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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F0000><colcolor=#fff> 미합중국 제2대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Walton Walker | |||
본명 | 월튼 해리스 워커 Walton Harris Walker | ||
출생 | 1889년 12월 3일 | ||
텍사스 벨턴 | |||
사망 | 1950년 12월 23일 (향년 61세) | ||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 (現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
묘소 | 알링턴 국립묘지 | ||
재임기간 | 제2대 제8군 사령관 | ||
1948년 8월 4일 ~ 1950년 12월 2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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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 미합중국 육군 | ||
1912년 ~ 1950년 | |||
최종 계급 | 대장 (미합중국 육군 / 사후추서)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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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월튼 해리스 워커 (Walton Harris Walker)는 미 육군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6.25 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이다. 6.25 전쟁 당시 주한 미 제8군 사령관 재직 중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에서 영웅적 공로로 수훈십자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수훈했다.2. 성장기
그는 1889년 12월 3일 미 텍사스 주 벨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인 샘 워커와 리디아 워커는 모두 대학교를 졸업한 인재였다. 남부군 장교 출신으로 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승마와 사냥, 사격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 입학을 희망했고, 장군이 되기를 바랐다.3. 군 경력
웨이트메이어 아카데미를 졸업한 그는 버지니아 군사대학(VMI)에 진학하여 미 육군사관학교 시험을 준비했다. 그는 1907년 6월 15일에 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으나 같은 해 10월 7일 퇴교를 하고 말았다. 그는 재수 끝에 다음 해인 1908년 미 육군사관학교에 재입교하여 1912년 6월 12일 미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그는 1912년 6월부터 1917년 5월까지 미 일리노이 주 포트 셰리던과 미 텍사스 주 포트 크로켓, 멕시코 베라 크루즈, 미 텍사스 주 갤버스턴, 미 텍사스 주 포트 샘 휴스턴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이 기간에 그는 1914년 프레더릭 펀스턴 준장이 이끄는 멕시코 베라 크루즈 원정에 참가했고, 1916년 미국-멕시코 국경을 순찰하면서 한 살 어린 육사 3년 후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긴밀한 우정을 쌓았다.
1917년 5월 15일 대위로 승진한 그는 1917년 5월부터 12월까지 미 텍사스 주 캠프 펀스턴에서, 1917년 12월부터 1918년 4월까지 미 텍사스 주 포트 샘 휴스턴에서 제13기관총 대대 예하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3.1. 제1차 세계 대전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결정한 후 그는 프랑스에 파병되어 1918년 4월부터 미 육군 제5사단 5기관총대대 13기관총중대 중대장으로 시작하여 1918년 6월 7일 현역 대위에서 주방위군 소령으로 진급, 1919년 5월 6일 주방위군 중령으로 진급하고, 1919년 7월에는 5기관총대대장을 맡게 되었다. 이 기간 중 그는 2개의 은성무공훈장을 수훈했다.종전 후인 1920년 2월 12일 그는 주방위군 중령에서 현역 대위로 계급이 환원되었다. 이후 그는 미 조지아 주 캠프 베닝과 미 오클라호마 주 포트 실에서 보병 중대장으로 근무했다. 1920년 7월 1일 현역 소령으로 진급했다. 1923년 8월부터 1925년 6월까지는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1925년 9월부터 1926년 6월까지는 미 캔사스 주 포트 리븐워스에 있는 지휘참모학교를 수료했다. 1926년 6월부터 1930년 7월까지는 미 버지니아 주 포트 몬로에서 복무했다. 이후 그는 중국 주둔 미 육군 제16보병 2대대장을 역임하고, 1935년 8월 1일 현역 중령으로 진급했다. 1936년 8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미 워싱턴 주둔 미 육군 제3보병사단 5보병여단 부여단장을 지냈다. 당시 여단장은 후일 미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조지 C. 마셜(George Marshall) 준장이었다.
