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풍 작전 독일어: Unternehmen Südwind 러시아어: Операция Южный ветер 영어: Operation Southwind | ||
제2차 세계 대전중 동부전선의 일부 | ||
▲ 남풍 작전 진행도[1] | ||
시기 | ||
1945년 2월 17일 ~ 24일 | ||
장소 | ||
부다페스트 북쪽의 그란 교두보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소련| ]]|
지휘관 | [[틀:깃발| (제2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미하일 슈밀로프| ]] (제7근위군 사령관) | ]][[틀:깃발| ]][[로디온 말리놉스키| ]][[틀:깃발| (남부 집단군 사령관)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한스 크레이싱 (제8군 사령관) | ]][[틀:깃발| ]][[틀:깃발| ]] 오토 뵐러
결과 | ||
소련의 패배 그란 강 서쪽의 소련군 교두보 제거 | ||
영향 |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국방군이 승리한 마지막 공세 작전 | ||
피해 규모 | 사상자 8,194명 포 459문 전차/자주포 54대 | 전사 969명 실종/포로 901명 부상 4,601명 전차/자주포 130대[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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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풍 작전은 봄의 새싹 작전 시작 전에 측면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남부 집단군이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상대로 진행한 공세 작전이며 8군은 7근위군을 그란 강 동쪽으로 밀어내고 교두보를 제거하면서 목표를 달성하는데 성공했다. 남풍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진행한 공세 중에 마지막으로 승리한 작전이었으며 이 공세의 성공으로 서쪽의 발라톤 호수에서 봄의 새싹 작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2. 1945년 2월의 헝가리 전선
▲ 1945년 1월 시점에서 헝가리 전역의 전선 |
부다페스트 공세의 마무리 단계에서 진행된 독일의 콘라트 작전의 결과로 부다페스트 북서쪽 에스테르곰(Esztergom)에 소련군이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 교두보는 위 지도에서 그란 강(Gran river)[3] 서쪽, 도나우 강 북쪽에 점선으로 표시된 지역이며 북서쪽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여기에 7근위군과 6근위전차군을 배치한 상태였다. 이 지역을 담당한 독일 8군은 1945년 2월 현재 북동쪽의 1기갑군과 남서쪽의 6군 사이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좌익부터 29군단, 72군단, 펠트헤른할레 기갑군단을 배치한 상태였다. 이 중 펠트헤른할레 기갑군단이 그란 강 교두보에서 소련군을 막고 있었다.
2월 3일에 소련군의 비스와-오데르 공세가 중단되면서 독일군은 종전 전에 마지막으로 병력을 재배치시킬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육군참모총장 구데리안 상급대장은 마지막 남은 기갑 전력을 동원해 오데르 강에서 반격작전을 펼쳐 적의 베를린을 향한 공세를 최대한 늦추려 했다. 어차피 그 기갑전력이 남아있어도 차후 소련이 전력을 보충해 진격해 오면 큰 의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구데리안은 지점 작전이라고 이름 붙은[4] 공세를 위해 대규모 기갑전력을 북쪽에서는 3기갑군 휘하에[5] 슈체친 동쪽의 스타르가르트(Stargard)에서, 6기갑군[6]이 남쪽의 구벤에서 공격해서 소련군 선봉을 포위섬멸하는 전형적인 독일군의 공세 작전이었다. 문제는 시간이 있다고 해서 독일군이 빠르게 이동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낮에는 연합국의 전략폭격때문에 이동이 거의 불가능했으며 무엇보다도 연료 문제가 심각했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은 전투에 필요한 연료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해 가장 중요한 작전에만 연료를 공급하는 상황이었다.
공세가 계속 미뤄지는 가운데 히틀러의 관심은 정작 헝가리에 있었다. 지점 작전에 계속 미뤄지자 히틀러는 9군 후방에 있던 6기갑군 사령부를 6군 남서쪽으로 재배치시킬 것을 명령했고 남부 집단군은 헝가리에서 새로운 공세인 봄의 새싹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헝가리에서의 공세 자체는 1월부터 준비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독일군은 부족한 전력이 또다시 분산 투입되어버렸다. 어쨌든 뵐러는 공세에 앞서 동쪽의 그란 교두보를 제거하기로 결정했고 서부 전선에서 이동한 1SS기갑군단을 증원받았다.[7] 이 교두보는 소련군이 남부 집단군 후방을 향한 공세를 펼칠 수 있는 곳으로 차후 공세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곳이었다.
