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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03:07:48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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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34대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파일:드와이트 아이젠하워.jpg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본명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
Dwight David Eisenhower
출생 1890년 10월 14일
텍사스주 그레이슨 카운티 대니슨 사우스 라마 애비뉴 609
사망 1969년 3월 28일 (향년 78세)
워싱턴 D.C. 월터 리드 육군 의료 센터
묘소 캔자스주 딕킨슨 카운티 애빌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도서관&박물관
재임기간 제34대 대통령
1953년 1월 20일 ~ 1961년 1월 20일
서명
파일: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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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데이비드 제이콥 아이젠하워
어머니 이다 엘리자베스 스토버 (1862 ~ 1946)
형제자매 첫째 형 아서 아이젠하워 (1886 ~ 1958)
둘째 형 에드가 뉴턴 아이젠하워
남동생 로이 아이젠하워 (1892 ~ 1942.6.7)
남동생 얼 듀이 아이젠하워
남동생 밀튼 스토버 아이젠하워
남동생 폴 D. 아이젠하워 (1894 ~ 1895)
배우자 매미 아이젠하워 (1896 ~ 1979)
자녀 다우드 아이젠하워[1], 존 아이젠하워[2]
학력 에빌린 고등학교(졸업)
미국육군사관학교 (학사)
종교 개신교 (장로교회)
신체 179cm / 체중 78kg / O형
소속 정당

문장 파일:Dwight_D._Eisenhower_Arms.png
군사 경력
임관 미국육군사관학교 (1915년 임관)
복무 미합중국 육군
1915년 ~ 1953년[3]
1961년 ~ 1969년[4]
최종 계급 원수 (미합중국 육군)
주요 보직 연합군 총사령관
연합원정군 최고사령관[5][6]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서훈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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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avy_Distinguished_Service_Medal_ribbon.svg.png해군수훈근무훈장
파일:800px-Legion_of_Merit_ribbon.svg.png공로훈장
파일:멕시코국경근무메달 약장.svg멕시코국경근무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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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점령군메달 약장.svg점령군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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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wight_D._Eisenhower,_official_Presidential_portrait.jpg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2. 생애3. 평가
3.1. 군인으로서의 평가3.2. 대통령으로서의 평가
3.2.1. 총평3.2.2. 문민통제 확립 및 군산복합체 견제와 대소련 군사 전략
4. 선거 이력5. 대중매체에서
5.1. 영화5.2. 만화/애니메이션5.3. 소설5.4. 게임
6. 기타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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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4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7]
미국의 제34대 대통령, 애칭은 아이크(Ike).[8]

미군 장성 출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으로서, 율리시스 S. 그랜트 이후 최초로 재선에 성공 후 8년 이상 재임한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다.[9]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자, 고국으로 귀환하여 대통령이 된 5성 장군이었다. 대통령 재임 당시 극심했던 인종 차별을 연방군 투입으로 저지시킨 또 다른 의미의 영웅이기도 하다.[10] 초대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직도 지냈다.

2.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생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1.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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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3. 평가

군 장성 출신 대통령 중 초대 대통령이였던 조지 워싱턴과 함께 군인으로서도 대통령으로서도 평가가 좋은 편이다.

3.1. 군인으로서의 평가

세계사에 기록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지휘했던 장군. 2차 세계대전 당시 최고의 사령관 중 한 명으로, 상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역시 아이젠하워를 본인이 만난 사무원 중 최고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1] 능력이 있던 인물이었고, 2차 세계대전 당시 횃불 작전, 시칠리아 상륙작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보여준 모습을 보면 굉장한 리더십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사람들 간의 갈등을 중재하고 해결하는데 능했으며, 이러한 그의 성격과 능력은 여러 국가들의 군이 동참하는 연합군의 지도자로서 매우 적합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훗날 그가 군인을 넘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 이후에도 이를 수월하게 수행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3.2. 대통령으로서의 평가

3.2.1. 총평

집권기였던 1950년대 미국을 상당히 안정적으로 이끌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시기적으로도 전쟁이 끝나고 전후 복구기를 맞아 미국 경제는 호황을 누렸으며[12] 일자리도 완전 고용에 가깝게 실현되었다. 덕분에 지금도 역대 미국 대통령 평가 순위에서 10위 안팎의 상위권에 오르내리며, 공화당에서 자당 정치사의 주요 아이콘으로 내세우는 대통령 중 한 명이 되었다.

다만 아이젠하워는 본래부터 정치인은 아니었던데다, 정책적으로는 실용주의적 노선을 지향해 반대로 공화당원으로서의 당색은 약한 편에 속한다.[13] 그래서 직전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도 일부 계승했고, 흑인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또 오늘날의 공화당은 신보수주의 운동을 거치면서 1950년대보다 보수화되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와 안 맞는 점도 있다.

사실 애초부터 아이젠하워는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영입하고자 하는 거물급 인사였고, 공화당이 20년간 대통령 자리를 뺏겨왔던 탓에 더 절박하게 대통령 후보 자리를 내준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공화당에선 자기네들 역사가 길어서 그렇다고 때우고 있고, 반대로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호감도가 매우 높고 괜찮은 대통령 축에 속한다.

