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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7대 로켓 및 포병군 사령관 세르게이 바렌초프 Серге́й Варенцо́в | Sergey Varentsov | |||
본명 |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바렌초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Варенцо́в Sergey Sergeyevich Varentsov | ||
출생 | 1901년 9월 2일 |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현 드미트로프구 드미트로프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주 드미트로프) | |||
사망 | 1971년 3월 1일 (향년 69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노보데비치 묘지 | ||
재임기간 | 제14대 포병관리국장 | ||
1952년 1월 ~ 1955년 4월 | |||
제7대 로켓 및 포병군 사령관 | |||
1953년 3월 ~ 1963년 3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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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 1946년 | |||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 |||
1946년 ~ 1963년 | |||
최종 계급 | 포병상원수 → 소장[1]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 ||
병과 | 포병 | ||
주요 참전 | 러시아 내전 독소전쟁 | ||
주요 서훈 | 레닌훈장 (4회→3회) 적기훈장 (3회) 수보로프 훈장 1급 (1회) 쿠투조프 훈장 1급 (2회) 적성훈장 (1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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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군인, 최종 계급은 포병상원수였으나 소장으로 강등당했다.2. 생애
1901년 9월 2일 모스크바현의 드미트로프에서 노동자 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회계과정을 수료하고 회계사로 일했으며 1919년 3월에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
러시아 내전 당시 남부전선에서 싸웠고, 1921년 3월에는 크론슈타트 반란 진압에도 참전했다.
2.1. 전간기~제2차 세계 대전
1921년에는 데츠코예 셀로 중포병 과정을 이수받고, 1926년에는 제1포병학교 전체 실기시험에서도 합격했으며, 1931년에는 포병지휘통제 과정을 졸업한다.1934년에는 하리코프 군관구 산하 제41소총사단 포병연대 부연대장으로 발령받았다가 1937년에는 연대장으로 승진했고, 1939년 3월부터는 41소총사단의 포병대장이 되었다.
1940년 11월부터 키예프 군관구 산하 제6군 포병사령관을 역임했고, 1941년 3월부터는 제6소총군단의 포병대장으로 발령받게 된다.
2.2. 독소전쟁
1941년 독일이 국경을 넘어오자 바렌초프는 남서부 전선에서 방어전을 개시했고, 키예프 전투에서는 포병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고 포위망을 뚫기 위해 궤멸되거나 와해된 부대 소속의 병력을 흡수했으며, 이 공로로 11월 6일에 레닌훈장을 수여받음과 동시에 포병소장으로 진급하고 된다.1941년 11월에는 남서부전선 제40군의 포병대장으로 임명되었고 옐츠 공세작전과 바르벤코보-로조프 공세,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 보로네시 전투에도 참전했다.
1942년 9월에는 보로네시 전선 제60군 포병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943년 2월 4일에는 포병중장으로, 같은 해 10월 20일에 포병상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바렌초프는 1942년부터 종전 때까지 보로네시 전선의 포병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이후 자신이 훌륭한 포병 사령관임을 입증하게 되며 1943년 1월, 하리코프 탈환을 위한 오스트로고즈크-로소쉬 공세 포병 전력을 지원하게 된다.
1943년 2월부터 3월까지 제3차 하리코프 공방전 동안 포병 전력을 지원했고, 쿠르스크 전투, 드네프르 강 전투, 코르순-체르카시 전투와 로브노-루츠크 공세, 프로스쿠로프-체르노프시 공세, 르보프-산도미에레츠 공세,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그리고 베를린 공방전에서도 전선군에 필요한 포병 전력을 지원했다.
2.3. 종전 이후
1945년 7월부터 중앙군집단의 포병대장으로 있다가 1947년 귀국하여 카르파티아 군관구 포병사령관으로 발령받았고, 1951년 1월에는 소련군 총참모부 사관학교에서 고등학술 과정을 졸업했다.1951년 10월부터 자캅카스 군관구 포병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955년 3월 11일에는 포병원수로 진급했다.
