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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3:21:11

파벨 바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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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 조약 기구 통합군 총참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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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세이 안토노프 파벨 바토프 미하일 카자코프 세르게이 시테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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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6대 발트 군관구 사령관
바르샤바 조약 기구 제2대 통합군 총참모장
파벨 바토프
Па́вел Ба́тов | Pavel Batov
파일:파벨 바토프 대장.jpg
본명 파벨 이바노비치 바토프
Па́вел Ива́нович Ба́тов
Pavel Ivanovich Batov
출생 1897년 6월 1일
러시아 제국 야로슬라블현 리빈스크구 펠리소보 마을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야로슬라블주 리빈스크군 펠리소보 마을)[1]
사망 1985년 4월 19일 (향년 88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묘소 노보데비치 묘지
재임기간 제6대 발트 군관구 사령관
1958년 4월 16일 ~ 1959년 11월 16일
제2대 통합군 총참모장
1962년 6월 16일 ~ 196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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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배우자 율리아 세묘노바 바토바[2]
자녀 장녀, 차냐
복무 러시아 제국 육군
1915년 ~ 1917년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1918년 ~ 1965년
최종 계급 하급부사관 (러시아 제국 육군)
대장 (소비에트 연방 지상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스페인 내전
겨울전쟁
독소전쟁
주요 서훈 10월 혁명 훈장
레닌훈장 (7회)
소비에트 연방 명예훈장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수보로프 훈장 1등급 (3회)
적기훈장 (4회)
대조국공로훈장 1등급
쿠투조프 훈장 1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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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파벨 바토프.jpg
상장 시절의 모습

1. 개요2. 생애3. 평가4. 대중매체5. 진급 이력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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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 활약한 소련군의 장성.

2. 생애

2.1. 러시아 제국군

파일:파벨 바토프(1916년).jpg
1차 세계 대전 당시 바토프

바토프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군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15년 학생 예비역으로 입대하여 황실 근위대 제3보병 연대에서 정찰병으로 복무했고 이후 1917년 작전 중 부상을 입은 후 바토프는 페트로그라드의 부사관 학교에 예비역으로 배정되었다.

이후 바토프는 볼셰비키 정치 선동가인 A. 사브코프를 몰래 만나왔고 A. 사브코프는 바토프를 볼셰비키 운동으로 이끌었다.

2.2. 적백내전

바토프는 내전 중 붉은 군대에서 첫 4년 동안 기관총 사수로 복무했다. 같은 해에 프룬제 군사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는 붉은 군대의 미래의 많은 고위 장교들을 만났다[3].

이후 1929년에 정식으로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2.3. 프룬제 군사대학

1927년 바토프는 제1 모스크바 프롤레타리아 소총병 사단의 대대장으로 진급했으며 이후 9년 동안 이 부대에서 복무하여 이후 제3연대장이 되었다. 1936년 그의 사단장은 다음과 같이 썼다.
"바토프 동지는 3년 이상 연대를 지휘해 왔으며 그 동안 연대는 ​​전투 및 정치 훈련의 모든 부문에서 사단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전술 훈련에서 그의 연대가 가장 우수합니다."

2.4. 2차 세계 대전

2.4.1. 스페인 내전

어느날, 바토프는 스페인 내전에 갈 장교로 갑자기 '자원'했다. 말이 자원이지 사실상 차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스페인 내전에서 그는 처음에 헝가리 출신 공산주의자로 마드리드를 방어하는 제12국제여단 지휘관 마테 절커(Máté Zalka)의 군사 고문으로 근무했고 테루엘 전선에서 두 번이나 부상을 당했다. 그 공로로 레닌 훈장과 적기 훈장을 받은 바토프는 훗날 스탈린그라드에서의 분전으로 유명해지는 알렉산드르 로딤체프와 함께 아라곤 전선에서 싸웠고 또 부상당했다.

2.4.2. 폴란드 분할

1937년 12월 스페인에서 소련으로 돌아온 바토프는 이후 제10소총병군단과 제3소총병군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이후 그의 제10소총병군단과 제3소총병군단과 함께 1939년 9월, 소련군의 폴란드 동부 점령을 지휘했다.

