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존 케이시 Hugh John Casey | |
출생 | 1898년 6월 7일 |
미국 뉴욕주 뉴욕시 브루클린 | |
사망 | 1981년 8월 30일 (향년 83세) |
미국 버몬트주 화이트리버정션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소장 |
복무 기간 | 1918~1949 |
학력 | 브루클린 공과대학교[1]중퇴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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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뉴욕주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아일랜드계 이주민 출신으로 남북 전쟁 샤일로 전투에서 전사했다. 브루클린 공과대학교를 중퇴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으며[2] 1918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공병 대위로 임관했다. 제19보병사단 제219공병대대 중대장으로 서부전선에 배치될 예정이였으나 독일의 항복으로 라인란트에 배치되었다.미국으로 돌아와서 캔자스 대학교 학군단 훈육관을 거쳐 피츠버그에 배치되어 시설공병으로 오하이오강의 댐을 건축했다. 1937년 필리핀에 배치되어 주요 시설 건축에 참가하다가 극동육군 참모진 소속이 되었다. 1940년 소령으로 진급하고 브레혼 소머벨의 지휘아래 펜타곤을 건설하는데 참가했고 건축가인 조지 버그스톰을 보좌했다. 1941년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전쟁부 소속으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건설에 참가했다.
그 해 9월 필리핀으로 복귀해 더글러스 맥아더의 극동육군 공병대장으로 발탁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대령, 1942년 준장으로 진급해 필리핀 루손섬 특히 바탄을 요새화하는데 기여했고 비록 필리핀 전역에서 패배했으나 그가 만든 방어시설은 지연전을 성공시켜 이 공으로 수훈십자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맥아더, 다른 15명의 참모들과 필리핀을 탈출했고 남태평양 육군 공병단장으로 취임했다. 뉴기니 전역 당시 정글, 산을 개척하기 위해 도로, 비행장, 벙커 등 여러 군사시설을 건설했으며 호주 육군의 토머스 브래미, 클라이브 스틸과 함께 태평양 전선에서 맹활약했다.
자제보급 체계도 재정비해 미국에서 안되는 자재는 호주에서 가져왔으며 수송체계도 재확립했다. 이 공으로 은성훈장을 수여받았다. 공병단의 규모는 커졌으며 필리핀 탈환전 당시 43,000명이였다. 레이테 만 전투에서 월터 크루거가 이끄는 제6군 사령부를 각 섬마다 6개를 증축해 섬을 이동할때마다 사용하게 했으며 링가옌만 상륙작전 당시 첫 날에 상륙하지 못했으나 상륙후 루손섬 전역에서 활약하머 미국 공로훈장, 동성훈장을 수여받았다.
종전 후에도 극동육군에 남았으며 1948년 퇴역하는 레이먼드 A. 휠러 중장의 후임으로 공병사령관 자리를 받고 싶었으나 해리 S. 트루먼은 루이스 A. 픽 소장을 차기 공병사령관에 내정했으며 케이시는 1년 뒤 소장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 공기업인 뉴욕시 트랜스 오소리티에서 중역을 지냈고 1981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여담
- 아들인 휴 보이드 케이시는 태평양 전쟁, 6.25 전쟁에 참가했으며 1952년 동두천시에서 전사했다. 딸은 절친 클레이의 차남인 프랭크 버트너 클레이와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