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의 일부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astern_Front_1941-12_to_1942-05.png | ||
날짜 | ||
1942년 5월 12일 ~ 28일 | ||
장소 | ||
소련 우크라이나 SSR 하리코프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틀:깃발| ]][[틀:깃발| ]][[루마니아 왕국| ]] |
지휘관 | [[틀:깃발| | ]][[틀:깃발| ]][[세묜 티모셴코|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 [[틀:깃발| ]][[틀:깃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쿠르트 플루크바일 | ]][[틀:깃발| ]][[페도어 폰 보크| ]]
결과 | ||
추축군의 압도적인 승리 | ||
영향 | ||
청색 작전의 발동 | ||
전력 | 76만 5300명 전차 1,176대 자주포 300문 항공기 926대 | 병력 35만 명 전차 1천여 대 항공기 700대 |
피해규모 | 사망, 실종, 포로 17만 명 부상 10만 6천여 명 화포 2,086문 손실 전차 1,250대 파괴 항공기 542대 손실 | 사망, 실종, 포로 2만여 명 항공기 49대 손실 조종사 12명 사망 조종사 98명 실종 |
1. 개요
파일:external/www.militaryeducation.org/Entry-7.-Second-Battle-of-Kharkov.jpg1942년 봄에서 여름까지 소련 우크라이나 SSR 지역의 하리코프를 둘러싸고 벌인 소련군과 독일군의 전투, 보통 청색 작전(Fall Blau)까지 포함해서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제1차 하리코프 공방전인 1941년 10월 1일~29일까지 소련 우크라이나 SSR 하리코프에서 벌어진 전투에 이어서 하리코프에서 일어난 공방전이기 때문에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으로 칭한다.
이 전투는 독일군과 소련군 각각 공세계획을 세웠고, 소련군이 먼저 공세를 시작했으나, 조금 늦게 공세를 준비하던 독일군에 격퇴되고, 독일군은 이 여세를 몰아 역공세를 취하며 볼가 강 연안의 도시 스탈린그라드까지 진출했다. 그러므로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은 하리코프를 둘러싼 전투 뿐만 아니라 1942년 5월부터 8월부터 시작된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전까지의 소련 남부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지칭한다.
2. 1942년 봄의 동부전선
자세한 내용은 청색 작전 문서 참고하십시오.3. 양측의 계획
3.1. 독일군: 청색 작전
독일군은 모스크바 전투에서 참패했고, 바르바로사 작전의 최종목표 A-A선(백해 연안 아르한겔스크-카스피해 연안 아스트라한)은 구경하지도 못하였다. 그제서야 독일군의 주요 지휘관들은 소련군의 군사적 잠재력이 전쟁전 예측한 것보다 훨씬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1] 그러나 원래부터 자신의 상상력에 의존한 전략을 짜던 히틀러는 전혀 정신을 못차리고 더욱 대담한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히틀러의 전쟁목표는 원래부터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보다는 소련 남부의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와 대유전지대인 캅카스였다. 그러므로 1942년의 목표는 모스크바 대신 남방으로 잡았다. 즉, 모스크바 전투 패배로 상당히 약화된 중부집단군은 일단 전선을 유지시키고, 대신 소련군 부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손실이 심각하던 남부집단군을 보강하여 공세를 편다는 것이었다. 남부집단군은 A/B집단군으로 나뉘어 우크라이나 전역을 탈취하고 볼가 강까지 진출하도록 되어있었다. 이후 B집단군(사령관 바익스 원수)은 스탈린그라드에 닿아 소련의 볼가 강 수운을 끊고 소련군의 남하와 도강을 저지하며 A집단군(사령관 클라이스트 원수)은 캅카스까지 내려가 유전지대를 탈취한다는 극히 야심찬 계획이었다.[2] 총 진격거리는 1000km를 넘으며, 궁극적으로는 적과 아군 모두를 경악하게 하는 과격한 기동공세로 북아프리카에서 동진하는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과 중동에서 합류한다는 원대한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3]
