산을 얻어 해외의 종마를 구입해 훈련시켜 군마를 보충했다. 말좀 늘린게 대단하게 보이진 않을 수 있으나 2차 대전 당시에는 보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것이 말이었다. 특히 소련군은 종전까지도 대다수의 보급을 군마에 의존했는데 그 군마들을 키워낸게 부됸니였으니 공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1934년 2월, 전연방공산당 1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35년 붉은 군대에 다시 계급제도가 도입되자 부됸니는 보로실로프, 투하쳅스키, 예고로프, 블류헤르와 함께 소련 원수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들 중 투하쳅스키와 예고로프, 블류헤르는 1937~1938년의 대숙청 기간 중 처형되었고, 부됸니와 보로실로프만이 살아남았다.

파일:external/incognita.day.kiev.ua/tyxa_s.jpg
1935년 11월 11일 촬영.

사실 부됸니도 대숙청을 총지휘했던 NKVD 부장 니콜라이 예조프의 마수에 걸려 숙청 대상에 올랐지만 NKVD 요원들이 사무실을 덮치자 이들과 완력으로 맞섰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 부됸니는 권총을 빼들어 체키스트들에게 더 이상 다가오면 다 쏴죽이겠다고 위협했고,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 잽싸게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9], 전화를 받은 스탈린이 "아, 그건 오해다."라며 간단히 그 자리에서 혐의를 풀어줘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1939년 3월, 전연방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3.4. 키예프에서의 실책

파일:external/www.stalinsociety.org/Marshall-Budyonny.jpg
군 예복을 입은 사진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독일 남부집단군에 맞서는 소련 남부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세 군데에서 독소의 '원수 대 원수의 빅매치'가 펼쳐졌는데, 북부에서는 레프 대 보로실로프, 중부에서는 보크 대 티모셴코, 남부에서는 룬트슈테트 대 부됸니였다.

부됸니는 남부전선군과 남서전선군의 상급제대인 남서방면군을 지휘하였는데, 두 전선군 가운데서 가장 독일군을 상대로 선전한 남서전선군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독일군 남부집단군의 전진 속도를 늦추는 등 대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부됸니가 잘 했다기 보다는 남서전선군의 사령관이었던 미하일 키르포노스가 정열적이고 공격적으로 지휘한 것과 키예프 군관구 전임 사령관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가 독일군의 침공을 내다보고 엄격한 훈련으로 좋은 부대를 많이 양성했기 때문이다. 남부집단군 자체에도 문제가 많았다. 남부집단군은 작전지역도 다른 집단군보다 넓었는데 반해 병력은 충분치 않았다. 독소전 개전 직전에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침공에 독일 제12군[10]이 동원되었고, 남부집단군에는 제12군 대신 세바스토폴 공방전에 참가하는 것으로 유명해지는 제11군이 배속되었다. 하지만 제11군은 독소전 개전 시점에도 아직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카르파티아 산맥을 끼고 있는 지형상의 문제로 인해 남부집단군 병력은 나뉘어서 작전을 해야했고 독일군 이외에도 루마니아군, 슬로바키아군과 같은 다른 추축 동맹국 병력들도 지휘해야했다. 이 때문에 독일 남부집단군은 계속 전진하면서도 다른 집단군들에 비해 큰 피해를 입었고, 초기의 진격도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남서방면군이 선전하여 독일 남부집단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동안 이웃한 전선 중부는 독일군에게 급속히 붕괴되었다. 결과적으로 부됸늬 지휘하의 소련군은 키예프 근방에서 독일군의 두 집단군 사이에 낀 위험한 형국이 되어버렸다. 히틀러는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 보다는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스크바보다도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인 키예프를 먼저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목전에 두고 있던 중부집단군의 전진을 정지시키고 산하 부대의 일부를 남부집단군에 보내어 키예프 근방에 몰린 소련군을 상대로 사상 최대규모의 포위전을 실시했다.

