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반도 공세 러시아어: Крым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1] 독일어: Schlacht um die Krim | ||
제2차 세계 대전중 동부전선의 일부 | ||
▲ 소련군의 크림 공세 진격도 | ||
날짜 | ||
1944년 4월 8일 ~ 5월 12일 | ||
장소 | ||
소련 러시아 SSR 크림 반도 | ||
원인 | ||
드네프르 강 공세의 측면 위협 차단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틀:깃발| ]][[틀:깃발| ]][[루마니아 왕국| ]] |
지휘관 | [[틀:깃발|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필리프 옥티아브르스키| ]] (흑해 함대 사령관) | ]][[틀:깃발| ]][[표도르 톨부힌| ]][[틀:깃발| (남우크라이나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호리아 마첼라리아| ]] (루마니아 흑해 함대 사령관) | ]][[틀:깃발| ]][[에르빈 예네케| ]]
결과 | ||
소련군의 승리 | ||
영향 | ||
소련의 흑해 지배권 확립 | ||
전력 | 병력 462,400명 야포 6,000문 전차/자주포 560대 항공기 1,200기 | 병력 230,000~255,970 |
피해규모 | 전사/실종 17,745명 부상 67,065명 | 전사/실종 57,500명 부상 39,2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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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중 1944년 4월 8일부터 5월 12일 까지 크림 반도에서 벌어진 소련군의 공세로 독일군의 패배로 끝났다.2. 서막
2.1. 케르치-엘티겐 작전
1943년 9월 초 타만반도에서 패배한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은 크림 반도로 후퇴하였다. 이에 소련군은 크림 반도 전체를 탈환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드네프르 강 전투의 승리로 크림반도에 있던 독일 제17군을 나머지 독일군과 분리되었지만, 여전히 해상으로 보급을 받고 있다. 제17군은 북쪽에서 제5군단을 통제했고, 제64산악 군단과 루마니아 부대는 페레코프 지협[2]을 지키고 있었다. 또한 크림반도 남부와 남동부 지역에는 루마니아 산악군단이 위치해있었다. 독일군은 근시일 내에 소련군의 공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대량의 대공포와 돌격포를 크림반도로 보냈다.상륙 작전을 위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정치위원장[3]과 콘스탄틴 레셀리제 대령이 지휘하는 제18군과 제56군, 흑해 함대, 아조프 함대를 투입하였다. 이 작전을 전체를 지휘한 사람은 이반 페트로프 장군이고 해군을 담당한 사람은 레프 블라디미르스키 중장이었다. 악천후와 거친 바다로 상륙이 연기되었지만 바실 글라드코프 대령이 지휘하는 제318소총사단과 제386해병보병대대를 엘티겐에 상륙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아틀 뒤 제56군의 제2근위소총사단,제55근위소총사단과 제32소총사단 4,400명이 예니칼레에 상륙하였고, 타만 반도에 위치한 포병 지원으로 견고한 해안 교두보를 형성하였다. 소련군은 11월 11일까지 27,700명을 예니칼레 해안 교두보에 상륙시켰다.
소련군은 상륙에 성공하였지만 내륙으로 전진할 수 없었다. 독일군이 소련군이 상륙하자마자 방어선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독일 해군이 기뢰를 케르치 해협 일대에 깔아 소련군의 해상 보급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에 소련 해군은 밤에 기습적으로 보급을 시도했지만, 교두보에 있는 부대에 충분한 보급은 하지 못했다. 또한 루프트바페가 타만 반도에 있는 포병대를 향해 끊임없는 폭격을 가하자 소련군은 점차 고립되어 갔다.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은 12월 6일 총공격을 가하기 전 5주 동안 해안을 봉쇄하였다. 그 사이 루마니아 기병대는 남쪽에서 기만 공격을 가하기도 했고, 루마나이 산악군단은 소련군 서쪽을 향해 돌격포를 발사하였다. 그 사이 소련군은 공중 보급 시도를 재시도하였지만 루프트바페에 의해 저지되었다. 12월 6일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은 엘티겐에 있는 소련군을 향해 총공격을 가했다. 결국 총공격 하루 만에 소련군은 무너졌고 총 1,200여명의 소련군이 사망하고 1,57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
엘티겐 교두보가 무너지는 동안, 약 820명의 소련군이 북쪽으로 돌파하여 아군이 있는 예니칼레에 가려고 했다. 이들은 미트리다테스 산[4]을 성공적으로 점령했지만, 예네커 상급대장은 루마니아 제3산악사단을 투입시켜 다시 미트리다테스 산을 탈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소련군이 아조프 함대의 도움을 받아 예니칼레 교두보에 있는 오파스노에 마을로 무사히 철수하였다.
이 전투로 소련군은 예니칼레에 교두보를 형성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는 소련군이 크림 반도 공세를 가하는데 크나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사이 크림반도는 소강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후일 있을 공세를 위해 1944년 2월 부터 3월 까지 댐을 건설하고, 하중 용량을 30톤으로 늘려 T-34 전차와 중포병이 수월하게 통과하게 만들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쿠르트 차이츨러와 루마니아의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크림 반도에서 철수하자고 지속적으로 건의하였지만 발칸 반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크림 반도가 필요하다는 히틀러의 주장에 따라 세바스토폴은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야 할 요새로 선언되었다.
