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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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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56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파일: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주별 결과.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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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대선
1956년 11월 6일
1956 대선
1960년 11월 6일
1960 대선
}}} ||
선거 일시 11월 6일 5시 ~ 11월 7일 6시 (UTC)
투표율 60.6%
선거 결과
후보 [[공화당(미국)|
공화당
]]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부통령 리처드 닉슨
[[민주당(미국)|
민주당
]]
대통령 애들레이 E. 스티븐슨
부통령 에스테스 키포버
선거인단
457명 73명[1]
전국 득표
57.4%
35,579,180표
42.0%
26,028,028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파일:1956년 공화당 전당대회 후보 지명자.jpg
공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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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정당별 상황
3.1. 공화당
3.1.1. 아이젠하워의 건강 문제3.1.2. 아이젠하워와 닉슨의 갈등3.1.3. 1956년 8월 공화당 전당대회
3.2. 민주당
3.2.1. 스티븐슨 vs 키포버 시즌23.2.2. 스티븐슨 vs 트루먼3.2.3. 키포버 vs 케네디
4. 최종 후보5. 선거 과정
5.1. TV 광고의 중요성5.2. 1956년 헝가리 혁명제2차 중동전쟁5.3.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을 둔 의견 차이
6. 선거 결과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1956년에 치러진 미국의 34대[2] 혹은 35대[3]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

2. 배경

4년전 대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민주당의 20년 집권을 깨뜨린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성공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6.25 전쟁 정전 및 전후 재건 특수 속에 경제 성장을 성공적으로 이뤄내면서 전후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었고 재선도 유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갤럽 여론조사 상 첫 임기 중 최저 지지율이 68% 수준일 정도.

하지만 1954년 중간선거에서는 상·하원을 모두 다시 민주당에게 내주면서 패했고 아이젠하워 본인도 1955년 콜로라도에서 휴가를 보내던 도중 심근경색으로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던지라 고령 리스크가 조금씩 부각되고 있었다. 다행히 살아났지만 아이젠하워는 실제로 심장마비의 후유증으로 인해 1956년 초까지도 통상적인 수준의 업무 일정을 소화하기 힘들어했다. 이때문에 한때는 차기 대선 불출마 가능성이 언급되었다.

민주당은 이 점을 적극 지적하며 아이젠하워를 파트타임 대통령이라 비판했고, 여기에 더해 전국민적 호감도가 높은 아이젠하워보다는 부통령인 리처드 닉슨을 공격하는데 집중했다. 젊은 정치인이었지만 "교활한 딕(Tricky Dick)"이라는 별명이 있을만큼 대중적으로 노회한 이미지가 컸던 닉슨이 아이젠하워의 대통령 자리를 대신해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집중 공격했다.

닉슨 역시 민주당의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국가를 방문하고 노쇠한 아이젠하워를 대신해 여러 공식 석상에 자리해 연설을 하고, 때로는 내각 회의를 주재하는 등 실세 부통령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히며 활력 넘치는 모습을 보여 연말 대선을 노리는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이젠하워가 1956년 2월 29일 자신이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선언한 뒤 재선 도전을 공식화했고, 리처드 닉슨 역시 별다른 반발이나 움직임 없이 부통령 자리를 다시 한번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민주당의 계획은 무산되었고 그렇게 1956년 대선 시즌이 찾아오고 있었다.

3. 정당별 상황

3.1. 공화당

3.1.1. 아이젠하워의 건강 문제

공화당에서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본인이 재선 도전에 나설 경우, 감히 여기에 도전장을 내밀만한 인물이 없었지만 문제는 아이젠하워 본인의 건강과 의지였다. 실제로 아이젠하워는 목표가 민주당의 20년 장기 집권을 끝내는 것이었고 집권 1년차만에 차기 대선 불출마를 검토할 정도로 권력 의지가 약한 인물이었고[4] 1954년 중간선거 패배와 1955년 심근경색을 연달아 겪게 되면서 정가에서는 1955년 연말부터 아이젠하워가 재선을 포기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다만 당시 공화당 지도부에서는 아이젠하워의 높은 지지율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계속해 건강 회복 중인 아이젠하워에게 재선 도전을 종용했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상기한바와 같이 1956년 2월 재선 도전을 공식화했다. 같은 해 5월 12일에 신체검사에서 문제가 없다는 판정을 받으면서 건강 리스크를 잘 넘어가는듯 했지만 바로 다음달인 6월 회장염에 걸려 다시 한번 수술을 받게 되면서 고령 및 건강 리스크가 다시 한번 부각되고 만다.

