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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81e05><colcolor=#fff> 소비에트 연방 제11·12대 해군 총참모장 아르세니 골로프코 Арсе́ний Головко́ | Arseny Golovko | |||
본명 | 아르세니 그리고리예비치 골로프코 Арсе́ний Григо́рьевич Головко́ Arseny Grigoryevich Golovko | ||
출생 | 1906년 6월 23일 | ||
러시아 제국 테레크현 모즈도크구 프로흘라드나야 마을 (現 러시아 북캅카스 연방관구 카바르디노-발카리야 공화국 프로흘라드나야) | |||
사망 | 1962년 5월 17일 (향년 55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 |||
묘소 | 노보데비치 묘지 | ||
재임기간 | 제6대 카스피해 전단 사령관 | ||
1938년 ~ 1939년 | |||
제5대 북방함대 사령관 | |||
1940년 7월 ~ 1946년 4월 | |||
제11대 해군 총참모장 | |||
1947년 2월 ~ 1950년 2월 | |||
제12대 해군 총참모장 | |||
1950년 2월 ~ 1952년 8월 | |||
제3대 제4함대 사령관 | |||
1952년 8월 ~ 1955년 12월 | |||
제22대 발트함대 사령관 | |||
1956년 1월 ~ 1956년 11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d81e05><colcolor=#fff> 배우자 | ???[1] 키라 니콜라예브나 골로프코[2][3] | |
자녀 | 아들 미하일[4] 딸 나탈리야[5] | ||
복무 | 노농적군 해군 | ||
1925년 ~ 1946년 | |||
소비에트 해군 | |||
1946년 ~ 1962년 | |||
최종 계급 | 상장 (소비에트 해군) | ||
주요 참전 | 스페인 내전 독소전쟁 | ||
주요 서훈 | 레닌훈장 (4회) 우샤코프 훈장 1등급 (2회) 적기훈장 (4회) 적성훈장 (2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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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920년 마을 최초로 콤소몰에 가입했고 1925년 모스크바로 와 티미랴제프 농업 대학에 입학했지만 몇달 후 1925년 11월 5일 콤소몰에 의해 해군에 징집되었다.
1925년 발트해 수병으로 시작한 골로프코는 곧바로 사관학교로 보내져 1928년 프룬제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지휘참모 특별 과정을 수료하며 빠르게 고위장교 루트를 밟았다.
1936년 해군대학에 입학했을때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 학업을 중단하고 군사고문단에 자원해 스페인에 파견되었다. 카르타헤나 항구의 해군기지 군사고문으로 일하다 소련으로 돌아와 1938년에 해군대학을 졸업했다.
졸업한 그는 북방함대 구축함 사단장, 북방함대 참모장을 지내다 1938년 7월엔 카스피해 전단 사령관, 1939년 7월엔 아무르강 소함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1940년 7월 34세의 나이로 북방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2.2. 독소전쟁
개전 공식 발표가 있었을 때 내 집무실에는 군사위원회 위원 니콜라예프, 참모장 쿠체로프, 정치부장 토리크가 있었다. 우리 중엔 35살을 넘는 사람이 없었고, 이렇게 광범위한 영해에서 함대를 운영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의 눈에서 말로 표현 못할 감정들을 읽었다.
회고록 «Вместе с флотом» 中
당시 북방함대는 드넓은 북극해를 담당하게 됐음에도 발트함대와 흑해함대에 우선순위가 밀려 장비와 장교들이 턱없이 부족했다. 골로프코는 이런 환경 속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북방함대 사령관을 지내며 무르만스크 방어 및 북극 방어, 북극항로로 보내지는 랜드리스 보급선 보호, 독일-노르웨이 통신선 교란, 펫사모-키르케네스 공세 등을 지휘했다.회고록 «Вместе с флотом» 中
2.3. 전후
1946년엔 소련 해군 부참모장, 1947년에 소련 해군 참모장 겸 해군 제1부총사령관으로 지내다 1950년엔 총사령관 겸 해군 제1차관으로 임명됐다.1951년 초, 해군 수석 감찰관 고르데이 레브첸코 제독이 해군부의 상황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제출했다. 내용은 해군장관 유마셰프 제독의 잦은 질병으로 인해 사실상 골로프코 제독이 해군부의 권력을 장악했지만 부서를 제대로 조직하지 못하고 중요한 안건들이 몇달째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내용들이었다.
