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제2대 서독미군정사령관 루시어스 클레이 Lucius Clay | |
본명 | 루시어스 듀비그넌 클레이 Lucius Dubignon Clay |
출생 | 1898년 4월 23일 |
미국 조지아주 매리에타 | |
사망 | 1978년 4월 16일 (향년 78세) |
미국 매사추세츠주 채텀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대장 |
복무 기간 | 1918 ~1949 |
학력 | 미국육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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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조지아주 매리에타에서 상원의원 알렉산더 S. 클레이의 6남으로 태어났으며 1918년 미국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 주로 시설공병에서 종사하며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세워진 댐과 여러 건축물을 증축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 계기로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백악관 대변인 샘 레이번[1], 해리 홉킨스와 좋은 관계를 맺어 빠른 진급 속도를 보였다.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450개의 비행장을 증축했으며 이 공으로 44세의 나이에 준장으로 진급했다. 조지 C. 마셜과 같이 전투에 참가하진 않았으나 후방에서 맹활약하며 미국 공로훈장, 동성훈장등 여러 훈장을 받았으며 1945년 4월 17일 중장까지 진급했다.
전후 1947년 대장으로 진급했고 조셉 맥나니의 후임으로 서독미군정사령관으로 복무했다. 마셜이 계획했던 마셜 플랜을 짜는데 도움을 줬으며 베를린 봉쇄 당시 항공공수로 고립된 베를린 시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장기적으로 소련의 제제를 실패로 돌아가게 했다. 유대인들도 법조계에 적극적으로 채용했다. 반면 전범들에게 관대한 처벌을 내리기도 하는 비판도 받았다.
1949년 존 매코이에게 인수인계하고 예편했으며 리먼 브라더스에서 중역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1963년 존 F. 케네디대통령과 함께 서베를린에 다시 돌아와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가 나온 연설을 참관했다. 1978년 사망했다.
3. 여담
장남인 루시어스 클레이 주니어는 공군에서 활동했으며 대장까지 차남인 프랭크 버트너 클레이는 육군 소장까지 진급했다.[1] 레이번이 텍사스 의원으로 있었을때 데니슨 댐을 증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