그러나 공산화를 막기 위해 무신론자들[14]을 통제하는 등 보수적인 정책노선을 걷기도 했으며, 실제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충성의 맹세에 '하나님 아래(Under God)'가 추가되었다. 또 적절한 정부개입을 지지하더라도 정부규제보다는 친기업, 친시장 기조 하에서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의 우호적인 상호작용을 선호했으며, 복지정책에 있어서도 재정보수주의에 입각한 재정건전성을 중시했다.

미국 공화당 내 온건 보수라는 점에서 넬슨 록펠러와 함께 록펠러 공화당으로 분류되지만, 그는 종교적 관용이나 낙태와 같은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좀 더 진보적인 편이었던 록펠러와 달리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대한민국에 2번이나 방한하였으며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대한민국의 안보에 큰 역할을 하였다.

아이젠하워는 재임 기간 동안 행운도 따랐으며 특히 외교 분야가 그런 편이었다. 예를 들어서 임기 말년에 쿠바 혁명이 터졌는데, 그 대책 마련을 주문해놓고 퇴임해버려서 후임인 케네디에게 도착한 것이 피그만 침공 계획서와 노스우즈 작전 계획서였다. 피그만 침공이 케네디 집권 3개월차에 있었던 것이 이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의 경우도 도미노 이론에 따라서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1차 인도차이나 전쟁 휴전안의 조건이었던 남북베트남의 통합선거를 거부하게 하고 베트남 공화국의 건국을 지원한 것이 아이젠하워 정부의 정책이었다. 케네디는 베트남에서 발을 빼야 하고 군대 파견은 절대로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남베트남의 상황은 미국이 발을 빼면 그대로 망할 판이라서 발을 뺄 수가 없었다.

부통령으로는 리처드 닉슨이 있었다.[15] 하지만 닉슨이 자신의 뒤를 이어 공화당 대표로 출마할 때 그에게 명확하게 지지를 보내지 않았고, 이것이 닉슨에게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되기도 했다.[16] 존 F. 케네디와 맞붙은 60년 대선에서의 득표 편차는 표 수로는 약 20만 표였으나 비율로는 고작 0.1%p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가 명확한 지지를 표명했으면 닉슨이 이겼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후 다음 68년 대선에서 승리했지만 여기서도 0.7%p차로 신승한다. 결국 닉슨은 압도적인 재선을 위해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무리수를 두게 되었다.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단 아이젠하워가 개인적으로 닉슨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도 닉슨이 항상 아이젠하워의 명령에 충실했음에도[17] 불구하고 아이젠하워는 직접 닉슨을 부통령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려고 한 적이 있다.[18]

또한 아이젠하워는 이 시기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정력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55년에는 심각한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을 뻔했고, 56년에는 크론병으로 인한 장 폐색으로 대수술을 받았으며, 57년에는 뇌졸중이 터져 실어증 증세까지 보였고 이 때문에 금연했다. 다행히 금연을 하고 건강 관리를 받으면서 이전 시기보다는 건강이 많이 호전되었지만, 아이젠하워는 2번째 재임 기간 동안 몇 번씩이나 심장 마비를 겪었다. 이 때문에 닉슨과 케네디가 맞붙던 시점에는 영부인이나 대통령 주치의 모두가 닉슨의 선거 운동을 돕기 어렵다고 할 정도였다. 만약 아이젠하워가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도왔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있고 실제로 닉슨도 "아이젠하워가 방문했다면 표심이 바뀌었을 주가 몇 곳은 되었을 것"이라는 회고를 하기도 했다.

반면 케네디는 아이젠하워와는 다르게 젊고 활동적인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써먹었고, 이 때문에 아이젠하워는 매일 골프장이나 전전하는 퇴물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3.2.2. 문민통제 확립 및 군산복합체 견제와 대소련 군사 전략

아이젠하워는 먼저 느슨했던 문민통제를 확실하게 했다. 현역시절 보너스 군대 사건을 지켜보면서 폭주한 군부가 어떻게 시민들의 목숨을 위협하는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비대해진 군부의 영향력을 줄여야 했다.

아이젠하워는 퇴임사에서 군부와 산업계가 상호 의존하는 이른바, 군산복합체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다만, 군산복합체라는 개념을 처음 꺼내든 것은 아이젠하워가 아닌, 찰스 트레벌 영이었고 군산복합체란 단어를 연설문에 집어넣은 것도 대통령 연설문 작성가였던 랠프 윌리엄스와 맬컴 무스였다.

다만, 그의 군산복합체론은 군부와 산업계가 결합한 거대한 이익 집단의 도래를 예견하고 이를 막기 위해 군수 산업계에 대해서 강력한 규제와 통제를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최초로 군산 복합체란 개념을 말한 영의 주장은 군수 산업을 국영화하고 그것을 통제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었고 아이젠하워의 주장도 일부에서 제기하는 수상쩍은 악의 단체가 미국을 배후 조종한다는 식의 음모론적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군사예산을 삭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세한 것은 군산복합체 항목 참조.

그의 발언은 시대상을 읽을 필요가 있다. 아이젠하워 정권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전세계의 군수공장"[19] 역할을 한 미국이 전후에 대대적인 군축을 시행했고 한국 전쟁을 시작으로 50년대에 다시 군비를 키울 때였다.[20] 그러다 재임 후반기에 오면서 다시 군축을 해야할 시기가 다가왔고 이 때 나온 것이 퇴임사의 군산복합체론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무기는 어떠한 가치 재생산도 하지 못한다. 단기간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자국에 유리한 협정을 맺는다면 상당한 경제적 가치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쓰이지 않는다면 고철로 폐기되기 마련이다. 제국주의 시대까지는 아편 전쟁을 비롯하여 단기간의 전쟁으로 이익을 챙길 수 있었지만, 양차 대전 이후로 세계 주요 국가들은 전쟁이 갖고 오는 엄청난 사회, 경제적 문제를 인식했고 국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전쟁의 규모가 감당 불가능할 정도로 커졌다.