3.2. 제2차 세계 대전
워커는 1937년 8월부터 미 워싱턴 DC에 있는 미 육군 참모본부(General Staff Corps) 전쟁기획부 참모장교로 근무했다. 1939년 9월에는 그가 한때 상관으로 모셨던 조지 C. 마셜이 육군 참모총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1941년 2월 14일 대령(전시 임시 계급)으로 승진했다. 마셜 총장이 미 육군 기갑부대를 조직하기 위해 조지 S. 패튼을 지명했을 때 워커는 당시 확장일로에 있던 기갑부대의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먀샬에게 로비하여 고속 승진을 보장하는 기갑부대장 자리를 부탁했다. 그 결과 1941년 4월 15일 기갑보병연대로 재편성되어 신편 제3기갑사단 예하로 편입된 제36기갑보병 연대장으로 취임할 수 있었고, 1941년 7월 10일에는 대령 승진 5개월만에 준장(전시 임시 계급)으로 진급, 1941년 8월 제3기갑사단장에 취임했다. 1942년 2월 16일에는 준장 진급 7개월만에 소장(전시 임시 계급)으로 진급했고, 1942년 5월 1일 대령(공식 계급)으로 진급했다. 1942년 8월 제4기갑군단(후일 제20군단으로 개편) 군단장에 취임했다.1944년 2월 영국에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준비했고, 패튼 장군의 미 육군 제3군과 함께 노르망디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44년 7월 7일 은성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워커의 20군단은 1944년 8월~9월 초에 걸쳐 패튼의 공격 선봉 역할을 수행하여 빠른 진격 속도로 인해 "유령 군단 (Ghost Corps)"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1944년 8월 23일 수훈십자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수훈했다. 워커의 20군단은 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프랑스와 독일, 특히 메츠 (Metz), 벌지전투(Battle of the Bulge), 그리고 독일 본토 침공에서 격전을 벌였다. 1945년 봄, 20군단은 부헨발트 수용소를 해방시켰고, 1945년 4월 15일에는 소장 진급 3년 3개월만에 중장(전시 임시 계급)으로 진급했다. 이후 남동쪽으로 진격하여 1945년 5월에는 오스트리아를 점령했고,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
종전 후 미국으로 돌아와 1945년 5월부터 1946년 5월까지 미 달라스에 위치한 제8지원사령부를 지휘했다. 1946년 5월부터 1948년 9월까지 시카고에 위치한 제6지원사령부와 제5군을 지휘했다. 1947년 8월 1일 소장(공식 계급)으로 진급했다.
3.3. 6.25 전쟁
1948년 워커는 일본의 점령군 임무를 수행 중이던 주일 미 제8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워커는 주일 연합군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로부터 미 제8군을 전투 준비 상태로 회복 시킬 것을 명령받았다.[1]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한국에서 6.25 전쟁이 발발하고, 미군의 참전이 결정되자 미 제8군의 한국 파병이 시작되었다. 워커는 북한군을 공격하여 원래 위치인 38선 이북으로 되돌려 놓으라는 명령을 받고, 미 육군 제24보병사단을 오산 전투와 대전 전투에 투입하였으나 이내 자신의 임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워커는 수비로 전환했으나 북한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큰 손실을 입었고, 미 육군 제1기병사단과 제25보병사단을 추가로 투입했음에도 방어선을 형성할 수 없었다.
워커는 그의 참모진과 예하 지휘관들에게 "한 발도 물러서지 말 것"을 독려했다. 그렇다고 해서 강력한 북한군의 공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후퇴하는 것을 무리하게 막지도 않았다. 그는 현실적으로 유연하게 후퇴를 거듭하여, 마침내 낙동강에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워커는 좁아진 방어구역의 장점을 활용하여 수세적인 상황에서도 부분적인 공세를 펼쳤고, 북한군의 공격기세를 조금씩 꺾었다.
워커는 미군의 증원이 계속되자 하와이와 본토에서 파병된 미 육군 제27보병연대와 미 해병대 제1임시해병여단을 소방대 역할의 기동예비대로 활용하여 전선의 급한 불을 끄고 약한 틈새가 보이면 틈틈히 반격을 시도했다. 본토 증원군이 증가함에 따라 전투 우위가 유엔군으로 이동하여, 북한군은 점차 끔찍한 고통을 겪었고, 북한군의 공급선은 지속적으로 공중 폭격을 당했다. 남침을 주도했던 T-34 전차는 거의 전부가 파괴되었다.
