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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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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flamesofwar.com/Kamenets-podolskiy-map-01.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menets-Podolsk_pocket.jpg
파일:external/www.flamesofwar.com/Kamenets-podolskiy-05.jpg
날짜
1944년 3월 25일 ~ 4월 15일
장소
소련 우크라이나 SSR 카메네츠-포돌츠크
교전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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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폰 만슈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
]](남부집단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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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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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한스 발렌틴 후베(제1기갑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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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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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하우서|]](제2SS기갑군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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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주코프|]](총군부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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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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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바투틴|]](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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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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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코네프|]](제2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결과
소련군의 승리
병력 20만 명 50만 명
피해규모 전사/실종 1만 4,242명 인명피해 미상
전차/돌격포 399문 손실
포 280문 손실
1. 개요2. 소련군의 공세 계획3. 소련군의 포위 기동4. 후베 포켓5. 포위망 돌파6. 소련군의 돌파 차단 기도7. 제1 기갑군의 탈출8. 결과와 평가

1. 개요

흔히 '후베 포켓'이라고 알려진 독소전쟁의 전투이다. 1944년 3월, 2개의 소련군 전선군이 상급대장 한스-발렌틴 후베가 지휘하는 제1 기갑군을 드니에스테르 강 북쪽에서 포위를 하였다. 독일군은 4월, 기갑군 대부분의 병력을 이 포위망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보유한 중장비를 거의 잃고 말았다.

2. 소련군의 공세 계획

1944년 2월 중순, 제1기갑군은 우크라이나 북서부 전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에 갇힌 2개 군단을 구출하기 위해 기갑군의 귀중한 병력 이었던 제3 기갑 군단을 소진한 상태였다.

1944년 2월, 후베의 제1 기갑군은 9개 기갑사단[1], 1개 기갑척탄병사단[2], 9개 보병사단[3], 1개 경보병사단[4], 1개 포병사단[5] 등 21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다시 4개의 군단으로 구성되어 있고[6] 이 중 3개 군단이 기갑군단이었다. 이들 군단에 배속된 지원 부대를 포함한 제1기갑군의 병력은 약 20만명. 남부집단군 사령군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 휘하에서 가장 강력한 부대였다. 그런 제1 기갑군을 잃는다는 것은 남동부 전선 전체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었다.

한편 소련군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체르카시 포위전을 치르면서 제1 기갑군의 예비전력이 약화된 것[7]을 간파하고 있었고, 즉시 제1 기갑군을 붕괴시키기 위한 작전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다. 주코프는 양동 작전을 실시하기로 계획하고 니콜라이 바투틴 대장제1우크라이나 전선군과 막 원수로 승진한 이반 코네프가 지휘하는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9개 야전군을 초과하는 이 강력한 부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재현하듯 후베의 제1기갑군의 측면을 둘러싸고 포위하기 위한 움직임을 개시하였다.

소련군의 포위작전은 독일군 전선의 우익과 좌익 끝쪽에서 시작되어 포위망을 점차 남쪽으로 확대하는 기동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경우와 달리, 이번에는 이미 소련군의 움직임이 독일군에게 포착되고 있었다. 만슈타인은 대규모의 소련군이 후베의 전선으로 대규모 기동하고 있다는 것을 포착하였고, 히틀러에게 전략적 후퇴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체르카시 포위전을 계기로 히틀러는 만슈타인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지속되는 전략적 후퇴에 넌더리가 난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제안을 거부하였고, 이번에도 포위망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조치가 조기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3. 소련군의 포위 기동

소련군 공격의 선공은 3월 초순의 바투틴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에 의해 수행되었다. 병력과 물자면에서 압도적 우세를 차지하는 소련군의 공격은 후베군을 드니에스테르 강이 있는 우익 측면까지 후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계속적인 소련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이 전선은 3월 말까지 유지가 되었다. 1944년 3월 22일, 이번에는 제1 기갑군 전선의 좌익이 타겟이 되었다. 5개의 소련군 전차 군단이 후베군의 좌익 측면을 돌파하였고 즈브뤼치 강과 세르트 강 사이의 남쪽으로 쇄도하였다. 이 군단은 드니에스테르 강을 향해 진격하였고, 후베군의 측면을 포위하고 이 회랑을 둘러싸기 위한 보병사단의 전진도 시작되었다.

소련군의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후베와 만슈타인은 제 1기갑군이 포위당할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인식했다. 소련군의 드니에스테르 강 우익 측면에서의 공격과 최근에 후베군 좌익 측면에 대한 공격으로 제1 기갑군의 전선은 자연스럽게 돌출부를 형성하는 형태가 되었고 이 돌출부의 유일한 통로인 남쪽의 문이 닫혀지면 스탈린그라드의 재판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소련군의 양익 기동으로 인해 제1기갑군 전부가 카메네츠-포돌츠크 부근에 몰리면서 소련군에 의해 좌우익이 포위된 상황이 되었고, 포위된 기갑군은 약 2주간을 버틸 수 있는 식량과 탄약만이 있었고 차량에 공급할 연료 역시 바닥이 난 상태였다. 루프트 바페의 항공 보급 역시 폭설에 인해 정체되었기 때문에, 단지 전투용 차량만이 가동이 가능한 상태였다.

