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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4-23 17:35:54

레슬리 맥네어

파일:us_army_ww2.png 제2차 세계 대전 미군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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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General of the Army / Fleet Admiral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 더글러스 맥아더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헨리 아놀드AAF
해군
원수
윌리엄 리히 | 어니스트 킹 | 체스터 니미츠 | 윌리엄 홀시
대장
General / Admiral
육군
대장
오마 브래들리 | 조지 S. 패튼 | 칼 스파츠AAF | 조나단 웨인라이트 | 조지프 스틸웰 | 월터 크루거 | 조지 케니AAF | 코트니 호지스 | 마크 클라크 | 레너드 T. 게로 | 말린 크레이그 | 브레혼 소머벨 | 존 헐
해군
대장
마크 미처 | 토머스 킨케이드 |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 로열 잉거솔 | 홀랜드 스미스M |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M | 리치먼드 K. 터너 | 제임스 O. 리처드슨 | 해럴드 스타크 | 헨리 켄트 휴이트 | 토머스 홀컴M | 조나스 H. 잉그램 | 러셀 R. 웨이시C 전
중장
Lieutenant general / Vice Admiral
육군
중장
레슬리 맥네어 | 존 리드 하지 | 앨버트 웨드마이어 | 매튜 B. 리지웨이 | 사이먼 B. 버크너 | 월튼 워커 | 로버트 리처드슨 | 루시안 트러스콧 | 호이트 반덴버그AAF | 루이스 H. 브레레턴AAF | 존 C. H. 리 | 윌리엄 H. 심슨 | 알렉산더 패치 | 제이콥 데버스 | 프랭크 맥스웰 앤드루스AAF| 로이드 프레덴달 | 밀러드 하먼AAF†| 델로스 에먼스AAF | 월터 베델 스미스 | 리처드 서덜랜드 | 조지 H. 브렛AAF | 트로이 H. 미들턴 | 아이라 이커AAF | 에니스 화이트헤드AAF |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AAF | 존 드위트 | 휴 알로이시우스 드럼 | 해럴드 L. 조지AAF | 바니 M. 자일스AAF | 휴버트 R. 하먼AAF | 토머스 D. 화이트AAF | 네이선 트와이닝AAF | 웨이드 H. 헤이즐립 | 윌리스 D. 크리텐버거 | 제프리 키스 | 에드먼드 B. 그레고리 | 존 K. 캐넌AAF | 오스카 그리스월드 | 벤 리어 | 찰스 P. 홀 | 레이먼드 S. 매클레인 N 전 | 토머스 T. 핸디 | 루시어스 클레이 | 스탠리 던바 엠비크 | 대니얼 아이섬 설턴 | 유진 레이볼드
해군
중장
프랭크 잭 플레처 | 제시 올덴도르프 | 윌리스 리 | 존 매케인 시니어 | 존 H. 타워스 | 줄리안 C. 스미스M| 로이 가이거M | 앨런 H. 터니지M | 드위트 클린턴 램지 | 프레더릭 C. 셔먼 | 찰스 록우드 | 로버트 C. 기펜 | 로버트 곰리 | 루이스 덴펠드 | 찰스 M. 쿠크 주니어 | 아서 L. 브리스톨 | 로스 E. 로웰M
소장
Major General / Rear Admiral
육군
소장
제임스 밴 플리트 | 모리스 로즈 | 커티스 르메이AAF | 맥스웰 테일러 | 레슬리 그로브스 | 윌리엄 F. 딘 | 클레어 셰놀트AAF·전 | 랄프 스미스 | 월터 쇼트 | J. 로턴 콜린스 | 로버트 올즈AAF | 리먼 렘니처 | 호바트 R. 게이 | 로스코 B. 우드러프 | 에드윈 F. 하딩 | 스태퍼드 리로이 어윈 | 윌리엄 J. 도너번 | 존 P. 루카스 | 에드윈 D. 패트릭| 클래런스 L. 팅커AAF† | 로버트 아이첼버거 | 찰스 윌로비 | 윌리엄 B. 킨 | 핸퍼드 맥나이더 | 폴 뉴가든 | 프랭크 캐들 마힌 | 폴 J. 뮐러 | 노먼 코타 | 어니스트 N. 하먼 | 찰스 H. 게르하르트 | 앤드루 데이비스 브루스 | 로버트 W. 해즈브룩 | 제임스 로턴 콜린스 | 존 B. 콜터 | 패트릭 헐리 | 프랭크 W. 밀번 | 앨버트 W. 월드론 | 클로비스 E. 바이어스 | 윌리엄 W. 이글스 | 윌리엄 F. 샤프 | 프랭클린 C. 시버트 | 아이작 D. 화이트 | 조지 데커 | 카터 매그루더 | 로버트 B. 매클러 | 클라크 L. 러프너 | 앤서니 맥콜리프 | 레이먼드 바턴 | 로버트 N. 영 | 윌리엄 M. 호그 | 제임스 L. 브래들리 | 클래런스 R. 휴브너 | 윌러드 G. 와이먼 | 루이스 A. 크레이그 | 찰스 H. 콜렛 | 에드워드 H. 브룩스 | 가이 V. 헨리 주니어 | 앨버트 E. 브라운 | 월터 M. 로버트슨 | 새뮤얼 E. 앤더슨 AAF | 도널드 윌슨 AAF | 테리 앨런 | 도일 히키 | 길버트 R. 쿡 | 제임스 E. 채니 | 데이비드 바 | 에드워드 알몬드 | 에드워드 P. 킹 | 조지 M. 파커 | 조지 F. 무어 | 토머스 B. 라킨 | 러셀 P. 하틀 | 프랭크 오드리스콜 헌터 AAF 전 | 헨리 오랜드 | 찰스 W. 라이더 | 아처 L. 러치 | 찰스 L. 볼트 | 알프레드 그루엔터 | 로리스 노스타드 | 아치볼드 빈센트 아널드 | 레이 바커 | 에드윈 P. 파커 주니어 | 해리 J. 맬로니 | 찰스 L. 스콧 | 브루스 매그루더 | 올랜도 워드 | 존 밀리킨 | 존 W. 레너드 | 제임스 개러시 오드 | 제이 L. 베네딕트 | 로버트 S. 바이틀러N | 레너드 F. 윙N | 존 달퀴스트 | 프레드 L. 워커 | 어니스트 J. 돌리 | 유진 M. 랜드럼 | 프랭크 메릴 | 오벌 R. 쿡 AAF | 로렌스 S. 커터 AAF | 얼 E. 파트리지 AAF | 휴 존 케이시 | 레이먼드 A. 휠러 | 루이스 A. 픽 | 고든 P. 새빌 AAF | 뮤어 S. 페어차일드 AAF | 맨튼 S. 에디 | 도널드 A. 스트로 | 호러스 L. 맥브라이드 | 윌리엄 H. H. 모리스 주니어 | 휴 J. 가피 | 존 셜리 우드 | 엘우드 리처드 케사다 AAF | 조지 비지 스트롱 | 존 W. 오대니얼 | 윌리엄 C. 리 | 윌리엄 M. 마일리 | 윌리엄 F. 마쿼트 | 리처드 재클린 마셜 | 호러스 H. 풀러 | 젠스 A. 도 | 해럴드 불 | 찰스 P. 그로스 | 해리 C. 잉글스 | 유잴 G. 엔트 AAF | 윌리엄 코벨 | 릴랜드 홉스 | 윌리엄 S. 키 | 에밀 F. 라인하르트 | 로버트 M. 웹스터 AAF 전 | 존 F. 커리 AAF
해군
소장
허즈번드 킴멜 | 아이작 C. 키드 | 노먼 스콧 | 대니얼 J. 캘러헌 | 해리 슈미트M | 윌리엄 H. P. 블랜디 | 존 W. 윌콕스 주니어 | 찰스 P. 세실 | 로버트 H. 잉글리시 | 그레이브스 B. 어스킨M| 돈 P. 문 | 클리프턴 스프레이그 | 시어도어 E. 챈들러| 리틀턴 월러 주니어M | 찰스 D. 바렛M | 아서 D. 스트러블 | 르무엘 셰퍼드M | 시어도어 스타크 윌킨슨 | 윌리엄 P. 업셔M | 패트릭 N. L. 벨린저 | 제임스 H. 도일 | 헨리 M. 뮬리닉스 | 포레스트 셔먼 | 윌리엄 H. 루퍼터스M | 칼튼 H. 라이트 | 말론 티스데일 | 클리프턴 B. 케이츠M | 칼 헨리 존스 | 프랜시스 W. 록웰 | C. 터너 조이 | 윌리엄 페치텔러 | 올리버 스미스 M | 새뮤얼 L. 하워드M | 아서 래드포드 | 로버트 웹스터 캐리 | 클로드 A. 존스 | 로버트 카니 | 러셀 S. 버키 | 토머스 L. 스프레이그 | 펠릭스 스텀프 | 윌리엄 M. 캘러헌 | 프랜시스 S. 로 | 루이스 E. 우즈 M | 프랜시스 P. 멀케이 M | 시드니 사워스 | 필드 해리스 M | 클레이턴 바니 보겔 M | 토머스 유진 왓슨 M | 찰스 F. B. 프라이스 M | 랄프 E. 데이비슨 | 제럴드 F. 보건 | 켈러 E. 로키 M | 드위트 펙 M | 아서 C. 데이비스 | 페드로 델바예 M
준장
Brigadier general / Rear admiral (lower half)
육군
준장
마크 클라크 | 돈 프랫 | 케네스 N. 워커 | 프레더릭 워커 캐슬AAF† | 네이선 베드퍼드 포레스트 3세AAF†| 제임스 돌턴 2세 | 스톤월 잭슨 | 가이 포트| 클로디어스 이즐리 | 허버트 다그AAF| 제임스 둘리틀AAF | 찰스 키런스 주니어 | 앨런 C. 맥브라이드 | 제임스 로이 앤더슨AAF | 브라이언트 무어 | 시어도어 루스벨트 주니어 | 제임스 에드워드 워튼 | 로렌스 B. 카이저 | 노먼 슈워츠코프 시니어 | 리 S. 게로 | 찰스 H. 바스 주니어 | 하워드 녹스 래미AAF† | 헤이우드 핸셀AAF | 로버트 싱크 | 조지 A. 테일러 | 존 H. 처치 | 찰스 D. 파머 | 윌리스턴 B. 파머 | 윌리엄 H. 윌버 | 에드윈 L. 시버트 | 해럴드 휴스턴 조지AAF† | 에밋 오도넬 주니어 AAF | 윌리엄 켈리 해리슨 주니어 | 앨버트 M. 존스 | 프랜시스 윌리엄 패럴 | 윌리엄 E. 브라우어 | 루서 R. 스티븐스 | 클리퍼드 블루멀 | 클린턴 A. 피어스 | 루이스 C. 비비 | 브래드퍼드 G. 시노웨스 | 찰스 C. 드레이크 | 칼 H. 실즈 | 제임스 R. N. 위버 | 케네스 로열 | 벤저민 O. 데이비스 시니어 | 러셀 A. 윌슨AAF 전 † | 넬슨 메이시 워커 | 에드먼드 윌슨 서비전 † | 데이비스 던바 그레이브스AAF 전 † | 클라이드 D. 에들먼 | 브루스 C. 클라크 | 제이 W. 매켈비 | 아서 트루도 | 구스타프 J. 브라운 | 에이사 N. 던컨AAF † | 칼라일 H. 워시AAF † | 윌리엄 H. 터너 AAF | 리처드 E. 뉴전트전 AAF | 존 L. 매그루더 | 존 그롬바크 | 웨인 C. 스미스 | 루벤 엘리스 젠킨스 | 토머스 레너드 해럴드 | 로버트 H. 소울 | 아이라 P. 스위프트 | 리로이 H. 왓슨 | 케일럽 V. 헤인즈 AAF | 로버트 몬태규
해군
준장
알레이 버크 | 해리 W. 힐 | 로렌스 A. 애버크롬비 | 메리트 에드슨M | 레이 A. 로빈슨M | 제임스 알렉산더 로건 | 로슨 H. M. 샌더슨M | 로버트 H. 페퍼M | 윌리엄 스털링 파슨스 | 프랭클린 A. 하트M
AAF:육군 항공대, M: 해병대, N: 주방위군 C: 해안경비대
※ 문서가 있는 인물만 종전 당시 계급으로 서술
※ 윗 첨자 : 전사
※ 윗 첨자 : 전시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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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제임스 맥네어
Lesley James McNair
파일:attachment/Lesley_McNair.jpg
출생 1883년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 번데일
사망 1944년 7월 25일 (향년 61세)
프랑스 망슈 생로
복무 미합중국 육군
복무 기간 1904 ~ 1944
최종 계급 육군 중장
육군 대장(사후)
주요 참전 베라크루즈 점령
판초 빌라의 급습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코브라 작전†
서훈내역 퍼플하트
레지옹 도뇌르