3.3.1. New Korea Plan
6.25 전쟁 초기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에 고전하자, 미국 정부에서는 한국의 정부 요인 및 피난민을 합친 62만명의 인원을 배에 태워서 한반도 외부에 망명정부를 구성하는 계획이 있었다.이 계획은 이른바 New Korea Plan으로 당시 미국 정부가 미8군사령관을 통해, 한국 육군참모총장에게 영천 방어선이 붕괴되면 이승만 대통령과 서사모아로 가서 망명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는 제안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참조 항목 다만 이 사실과는 달리 말 그대로 한국의 정부 인사와 군 관계자들에게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계획에 불과했다. 언급 및 검토되었다고 알려진 지역은 아래와 같다.
- 제주도: 국부천대와 비슷한 방식으로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이었는데, 일단 제주도는 지리학적 특성상 식수 공급이 어렵고 척박하여 농업 등의 기초산업의 기반이 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낮은 제안이었다.
- 규슈 북서부: 일본 규슈 북서부 일대의 나가사키 등지도 검토되었으나, 일본 본토에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세우기에는 양국간의 감정 문제가 아직 예민하던 시기였고, 그로 인해 파생될 수 있는 충돌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한국 망명정부는 한국전쟁과 무관하게 이미 일본에 머물던 한반도 출신의 재일조선인들을 망명정부의 일원으로 편입시켜 인적 자원을 확보하려고 할텐데,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아무리 일본인과 차별 대우하던 재일조선인이라도 전후 일본 사회를 재건하는데에 한명이라도 아쉬운 마당에 귀한 노동력을 유출당하게 놔두지 않을 것이므로 이 점에서도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등 여러 문제가 예상되었다. 그러한 여러 문제들로 인해, 일본 본토로의 대한민국 망명정부 수립은 후대에 그 개연성을 따져보더라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 서사모아 제도 내 일부 도서(당시 뉴질랜드령): 기밀이 해제된 문서 상의 일정을 보면 국군 고위 장교 및 그 가족, 정부 인사 및 그 가족을 우선으로 하고 아직 전투력을 보전한 한국군 약 몇개 사단을 주축으로 한 이주 계획이 포함되었다. 민간인은 서사모아에 정착하고, 군인들은 미군 지휘 체계에 통합한 다음 아시아 방위에 이용한다는 내용. 하지만 서사모아 정착도 말처럼 쉽지가 않은 게 한국 민간인을 수십만에서 많게는 100만 단위로 정착시키면 당연히 기존 원주민들은 밀려날 수밖에 없고 이후 양측의 마찰은 상당할 것이 분명하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모아 제도로의 망명은 보고서가 작성될 정도로 그나마의 자구책이었다. 그 정도로 암담하고 절망적인 전황이었다는 것. 하지만 어쨌거나 이 모든 것은 말 그대로 제안에 불과했다. 다만 만에 하나 낙동강 전선이 쓸려나갔으면 전쟁 당시 남한(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정말 어디론가 가서 망명정부를 수립하거나, 최악의 경우 정부는 커녕 국민들마저 각자도생으로 공산화된 한반도나 일본 열도 등지로 뿔뿔이 해체된 채, 러시아 제국과 에도 막부 두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근거지를 상실한 아이누족처럼 지금쯤 정체성이 사실상 멸족 수준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3] 그 당시의 전황 판단, 그리고 현재의 판단으로도 미루어 볼 때 낙동강 전선은 남한을 위해서 반드시 지켜냈어야 할 보루였음이 실로 명백하다. 밀려났더라면 현재의 한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3.3.2. 맥아더는 남한을 포기하려 했다?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 정말 낙동강이 쓸려나가면 남한 전국민을 집단 이주를 보내야 하는건가 싶었던 그 당시에,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항목 맨 마지막 비문 내용에 다시 나온다.당시 일본에 있던 맥아더 사령관도 남한을 포기하는 것을 고려했었다. 본국에서 준비한 'New Korea Plan'은 둘째치고 전면 철수가 거론되는 시점이었다. 파죽지세로 북한군에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당한 당시 상황에 비추어볼 때 객관적으로도 남한은 승산이 없어 보였다.
