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3458><colcolor=#fff> 레슬리 리처드 그로브스 주니어 Leslie Richard Groves Jr. | |
출생 | 1896년 8월 17일 |
미국 뉴욕주 올버니 | |
사망 | 1970년 7월 13일 (향년 73세) |
미국 워싱턴 D.C.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중퇴) 미국육군사관학교 (졸업) |
직업 | 군인 |
최종 계급 | 중장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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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육군 공병 병과 출신이다.제2차 세계 대전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이 사람의 대표적인 업적은 단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펜타곤, 그리고 원자폭탄.
흔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원자폭탄의 개발이라면 오펜하이머, 엔리코 페르미 등 당대의 천재 물리학자들을 주로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그로브스는 바로 이 대단한 물리학자들을 휘하에 두고 사상 최초의 핵무기 개발을 총지휘한 인물이다. 이 점에서 그의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2. 일생과 주요 경력
2.1. 초기의 삶
레슬리 그로브스는 1896년 미국 뉴욕주 올버니에서 목사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역하던 교회에서 사임하고 미 육군의 군종 목사가 되었으며 그 덕분에 그로브스도 여러 지역의 육군 부대를 옮겨다니며 살았다. 나중에 그로브스는 이것을 두고 "나는 미 육군에서 자랐다."(I had been brought up in the Army)라고 회고하기도 했다.그로브스는 1915년 미국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를 희망했으며 지역 상원의원의 추천서까지 받았으나 정작 시험 점수가 모자라 입학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일단 MIT에 입학하여 적을 두면서 육군사관학교를 다시 응시하기로 하였고, 결국 1916년에 시험을 통과하여 꿈에도 그리던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다. 그로브스는 먼 훗날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한 것을 자기 인생의 최고 업적으로 꼽은 적이 있었는데, 이로 보아 어지간히도 군인이 되고 싶었던 듯하다. 이후 그는 웨스트포인트를 전체 4등으로 졸업하고 육군 공병 소위로 임관하여 미국 국내외에서 경력을 쌓았다. 당시 웨스트포인트 성적 최상위권자는 공병 병과로 발령받는 것이 관행이었다. 공병 병과가 수학이나 공학 같은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기도 했고, 전역 후에 민간에 일자리 잡기도 가장 좋았기 때문에 성적이 우수한 생도들은 대부분 공병 병과를 지원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도 공병이란 것과 비슷한 시기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이종찬 장군이 당시 신분을 숨겼다고 해도 공병을 선택한 덕에 귀족임을 졸업식 때에야 알게 된 동기들의 충격먹은 일화는 태평양을 둔 두 가상 적국의 보조 군인 위치가 되는 육군의 주요 분야가 어디임을 알려주는 좋은 비교 사례이기도 하다. 그로브스는 위관과 영관 시절에도 이미 유명해서, "행동하는 사람, 운전하는 사람(현장으로 가는 사람), 의무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명성을 날렸다.
2.2. 펜타곤 건설
그로브스는 미 육군 병참단에서 근무하면서 1940년 11월에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그리고 그는 총책임자인 브레혼 소머벨의 지시로 미 국방부 청사의 신축 공사의 실질적 책임자가 되었다. 이 건물이 바로 우리가 아는 펜타곤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해외 파병과 작전을 수행하느라 미군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많은 업무에 시달렸으므로, 이를 총괄해서 수행할 장소가 필요했다. 이러한 소요에 따라 새롭게 거대한 건물을 건설하기로 했으니 바로 펜타곤이다. 장소 부지로 선정된 곳은 늪지였는데 건축사에 남을 만한 지반 공사와 엔지니어링을 통해 지반을 다졌다. 총 공사 기간은 18개월이었지만, 그 중에서 지반을 다지고 건물을 완공하는 데에는 고작 반 년밖에 안 걸렸다. 그럼에도 이 펜타곤은 2020년대 들어와도 무리 없이 사용할 정도로 튼튼하다.펜타곤 건설 현장. 1942년 7월 |
2.3. 맨해튼 계획