2.4.3. 겨울 전쟁

폴란드 분할 이후 핀란드에서 복무를 시작한 바토프는 그의 두 번째 레닌 훈장을 받았고 1940년 6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후 그는 남캅카스 군관구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2.4.4. 대조국전쟁

1941년 6월, 바토프는 제106, 156 소총병 사단과 제32 기병 사단으로 구성된 제9독립소총군단을 지휘했다[4]. 이 군단은 바르바로사 작전 발발 당시 크림반도에서 유일하게 주둔중이던 주요 붉은 군대 군단이였고 케르치에서 그의 군대가 철수하고 거기에다 독일군에 의해 크림 반도까지 점령했지만 바토프는 강철의 대원수에게 전략적 이유를 대며 상황을 설명하고 설득하여 겨우 숙청을 면했다...

1942년 1월, 그는 제3군 사령관으로 브랸스크 전선으로 재배치 되었고 후에 신병 전선 훈련을 위한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는 바토프가 "본부에 앉아 있는 것"보다 현지를 선호했으며, 그의 현재 역할이 그에게 "부담"이였다고 전해진다. [5]
2.4.4.1.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2년 10월 22일 바토프는 바실리 크루첸킨(당시 소령, 이후 중장)에서 제65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로코솝스키가 돈 전선의 일부를 수정하고, 구성할동안 바토프는 그 기간 동안 제65군을 지휘했다. 그는 소련의 반격인 천왕성 작전을 계획하는 데 도움을 주어 주코프에게 핵심 정보를 제공했다. 그의 군대는 이 공세에서 핵심 공격 부대를 지정됐고, 이어지는 작전은 포위된 추축국 군대를 감소시키고 격파했다. 로코솝스키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그의 부대로 훌륭한 주도권을 보였줬다... 그의 부대는 적의 측면과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다른 부대의 신속한 전진을 보장했다.
이 승리에 따라 제65군은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중앙 전선으로 로코솝스키의 부대에 합류했다. 이 성공을 이용하여 당시 전선군은 쿠르스크 서쪽의 약한 독일 제2군을 강력하게 공격하고 있었는데 봄철의 라스푸티차와 남쪽의 하르코프 주변의 독일군의 성공에 의해 저지당했다.
2.4.4.2. 쿠르스크 전투
1943년 7월, 바토프의 군대는 거대한 쿠르스크 전투 동안 독일의 패배 이후 작전에서 로코솝스키 전선군의 일부를 구성했다. 8월부터 10월까지 제65군은 세브(Sev), 데스나(Desna), 소즈(Sozh), 그리고 마침내 드네프르(Dnieper) 강을 건너게 하여 바토프와 그의 군대는 강 횡단 에서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2.4.4.3. 도하 전술의 달인
1944년 6월, 바토프의 군대는 벨로루시에서 주요 전략 작전에 참여했다. 로코솝스키와 바토프는 스탈린을 설득하여 지형을 고려할 때 독일군에 대해 한 번의 강한 공격보다 두 번의 강한 공격을 가하는 것이 더 낫다고 로코솝스키는 확신했다. 바토프는 코듀로이 도로, 늪지 신발 및 기타 수단을 사용하여 보브루이스크 남쪽의 늪지대를 가로질러 군대를 이끄는 바토프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 65군은 실망시키지 않았고 며칠 만에 독일 9군은 포위되어 대부분의 병력을 상실했다.

65군은 7월 22일 부크 강을 건너 9월 4일까지 바르샤바 북쪽의 나레프 강을 건너기 위해 진군했다.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인해 병력 대부분이 탈진했지만 바토프의 군대는 나레프 교두보에 대한 독일의 강력한 반격을 저지했다. 그후 1월에 개시될 공세를 위해 교두보에 병력이 증강되었다.

이후, 65군은 2월 초에 비스툴라 강을 건넜고, 로코솝스키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스탈린그라드 이후로 65군에 있었고 병사들, 지휘관들, 그리고 물론 용감하고 재능 있는 군인인 파벨 바토프의 훌륭한 자질을 관찰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있었다.