남한 사수가 힘들어지면 일시적으로 일본으로 패주한 후 재정비를 고려하거나 아니면 New Korea Plan처럼 서사모아로 가는 것을 머릿속에서 생각했을 것이다. 애초에 더글러스 맥아더가 사령관이면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까 미국 정부는 전황이 어두워지니까 철수하자고 주장했다. 앞서 말한 대로 낙동강에서 밀리면 알지도 못하는 섬으로 남한의 국가수반 + 전국민이 이사를 가야 하는 마당이었다. 거기다 대고 "여기서 다 죽더라도 여기서 버텨보겠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3.3.3.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1950년 7월 26일 미 육군 제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대구에 대한 북한군의 군사적인 압박이 증가하자 미 제8군 사령부의 부산 이전을 미 극동군사령부에 요청했다. 워커 중장은 단지 사령부만 이전하는 것이지 전투부대를 부산으로 철수시키겠다는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극동군사령부 참모장 에드워드 알몬드 육군 소장은 "미 제8군 사령부를 부산으로 옮긴다는 것은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릴 우려가 있으며, 미 제8군이 더 이상 한국에서 지탱을 못하고 철수를 개시할 수밖에 없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사령부 이전을 반대하였다.[4]알몬드 소장은 워커 중장의 요청을 미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보고하고, 맥아더 사령관의 한국 시찰을 건의했다. 맥아더 원수는 다음 날인 7월 27일 알몬드 소장을 비롯한 참모들을 대동하고 대구를 방문했다. 맥아더 원수는 대구에서 워커 중장에게 "미 제8군이 현 진지를 고수해야 된다"면서, "더 이상의 후퇴는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맥아더 원수는 미 제8군 참모장교들에게 "한국에서 철수란 있을 수 없으며, 한국 전선에서 제2의 덩케르크가 재연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5]
이때 맥아더 원수는 1950년 6월말 한강방어선 시찰을 하고 나서 구상했던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완성해놨고, 미 육군부에 이미 보고까지 마친 상태였다. 인천상륙작전 계획의 전제조건으로 달려 있던 게 바로 낙동강 방어선의 유지였기 때문에, 낙동강 방어선 사수는 맥아더에게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Stand or die." 자리를 지키거나 죽어라.
"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있다. 더 이상의 후퇴, 철수, 방어선 재조정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퇴각할 곳은 없다...
덩케르크나 바탄같은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 부산으로의 후퇴는 역사에 남을 학살이 될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우리는 함께 싸울 것이다. 만약 우리 중 일부가 반드시 죽어야 된다면 우리는 모두 함께 싸우다 죽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 방어선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이해했으면 한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We are fighting a battle against time. There will be no more retreating, withdrawal or readjustment of the lines or any other term you choose. There is no line behind us to which we can retreat.…There will be no Dunkirk, there will be no Bataan. A retreat to Pusan would be one of the greatest butcheries in history. We must fight until the end.…We will fight as a team. If some of us must die, we will die fighting together.…I want everybody to understand we are going to hold this line. We are going to win.
1950년 7월 29일 예하 사단에 대한 8군 사령부의 명령서. (출처: http://www.historynet.com, 연합뉴스)
맥아더에게 사령부 이전을 요청했다가 거절 당한 그는 할 수 없이 “부산으로 밀리면 대살육이 일어난다. 오직 버티느냐 죽느냐(stand or die)의 선택밖에 없다”며 장병들을 독려했다."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있다. 더 이상의 후퇴, 철수, 방어선 재조정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퇴각할 곳은 없다...
덩케르크나 바탄같은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 부산으로의 후퇴는 역사에 남을 학살이 될 것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야 한다...