2.3.1.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가 되다
당대의 과학자들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원자폭탄 개발은 처음에는 당연히도 학계의 연구로 추진되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2년 1월 19일, 그러니까 진주만 공습이 있고 나서 불과 6주 뒤에,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가 제출한 원자폭탄 개발 계획을 승인하였다.[1] 이에 따라 미국 학계를 중심으로 원자폭탄 개발이 시작되긴 했는데, 원자폭탄 개발이 점점 규모가 커지고 예산도 많이 투입되면서 이러한 작업들을 어떻게 통제하고, 기밀유지는 어떻게 할 것이며, 예산지출을 어떻게 위장할 수 있을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말 그대로 이제는 뛰어난 기술자와 공학자뿐만 아니라 유능한 정치가, 혹은 전문경영인이 필요해진것. 예를 들어 예산을 심의하는 의원들은 정부예산서만 보고도 프로젝트의 성격을 파악해낼 위험성이 있다. 기밀유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원자폭탄 개발에서 이는 큰 문제였다. 이 때문에 일찍이 미국 국립국방연구위원회(NDRC) 회장인 버니바 부시는 이 프로젝트를 군의 관할, 특히 육군 공병대 소관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고 있었다. 결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승인에 따라 원자폭탄 개발은 군 소관 극비 프로젝트가 되어 본격적으로 굴러갔다.버니바 부시는 이 중차대한 프로젝트 전체를 감독할 유능한 장교를 임명해달라고 요청했다. 헨리 L. 스팀슨 전쟁부 장관, 브레혼 소머벨 육군공병감 등 고위급 인사들은 얼마전 펜타곤 건설을 기록적인 단기간에 완벽히 해치운 추진력이 뛰어난 떠오르는 미 육군 공병 대령, 바로 레슬리 그로브스를 떠올렸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로브스는 펜타곤 건설을 마치고 드디어 해외에서 공병단을 지휘하는 전투 임무를 맡게 되리라 기대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과 전쟁부 장관이 승인한 일이니 워싱턴에서 계속 근무하면서 새로운 중요 임무를 맡게."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로브스는 공병감 서머벨 장군에게 이 명령을 받는 자리에서 대놓고 "저는 그 일 맡기 싫습니다."라고 버텼으며 나중에도 이에 대해 "그 당시에는 몹시 실망했다."고 술회했다.[2] 심지어 그로브스는 "나는 (공사장을 떠나) 전쟁터에서 평화를 찾기를 원했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오히려 공사판보다 전쟁터가 안식의 장소였을 것이다. 이에 상관들은 준장 진급이라는 미끼까지 걸어가며[3] 그로브스를 원자폭탄 개발 책임자로 앉히는 데 성공했다.[4]
대중적으로는 오펜하이머가 이 맨해튼 계획의 총책임자로 알려져 있지만,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의 연구소 소장 신분으로 핵폭탄 자체를 개발하는 이론-기술 분야의 책임자였으며 프로젝트 전체의 총괄 지휘는 그로브스 장군이 맡았다.
그로브스는 군복에 별을 담과 동시에 맨해튼 계획을 총괄했다. 그로브스가 처음 한 일은 바로 맨해튼 계획의 이름을 정한 것이었다. 과학자들과 미 육군 공병단이 처음으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당시에 '맨해튼 공병 관구(Manhattan Engineer District)'라 불렸다. 이 이름의 유래는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당시 공병단 사무실이 뉴욕 맨해튼 지구에 있던 데서 유래했다. 군 부대의 관할지역을 지칭하는 '관구' 개념으로 명명했다고 보면 된다. 이후 그로브스가 정식으로 이 계획을 총괄하면서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과학자들은 과학 실험 냄새가 물씬 나는 고색창연한 이름들을 제안했지만, 그로브스는 모두 기각하고 그냥 이전 관구 이름을 그대로 따와 맨해튼 계획으로 부르도록 하였다.
2.3.2.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성과를 내라
그로브스 장군은 처음에 실망했던 것과 달리 부임하며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는 태도를 바꿔 의욕적으로 일하며 무서운 추진력을 과시했다. 이 과정에서 있었던 유명한 일화들.- 전임자들이 처리하지 못하고 책상에 6개월가량이나 쌓인 각종 문서들을 단 하루 만에 모두 결재해버렸다.[5]
- 위니옹 미니에르[6]가 벨기에령 콩고에서 채굴한 우라늄 원석이 외교적인 문제로 미국이 구매하지 못하고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에 있는 야적장에 쌓인 채 있었는데, 그로브스는 소식을 듣고 뉴욕에 머무르던 위니옹 미니에르의 회장 에드가르 상지에에게 부관 케네스 니컬스를 보내 우라늄 원석 2천 드럼을 그 자리에서 구매했다.
