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영웅전설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이반 코네프(은하영웅전설) 문서 참고하십시오.
서부군집단 총사령관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주동독 점령군집단 총사령관 | |||
<rowcolor=#fff>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게오르기 주코프 | 바실리 소콜롭스키 | 바실리 추이코프 | 안드레이 그레치코 | |
주동독 군집단 총사령관 | ||||
<rowcolor=#fff>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안드레이 그레치코 | 마트베이 자하로프 | 이반 야쿠봅스키 | 이반 코네프 | |
<rowcolor=#fff>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이반 야쿠봅스키 | 표트르 코셰보이 | 빅토르 쿨리코프 | 세묜 쿠르콧킨 | |
<rowcolor=#fff>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예브게니 이바놉스키 | 미하일 자이체프 | 표트르 루셰프 | 발레리 벨리코프 | |
<rowcolor=#fff> 주동독 군집단 총사령관 | 소비에트 연방 서부군집단 총사령관 | 러시아 연방 서부군집단 총사령관 | ||
<rowcolor=#fff>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초대 | |
보리스 스네트코프 | 보리스 스네트코프 | 마트베이 부를라코프 | 마트베이 부를라코프 | }}}}}}}}} |
바르샤바 조약 기구 초대 통합군 최고사령관 | |||
<colbgcolor=#de0a07><colcolor=#fff> 소비에트 연방 제8대 주동독 군집단 총사령관 이반 코네프 Ива́н Ко́нев | Ivan Konev | |||
파일:Ivan_Stepanovich_Konev.jpg | |||
본명 | 이반 스테파노비치 코네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Ко́нев Ivan Stepanovich Konev | ||
출생 | 1897년 12월 28일 | ||
러시아 제국 볼로그다현 로데이노 (現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 키로프주 포도시놉스키군) | |||
사망 | 1973년 5월 21일 (향년 75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크렘린 벽 묘지 | ||
재임기간 | 제2대 지상군 총사령관 | ||
1946년 7월 ~ 1950년 3월[1] 1955년 3월 ~ 1956년 3월 | |||
초대 통합군 최고사령관 | |||
1955년 5월 14일 ~ 1960년 4월 | |||
제8대 주동독 군집단 총사령관 | |||
1961년 8월 9일 ~ 1962년 4월 18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de0a07><colcolor=#fff> 부모 | 친부 스테판 이바노비치 코네프 친모 예브도키야 스테파노브나 코네바[2] 계모 프라스코브야 이바노브나 코네바 | |
형제자매 | 자매 마리야 | ||
배우자 | 안나 에피모브나 코네바 (이혼) 안토니나 바실리예브나 코네바[3] | ||
자녀 | 아들 겔리, 딸 나탈리아[4] | ||
복무 | 러시아 제국 육군 | ||
1916년 ~ 1917년 | |||
노농적군 | |||
1917년 ~ 1946년 | |||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 |||
1946년 ~ 1962년 | |||
최종 계급 | 하사관 (러시아 제국 육군) 원수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독소전쟁 └스몰렌스크 전투 └모스크바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드네프르 강 전투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베를린 공방전 └프라하 봉기 | ||
주요 서훈 |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10월 혁명 훈장 레닌훈장 (7회) 수보로프 훈장 1등급 (2회) 적기훈장 (4회) 적성훈장 전승훈장 쿠투조프 훈장 1등급 (2회) | }}}}}}}}} |
[clearfix]
1. 개요
소련의 군인이다.2. 생애
2.1. 출생과 독소전쟁까지
1897년 지금의 포도시노프스키에서 부농이었던 스테판 이바노비치 코네프와 예브도키야 스테파노브나 코네바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함을 보인 코네프는 마을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교육을 더 받기로 결정했고, 고향 마을엔 3년제 교구 학교밖에 없었기 때문에 옆 마을까지 10 킬로미터 거리를 걸어 다니며 4년제 학교에서 추가 교육을 이수했다.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15세부터 포도시노베츠와 아르한겔스크의 목재 공장에서 시간 관리원으로 5년 동안 일하다 1916년에 군대에 징집당하며 군사 경력을 시작했다. 체격이 좋고 똑똑했기 때문에 원래 해군에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육군 보병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12연대에 보내진 코네프는 상관의 부츠를 닦고 막사 동기에게 폭행을 당할 뻔하고 40도의 땡볕 아래에서 풀을 깎는 등 군대의 쓴맛을 맛보았다고 한다. 당시 육군에 장교가 부족하여 부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장교 교육을 받은 후 부사관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포병사단에서 복무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주코프와 비슷하다.