1961년 5월 6일에는 포병상원수로 진급했고 1961년 제22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소련 최고회의 연방평의회 위원을 지냈다.
그렇게 유유히 말년을 보내는가 싶었으나...
2.4. 올레크 펜코프스키 사건
1962년 말, 1944년부터 1년 동안 바렌초프의 부관으로 지냈던 올레크 펜코프스키가 미국과 영국의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종전 이후부터 연락이 없다가 50년대 중반부터 다시 연락이 닿자 바렌초프는 펜코프스키의 부탁에 일자리를 알선하게 되었고, 제르진스키 사관학교의 책임자로 취업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다만 이 시점의 펜코프스키는 서방 정보기관에 포섭된 상태는 아니었으며 GRU에서 사건을 조사하는 내내 바렌초프가 펜코프스키에게 군사기밀을 넘긴 정황이나 바렌초프가 제3자를 통해 펜코프스키에게 군사기밀을 넘긴 정황은 확인되지 않았다.
펜코프스키 사건에서 바렌초프는 그저 증인으로 출석했으나 옛 부관과의 친분의 댓가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우선 1963년 3월 12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법령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박탈당했고, 다음 날에는 포병상원수에서 소장으로 4계급 강등당했다.
1963년 6월 21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회 결의안 따라 바렌초프는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서 제명당했으며 일련의 모든 처벌의 이유는 형식적인 "정치적 경계심의 상실과 부적절한 행동"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바렌초프가 펜코프스키를 사관학교에 채용한 뒤에야 CIA랑 MI6가 펜코프스키를 포섭했다는 사실과 바렌초프가 조국에 먹칠하지 않았고, 바렌초프의 "부적절한 행동"이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같은 해인 1963년에 군에서 강제로 예편당한다.
그리고 다른 국가에서 수여받은 훈장과 상의 박탈과 관련하여, 판결문의 본문은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다.[3]
2.5. 말년과 사망
바렌초프는 모스크바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71년 3월 1일에 사망하였고, 사후 유해는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2.6. 사후
바렌초프가 죽은 뒤에도 친척과 동료들이 그의 복권을 위해 수많은 시도를 해왔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소련 붕괴 이후에도 사법처리나 형사기소를 당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연방 법원에서도 복권시키기에는 난감한 사항이고, 바렌초프에 대한 모든 보복은 행정처분 및 당내 징계로 처리됐으며, 연방영웅 칭호 반환에 대해서도 법원의 판결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웅 칭호를 박탈당한 걸 감안해도 아직까지도 복권되지 못한 상태다.3. 서훈 내역
4. 기타
- 1940년 제41소총사단 포병대장 시절,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세묜 티모셴코가 전투테새 검열을 실시하자 실사격 훈련에서 매우 높은 정확도가 나왔다고 한다.[9]
- 1963년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불명예스럽게 옷을 벗은 이후부터 소련의 역사책이나 관련 문헌, 소비에트 군사 백과사전에서조차 바렌초프의 이름이 지워졌으며, 바렌초프에 관한 정보는 소련 붕괴 이후에 출판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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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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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3년 올레크 펜코프스키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4계급 강등 및 예편.[2] 간첩 사건에 연루되면서 박탈.[3] 일각에 의하면, 바렌초프가 흐루쇼프 공산당 제1서기와 추이코프 지상군 총사령관과의 의견 차이가 심하게 갈린 적이 많아서 그런지 유난히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4] 1945년 5월 29일 수여, 1963년 3월 12일 박탈.[5] 1941년 11월 6일(1회), 1945년 2월 21일(2회), 1945년 5월 29일(3회), 1961년 9월 14일(4회) 수여. 이 중에서 영웅 칭호와 함께 자동 수여된 세 번째 훈장이 박탈됨.[6] 1944년 1월 10일 수여.[7] 1943년 8월 11일, 1944년 8월 25일.[8] 1943년 2월 14일 수여.[9] 이에 티모셴코는 엄청 흡족해하며 바렌초프에게 포병대의 전투력을 최고로 끌어올린 공로로 금시계를 수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