후베는 결국 전선 동쪽에서 개시되는 소비에트군의 주공을 피해 드니에스테르 강 남쪽으로 군부대를 이동하도록 명령하였다. 독일군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사실을 포착한 주코프는 독일군이 총퇴각을 개시하고 포위망 남쪽으로 돌파를 시도하는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주코프는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다수의 부대를 차출하여 후베군이 후퇴하는 남쪽으로 이동시켰고 남쪽의 퇴각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결국 후베군의 남쪽 전선 돌파시도는 소비에트 군의 강력한 벽에 차단되어 지지부진 할 수 밖에 없었다.

4. 후베 포켓

후베는 포위망이 형성되기 시작된 시점부터 전선이 지나치게 넓다는 것을 인식하고 전선을 단축하고 방어를 용이하기 위해 포위망의 둘레를 줄이기 위한 시도를 하였다. 또한 소비에트군이 포위망을 완성하기 전에, 기동 방어를 시도하기 위한 전권을 부여 받을 수 있도록 상부에 요청하였다. 하지만 포위망이 완성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폭설로 인한 항공보급 차단은 기갑군의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급도 끊기게 말들었고, 가장 인접해있는 있는 독일군 부대인 제8군과 제4기갑군이 포위망으로부터 구제하기 위한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후베의 대처는 신속하였다. 그는 우선 포위망 내부의 군조직을 재편성하도록 명하였다. 4개의 군단은 해체되고 3개의 군단으로 재편성되었다. 포위망 외부에서도 제1기갑군을 구출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남부집단군 사령관 폰 만슈타인은 포위망에 갇힌 군대가 돌파를 허가받을 수 있도록 히틀러를 설득하는 한편 돌파작전을 지원할 수 있는 구원군을 파견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끝까지 전선 고수를 주장한 히틀러와의 치열된 논쟁 끝에,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주장에 승복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포위망 돌파의 방향을 어느 곳으로 선정할 수 있는가 여부가 또 하나의 난제가 되었다.

후베는 루마니아로 향하는 남쪽으로 돌파하기를 희망하였다. 지도에서 언뜻 보는 바와 같이 지형이나 거리상 남쪽 전선의 돌파가 가장 쉬워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슈타인은 이와 같은 기동이 시행될 경우, 긴 행군을 거쳐 루마니아로 들어간 제1기갑군이 상당기간 전열에서 이탈되기 때문에, 당장 남부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제1기갑군 병력을 활용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찬동하지 않았다.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망 돌출부의 서쪽은 허약한 헝가리 제7 군단이 담당하는 지역이었고, 후베군이 루마니아로 퇴각할 경우 헝가리군이 순식간에 소련군의 공세에 붕괴될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였다. 만슈타인은 제1 기갑군을 헝가리 제7 군단과 합류하여 남동부 전선의 붕괴를 막도록 하기 위하여 서쪽으로 즉각 후퇴를 하도록 명하였다.

결국 돌파작전의 개요는 후베군은 전선 서쪽인 타르노플을 향하여 돌파를 시도하는 한편 파울 하우서가 지휘하는 제2SS기갑군단이 구원부대로 지원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돌파작전이 성공하기에는 많은 난관이 있었다.

일단 언뜻 지도에서도 상당한 거리라는 것이 느껴지듯이, 카메네츠-포돌츠크에서 타르노플의 거리는 무려 150마일(250km)을 초과하는 장거리였다. 또한 행군로 역시 7개의 강과 진흙탕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것은 연료가 바닥이 난 후베군이 대부분의 차량을 포기하고 도보로 행군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소련의 강력한 전차 사단의 공격에 취약한 상태에 놓여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포위망 서쪽은 후베가 적의 가장 강력한 저항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 지역이었다.

돌파 방향에 대한 만슈타인의 명령에 불만이 있었지만, 후베는 그의 군단을 두개의 그룹으로 분리하고 서쪽으로 돌파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5. 포위망 돌파

1944년 3월 27일 후베군의 선도부대가 즈브뤼취 강을 향해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으로 20만에 이르는 제1기갑군 전군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돌파작전은 초기에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북부 그룹은 신속하게 즈브뤼취 강을 향하는 3개의 다리를 점령하였다.