여기에 대해서 전후에 살아남은 독일군 장군들은 히틀러의 오판이라고 주장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만약 그렇게 전진했을 경우 독일군의 우측면이 소련군의 남부집단군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것을 지적하며, 특히 데이비드 글랜츠는 자신의 스몰렌스크 전투 2부작에서 중부집단군이 옐냐 전투와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고 곤경에 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중앙 러시아에서 공세를 중지하고 대신 측방을 무너뜨려서 모스크바 공세의 기반을 다진 히틀러의 판단에 손을 들어주고 구데리안보크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1941년 9월 독일 육군 사령부는 기동의 대가인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2기갑집단을 중부집단군에서 빼내 남부집단군으로 임시 전속시켰고,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집단과 큰 반원을 그리며 키예프를 포위하도록 했다. 부됸니는 비록 현대전에는 무지했으나 전황추이와 적 진격의 속도를 보고 기민한 판단력으로 포위의 위험을 알아차려 스탈린에게 철수를 요청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전선 유지에 집착하여 이를 거부하고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개전 후 상급 지휘관들 목이 십수개씩 날아간 상황이라 부됸니가 이 명령을 거부하거나 따질만한 정치적 상황은 못 되었다. 결국 독일 기갑군의 고속기동에 손을 놓아야 했다. 당시 소련군의 병력이 60만이었고, 독일군이 50만이었음을 감안하면 더 많은 병력이 포위섬멸 당한 어처구니 없는 경우였다.

부됸니는 포위되어 절망적인 상황이 되자 9월 13일 스탈린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전화를 걸었고 스탈린은 화를 내면서 그를 파면했다. 부됸니는 비행기를 타고 탈출했다. 뒤에 남겨진 부대는 남서전선군 사령관 미하일 키르포노스 상장이 지휘했다. 하지만 키르포노스는 포위망을 뚫고 부대를 탈출시키려다가 9월 20일 전사했고,[11] 이후 남겨진 부대는 지휘관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독일군에게 섬멸당해 60만의 포로를 남기며 대패했다.

스탈린은 당시 민스크 근방에서 비슷한 규모의 패배를 당한 드미트리 파블로프 대장총살형에 처한 것과 달리 이 옛 친구에게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됸니는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썼으며 다시는 제1선에 나서는 일이 없었다.

3.5.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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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군복 예장 촬영 때.

이후 부됸니는 남은 전쟁 기간을 후방에서 상징적인 직위만 가지고 보내다가 종전을 맞았다. 1947년 농업성 부상에 임명, 새로운 말의 종자 개선에 큰 힘을 쏟았다. 1952년 10월, 소련 공산당 19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강등, 1953년에 농업성 부상에서 퇴임, 기병대 고문을 거쳐 1954년에 국방성 고문에 임명되었다.

이후 죽을 때까지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계속 재선되었다. 꽤 장수하여 90살까지 살았고, 다섯 권이나 되는 회고록을 남겼다. 회고록의 대부분은 러시아 내전을 다루고 있다.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3번이나 수훈했지만 3번 다 종전 이후 수훈했다. 2차대전 당시야 그렇다 치더라도, 어쨌든 이 시기 정도 가면 기껏해야 동네 먹물들이 빼돌린 총폭탄 몇개 들고 일어난 걸로 시작하여 세계를 양분하는 붉은 군대의 살아 있는 역사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큰 명예와 함께 살아 있는 군사사 박물관으로 대접받았다. 물론 명예만 많았다는 점은 일단 제껴두고.

사적으로는 몰로토프를 비롯해서 1957년에 숙청된 고참 볼셰비키들에게 연하장을 보내며 친분을 계속 유지하였으며 나중에 잡지를 통해 연재된 회고록에서 스탈린 격하야말로 소련에서 일어난 가장 큰 재난이었다고 스탈린을 옹호했다.

4. 평가

현대에 이르러 부됸니는 근대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스탈린과의 친분만으로 승진한 무능한 소련군 수뇌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어 독소전쟁 당시 키예프에서 벌인 실책은 어떤 변명으로도 덮을 수 없는 사례다.[12] 이에 대한 대표적인 표현이 바로 '말 엉덩이만 아는 사람'이다. 이조차 보로실로프에 비하면 무척 나은 편으로, 보로실로프는 아예 '아무 쓸모도 없는 자'라고 까였다.

