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펠코프 작전 러시아어: Операция Двойная голова 독일어: Unternehmen Doppelkopf 영어: Operation Doppelkopf |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전선의 일부 | ||
▲ 8월 16일의 전선과 27일까지 독일 국방군이 탈환한 영역 | ||
시기 | ||
1944년 8월 16일 ~ 27일 | ||
장소 | ||
리가 서쪽 리가만 일대 샤울라이 근처 리투아니아 SSR 서부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제1발트전선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이반 체르냐홉스키| ]] (제3벨로루시전선군 사령관) | ]][[틀:깃발| ]][[이반 바그라먄| ]][[틀:깃발| (중부집단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에르하르트 라우스| ]] (제3기갑군 사령관) | ]][[틀:깃발|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
결과 | ||
나치 독일의 전술적 승리 | ||
영향 | ||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의 전선 연결 성공 소련군의 북부집단군 섬멸 실패 바그라티온 작전 종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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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펠코프 작전은 랴지민 전투와 함께 독일군이 바그라티온 작전기에 소련군을 상대로 진행한 2개의 작전술적 반격 중 하나이다. 목표는 중부집단군과 북부집단군의 연속된 전선을 재구축하는것이었으며 리가에서 전선을 연결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전과 확대에 실패하며 독일군의 전술적 승리가 되었다.[1] 랴지민 전투가 소련군의 폴란드 서부 진출을 막아내면서 중부 전구에서 소련군의 공세를 끝냈다면 도펠코프 작전은 북부집단군을 구해내면서 소련군의 차후 공세를 6주나 늦추는데 성공했다.2. 1944년 8월의 동부 전선
1944년 8월은 독일군에게 엄청난 위기였다. 동부 전선 전체에서 소련군이 대공세를 시작했고 카렐리아 전선군과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카렐리아 작전으로 핀란드는 사실상 전쟁에서 이탈했다. 이어서 바그라티온 작전이 시작됐고 7월 말이 되자 공세는 3단계로 접어들었다. 북쪽에서 별개의 공세를 진행한 제2,3 발트 전선군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 진입했고 샤울라이 공세를 진행한 제1 발트 전선군은 북부 집단군의 16군과 중부 집단군의 3기갑군 사이를 파고들면서 7월 31일에 투쿰스에서 발트해에 도달했다. 이로 인해 집단군과의 연결이 끊겼을 뿐 아니라 집단군 사이를 돌파하고 북쪽으로 진격하면서 독일군은 리가에서 메멜까의 전선이 텅 빈 상태가 되었다.그나마 루블린-브레스트 작전을 진행중이던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이 바르샤바에서 독일군의 반격[2]으로 2전차군 소속 3전차군단이 괴멸되면서 중부 전선에서 소련군의 진격이 멈췄다. 8월 중순이 되자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진행하던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역시 산도미에시에서 북우크라이나 집단군 소속 4기갑군과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중부 전선은 전선이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마니아에서 제2,3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남우크라이나 집단군을 상대로 제2차 야시-키시네프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동부 전선이 아닌 유럽 전체에서도 독일군은 엄청난 위기였다. 서부 전선에서는 팔레즈 포위전으로 B 집단군의 기갑전력이 괴멸당하기 직전이었고 프랑스 남부에서도 용기병 작전으로 G 집단군이 사라질 위기였다. 이탈리아에서도 필사의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곧 그리스에 연합국이 상륙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F 집단군은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과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3. 전투 서열[3]
3.1. 독일군[4]
- 북부집단군 ( 사령관 : 페르디난트 쇠르너 상급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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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소련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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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세 준비
리가와 메멜 사이의 전선이 사실 상 텅 빈 상황에서 독일군은 급하게 타 전역에서 부대들을 차출했다. 단순히 전선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반격을 통해 북부 집단군을 구해야했기 때문에 상당한 기갑전력이 집결했다. 4군에서 39기갑군단과 5기갑사단을, 2군에서는 바르샤바에서 소련군을 막은 4기갑사단을, 9군에서는 9군을 구출하려다 실패한 12기갑사단을 차출해 당장 빈 전선을 메웠고 루마니아에 있던 40기갑군단과 북우크라이나 집단군 소속이던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 14기갑사단, 중부집단군에서 7기갑사단을 차출해 메멜-동프로이센 방면에 배치했다.독일군의 공세 목적은 북부집단군과의 연결을 복원하고 전선을 일직선으로 다시 펼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남쪽의 40기갑군단은 샤울랴이를, 북쪽의 39기갑군단은 옐가바를 각각 탈환하고 그 사이의 51군을 포위하고 섬멸하는 것이 공세의 목적이었다. 독일 공군 역시 이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가능한 항공 전력을 집중시켰다. 중부 집단군의 전선을 담당하던 6항공함대는 바르샤바에서 일단 적의 공세를 막아내는데 성공하자 4항공함대와 함께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을 지원하던 8항공군단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력을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방면으로 집결시켰다.