3. 공세 계획
독일군의 목표는 소련군을 강 너머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강 너머로 몰아낸 다음에는 그란 강 동쪽에 가능하면 교두보를 확보하려 했다. 전략적 공세가 아니라 서쪽에서의 주 공세를 위한 측면 확보의 목적이 강한 제한적인 공세였다. 357보병사단과 271국민척탄병사단은 교두보 북쪽에서 그란 강을 따라 72군단과의 연결을 유지했고 나머지 5개 사단이 공세를 진행할 예정이었다.교두보 북쪽에서는 44제국척탄병사단과 46보병사단, 211국민척탄병사단이 배치되어 있었고 서쪽에는 스타우바서 전투단(KG Staubwasser), 펠트헤른할레 전투단(KG Pz.Korps Feldherrnhalle)이 배치되어 있었다. 후방에는 2개 전투단[8]으로 구성된 LSSAH와 히틀러유겐트가 있었다. 남서쪽 도나우강 너머에는 1기병군단[9]의 후퍼 전투단(KG Hupe)과 711보병사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공세 시작 시점에서 독일군은 44대의 티거2를 비롯하여 282대의 가동 가능한 전차를 보유중이었다. 독일군이 보유한 기갑 전력은 다음과 같다. ()안의 수치는 보유 대수, 밖의 수치는 운용 중인 대수이다. SS부대들을 제외한 국방군 부대들의 수치는 공세가 절반 정도 진행된 2월 21일 기준이다.
- 제1SS기갑군단 "라이프슈탄다르테"[10]
- 제1SS기갑사단 "LSSAH"[11] - 4호 21(30), 5호 26(36), 4호구축 7
- 제501SS중전차대대[12] - 6호 B형 19(32)
-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13] - 5호 (44)
- 제560중구축전차대대 - 4호구축 8(18), 야크트판터 3(6)
- 기갑군단 "펠트헤른할레"
- 펠트헤른할레 전투단[14]
- 펠트헤른할레 중전차대대[15] - 6호 B형 10(26)
- 제208전차대대 - 4호 0(3), 4호구축 2(19)
- 제13구축전차대대 - 헤처 14(17)
- 스타우바서 전투단[16] - 4호 17(36), 5호 20(47), 돌격포/구축전차 18(40)
- 제44제국척탄병사단 - 돌격포 5(10)
- 제46보병사단 - 돌격포 2(9)
- 제211국민척탄병사단 - 돌격포 4(9)
- 제325돌격포여단 - 돌격포 27(34)
- 8군 직할 부대
- 제286돌격포여단 - 돌격포 9(30)
- 제1335구축전차중대 - 구축전차 3(13)
- 제1기병군단[17]
- 후퍼 전투단[18] - 돌격포 8(10)
- 제711보병사단 - 돌격포 9(13)
교두보를 담당하고 있던 소련군은 7근위군 소속 2개 소총군단이었다. 6근위전차군은 차후 공세를 위해 교두보에서 철수하여 후방에서 재편중이었고 24근위소총군단이 교두보 동쪽 구역을, 25근위소총군단이 교두보 서쪽 구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강 너머에는 4근위기계화군단과 야전군 직할부대들이 있었다. 공세 시작 시점에서 교두보에는 전차 26대와 자주포 5대만 있는 상황이었다.
4. 전투 서열
4.1. 독일군[19]
- 남부 집단군 ( 사령관 : 오토 뵐러 보병대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8군 ( 사령관 : 한스 크레이싱 산악대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29군단
- 아스만 전투단[20]
- 제15보병사단
- 제76보병사단
- 제72군단
- 제8보병사단
- 제101엽병사단
- 기갑군단 "펠트헤른할레"
- 제271국민척탄병사단
- 제211국민척탄병사단
- 제1SS 기갑사단 "LSSAH"
- 제12SS 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
- 제46보병사단
- 제44국가척탄병사단
- 제357보병사단
}}}
}}}
4.2. 소련군[21]
-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 ( 사령관 : 로디온 말리놉스키 연방원수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7근위군 ( 사령관 : 미하일 슈밀로프 상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5대공포사단
- 제93근위소총사단
- 제41근위포병여단
- 제2대전차포병여단
- 제11대전차포병여단
- 제27근위전차여단
- 제60공병여단
- 제24근위소총군단
- 제6근위공수사단
- 제72근위소총사단
- 제81근위소총사단
- 제25근위소총군단
- 제53소총사단
- 제375소총사단
- 제409소총사단
- 제27근위소총군단
- 제141소총사단
- 제243소총사단
- 제303소총사단
- 제4근위기계화군단[22]
- 제13근위기계화소총여단
- 제14근위기계화소총여단
- 제15근위기계화소총여단
- 제36근위전차여단
- 제292근위자주포연대
- 제352근위중자주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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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개
▲ 남풍 작전 진행도 |
소련군은 다뉴브강 북쪽을 지키고 있던 93근위소총사단을 전선에 투입했고 이를 파악한 독일군은 남서쪽에 있던 후퍼 전투단[24]이 에벳(Ebed)에서 다뉴브강을 도하해 북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18일이 되자 무장친위대 전투단들은 기갑 차량들을 도하시켜 남쪽으로 진격을 이어나갔고 서쪽에서는 스타우바서 전투단이 25근위소총군단을 향한 공세를 시작했다. 44제국척탄병 사단도 펠트헤른할레 중전차대대의 지원을 받아 남쪽으로 진격했다.