물론 부됸니 입장에선 이런 비교 자체가 억울할 게, 부됸니는 기병이라는 자신의 전공 분야 안에선 확실히 세계구급의 전문가였다. 독소전쟁에 접어들며 군사적 능력을 발휘한 사례가 아예 없다시피한 보로실로프와 달리, 부됸니는 원래 자기 위치에선 밥값을 확실하게 하며 성장한 인물이었기 때문. 그의 비극은 기병이라는 전공 분야 자체가 도태되었던 탓이었지, 부됸니 개인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일이었다.[13]

당장 후세의 입장에서 가장 정답에 가까운 해답을 낸 천재라 불리는 구데리안의 전차 기동전 구상 역시 그걸 적용한 독일에서도 개념이 너무 모험적이라고 큰 반발을 사고 있었으며, 1차대전의 전훈을 몸으로 체득한 상급지휘관들 대다수는 현실을 모르는 젊은이의 치기에 따른 오만한 독단으로 취급했다. 한 마디로, 기껏 수송대의 일종이었던 트랙터 부대에서 출발한 주제에 기병이나 포병 등 전통적인 1선 전투 병과 장교들을 들러리로 만드는 이론이다보니 군 내부에 전반적으로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14]

키예프에서 겪었던 패배 또한 후퇴나 부대 이동을 인정치 않고 현지 사수를 명령한 스탈린의 명령 때문이다. 물론 모든 전선에서 대규모 후퇴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최고 사령부가 내릴 수 있는 명령은 현지 사수일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당연히 그 책임을 지는 것 또한 최고 사령부가 되어야 한다. 한 마디로, 키예프의 패배를 전적으로 부됸니 때문이라 칭하는 건 일종의 책임 면피 이상이 되기는 어렵다. 실제로 해외의 군사 전문가들은 일관적으로 키예프에서 발생한 패배 원인은 상기한 여러 요소들을 고려하더라도 스탈린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보는 편이다. 하다못해 붉은 군대가 의견 상신과 반영에 적극적인 조직도 아니고, 부됸니는 그런 상황에서도 후대에서 볼 경우 정답이었던 자신의 의견을 올렸으며, 그런데도 거절당한 상황이었기 때문.[15][16][17]

하다못해 포위된 전선에서 절망적인 사투를 벌여서 제 2의 레닌그라드를 만들었다면 전설적인 명장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겠지만, 서쪽엔 발트해, 동쪽엔 라도가 호수가 위치하여 전면전선이 매우 좁았던 레닌그라드와 평야 한중간에 위치한 키예프의 지형적 차이가 너무 큰데다 결정적으로 기병 기동의 전문가인 부됸니에게는 부적합한 임무였다. 그의 전문대로 유격전 임무를 맡았다면 또 모르겠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방어전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비난하기엔 정상적인 혹은 소위 말하는 명장이라 불리는 인간들 중에서도 그 상황에서 키예프를 사수할 수 있었을까 하면 알 수 없는 일이다.[18]