- 그로브스는 전시생산국[7]을 찾아가 맨해튼 계획에 필요한 연구부지를 최우선 지원순위로 지정해주기를 요청했다. 전시생산국장 도널드 넬슨이 이를 거부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시생산국의 비협조로 국가 기밀 프로젝트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보고서를 올리겠다."면서 배째라는 식의 협박을 통해 바로 승인을 받아낸다.
- 맨해튼 계획의 핵심 역할을 담당할 연구소와 생산시설 세 곳의 입지를 선정하고 부지구매 계약 등을 일사천리로 처리했다. 그 세 곳은 다음과 같다.
- 테네시 주 오크리지에 위치한 우라늄-235 분리시설과 연구소 (주로 X라 불렸다)[8]
- 뉴멕시코 주에 위치한 그 유명한 로스앨러모스. 핵무기의 설계와 실제 제조를 담당한 곳으로 주로 Y라 불렸다.[9]
- 워싱턴 주 핸퍼드에 위치한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10]
-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 전쟁부 장관 헨리 L. 스팀슨, 국립국방연구위원회 회장 버니바 부시 등 쟁쟁한 인사들이 개최한 국립국방연구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여 맨해튼 계획의 운영방침을 브리핑했는데, 압권은 회의를 하다 말고 "테네시 주 오크리지 연구소 부지를 살펴보러 가야 하는데 지금 안 가면 기차 못 탑니다." 라고 거기 모인 인사들을 반 협박하여 중간에 회의장을 나와버린 일이다. 아무리 상하 격식을 상대적으로 중요시하지 않는 미국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는 엄청난 일이다. 당시는 미국도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었고, 무엇보다 그 어느 직종보다 상하관계가 뚜렷한 군대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전시에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총장이 개최한 중요한 회의에서 아무리 최중요 기밀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라지만 이제 막 별을 단 풋내기 준장이 "저 중요한 일 있으니 먼저 갑니다."하고 먼저 일어선 것.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육군 공병감 브레혼 소머벨 장군도 "그로브스가 너무 버릇없이 군다."고 생각했다고 나중에 술회할 정도였으니 사실 이건 맨해튼 계획은 통상적인 행정 절차와 방법으로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상층부에 신속하고 과감한 의사결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그로브스가 꾸민 일종의 퍼포먼스 성격도 있었다고 한다.
- 그로브스는 비록 핵물리학 자체를 배우지는 않았지만, 웨스트포인트 입학 전에 MIT에 적을 둔 적도 있을 만큼 과학과 공학 분야의 수재였던터라, 당대의 석학들이 연구하는 핵물리학의 어려운 내용들을 쉽게 습득했다고 한다. 맨해튼 계획의 과학자들과 공식적 첫 면담을 하고 나서 "플루토늄 추출은 충분히 가능하고, 플루토늄을 무기화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수 있다."고 개인적 기록을 남겼을 정도. 당시에는 우라늄을 활용한 폭탄 제조는 이미 명확한 이론이 정립되어 있었지만,[11] 플루토늄 추출과 무기화에는 당대 과학자들도 부정적으로 여긴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로브스는 이미 계획 초기에 플루토늄 폭탄의 가능성을 꿰뚫어 보았다는 얘기다.
어쨌든 이러한 추진력과 업무능력 덕분에 그로브스는 맨해튼 계획을 순조롭게 끌고 나갔으며, 맨해튼 계획 2년차가 된 1944년에 그는 소장으로 진급한다.
참고로 이 소장 진급은 전시 진급이다. 미군 군인들은 정규 계급이랑 전시 계급이 달랐다. 평시에는 정규 계급을 적용받다가, 전시 상황에선 그보다 한 두 계급 이상 빠르게 특진하여[12]높은 계급을 달고 원래 있던 직책보다 높은 보직에서 복무했다. 물론 전쟁이 끝나서 군 규모를 감축하기 시작하면 미군에 잔류하는 군인들은 정규 계급 체제로 복귀한다.[13] 다만 종전 이후에도 현역으로 복무하지 않고 전역/제대를 선택한 이들은 전시 계급을 유지한 채로 제대한다. 그리고 전시 진급이 그다지 흠도 아닌 게, 당시 미국 군인들은 1차 및 2차 세계대전 동안 임시(전시) 진급과 평시 계급 환원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저 유명한 미 육군항공대 칼 스파츠 장군 같은 경우도 대전 중에는 전시(임시) 대장이었다.