히틀러는 원래 이 작전명을 게르만족의 전설적인 영웅의 이름을 따서 처음에 "지크프리트 작전"이라고 명명했으나, 회심의 한방으로 소련을 멸망시키겠다던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상기했음인지 전통적으로 색깔을 이름으로 붙이던 과거로 돌아가서(예를 들어 폴란드 침공은 "백색 작전 - Fall Weiß", 프랑스 침공은 "황색 작전 - Fall Gelb") "청색 작전 - Fall Blau"으로 명명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지나치게 목표가 거대한 것이었으며, 안그래도 바르바로사 작전-모스크바 전투로 인한 엄청난 손실로 병력부족에 시달리는 독일군에게는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군은 이 공세에 엄청난 수의 추축동맹국 병력을 포함시켰다. 이들은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그리고 크로아티아(의용병)군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무장수준이나 훈련도는 매우 불충분했고, 그렇기 때문에 독일군은 이들을 2선에 배치하고 후방에 있던 독일군을 일선에 세운다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문제는 독일군이 너무 대담한 작전을 세우는 바람에, 독일 동맹국 병력이 맡고 있는 수백킬로미터에 달하는 측면이 소련군에 직접 노출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이런 문제점은 후에 독일군이 참패하는 원인이 된다.
1942년 6월, 독일군의 정보장교가 탄 비행기가 소련군 영역에 불시착했다가 포로가 되었고, 독일군의 이와 같은 작전안은 소련군에게 모조리 넘어갔으나 히틀러는 이에 책임있는 지휘관인 슈툼메(Stumme) 중장만 군법회의에 회부하고[4] 작전안을 그대로 실행했다.
3.2. 소련군의 작전안
스탈린과 스타프카 고위 장성들은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군을 격퇴했고, 중부집단군이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히틀러가 모스크바 대신 남방으로 공세의 화살을 돌릴 것이라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오직 모스크바의 수비에만 제일 우선순위를 두었다. 사실 이것은 독일군 장성들도 주장하던 것이었기 때문에, 히틀러가 정상적인 전략-전술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당연히 소련군 지휘부의 판단이 옳았겠지만, 소련군 수뇌부는 히틀러가 정상인과는 다른 변태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계산에 넣지 못했기 때문에 엉뚱한 방면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70여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는 중부집단군을 가장 큰 위협으로 보고, 모스크바 주변에 상당한 수비병력을 할당하였다.하지만 스탈린은 히틀러의 라이벌답게 여기서 얌전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고, 결국 고위 장성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춘계공세를 계획했다. 이는 레닌그라드로부터 흑해까지 이르는 수천킬로미터 전선의 7개 방면에서 동시다발적인 공세를 펴서 독일군을 소련에서 몰아낸다는 것이었다. 소련군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 대장과 총참모장 바실렙스키 중장은 모스크바 전투 반격 당시부터 "독일군은 아직 막강하고, 우리는 아직 준비가 덜되었다"고 계속 이를 말렸으나, 강철의 대원수는 히틀러 못지 않게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는지라 붉은 군대 고위 지휘관들은 실패가 뻔히 예상되는 공세를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3월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춘계공세는 몇몇 지역에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냈고, 이는 스탈린을 고무시켰다. 스탈린은 더욱 대담해져서 5월부터 공세를 펴서 오룔과 로스토프 일대에서 대치중인 독일 남부집단군을 섬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는 도네츠 강 연안 이지움을 발판으로 전선 전면의 독일 제17군을 뚫어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더 나아가 1941년 10월 이래로 점령되어 있는 하리코프를 탈환한다는 극히 야심만만한 계획을 세웠다.[5] 이를 지휘할 병력은 약 60만의 남서전구 소속 병력이었고, 겨울전쟁의 맹장 세묜 티모셴코 원수(전 국방장관)와 정치장교 흐루쇼프 중장이 이 공세를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다.