그래서 전쟁을 원치 않는 여론과 자칫 잘못하면 정권은 물론, 국가 위기 상황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정치인들을 사로잡았고 결과적으로 냉전 기간 동안 열강들 간의 전면전은 없었다. 그래서 팔리지 않는 구형 잠수함면도기 회사에 고철용으로 팔아 치운 사례도 있을 정도로 군수 물자와 무기에 대한 수요가 떨어져 버렸다. 따라서 평시에 과도한 군사비 투입은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다만 "어차피 전쟁 안 할 거면 국방비에 투자할 돈을 모두 그냥 민간 기업에 투자하면 기술 개발도 더 효과적인 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보통 민간 기업은 회장 개인의 개인적인 관심사가 아닌 이상 단기간에 경제적인 성과가 확실하지 않은 기술에는 잘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정부가 지원하지만 한계가 있다.

한국에서는 연구 개발 분야 정부 투자가 상대적으로 적어 아직 군수 산업이 민간 산업에 기대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첨단 과학 기술의 최초 수요자가 군수 산업이고, 그렇게 연구 인력을 유지하고 기술을 더 발전시키고 경제성을 키워 민간에 상용화된 경우가 흔하다. 그런 식으로 군수 산업이 의도치 않게[21] 군수 산업이 과학 기술 발전의 마중물로써 작용한다거나, 전자파나 인터넷처럼 군수 산업에서 출발해서 민간 부문으로 확장된 사례도 많다.

그 예시로, 스페이스X같은 민간 로켓 개발 회사들이 그나마 NASA의 지원을 받아 위성 발사체 사업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반 세기 동안의 국가 주도의 연구 개발 "낭비", 엄청난 숫자의 대륙간 탄도탄과 그것을 관리, 발사, 유도하는 시스템을 생산하며 발전한 결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수십 년 간 NASA의 천문학자와 다른 과학기술자가 한 일 대부분은 그 자체로서 바로 미국 서민의 "빵"이나 "달러"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달 탐사와 외행성 탐사를 위해 NASA가 얻은 예산 역시 냉전 시기 미소 경쟁과 군사 기술 개발 요구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만약 미소간 경쟁이 없었다면 GPS 위성 발사는 훨씬 늦었을 것이고 우리는 지상 기지국 기반의 위치 추적 시스템을 친숙하게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 정부의 예산 수준으로 위성 기반 위치 추적 시스템은 지금도 힘들다. 한반도 인근에서 사용할 용도로 겨우 시동을 걸고 있는 정도고 그나마 이것이 더 미래가 아니라 요즘 예산을 얻은 것도 국군의 필요가 반영된 것이 크다.

이렇듯, 군산 복합체에 대해 견제하긴 했지만, 아이젠하워 정부는 군비를 대폭 증강해 소련을 견제했었다. 이 시기 미국의 대소련 군사 전략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 국경을 맞댄 우방국에 미군 군사 기지와 공군 기지를 건설하고 핵폭탄과 폭격기를 배치해 둔 다음, 소련이 서유럽 침공을 시작하면 핵으로 먼저 대응한다는 식의 대량 보복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아이젠하워는 서유럽 우방과 전세계 진보 세력들의 격렬한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스페인 프랑코 정권과 수교를 맺고 그들을 지원하는 대가로 사라고사를 위시한 스페인의 주요 도시에 군사 기지와 공군 기지를 건설했다. 이러한 노선은 핵 만능주의라고 불리는 극단적인 핵무기 의존으로 이어졌다. 이는 수백 만에 달하는 소련군을 상대로 양적 열세를 갖고 있으니 핵으로 메우는 편이 경제적이라는 판단과 소련에게 핵 투발 수단이 없다는 자신감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푸트니크 쇼크로 소련이 미국 본토를 직접 핵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케네디 정권 시기부터 시작하는 핵 위기 상황은 소련의 ICBM로 촉발되었고, 미국은 이를 예상하지 못했다. 아이젠하워 정권 동안 미국은 절대적인 세계 초강대국이었고, 소련의 우주 항공 과학과 미사일 부문 발전은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어 미국인들은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 정권은 U-2로 소련 전역을 훤히 보고 있었음에도 대비하지 못하고 스푸트니크 쇼크를 맞이했으나, 핵 위기에 대한 불안은 후임인 케네디 정권이 떠안아야 했다.

아이젠하워 정권 막바지에 있었던 대선 기간 동안, 민주당 대선 후보 케네디는 선거 운동 도중 소련의 핵 미사일 전력이 미국의 핵 미사일 전력보다 앞서 있다는 내용의 미사일 격차(Missile Gap) 이슈를 내세워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미국의 안보 태세가 약화되었다고 선전했는데,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소련의 거대한 핵 미사일 전력이라고 알려진 수치는 흐루쇼프가 공갈을 치기 위해 과장한 블러핑이었다.