그러다가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의 정치장교로 극동으로 파견되어 장갑열차에 탑승해 백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내전 종전 이후에는 모스크바 군관구 예하의 보병사단에서 정치위원을 담당하던 중 당시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이자 스탈린의 친구인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안면을 트게 되고, 이 때 보로실로프의 눈에 들어 보로실로프가 국방장관이 되고 난 후 코네프를 지휘관으로 전임시키게 된다.
보로실로프의 후원 아래 1926년 프룬제 군사대학의 고급 지휘관 코스를 밟고 원 소속 부대로 돌아갔지만, 정치장교가 지휘관이 되었다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미하일 투하쳅스키에 의해 5년 동안 연대장 직에서 머물러야 했다. 사단장이 된 이후 다시 보로실로프의 도움으로 프룬제 군사대학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코네프는 모스크바 군관구, 벨로루시 군관구의 지휘관 보직을 지내면서 예로님 우보레비치[5]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37년부터 벌어진 대숙청에서는 보로실로프와 그의 파벌의 영향력으로 살아남아 되려 숙청당한 상급자들의 자리로 쾌속 승진하여 1939년에는 2급 사령관으로 임명됨과 1939년 3월, 전연방공산당 18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40년에는 자바이칼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으며, 1년 뒤에는 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2.2. 독소전쟁에서의 활약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코네프는 비텝스크에 배치된 제19군의 사령관이 되어 독일군과 맞서게 된다. 비텝스크에서는 공을 세워 상관들이 패전의 책임을 쓰고 처형되는 와중에 오히려 상장까지 진급했던 코네프였지만, 바쟈마에서는 대패하여 보로실로프의 질책을 받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눈 밖에 나게 된다. 그러나 코네프는 게오르기 주코프의 비호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이후 칼리닌 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코네프는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소련의 반격을 이끌었고, 주코프가 총군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자 주코프의 후임 서부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해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질 당시 아군을 구원하러 갈 수 없도록 붙드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본 코네프는 북서전선군사령관으로 전임되었고, 작전에 관해 스타프카와 갈등을 빚어 후방의 스텝 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임되었다.
쿠르스크 전투 당시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중)와 지형을 조사 중인 코네프 상장(우) |
이후에도 독일 남부집단군을 무너뜨리며 루마니아까지 진출한 코네프는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이후 바투틴을 대리하던 주코프의 후임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으로 전임된다.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당시 슐레지엔 지방으로 진격한 코네프는 독일 A 집단군을 상대로 잠시 밀려났지만, 곧장 재반격을 개시해 A 집단군을 밀어내고, 베를린으로 향하는 진격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전선군이 젤로 고지에서 발이 묶이자, 스탈린은 주코프의 제1벨로루시전선군과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이의 전투 지경선을 없애버리면서 경쟁을 부추겼고, 코네프는 베를린을 점령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젤로 고지를 겨우 넘은 주코프가 코네프에게 질 수 없다면서 광속으로 진격하는 바람에 베를린 점령의 영광은 주코프에게 돌아갔고, 코네프는 이에 무척 아쉬워했다고 한다.
프라하성에서 진행된 훈장 수여식에 참석한 코네프 원수 (좌)[6] |
2.3. 종전 이후
본인의 다차가 있는 모스크바 마을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보내는 모습 |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여 이후 죽을 때까지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재직하였다. 스탈린 사후 권력 투쟁 과정에서 라브렌티 베리야를 숙청하는데 협조하면서 복권되었고,[8] 잠시 지상군 총사령관으로 복직했다가 초대 바르샤바 조약 기구 가맹국 합동군 총사령관에 임명된다. 합동군 총사령관을 지내던 때, 코네프는 헝가리 혁명 진압을 지휘했다.[9] 1960년 군직에서 물러나 국방부 총감찰단[10]으로 이동했던 코네프는 1년 뒤에 독일 주둔 소련군집단 사령관으로 복귀했고, 베를린 장벽 건설을 지휘했다. 1962년 다시 국방부 총감찰단으로 이동한 코네프는 군 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3. 평가
복무 생활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지휘권을 손에 넣음과 동시에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전투를 계획하고 부대를 배치했다. 작전에 필요한 모든 것은 코네프가 지지하는 원칙에 따라 준비됐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항상 냉철한 결단력을 갖춘 사령관으로 유명했다. 많은 사람들이 코네프의 강한 정신력을 부러워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 했으며,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는 그의 관찰력은 부하 장교들까지 긴장하게 했다.
