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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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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샤포시니코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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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8·11대 노농적군 총참모장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Бори́с Ша́пошников | Boris Shaposhnikov | |||
본명 | 보리스 미하일로비치 샤포시니코프 Бори́с Миха́йлович Ша́пошников Boris Mikhaylovich Shaposhnikov | ||
출생 | 1882년 10월 2일 | ||
러시아 제국 우파현 즐라토우스트 (現 러시아 우랄 연방관구 첼랴빈스크주 즐라토우스트) | |||
사망 | 1945년 3월 26일 (향년 62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크렘린 벽 묘지 | ||
재임기간 | 제5대 노농적군 사령관 | ||
1928년 5월 ~ 1931년 4월 | |||
제8대 노농적군 총참모장 | |||
1937년 5월 10일 ~ 1940년 8월 | |||
제11대 노농적군 총참모장 | |||
1941년 7월 29일 ~ 1942년 5월 1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 아버지 미하일 페트로비치 샤포시니코프 어머니 펠라게야 쿠즈미니치나 | |
배우자 |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샤포시니코바 | ||
자녀 | 아들 이고르 | ||
복무 | 러시아 제국 육군 | ||
1901년 ~ 1917년 | |||
노농적군 | |||
1917년 ~ 1945년 | |||
최종 계급 | 대령 (러시아 제국 육군) 원수 (노농적군) | ||
주요 보직 | 보로실로프 사관학교장 노농적군 총참모장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혁명 러시아 내전 독소전쟁 | ||
주요 서훈 | 레닌훈장 (3회) 수보로프 훈장 1등급 적기훈장 (2회) 적성훈장 (2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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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군인.스탈린 시절에 대숙청 이후 노농적군의 총참모장을 맡아 수많은 장교가 숙청되어 난장판이 된 소련군의 재건에 큰 기여를 했다.
2. 생애
2.1. 러시아 제국
카자크족 출신으로 1882년 첼랴빈스크 주에서 태어났다. 1901년 러시아 제국 육군에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장교의 길을 걷는다. 1910년에는 니콜라예프 총참모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참모장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소령계급으로 참모장교로 참전하여 오스만 제국군과 싸웠다.1914년 머리를 부상당하기도 했으나 회복되어 복직하였고, 대령까지 진급하였다.
2.2. 대숙청 이전까지
1917년 10월 혁명이 발발하자, 장교출신으로는 드물게 볼셰비키를 지지하고 노농적군에 입대하였다. 정규장교가 드물었던 초기 붉은 군대에서 정규군사교육을 받았던 정통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내어 당장 노농적군 제1부총참모장으로 러시아 내전에서 붉은 군대의 승리에 기여했다. 1918년 다시 큰 부상을 당하기도 했으나, 이후 회복되어 복귀했다. 이어 여러 전공을 세워 적기훈장을 받았다.이후 야전으로 돌아가 여러 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1931년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후임으로 노농적군 총참모장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취임한지 1년만에 1932년 군내 파벌간의 투서사건에 휘말려 한직인 프룬제 군사대학의 교장으로 좌천되었다. 1935년 다시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어 야전으로 복귀했다. 1935년 군에 계급이 도입되자 대장을 달았다.
1937년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예고로프가 숙청되면서 다시 총참모장직에 복귀했다.
성향을 의심받는 제국군 장교 출신이었고, 대숙청 이후였던 1939년까지 당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정치적 행동이나 발언을 극히 삼가고 순수한 군인에 머물렀기 때문에 대숙청을 피해갈 수 있었다. 오히려 공산당 내에 수많은 파벌이 난무하던 대숙청 이전에 당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계파로 찍히지 않아서 대숙청을 피해간 행운의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대숙청에 고위 재판관으로 참가하여 이후에 복권된 투하쳅스키나 요나 야키르 같은 여러 전직 동료들에게 사형을 언도하기도 했다. 사실 본인이 판결을 내렸다기보다는 스탈린이 내린 명령에 도장찍어주는 역할이었다.
2.3. 이후
샤포시니코프는 대숙청 이후 막장화된 소련군을 재건하기 위해 많은 기여를 했다.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스탈린을 설득하여 감옥에 있거나 예편된 수천명의 장교들을 군에 복직시켰다.스탈린은 의심많은 성격답지 않게 특별히 샤포시니코프를 신임했으며, 직책이나 성("총참모장 동무"나 "샤포시니코프 동무")으로 부르지 않고 "샤포시니코프 선생"[1]이라고 높여 불렀을 정도로 샤포시니코프를 신임하고 총애했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특별히 샤포시니코프만 담배를 피울 수 있게 허락해주고, 자기 책상에 샤포시니코프의 저서인 "군의 두뇌"를 항상 놓고 탐독했다고 한다.