티모셴코는 남부전선군을 크라스노그라드로, 남서전선군을 수미로 보내 각각 남북으로 틀어 하리코프를 포위하고 독일 제17군을 제거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를 위해 그는 스탈린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스탈린은 1,500대의 전차를 보내며 화답했다.
4. 소련군의 선공
5월 12일 오전 6:30분 소련군은 공세를 시작했다. 소련군의 통상작전교리대로 포병이 1시간 동안 독일군의 거점에 맹포격을 퍼부은 후, 7:30분부터 볼찬스크와 바르벤코보 두 방면에서 지상병력의 공세로 나왔다. 선봉대인 남부전선군 소속 제9군과 제57군은 무려 30km를 돌파하는 경이로운 전과를 올렸다. 이에 티모셴코는 돌파구 확대를 위해 예비대를 집중 투입하면서 전진했다.티모셴코는 크라스노그라드를 선점해야 돌파구를 더 넓힐 뿐만 아니라 공세 전체가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해당 방면으로 기갑전력을 몽땅 투입해서 돌파력을 증강했다. 소련의 공세에 독일 제17군은 정신을 못차리고 두들겨 맞았다. 간신히 구멍을 막으려는 분투를 이어갔지만 전망이 그리 밝지 않았다.
5. 독일군의 역습
하지만 소련의 남부전선군이 신나게 돌파해 제17군을 두들기고 있는 동안 북쪽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독일 제6군과 제1기갑군에 의해 남서전선군이 가로막혀 전진을 못하고 있던 것이다. 이는 청색 작전을 위해 제6군이 전력 정비를 완료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은 전술한 이지움 방면의 돌출부 제거를 위해 제6군에 대규모의 전력 증강을 진행하였고 대부분이 마무리 단계였다. 이 덕분에 제6군은 당장 전투에 투입 가능한 상태여서 소련의 전진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당장의 방어는 얼마 못가 무너질 것으로 예상하고 OKH에 지원을 요청했다.OKH는 한참 청색 작전을 준비하던 중, 갑작스러운 소련군의 공세에 당황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 반격작전을 수립했다. 소련군의 공세지구 이외의 병력은 청색 작전을 준비중이거나 세바스토폴 공방전에 투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지상병력을 하리코프에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에 히틀러는 세바스토폴 전역을 지원하던 제4항공군에게 하리코프까지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제4항공군 또한 여력이 극히 부족한 상태로 히틀러에게 불가 의견을 개진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어떻게 해서든 지원하라는 명령을 다시 내렸고 결국 제4항공군단을 하리코프로 이동전개시켰다. 이에 제8항공군단장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상급대장은 "공군이 육군의 걸레냐!"라고 격분하여 반대의사를 보냈지만 결정은 바뀌지 않았다.
쿠르트 플루크바일이 지휘한 제4항공군단은 즉각 지원에 돌입했다. 첫 목표는 돌파구 확대를 담당한 소련 제38군이었다. 당시만 해도 소련 공군은 바르바로사 작전때 2만여기의 전투기를 잃은 후유증으로 하리코프 방면의 공세를 공중지원한다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5월 14일이 되자 제공권을 독일에게 완전해 내주었다. 이로 인해 지상에서 작전하는 소련군은 루프트바페의 맹폭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때문에 소련군은 큰 손실을 입었고, 하리코프 방면의 제6군은 소련군에 비해 적은 병력에도 효과적으로 공세에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소련 남부전선군 선붕인 제9군과 제57군이 어느새 독일군에게 둘러쌓이기 시작했다. 티모셴코는 이들에 대한 활용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5월 15일 소련은 공세종말점에 이르고 말았다.