세묜 티모셴코
세묜 티모셴코
4. 여담
-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중 코네프의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소속 제60군이 해방시켰다. 수용소에 대해 보고받은 코네프는 충격을 금치 못하며 끔찍한 현장을 직접 보면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타격을 받아 전투 지휘에 영향이 갈까 봐 수용소에 방문하지 않았다.
- 프라하를 해방시킬 때 프라하를 점령한 사령부와 몇 시간 동안 연락이 끊기는 사고가 벌어졌다. 프라하에 있는 부대 중 아무도 보고를 보내지 않았고 연락을 하기 위해 비행기와 차를 보내도 돌아오지 않았다. 공중정찰을 해보니 더 이상 전투는 없고 거리에 사람들이 꽉 들어찬 것으로 보아 해방된 것이 분명하다는 결과가 나왔으나 여전히 돌아오는 보고는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점령하고 적은 어디로 후퇴했는지 물어오는 스탈린에게 아무 답도 줄 수 없었던 코네프는 큰 불안에 휩싸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소련 장교가 나타나면 환희에 찬 프라하 시민들이 에워싸고 키스와 꽃을 퍼부으며 포위해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프라하에서 실종됐던 지휘관은 렐류셴코, 리발코 등이 있다.
- 엘베강에서 소련군과 미군이 만났을 때 미국의 브래들리 장군은 코네프에게 윌리스 MB를, 코네프는 브래들리에게 돈 말을 선물했다. 브래들리가 준 윌리스의 보닛에는 흰색 페인트로 'Commander in chief marshall Konev'라고 쓰여있었다. 윌리스는 코네프의 다차에 평생을 짱박혀있다가 코네프의 딸이 운전연습으로 딱 한 번 몰아봤다.
- 중앙군집단 사령관으로 오스트리아 빈에 있을 때 오랫동안 앓고 있던 위궤양이 터져 출혈이 발생했다. 소련 의사들은 즉시 모스크바로 가서 위절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으나 코네프는 모스크바에 가는 대신 저명하다는 오스트리아 의사를 초빙해 진찰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의사는 코네프의 병력과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경악하며 "나치당원으로 히틀러를 위해 일했던 우리 전문가들은 절대 이 상태까지 내버려두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네 의사들은 형편없습니다!"라고 소련 의학계를 디스했다. 코네프는 의사면 진료나 하라고 쏘아붙였고 오스트리아 의사는 수술할 필요성이 없다며 일어나서 낚시하고 사냥을 하면 점차 나아질 거라고 대답했다. 오스트리아 의사의 말대로 하니 코네프의 몸은 정말 회복되었다. 정확한 진단을 내린 오스트리아 의사는 이후 인체실험을 한 전범으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 사이가 안 좋았던 주코프와는 결국 화해했다. 1967년 70세가 된 코네프는 이것이 자신이 여는 마지막 잔치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칠순잔치를 성대하게 열며 주코프도 초대했다. 초대받은 주코프는 코네프를 위해 존경과 축하를 담은 짧은 연설을 했고 둘은 수십 년 만에 포옹하며 화해했다. 1974년 5월 1일 코네프를 떠나보내고 과부가 된 코네프의 아내 안토니나가 입원 중인 주코프를 방문했을 때 주코프는 과부에 대한 복지가 있는지 물어보며 상태를 걱정하는 안토니나에게 곧 나을거라고 대답했지만 한 달 뒤 사망하고 만다.
- 코네프의 두 번째 아내 안토니나와 주코프의 첫 만남은 독특하기도 하다. 전쟁 중에 코네프와 안토니나의 사이가 깊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코네프가 일하는데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해 주코프에게 안토니나를 만나서 코네프와 이별할 것을 종용하라는 임무를 내린다.[11] 그러나 안토니나를 만난 주코프는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며 코네프에게 아내와 가족이 있는 것을 아는지, 진지한 마음인지 물어보고 책을 많이 읽고 똑똑해지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떠나버렸다.
주코프가 허락한 사랑
- 라일락을 좋아했다. 다차 정원에 여러 종류의 라일락을 심었고 그중엔 로코솝스키 원수가 생일 선물로 선물한 눈부시게 아름다운 흰 라일락도 있었다. 꽃뿐만 아니라 사과나무도 심고 정성껏 돌보면서 가드닝을 즐겼다.