이어서 무장친위대 전투단들은 진격 방향을 남쪽에서 남동쪽으로 틀었고 후퍼 전투단 함께 그란강과 도나우 강의 교차점으로 향했다. 그 사이 711보병사단은 에스테르곰에서 도나우 강을 건넜고 강 바로 북쪽의 파카니(Párkány)에서 격렬한 시가전 끝에 도시를 장악했다. 조금 북쪽에서는 LSSAH의 제2SS기갑척탄병연대가 나나(Nána)를 점령하고 그란 강에 도달했고 25근위소총군단은 명령도 없이 그란 강 동쪽으로 후퇴했다. 이제 소련군의 교두보는 케멘(Kéménd) 근처로 축소됐지만 펠트헤른할레 전투단이 208전차대대를 앞세워 케멘을 향해 감행한 공세가 성과를 전혀 거두지 못하면서 전선이 고착됐다. 공세 시작 후 3일 동안 우익에서의 공세가 성공적이긴 했으나 좌익의 211국민척탄병 사단은 거의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19~20일 이틀 간 독일군은 이 조그만 교두보를 마저 제거하기 위해 공세를 펼쳤으나 제공권을 장악한 소련 공군의 지원과 함께 소련군이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거의 진격하지 못했다. 소련군도 부대를 재편하여 교두보에 24,27근위소총군단과 4근위기계화군단의 일부를 배치했다. 독일군에게는 이제 시간이 없었다. 후방에서 재편성을 마친 6근위전차군이 이동하는게 항공정찰로 포착됐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증원이 그란 강 쪽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독일군은 후방에서 재편성을 거친 1,12SS기갑사단과 44제국척탄병 사단 및 전투단들이 21일부터 2단계 공세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21일부터 독일군은 공세를 재개했다. 파이퍼 전투단은 하루 종일 카멘카 남쪽의 코히드야르마트(Kóhidgyarmat)를 공격했고 밤이 되자 마을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소련군의 교두보는 폭 10km, 깊이 4km로 축소됐다. 교두보에는 이제 24근위소총군단의 4개 사단만이 남아있었다. 22일에는 히틀러유겐트 사단이 바트(Bart)를 공격해 점령했고 이제 그란 강 동쪽에 있는 소련군의 거점은 베니(Bény)와 카멘카뿐이었다. 이날 오후에 6기갑군[25]은 차후 공세를 위해 1,12SS기갑사단을 교두보에서 철수 시킬 것을 주장했으나 뵐러는 이를 거절했다.[26]
23일에 독일군은 부대를 잠시 재편했고 24일 새벽에 마지막 공세를 시작했다. 북쪽에서는 12SS기갑사단이 26SS기갑척탄병연대를 앞세워 베니를 공격했고 오전중으로 독일군의 수중에 들어왔지만 소련군은 후퇴하면서 다리를 폭파시키는데 성공했다. 남쪽에서는 44제국척탄병사단과 1SS기갑사단이 카멘카를 공격했으며 8군 사령부는 17시 20분에 교두보가 제거되었음을 남부 집단군에 보고하면서 공세가 종료됐다.