1. 개요2. 경력
2.1. 초기2.2. 제1차 세계 대전2.3. 전간기2.4. 제2차 세계 대전2.5. 사망2.6. 사후
3. 업적
3.1. 훈련3.2. 기존 조직 정리3.3. 전투 부대3.4. 유색인종 군인3.5. 포병3.6. 개발 관리
4. 중간
4.1. 개인 교체식 병력 보충
5. 실책
5.1. 원인5.2. 효율적인 이론
5.2.1. 당시 대전차 자주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5.2.2. 퍼싱의 신뢰성 문제와 셔먼의 수량 확보에 대한 노력
5.3. 현실은 시궁창
5.3.1. 방어적 교리에 입각한 견인식 대전차포 선호5.3.2. M4 셔먼 만능주의5.3.3. 모의전 조작
6. 평가7. 매체에서의 등장8. 외부 링크

1. 개요

미국군인. 최종 계급은 미국 육군 중장이었으며 전사 후 대장으로 추서되었고,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미국 육군 지상군(AGF) 총사령관 자리를 맡았다. 해외 주둔 미군을 위한 조직, 훈련, 보충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2. 경력

2.1. 초기

레슬리 맥네어는 원래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하려고 했으나 입교 대기자 명단에 오랜 기간 머물러 있게 되자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는 것으로 목표를 변경하고 1900년에 시험을 치룬 후에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다. 1904년에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졸업인원 124명중 11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기록했기에 포병을 선택했고 미국 해군사관학교 입교 대기자 시절에 미네소타 경영대학원에서 기계공학과 통계학을 전공으로 해서 공부했는데 이러한 지식이 나중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레슬리 멕네어가 군인으로서 초기에 겪은 경력은 주로 화기 시험장이나 조병창이었으며 해당 시설에서 화포를 연구하고 실험하면서 신무기의 개발, 시험, 채용, 생산, 배치에 대한 각종 경험을 익히게 된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중위로 승진한 후에는 포병 부대에 배치된 후에 산포 부대에서 산포를 현대화하고 산포를 전장으로 운반하는데 필요한 각종 장비 및 부속품을 개발 및 적용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으며 여기서 얻은 성공과 실패를 바탕으로 해서 주로 포병 분야에서 설계에 대한 특허를 3개나 획득할 수 있었다.

이미 이 당시부터 훌륭한 지휘관이면서 포병과 화포에 대한 전문가로 입지를 단단히 다진 레슬리 멕네어는 간접 사격을 위한 사격제원표를 작성하거나 프랑스에 7개월간 파견을 가서 프랑스군의 포병 훈련, 교육 및 배치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는 등 계급에 비해 상당히 중대한 임무를 담당하게 된다.