실제 핵 미사일 전력은 미국이 크게 우세한 상황이었던 것. 그러나 대통령인 아이젠하워가 국가 기밀들인 소련의 군사력이나 미국의 군사력을 밝힐 수도 없었던 관계로 난감한 입장에 처했다.

도리어 아이젠하워 정권은 터키를 비롯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에 공군 기지와 핵 전력을 배치하여 소련을 핵무기로 포위하는 상황이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U2로 소련 전역을 훤히 내다 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는 국가 기밀이었기 때문에 밝힐 수가 없었고 아이젠하워와 백악관 수뇌부들은 선거 기간 동안, 매우 난처한 처지에 몰렸다.

4.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당선 여부 비고
1952 미국 대통령 선거 미합중국

34,075,529 (55.18%, 442명) 당선 (1위) 초선
1956 미국 대통령 선거 35,579,180 (57.37%, 457명) 재선

5. 대중매체에서

5.1. 영화

5.2. 만화/애니메이션

5.3. 소설

5.4. 게임

상술한 게임의 서브모드인 TNO에선 1952년 대선 후보로 출마하는데, 현실과 달리 민주당 소속 후보로 나왔다.[30] 현실과 똑같이 대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6. 기타

파일:$1 Eisenhower.png* 1971년부터 1978년까지 미국 1달러 주화에 얼굴이 새겨져 있기도 했으며, 해당 주화는 아이크 달러(Ike Dollar)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유통용 주화는 니켈을 도금한 구리이고, 기념 주화는 구리에 은 도금을 하여 은의 비율이 40%이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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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아놀드의 원수 진급 당시 공군은 육군 항공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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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너 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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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C. 베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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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L. 하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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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대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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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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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us_army_ww2.png 제2차 세계 대전 미군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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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General of the Army / Fleet Admiral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 더글러스 맥아더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헨리 아놀드AAF
해군
원수
윌리엄 리히 | 어니스트 킹 | 체스터 니미츠 | 윌리엄 홀시
대장
General / Admiral
육군
대장
오마 브래들리 | 조지 S. 패튼 | 칼 스파츠AAF | 조나단 웨인라이트 | 조지프 스틸웰 | 월터 크루거 | 조지 케니AAF | 코트니 호지스 | 마크 클라크 | 레너드 T. 게로 | 말린 크레이그 | 브레혼 소머벨 | 존 헐
해군
대장
마크 미처 | 토머스 킨케이드 |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 로열 잉거솔 | 홀랜드 스미스M |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M | 리치먼드 K. 터너 | 제임스 O. 리처드슨 | 해럴드 스타크 | 헨리 켄트 휴이트 | 토머스 홀컴M | 조나스 H. 잉그램 | 러셀 R. 웨이시C 전
중장
Lieutenant general / Vice Admiral
육군
중장
레슬리 맥네어 | 존 리드 하지 | 앨버트 웨드마이어 | 매튜 B. 리지웨이 | 사이먼 B. 버크너 | 월튼 워커 | 로버트 리처드슨 | 루시안 트러스콧 | 호이트 반덴버그AAF | 루이스 H. 브레레턴AAF | 존 C. H. 리 | 윌리엄 H. 심슨 | 알렉산더 패치 | 제이콥 데버스 | 프랭크 맥스웰 앤드루스AAF| 로이드 프레덴달 | 밀러드 하먼AAF†| 델로스 에먼스AAF | 월터 베델 스미스 | 리처드 서덜랜드 | 조지 H. 브렛AAF | 트로이 H. 미들턴 | 아이라 이커AAF | 에니스 화이트헤드AAF |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AAF | 존 드위트 | 휴 알로이시우스 드럼 | 해럴드 L. 조지AAF | 바니 M. 자일스AAF | 휴버트 R. 하먼AAF | 토머스 D. 화이트AAF | 네이선 트와이닝AAF | 웨이드 H. 헤이즐립 | 윌리스 D. 크리텐버거 | 제프리 키스 | 에드먼드 B. 그레고리 | 존 K. 캐넌AAF | 오스카 그리스월드 | 벤 리어 | 찰스 P. 홀 | 레이먼드 S. 매클레인 N 전 | 토머스 T. 핸디 | 루시어스 클레이