2.3.3. 뜻밖의 한쌍, 오펜하이머와 단짝이 되다
맨해튼 계획을 성공으로 이끈 명 콤비, 그로브스와 오펜하이머 | 트리니티 실험 2달 뒤, 코어 철탑 잔해 앞의 그로브스와 오펜하이머 |
2.3.4. 원폭 개발 성공
결국 그가 진두지휘한 원자폭탄 개발은 1945년 7월, 트리니티란 별칭이 붙은 최초의 실험이 성공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그로브스 본인은 큰 만족을 표했지만, 원폭 개발을 기술적으로 주도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이때를 회고하며 "나는 죽음이며 세상의 파괴자다."라는 바가바드 기타의 내용을 떠올리며 곧 다가올 핵무기의 험악한 시대를 예견했다.원폭의 개발을 전후로, 미국은 첫 표적이 될 일본의 어느 도시를 선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로브스는 군수공장이 다수 위치한 교토를 제1순위로 제안했지만, 스팀슨 전쟁부 장관은 교토가 일본 역사에 차지하는 의미를 고려하여 대상에서 배제했다.[14] 종전 이후의 전후처리 과정을 염두에 둔 것으로, 그로브스가 맨해튼 계획에서 몇 안되게 자신의 고집을 꺾은 부분이기도 하다.
2.4. 투하 직후
그로브스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를 한 직후인 1945년 8월 10일에 8월 15일 이후에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을 경우, 8월 17일 또는 19일에 1발, 9월과 10월에 각각 1발 등 이 외에 10발을 더 투하해 총 15발을 투하하자고 조지 C. 마셜 미군 원수에게 제안했다. 물론 마셜은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이 떨어져야 원자폭탄을 추가로 투하할 수 있다는 답변을 내렸다.2.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로브스와 같이 목표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은 그 추진력을 따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적을 많이 만들수 밖에 없다. 심지어 같이 일했던 사람들조차도 그로브스의 개차반 성격이나 절차 무시 같은 문제점들에 대해 비판을 하는 와중이었으니 그 반대파들은 어떠했겠는가. 그나마 대전 중의 육군참모총장 조지 마셜은 그로브스의 장점을 인정하고 아낀 편이었기에 그가 맨해튼 계획의 책임자로 문제 없이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로브스에게는 불행하게도, 그의 성격과 업무 스타일을 매우 싫어하던 사람들의 대표주자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마셜의 뒤를 이어 미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으니 바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였다.[15]그로브스는 대전 종료 이후 공병 병과의 최고위직인 미 육군 공병감(Chief of Engineers)으로 승진하기를 내심 희망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1948년 1월에 있었던 그로브스 소장과의 공식 면담에서 그의 독선, 무례함, 규정과 절차를 무시하는 행태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당신을 공병감 시킬 생각이 절대 없다'라는 것을 분명히 해버렸다. 게다가 헨리 스팀슨 장관을 중심으로 그로브스에게 수훈십자장을 수여하자고 추진하였으나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뻔하다가 겨우 겨우 받았다. 몇몇 개인적 기록에 의하면 그로브스는 사실 명예훈장 수훈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현실은 수훈십자장도 아슬아슬했다.
이에 환멸을 느낀 그로브스는 1948년 중장 진급과 동시에 전역을 택했다. 다시 말해 그의 중장 진급은 일종의 명예 진급으로, 그의 실질적인 경력은 소장에서 그쳤다. 맨해튼 계획이란 인류사에 유례없는 계획을 성공으로 이끈 당사자 치고는 다소 아쉬운 결말이다.[16] 다만 고려해야 할 점은 아이젠하워가 그로브스를 내친 것은 단순 불화문제라기보다는 그로브스의 일하는 타입이 본질적으로 민주주의 국가에선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펜타곤 건설,맨해튼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서 말그대로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식으로 수단방법 안 가리고 협박도 서슴치 않으며 최단기 안에 성과 만드는 업무 스타일은 일단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하는 전시엔 쓰임새가 있지만,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마찰없이 활용하면서 발전을 추구해야 하는 평시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엄청난 불화 및 부작용을 몰고 오기 때문이다. 그나마 미 의회의 배려로 기록상의 중장 진급 일시는 트리니티 핵 실험을 성공시킨 1945년 7월 16일로 소급 적용되는 영예를 안기는 했다.