2.2.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한 1917년 4월에 레슬리 멕네어는 소령 계급이었으나 장교 훈련 캠프의 교관으로 배치된 후 해당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 새롭게 창설된 미국 제1사단의 훈련 담당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레슬리 맥네어는 병력 동원 및 개별 병사에 대한 훈련과 병력의 집단 훈련에 대한 전권을 가지게 된다. 해당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으므로 1917년 6월에 제1사단이 프랑스로 파병을 갈 때 합류하여 당시 제1사단 작전 참모차장인 조지 C. 마셜 대위와 병력수송선에서 같은 선실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긴 항해 기간동안 서로 친해졌으며 직업적인 유대감을 가지게 되었고 해당 만남은 이후의 군 경력동안 계속 지속되었다.

1917년 8월에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전시(戰時) 중령 계급을 받은 레슬리 맥네어는 미국 원정군(AEF) 본부에 배치되어 AEF 참모 훈련 부서(G-5)의 포병 훈련 및 전술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한다는 판단을 받아서 1918년 6월에 전시 대령으로 승진한 후 1918년 10월에 35세의 나이로 전시 준장이 되어 당시 미군에서 두번째로 나이가 어린 장군이 되었다.[1]

소령에서 장군으로 진급이라니 이상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미군은 전시진급으로 원래 자기 계급이 뭐든간에 필요한 직책에 맞는 계급을 받는게 가능하다. 다만 월급은 원래 계급의 월급을 받고, 전쟁이 끝나면 원래 계급으로 복귀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전시 진급한 경우는 퇴역등의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군인으로 계속 복무할 경우에는 원래 계급으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계급인 사람들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대접을 더 많이 받으며 군대의 중요 직책에 올라갈 기회를 더 많이 주게 된다.

1차대전 당시 레슬리 맥네어는 전술적, 기술적으로 전문성을 보여서 상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존 조지프 퍼싱에게 육군공로훈장을 수여받았고 필리프 페탱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그리고 1차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배한 후 독일 점령군으로 계속 복무하였으며 1919년 6월에는 미국 원정군(AEF)에서 전투 중 보병에게 적절한 이동식 간접화력지원을 제공하는 문제를 연구하는 라시터 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2.3. 전간기

포트 리븐워스(Fort Leavenworth)에 있는 미국 육군 지휘 및 참모대학(United States 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의 교수로 임명받은 레슬리 맥네어는 미국 본토로 빠르게 귀환해서 1921년까지 교수를 담담했으며 전시 계급은 복귀하였으나 원래 계급을 정식 소령으로 승진하는 것으로 인정받았다.

당시의 포트 리븐워스는 구식 교육기관인 미 육군 전열학교(The Army's School of the Line)가 1차대전 발생으로 사실상 활동을 중단한 상태였기에 지휘 및 참모대학으로서의 기능이 정지된 상태였다. 사실상 처음부터 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커리큘럼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으나 레슬리 맥네어는 해당 업무를 제대로 수행함과 동시에 미국 육군의 야전교범(United States Army Field Manual)을 새롭게 개발하고 공포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야전교범은 1923년에 기존의 남북전쟁 시절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 교범을 완전히 교체했으며 레슬리 맥네어는 여기에 대해서 큰 공훈을 인정받았다.

1923년에는 하와이에 있는 포트 샤프터(Fort Shafter)에 작전 담당 참모부 차장(G-3) 직책으로 레슬리 맥네어가 부임한다. 여기서 진주만을 포함한 하와이를 방어하는 문제에 대한 토론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해안포폭격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오아후 섬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실험을 하고 차트를 작성해서 보고를 했다. 레슬리 맥네어의 보고서에 따르면 해안포는 해안선 방어에 충분하며 폭격기는 비록 정확도가 떨어지지만 원거리에서 적 군함을 폭격할 수 있기에 유용하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미국과 일본간에 태평양에서 전쟁이 벌어질 경우를 대비한 전쟁 계획인 전쟁 계획 오렌지(War Plan Orange)의 검토 작업에도 착수해서 일본의 공격으로부터 하와이를 방어하는 목적으로 비상시 적용할 비상계획을 만들었다. 구체적으로는 하와이에 게엄령을 선포하고 미국 본토에서 증원군이 올 때까지 하와이를 방어하는 구체적인 계획과 함께 긴급시 화학무기까지 사용해서 일본군을 상대하는 것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1924년에서 1925년까지 미국 육군 항공대의 미래를 놓고 여러가지 논쟁이 발생했는데 그 중에서 레슬리 맥네어가 실시한 연구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미국 육군 항공대는 공군력에 대한 과소평가가 진행되었다고 항의하고 해안포병을 비롯한 미국 육군의 수뇌부들은 맥네어의 연구와 조사에 해안포병과 육군 항공대의 장교가 모두 참여해서 공정했다고 맥네어를 변호하는 등 마찰이 있었다. 하지만 빌리 미첼이 과격한 언사까지 동원하면서 찰스 펠럿 서머올을 비롯한 미국 육군 수뇌부를 모조리 비난했기에 전면적인 조사가 들어간 끝에 빌리 미첼의 재판에서 나온 증거를 통해 레슬리 맥네어가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했고 미국 육군 항공대에게 편파적인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제출되었다. 결국 빌리 미첼은 유죄 판결을 받은 후에 퇴역했고 반대급부로 레슬리 맥네어는 미국 육군의 수뇌부에 올라갈 차기 인물중 하나로 인정받게 된다.

1924년에 레슬리 맥네어는 퍼듀 대학교(Purdue University)에서 ROTC 관련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군사 과학 및 전술 교수로 임명되었다. 여기서는 예비역 장교를 훈련하는 것 외에도 퍼듀 대학교의 ROTC는 기계화 포병쪽으로 임관하기 때문에 레슬리 맥네어의 전문분야와 일치했다. 여기서도 레슬리 맥네어는 ROTC의 전반적인 프로그램과 커리큘럼을 훌륭하게 개선 및 적용했고 덕분에 퍼듀 대학교는 레슬리 맥네어를 육군 야전포병 규정을 개정하기 위해서 전근시키는 것에 반대하고 일반적인 ROTC 교수의 임기인 4년을 보장하라고 요구할 정도였다. 그래서 1928년까지 레슬리 맥네어는 퍼듀 대학교에서 근무하게 된다.

1928년에 레슬리 맥네어는 중령으로 정식 진급하여 미국 육군 전쟁대학(United States Army War College)에 입교한다. 해당 학교는 미국 육군 장교를 위한 최상위급 정규 교육기관으로 장차 미국 육군의 수뇌부가 될 사람을 전문적으로 교육시키는 곳이다. 여기서 레슬리 맥네어는 기본적인 교육 과정 외에도 인사(G-1), 정보(G-2), 운영 및 훈련(G-3), 병참(G-4)에 대한 세미나를 이수하고 각종 사안에 대해 토론을 진행했다.

미국 육군 전쟁대학에서 레슬리 맥네어가 교육과정을 수료하는 동안 장차 2차대전에서 유명해지는 주요 장교들을 만나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대학을 졸업하면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미국 육군이 부대 훈련용 예산을 할당할 때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최종적인 연구를 한 프로젝트를 제출했는데 당시 미국 전쟁부에서 미국 육군 전쟁대학에서 만들어진 매우 우수한 공로급 연구라고 극찬을 받은 후에 레슬리 맥네어는 장차 고위급 장성이나 참모본부의 중요 직책을 담당할 인물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미국 육군 전쟁대학을 졸업한 레슬리 맥네어는 미국 육군 야전포병학교의 부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레슬리 맥네어는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지속된 고질적인 야전 포병의 교리를 완전히 뜯어고쳤다. 기존의 야전 포병 교리라는 것은 참호전 시절에도 부적절한 수준으로 제대로 된 관측도 없이 시간이 되면 고정 좌표에 포격하는 정시 포격과 목표를 정해진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포격하는 순환 포격같은 답없는 짓을 하고 있었는데 이걸 전방에서 포격을 관측하는 전방 포격 관측장교(forward observer (FO))를 도입해서 관측후 포격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더 이상은 참호전이 벌어질 가능성을 낮게 본 후 전선에서 긴급화력지원을 요청할 때 신속하게 포병 화력을 지원할 수 있도록 포대 단위로 운영하던 포병을 포병 대대 단위로 운영하고 일선 부대에 화력지원을 제대로 요청할 수 있는 장교를 훈련시켜서 배치함으로서 포병 화력 지원속도를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구세대적인 꼴통 장교들의 방해를 뚫고 개혁을 수행한 공로로 1933년에 부교장의 임무를 마친 레슬리 맥네어는 효율성 보고서에서 최고 점수를 받은 후 대령으로 임시 진급했다.