우리는 함께 싸울 것이다. 만약 우리 중 일부가 반드시 죽어야 된다면 우리는 모두 함께 싸우다 죽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이 방어선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모두가 이해했으면 한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We are fighting a battle against time. There will be no more retreating, withdrawal or readjustment of the lines or any other term you choose. There is no line behind us to which we can retreat.…There will be no Dunkirk, there will be no Bataan. A retreat to Pusan would be one of the greatest butcheries in history. We must fight until the end.…We will fight as a team. If some of us must die, we will die fighting together.…I want everybody to understand we are going to hold this line. We are going to win.
1950년 7월 29일 예하 사단에 대한 8군 사령부의 명령서. (출처: http://www.historynet.com, 연합뉴스)
문제는 좁디좁은 낙동강 전선에서도 전개한 유엔군의 병력은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말 그대로 버티기도 어려울 정도로 얇은 선을 그은 건데, 결국 부대 전체가 일종의 소방대처럼 한쪽의 위기가 발생하면 다른 쪽의 병력을 빼서 그쪽을 틀어막는 전략이었다. 그것도 북한의 방호산 이 지휘하던 북한군 6사단이 마산 쪽으로 측면 기습을 시도하는 바람에 이 전략도 무너질 뻔했다. 어렵고 어려운 상황이었다.
3.3.4. 월튼 워커의 결단, 그리고...
워커 중장은 무자비한 명령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 의회에서 미국 국민이 아닌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미국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게 마땅한가? 라거나 버티지 못하면 죽어라? 조국도 아니고 다른 전선에서 이러는 건 마치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하던 명령과 차이가 뭔가?와 같은[6]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나마 맥아더 장군은 군국주의? 뭘 모른다. 워커의 말은 역사상 많은 장군이 흔하게 내리던 명령일 뿐이다. 그런 것에 민주주의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며 그를 두둔해주며, 자신의 명령에 대한 책임을 졌다.워커 중장은 Stand or die란 발언 덕에 본국 의회에서 논란을 일으켜서 한참을 욕 먹어가면서도 한국 꼭 지켜야 된다고 전쟁을 반쯤 포기한 미국 정부를 설득하고 다녔다.[7]
워커 중장은 최전선에서 방어에 힘썼고 한국군과 미군 병사들이 모두 미숙한 훈련병들 위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낙동강 방어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맥아더 원수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 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데에 성공하여 방어선을 굳혔다.
사실, 맥아더의 극동 사령부는 맥아더 패밀리만으로 구성되는 폐쇄적 조직이었다. 맥아더의 참모들은 맥아더가 태평양 지역 사령관으로 병력과 장비 부족으로 고생하던 시절부터 함께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인맥 위주로 굴러가는 또다른 작은 사회였던 셈. 맥아더는 당시의 고생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았다고 평가되던 유럽 전선 출신 장교들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월튼 워커는 출신 성분이 유럽전선이었다. 게다가 무뚝뚝한 성격 탓에 같은 유럽전선 출신이면서도 뛰어난 행정능력을 발휘하여 맥아더의 신임을 얻은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과 달리 워커 중장은 맥아더의 입장에서 볼 때 '굴러들어온 골치아픈 노땅'에 불과했다.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난 부분이 바로 낙동강 방어전인데, 맥아더는 어떻게든 미 본토의 합참을 구워삶아 다수의 병력을 지원받았으나, 이들 대부분을 인천상륙작전 병력으로 전용했고 연이은 소모전으로 방어선에 구멍이 나고 있는 워커에게는 병력 지원을 하지 않았다.
워커의 입장에서는 서럽고 서러운 상황이었다. 맥아더 패밀리에 들어가지 못해 왕따당하는 것도 서러운데, 병력지원은 안해주고 방어선은 틀어막으라고 명령을 했으니 워커 입장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사랑보다 곧 전역해야 할 장성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오기로라도 임무를 완수해야 할 상황이었다. 더욱이 그냥 밀리기만 하면 또 모르겠는데 실제로는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계획되고 병력이 충원되는 마당으로, 상륙작전까지 버티지 못하고 전선이 붕괴되면 모든 책임은 자신이 뒤집어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일화를 보면 그의 휘하 부대 연대장들 상당수는 무능하고 보신주의에 빠져서 전선이 붕괴되는 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워커는 직접 연락기를 타고 북한군 머리 위까지 날며[8] 전황을 체크하고 연대 지휘소를 찾아 다니며 휘하 연대장들을 닦달해 전선을 틀어막아야 할 판이었다.