3.1.2. 아이젠하워와 닉슨의 갈등

한편 아이젠하워와 닉슨의 불편한 동거도 다시 한번 문제가 되었는데, 오죽하면 닉슨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아이젠하워가 재선 출마를 결심하게 된 이유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아이젠하워는 처음에는 차기 내각 출범 시 국방장관직을 제안하는 등 우회적으로 닉슨의 포기를 요구했으나, 닉슨은 '공식적으로' 요청받지 않는다면 부통령직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한마디로 그렇게 싫으면 빙빙 돌리지 말고 직접 싫다고 말하라는 것이다. 당연히 아이젠하워 입장에서는 닉슨과 대놓고 척을 지기에는 여러모로 부담스러웠다.

자칫 아이젠하워와 닉슨의 갈등으로 문제가 될까봐, 특히 아이젠하워가 재선 출마를 포기하게 될까봐 경악한 당 지도부는 닉슨에게 부통령직을 두고 싸울만한 당내 유력정치인들을 설득했지만 대중적 인기, 특히 공화당원들에게 지지율이 높았던 닉슨을 이길 수 있을만한 정치인은 많지 않았고 아이젠하워는 닉슨의 제거가 당의 분열보다 중요하진 않다고 판단해 이후에는 닉슨의 부통령직 재지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3.1.3. 1956년 8월 공화당 전당대회

1956년 공화당 전당대회 표결 결과
<rowcolor=#E81018> 후보자 1차 투표
<colbgcolor=#f5f5f5><colcolor=#000>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1,323
(100.00%)

그렇게 공화당의 대선 티켓이 아이젠하워-닉슨으로 사실상 확정된 상황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당대회가 열리게 됐다. 이 자리에는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이 기조연설에 나서 공화당원들에게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아이젠하워는 당연하게 손쉽게 만장일치로 재지명되었고, 전당대회까지 닉슨을 교체하려는 일부 시도에도 불구하고 닉슨 역시 단 한 표의 반란표를 제외하고 압도적인 지명을 받으면서 손쉽게 재선 도전에 나서게 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후보직 수락 연설에서 주 정부의 역할에 힘을 실으며 연방정부의 비대화에 대해 다시 한번 경고[5]했고, 닉슨 역시 자신은 복지국가를 믿지 않는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연방 차원에서 빈곤을 퇴치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다소 유화적인 입장을 보였다. 아이젠하워와 닉슨이 각각 자신에게 있는 약점[6]을 보완하기 위한 연설을 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3.2. 민주당

3.2.1. 스티븐슨 vs 키포버 시즌2

4년전 당권파의 비토로 경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후보직을 차지하지 못한 에스테스 키포버가 민주당 주자 중 가장 먼저 아이젠하워에게 다시 한번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편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역시 4년전 사실상 당 지도부의 추대로 반쯤 원치않게 출마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본인도 의지를 가지고 경선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이외에도 뉴욕 주지사인 W. 애버럴 해리먼이 스티븐슨에게 추가로 도전장을 내밀어 민주당 경선은 스티븐슨과 키포버의 양자대결 속에 다시한번 3파전 구도가 되었다.

키포버는 초반 뉴햄프셔미네소타 경선에서 승리하면서 기세를 올렸고 이어 위스콘신 경선에서도 승리하면서 후보직에 가까워졌다는 평을 받았지만 미네소타 경선 과정에서 스티븐슨이 키포버의 과도한 네거티브를 지적하며 비판한 뒤 마음을 바꿔 키포버와의 토론회를 여러차례 여는 등 좀 더 공격적으로 경선에 참여했고 플로리다 경선에서 52%를 득표해 승리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결국 승부처였던 캘리포니아 경선에서 63%를 득표하며 스티븐슨이 키포버를 상대로 큰 격차로 승리했고, 당권파의 반대를 꺾기 위해선 압도적 대중의 지지가 필요했던 키포버는 이 패배와 함께 모멘텀을 잃고 경선 중단을 선언했다.

