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7대 발트 군관구 사령관 이오시프 구사콥스키 Ио́сиф Гусако́вский | Iosif Gusakovsky | |||
본명 | 이오시프 이라클리예비치 구사콥스키 (러시아어) Ио́сиф Ира́клиевич Гусако́вский Iosif Irakliyevich Gusakovskiy | ||
이오시프 이라클리예비치 후사코우스키 (벨라루스어) Іосіф Іракліевіч Гусакоўскі Iosif Iraklijevič Husakoŭski | |||
출생 | 1904년 12월 25일[1] | ||
러시아 제국 모길료프현 체리콥스키구 (現 벨라루스 모길료프주 크리쳅스키구) | |||
사망 | 1995년 2월 20일 (향년 90세) | ||
러시아 모스크바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 |||
묘소 | 노보데비치 묘지 | ||
재임기간 | 제7대 발트 군관구 사령관 | ||
1959년 11월 16일 ~ 1963년 3월 14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형제자매 | 5남[2] 2녀 중 ?남 | |
복무 | 노농적군 | ||
1928년 ~ 1937년 1941년 ~ 1946년 | |||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 |||
1946년 ~ 1992년 | |||
최종 계급 | 대장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 ||
병과 | 기갑 | ||
주요 참전 | 독소전쟁 | ||
주요 서훈 | 10월 혁명 훈장 레닌훈장 (4회)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적기훈장 (4회) 적성훈장 (2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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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군인.2. 생애
가난한 벨라루스인 농민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구간, 어머니는 도시 외곽 농장에서 일했으며 구사콥스키는 시골 학교 졸업 후 어머니를 도와 노동자로 근무했다. 1928년 10월 노농적군에 자원입대해 1931년 레닌그라드 고등기병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34년 5월부터 북캅카스 군관구 제12기병사단 제12기계화연대 부연대장을 역임했다.2.1. 대숙청
1937년 5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추방돼 6월경 반공 가문 출신이란 누명을 썼다. 다행히 NKVD에 체포되진 않고 외딴 지역의 노동조합 내 비서로 좌천되는 선에서 목숨을 부지했다. 탄광에서 안전감독관으로 근무하다 1938년 7월 다시 군복을 입게 됐다. 1941년 4월부터 북캅카스 군관구 제103차량화사단 제147전차연대에서 복무했다.2.2. 제2차 세계 대전
2.2.1. 독소전쟁
1941년 11월, 제50군 제131전차대대 참모장으로 임명돼 스몰렌스크 전투, 모스크바 공방전에 참전했다. 1943년 8월 12일 쿠르스크 전투 당시 독일 육군이 가한 포격으로 인해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입원했다. 퇴원 후 1943년 9월 20일 제11근위전차군단 제112전차여단장으로 임명됐다. 1943년 초 구사콥스키는 몽골 인민공화국 국민들의 헌금으로 생산된 전차 53대를 받았다.[3] 1944년 9월 23일,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법령에 따라 레닌훈장,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당시 필리카강을 건너 교두보를 빠르게 점령해 5일 만에 워비치 탈환했다. 구사콥스키의 부대는 다른 기갑부대보다 300km 정도 앞서 전선의 선봉에 섰다. 4개의 대도시를 탈환한 뒤 250개의 소규모 진지, 전차 10대, 자주포 12문, 장갑차 59대, 야포 43문, 병사 및 장교 4천여 명을 사살한 공로를 인정받아 1945년 4월 6일 두 번째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