해군
중장
프랭크 잭 플레처 | 제시 올덴도르프 | 윌리스 리 | 존 매케인 시니어 | 존 H. 타워스 | 줄리안 C. 스미스M| 로이 가이거M | 앨런 H. 터니지M | 드위트 클린턴 램지 | 프레더릭 C. 셔먼 | 찰스 록우드 | 로버트 C. 기펜 | 로버트 곰리 | 루이스 덴펠드 | 찰스 M. 쿠크 주니어 | 아서 L. 브리스톨
소장
Major General / Rear Admiral
육군
소장
제임스 밴 플리트 | 모리스 로즈 | 커티스 르메이AAF | 맥스웰 테일러 | 레슬리 그로브스 | 윌리엄 F. 딘 | 클레어 셰놀트AAF·전 | 랄프 스미스 | 월터 쇼트 | J. 로턴 콜린스 | 로버트 올즈AAF | 리먼 렘니처 | 호바트 R. 게이 | 로스코 B. 우드러프 | 에드윈 F. 하딩 | 스태퍼드 리로이 어윈 | 윌리엄 J. 도너번 | 존 P. 루카스 | 에드윈 D. 패트릭| 클래런스 L. 팅커AAF† | 로버트 아이첼버거 | 찰스 윌로비 | 윌리엄 B. 킨 | 핸퍼드 맥나이더 | 폴 뉴가든 | 프랭크 캐들 마힌 | 폴 J. 뮐러 | 노먼 코타 | 어니스트 N. 하먼 | 찰스 H. 게르하르트 | 앤드루 데이비스 브루스 | 로버트 W. 해즈브룩 | 제임스 로턴 콜린스 | 존 B. 콜터 | 패트릭 헐리 | 프랭크 W. 밀번 | 앨버트 W. 월드론 | 클로비스 E. 바이어스 | 윌리엄 W. 이글스 | 윌리엄 F. 샤프 | 프랭클린 C. 시버트 | 아이작 D. 화이트 | 조지 데커 | 카터 매그루더 | 로버트 B. 매클러 | 클라크 L. 러프너 | 앤서니 맥콜리프 | 레이먼드 바턴 | 로버트 N. 영 | 윌리엄 M. 호그 | 제임스 L. 브래들리 | 클래런스 R. 휴브너 | 윌러드 G. 와이먼 | 루이스 A. 크레이그 | 찰스 H. 콜렛 | 에드워드 H. 브룩스 | 가이 V. 헨리 주니어 | 앨버트 E. 브라운 | 월터 M. 로버트슨 | 새뮤얼 E. 앤더슨 AAF | 도널드 윌슨 AAF | 테리 앨런 | 도일 히키 | 길버트 R. 쿡 | 제임스 E. 채니 | 데이비드 바 | 에드워드 알몬드 | 에드워드 P. 킹 | 조지 M. 파커 | 조지 F. 무어 | 토머스 B. 라킨 | 러셀 P. 하틀 | 프랭크 오드리스콜 헌터 AAF 전 | 헨리 오랜드 | 찰스 W. 라이더 | 아처 L. 러치 | 찰스 L. 볼트 | 알프레드 그루엔터 | 로리스 노스타드 | 아치볼드 빈센트 아널드 | 레이 바커 | 에드윈 P. 파커 주니어 | 해리 J. 맬로니 | 찰스 L. 스콧 | 브루스 매그루더 | 올랜도 워드 | 존 밀리킨 | 존 W. 레너드 | 제임스 개러시 오드 | 제이 L. 베네딕트 | 로버트 S. 바이틀러N | 레너드 F. 윙N | 존 달퀴스트 | 프레드 L. 워커 | 어니스트 J. 돌리 | 유진 M. 랜드럼 | 프랭크 메릴 | 오벌 R. 쿡 AAF | 로렌스 S. 커터 AAF | 얼 E. 파트리지 AAF | 휴 존 케이시 | 레이먼드 A. 휠러 | 루이스 A. 픽 | 고든 P. 새빌 AAF
해군
소장
허즈번드 킴멜 | 아이작 C. 키드 | 노먼 스콧 | 대니얼 J. 캘러헌 | 해리 슈미트M | 윌리엄 H. P. 블랜디 | 존 W. 윌콕스 주니어 | 찰스 P. 세실 | 로버트 H. 잉글리시 | 그레이브스 B. 어스킨M| 돈 P. 문 | 클리프턴 스프레이그 | 시어도어 E. 챈들러| 리틀턴 월러 주니어M | 찰스 D. 바렛M | 아서 D. 스트러블 | 르무엘 셰퍼드M | 시어도어 스타크 윌킨슨 | 윌리엄 P. 업셔M | 패트릭 N. L. 벨린저 | 제임스 H. 도일 | 헨리 M. 뮬리닉스 | 포레스트 셔먼 | 윌리엄 H. 루퍼터스M | 칼튼 H. 라이트 | 말론 티스데일 | 클리프턴 B. 케이츠M | 칼 헨리 존스 | 프랜시스 W. 록웰 | C. 터너 조이 | 윌리엄 페치텔러 | 올리버 스미스 M | 새뮤얼 L. 하워드M | 아서 래드포드 | 로버트 웹스터 캐리 | 클로드 A. 존스 | 로버트 카니 | 러셀 S. 버키 | 토머스 L. 스프레이그 | 펠릭스 스텀프 | 윌리엄 M. 캘러헌
준장
Brigadier general / Rear admiral (lower half)
육군
준장
마크 클라크 | 돈 프랫 | 케네스 N. 워커 | 프레더릭 워커 캐슬AAF† |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 3세AAF†| 제임스 돌턴 2세 | 스톤월 잭슨 | 가이 포트| 클로디어스 이즐리 | 허버트 다그AAF| 제임스 둘리틀AAF | 찰스 키런스 주니어 | 앨런 C. 맥브라이드 | 제임스 로이 앤더슨AAF | 브라이언트 무어 |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 | 제임스 에드워드 워튼 | 로렌스 B. 카이저 | 노먼 슈워츠코프 시니어 | 리 S. 게로 | 찰스 H. 바스 주니어 | 하워드 녹스 래미AAF† | 헤이우드 핸셀AAF | 로버트 싱크 | 조지 A. 테일러 | 존 H. 처치 | 찰스 D. 파머 | 윌리스턴 B. 파머 | 윌리엄 H. 윌버 | 에드윈 L. 시버트 | 해럴드 휴스턴 조지AAF† | 에밋 오도넬 주니어 AAF | 윌리엄 켈리 해리슨 주니어 | 앨버트 M. 존스 | 프랜시스 윌리엄 패럴 | 윌리엄 E. 브라우어 | 루서 R. 스티븐스 | 클리퍼드 블루멀 | 클린턴 A. 피어스 | 루이스 C. 비비 | 브래드퍼드 G. 시노웨스 | 찰스 C. 드레이크 | 칼 H. 실즈 | 제임스 R. N. 위버 | 케네스 로열 | 벤저민 O. 데이비스 시니어 | 러셀 A. 윌슨AAF 전 † | 넬슨 메이시 워커 | 에드먼드 윌슨 서비전 † | 데이비스 던바 그레이브스AAF 전 † | 클라이드 D. 에들먼 | 브루스 C. 클라크 | 제이 W. 매켈비 | 아서 트루도 | 구스타프 J. 브라운 | 에이사 N. 던컨AAF † | 칼라일 H. 워시AAF † | 윌리엄 H. 터너 AAF
해군
준장
알레이 버크 | 해리 W. 힐 | 로렌스 A. 애버크롬비 | 메리트 에드슨M | 레이 A. 로빈슨M | 제임스 알렉산더 로건
AAF:육군 항공대, M: 해병대, N: 주방위군 C: 해안경비대
※ 문서가 있는 인물만 종전 당시 계급으로 서술
※ 윗 첨자 : 전사
※ 윗 첨자 : 전시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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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서양 조약 기구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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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육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육군