이 시기부터 확실하게 미국 육군의 수뇌부가 될 사람으로 인정받은 레슬리 맥네어는 진급에 필요한 일선부대 근무가 필요했으므로 1933년 7월 1일부터 10월 1일까지 제16야전포병연대 제2대대장을 역임했고 레슬리 맥네어는 부대의 명칭 변경과 재편을 담당하면서 1934년 8월까지 이제는 제83야전포병연대 제2대대로 바뀐 해당 대대를 지휘했다.

1934년 8월에는 민간 보호단(Civilian Conservation Corps (CCC))의 E지구의 사령관으로 이임한 레슬리 맥네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을 계획, 지휘, 감독하는 업무를 수행하면서 수천 명의 젊은 구성원을 동원하고, 주거를 제공하고, 음식을 제공하고, 의료를 제공하고, 감독하고, 신체적, 정신적 회복력을 향상시키는 실질적인 경험을 쌓았다. 그리고 임무를 위해서 다수의 군인과 협력해서 활동해야 했고 민간인인 정부 관계자와도 협동해야 했으므로 나중에 레슬리 맥네어가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본인의 임무 수행을 위해서도 귀중한 경험을 쌓았고 나중의 업무 수행에도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2가지의 실전 부대 배치에서도 모두 성과가 좋게 나오자 1935년 5월에 대령으로 정식 진급하게 된다.

레슬리 맥네어의 다음 자리는 미국 육군 야전포병사령관의 행정부관이었다. 레슬리 맥네어는 기본적인 임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애비딘 시험장(Aberdeen Proving Ground)에서 호치키스(Hotchkiss) 25mm 대전차포호치키스(Hotchkiss) 25mm 대공기관포등의 무기를 시험하고 연구하며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야전포병의 관측을 위해서 오토자이로를 활용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1937년 1월에 레슬리 맥네어는 준장으로 진급한다.

1937년 3월에 제2야전포병여단의 사령관으로 레슬리 맥네어가 임명된다. 여기서 레슬리 맥네어는 보병사단 편제 중에 1차대전식의 4각 사단과 새롭게 제안된 3각 사단중에 어떤 것이 더 나은지 평가하는 임무를 육군참모총장에게 부여받았다. 레슬리 맥네어는 기존의 4각 사단인 사단 아래에 2개 여단을 둔 후 각 여단이 2개 연대를 두는 방식으로 4개 연대를 사단이 보유하는 체제가 너무 무겁고 둔중하다고 판단하여 여단을 제거하고 사단 아래에 3개 연대를 바로 도입하는 3각 사단이 더 유용하다고 판단했으며 해당 결정은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 사단의 정규 편제로 도입된 후 오랜 기간동안 유지된다.

해당 업적이 매우 큰 반향을 보인데다가 기본적인 업무로 잘하기 때문에 당시 제2보병사단의 사단장이자 레슬리 맥네어의 상관인 제임스 K. 파슨스(James K. Parsons)소장은 연례 업무 평가에서 레슬리 맥네어가 자신의 상관이 될 능력이 충분하므로 해당인을 군단장이나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해줄 것을 추천한다. 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그리고 다른 장군들이 파슨스 소장에게 레슬리 맥네어를 동료들과 비교하면 어떤 수준인가라는 추가 질문이 들어오자 파슨스는 자신이 아는 40명의 장군이나 장군감 장교들중에서 레슬리 맥네어는 2등이라고 언급했다. 덕분에 레슬리 맥네어는 1939년 3월까지 제2야전포병여단의 사령관으로 재직한 후 영전한다.

레슬리 맥네어가 훌륭한 평가를 받자 당시 미국 육군참모총장인 말린 크레이그는 레슬리 맥네어를 지휘참모대학의 교장으로 임명한다. 여기에는 말린 크레이그의 부관인 조지 C. 마셜도 적극적인 찬성을 나타냈다. 여기서 레슬리 맥네어가 받은 임무는 지휘참모대학의 커리큘럼을 완전히 뒤엎어버리고 현대화하는 한편 미군의 대규모 증편에 따라서 대량의 장교수요가 발생하므로 이전보다 더 많은 장교를 더 빠른 시간안에 육성하도록 수업기간을 단축해야 하는 어려운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기존의 참호전 교리가 아니라 적극적인 기동전에 맞춘 장교를 양성해야 하니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레슬리 맥네어는 위에 나온 어려운 임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야전교범도 개편했다. 레슬리 맥네어가 부임하기 전에 완성단계에 돌입했던 1939년판 야전교범이 비판을 받자 즉시 개정작업에 돌입해서 1941년판 야전교범의 상당부분을 완성했다. 그래서 1940년 7월에 레슬리 맥네어가 다른 자리로 이동할 때까지 1941년판 야전교범은 작성중이었지만 1941년 1월 1일에 해당 야전교범을 출판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한 조지 C. 마셜의 요구를 만족시키지는 못했지만 내용면에서는 제대로 야전교범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1년판 야전교범은 제2차 세계 대전중에 미국 육군의 야전교범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공적들이 합산된 결과 이미 교장 재직 초기에 말린 크레이그는 자신이 아는 31명의 준장중에서 레슬리 맥네어가 2등이라고 평가했으며 퍼시 포 비숍(Percy Poe Bishop) 소장은 첫번째로 레슬리 맥네어를 평가할 때 자신이 아는 31명의 준장중에서 레슬리 맥네어가 5등이라고 했고 두번째 평가에서는 레슬리 맥네어가 모든 분야에서 우수하며 고위 지휘관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한 후 자신이 아는 30명이 넘어가는 준장중에서 레슬리 맥네어가 1등이라고 언급했다.

2.4.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7월에 레슬리 맥네어는 새롭게 신설된 미국 육군 총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United States Army (GHQ))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해당 조직은 미국 육군이 제2차 세계대전시에 동원, 조직, 장비 및 훈련을 감독하기 위해 창설한 것으로 조직의 수장은 육군참모총장인 조지 C. 마셜이 겸임하지만 워낙 업무가 과다한 관계로 인해 마셜은 GHQ의 중요 임무를 모두 참모장인 레슬리 맥네어에게 위임한 후 대다수의 업무를 처리하게 했다. 그리고 마셜은 맥네어에게 업무에 도움이 될 광범위한 조언과 지침을 제공하고 아주 중요한 업무에 한해서 맥네어의 요청을 받아 최종승인을 하는 방식으로 GHQ를 움직였다.

1차대전 후 군축으로 거의 소멸상태였다가 갑자기 대규모 증원을 하는 대혼란의 도가니탕이 당시의 미국 육군이었으므로 GHQ는 극소수의 인원으로 운영을 시작했으며 처음부터 임무가 크고 막중한데다가 과거의 유물인 미국 본토의 군단사령부와 충돌이 발생하는 등 운영이 순탄치 않았다. 이런 악조건 하에서도 레슬리 멕네어는 1940년과 1941년에 기동훈련을 실시하여 전투교리의 수정과 장비의 개선 및 무기의 교체등을 이룩했으며 쓸모없는 장교들을 색출해서 마셜이 즉시 해임하거나 한직으로 재배치하는 등의 작업을 도와줄 수 있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서 레슬리 맥네어는 1940년 9월에 임시 소장으로 진급한 후 1941년 6월에 임시 중장이 되었으며 미국이 전쟁에 돌입한 후에는 전시(戰時) 중장이 되었다.