결국 부됸니가 소환된 이후, 키예프를 지키던 서남방면군은 뒤늦게 철수하려다 포위되어 섬멸당하고 말았다. 스탈린 입장에서 보자면 부됸니의 군을 사석으로 삼은 덕분에 구데리안의 기갑군까지 추가로 묶어둘 수 있었고, 덕분에 모스크바 방면을 향한 압박이 완화되어 남부 전선군이 전멸하는 사이 극동에 배치되었던 정예군을 모스크바로 소환해 독일군의 위협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냥 그 판단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키예프에서 부됸니가 더 버티거나 적을 역으로 섬멸했다면' 혹은 '부됸니가 무능해서 휘하 남부군이 전멸했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부됸니가 독소전쟁 당시에도 명장 축에 든다 말하기 힘든 건 자명한 사실이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 분야였던 기병과, 그 역할을 비슷하게 수행하고 있는 기갑군에 한하여 그 통찰력이 남아있었다는 정도. 실제로 후배 원수이자 실질적으로 독소전의 승리를 이끈 게오르기 주코프이반 코네프의 회고록에서 부됸니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래도 코네프는 부됸니가 전혀 발전이 없었다고 완전 혹평을 했지만, 주코프는 그나마 그의 근무 태도나 성실성엔 후한 점수를 줬다. 말 그대로 노력은 했지만 그 노력 분야인 기병 확충이 정작 기병 병과 자체가 도태되면서 무능한데 노력하는 부류가 되어버린 경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러시아 내전 당시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 부됸니는 연령상으로나 커리어상으로나 명장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충분했다. 용맹함이나 지휘력, 가혹 행위가 극심하던 러시아 제국의 군인 출신인데도 혁명 이후 휘하 병사들의 지지를 얻어 지휘관 자리를 역임한 인망도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활약 또한 출중했다. 그 스탈린이나 트로츠키마저 레닌의 몽상이라 경악한 '전쟁을 통해 세계 각국을 소비에트화한다'는 무력 통합책을 전 인민이 환호하는 일대 사업으로 바꿔 다른 정치가들조차 말을 바꾸게 한 건 바로 부됸니의 제1기병군이 벌인 활약이었다. 전간기 당시 부됸니가 마치 신화적인 영웅처럼 묘사되었던 점에 대해 흔히들 대숙청 당시 모가지가 썰려나간 이들을 제외하면 띄울 만한 사람이 부됸니밖에 없었다거나,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던 '낭만적인' 기병대 장교 출신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평하고 이는 부정하기 어렵지만 그 이상으로 부됸니 휘하 제1기병군이 실제로 그만한 위업을 세웠던 점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이후의 코마루프 전투에서 겪었던 패배 또한 본질적으로는 어마어마한 전공 탓에 낙관으로 젖은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바르샤바 점령 시도 실패를 뒷수습하기 위하여, 나아가서는 후퇴하던 부대에 대한 압력을 완화하기 위하여 투하쳅스키가 직접 지시한 작전이었다. 물론 부됸니의 커리어에 있어 코마루프 전투가 기록적인 대패인 건 확실하지만, 애초에 패배한 군대의 후퇴를 위해 옆을 찌르는 전술 자체가 성공 가능성은 커녕 만일 상대가 대비하고 있다면 전멸조차 각오해야 하는 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숫적 이점은 있었으나 다시금 폴란드군의 포위를 돌파해 퇴각한 부됸니에게 필요 이상의 감점이 붙을 여지는 아무래도 적다.

한 마디로, 군인으로서의 자질은 충분히 훌륭했지만 독소전을 포함한 2차대전 시기엔 전장의 패러다임 변화가 너무 빨랐던 게 문제가 되는 인물이다. 명장이고 훌륭한 기병장교로서의 영웅이었지만 하필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점에서 너무 오래산게 문제다. 카쟈크 마을에서 말과 함께 태어나 말과 함께 싸웠던 사람이 말이 쓸모없어지는 시대를 겪기전에 적백내전과 소비에트 폴란드 전쟁 말미에 이순신 장군처럼 전사했다면 이 항목은 찬사로 가득했을 것이다.

말에 대한 사랑과 전문성이 신뢰할 수 없는 기계장치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데 영향을 주었을거고[19] 고집스런 장인이 시대에 밀려 도태되는 것처럼 도태되어 버린 것. 당장 기갑전의 선두주자였던 독일조차 여전히 완전한 기계화 부대를 보유하지 못했을 정도로 당시 기병대에서 기갑부대로 나아가는, 기병대의 도태 속도는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지나치게 빨랐다. 수천년간 모든 병과의 왕으로 군림하던 기병이 불과 십여년만에 완벽하게 몰락할 줄은 그 구데리안 마저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슷한 사례인 항공모함과 비교하더라도 너무 빨랐다. 전함에서 항공모함으로의 전환에는 30여년 이상의 실험과 실전테스트가 있었고,2차대전 당시의 전함은 기병처럼 일선전투병과에서 빠지고 수송선취급당할 정도로 무력한 존재가 절대 아니었다.

