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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 ※ 진급시기 기준 세분, 2차 대전기는 전간기부터 1945년 8월까지 해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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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초대 장거리항공사령관 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 Алекса́ндр Голова́нов | Alexander Golovanov | |||
본명 | 알렉산드르 예브게니예비치 골로바노프 Алекса́ндр Евге́ньевич Голова́нов Alexander Yevgenievich Golovanov | ||
출생 | 1904년 8월 7일[1] | ||
러시아 제국 니즈니노브고로드 (現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 니즈니노브고로드주 니즈니노브고로드) | |||
사망 | 1975년 9월 22일 (향년 71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노보데비치 묘지 | ||
재임기간 | 초대 장거리항공사령관 | ||
1944년 12월 6일 ~ 1946년 4월 3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배우자 | 타마라 바실리예브나 골로바노바 | |
자녀 | 장녀 스베틀라나 차녀 타마라 3녀 베로니카 4녀 올가 5녀 스뱌토슬라브 | ||
복무 | 노농적군 | ||
1919년 ~ 1924년 | |||
소비에트 연방 공군 | |||
1941년 ~ 1953년 | |||
최종 계급 | 항공상원수 (소비에트 연방 공군) | ||
병과 | 공대지 전투 → 수송 | ||
주요 참전 | 러시아 내전 할힌골 전투 겨울전쟁 독소전쟁 | ||
주요 서훈 | 레닌훈장 (2회) 수보로프 훈장 1등급 (3회) 적기훈장 (3회) 적성훈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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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군인.2. 생애
예인선장 아버지, 오페라 가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2.1. 러시아 내전
13세가 되던 해 2m가 넘는 키 덕분에 나이를 16세로 속이고 적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식품인민위원회 사무실에서 집배원으로 일하다 1919년 5월 말 동부전선 제28보병사단 제59보병연대에서 정찰병으로 차출됐다. 이후 남부전선 제7보병사단 소속으로 전투를 치르다 1920년 9월 포탄 공격에 의해 입원했다.2.2. 제2차 세계 대전
2.2.1. 할힌골 전투, 겨울전쟁
1939년 5월부터 공군사령부 소속으로 더글라스 항공기를 조종하며 부상당한 사령관들의 후송을 담당했다. 빠르고 우수한 비행 실력으로 적기훈장을 받은 뒤 400시간 이상의 실전 비행 기록을 세웠다.2.2.2. 독소전쟁
1941년 여름부터 야간 지상 공격을 치르다 제81장거리항공사단장으로 임명됐다. 이후 모스크바에 접근하는 독일 국방군을 저지한 뒤 스몰렌스크, 모길료프, 칼리닌그라드 근처 교량과 철도를 파괴했다. 이후 제81장거리항공사단은 1941년 12월 국방인민위원회 명령에 따라 제3장거리항공사단으로 개명됐다. 여러 전투에서 좋은 성과를 낸 골로바노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신뢰를 얻으며 제18공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뒤 베를린 공방전에서 장거리 폭격 훈련을 지휘했다. 1944년 골로바노프는 수면장애로 경련을 앓다 중추신경계를 크게 다쳐 최전방 사령관직에서 물러났다.2.3. 전후
1950년 보로실로프 고등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재활치료를 받으며 스탈린에게 복직을 요청했으나 기각됐다. 1952년부터 제37근위공수군단장을 역임하는 수모를 겪은 것도 모자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법령에 따라 다시는 군단급 이상의 부대를 지휘할 수 없게 됐다.[2] 1953년 스탈린 사망과 동시에 해임됐으며, 1958년부터 민간항공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하다 1966년 은퇴했다.2.4. 사망
1975년 9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뒤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됐다.3. 여담
- 소련군 역사상 최연소 병과상원수다.
- 테헤란 회담 당시 스탈린,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탑승한 여객기를 직접 조종했다.
- 딸 올가에 따르면 계급에 맞지 않는 대우를 받아도 여전히 스탈린주의를 지지했다고 한다.
- 유언으로 '평생 불행했다'고 하자 아내 타마라가 이유를 물었는데, '그 이유를 모르는 게 당신이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고 한 뒤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