1942년 3월에 미국 육군은 기존의 GHQ를 폐지한 후 사령부 3개를 신설한다. 미국 육군 지상군(Army Ground Forces(AGF))는 레슬리 맥네어가 지휘하고 미국 육군 항공군(AAF)는 육군 항공대 수장인 헨리 아놀드가 지휘하며 미국 육군 보급군(ASF)는 브레혼 B. 소머벨(Brehon B. Somervell)이 지휘하는 것으로 구성하며 각 부서 간의 경쟁과 주도권 및 자원을 둘러싼 경쟁을 종식시킬 목적으로 개편한 것이었다.

해당 구조는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는데 기존의 혼란스런 충돌은 사라졌으나 이제는 기존의 전쟁부 휘하의 참모본부와 3개의 사령부 사이의 경쟁이나 3개의 사령부 각각의 경쟁이 벌어지며 권한 문제가 대두된 것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까지는 조정이 가능했고 역할이 상당수는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기에 상대적으로 다툼이 줄어들긴 했다.

여기서 레슬리 맥네어는 강력한 권한과 영역을 가지게 된다. 이미 AGF가 창설될 당시부터 장교와 병사를 합해서 78만명이라는 거대한 병력을 총괄하는 AGF는 1943년 7월까지 병력을 220만명으로 늘릴 계획을 잡았으며 실제로 1945년에는 800만명까지 병력이 늘어나면서 권한과 범위 면에서는 매우 거대한 조직이 된 것이다. 이렇게 많은 것을 관리하기 위해서 기존의 육군의 4개 조직인 보병, 포병, 기병, 해안포병의 조직은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부장 직위를 폐지하고 권한을 레슬리 맥네어에게 넘겼다. 여기에 더해서 각종 훈련조직이나 동원 및 모병 조직도 레슬리 맥네어가 관장하게 되었으며 기존의 전투 조직에 속하지 않는 공수, 기갑, 대전차, 대공포 부대 및 관련조직은 레슬리 맥네어가 혼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조정이 가능했다.

워낙 레슬리 맥네어에게 집중된 권한과 분야가 많았기에 위에서 언급한 다른 사령부나 참모본부와의 충돌이 있긴 했고 레슬리 맥네어도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나 막강한 권한과 책임 때문에 사실상 미국 육군 안에서는 육군참모총장인 조지 C. 마셜 다음의 2인자가 레슬리 맥네어였다. 그래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처럼 연합군본부 총사령관이 된 인물도 레슬리 맥네어보다 사실상 서열이 아래였다.

그러므로 레슬리 맥네어는 자신의 담당 분야에 대해서는 미국 육군 내에서는 마셜보다 아래인 인물 따위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으며 실제로도 의견을 묵살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고집스럽게 관철한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후술할 한계점이나 문제점에 대해서 화살이 집중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1943년에 횃불 작전으로 미군이 북아프리카 전역에 돌입하자 레슬리 맥네어는 전장 시찰 및 AGF가 전장에 맞추어서 제대로 활동하는 지 여부를 알기 위해 전선을 방문했다. 그러다가 1943년 4월 23일에 튀니지 전투중에 팔과 머리에 파편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된다. 그래도 큰 부상은 아니라서 현역을 유지한 채 치료를 받고 퍼플하트를 수여받은 후 미국 본토로 가서 업무에 복귀한다.

1944년에 레슬리 맥네어는 서유럽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목적은 북아프리카 전역과 동일한 것 외에 포티튜드 작전이라는 기만작전과도 관련이 있었다. 여기서 가상으로 설정된 집단군급 부대인 미국 육군 제1집단군(First United States Army Group), 약칭 FUSAG의 후임사령관으로 조지 S. 패튼의 뒤를 이어서 부임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패튼을 제3군 사령관으로 임명해야 하기에 빈 자리를 메꿔야 하며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독일군의 시선을 돌리려면 거물급 인물이 FUSAG의 사령관을 담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1944년 7월에 레슬리 맥네어는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와서 코브라 작전에 참가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FUSAG가 직접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고 나치 독일군을 속이기 위함이었다.

2.5. 사망

1944년 7월 25일, 노르망디 교두보를 돌파하기 위한 코브라 작전에 앞서 미군은 전선의 독일군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융단폭격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당시 폭격 정밀도란게 정밀 폭격 수단인 급강하폭격기가 급강하 폭격을 해도 전차처럼 작고 빠르고 민첩한 표적에 대한 명중을 기대할수 없었다.[2] 하물며 대규모 수평폭격은 말할것도 없다. 게다가 당시의 연합군과 독일군은 상당히 근접거리에 있어서 조금만 실수하면 오폭당하기 딱 좋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융단폭격이 없으면 돌격하는 셔먼 전차는 다 불덩어리가 될 판이므로 예정대로 폭격은 감행되었으며, 결국 예상했던 대로 오폭이 발생하고 말았다. 더욱 사태가 악화된 것은, 일단 융단폭격에서는 선도기나 선두의 폭격기가 폭격을 하면 거기서 발생되는 연기를 따라서 다른 비행기들도 폭격의 목표를 삼는 버릇이 있는데, 때마침 풍향이 연합군 진지쪽으로 바람이 흘러가는 상태라서 폭발연기가 연합군 진지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결국 사태를 파악한 연합군이 황급히 폭격중지명령을 내렸지만, 때마침 전장시찰을 나온 맥네어 장군 이하 130여명의 사상자가 나고 말았다. 폭격으로 인한 시신 훼손이 심각해, 맥네어 장군을 식별할 수 있는 단서는 계급장뿐이었다고 한다.

비록 오폭사건이 일어나긴 했지만 다음날 다시 융단폭격을 재개하기로 결정이 난데다, 전날의 폭격이 조금 하다 만 수준이라 독일군이 잠시 동안은 폭격이 없을 것으로 생각해서 낚인 것까지 합쳐진 덕에 다음날의 융단폭격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다.

결국 레슬리 맥네어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사이먼 버크너 육군중장과 함께 미군 내 둘 뿐인 중장 전사자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 전사자 중 최고 계급이 되고 만다.[3]

2.6. 사후

레슬리 맥네어의 장례식은 FUSAG의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하인 오마 브래들리조지 S. 패튼등 총합 4명이라는 적은 인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간소하게 치뤄졌으며 노르망디 미군 묘역(Normandy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에 안장되었다. 또한 1943년 62세의 고령으로 전역했던 벤 리어 중장이 맥네어 사후 현역으로 복귀해 후임 지상구성군 사령관이 되었다.

맥네어 장군 사망 2주 후, 태평양 전쟁에 투입된 미 육군 제77보병사단 참모장이던 그의 아들인 더글러스 맥네어 육군 대령에서 일본 육군저격을 당해 전사했다. 맥네어 대령은 슬하에 1명만 두고 있어, 결국 가문이 단절되고 말았다.

1944년 8월에야 부정확한 언론 보고로 레슬리 맥네어가 적군 총탄에 맞고 전사했다고 알려졌고 조금 후에나 실제 전사 상황이 정정보도로 나갔다. 1954년에 사이먼 버크너 육군중장과 함께 정규계급 대장으로 사후 진급 및 추서가 이루어졌으나 미국 전투 기념물 위원회(American Battle Monuments Commission)에서는 기존의 중장 계급이 조각된 십자가 비석을 교체하지 않았다가 2010년에나 뒤늦게 사실을 알아채고 그제서야 레슬리 맥네어의 십자가 비석을 대장 계급이 조각된 것으로 교체한다.

3. 업적

육군참모총장인 조지 C. 마셜과 함께 1차대전 후의 대군축과 전간기때의 대공황을 맞으면서 약소국 군대인 포르투갈군 이하의 실질전투력을 가졌던 미국 육군을 급격한 대규모 증강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긴급육성한 공로가 큰 명장이자 훌륭한 후방사령관이다.