매튜 B. 리지웨이
육군

알프레드 그루엔터
공군

로리스 노스타드
육군

리먼 렘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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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앤드류 굿파스터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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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버나드 W. 로저스
육군

존 갤빈
육군

존 샬리카시빌리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육군

조지 줄완
육군

웨슬리 클라크
공군

조셉 랠스턴
해병대

제임스 L. 존스
육군

밴츠 크래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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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제임스 스타브리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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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브리들러브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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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 월터스
육군

크리스토퍼 카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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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프랭크 앤드류스 제이콥 데버스 조셉 맥나니 루시어스 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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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런스 R. 휴브너 토머스 T. 핸디 맨턴 에디 찰스 L. 볼트 윌리엄 M. 호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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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맥콜리프 헨리 호디스 클라이드 D. 에들먼 브루스 C. 클라크 폴 L. 프리먼 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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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오미라 제임스 폴크 마이클 데이비슨 조지 블랜차드 프레드릭 크로젠 주니어
<rowcolor=#ffffff> 21대 22대 23대 24대 25대
글렌 오티스 크로스비 세인트 데이비드 매독스 윌리엄 크라우치 에릭 신세키
<rowcolor=#ffffff> 26대 27대 28대 29대 30대
몽고메리 메익스 버웰 벨 3세 데이비드 맥키어넌 카터 햄 마크 허틀링
<rowcolor=#ffffff> 31대 32대 33대 34대 35대
도널드 캠벨 주니어 벤 호지스 크리스토퍼 카볼리 대릴 윌리엄스 크리스 도나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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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Person of the Year 194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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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nopad>파일:attachment/time_1945.jpg파일:Person Of The Year 1946.jpg파일:attachment/time_1947.jpg파일:attachment/time_1948.jpg파일:attachment/time_1949.jpg
<rowcolor=#fff> 1945년

원폭 투하종전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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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word-break: keep-all"<tablebordercolor=#e90606> 파일:타임지 로고 화이트.svg 올해의 인물 (1950년대)
Time Person of the Year 1950'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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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time_1950.jpg파일:attachment/time1951.jpg파일:attachment/time_1952.jpg파일:attachment/time_1953.jpg파일:Person Of The Year 1954.jpg
<rowcolor=#fff> 1950년

6.25 전쟁
1951년
1952년
1953년
1954년
파일:Person Of The Year 1955.jpg파일:attachment/time_1956.jpg파일:attachment/time_1957.jpg파일:attachment/time_1958.jpg파일:attachment/time_195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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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957년