퇴역 이후에는 군수기업 레밍턴랜드 사의 이사를 지내기도 하고, 말년에는 군인 미망인들을 위한 양로원 설립을 주창하는 등 노년까지도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그로브스는 1970년 사망했으며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3. 기타
웨스트포인트 시절부터 미식축구 선수로 뛰었고 장군 시절에도 테니스 선수급 실력을 자랑했던 만능 스포츠맨이며 일평생 다이어트를 시도했지만, 한편으로는 평생을 초콜릿 중독자로 살았으며 사진에서 보이다시피 비대한 몸집을 지녔다. 그의 비서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사무실 금고에 비밀 문서를 잘 보관하는 것과 더불어, 그 금고에 초콜릿이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채워놓는 것이었다고 한다.4. 매체에서의 그로브스
1989년도 영화 "멸망의 창조(Fat Man And Little Boy)"에서 주인공으로 나온다. 폴 뉴먼이 맡았다. 미션, 킬링필드 감독으로 한때 유명했으나 2000년대 와서 잊혀진 감독 롤랑 조페 감독 영화이며 A특공대에서 머독을 맡은 드와이트 슐츠가 역시 실존인물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연기했다. 원제목을 봐도 알겠지만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에 쓰인 원폭 팻맨과 리틀보이. 즉, 이 원폭을 만들고 쏘는 여러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1989년 당시 국내 영화월간지 로드쇼에선 "뚱보와 꼬마"라는 직역으로 제목표기해 신작으로 소개했다. 멸망의 창조는 CIC 비디오로 나온 제목이다. 평은 그렇게 나쁘지 않으나, 대중적 흥행성으로 크게 부족했다는 평이라 3200만 달러라는 당시 제법 큰 돈으로 만들어 400만 달러조차 벌지 못하고 흥행에 참패했다.카와구치 카이지의 만화 지팡구에서 후반에 비중 있게 등장한다.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맨해튼 계획을 저돌적으로 추진하는 것으로 그려지며, 한편으로는 원자폭탄의 개발로 "이제 맘 편히 잠들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하고 자조하는 인간적 면모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의 피해자 행세의 한계와 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서 역사교육의 고의적인 태업으로 드러나는 일본인의 전형적인 시각이 투사된 것이다. 실제의 그로브스는 원자폭탄의 필요성을 인생 내내 단 한번도 부정한 적이 없었고, 대전 중에는 교토에다 제일 우선으로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 자조 같은 걸 했을 리가 없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등장인물 오슨 크레닉은 레슬리 그로브스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이다. 겔런 어소의 모티브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인 것과도 연관되는 부분. 이는 파블로 히달고가 인터뷰에서 "맨하탄 프로젝트 동안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일어난 다양한 사건과 이야기를 참고했다"고 말해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엔지니어 출신의 군인이라는 점과 공병부대 소속으로 커리어를 쌓고 국가적인 상징이 된 건축물을 준공한 점, 이후 천재 과학자들을 휘하에 두고 은하 제국의 정책을 뒷받침할 대량 살상 병기를 건설한 책임자라는 점이 놀랍도록 유사한 것이 우연이 아닌 셈이다. 직책 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판박이인데, 무기의 시험 폭격이 성공한 후 작전권을 상관이자 은하 제국의 2인자인 윌허프 타킨이 빼앗아가자 정면으로 분노를 터뜨린다거나, 급한 일이 생겼으니 나중에 다시 말하자고 하고 회의장을 나가버린다거나, 상관이 답답하니 군 최고 통수권자에게 직접 보고를 올리겠다고 하는 등의 모습은 그로브스가 자신보다 훨씬 높은 상관들에게 심한 무례를 저질렀던 사건들과 유사하다. 게다가 애초에 스타워즈에서 은하 제국은 겉으로는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과 유사하지만 사실은 미국을 상징한다.[17]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23년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등장하며, 맷 데이먼이 연기했다.