하다못해 부됸니는 일종의 수송대였던 트랙터 부대가 기갑사단으로 재편될 시기엔 이미 나이가 너무 많고 계급이 지나치게 높아 이제 와서 '실험적인' 부대에 낄 짬도 아니었다. 요컨대, 기갑에 적응하고 나발이고 애시당초 기갑의 가능성을 판단할 상황 자체도 없었던 셈. 물론 기갑화를 반대한 건 어디까지나 기병 병과를 중시했던 스스로의 판단 내지 기갑부대를 고려할 가치도 없다고 여긴 스스로의 생각 때문이었으니, 지금에 와서는 오답이라는걸 알지만 애석한 측면도 있다.

어쩃거나 빠르게 임무가 교대되어 1선 전투병과가 아닌, 수송을 담당하게 된 기병대를 역할에 맞게 편제하는 일에도 기여했으니 기병 장교로선 마지막까지 자기 몫은 하다가 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스탈린도 상술한 사정이 있고,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던 만큼 딱히 부됸니에게 실패에 대한 책임은 크게 묻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숙청 이후 붉은 군대 내부에 소련 혁명 당시부터 전공을 쌓아 군을 대표한다고 할 법한 인물이 마땅히 없었던 점도 있고, 러시아 내전에서 세운 전공으로 소련 건국에 큰 기여를 했다는 점까지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니므로 부됸니는 독소전 당시 이런저런 실수와 큰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소련의 국가적 영웅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물론 반대로 말하자면 딱 거기까지였고, 퇴물이 되었다 한들 명성만은 있었던 만큼 스탈린도 그 이상 부됸니를 크게 대우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부됸니는 이후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3회 수훈했지만, 모두 보로실로프처럼 스탈린 사후 수여받은 것이다.

5. 기타

소련군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인 37년간 원수 계급을 유지한 인물이다.

뛰어난 기병이었을 뿐만 아니라 말에 대해서는 동물학자에 준하는 전문가였다. 말 품종개량에도 힘써 러시아에는 그의 성을 딴 부됸니라는 품종이 있다. 서러브레드 종마와 러시안 돈 암말을 교배해서 만든 군마로서 전체적으로 무던한 성질에 높은 지구력, 뛰어난 환경 적응력을 가졌다고 한다. 러시아에서는 의장용 혹은 축제 등지에 현재에도 동원되며 해외에 수출까지 한다. 자기 분야 안에서는 전문가가 맞았다는 반증이다.

아코디언 연주에도 실력이 있었다. 전문 음악가인 그리고리 자이체프라 하는 친구와 함께 듀엣곡 음반까지 냈다. Зачем тебя мой милый я узнала, Донской казачок 상술한 각주에 소개된 부됸니 지휘하 적군 제1 기병여단을 기반으로한 적백내전 당시 적군 미화 소설인 붉은 기병에선 술과 음악을 좋아하고 목소리가 크며, 술취해 홧김에 반유대주의적인 폭언을 하면서도 누군가 반유대주의는 부르주아적 반동 차별의식이라 지적하면[20] 정색하며 사과, 자아비판하는 전형적인 거칠면서도 호쾌한 러시아, 카자크 남아쯤으로 묘사된다.

혼인을 3회 했다. 첫째 부인[21]러시아 내전 직후의 뒤숭숭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고, 집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둘째 부인[22]은 가극단에서 성악가로서 활동했는데, 1937년에 동료 성악가의 집에서 불륜 관계를 맺은 채로 니콜라이 예조프가 다스리는 내무인민위원회에 체포되었다. 결국 두번째 부인과는 이혼했으며, 그녀는 굴라크에서 20년간 삽질하면서 무뢰배들에게 윤간을 당했다. 셋째 부인[23]은 둘째 부인의 어머니의 소개로 혼인했다. 셋째 부인은 온순한 주부로서 평생을 살았고, 부부는 평온한 가정을 꾸렸다. 셋째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한때 맞벌이를 고려했지만, 남편의 만류로 육아에 전념한 덕택에 스탈린의 호감을 얻었으며, 그녀의 남편이 관직을 퇴임할 경우에 대비해 개인이 소유하는 별장을 미리 마련한 덕택에 부부가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가 있었다고 한다. 딸인 니나 부됸나야는 훗날 언론인 겸 예술가가 되었는데 구글에 Nina Budyonnaya라 이미지 검색하여 나오는 작품들을 보면 아버지의 농촌 성향은 딸의 예술관에도 그대로 반영된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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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집안 할아버지들이 그렇듯이 손주들에게는 따뜻한 할아버지였다. 1965년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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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의 사진이다. 저 콧수염은 내전 시기부터 그의 대표적인 트레이드마크였다.