스푸트니크 쇼크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
19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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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훈장 수훈자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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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온 말리놉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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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로코솝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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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우 롤라지미에르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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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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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프 브로즈 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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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7 ~ 1921. 성홍열로 요절했다.[2] 1922 ~ 2013. 6.25 전쟁 참전 용사로, 전쟁 당시 대대장으로 복무했다.[3] 대통령 출마로 임시전역[4] 대통령 퇴임후 예비역 종신원수 복귀[5] 1944년 ~ 1945년에는 서부 전선에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비롯한 프랑스와 독일 지역 공격에 대한 책임을 맡아 공격을 계획하고 감독했다.[6] 남서태평양지역군 총사령관은 자신의 옛 상관이자 10년 선배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였다.[7] 자세히 들어보면 취임 선서를 할 때는 정석적인 군인 발성을 쓰는 반면 연설을 할 때는 평범한 발성을 쓰는 것을 알 수 있다.[8] 애칭이 아이크가 된 이유는 원래 태어났을 때 이름은 데이비드 드와이트였지만 데이비드가 아버지와 같은 이름이라서 혼동이 생겼다. 때문에 집안의 아들들은 전부 아이크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형인 에드거는 '큰 아이크', 드와이트는 '작은 아이크' 이런 식으로. 아이크는 성인 아이젠하워를 축약해서 부르는 명칭이 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드와이트만이 아이크라고 불리게 되었다. 대선 후보 당시 선거구호도 'I like Ike'였다. 꽤 적절한 언어유희를 사용한 셈.[9] 윌리엄 매킨리는 재선에 성공은 했으나 얼마 못 가 암살당했다.[10] 아칸소주 리틀록에서 발생한 흑인 학생 등교 거부 사건에 아이젠하워는 연방군을 투입하여 막았으며, 당시 주 방위군과 연방군 사이에 심각한 수준의 긴장 상황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이러한 결단으로 인해 미국에서의 인종 차별 철폐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올랐으며, 리틀록 사건은, 이후 미국 사회의 다양한 인종들이 잘 융화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11]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맥아더를 매우 싫어했던 모양이다. 그는 본인의 일기장에 상관인 맥아더와 관련된 온갖 쌍욕(...)을 한가득 써놓기도 했다.[12]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0여 년만에 세계 대공황이 터진 것처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공황을 기대한(?) 스탈린의 바람과는 반대였다. 다만, 집권 말기에는 일시적인 경기 불황에 시달렸는데 이는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존 F. 케네디의 당선 요인 중 하나가 된다.[13] 소득세 높이고 보건과 복지에 힘을 쓰는 등 추진한 정책 또한 객관적으로 봐도 그렇고 시대상으로도 상당히 실용적이면서도 급진적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러한 스탠스 때문에 오늘날에야 공화당 정치인이나 지지자들에게 있어서는 상직전인 존재이나 정작 당시에는 당과의 문제로 상당히 고생했다고 한다.[14] 무종교인과 무신론자가 25~30% 정도로 개신교 다음으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가톨릭 신자보다도 많은 현재의 미국과 달리, 아이젠하워의 치세 당시에는 무신론은 공산주의와도 상당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미국의 무종교인은 10%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15] 사적으로는 아이젠하워의 손자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와, 닉슨의 딸인 줄리에 닉슨이 결혼한 관계였다.[16] "부통령 닉슨이 8년 동안 어떤 주요한 정책 결정에 참여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일주일 정도 시간을 주면 아마 한 가지 쯤 기억이 나겠지요."라는 농담으로 대답했다. 처음에는 농담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이후 케네디 측에서 네거티브 선거 운동을 하면서 이 말을 써먹어서 닉슨에게 타격이 되었다.[17] 특히 아이젠하워는 본인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 닉슨을 민주당을 때리기 위한 "맹견" 역할로 자주 사용했다. 그래서 닉슨 행정부에서 부통령 시절 닉슨과 유사한 일을 한 스피로 애그뉴의 별명이 "닉슨의 닉슨" 이었다.[18] 사실 그는 패튼과 몽고메리를 다독이기 위해 브래들리를 중재자 역할로 잘 써먹다 팽 시킬뻔한 적도 있다.[19] 총력전 중이어서 자동차 부품 회사, 가전 제품 회사, 타이어 회사까지 전차와 포탄, 전투기와 폭격기를 생산했다. 그런 회사들이 생산 시설을 전용해 만든 물량이 전쟁 전부터 전투기, 전차를 생산한 군수 산업체들이 생산한 것보다 더 많을 정도였다. 이 군수 기업들은 50년대 중반 이후, 점점 군수 사업을 접거나 다른 기업에 합병당하는 방식으로 소멸했다. 