독일군은 공세를 위해 6개 기갑사단과 1개의 사단급 기갑전투단을 2개 기갑군단에 배속시켜 투입했다. 15일 기준으로 3기갑군이 보유하고 있던 기갑 전력은 다음과 같다. 아래 수치는 가동가능(단기수리/장기수리) 순이며 따라서 독일군은 공세 개시 당시 399대의 가동 가능한 전차/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추가로 215대의 단기간[8]에 수리 가능한 전차/돌격포를 포함해 총 722대를 보유중이었다.[9] 여기에 해상으로 수송 되고 있던 기갑차량들까지 가세하면서 독일군의 기갑전력은 공세가 진행되면서 오히려 계속 증가했다.
- 제4기갑사단 - 4호 전차 32(31/5), 5호 전차 15(23/9)
- 제5기갑사단 - 5호 전차 24(10/10)
- 제6기갑사단 - 4호 전차 26(18/7)
- 제7기갑사단 - 5호 전차 19(25/18), 돌격포 5(0/1)
- 제12기갑사단 - 4호 전차 25
-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연대 1대대 - 5호 전차 30(15/3)
-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 - 4호 전차 7(1/0), 5호 전차 41(13/28), 6호 전차 B형 29(8/0), 돌격포 20(4/1)
- "폰 베르터" 기갑척탄병 여단[10] - 4호 전차 1(2/4), 돌격포 4(4/9)
- 제510중전차대대 - 6호 전차 B형 13(27)
- 군/군단 직할부대 - 돌격포 108(34/13)
5. 전개
▲ 도펠코프 작전 진행도 |
공세는 16일부터 시작됐다. 첫 날 3기갑군이 공세에 동원한 기갑 전력은 141대의 전차와 54대의 자주포였다. 북쪽의 39기갑군단은 4,5기갑사단을 앞세워 옐가바(Jelgava) 방면으로 공세를 시작했고 12기갑사단은 후방에서 두 사단을 지원했다. 남쪽의 40기갑군단은 샤울랴이(Siauliai)를 목표로 3개 사단이 공세를 시작했다. 17일까지 독일군의 진격은 순조로웠다. 특히 독일 공군은 가용 가능한 항공기 대부분을 동원하여 육군을 지원했다. 중부 집단군을 지원하던 6항공함대는 114기의 지상공격기와 116기의 전투기를 동원했는데 당시 6항공함대 휘하에 전투항공단이라고는 제51전투항공단[11]과 타 비행단의 일부 비행대[12]만 있었음을 감안하면 가용 가능한 전투기를 전부 투입시킨 것이었다.[13]
그러나 18일부터 진격은 지지부진해졌다. 1전차군단을 샤울랴이에 배치하면서 40기갑군단은 2근위군에 막혔고 제1 발트 전선군 사령관인 바그라먄의 대처도 신속했다. 제3 벨로루시 전선군에서 5근위전차군을 증원받아서 곧바로 샤울랴이 북쪽에 배치해 그로스도이찰란트 기갑척탄병사단을 막아섰다. 39기갑군단의 공세 역시 바그라먄이 51군 우익에서 리가를 압박하던 43군의 공세를 중단하고 3근위기계화군단과 19전차군단을 51군 남쪽에 배치해 막았고 이렇게 남쪽에서의 공세가 막히자 독일군은 다시 북쪽으로 눈을 돌렸다.
