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스 오거스터스 리 주니어 Willis Augustus Lee Jr. | |
출생 | 1888년 5월 11일 |
미국 켄터키주 내틀리 | |
사망 | 1945년 8월 25일 (향년 57세) |
미국 메인주 해안 | |
복무 | 미합중국 해군 |
최종 계급 | 미국 해군 중장 |
복무 기간 | 1908~1945 |
학력 | 미국해군사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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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켄터키 주의 오웬 카운티의 시골마을 내틀리에서 판사 윌리스 리 시니어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린시절부터 사냥총을 들고 유해조수를 사냥하는 취미가 있었으며 어린시절 사제폭탄을 제조해 실험 중 지근거리에서 폭발해 시력이 손상되었다. 이에 평생동안 안경을 착용했다.1904년에 미국-스페인 전쟁여파로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성적은 공부는 잘 안하고 사관학교 사격팀에 몰두했지만 중간을 기록했다. 1908년 해군소위로 임관했다.[1]
1908년 10월부터 1909년 3월까지 전함 USS 아이다호에서 근무한 뒤 1910년까지 순양함 USS 뉴올리언스, USS 헬레나에서 복무한 후 1913년 7월에 다시 아이다호로 되돌아왔다가 곧바로 전함 USS 뉴햄프셔로 이동해 멕시코 원정대에 투입되어 베라크루즈 점령전에 참가해 멕시코 혁명군과 전투를 치렀다. 스코프없는 소총의 기계식 조준기로 조준해 혁명군 저격수 여려명을 저격했으며 별동대를 편성해 기관총으로 인해 데드존이 형성된 지역을 돌파해 고립된 인원을 구출하기도 했다.
이후 일리노이에 있는 록아일랜드 조병창에서 근무하며 육상근무를 시작했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엔 구축함 USS 브라이언, USS 리에서 종군해 U보트와 맞서싸웠다.
사관학교시절부터 사격팀선수였고 임관 후에도 군 내 사격대회에서 타이틀을 차지했다. 이후 전미사격대회에서 내로라하는 선수 685명을 제치도 당당하게 우승을 차지했으며[2]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의 미국 국가대표로 참가해 소총과 권총 14개 종목에 출전하여단체전에서 금메달 5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획득했다. 동료인 로이드 스페너와 함께 한 대회에서 7개의 메달을 따낸 그의 기록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당시 알렉산드르 디탸틴이 체조종목에서 7개를 따 내기 전까지 깨어지지 않은 기록이었다.
1920년 말경에 그는 해군대학을 거쳐 1936년엔 대령으로 진급한 뒤 경순양함 USS 콩코드의 함장으로 취임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2년엔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2년 11월 14일부터 15일 새벽까지 이어진 제3차 솔로몬 해전에서 64전대장으로 전함 USS워싱턴, USS 사우스다코타 2척과 구축함 4척을 지휘했다. 핸더슨 비행장을 포격하기 위해 돌입한 콘도 노부타케 중장의 함대를 격퇴한 리 소장이었지만 자신의 함대도 구축함 4척을 잃고 전함 USS 사우스다코타가 대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일본해군의 비행장 포격을 방지하고 특히 해전에서 승선한 전함 USS 워싱턴이 레이더 사격으로 일본해군의 전함 키리시마에 여러 발의 포탄을 명중시켜 격침시켰다. 이 공으로 해군십자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에 중장으로 진급했고 태평양함대 전함전대 사령관으로 고속전함 부대를 지휘해 마리아나 해전, 레이테 만 해전 등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 1945년 5월에 카미카제의 방어수단을 연구하는 특별부대의 지휘를 위해 본국으로 돌아갔고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8월 15일에서 10일 지난 후 전함 USS 아이오와의 함상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하고 말았다.
3. 여담
- 미쳐급 구축함 3번함인 윌리스 A. 리는 그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
- 별명은 Ching이였다. 생도시절 시력 손상으로 인해 청나라인처럼 눈이 작아서 붙였던 별명이다.
- 상술했듯이 사격의 달인이였으며 사격에 대한 애정이 높아 중국에서 근무하던시절 사격에 대한 글을 학술지에 여러번 기고했다. 평생 착용한 안경 또한 특수하게 제작되었는데 볼트액션이 후퇴하는 부분의 렌즈를 제거했다. 부임한 곳마다 사격솜씨를 펼치며 인원들을 상당히 놀라게 했다. 참모직 시절에도 공기총 사격구역을 만들기도 했다.
- 또한 포술의 달인이기도 했으며 USS 콩코드 함장시절 포술을 훈련시켰으며 여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6인치 포에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했으며 태펑양 전쟁전 사격통제장치 개선, 함교탑 디자인에 크게 관여했다. 그 결과가 드러난것이 제2과달카날 해전이다.
- 할리우드와 협업해 정찰 사진술과 분석을 개선하는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1] 당시 동기는 리치먼드 K. 터너, 토머스 킨케이드, 프랜시스 F. 록웰, 윌리엄 R. 퍼렐, 아서 S. 카펜터등이 있다.[2] 본래는 소총만 하려했으나 사격 코스를 너무빨리 통과해 심심해서 권총에 도전했다가 권총도 출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