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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과 중화민국간의 상호방위조약 中華民國與美利堅合眾國間共同防禦條約 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Republic of China | ||
<colbgcolor=#053864> 체결일 | 1954년 12월 2일 | |
파기일 | 1979년 12월 31일 | |
가맹국 | 미국 중화민국 | |
본부 |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現 타이베이시 시립미술관) | |
병력 | 최대 30,000명 (1968~69년) | |
사령관 | 미군 중장 (~1977년) 미군 소장 (~19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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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합중국과 중화민국간의 상호방위조약은 미합중국이 타이베이의 국민정부를 유일한 중국의 합법 정부로 인정하던 시절인 1954년 12월 2일에 미합중국과 중화민국이 맺은 상호방위조약이다. 그러나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 대륙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서 인정하게 되면서, 1979년 1월 1일 지미 카터가 일방적인 파기를 통보한 뒤 1979년 12월 31일에 최종적으로 폐기되었다. 이는 미국이 체결한 양자간의 상호방위조약 중 최초로 파기된 것이기도 하다.본 조약의 체결 당시에는 중화민국이 '중국'으로 인정받고 있었기에[1] 중미공동방어조약 혹은 미중상호방위조약이라고 불렸다.
2. 상세
미국은 1951년 8월 30일 미국-필리핀 상호방위조약을, 1951년 9월 8일 일본과 미일안전보장조약을 체결한 이후, 한국과는 6.25 전쟁 휴전협정 체결로부터 약 3개월 후인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다. 그때까지도 미국은 대만과는 상호방위조약이 없었다.그러다가 1954년 벌어진 제1차 대만해협 위기 이후, 미국에서 상호방위조약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54년 12월 2일에 대만과 미중공동방어조약을 체결한다. 체결 이후 미국은 대만 타이베이시에 미군 협방 타이완 사령부(United States Taiwan Defense Command; USTDC)를 설립하고, 사령관은 미군 중장이 맡았다. 참고로 주일미군 역시 중장이 맡으며, 주한미군은 이들과 달리 대장이 맡는다.[2]
3. 파기와 주대만미군 철수
1971년 12월, 대만이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가 유엔 총회에서 가결된 이후 UN에서 자진 탈퇴했다. 이때부터 미중공동방어조약 유지에 위기가 생기게 되고, 그 시점부터 미국은 서서히 주대만미군 주둔 규모를 줄여나가게 된다. 최대 주둔 당시 약 30,000명이었던 주대만미군은 1972년 미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발표한 상하이 코뮈니크 선언 이후 1973년 4월에 12,000명으로 크게 줄었다. 1974년 9월에는 5,800명으로 계속해서 줄어나갔다. 이러한 주둔 규모 감소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기 데탕트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가속화된다.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주대만미군 사령관의 계급은 중장에서 소장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이 시점부터 전면철수에 쐐기를 박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1978년 9월 30일에는 주대만미군 수가 겨우 753명에 불과할 정도로 크게 줄었다. 그리고 1979년 1월 1일, 미국은 중국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체결하고, 지미 카터 대통령은 대만 측에 상호방위조약의 일방적 파기를 통보한다. 3월 1일에는 주대만미군 고문단이 해체되었다. 1979년 4월 26일, 미군협방타이완사령부는 최후의 하기식을 거행한 뒤, 5월 3일 마지막 사령관 제임스 린더 소장이 대만을 떠나면서 주대만미군은 완전히 해체된다. 2018년에 미국이 사실상의 대표부 역할을 맡는 미국 재대만협회 건물 주변에 해병대 일부(10여 명)를 주둔시키려 했지만, 중국의 반발을 우려한 국방부 장관이 강력히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대만에는 공식적으로는 미군이 없다.[3]
날짜 | 총 주대만미군 규모 |
1955년 | 5,500 |
1958년 | 20,000 |
1968년~1969년 | 30,000(최대) |
1973년 4월 | 12,000 |
1974년 9월 | 5,800 |
1975년 7월 | 3,098 |
1976년 1월 | 1,400 |
1977년 12월 | 1,200 |
1978년 9월 | 753 |
2022년 9월 | 21[주의] |
4. 미국 연방대법원 소송
지미 카터 행정부가 양자상호방위조약을 맺은 국가 중에서는 처음으로 대만 측에 파기를 통보하자, 당시 미국 상원의원이었던 배리 골드워터가 미국 상원의 승인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정했다며 반발해 미국 연방대법원 측에 소송을 걸었다. 이 사건이 바로 골드워터 대 카터 사건("Goldwater v. Carter", 444 U.S. 996, 1979)이다.#이 사건에 대해 연방대법원은 카터 행정부가 상원의 승인 없이 대만과의 상호방위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것은, 의회가 정식으로 반대 입장을 표결에 부쳐서 통과시키는 등의 적극적인 표명을 하지 않았기에, 통치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만약 당시에 미국 상원이 반대하는 입장을 표결에 부쳐 통과시켰다면 의회가 이길 수 있었지만, 정작 입장문을 만들어놓고 표결에 부치지 않는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서 결국 지고 말았다. 더 이상 파기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정치적 장치가 없어졌기에,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은 그대로 파기로 이어졌다.