1939년 겨울전쟁에서 침공작전을 입안하지만,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지휘한 소련군은 처음에 핀란드군에 참패했고, 이후 후임 사령관 세묜 티모셴코가 전선을 추스려 겨우 핀란드의 항복을 받아냈다. 소련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초기 실패는 침공군 사령관이었던 보로실로프의 책임이 더 크다고 판단되었고, 최종적인 승리가 평가되어 1940년 5월, 원수로 승진했다. 하지만 만성폐결핵 환자이었기 때문에 전쟁중 건강을 해쳐 8월 총참모장 자리에서 사임했다. 후임 총참모장이 키릴 메레츠코프 대장인데, 스탈린의 신임을 잃어 다음해 1월에 다시 주코프 대장으로 교체되었다.
결국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주코프는 특유의 고집으로 스탈린과 잦은 의견 충돌을 벌이다 다시 야전으로 돌아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방위를 맡았다. 샤포시니코프는 이런 주코프의 뒤를 이어 10월 다시 총참모장에 취임하지만 이는 명목상이었고, 부총참모장인 바실렙스키가 실질적인 총참모장 역할을 하면서 모스크바 전투를 지휘하는 주코프를 보좌했다.
이후에도 샤포시니코프는 명목상 계속 총참모장에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부총참모장이었던 바실렙스키가 총참모장 역을 한다. 샤포시니코프는 독일군의 청색 작전으로 전쟁이 중대국면에 치달은 1942년 5월이 되어서야 이 자리를 바실렙스키에게 물려주고 한직인 보로실로프 군사학교 교장으로 물러난다.
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나기 직전인 1945년 3월 26일 지병인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화장되어 크렘린 벽묘지에 매장되었다.
3. 평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샤포시니코프다. 그의 군사적 재능과 지식은 소련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했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샤포시니코프는 부하 장군들의 잘못을 꾸짖지 않고 엄중히 문책했다. 그는 항상 나를 포함한 장군들을 아버지 같은 따뜻함으로 감쌌다. 질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참모부에서 복무했다. 고통스럽게 기침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지들의 마음은 무거웠으나 항상 품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은 놀라웠다.
세르게이 시테멘코
세르게이 시테멘코
단 한 가지 질문, 식사를 했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샤포시니코프는 언제나 군인들의 끼니를 최우선으로 여겼다. 매일 병사들을 위한 식량 공급에 노력했다.
마트베이 자하로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야전지휘를 맡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소전쟁 직전까지 스탈린의 신임을 이용하여 소련군내에 여러 개혁조치들을 실행했다. 또한 관리능력도 출중했기 때문에 대숙청후 박살난 소련군의 재건에 큰 기여를 했다. 이것이 독소전쟁 발발 이전까지 끝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 재건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평가받는다.마트베이 자하로프
야전군인이라기보다는 행정가, 군사이론가, 저술가로 더 이름이 높다.[2] 그의 저서들은 소련군 및 공산권 군대에서 널리 읽혀졌으며, 제2차 세계 대전때 소련군 장성들의 스승으로 간주된다.
4. 기타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의 열렬한 추종자로 알려져 있다.
- 소련 최후의 국방장관인 예브게니 샤포시니코프와는 성만 같을 뿐 아무런 관계가 없다.
- 외아들 이고르 샤포시니코프 (1919-1991)은 소련군의 공병 중장으로 재직했다.
- 샤포시니코프를 기리기 위해 우달로이-I급 구축함 555번함이 마르샬 샤포시니코프(Маршал Шапошников)로 명명됐다.
[1] 스탈린은 러시아어로 샤포시니코프를 "보리스 미하일로비치"라고 이름+부칭으로 불렀는데, 이는 존칭으로 간주된다. 한국어로는 ~선생과 어감이 비슷하다고.. 예를 들어 러시아계 한국인인 박노자 교수가 스승인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를 사석에서 부를 때 이렇게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부른다.[2] 이 점이 소비에트 연방 영웅으로 등극하지 못한 이유로 꼽히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