그리고 레슬리 맥네어가 세운 업적은 독일이나 소련과 달리 실전경험이 아니라 파견장교와 해외의 전훈에 대한 보고서의 분석, 그리고 기동훈련을 통한 검증의 결과라는 점도 중요하다. 레슬리 맥네어를 비롯한 미육군 조직가들은 거의 비어있는 3류 육군을 도상에서의 토의와 분석, 벤치마킹을 통해 현대 미육군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즉 레슬리 맥네어를 필두로 한 미 육군 수뇌부는 독일군과 소련군이 병사들의 막대한 피를 댓가로 얻은 전훈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흡수해낸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당시까지 레슬리 맥네어가 입수할 수 있던 정보에도 어느 정도의 제한이 있다. 독소전에서 소련군은 사단/군단급 방어에서 적극적으로 차량화된 대전차포 예비대, 그리고 대전차자주포 연대를 종심상에서 운용했으며, 이는 레슬리 맥네어를 비롯한 미육군 수뇌부에서 생각한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이는 1940년까지의 독일군 기갑사단이 기갑여단 - 연대 단위의 집중운용, 그리고 그 이전까지 독일 주재무관 트루먼 스미스를 통해서 획득한 독일군 기갑운용 교리에서 볼 때 적합한 관점이었다.

문제는 1944년에서 1945년까지 독일군이 미군을 상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여건을 상실한데다, 독일 기갑사단의 부대운용 교리가 기갑집중운용에서 보다 전차를 분산시켜 운용하는 형태로 전환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국력이 올라가면서 물자와 장비보다는 미국 병력의 손실을 더 걱정해야 하는 사태로 변환되었는데 그걸 빠르게 캐치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래서 뒤에 설명하는 전차전대전차전 및 관련 분야에서 실책을 저질렀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워낙 업적이 엄청나서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옥에도 티가 있다는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3.1. 훈련

긴급하게 징병된 민간인이 빠른 시간내에 훈련을 받고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훈련과정을 모조리 뜯어고쳤다. 그리고 실탄훈련이나 실탄을 사용하는 것을 정확하게 반영할 시뮬레이터를 사용하는 훈련등을 도입해서 실전적인 훈련을 하는 것도 중시했다.

그런 과정에서 일단 민간인을 군인으로 빠르게 만들어주는 기초군사훈련과 군인을 해당 군사특기에 맞게 훈련시키는 주특기훈련이 확실하게 확립되었으며 해당 훈련을 수료한 후에는 한국의 호국 훈련, 독수리 훈련과 같은 대규모 훈련을 경험하게 함으로서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건너서 일선에 파견되더라도 일단 전투가 가능할 수준까지 병력을 대규모로 빠른 시간에네 훈련시켰다. 사실상 훈련 항목에 있는 훈련중 대다수는 레슬리 맥네어가 기초를 잡아놓은 것이다.

여기서 징집한 민간인을 훈련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하고 느낄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간인을 군인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인데다가 당시의 미국은 대공황의 영향등으로 인해 징병된 사람들의 수준과 능력이 바닥을 기었다. 대공황 시절에 가난으로 인해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해서 문맹이 기본이고 심각한 수준의 사투리까지 작렬해서 같은 주에 거주해야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인데다가 지병들도 많아서 근시충치등의 잔병이 기본탑재된 상태였다. 따라서 훈련소에서 알파벳과 미국 표준 영어를 가르치고 안경을 맞춰주며 충치를 치료하는 등 먼저 사람부터 만들어야했기에 이런 자들이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하는 것 자체가 말 그대로 난관이다. 이걸 해결한 것 자체가 위업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병력 뿐 아니라 장교훈련도 소홀히 하지 않아서 위의 경력 사항에서 언급했듯이 지휘참모대학을 완전하게 뜯어고침으로서 전시에 대규모의 장교들이 일단 지휘참모과정을 수료할 수 있게 함으로서 부족하나마 전선에서 지휘관으로 제대로 활동하도록 준비해두었다. 실제로 해당 과정을 수료하고 전선에 뛰어든 장교 중에서 2차대전의 영웅이나 그 후의 전쟁에서 노련한 장군이 된 사람들이 많다.

여기에 더해서 1941년판 야전교범의 뼈대를 만들고 상당수를 완성한 공적도 대단하다. 해당 야전교범은 2차대전의 전훈을 반영해서 많은 곳이 수정되었으나 기본적인 현대식 교범의 기초를 확립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3.2. 기존 조직 정리

길게 보면 미국 독립 전쟁부터, 짧게 봐도 남북전쟁부터 시작해서 1차대전과 전간기를 거치면서 우후죽순격으로 난립한 민병대식 병력 양성기관과 각종 조직을 정리하거나 최소한 영향력을 크게 줄이는데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위에 언급한 GHQ와 AGF의 수장으로서 미국 본토의 군단사령부와의 갈등이나 보병, 포병, 기병, 해안포병의 조직과의 충돌과 개편과 수습은 이미 언급한 바 있고 미국의 국민방위군(National Guard)과의 싸움도 대단했다.

원래 레슬리 맥네어는 국민방위군을 완전히 해체하려고 했다. 남북전쟁 시기에 지역명사가 의용군을 이끌고 오면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지휘관에게 적당하게 높은 계급을 부여한 후 정규군 취급을 해주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게 국민방위군인지라 병력의 질도 좋지 않고 장교의 수준은 말 그대로 바닥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육군참모총장과 전쟁부 장관이 정치적 반발 및 병력 수급 수단의 상실을 우려해서 레슬리 맥네어의 요청을 거절하자 차선책으로 국민방위군의 장교의 질이라도 높이려고 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기존의 국민방위군 장교는 절대로 대령 이상으로 진급하면 안되며 사단급 이상의 국민방위군 부대는 정규군에서 정식 장교를 파견해서 지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당 대책은 대부분 성공해서 2명의 예외를 제외하면 국민방위군 사단은 정규군 육군 장교가 지휘하도록 교체되었으며 대부분의 국민방위군 장교와 장군들은 국내 임무나 비전투급 해외 임무를 담당하고 계급에 비해 낮은 직책을 부여받으며 주로 행정 및 훈련같은 임무에 종사했다. 만일 해외 임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전투 임무에 종사하고자 하는 국민방위군 장교가 있다면 계급 강등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레슬리 맥네어는 남북전쟁 시기처럼 군사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지역명사가 전선에 의용군을 끌고 나와서 각종 뻘짓을 벌이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3.3. 전투 부대

제2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여하기 직전에 육군성이 추산한 것에 따르면 미국 육군만 따져도 350개 사단을 창설 및 장비와 물자를 지급하고 훈련한 후 배치까지 진행해야 했다. 전간기때 10만명 수준으로 크게 줄어든 미국 육군이 감당가능한 크기가 아니며 인력 충원에도 문제가 발생할 정도로 대규모의 병력이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레슬리 맥네어는 앞서 언급한 4각 사단 편제를 3각 사단 편제로 변경한 것 외에도 각 부대의 차량을 늘리고 각종 기계를 도입함으로서 육군성의 차기 추산에서 200개에서 220개의 사단을 창설하면 되는 것으로 크게 줄여놓았다.

그 다음에 육군참모총장인 마셜이 독소전쟁의 개전 및 여러가지 나치 독일 국내에서 나오는 정보를 바탕으로 해서 최대 90개 사단을 창설 및 유지하면 미국 국내의 경제력에 지장이 올 정도로 민간인을 징집하지 않고서도 단독으로는 나치 독일과 정면승부가 어렵지만 영국군과 소련군과 협력하면 충분히 나치 독일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섞인 요청을 했다. 여기에 대응하여 레슬리 맥네어와 AGF는 새롭게 사단 인력 및 장비 매뉴얼을 만들어서 사단에 필요한 군인 숫자를 줄임으로서 1943년에 기존 방식으로는 73개 사단만 창설가능한 병력으로 89개 사단을 창설가능하도록 함으로서 마셜의 목표를 1945년에 달성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외에도 공수부대를 2개 사단이나 창설해서 성공적으로 운용 및 유지했다. 물론 레슬리 맥네어는 다양한 환경에 맞추어서 조정이 가능한 다용도 경보병사단을 더 선호했으나 공수부대 창립자들이 강력하게 주장하자 고집을 꺾은 후에 공수부대 창립 및 관련 장비와 물자 보급등을 성실하게 준비했다.