3. 전투 서열
3.1. 독일군
- A집단군 ( 사령관 : 페르디난트 쇠르너 상급대장 )
- 제17군 ( 사령관 : 에르빈 예네케 상급대장 )
- 제64산악군단 ( 사령관 : 루돌프 콘라트 산악병대장 )
- 제50보병사단
- 제111보병사단
- 제336보병사단
- 제279돌격포여단
- 제5군단 ( 사령관 : 카를 알멘딩거 보병대장 )
- 제73보병사단
- 제98보병사단
- 루마니아 제3산악사단
- 제191강습포여단
3.2. 루마니아군
- 루마니아산악군단 ( 사령관 : 휴고 슈와브 대장 )
- 제1산악사단
- 제2산악사단
- 제6기병사단
- 제9기병사단
3.3. 소련군
- 제4우크라이나전선군 ( 사령관 : 표도르 톨부힌 대장 )
- 제2근위군 ( 사령관 : 게오르기 사하로프 중장 )
- 제51군 ( 사령관 : 야코프 크라이저 중장 )
- 제4항공군 ( 사령관 : 콘스탄틴 베르시닌 대령 )
- 흑해 함대 ( 사령관 : 필리프 옥티아브르스키 대장 )
- 아조프 함대 ( 사령관 :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소장)
- 독립 해안군 ( 사령관 : 콘트라트 멜니크 중장 )
- 크림 반도 저항 운동
4. 전개
4.1. 시바시 호수 돌파
1944년 4월 8일,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우크라이나 본토와 크림반도 사이의 아조프해 서부 연안에 펼쳐진 갯벌인 시바시 호수를 향해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오전 8시 콘스탄틴 베르시닌 대령이 지휘하는 제4항공군의 폭격을 시작으로 2시간 30분 동안 포격을 시작했다. 그 후 제51군은 시바시 호수 남쪽을 향해 공세를 시작했다. 그날 저녁 제3근위소총사단은 교두보를 형성하는데 성공하였고 이 곳으로 포병대를 투입하였다. 4월 9일, 보병과 포병의 유기적인 작전으로 독일군의 첫번째 방어선을 제압하는데 성공하였다.4월 10일 아침 소련군 소총대대가 쿠라예프카 남서쪽, 독일 수비대 후방에 상륙하자 독일군은 스타로예 호수 방어선까지 후퇴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 제346소총사단은 아이굴스코예 호수에 도착하였고, 제51군은 페레코프 해협 측면을 따라 신속히 진격하여 독일군 방어선을 약화시켰다. 4월 12일 오전 제2근위군은 크림반도 북부에 위치한 도시 아르먄스크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4.2. 크림반도 탈환
4월 11일 밤 소련의 독립해안군은 요새화된 케르치 인근 마을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콘스탄틴 프르발로프 소장이 지휘하는 제16소총군단과 제318,339,383소총사단의 일부, 제255해병여단, 제244전차연대가 케르치를 점령하였다. 한편 4월 11일 아침, 바실리예프 소장이 지휘하는 소련 제19기갑군단이 심페로폴로 돌격하였다. 소련군의 진격에 놀란 독일군은 세바스토폴로 후퇴하였다. 독일군은 1941~1942년 소련군이 그랬듯이 세바스토폴을 요새화 하였다. 그 사이 4월 13일에는 심페로폴, 페오도시야, 옙파토리야를 점령하고 4월 14일에서 15일에는 바흐치사라이, 얄타를 점령하였다.4.3. 제2차 세바스토폴 전투
4월 15일 소련군은 세바스토폴에 도착하였지만, 오랜 기간의 준비를 거친 뒤 5월 5일 공격을 시작했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는 표도르 톨부힌대장과의 합의 하에 제51군을 발라클바바를 그리고 독립해안군을 세바스토폴 중앙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사이 독일군은 에르빈 예네케를 해임하고 새로운 지휘관으로 카를 알멘딩거로 교체하였다. 왜냐하면 크림반도에서 급속한 후퇴로 히틀러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 5월 7일 오전 10시 30분, 소련군은 공군의 지원을 받아 세바스토폴 요새 지역에 대한 총공세를 개시했다. 소련의 주력군은 세바스토폴 남동쪽에 위치한 240m의 산 사푼 산을 점령하였다. 그러자 독일군은 세바스토폴 근교에 있는 케르소네소스 곶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21,000여명의 독일 잔존 병력들은 케르소네소스 곶에서 싸움을 계속할 생각이었지만 소련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뒤 결국 항복하였다. 소련군은 공세 약 한달 만에 세바스토폴을 함락하는데 성공한 것이다.4.4. 독일, 루마니아군 철수
1944년 4월~5월에 6만작전(Operation 60,000)으로 명명된 크림반도 철수 작전이 시자고디었다. 4월 15일부터 5월 14일까지 수많은 독일, 루마니아 군함이 세바스토폴과 콘스탄차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이들은 아군 113,000여명을 대피시키는데 성공하였다.5. 결과
크림반도에서 별다른 저항 없이 독일군과 루마니아군이 철수하자 이에 격분한 아돌프 히틀러는 제17군 사령관인 에르빈 야네케 장군을 자신의 별장이 있던 베르히테스가텐으로 불렀다. 히틀러는 철수를 하지말라고 주장하였지만, 에르빈 야네케는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에 히틀러는 에르빈 야네케를 체포하라고 명을 내렸고, 그는 루마니아에서 체포되고 군사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하인츠 구데리안의 개입으로 그는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에서 강제로 예편되었다.한편 소련이 크림반도를 점령하자 오데사를 위시한 우크라이나 해안 도시 및 지대에서 독일군을 후퇴시켰고, 이는 소련이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를 쉽게 하도록 도왔다. 또한 흑해 함대가 주력 기지인 세바스토폴을 탈환함으로서 루미니아 침공을 수월하게 하고 흑해 재해권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