즉 워커의 입장은 '자포자기 될대로 되라'가 아니라 '더러워서 오기로라도 버틴다'는 식에 가까웠다고 보는게 맞다. 그렇게 워커는 낙동강 전선을 지켰고, 그 와중에 상륙작전에 쓰려고 병력을 안주는 극동사령부의 참모들과도 싸웠다. 즉, 워커의 적은 전선의 북한군 외에도 극동사령부 맥아더 패밀리(참모)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맥아더의 선택은 탁월했지만 그 전에 그로부터 아무런 지원 없이 방어선 붕괴 직전의 절망적인 상황을 오기로 견뎌내 북한군의 주력을 남쪽에 묶어놓은 것은 워커의 공이다. 그래서 워커는 생전에 매우 불운했던 장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3.3.5. 6.25 전쟁에서 그의 전술 방식과 평가
워커의 전략은 패튼 전략의 한국화이지만 지나친 기동전 및 기동 전략으로 인해서 부대간 지원에 구멍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1950년의 중국군 개입 당시 전선 붕괴 당시 상황과 비교되는 일도 있다.하지만 북진 전략은 모두가 맥아더 사령부의 작품이다. 워커의 8군이나 에드워드 알몬드의 10군단은 그 스케줄을 이행하는 장기말에 불과했다. 오히려 지나치게 무리하게 스케줄을 강행했던 알몬드의 10군단이 어떤 꼴을 겪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워커는 기동전을 자주 구사했음에도 꽤 잘 대처한 편이다.
4. 안타까운 사고
1950년 12월 23일 오전 10시경 워커 장군 일행이 탑승한 두 대의 지프차가 의정부 근처 미 제9군단 예하 24사단 전투지휘소를 향해 이동 중이었다. 한국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 3구 외곽의 도로[9]에서 한국군 육군 제6사단 2연대 수송부 정비대 수리공인 민간고용인 박경래(당시 27세, 무면허)가 수리를 마친 차량의 시험주행을 위해 도로가에 나란히 주차되어 있던 5대의 차량 중 4번째 차량인 닷지 WC-51 쓰리쿼터(3/4 톤) 트럭을 출발시키는 도중 마주오던 워커 중장이 탑승한 차량의 측면을 들이받아 지프가 균형을 잃고 전복되었다. 당시 이 지프 차량에는 워커 중장 본인과 부관 레이튼 타이너; Layton C. Tyner 중령, 운전담당 부사관 조지 벨튼 상사; M/Sgt George A. Belton, 경호관 프랜시스 리난 병장; Sgt. Francis D.Reenan 총 4명이 타고 있었다. 워커 중장은 지프의 앞유리창을 깨고 차량 밖으로 튕겨나가 땅바닥에 부딪히면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즉사한 뒤였다.[10]당시 교통사고를 조사한 미군에서는 과실치사로 수사를 종료하고 한국군에 사건을 이첩하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해당 사건 피의자인 한국군 소속 민간인을 사형에 처하려 하자, 당시 미 군사고문단의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가 말렸다고 한다. 사고 유발 운전자는 과실치사로 3년 징역형을 받았다. 사고 직후 워커 중장의 시신은 미국으로 운구되어 1계급 추서 후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프랭크 W. 밀번이 권한대행으로 제8군을 임시지휘했다.
