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02:49:19
[clearfix]소련의 군인.
노동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1913년부터 아버지를 따라 광산에서 일했다.
1917년 10월 25일 적군에 자원입대해 기관총 사수로서 알렉세이 칼레딘의 카자크 부대를 상대했다. 1919년 12월 안톤 데니킨의 공격을 막지 못해 포로가 됐으며, 며칠 뒤 적군 병사들에 의해 석방됐다.
남부 군관구, 북캅카스 군관구, 스탈린그라드 군관구, 중부 군관구,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제3벨로루시전선군, 자바이칼 군관구에 파견돼 전투를 치렀다. 제200소총사단 소속 당시 1941년 7~8월 간 키예프에 접근 중인 독일 육군 제6군의 측면을 타격했으나 실패했다. 8월 20일 드네프르 강을 건너 철수한 뒤 체르니고프 방어전에 참전했다. 전투 당시 뇌진탕과 다리 골절로 기절한 뒤 하르코프 군사병원, 카잔 제316군사병원에 입원했다. 1941년 11월, 퇴원한 류드니코프는 제7군 본부 작전부서장직을 권유받았으나 전투 경험을 많이 쌓아 상급 부대를 지휘하길 원했기 때문에 거절했다. 11월 말 로스토프 공세 당시 로스토프나도누를 탈환하는 데에 성공했다.
1942년 4월 중순 아마자습 바바자니안의 명령이 따라 전투를 치르던 도중 제63산악소총사단장 마트베이 비노그라도프가 상부 명령 없이 후퇴했단 이유로 비노그라도프의 총살을 맡았다.
1942년 5월 29일 북캅카스 전선 제138보병사단장으로 임명됐다. 8월 1일 포드고렌스카야 근처에서 포위됐으나 사흘 뒤 바실리 추이코프의 부대가 지원해준 덕분에 방어선을 재구축할 수 있었다. 1942년 10월부터 1943년 1월까지 추이코프와 류드니코프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전투에 임했다. 마침내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독일-루마니아 연합군을 궤멸시킨 뒤 2월 6일 소련 국방인민위원회 법령에 따라 류드니코프의 제138소총사단은 제70독립근위소총사단으로 개명됐다.
제15소총군단장으로 임명돼 교두보를 확보한 뒤 독일 국방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43년 10월 16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법령에 따라 레닌훈장과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비쳅스크-오르샤 돌파전 당시 독일 육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뒤 2만 명이 넘는 장교와 병사들을 포로로 잡고 수많은 점령지를 탈환했다. 이후 이반 체르냐홉스키의 제3벨로루시전선군을 지원했다.
많은 양의 야포, 전차가 지원됐으나 짙은 안개 때문에 진격을 늦추게 됐다. 걱정과는 달리 문제 없이 방어선을 돌파했다. 독일 육군의 전력과 통신망에 큰 피해를 입힌 류드니코프는 상장으로 진급했다.
1945년 8월 실전에 투입돼 몽골-만주 국경에 위치한 방어선을 돌파해 400km 정도 되는 초원을 횡단해 부대를 무사히 만주 중부 산맥까지 지휘했다.
여러 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하다 적군 총참모부 사관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1976년 4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뒤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