전쟁 때야 "우리 회사에 좋은 무기 있어요"하고 시연하면 채택해주었지만, 전시에 설립된 여러 군수 기업들이 입찰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벌여야 했고, 두세 번 떨어지면 회사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20] 2차 세계 대전과 그에 뒤이은 한국 전쟁을 겪으며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군사 기술이 대폭 발전해서 기존의 군수 물자와 장비들이 모두 구식이 되어 버렸다. 그 예시로 2차 세계 대전 동안만 해도 항공대와 해군의 전투기는 프로펠러기 였으나 한국전쟁부턴 제트기가 등장하여 프로펠러기를 구식으로 만들었으며 해군의 전함 또한 태평양 전쟁 초기까지 해군의 가장 중요한 함종이었으나 항공모함의 등장으로 4년만에 현대 전투방식에 맞지 않은 함종으로 전락하였다.[21] 국방비에 예산을 많이 쓰고 싶어하는 정부는 없다. 이익이 아닌 리스크와 생산 단가가 늘어나는 걸 좋아하는 군수 회사도 없다.[22] 비록 한 명(테디 루스벨트)은 밀랍인형으로서였지만, 로빈 윌리엄스는 미국 대통령 두 명을 맡게 되었다.[23] 보통 코믹한 연기자로만 기억할 로빈 윌리엄스의 드문 정극 연기 캐릭터이기도 하다. 한국 명화극장에서는 로빈 윌리엄스의 전담 성우 배한성이 더빙을 했다.[24] 다우드 아이젠하워의 죽음은 드와이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라고 회고할 정도로 큰 슬픔이였다.[25] 대표적으로 2차대전의 유럽 방면 사령관은 원래 아이젠하워였는데 작중에서는 유진이 맡고, 아이젠하워는 아시아 방면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원래 아시아 총사령관이 되었어야 할 맥아더는 전간기에 진작 퇴역해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26] 아이젠하워가 부상이나 장남의 요절 등 고난을 겪을 때마다 유진이 그를 위로해준 덕분에 계속 군생활을 할 수 있었고, 대통령 출마 때도 유진이 판을 잘 깔아 준 덕분에 원래보다 훨씬 수월하게 대통령직을 역임할 수 있었다.[27] 영국, 프랑스를 포함한 1선급 동맹국에도![28] 다만 1943 정복에서는 기본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29] 2차대전기 1차대전에서 출세하고 구식 전술을 버리기를 거부한 원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프랑스는 원수가 4명이나 있는데도 죄다 쓰레기이다.[30] 루즈벨트 장기집권이 이뤄진 현실과 달리 중간중간 공화당 체제도 이어졌고, 성향도 맞겠다 민주당의 입당제안을 수락한 것으로 보인다.[31] 당시 매카시 의원은 미국을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지키겠다는 미명 하에 '묻지 마 여론몰이'식 매카시즘 색깔론 광풍을 주도하다 온갖 허위와 날조, 과장이 밝혀져 각계에서 역풍을 맞은 상황이었다. 여론의 역풍으로 자신이 궁지에 몰리자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당선 이전까지 인생을 바쳤던 군대에 색깔론을 들이대고, 군 현대화 전략을 설계해 존경을 받았던 조지 마셜 국방장관까지 비난하는 등 막장 행보를 보였다.[32] 아이젠하워도 색소 없는 콜라를 즐겨 마셨다.[33] 이 일화는 도널드 트럼프을 세우면서 다시 회자되곤 했다.[34] 아이젠하워의 조상들이 종교 박해를 피하여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독일어식 철자인 Eisenhauer를 발음하기 편하도록 영어식으로 Eisenhower로 고친 것이다. 참고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조지아식 본명 주가시빌리도 '철사람', 즉 대장장이란 뜻이었으나 러시아식으로 바꾸면서 '강철인간' 스탈린이 된다.[35] 미국 대통령 아들이 백악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군생활하면 적성국의 납치나 암살 표적이 되기 딱 좋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2차세계 대전때도 연합군 사령관 아들이라고 본국에서 일부러 후방으로 뺐다. 정작 필리프 드골 제독아버지가 자유 프랑스 수반 시절일 때 그 위험한 해군 코만도 소대장으로 근무했고, 대통령 재직 시절에도 해군 항공대조종사, 호위함 함장 등을 지내며 최일선에서 근무한 덕에 프랑스 해군 대장까지 이르렀다.[36] 아이젠하워가 가장 좋아한 음식이 아내가 만든 백만달러 퍼지(Million Dollar Fudge)였다.[37] 비서였던 케이는 회고록에 아이크와 성관계를 가진 사실이 있기는 한데 고령이라 아이크와 활발한 성관계는 갖지 못하였다고 밝혔다.[38] 로버트 듀발과 리 리믹(Lee Remick)이 두 주인공으로 열연하였다.[39] 두 사람의 출연 빈도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40] 제2차 세계 대전동안 아이젠하워의 상관이자 전우였고, 아이젠하워가 평생 존경했던 인물이다.[41] 그런데 아이젠하워는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잘났거나 자기 심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사람은 몰래 뒤끝을 부리며 욕하는 등 위선자 기질이 있었다. 즉 그의 말만 다 믿기는 힘들다.[42] 비슷한 일화를 후임자인 JFK도 남긴 적이 있는데.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의회 수뇌부와 언론, 군부가 다같이 케네디의 (공습 대신 선택한) 봉쇄정책이 너무 유약하다고 비판하자, “대통령 자리 하고 싶은 놈 있으면 가져가라고 해, 전혀 안 달가운 자리니까.”라고 말한적이 있었다.[43] 일단 그 당시에 롤스로이스 차량을 구매하려면, 보유한 총 자산도 아닌 '유동 자산'이 최소 3,000만 달러(한화 약 330억 원)가 넘어가야 했다. 쉽게 말해 롤스로이스를 소유하려면 그에 걸맞은 사회적 지위와 자산이 필요했다는 소리다. 게다가 자격 요건에 부합하더라도 시원찮은 지도자나 고위층들, 물의를 일으킨 유명인들, 철권 통치를 한 독재자들에게는 판매를 불허했다. 이렇게 까다롭게 판매를 거부하다 보니 이런 썰들까지 생겨 회사에 역으로 먹칠을 하기도 했다. 일례로 이승만 대통령이 롤스로이스를 대한민국 국가원수 의전차로 도입하려고 문의하였으나 거절당해서 캐딜락을 의전차로 썼는데 그 후 이기붕IOC 위원으로 위촉되자마자 롤스로이스에서 의전차를 제공하겠다고 바로 연락이 와서 이기붕이 아주 난감해했다는 설도 있으며(자칫 잘못했으면 하급자가 상급자보다 더 좋은 차를 탈 뻔한 셈),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려고 했을 때 우리 차는 딴따라들 타라고 있는 차가 아니라고 하며 거절했다가 정작 똑같이 딴따라짓 하면서 돈 벌던 비틀즈존 레논에게는 가장 먼저 차를 제공했다는 설도 있다. 물론 이 설들은 모두 부풀려진 것으로 엘비스와 존 레논 모두 롤스로이스를 소유하여 인증샷을 남겼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애초에 아이젠하워에게 한미 수교 기념으로 캐딜락 플리트우드 방탄의전차를 제공받았기에 롤스로이스에 대해 관심도 주지 않았다. 다만 존 레논은 롤스로이스 사의 행보에 불만을 품어 작은(?) 기행을 저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