6. 매체에서

2차대전 게임 Hearts of Iron 4에서 소련군 원수로 등장한다. 성능은 영 좋지 않다. 그나마 미하일 투하쳅스키와는 다르게 역사적 중점일 때 모가지를 날릴 필요는 없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나, 스탈린이 되었다?!에서는 소련군 원수로서 황혼기에 접어든 기병으로 후사르처럼 용맹하게 싸워 독일군에 큰 피해를 입히는 등 크게 활약하며, 스탈린 전차가 부됸니 전차(SB-1,2,3 등)[24]로 개명된다. 하지만 베리야의 정보누출로 오토 스코르체니의 팔시름예거의 기습에 당해 전사한다. 하지만 죽은 후에도 소련군의 전투의지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며, 어린 병사들에겐 과거부터 나라를 위해 싸워온 전설적인 영웅으로 기억되고, 기병군 출신의 전차병들은 존경하던 원수의 존함을 딴 전차를 몰며 그의 죽음에 대한 원한을 되새길 정도였다. 그리고 주코프같은 소련군 장성들에게는 과거 러시아 제국부터 적백내전에 걸쳐 대조국전쟁까지 군에 전력을 다했던 존경하는 대선배였기 때문에 상하를 가릴 것 없이 복수심에 눈이 벌개져서 독일군을 잡아 죽이는 등 악에 받쳐 독일군을 몰아냈다. 전후엔 칼리닌그라드가 부됸니의 이름을 따 부됸니그라드라고 개명되었다. 훗날 현대로 되돌아온 주인공이 그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꽃으로 수북했다고. 작중에선 연방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인민의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인물이 되었다.

한국 독립 전쟁에서는 소련군 원수로 등장한다. 1938년, 불류헤르가 동아시아 경제블록의 지원을 뒤로 업고 가짜 아나스타샤 황녀 사건을 이용해 소련에 반기를 들면서 2차 적백내전이 발발해 미국이 반공 민병대라 둘러대고 보낸 패튼의 부대가 만주에서 출발해서 중공과 극동, 몽골을 헤집고 단독으로 우랄산맥을 넘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미친놈이라는 칭찬과 함께 아주 기뻐하며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소련군 원수의 몸으로 직접 출진하였다. 어차피 싸우건 안 싸우건 스탈린의 의심병과 숙청을 피하기 어려울거라 여겼고, 죽어야 한다면 친구 손에 피를 묻힐 바에는 차라리 용맹한 자와 싸우다 전장에서 죽을 생각이었다고. 원거리에서 확성기를 통해 패튼과 직접 대화하며 상마초 스타일의 패튼을 아주 마음에 들어하였고[25], 지는 쪽이 술을 대접하기로 내기까지 걸은 상태. 전투가 시작되자 자신은 말 위에 타고 전차를 탄 패튼과 칼싸움을 벌였는데 너무나도 즐거워서 도우러 온 아군에게 위협사격을 가해 쫒아내버릴 정도로 즐기고 있었다. 나중엔 패튼과 정말로 술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는데, 베리야에게 스탈린이 죽은걸 알고 분노하다 친구의 복수라도 해야 하는거 아니냐는 패튼의 설득에 넘어가 전향, 패튼과 모스크바로 가게 된다. 붉은 군대의 원수라는 직책에 걸맞게 연설 한번만으로 그 무모함 반 전투정신 반인 패튼조차 공군 지원이 필요하겠다고 여긴 난공불락의 모스크바를 무장해제하고 무혈로 입성한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전직 제국군 출신 장교로 기병에 탁월한 장군, 소련군의 신속한 진격에 도움이되었지만 독자적 남부 점령에 나서고 폴란드 전선의 패배요인중 하나가 된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본인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남들에게 언급은 자주되는 인물로 등장한다. 주로 술고래로 묘사되며,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달리 한끗발 떨어지는 장군으로 묘사된다. 같은 나이든 장군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에게 패배하고 디스당한다.