당시는 안전벨트의 중요성은 커녕 필요성도 잘 인식되기 전의 시대라서 전선에서의 비포장도로 위의 차량 운행 시 이러한 차량 사고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11] 우연찮게도, 조지 S. 패튼도 비슷하게 사고사를 당했다. 다만 패튼의 경우는 하드탑인 캐딜락이었는데, 뒷좌석 쪽의 칸막이 유리에 충격하며 목이 부러졌으나 즉사하지 않고 며칠 살아있다가 죽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북한에선 자신들이 워커를 매복해서 사살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가령 2016년 7월 17일자 조선중앙통신 기사 "미국은 조선전쟁에서 당한 참패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에서는 "미제8군사령관이였던 워커는 인민군 적후부대의 매복에 걸려 황천객이 되고 말았다."고 했으며, 2022년 7월 21일자 조선중앙통신 기사 "비참한 운명을 면치 못한 살인《장군》들"에서는 "모조리 죽이는 전법으로 승진의 길을 닦아온 미8군사령관 워커도 인민군대의 매복에 걸려 저승길로 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북한의 선전자료들마다 디테일이 계속 다르며 미군의 1차 사고 조사 보고서와 비교해보면 터무니없는 황당한 소설에 불과하다. 애초에 사고 지역만 봐도 알겠지만, 이미 인민군은 한참 패퇴하고 박멸되어 수도권역에는 매복기습할만한 병력 자체가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5. 기타
6.25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쳐 1983년 대한민국 국방부 선정 4대 명장으로 이름을 올렸다.#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군이 M41 워커 불독이란 경전차를 개발했는데, 전차의 명칭은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워커 장군의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서울 아차산의 지명에 워커힐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SK그룹이 운영하는 호텔인 광진구 그랜드 워커힐 서울과 비스타 워커힐 서울, 그리고 워커힐아파트의 워커힐이 바로 이 지명을 의미한다. 워커힐 호텔이라고 하면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그 워커힐이 워커 장군이라는 군인을 기려서 지어진 명칭이란걸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워커를 기리는 기념비 및 동상도 세워졌으나 더글라스 맥아더와 견주면 철저하게 잊혔다.
아래는 워커힐 본관 정문 산자락에 세워진 비문이다.
"오늘 우리가 장군을 특별히 추모하는 것은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던 미국 조야의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독 장군만이 홀로 한반도 고수를 주장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여 우리의 오늘을 가능케 한 그 공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밌게도 이후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당시 북한의 김여정이 광진구 워커힐에 있는 숙소에서 묵게 되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의 여동생이 북한과 싸운 워커를 기리는 장소에서 지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맥아더 자신은 워커에 대해서 썩 좋은 감정이 없었고. 그냥 저냥 늙다리이자 버거운 부하 정도로 생각했다.[12] 그런 이유로 워커의 공이 잊혀진 것도 사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워커가 순직하지 않았다면 맥아더에 의해서 해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제로 워커 사후 워커의 참모들 중 상당수가 리지웨이에 의해서 전출되는 일이 벌어졌다.[13]
쇼맨십이 특기인 맥아더나 어느 정도 기자들에 대해서 온화한 리지웨이에 비해서 딱딱거리는 편이 많아서 기자들이 좋게 보지 않았다. 마거릿 히긴스의 회고담에서도 은근히 돌려서 깔 정도. 사실 워커의 공이 이런 이유로 묻힌 것도 있다. 실제로 워커에 대해서 나온 전기는 단 두편. 그것도 한편은 사망 직후에 나온 전기이다. 동시대의 역대 미 8군 사령관들이 이전이나 이후 커리어 때문에 전기가 굉장히 많은 것과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전형적인 무골이었다.
1950년 12월, 이승만 대통령과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 |
워커 중장의 사고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워커 중장의 부인에게 북진 도중 영변 근처에서 노획한 김일성의 소련제 리무진 ZIS110을 선물로 주었다. 워커 부인은 1951년 7월 로스엔젤레스에서 이 자동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미국제 승용차로 교환했다. 그 후 김일성의 리무진은 여러 수집가의 손을 거쳐오다 1982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2014년 6월에는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다. 거액을 주고 기부를 했다는 후문이 기부 전시실에 있다.
워커 중장의 사고건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가 있던터라 북한에서는 대대적인 선전의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내용은 최종운이라는 하전사가 특수부대를 이끌고 유엔군의 보급로를 습격하는 일련의 작전에서 워커가 거느린 대규모 후퇴 대열을 기습해서 전멸시켰다는 이야기. 지금도 심심하면 잡지에서 떠들어대는 이야기이다. 참고로 일본의 검은 안개에서는 아예 후퇴중에 워커가 탱크에 깔려죽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에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구내 식당이 있었다[14]. 이름은 워커 하우스(Walker House). 설명에 따르면, 건물이 6.25 전쟁 당시 미 8군의 사령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구광역시에 그의 이름을 딴 미군부대인 캠프 워커가 존재한다.