- 사냥과 낚시를 좋아했다. 젊을 때는 사냥을 즐겨 하다가 나이가 든 말년엔 낚시를 주로 했다고 한다.
5. 서훈 내역
-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1944, 1945)
- 전승훈장 (1945)
- 레닌훈장 7회 (1944, 1945, 1947, 1956, 1957, 1967, 1972)
- 10월 혁명 훈장 (1968)
- 적기훈장 3회 (1938, 1944, 1949)
- 수보로프훈장 1급 2회 (1943, 1944)
- 쿠투조프훈장 1급 2회 (1943 2회)
- 적성훈장 (1936)
- 체코슬로바키아 영웅 (1970)
- 몽골 영웅 (1971)
- 몽골 수흐바토르훈장 2회 (1961, 1971)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2급) (연도 불명)
6. 진급 이력
7. 대중매체에서
- 세계 정복자 3 등 세계 정복자 시리즈에서 현질 장군인 주코프를 제외하면 포병 능력 1인자다.
-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 주코프와 더불어 레벨 5짜리 소련군 장성으로 등장하며 참모진에서도 은폐능력을 버프시켜주는 참모로 등용할 수 있다. 소련 인물 중 유일하게 인물설명이 달려있다.
HOI4의 모드 카이저라이히[12]에선 브리튼 연합에 망명했다.
8. 둘러보기
소비에트 연방군 원수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육군 | ||
이오시프 스탈린P | |||
소비에트 연방 원수 Маршал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 |||
소비에트 연방 초기 5원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P · 미하일 투하쳅스키 · 세묜 부됸니 ·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 바실리 블류헤르 | |||
제2차 세계 대전기 세묜 티모셴코 · 그리고리 쿨리크 ·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 게오르기 주코프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이오시프 스탈린P · 이반 코네프 · 레오니트 고보로프 ·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로디온 말리놉스키 · 표도르 톨부힌 · 키릴 메레츠코프 | |||
냉전기 바실리 소콜롭스키 · | |||
NKVD | 제2차 세계 대전기 | ||
해군 | 함대 제독 {{{-2 Адмирал Флота}}} | ||
제2차 세계 대전기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 이반 이사코프 | |||
소비에트 연방 함대 제독 Адмирал Флота Cоветского Cоюза | |||
냉전기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 이반 이사코프 ·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 |||
비고 | P : 정치장교, AD : 방공군, SRF : 전략로켓군 | ||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
}}}}}}}}} |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총사령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d0000, #d40000 20%, #d40000 80%, #cd0000); color: #ffe4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e400>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게오르기 주코프 | 이반 코네프 | 로디온 말리놉스키 | 안드레이 그레치코 | 바실리 추이코프 | |
<rowcolor=#ffe400> 제6대 | 제7대 | 제8대 | 제9대 | 제10대 | |
이반 파블롭스키 | 바실리 페트로프 | 예브게니 이바놉스키 | 발렌틴 바렌니코프 | 블라디미르 세묘노프 | }}}}}}}}} |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전선 사령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d0000, #d40000 20%, #d40000 80%, #cd0000); color: #ffe4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가브릴 자시힌 | 게오르기 자하로프 | 게오르기 주코프 | 니칸드르 치비소프 |
니콜라이 바투틴 | 다닐 주라블료프 | 드미트리 랴비셰프 | 드미트리 코즐로프 | |
드미트리 파블로프 | 레오니트 고보로프 | 로디온 말리놉스키 | 마르키안 포포프 | |
막스 레이테르 | 막심 푸르카예프 | 미하일 그로마딘 | 미하일 예프레모프 | |
미하일 코발레프 | 미하일 코진 | 미하일 키르포노스 | 미하일 페트로프 | |
바실리 고르도프 | 바실리 소콜롭스키 | 발레리안 프롤로프 | 세묜 부됸니 | |
세묜 티모셴코 | 안드레이 예료멘코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야코프 체레비첸코 | |
이반 마슬렌니코프 | 이반 바그라먄 | 이반 보그다노프 | 이반 체르냐홉스키 | |
이반 코네프 | 이반 튤레네프 | 이반 페듀닌스키 | 이반 페트로프 | |
이오시프 아파나셴코 |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 키릴 메레츠코프 | |
파벨 아르테미예프 | 파벨 쿠로치킨 | 표도르 코스텐코 | 표도르 쿠즈네초프 | |