[1] 오페라 가수였으며 부됸니와 나이 차이가 20살이나 되었다.[2] 두 번째 부인이었던 올가 스테파노브나의 사촌지간, 시어머니의 중재로 결혼했다.[3] 1938년생.[4] 1944년생.[5] 1939년생.[6] 물론 당대 잘 나가던 동/서양의 남성들을 보면 수염 스타일이란 당대 문물을 받아들인 쪽 기준으론 항상 저 스타일이 흔했다.[7] 코마루프(Komarow) 전투. 사실 이 전투는 부됸니 입장에서는 흑역사급 전투이다. 노농적군 1만 7,500명과 폴란드군 1천 7백명이 싸워서 적군이 전사자 4천을 내고 대패했다, 그나마 폴란드군 숫자가 워낙 적어서 전멸은 피했으니 다행.[8] 그나마 이것도 러시아 내전 이후 자본주의 국가에 포위되어 있다는 소련의 공포심이 낳은 결과였다. 당시 소련은 경공업이고 농업이고 싸그리 팽개치고 중공업에 모든 능력을 몰빵했고, 그 결과는 소련 중공업의 기형적인 발전과 홀로도모르라는 대참사였다.[9] 한 손 완력으로 요원 3명을 제압했다는 썰도 있다.[10] 독일 제12군은 훗날 베를린 공방전 무렵 즈음에 제9군과 함께 싸운것으로 유명한데 이 12군과 전쟁 말기의 12군은 다른 부대였다. 그리스를 점령하고 주둔하게 된 12군은 E집단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집단군으로 편성할 의도가 있었으나 전황이 악화로 증강은 이루어지지 않아서 명칭만 집단군이지 실질적으로는 그냥 야전군 규모였다. 전쟁 말기 쯤에는 발칸반도를 북상하여 오스트리아 부근에서 종전을 맞았다. 베를린 공방전에서 등장하는 12군은 신편부대였다.[11] 포로가 될 것을 우려해 자살했다는 설도 있으며, 독소전쟁에서 전사한 소련 장성들 중 한 사람이다. 다른 장성급 전사자로는 1944년에 우크라이나 반소 게릴라에게 저격당한 니콜라이 바투틴 대장과 1945년에 독일군을 추격하다가 전사한 이반 체르냐홉스키 대장이 등이 있다.[12] 물론 부됸니가 직전까지만 해도 다른 전선에 부임하고 있었으며, 실질적으로 그가 전쟁을 준비할 시간이 1달도 되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 점을 알고 필요한 게 있느냐 묻던 사령부에게 경기병을 요구한 것읏 실책이다.[13] 부됸니와 보로실로프의 가장 큰 차이가 여기에 있다. 부됸니는 독소전쟁 당시에도 기병, 나아가서는 그 연장선상인 우회기동 등에 대해선 여전히 세계구급 전문가 특유의 안목을 보여주지만 보로실로프는 러시아 내전 당시 발휘했던 군사적 능력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 대규모 국제전인 독소전쟁과 어디까지나 내전에서 활약한 수준에 불과한 보로실로프의 경험 사이에 있는 차이 때문이라 말하기도 힘든 게, 러시아 내전은 말만 내전이지 실제로는 서구 각국의 지원을 받은 군사 전문가들이 두각을 드러낸 일종의 국제 대리전이었고 보로실로프는 비록 정치장교 출신이었다고는 하나 그 당시에 적지 않은 활약을 올렸기 때문이다.[14] 단순히 그 뿐이라면 선구안이 있던 구데리안과 그를 따라오지 못한 독일 지휘관들 사이의 갈등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군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집단인 만큼 상당히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집단이라는 게 문제였다. 실제로 상기한 문제점 때문에 구데리안은 이론 도입 이전은 물론이고 전공을 올린 이후에도 군 내부 평가는 최악이었고, 그의 커리어는 평탄하지 못했다. 만약 히틀러가 프로이센 출신의 군 상층부를 불신하고 견제하기 위해 독단적으로 밀어주지 않았다면 구데리안 또한 이론가 중 한 명으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한 마디로, 구데리안의 선구안이 정답에 가까웠던 건 틀림없지만 그건 구데리안이 대단했던 거고 그조차도 운이 좋지 않았으면 묻혔다.[15] 당장 유능한 기병 장교였던 부됸니가 우회기동의 무서움을 모를 리도 없었다. 