3.2.2. 스티븐슨 vs 트루먼

경선에서 라이벌 키포버를 주저앉힌 스티븐슨의 마지막 적은 1956년 8월,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해리 S. 트루먼 전 대통령의 반대를 뚫는 것이었다. 1952년에는 키포버를 꺾기 위해 스티븐슨을 지지한 트루먼이었지만 이번엔 스티븐슨의 재지명에 반대하며 해리먼을 지지한다는 의사를 공개표명했다.
1956년 민주당 전당대회 표결 결과
<rowcolor=#0044C9> 후보자 1차 투표
<colbgcolor=#f5f5f5><colcolor=#000> 애들레이
스티븐슨
905.5
(66.00%)
W. 애버럴
해리먼
210
(15.31%)
린든 B.
존슨
80
(5.83%)
스튜어트
사이밍턴
45.5
(3.32%)
해피
챈들러
36.5
(2.66%)
제임스 C.
데이비스
33
(2.41%)
존 S.
배틀
32.5
(2.37%)
조지
티머만스
23.5
(1.71%)
프랭크
라우체
5.5
(0.40%)
하지만 더이상 '전직 대통령'에 불과했던 트루먼의 의사는 당 지도부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존 F. 케네디, 앨버트 고어 시니어, 휴버트 험프리 등 신진 그룹이 스티븐슨을 지지한 영향도 있어 스티븐슨이 무난히 1차 투표만에 해리먼을 꺾고 후보 지명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신진 그룹의 지지를 대가로 스티븐슨은 통상적으로 대통령 후보가 지명하던 부통령 후보직을 공개 경선으로 풀었고 이 자리에 바로 케네디가 도전장을 내밀게 되었다.

3.2.3. 키포버 vs 케네디

스티븐슨의 공개 지명 선언으로 인해 부통령직을 둔 표결이 진행됐는데, 유력한 후보는 비록 경선 과정에서 포기하긴 했지만 여전히 강한 지지층을 보유하고 있던 키포버였다. 그나마 공개 경쟁을 할 수 있는 여유도 딱 하루 주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지명이 유력하다고 판단되었지만 여기에 당시까지만 해도 초선 상원의원이었던 신예 케네디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스티븐슨은 키포버보다는 케네디를 러닝메이트로 개인적으로 선호했지만 공식적으로 이를 표현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1차 표결에서는 예상대로 키포버가 케네디에 179.5표 차이로 앞섰지만, 2차 표결 도중 648표로 케네디가 역전에 성공(케네디 648표 vs 키포버 551.5표)하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만약 39표만 더 나왔다면 이대로 케네디가 부통령 후보가 될 수 있었다. 이대로 부통령 후보가 되는 파란을 일으키는가 했으나, 결국 다시 키포버가 최종 교대 투표에서 역전에 성공하면서 케네디는 후보직을 양보하는 연설을 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실 어찌보면 케네디로서는 이름값을 높이면서 남는 장사가 되었는데, 패배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선거에 출마하지 않게 되면서 이미지 소모를 막은 동시에 거물 키포버에게 대항하면서 이름값을 한껏 높였기 때문.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케네디는 4년 뒤 열린 대선에서는 진짜 대통령 후보직에 도전하게 된다.
1956년 민주당 전당대회 부통령 표결 결과
<rowcolor=#0044C9> 후보자 1차 투표 2차 투표 3차 투표
<rowcolor=#0044C9> 교대 전 교대 후 교대 전 교대 중 교대 후 최종
<colbgcolor=#f5f5f5><colcolor=#000> 에스테스
키포버
466.5
(34.00%)
483.5
(35.24%)
551.5
(40.20%)
551.5
(40.20%)
755.5
(55.70%)
1,372
(100.00%)
존 F.
케네디
294.5
(21.47%)
304
(22.16%)
618
(45.04%)
648
(47.23%)
589
(42.93%)
중단
앨버트
고어
178
(12.97%)
178
(12.97%)
110.5
(8.05%)
80.5
(5.87%)
13.5
(0.98%)
중단

4. 최종 후보

4.1. 공화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파일:1956년 공화당 전당대회 후보 지명자.jpg
{{{#!wiki style="margin: -5px -10px"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
제36대 미국 부통령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후보의 후보직 수락 연설
I Like Ike!
나는 아이크가 좋아!

1956 아이젠하워-닉슨 티켓 슬로건

4.2. 민주당: 애들레이 E. 스티븐슨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전당대회 지명 후보자
대통령 후보 지명자 부통령 후보 지명자
파일:1956_Estes-Kefauver-(left)_2.jpg
{{{#!wiki style="margin: -5px -10px"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2세
제31대 일리노이 주지사
에스테스 키포버
테네시 주 연방 상원의원
}}}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후보직 수락 연설
All the Way with Adlai
애들레이를 위해 온힘을 다해

1956 스티븐슨-키포버 티켓 슬로건

5. 선거 과정

5.1. TV 광고의 중요성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광고
"Taxes"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광고
"Women Voters"
4년전 대선부터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TV 광고였지만, 본격적으로 양측 진영이 모두 TV 광고를 중요 캠페인 수단으로 활용한건 이번 대선이 처음이다. 특히 아이젠하워의 노령 및 건강 문제가 대선 이슈에서 감춰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는데 TV 광고를 적극 활용하면서 전처럼 직접 모든 주를 다니면서 유세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 또한 4년전 아이크의 대승에 영향을 준 여성, 특히 주부 유권자들이 양당이 설득해야할 핵심 유권자로 떠오르면서 1956년 TV 광고 다수가 주부를 타겟팅해서 만들어지기도 했다.