1951년 해군 최고 군사회의가 열려 유마셰프 제독이 해임되고 쿠즈네초프 제독이 해군장관으로 재임명됐다. 골로프코도 비판을 들었지만 스탈린은 마지막에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결국 1952년 발트함대로 좌천당하고 1956년 1월부터 11월까지 발트함대 사령관을 지냈다.
1956년 11월 다시 소련 해군 부사령관으로 복귀했다.
1961년 10월 노바야제믈랴에서 진행된 차르 봄바 실험에 참여했다가 방사능에 피폭당했다.[6] 집에 돌아온 골로프코는 심장 통증을 호소했고 1962년 봄에는 숨을 못 쉬기 시작했다. 아내의 고집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병문안 온 아내를 볼때마다 "나를 집에 데려가 줘."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골로프코의 피부는 핏기가 빠진 거 같이 창백해졌고 머리가 백발로 세면서 노인처럼 변해갔다. 결국 같은 해 5월 17일 55세에 불과한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아내에게 한 마지막 유언 역시 "집에 데려가 줘."였다.
3. 여담
- 영국과 미국 해군 제독들에 비해 소련 해군 제독들은 전체적으로 젊은 편이었고 골로프코는 1906년생으로 함대사령관 중 최연소였다. 한번은 골로프코보다 2배정도 나이가 많은 한 영국 제독이 "러일전쟁 때는 무슨 함선을 지휘하셨습니까?"라며 골로프코의 나이를 가지고 농담하기도 했다고 한다.
- 그를 기리기 위해 어드미럴 고르쉬코프급 호위함 3번함이 아드미랄 골로프코(Адмирал Головко)로 명명됐다.
- 쿠즈네초프가 간첩혐의로 탄압당할 때 비난하는 것을 거부해 찍혔다는 말도 많다.[7] 실제로 구축함의 실패 테스트를 은폐했다는 혐의로 기소당했고, 자신도 징역을 받을 거라 생각해 감옥에 가져갈 짐을 꾸리고 체포를 기다렸으나 다행히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
4. 대중매체
- 북방함대의 정찰특수부대 이야기를 다룬 2018년 4부작 미니 시리즈 <검은 코트>에 나온다.[8] 배우는 알렉산드르 로박.
- 2022년 8부작 드라마 <바렌츠해>에 등장한다. 배우는 세르게이 마호비코프.
-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전략게임인 Hearts of Iron IV에서 소련의 장군진으로 등장한다.
- 같은 게임의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러시아 공화국의 최고사령부 참모와 해군 지휘관으로 등장한다, 다만 적백내전이 발발하면 적군 참모로 갈아타는 건 덤.
[1] 1944년에 의료사고로 사망했다. 나중에 두 번째 아내 키라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해 낙태수술을 하다가 사망한 것이라고 증언했으나 검증되지는 않았다.[2] 성별 구분이 없는 성씨.[3] 영화 배우다.[4] 아버지를 따라 해군에 입대해 대령까지 달았다.[5] 어머니를 따라 배우가 됐고, 나탈리야의 아들도 배우가 되어 3대 배우 가문이 됐다.[6] 당시 방사능의 위험성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대피소에서 나와 버섯구름을 직접 지켜봤다고 한다.[7] 골로프코를 북방함대 사령관으로 앉힌 게 쿠즈네초프라 명백한 쿠즈네초프 라인으로 평가받고 있어 더 그랬다.[8] 어째선지 성이 고로빈으로 개명돼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