해상으로 수송중이던 2개 기갑여단이 도착하자 스트라흐비츠 그룹을 편성하여 19일부터 해안을 따라 북부집단군의 16군과의 연결을 위해 공세를 시작했다. 스트라흐비츠 그룹은 약 60대의 전차 및 돌격포를 보유중이었다. 같은 날에 남쪽의 14기갑사단은 510중전차대대를 증원받아 다시 한 번 샤울랴이를 공격했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바그라먄은 43군 우익에 있던 6근위군을 리가 방면에서 51군과 5근위전차군 사이로 재배치했다. 20일이 되자 독일군은 두 기갑군단을 합쳐 크노벨스도르프 기갑집단을 편성했고 39기갑군단이 소련군의 반격을 막아내는 사이 스트라흐비츠 그룹은 투쿰스(Tukums) 근방에서 마침내 16군 우익의 클레펠 군단[14]과 만나는데 성공했다. 독일군은 포병 전력이 부족해 리가만에서 아트미럴 히퍼급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과 구축함 2척을 위시한 해군의 함포 사격 지원을 받았다.
이후 공세는 두 집단군을 연결하는 좁은 회랑을 확장하는 싸움이었다. 회랑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크노벨스도르프 기갑집단은 22일에 해체됐고 같은 날 4기갑사단과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척탄병사단은 회랑으로 이동해 남쪽으로 공세를 시작했다. 25일이 되자 독일군은 도벨레(dobele)에 도달했지만 1,19 전차군단에 막혀 더 이상 진격할 수가 없었다. 라우스는 14기갑사단도 북쪽으로 이동시켜 마지막 공세를 펼치려고 했다. 25일 기준으로 80대의 전차[15]와 13대의 돌격포, 단기수리중인 전차 21대[16]를 보유한 14기갑사단은 3기갑군 내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이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14기갑사단을 포함한 2개 사단을 북부집단군으로 이관하고 차후 공세[17]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27일에 공세는 마무리됐다. 공세 마무리 시점에서 두 기갑군단은 299대의 전차 및 돌격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6. 결과
비록 본래 목표인 전선을 옐가바에서 샤울랴이까지 일직선으로 펼치는 것은 실패했지만 부족한 전력으로 텅 빈 전선을 채우고 두 집단군을 다시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이 여파로 바그라티온 작전은 끝났고 소련군 10울 5일에 메멜 공세[18]를 시작할 때까지 6주간이나 정지해 있어야 했다. 제1 발트 전선군의 섬멸과 전선의 직선화라는 목표는 북부 집단군은 3기갑군을 잠시 배속받아 9월 16일에 카이사르 작전을 개시했으나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5일만에 중단됐다. 이후 발트해 공세의 마지막 단계로 제1 발트 전선군이 메멜 공세를 시작한지 4일만에 메멜에서 다시 소련군이 발트해에 도달하면서 북부 집단군은 쿠를란트에 다시 갇혔고 종전까지 쿠를란트에서 전투를 이어나가게 된다.7. 미디어
[1] 다만, 전과확대는 히틀러가 원한거지 육군최고사령부는 생각도 안했으며 애초에 불가능했으니 전선 연결에 성공한 것 만으로도 엄청난 성과이긴 하다.[2] 랴지민 전투[3] 전투에 참가한 부대만 작성함[4] 작전 시작 시점[5] 2개 기갑여단으로 구성[6] 8월 1일 기준[7] 8월 말에 제1 발트 전선군에 증원[8] 2주 이내[9] 다만 이는 3기갑군 전체가 보유하고 있는 수량이며 26,9군단은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고 39,40기갑군단도 작전 시작 시점에서 전선에 모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 전력은 훨씬 적다.[10] 총통 호위 대대에서 차출한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작전 종료후 해산되어 원 부대로 복귀한다. 나중에 총통 호위 여단으로 확대된다.[11] 연대급으로 소련 공군의 항공 사단과 비슷한 규모다.[12] 대대급[13] 나머지 주요 전력인 4항공군단은 바르샤바에서 2군과 4군을, 8항공군단은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을 지원하고 있었다.[14] 나중에 16군단이 된다.[15] 4호 17대, 5호 57대, 구축 4대[16] 4호 11대, 5호 9대, 구축 1대[17] 카이사르 작전[18] 발트해 공세의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