2016년 국방TV 개국 11주년 특집으로 그를 기리는 다큐를 방영했다.
그의 아들인 샘 워커는 아버지와 같이 한국전쟁에서 활약했으며 이후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4성장군에 남동유럽 연합군 사령관으로 전역하였다. 이후 2015년에 91세로 사망하였다.
[1] 워커장군이 주일 미 제8군 사령관으로 일본에 부임할 당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참전용사의 대다수가 제대했으며 대부분 햇병아리 신병들로 가득했고, 전형적인 무사안일 천하태평의 분위기가 가득했다.[2] 1950년 당시 사모아 인구가 8만명을 겨우 넘는 정도였으니 100만이 몰려오면 전체 인구의 10%도 안되는 원주민의 소수민족화는 당연지사다.[3] 냉전 종결 후 기밀 해제된 미국 비밀문서에 따르면, 1951년 1.4 후퇴 이후 미국 정부에서 다시 한 번 이보다 더 체계적인 한국 정부 망명 계획을 준비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번에는 완벽하게 패하는 상황이 아니라 중국군이 특정 방어선(금강 - 소백산맥 방어선)을 넘어오기만 하면 바로 실행한다고 결정한 상태였다.[4]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206,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5집 낙동강선 방어작전, 75페이지.[5]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207, 미 육군 군사 연구소, 6.25 전쟁사 5집 낙동강선 방어작전, 76페이지.[6] 24사단장인 딘 소장이 실종(나중에 북한군의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 확인됨)되는 지경까지 초래했으니 미국 의회의 충격은 대단했다. 장성급 장교가 실종될 정도였다.[7] 물론 미군들은 이런다고 일본군처럼 알겠다고 죽을 이들이 아니었다. 이런 말이 전해지자 미군들은 저 미친 놈이라고 워커를 씹었고 우리가 질 것 같고 달아날 수 있다면 달아나지 미쳤다고 여기서 죽냐고 비아냥거렸다. 당시 참전한 김성환 화백은 워커 사진에 침을 뱉으며 욕하던 미군도 봤다고 하니 미군들에겐 은근히 욕을 많이 먹었던 걸 알 수 있다.[8] 오죽했으면 워커의 부관이 연락기에 그려진 삼성장을 지울 정도였다.[9] 현재 위치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로169나길 53 (도봉동 596-5번지) 앞 길. 지도 사고장소에서 140m 떨어진 도봉역 2번 출구 길 건너편에 워커 장군 전사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사고 장소에 표지석을 세울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사고 장소 인근에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10]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2014.12월에 발간한 군사 제93호에 당시 사건기록을 토대로 사고 자체를 재구성한 논문이 실렸다.[11] 차량 자체가 하드탑이 아니라서 전복사고가 나면 중상 아니면 사망일 정도로 안전성이 없었다.[12] 상단에도 언급되지만 그는 맥아더와 달리 유럽전선에 있었고 패튼의 사람이었다.[13] 그렇지만 리지웨이가 맥아더파 인물이라 이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매튜 B. 리지웨이 문서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리지웨이는 맥아더 휘하에 있었던 시절도 있었으나 맥아더 라인 장교도 아니었고, 맥아더가 월권을 휘두르기 좋아하는 정치장군임을 경계하여 워커의 후임으로 미 8군에 부임할 때 아예 맥아더와 담판을 통해 간섭을 하지 말 것을 못박을 정도였다. 그랬음에도 맥아더 및 그 이너서클 장군들과의 충돌이 잦았다. 리지웨이의 장교 교체는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는 참모진의 교체, 그리고 중공군의 참전 이후 지속된 후퇴로 패배주의가 만연한 장교진의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목적이 더 강했다 볼 수 있다.[14] 2019년 7월부터 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