여기에 더해서 이탈리아 전선의 험준한 산악지대와 태평양 전쟁의 정글등에 대응하기 위해 경보병사단을 3개 창설했는데 그 중에서 제10경보병사단은 산악사단으로의 가치를 인정받아서 산악사단으로 이탈리아 전선에 참여해서 성공적으로 운용되었다. 나머지 2개 경보병사단은 최종훈련과정중에 규모가 너무 작아서 전투지속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은 후 신속하게 정규 보병사단으로 전환된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아주 약간의 실험적 요소 및 충돌이 있었으나 전반적으로는 미국 육군의 전쟁시 사단 조직과 재편성이 2차대전에서 승리하는 데 필요한 적절한 수의 부대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렇게 대규모의 병력을 부대로 조직하면서도 민간인의 징집과 차출을 최대한 억제하여 미국의 국력을 보존함으로서 농업과 산업 생산이 지속되고 원할한 병참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보장했다는 점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3.4. 유색인종 군인

2차대전 당시의 미국은 지독한 인종 차별백인 우월주의로 인해 미국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을 군사력으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전간기 말기에 미국 흑인의 숫자는 전체 미국의 인구중에서 10% - 11%를 차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병력으로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병력수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미국 육군성은 미국 흑인들에게 인구비례에 따라서 군대에 입대할 것을 요구했고 입대한 흑인은 훈련을 받은 후에 백인이 있는 일반 군부대에 들어가서 군복무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병력 비율은 흑인 1명대 백인 10.6명의 비율이었다. 그리고 흑인에게도 장교 임관의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레슬리 맥네어는 해당 조치를 반대하고 차선책을 제시한다. 레슬리 맥네어도 당시의 일반인처럼 어느 정도 흑백분리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해당 건은 조치에 영향이 없었다. 레슬리 맥네어가 우려하는 것은 장기간 백인 우월주의와 인종 차별이 있는 사회에서 성장한 백인 병사가 소수인 흑인 병사를 괴롭히거나 같은 장소에 있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 명백한데다가 미국 흑인은 가난해서 교육수준이 더 많이 떨어지므로 병사로서의 수준이 백인 병사보다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서 협동 전투가 어렵고 흑인 병사가 부대의 짐덩어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레슬리 맥네어는 실무적인 이유로 흑인 부대를 따로 만들어서 창설하고 훈련시키며 장교후보생학교(Officer Candidate School)를 졸업한 흑인 장교후보생들을 흑인 부대의 장교로 배치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흑인 부대는 후방이나 최전선 근방의 보급선이나 통신선을 수비하거나 유사시 예비병력으로 편성해서 최전선에 투입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레슬리 맥네어의 의견은 받아들여졌고 1943년까지 AGF는 거의 300개의 흑인부대를 창설했으며 1943년 6월까지 AGF가 관장하는 시설에서 훈련을 받은 미국 흑인은 약 17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전체 병력의 약 10.5%로 미국 전쟁성의 요구사항을 거의 충족했다. 그리고 단순히 후방부대만 만든 것이 아니라 제452 대공포병대대, 제555 공수보병대대, 제761 전차대대처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실전에 참여하거나 병력의 주요 구성원들이 6.25 전쟁에 참전하는 등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쓸만한 흑인 부대도 만들어냈다.

그 외에도 흑인을 제대로 된 병력으로 만들기 위해서 훈련기간이 연장되었으며 흑인 장교를 최대한 수급해서 중대급 이하의 현장 장교로 배치했고 백인은 고위 장교나 일부 현장 직책을 담당하게 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만일 흑인 장교가 모자란다면 해당 경우에 한해서 백인 장교들이 중대급이나 그 이하의 직책을 채웠으며 이런 조치를 통해 흑인 부대가 최대한 제대로 돌아가도록 노력했다.

레슬리 맥네어는 이런 조치를 통해서 미국 육군성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고 미국 흑인들에게서도 최대한 병력을 뽑아내면서도 당시 시대상의 한계를 반영해서 흑인 부대를 만들어냄으로서 불필요한 충돌과 비효율을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3.5. 포병

제2차 세계 대전의 미군 화포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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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373a3c> 제2차 세계 대전
미군화포
보병포 <colbgcolor=#fefefe,#191919>37mm M1916 보병포
곡사포 75mm M1 경곡사포, 105mm M2 곡사포, 105mm M3 경곡사포, 155mm M1918 곡사포, 155mm M1 곡사포, 8인치 M1/M2 곡사포, 240mm M1 곡사포
평사포 M1 4.5인치 평사포, 155mm M1918 평사포, 155mm M1/M2 평사포 'Long Tom', 8인치 M1 평사포
대전차포 37mm M3 대전차포, 57mm M1 대전차포, 75mm M1897/A1/A2/A3/A4 대전차포, 3인치 M5 대전차포, 90mm T8 대전차포, 76mm T124/T124E2 대전차포, 105mm T8 대전차포
전차포 37mm M5/M6, 75mm 전차포 M2–M6, 76mm M1 전차포, 3인치 M7, 90mm M1/M2/M3, 90mm 73구경장 T15/T15E1/T15E2, 105mm M4 곡사포, 105mm 전차포 T5, 120mm 전차포 T53, 155mm 전차포 T7
대공포 37mm M1 대공포, 1.1 인치 75 구경장 대공포 "시카고 피아노", 40mm M1 대공포, 3인치 M1918 대공포, 90mm M1/M2/M3 대공포, 120mm M1 대공포
박격포 M2, 리틀 데이비드
열차포 8인치 Mk.VI 열차포
다연장로켓포 T34 칼리오페 (M8 로켓)
함포 3인치 50구경장 함포, 5인치 38구경장 양용포, Mk.16 6인치 47구경장 함포, Mk.16 6인치 47구경장 양용포, Mk.17 6인치 47구경장 함포, Mk.14 8인치 55구경장 함포, Mk.15 8인치 55구경장 함포 Mk.16 8인치 55구경장 함포, Mk.7 12인치 50구경장 함포, Mk.8 12인치 50구경장 함포, Mk.10 14인치 45구경장 함포, Mk.11 14인치 50구경장 함포, Mk.5 16인치 45구경장 함포, Mk.6 16인치 45구경장 함포, Mk.2 16인치 50구경장 함포, Mark 7 16인치 50구경장 함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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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맥네어의 전문 분야이며 가장 특성에 맞는 부대였으므로 초급 장교시절부터 포병 개혁에 대해 심도있는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성과도 매우 높았다.

위의 틀에서 나오는 곡사포, 평사포, 대공포의 대부분은 레슬리 맥네어가 개발에 관여하거나 미국 해군의 함포나 외국의 화포를 빠르게 도입했으며 대량 생산배치 및 보급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2차대전의 미국 포병은 연대포병, 사단포병, 군단포병을 모두 충분하게 갖춘데다가 화포의 구경도 늘려서 동급 포병부대면 타국의 포병부대보다 화포의 수량과 질이 모두 높았다. 예를 들자면 75mm 구경은 타국에서는 사단포병에서 운영하지만 미국 포병은 산포보병포나 공수부대용 화포로 전환했고 연대포병부터 105mm 곡사포를 배치하고 사단포병부터는 155mm 곡사포도 같이 배치한다.