5월 17일,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한 제1기갑군 소속 독일 제3기갑군단과 44군단이 제6 항공군단의 지원과 함께 반격에 나섰다. 순식간에 소련 배후로 치고 들어간 이들은 무려 10km를 돌파했고 소련군의 여러 부대들은 패퇴하면서 크라스노그라드 일대에 포위될 위기에 빠졌다. 이 손실이 너무 크자 티모셴코는 스탈린에게 증원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사단을 시장에서 팔면 사주겠지만 시장에서는 사단을 팔지 않는다. 증원은 불가능하다."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며 이를 거절하였다. 손실이 너무 큰 것에 주목한 바실렙스키는 스탈린에게 후퇴를 상신했지만, 자신이 수립한 계획을 고집한 스탈린은 이를 거부했다.
5월 18일, 소련군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고, 스탈린은 다시 한번 후퇴요청을 불허했다. 5월 19일에는 그동안 수세에 있던 제6군마저도 공세로 나왔고, 북부의 남서전선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그제서야 공세취소를 허락하고 방어대형을 취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역공을 당한 소련군은 포위되기 시작했으며, 엄청난 병력 손실을 입었다. 참극이 벌어진 상황을 지켜본 티모셴코는 "이건 너무하다"며 혼잣말을 하면서 혼자 후방으로 도주했다.
5월 21일 티모셴코의 소련군은 부대 재편성을 가까스로 마치고 독일군 포위망에서 탈출해 후퇴에 나섰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실패로 끝났으며, 5월 25일 소련군의 일부는 탈출했으나 많은 수가 포위망에 걸려 포위망 탈출 도중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포로와 사상자를 포함한 소련군의 손실은 24만~27만 정도로 추정되며 이는 공세에 참여한 병력의 절반에 달하는 것이었다. 포위망에서 도주한 병력들은 볼가 강 서안을 향해 패주했고, 굳건했던 소련의 벨고로드-로스토프 방어선은 구멍이 숭숭 뚫려버렸다. 이를 발판으로 독일군은 바로 청색 작전을 실행할 수 있었다.
6. 평가
제2차 하리코프 공방전에서 참패의 원인을 두고 여러 설이 있다. 일부 소련군 장성들은 소련군 수뇌부, 특히 모스크바 전투 승리 이후 소련군의 역량을 과대평가한 스탈린의 병크로 돌리기도 한다. 여간해선 스탈린을 까지 않는 주코프조차[6] 이 패배는 스탈린의 고집 때문이었다고 자기 회고록에 밝혔다.당시 소련군의 상태도 사실 말이 아니었는데, 소련군은 그때까지 500여만명의 병력을 날렸고, 당시 보유하고 있던 병력은 대부분 신병으로 구성되어 있던 급조사단이었다. 더구나 신병보다도 더 나쁜 것은 야전의 허리가 되는 부사관이나 초급장교들이 대부분 경험이 없었다는 점이다.[7] 이렇기 때문에 소련군은 제대로 된 공세를 펼 수 없었고, 2배나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독소전쟁 이전부터 2년간 수많은 실전경험을 쌓았던 노련한 독일군에게 처참하게 역관광당했다.
이 전투의 참패는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참패, 그리고 안드레이 블라소프가 지휘한 북방 류반 공세의 좌절과 더불어 소련군에게 가장 큰 위기상황을 불러왔다. 모스크바 전투 때도 위기상황이었지만 당시는 겨울이 코앞이라 날씨가 소련군에게 절대로 유리했던 반면, 이번에는 독일군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한 여름을 앞두고 방어망에 커다란 구멍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소련군에는 절망뿐인 상황이 되었고, 이런 상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시작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소련측에도 이 전투가 아주 헛된 것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스탈린이 자신의 군사적인 무지를 인식했다는 점이다. 자신이 기획한 여러 반격 작전이 모조리 참패로 끝나자 스탈린은 더이상 직업군인들이 짠 작전에 손대지 않았으며, 스탈린의 명을 받고 사사건건 간섭하던 정치장교의 권한도 확 줄여버렸다. 물론 이후로도 스탈린이 군대에 손댄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보급 계획이었으며 실제로 보급계획 및 물자관리에 있어선 수준급이었다. 군인들에 관련해선 이전처럼 하나하나 참견하는 것에서 장교들 교통정리하는 수준으로 상당히 완화되었다. 그랬기 때문에 야전지휘관들은 더이상 스탈린의 시시콜콜한 간섭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소신껏 작전을 지휘할 수 있었다.