표도르 톨부힌 | 표트르 구디멘코 | 표트르 소벤니코프 | 필리프 골리코프 | |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최전방에서 단독으로 부대를 배치 · 지휘한 장군을 전선 사령관(Командующие войсками)으로 임명했다. | }}}}}}}}} |
바르샤바 조약 기구 통합군 최고사령관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d700>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이반 코네프 | 안드레이 그레치코 | 이반 야쿠봅스키 | 빅토르 쿨리코프 | 표트르 루셰프 | }}}}}}}}} |
{{{#!wiki style="margin:-10px" | <tablebordercolor=#fff> | 승리의 기사단 Кавалеры ордена «Победа»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전승훈장 수훈자 | ||
2회 | |||
게오르기 주코프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이오시프 스탈린 | |
1회 | |||
레오니트 고보로프 | 로디온 말리놉스키 | 세묜 티모셴코 | |
알렉세이 안토노프 | 이반 코네프 |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
키릴 메레츠코프 | 표도르 톨부힌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
버나드 로 몽고메리 | 미하우 롤라지미에르스키 | 미하이 1세 | |
요시프 브로즈 티토 | }}}}}}}}} |
[1] 1950년부터 1955년까지 지상군 총사령관 직위 폐지[2] 출산 중 사망.[3] 혼전성은 바실리예바[4] 후처인 안토니나 소생.[5] 스탈린의 측근으로 대숙청 당시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이었지만 스탈린의 보직 변경 명령에 항명하다가 숙청된 인물로, 개인적인 능력은 매우 뛰어났고 코네프, 주코프, 말리놉스키와 메레츠코프의 스승으로 존경받았으며, 투하쳅스키의 칭찬을 받은 군인이었다. 그러나 부패했고 군사모험주의적이었으며, 정치에 과도하게 간섭했으며 군을 사유화하자 결국 스탈린의 손에 의해 숙청된다.[6] 오른쪽부터 파벨 리발코 기갑상장, 안드레이 예료멘코 대장[7] 당시 주코프가 숙청당할 위기에서 그를 제일 먼저 변호한 것이 다름아닌 코네프였다고 한다. 정확히는 주코프를 실컷 욕한 뒤, 그를 변호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한다.[8] 베리야는 스탈린 사후 재빨리 개혁적 성향을 가졌던 과두정에 편승했으나, 동독을 서독과 통일시키자는 등의 너무 막나간 주장을 한데다, 스탈린 시절 한 짓들로 인해 대중과 당, 군부 모두에게 찍혀 있었다. 오죽하면 철천지 원수 관계였던 주코프와 코네프가 베리야 제거에는 합심을 했다.[9] 이로 인하여 헝가리 국민들은 코네프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긴다. 코네프의 사진과 기념물들이 모조리 찢겨지거나 파괴되어 불태워질 정도로 코네프에 대한 증오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다.[10] 소련군에는 정년이 없기에 은퇴나 예비역 전환을 원하지 않는 고위 장성들이 총감찰단으로 이동한다.[11] 개인의 연애사에 참견하는 게 이상해 보이는데, 코네프는 첫 번째 아내와의 불화 때문에 스트레스로 전쟁 내내 위궤양을 앓으며 골골거렸다. 안토니나도 1942년에 처음 만난 코네프의 첫인상을 '아파 보인다'라고 서술했다. 아마 스탈린도 이런 점 때문에 코네프의 연애 사정에 예민하게 반응한 듯하다.[12] 1차대전에서 독일제국이 이기고 10월 혁명이 실패한 세계
분류
- 1897년 출생
- 1973년 사망
- 키로프주 출신 인물
- 제1차 세계 대전/군인
- 러시아 내전/군인
- 겨울전쟁/군인
- 독소전쟁/군인
- 소련군 원수
- 소련 육군 총사령관
- 바르샤바 조약군 최고사령관
- 서부군집단 총사령관
- 소비에트 연방 영웅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영웅
- 몽골 인민공화국 영웅
- 수흐바타르 훈장
- 크렘린 벽 묘지 안장자
- 소련 최고회의 1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2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3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4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5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6기 연방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7기 국가평의회 위원
- 소련 최고회의 8기 국가평의회 위원
- 소련 공산당 18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소련 공산당 19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0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2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3기 중앙위원회 위원
- 소련 공산당 24기 중앙위원회 위원
- 전승훈장
- 레지옹 도뇌르 훈장/그랑도피시에
- 클레멘트 고트발트 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