스티븐슨 역시 이번에는 TV 광고를 적극 활용하여 공격적으로 대선에 나섰는데 4년전 TV 광고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엘리트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I Like Ike" 광고에 제대로 당한 영향인지 카툰 스타일의 광고를 많이 활용했다. 또한 이 시기 스티븐슨의 많은 대선 광고가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향한 네거티브에 치중되어있는데, 아무래도 지지율에서 큰 격차로 밀리고 있는 추격자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전국민적 호감도가 높은 아이젠하워 개인에 대한 공격은 최대한 자제했다.

물론 전통적인 현장 유세도 계속되었는데 재밌는 점은 노쇠한 아이젠하워를 대신해 리처드 닉슨이 직접 유세를 많이 다니다보니 유세 현장에서 스티븐슨과 닉슨이 맞붙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는 것. 그러다보니 스티븐슨의 대선 유세 과정에서도 아이젠하워 개인에 대한 공격보다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닉슨을 공격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7]

덕분에 아이젠하워는 반사이익을 누렸는데, 스티븐슨과 닉슨이 서로 대결하는 사이 직접 공격받는걸 피하고 전국 신문의 5분의 3 이상에 달하는 언론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자신의 리스크를 완전히 숨기고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포지션을 계속하여 유지할 수 있었던 것.

5.2. 1956년 헝가리 혁명제2차 중동전쟁

애들레이 스티븐슨과 민주당은 대선 주제를 내치와 경제에 맞추려고 주안점을 두었고, 인플레이션 문제를 집중공격했다. 공교롭게도 4년전 대선에서는 아이젠하워와 공화당이 공격하던 주제로 다시 반격을 가한 셈이 되었고 공화당은 아이젠하워를 대신하여 인플레이션이 오히려 안정된 것이라며 방어에 나섰다.

거기다 4년전 대선에서 휘몰아치던 매카시즘 광풍도 1954년 상원에서 매카시에 대한 견책 결정이 내려진 이후 잠잠해진 터라 민주당은 사회보장법 확대, 농작물 가격 지원, 토양 은행 프로그램 등 진보적 의제도 비교적 편하게 꺼내들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와 공화당은 내치 분야 대신 주제를 냉전과 외교로 옮기려 노력하였고 소련 니콜라이 불가닌의 내정 간섭 시도가 좋은 먹잇감이 되어주긴 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1956년 10월, 헝가리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소련이 전차와 군대를 동원해 강경하게 진압해버리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난데다가 같은 시기 이집트 나세르 정권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시도로 인한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면서 국민들의 관심이 다시 냉전과 외교로 쏠려버렸다. 당연히 외교 위기 상황에서 전쟁 영웅이자 냉전 시대외교를 안정적으로 끌어가고 있던 현직 대통령 아이젠하워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더욱 굳건해졌고 관심을 내치로 돌리려던 민주당과 스티븐슨의 전략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스티븐슨의 수소폭탄 실험 중단, 징병제 폐지 공약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스티븐슨으로서는 갑작스런 외교 환경 변화에 역효과만 내고 말았다.

5.3.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을 둔 의견 차이

선거 과정에서 흑인들은 다른 안건과 함께 1954년 있었던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을 둔 두 후보의 입장차에도 주목하고 있었다. 당시만해도 흑인의 정치적 목소리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주목받지 않았지만 미국 공립 학교에서 인종분리를 종식시킨 이 역사적 판결에 대해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공화당 행정부는 이를 지지한데 비해, 스티븐슨과 민주당은 연방이 주 정부에 개입하려 한다는 이유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

놀라운 점은 1948년 당시만해도 오히려 민주당이 민권법과 흑인 인권 개선에 앞장서고 있었다는 점. 민주당을 지지했으나 슬슬 이탈할 기미를 보이고 있던 남부 백인들을 염두에 둔 발언이긴 했지만 이 발언에 크게 실망한 흑인들은 루즈벨트 시기부터 이어진 민주당에 대한 지지 의사를 서서히 돌리기 시작했다. 반면 아이젠하워와 공화당은 이런 흑인들의 민심 이반을 알아채고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에 대한 호불호 표명을 피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6. 선거 결과

<rowcolor=#000>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대통령 후보 득표수 비고
부통령 후보 득표율
정당 선거인단 당락
파일:공화당(미국) 엠블럼.svg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35,579,180 1위
리처드 닉슨
(Richard Nixon)
57.37%