6. 결과
독일군은 그란 강 서쪽의 교두보를 제거하는데 성공했으며 봄의 새싹 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한적인 공세였기에 모을 수 있는 기갑 전력이 많지 않았고 그 탓에 기갑척탄병 부대들이 앞장서야 했고 인명 피해가 상당했다. 전차와 자주포 역시 손실 대수는 많지 않았으나 대부분 수리가 필요했고 특히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재편을 위해 적어도 10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2~3월동안 독일군이 동부 전선에서 진행한 4개의 반격 작전인 지점 작전, 남풍 작전, 염소 작전, 봄의 새싹 작전 중에 유일하게 목표를 달성한 공세였다.소련군은 산도미에시, 부크린, 류테즈에서와 달리 이 교두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독일군 기갑 전력의 피해는 대부분 잘 배치된 대전차포에 의한 것이었으며 방어 기간 독일군을 막아선 것은 잘 짜여진 방어 거점들과 압도적인 제공권을 유지한 공군이었다. 물론 독일군에게 밀려나긴 했으나 소련군의 주력은 서쪽 발라톤 호수에 있었다. 부다페스트 근처에서 가장 강력한 기갑 전력을 보유한 6근위전차군 역시 교두보가 아닌 발라톤 호에서의 반격 작전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이미 독일군이 헝가리 서부에서 대규모 반격 작전을 준비중인 것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쿠르스크 전투 때처럼 적의 공세를 흡수하고 반격으로 전환할 예정이었다. 따라서 제2,3 우크라이나 전선군에게 공세에 동원될 병력들을 방어에 투입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고 소련군은 저항을 하긴 했지만 큰 미련 없이 교두보를 포기했다.
그란 강 서쪽 지역은 슬로바키아 서부와 체코 남쪽을 점령하기 위해 제2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3월 25일부터 시작한 브라티슬라바-브르노 공세에서 소련군이 점령하게 된다.
[1] 남쪽 강이 도나우 강이고 동쪽 전선에 걸쳐 있는 강이 그란 강이다.[2] 거의 대부분이 단기간에 수리 가능한 손실이었으며 이 전차들은 복귀하고 곧바로 봄의 새싹 작전에 투입된다. 티거2의 경우 37대를 손실했지만 완전 손실은 1대였으며 2대는 장기 수리를 요구했지만 34대는 단기 수리가 가능했다.[3] 영어로는 가람강(Garam river)이며 오늘날에는 슬로바키아 영토이기 때문에 슬로바키아어로 흐론 강(Hron river)이라 부른다.[4] 육군에서는 작전명으로 "후사르돌격"이라는 "Unternehmen Husarenritt"를 주장했으나 작전의 주력이 될 무장친위대에서 지점 작전 혹은 동지 작전이라는 뜻을 가진 "Unternehmen Sonnenwende"를 강력히 주장해서 지점 작전이 되었다.[5] 3기갑군은 이 시점에서 중부 집단군 소속으로 동프로이센에 갇혀있었으며 비스툴라 집단군에 배속된 3기갑군 사령부가 이동중이었다. 그러나 작전 시점까지 도착하지 못해 11군(흔히 11SS기갑군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식 명칭은 11군이다.)이 공세를 진행하게 된다.[6] 혹은 6SS기갑군[7] 정확히는 군단 본부는 독일에서 차후 공세를 준비하고 휘하 2개 기갑사단이 펠트헤른할레 기갑군단에 증원됐다.[8] 기갑연대를 중심으로 한 파이퍼 전투단과 기갑척탄병연대를 중심으로 한 한센 전투단, 여기에 적절하게 공병부대와 포병부대를 배속시켰다.[9] 6군 소속[10] 군단 자체는 공세에 참여하지 않고 휘하 2개 사단만 참여했다.[11] 2월 17일 기준[12] 2월 17일 기준[13] 2월 10일 기준[14] 펠트헤른할레 군단의 직할대로 구성[15] 이전 명칭은 503중전차대대[16] 357 보병사단으로 구성[17] 6군 소속[18] 96 보병사단으로 구성[19] 2월 19일 기준[20] 제101엽병사단으로 구성[21] 2월 1일 기준[22] 2월 1일 시점에서는 전선군 직할이었고 이후 7근위군에 배속됐다.[23] 교두보 내에서 중간 정도에 있다. 문서 제일 상단의 지도에서 교두보 내에 동서로 흐르는 물줄기를 찾으면 된다.[24] 돌격포 20대를 보유중이었다.[25] 6SS기갑군[26] 사실 6기갑군의 주장이 맞긴 한데 이미 남부 집단군의 모든 기갑전력이 봄의 새싹 작전을 준비하는 상황이라 1SS기갑군단과 교대할 수 있는 전력이 없어 남은 교두보를 제거할 수 있을지 의문인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