실제로 관련된 의견을 최고 사령부에 진언하기도 했거니와, 그게 기갑 병과가 생기기 전부터 기병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전차군의 가치를 알고 있었나 하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있어도, 후방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진격하는 적이 아군의 보급선과 후퇴선을 차단하려고 하는 건 기병 장교가 보기엔 너무나도 이유가 명확한 행동이다. 주변 지역에서 가용한 소련군은 모두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 밀집하거나 시간을 벌기 위해 현지를 사수하는 등, 둘 중 하나인 상황에서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알고 있던 그는 사석 취급받은 자신의 부대가 포위섬멸당하기 전에 군대를 철수시키고 싶었지만 당시 상황 상 그건 불가능했다.[16] 이 당시 부됸니는 우크라이나 남서부 지구의 총사령관이었을 시기부터 스타프카에 보낸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1. 적이 돌파하기 전의 시점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는 것은 현 전력으로는 불가능하다. 2. 6군과 12군이 제자리를 사수한다면 며칠내로 독일군에게 포위섬멸당할 것이다.“[17] 이후 1941년 9월 11일 키예프가 완전히 포위되기 직전 그가 모스크바에 보낸 요청은 ”남서부 전선군을 노브고로드-시베르스키와 크레멘추크 방향에서 포위하려는 적의 속셈은 누구에게나 뻔하다.“ 라며 모든 병력을 동쪽으로 후퇴시키던가 아니면 키예프를 소개해 병력을 확보하고 줄어든 전선을 지키자고 요청한 걸 보면 키예프 전투의 패배를 그에게만 묻는 것은 너무한 일이다. 출처는 '소비에트 스톰'이다.[18] 당장 그 독일군도 밀려나가는 상황이 되자 모든 전선에서 병력들이 증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때 그나마 버틴 게 바로 그 유명한 총통의 소방수 발터 모델인데, 결국 전쟁 마지막엔 포위선 안에서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이런 상황은 개인이 유능하고 무능하고 이전에 처음부터 불가능한 임무였다고 평할 수 있다.[19] 초기의 전차들의 기동성과 신뢰성은 그야말로 끔찍한 수준이었다. KV쇼크를 일으켰다는 그 KV전차의 변속기는 망치로 때려야 움직일 수 있다는 말까지 있으니 수천년간의 운용경험이 쌓인 기병에 비해 지휘관 입장에서 전혀 신뢰성이나 전술적 활용이 답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20] 적백내전 당시 백군이나 적군이나 대규모 징집을 하면서 종종 러시아동유럽 민간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적 의식이 유대인에 대한 약탈과 살해 등으로 표출되었다. 이런 와중 적군은 그래도 이념이 이념이니 공식적인 차원에선 반유대주의를 퇴폐적 반동적 인종주의라 비판하며 억제하려고 했던 반면, 백군은 아예 노골적으로 공산혁명 자체를 유대인들이 일으킨 반기독교적 음모로 선전하며 공식적으로 밀었고, 당시 러시아 백군의 반유대주의+반공주의 콤비 사상은 오래 지나지 않아 전간기 유럽의 파시스트극우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21] 농사꾼의 딸이었다.[22] 노동자의 딸이었다.[23] 둘째 부인의 가까운 친척이었다.[24] 키릴 문자를 반영하면 СБ 전차가 된다.[25] 부됸니는 말 엉덩이만 아는 사람이라 평가받을 정도로 기병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사람인데 패튼 역시 말 대신 차량이나 전차를 타고있을뿐 전장의 기름과 화염 냄새를 즐기는데다 점령지 병력 차출에선 자진입대나 '장난' 등 해병문학을 찍는 등 하는 짓은 상마초에 중세시대 기사 그 자체라 부됸니의 성향에 딱 맞아떨어진것. 패튼과 만난 에피소드의 제목도 유유상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