또한 소련군은 참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장시간 대규모로 야전기동을 실시해보는 실전경험을 가졌다. 특히 지금까지 방어전만 수행한 소련군이 독소전 최초로 벌인 대규모 공세작전인 만큼 대숙청과 개전초기 연이은 대패로 인해 경험부족에 시달리던 소련군에게 커다란 학습장이 되었다. 결국 이 패배를 밑거름 삼아 소련군은 325호 명령을 발령했다. 이는 전차 및 기계화군단의 지휘관이 기동제대를 파편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화력이 분산되어 각개격파되는 것을 막았으며, 후일 소련군의 기동집단 탄생에 관여한 명령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소련군에게 이런 실전경험이 점차 쌓여가면서 1943년이 되면 소련군도 독일군 뺨칠 정도의 제병협동 공세를 펼칠 수 있게 되며, 이전에는 각각 따로 놀던 보병, 포병, 기갑, 공군 등이 손발이 척척 맞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 결국 소련군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의 성공은 이런 처참한 참패들을 그냥 넘기지 않고 계속 자신의 약점과 단점을 수정했던 소련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전투를 끝으로 전쟁 전에는 스탈린의 신임을 톡톡히 받았던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세묜 티모셴코 원수는 찬밥신세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스탈린은 이 전투가 마무리된 이후, 자신의 이름이 붙은 스탈린그라드를 수비하기 위해 영 미덥지 않은 티모셴코 대신 신진 지휘관인 안드레이 예료멘코를 남서전선군 사령관으로 앉히고 티모셴코는 후방으로 돌렸다. 티모셴코는 이후 후배 원수들[8]이 독일군을 방법하며 베를린 레이스를 펼칠 동안 후방에서 예비부대만 지휘하는 신세가 되었다.
7. 대중문화
-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하일 숄로호프의 소설 "그들은 조국을 위해 싸웠다 (Они сражались за Родину )"가 이 전투의 패잔병들이 스탈린그라드로 후퇴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1975년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1] 할더는 당시 자신의 일기에서, 우리가 100개 사단을 격파하면, 소련군은 200개 사단을 내놓는다면서 전쟁이 낙관적이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써놨다.[2] A/B집단군 자체는 작전 중에 나뉜 것이다.[3]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이 청색작전 구상과 실시초반 단계인 1942년 여름까진 영국군을 밀어붙이고 있었기 때문에 롬멜의 이집트 돌파는 헛된 꿈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4] 슈툼메는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남부집단군 사령관 보크가 힘을 쓴 덕분에 아프리카 군단으로 전속되고 거기서 롬멜 휘하에서 싸우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5] 이와 함께 레닌그라드 방면에서는 안드레이 블라소프 중장이 지휘하는 소련군의 류반 공세가 4월부터 실시되었다.[6] 주코프가 승리한 뒷배경에 스탈린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여러 병크를 저지르긴 했어도 막대한 규모의 전시경제를 굴리며 일선 장성들을 서포트해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7] 2차 대전 말기까지도 소련군의 전략적, 작전술적 지휘 능력은 지속적으로 유연해지고 개선된 반면 초급 지휘관이 주축이 된 전술적 능력의 개선은 경직되고 지지부진했다는 평가가 많다.[8] 후배라고 해도 대부분 동년배이다. 티모셴코가 1895년생. 후배원수들인 주코프, 바실렙스키, 로코솝스키가 1896년생, 코네프가 1897년생. 티모셴코를 대신해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이 된 안드레이 예료멘코 상장은 1892년생으로 티모셴코보다도 나이가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