457명 당선
파일:민주당(미국) 엠블럼.svg 애들레이 E. 스티븐슨
(Adlai E. Stevenson)
26,028,028 2위
에스테스 키포버
(Estes Kefauver)
41.97%


73명 낙선
- 그 외 후보 414,771 -
0.67%


[[무소속(정치)|
무소속
]]
1명
총 투표수 62,021,979


유지
전국 득표 선거인단
아이젠하워 스티븐슨 아이젠하워 스티븐슨
<rowcolor=#000,#fff> 57.37% 41.97% 86.06% 13.75%

선거 결과, 4년전과 마찬가지로 공화당 아이젠하워-닉슨 티켓이 민주당 스티븐슨-키포버 티켓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며 재선에 성공했다. 아이젠하워의 득표율은 선거 전 우려와 달리 오히려 55%에서 57%로 상승했으며 지난 선거 대비 미주리를 빼앗기긴 했지만 대신 켄터키, 루이지애나, 웨스트버지니아를 탈환하면서 선거인단 격차도 더욱 벌렸다. 특히 루이지애나에서의 승리가 역사적으로 의미 깊었는데 아이젠하워는 루이지애나에서 승리한 역사상 첫 공화당 후보가 되었으며 러더퍼드 헤이스 이후 딥사우스(Deep South) 주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맛본 공화당 후보가 되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번 승리로 1896-1900년의 윌리엄 매킨리 이후 56년만에 선거를 통해 재선에 성공한 공화당 대통령이 되었다. 이 사이 다른 공화당 대통령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가 대통령직을 승계한 이후에 재선에 성공했거나 사망, 대선 패배 등의 이유로 단임으로 끝났다.

스티븐슨은 이번에도 남부에서만 지지를 받았지만(정확히는 남부 6개주와 미주리) 그 중에서도 딥사우스(Deep South) 지역만 지켰을뿐 오히려 남부 대서양 지역(South Atlantic)에 있는 주들은 아이젠하워에게 빼앗기며 2번 연속 대선에서 참패하는 굴욕을 당했다. 도시권에서의 참패도 이어졌는데 4년전에는 인구 25만명 이상 도시 39개 중 21개에서 패했지만 이번에는 28개에서 패배를 당했다. 미국 남부의 8대 대도시 중에서도 오직 애틀랜타만 민주당이 지켰다.

선거 직후 스티븐슨은 승복 선언에서 자신을 "대선 참패의 최고 권위자"라고 냉소적으로 희화화한 뒤[8] 다시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자신이 대선 과정에서 여러 현대적 자유주의 의제를 제안하였으며 자신은 패했지만 그 의제들은 끝내 승리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단서를 남겼다. 한편 닉슨은 1956년 대선 과정에서 노쇠한 아이젠하워를 대신해 정력적으로 전국 유세를 나서면서 위상을 한층 더 키우는 데 성공했다. 어찌보면 이번 대선 최고의 승자.

한편 함께 치러진 상·하원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다시 한번 과반을 확보하면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또다시 여소야대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7. 관련 문서


[1] 민주당의 월터 존스 후보를 투표하고 싶던 투표자 1명이 배신표를 던졌다.[2] 현직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승리 시.[3] 도전자 애들레이 E. 스티븐슨 승리 시.[4] 하지만 임기 중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자신을 대체할만한 인물이 없다고 여겨 재선을 결심하게 됐다는 후문이 있다.[5] 아이젠하워는 인종문제 등 몇몇 이슈들에 대해서는 공화당답지 않게 진보적이었지만, 적어도 재정적으로는 보수주의 성향이 확고했다. 실제로 아이젠하워의 임기동안 미국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57.2%에서 43.6%로 하락하여, 미국 경제의 재정건전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GDP 대비 정부지출 또한 20.4%에서 18.4%로 감축시켰으며, 이는 아이젠하워 이전에 집권한 루스벨트와 트루먼 행정부, 그리고 아이젠하워 이후에 집권한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서 모두 GDP 대비 정부지출을 증액시킨 것과 대조적이다.[6] 아이젠하워는 무늬만 공화당원인 민주당원 아니냐는 비판, 닉슨은 너무 강성우파가 아니냐는 비판.[7] 1952년 대선부터 1956년 대선으로 이어지는 과정 사이에 닉슨은 스티븐슨을 배운 티를 내는 엘리트주의자라며 대놓고 폄하했고, 스티븐슨은 그런 닉슨을 매우 경멸한 것으로 알려져있다.[8] 미국 역사상 2번 연속에 대선에 나서 2번 연속 참패한건 스티븐슨이 최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