[1] 다이애나 프레스턴, 원자폭탄 그 빗나간 열정의 역사, 뿌리와 이파리, p. 318.[2] 맨해튼 계획과 원자폭탄이 무엇인지 아는 현대의 시각에서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당시 대부분 직업 군인들은 본토에서 행정적인 관리 업무보다는 실제 전장에서 공을 세우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로브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원자폭탄의 개념만 어렴풋하게 나와있던 때에 뭐가 뭔지도 잘 모를 신무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감독하는 업무가 그다지 끌리지 않았음이 당연하다.[3] 사실 그로브스는 맨해튼 계획을 맡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펜타곤 건설의 공로로 준장 진급 최우선 후보자였다.[4] 다이애나 프레스턴, 앞의 책, p. 320.[5] 그 문서들 중에는 나중에 테네시 주 오크리지의 우라늄 농축시설 부지의 구매계약 건도 있었다.[6] Union Minière du Haut Katanga. 벨기에령 콩고에서 구리 등 금속을 생산하던 광산 회사이다.[7]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에 전시 경제의 운영을 위해 설립된 미국의 행정조직. 전시에 무엇을 우선 생산할 것인지, 자원은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등을 결정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8] 현재도 미국 국립 오크리지 연구소가 자리잡고 있다.[9] 현재도 미국 국립 로스앨러모스 연구소가 있다.[10] 현재도 핸퍼드 핵저장소로 남았는데 점차 폐쇄 절차를 밟는 중이다. 2017년에도 핵폐기물 저장 터널이 무너져 일대에 비상사태가 선포되는 등# 여러모로 미국의 골치거리.[11] 우라늄 두 덩어리를 고속으로 충돌시켜 임계질량을 넘기는 방식을 말한다. 이 방식은 너무나 원리가 간단하고 명확하여 우라늄 임계질량만 충족되면 실패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실제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우라늄 충돌방식의 원자폭탄 리틀보이는 단 한번의 실제 폭발실험도 없이 바로 히로시마에 투하되었다. 로스앨러모스 사막에서 실험한 폭탄은 플루토늄 압축 방식이며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과 동일형이다.[12] 물론 얼마나 빨리/높이 올라가고 요직을 부여받느냐는 개개인의 능력과 전공에 따라 다르나, 세계 대전 중에는 전쟁 전에 비해 미군의 규모가 급격히 팽창했으므로 후방 한직을 전전하는 이들도 전쟁 전부터 복무하던 이라면 한 계급 정도는 올라가는 경우가 흔했다.[13] 다만 종전 이후에 정규 계급 체제로 돌아간 이후에도 자기가 맡고 있는 보직이 본래는 본인보다 높은 계급이 맡아야 하나 포상/행정적 이유로 계속 맡고 있는 경우는 있다.[14] 스팀슨의 신혼여행지가 교토였다는 말도 있다. 꽤나 신빙성이 높은지라 영화 오펜하이머에서도 이게 교토가 폭격 대상에서 배제될 때 스팀슨이 한 마디 덧붙이는 것으로 나온다.[15] 아이러니하게도 마셜과 아이젠하워는 전시 중에 독보적인 개성을 지닌 고집불통들에게 시달렸고 그만큼 개성 강한 사람들을 유연하게 포용해줄 수 있던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마셜과 달리 군인을 넘어 대권까지 바라보던 아이젠하워는 더이상 눈에 거슬리는 그로브스를 놔둘 생각이 없었다.[16] 이 때문에 인터넷에서 그로브스의 중장 제복 사진은 상당히 드물며, 이 문서 맨 상단의 대표사진이 거의 유일하다. 주로 준장 혹은 소장 시절 사진밖에 검색되지 않는다.[17] 시대적으로 스타워즈 오리지널 삼부작은 베트남 전쟁, 스타워즈 프리퀄 삼부작의 스타워즈: 클론의 습격과 스타워즈: 시스의 복수는 조지 W. 부시 정부를 비판하려고 만들었다는 것은 원작자 조지 루카스가 직접 밝힌 유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