이후, 1945년 4월에 다시 한번 더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겨울 공세를 통해 바토프의 군대는 독일 동부로 진격하여 마침내 오데르 강으로 진격하였다.[6]

2.5. 2차 세계 대전 후

전쟁이 끝난 후 바토프는 다양한 고위 사령관직을 맡았다. 1945년 여름, 그는 폴란드의 제7 기계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병력이 감소함에 따라 1947년에는 칼리닌그라드에 본부를 둔 제11 근위군, 독일에서 보로실로프 장군 참모 학교에서 강의를 진행하고, 군사 이론에 대한 책을 쓰는 작가가 되었다. [7]

바토프는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카르파티야 군관구의 사령관이 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1956년 헝가리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그는 발트 군관구사령관(1958-1959), 남부군집단사령관(1960-1962),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망한 알렉세이 안토노프 장군을 대신해 바르샤바 조약 기구 가맹국 합동군 참모장(1962-1965)으로 재배치되었다. 바토프는 1965년 현역 소련군 장교로서 사임했지만, 이후 소련 국방부 총감찰단에서 계속 근무했으며 1970년부터 1981년까지 소련 재향군인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그는 1968년 그의 절친 로코솝스키가 사망할 때까지 로코솝스키의 절친한 친구로 남아 그의 회고록을 편집하고 출판하는 업무를 맡았다.

2.6. 최후

바토프는 1985년 4월 19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여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3. 평가

여러 전투 사령관들이 경험이 많고 유능했는데, 특히 파벨 바토프가 그랬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일반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바토프는 당시 그의 능력에 대한 충분한 평판을 얻었고, 대조국전쟁에서 살아남은 후 나치를 끝낸 최종 승리에 크게 기여한 수많은 재능 있는 장군들 사이에서 그는 "적을 교묘하게 때려눕혀야 하고, 적은 양의 피를 흘려야 한다"는 말을 즐겨 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전후 NATO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바토프는 전투 중 최전선에 나가 병사들과 대화를 나눴던 몇 안 되는 고위 장교 중 한 명이였고 병사들로부터 많은 신뢰와 존경을 받았왔습니다. 그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군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 유능하고 재능 있는 군지도자이자 교관임을 입증했습니다."

4. 대중매체

하츠 오브 아이언 4 모드 TNO에서 로코솝스키가 이끄는 스베르들롭스크 소속으로 나온다. 로코솝스키와 절친이라 그런지 로코솝스키가 사망하면 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만약 스베르들롭스크가 야조프의 옴스크에게 무력으로 합병당할 경우 반야조프 반란을 이끌고 기어이 무너트리거나 아니면 존재 자체가 지워지며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5. 진급 이력

6. 둘러보기

파일:소련 국방부 휘장.svg 제2차 세계 대전 소련군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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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정치장교, A: 포병, T: 기갑, Si: 통신, Sa: 공병
※ 문서가 있는 인물만 종전 당시 계급으로 서술
※ 병과원수랑 병과상원수는 대장과 동급이나 의전서열상 대장과 원수 사이에 있었다
※ 포병·기갑·통신·공병·공군 장교는 상장→대장이 아닌 상장→병과원수로 진급
※ 윗 첨자 : 전사
1. 반공 및 지시불이행 혐의로 총살당했으나 전후 1957년 7월 31일 무죄로 판결나면서 복권
2. 1944년 4월 20일 대장에서 상장으로 강등, 전후 1953년 8월 3일 대장 계급 복권
3. 1942년 3월 17일 원수→소장으로 4계급 강등 및 1945년 7월 19일 중장→소장으로 강등
4. 1942년 7월 12일 독일군에게 생포당한 이후 나치 독일에 전향, 종전 후 체포되어 나치 부역 혐의로 사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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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2007년 기준으로 사람이 한 명밖에 안 산다. 다만 현재는 인구 조사를 안해서 인구가 사실상 파악이 안된다. 좌표는 57°55' 41.0″N 38°49' 04.7″E. 우체국 한 곳이 있고 집은 총 다섯 채라고 한다.[2]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전용사다.[3] 대표적으로 로코솝스키를 이때 만났다. 이후 로코솝스키와 바토프는 절친이 된다.[4] 총 병력은 약 35,000명이었다[5] 추가로, 바토프와 로코솝스키는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로코솝스키의 지휘 하에 계속 복무했고. 추가로, 1968년에 로코솝스키가 사망할때까지 계속 직업적 개인적 유대를 형성했다고 알려져있다.[6]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이후 근처 독일 관료들은 4월 26일 바토프의 군대가 엄청난 속도로 오데르 강을 넘자 저항도 하지 않고 공포에 질려 즉시 항복했다.[7] 그의 도하 전술에 관한 그의 논문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참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