하지만 남부 그룹은 포위망 깊숙한 침투하여 카메네츠-포돌츠크 까지 점령한 소련군의 반격에 의해 크게 고전하였다. 대부분의 도로와 철로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도시 주변을 우회하여 이동할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은 이동 속도를 상당히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독일군은 반격을 통해 소비에트군의 기동을 차단시키켰고, 돌파작전은 다시 진행될 수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행군을 통해 후베군은 점점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세레트 강 너머의 교량에 도달할 수 있었다.

후베군의 돌파작전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던 것은 소비에트 참모부의 오판도 하나의 이유로 꼽을 수 있었다. 후베군이 초기에 남쪽으로 돌파를 시도했던 사실에 집착했던 주코프와 코네프는 여전히 독일군의 주력이 남쪽으로 향할 것으로 생각을 했고, 서쪽에서의 탈출 시도를 기만작전 내지 양동작전이 아닌가 의심을 하였기 때문이다.

주코프는 오히려 포위망의 북부와 동부 측면에서 전진을 하도록 명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은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단지 독일군이 포기한 지역을 점령하는 것에 그치는 일이었다. 독일군 주력이 현저하게 포위망 서쪽으로 탈출하는 움직임이 명백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던 남쪽에서의 돌파 움직임에 대비하여 예비병력을 꾸준하게 남쪽 측면으로 이동시켰던 것이었다.

한편 3월 30일, 만슈타인은 OKH로부터 남부집단군 사령관 해임사실을 통보받았다. 총통은 후퇴 재가를 둘러싼 논쟁에서의 그의 수많은 항의를 절대 잊지 않았던 것이다.

6. 소련군의 돌파 차단 기도

다음날, 소련군은 드디어 후베군에 대한 차단에 나섰다. 제4 전차 군단의 강력한 전차부대가 세레트 강과 즈브뤼취 강 중간의 북쪽을 강타하였다. 후베군 남부 그룹의 선봉대는 반전하여 소비에트군의 진격을 정지시키고 소비에트군 보급선에 타격을 주었으며, 제4 전차군단에 배치된 다수의 T-34를 기동불능으로 만들었다.

후베가 명백하게 포위망으로부터 탈출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주코프는 탈출하는 독일군을 차단하고자 하는 추가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다. 타르노플로 가는 길은 여전히 쾌청하였다.

7. 제1 기갑군의 탈출

폭설과 보급의 중지, 완벽하게 포위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후베군의 꾸준한 전진은 그들에게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독일군에게 볼 수 있었던 "포위망에 대한 공포"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단은 여전히 군기를 유지하고 잘 조직되었고, 절망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스탈린그라드와 체르카시 포위전에서의 공황상태를 찾아볼 수 없었다.

4월 5일, 북부와 남부그룹의 선봉대는 스트리파 강에 도달했고, 그 다음날 부차츠에 도착하여 감격적으로 파울 하우서의 제2SS 기갑 군단 선봉대와 조우할 수 있었다.

약 2주를 넘는 격렬한 전투, 끔찍한 날씨, 보급을 거의 받지 못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제1 기갑군은 단지 평균적인 손실을 입고 포위망으로 탈출에 성공하였다. 2주간의 후퇴기간 동안, 후베군은 357대의 전차, 42 돌격포, 280문의 포를 파괴하였고 소련군에게 심각한 손해를 입혔다.

8. 결과와 평가

만슈타인의 신속한 판단과 작전계획, 후베의 통솔력이 20만명의 장병을 스탈린그라드의 비참한 운명에서 구해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제1 기갑군이 대부분의 병력을 온전하게 보존하였지만, 연료의 부족으로 대부분의 차량과 화기를 포기하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고 겨우 45대의 장갑차량만이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후베가 지휘하는 제1기갑군이 남부집단군내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기갑병력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기갑군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심각한 장비 손실은 6월에 시작될 바그라티온 작전과 뒤에 있을 루마니아 공세를 포함한 남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반격 작전 수립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무튼 후베 포켓, 또는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이라는 불리우는 이 작전은 오늘날 포위망에 갇힌 부대가 어떻게 전멸을 면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기 위한 사례로 세계 각국의 사관학교에서 자주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1] 제1 기갑사단, 제6 기갑사단, 제11 기갑사단, 제16 기갑사단, 제17 기갑사단, 제19 기갑사단, 제25 기갑사단, 제1 SS 기갑사단 "LSSAH", 제2 SS 기갑사단 "다스라이히"[2] 제20 기갑척탄병사단[3] 제1 보병사단, 제75 보병사단, 제82 보병사단, 제96 보병사단, 제168 보병사단, 제208 보병사단, 제254 보병사단, 제291 보병사단, 제371 보병사단[4] 제101 경보병사단[5] 제18 포병사단[6] 제3 기갑군단, 제24 기갑군단, 제46 기갑군단, 제59군단[7] 1944년 3월 1일 기준으로 보유 중이였던 전차/돌격포/대전차 자주포 838대 중 300대만이 전투 가능한 상태였고 나머지는 정비가 필요한 상태라 전투에 투입할 수 없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