5. 파기 이후
파기 이후 주대만미군은 1979년 5월 3일 최후의 주대만미군 사령관 제임스 린더 소장이 떠난 이후 완전히 없어졌다. 이후 미국 의회가 타이완 관계법을 제정했긴 했으나, 한미상호방위조약/미일안전보장조약처럼 대만이 중국 등으로부터 군사적 침공을 받을 경우 미국이 직접적인 군사적 도움을 주는 근거가 되는 미국-중화민국 상호방위조약에는 못 미쳤다. 이후 트럼프 정부 시기인 2019년, 2020년에 타이완 동맹 보호법과 대만 보증법이 시행되었으나, 그래도 상호방위조약의 '침략을 받을 경우 직접적인 군사적 지원 가능'이라는 위력엔 못 미친다. 대만 보증법도 결국 미국이 대만의 자국 방위 능력을 키우는 데 중점을 맞추고 있지, 중국 등의 외세 침공 시에 미국이 직접적으로 군사지원을 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대만이 외세의 침공을 받더라도 미국은 군사지원을 아예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암묵적인 묵인과 명문화된 것은 차원이 다르다. 구두계약과 서면계약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이전에 주대만미군 사령부로 쓰였던 건물은, 1983년에 지금의 타이베이 시립미술관이 된다.
한편 오늘날 대만에서는 "중국이 대만에 쳐들어와도 미국은 대만을 돕지 않을 것이다", "대만은 그저 미국의 대외전략에 놀아나는 카드패 중 하나일 뿐이다"를 골자로 하는 미국 회의론이 돌기도 하는데, 이러한 회의론의 근거로 미중상호방위조약 파기를 들기도 한다. 유일하게 미국한테 방위조약을 파기당했으니 언제 또 이런 식으로 대만이 버려질지 모른다는 것.
6. 다시 체결할 가능성?
굉장히 낮다. 1954년에 미국과 중화민국(대만)이 서로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당시가 냉전이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역시 냉전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게다가 그때는 지금의 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이 UN으로부터 국가이자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지 못했었고, 상임이사국 자리도 중화민국 측이 차지하고 있었다.그런데 1971년에 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를 본 중화민국은 환멸감에 자진탈퇴를 하게되고 이에따라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지위의 박탈과 UN에서 더 이상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즉, 더 이상 제대로 된 국가로서 외교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입지가 크게 좁아진 것이다. 미국도 소련 견제를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필요했으니 1979년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했고, 이 과정에서 중화민국(대만)과 단교 및 상호방위조약을 파기한 것이다.
다시 부활시키려고 해도 중국을 직접적으로 자극하여 자칫 잘못하면 전쟁 → 제3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나리오까지 가능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직접적인 무력충돌을 원치 않는 미국 정부의 기조로 보았을 때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21년 7월 7일 커트 켐벨 백악관 NSC 인도-태평양 조정관의 발언에서도 미국의 저의를 엿볼 수 있다. 미국은 중국 견제를 위해서는 대만이 수많은 필수요소 중 하나이지만, 중국과의 직접적인 무력충돌 상황 자체를 꺼린다. 즉, 미국 입장에서는 현상유지가 미국 국익에 최고로 좋은 상황이다. 하지만 이건 달리 해석하면 만약 중국이 무력으로 대만을 침공할 경우, 미국이 현상유지를 위해 개입하겠는 뜻을 내비친 것으로 하나의 중국 정책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나온 발언이다.
7. 관련 문서
- 미국-필리핀 상호방위조약
- 한미상호방위조약
- 미일안전보장조약: 앞의 두 조약과 달리 '안전보장'조약이라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필리핀과 한국은 법적으로 교전권을 갖춘 정규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명목상이나마) 미국과 대등한 정규군 수준에서 서로의 방위를 지원한다는 관계설정이 가능하지만, 일본은 평화헌법에 따라 정규군을 가지고 있지 않아[5] 필리핀과 한국같은 상호방위 수준의 군사적 협력이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8. 참고 문헌
[1] 1971년 UN 총회 결의 이전까지 '중국'이라는 명칭의 대표권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에 있었다.[2] 이것은 대한민국 정부에서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을 4성 장군으로 보임하여서 미군에게 4성 장군 사령관을 보내도록 한 면도 있다.[3] 오랫동안 미국 재대만협회에 소수의 미군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미국이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온 것은 최근에 와서였다. 2021년에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미군이 대만에 주둔하여 중화민국 국군을 돕고 있다고 인정한 바 있다.[주의] 주대만미군이 아닌, 일반 미군이다.[5] 현재의 자위대는 무장 수준은 세계 어느 나라의 군대와도 손색이 없는 정예 병력이지만, 공식적인 교전권이 없어서 법적 지위는 경찰 수준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