따라서 포병간에 포격전이 발생하면 어지간하면 미국 포병이 화포의 숫자와 질적 우위로 압도하며 병참까지 충분하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탄약을 소모하면서도 탄약 부족 증상에 빠지는 일이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추축국 중에서는 가장 좋은 수준인 나치 독일의 포병도 정면승부보다는 포격하고 즉시 철수하는 히트 앤드 런 방식을 자주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포병의 운용면에서도 완전한 개혁을 이루어냈다. 기존의 야전 포병 교리라는 것은 참호전 시절에도 부적절한 수준으로 제대로 된 관측도 없이 시간이 되면 고정 좌표에 포격하는 정시 포격과 목표를 정해진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포격하는 순환 포격같은 답없는 짓을 하고 있었는데 이걸 전방에서 포격을 관측하는 전방 포격 관측장교(forward observer (FO))를 도입해서 관측후 포격하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더 이상은 참호전이 벌어질 가능성을 낮게 본 후 전선에서 긴급화력지원을 요청할 때 신속하게 포병 화력을 지원할 수 있도록 포대 단위로 운영하던 포병을 포병 대대 단위로 운영하고 일선 부대에 화력지원을 제대로 요청할 수 있는 장교를 훈련시켜서 배치함으로서 포병 화력 지원속도를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보병용 지원화기에도 신경을 써서 60mm 박격포81mm 박격포를 대량 보급 및 병참을 지원하게 했고 4.2인치 박격포같은 대구경 박격포도 많은 양을 지급해서 실질적인 화력지원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포병용 탄약의 대량 제조 및 공급체제를 만들어냈고 VT신관같은 특수한 물건도 빠르게 육군 포병용으로 도입했다. 그러므로 포병 분야에 있어서는 레슬리 맥네어는 미국 포병의 전성기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3.6. 개발 관리

전간기 시절에 겨우 M4 셔먼 1대 만들 돈을 1년간 예산으로 지급하면서 전차를 개발하라고 빵셔틀 수준의 압박이나 받던 개발 부서에 갑자기 대량의 자금과 인원이 충원되자 말 그대로 폭주가 발생하면서 평소 해보고 싶었지만 시간과 예산이 없어서 못하던 것들을 모조리 실행하던 것이 당시의 미국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상황을 강력하게 압박한 후 전쟁에 필요하면서도 당장 양산이 가능한 물건을 개발하라고 교통정리를 한 것이 바로 레슬리 맥네어다. 그리고 태평양이나 대서양을 건너간 후에 무기나 장비를 사용해야 하므로 유지보수가 곤란해지므로 신뢰성을 최우선적으로 확보한 후 수송선과 항구의 작업 크레인 적재가능 중량등을 고려한 병참의 효율성도 고려할 필요가 높다고 지시한다.

그래서 바주카M4 셔먼 및 앞서 언급한 미국의 화포들이 신뢰성이 높고 장기간 전선에 있어도 대규모 유지보수의 필요성이 줄어들었으며 대량생산으로 많은 수량의 예비품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교체품을 투입하고 기존 물건은 본국이나 영국등으로 후송시켜서 수리하는 조치가 가능해졌다.

마지막으로 개발 부서쪽에서 문제가 터지면 신속한 추궁과 압박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했다. 미국 해군이 어뢰 스캔들에서 개발 부서와 관련된 장성 때문에 문제 해결에 상당한 시간과 고난을 겪은 것을 생각한다면 대단한 일이다.

4. 중간

성과와 부작용이 동시에 비슷한 규모로 존재하는 항목이다.

4.1. 개인 교체식 병력 보충

전투에서 병력을 손실하고 병력 보충을 요구하는 부대가 발생하는 것은 항상 존재하는 일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AGF의 수장인 레슬리 맥네어는 미국 본토에서 훈련을 마친 병력을 전투 부대의 보충원으로 개별적으로 보내는 시스템을 주장했다.

이론상으로는 기존 방식보다 나았다. 기존 방식은 손실이 발생한 일선 부대를 대체할 부대를 보낸 후 일선에서 물러난 부대를 재편성하며 대규모의 충원 및 장비보급을 하는 것인데 일선 부대를 대체할 예비 부대가 없는 경우가 많고 일선 부대를 전선에서 빼다가 틈새를 노리고 공격한 적 때문에 전선이 붕괴될 위험성도 적다. 그리고 부대 재편성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으며 레슬리 맥네어가 확립한 훈련 시스템에서 나오는 군사특기를 보유한 병력을 적재적소에 투입할 수 있어서 효율성도 좋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아무리 훈련을 잘 받았다고 해도 신병을 기존의 숙련병과 섞어놓으면 부대 전체의 사태 대응 능력이나 순발력이나 전투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며 신병이 숙련병과 화합이 잘 안되는 경우도 많고 숙련병이 신병을 가르칠 시간도 없는 상태에서 전투에 투입되므로 신병이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전사하면서 다시 보충병이 필요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전선의 급박한 상황 때문에 대규모의 병력 충원이 필요하면 기존의 체제 따위는 다 무시하고 일선의 장교들이 현장에서 근처의 일반 부대나 후방 부대에서 병력을 착출해서 투입하는 비정상적인 길을 택하는 것도 문제였다. 레슬리 맥네어가 만든 시스템인 전방 보충소에서 일선 장교들이 병력 보충을 요청하면 자격과 부대의 우선순위에 따라 전방 보충소에서 요청 부대에 병사들을 배치하는 식의 과정은 한가할 경우에만 작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레슬리 맥네어는 해당 문제에 대해서 심도있게 고찰했다. 일단 마구잡이로 병력을 일선 장교가 제멋대로 뽑아가는 경우를 막아야 했다. 이렇게 될 경우 주특기훈련을 받을 이유가 없다. 운전병을 알보병으로 투입해버리는 등의 비효율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특기훈련을 하지 않으면 알보병만 보내게 되는데 이러면 병력 공급 자체가 답이 없어지게 된다.

그래서 레슬리 맥네어는 보충병의 훈련 기간을 24주에서 13주로 줄여서 빠른 공급이 가능하게 할 것을 주장했고, 미국 전쟁부는 맥네어의 주장을 상당부분 받아들여서 보충병의 훈련 기간을 17주로 줄인 후 개인 교체식 병력 보충을 계속 채택한다.

여기에 더해서 보충병 공급을 빠르게 하기 위해서 레슬리 맥네어는 자신의 지휘 하에 분류 및 교체 부서를 설립하고 복무 적합성을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신체적, 심리적, 정신적 기준을 간소화하는 등 개선을 시도했다. 그리고 미국 내 ASF의 보충병 센터 관리 문제로 인해 AGF가 직접 메릴랜드주와 캘리포니아주에 각각 1개씩 총 2개의 보충병 센터를 만들고 운영했다. 그리고 보충병에 적합한 수준높은 훈련병과 사회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민간인을 AGF 보충병 훈련쪽으로 돌림으로서 전선에 쓸만한 보충병을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AGF로 병사들이 지원을 꺼리고 AAF나 ASF로 지원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자 AGF 직원 직속 사무실인 특수정보부(SIS)를 창설한 후 미국 육군 보병으로 지원하라는 홍보 행사를 개시했다. 1943년 10월 15일 전투보병휘장이 만들어진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그 외에도 정치인이나 재벌들이 미국 보병이 미국 본토를 떠나서 전선에 투입되기 전에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일일 군인 환영회(Soldier for a Day Initiative)도 개최했다. 심지어 성과보다는 욕설만 얻어먹었지만 1942년 11월 11일에 레슬리 맥네어가 블루 네트워크(Blue Network)를 통해 라디오 연설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슬리 맥네어가 전사하면서 더 이상의 개선노력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1944년 후반부터 1945년 초반까지 전선에서 지속적이거나 사실상 잠깐의 기간 외에는 계속 전투를 벌이는 부대의 수가 늘어나서 개인 교체식 병력 보충 시스템이 붕괴되었다. 덕분에 후방 부대의 병사들은 종종 임무에서 제외되어 최전선 전투 부대의 사상자가 비운 자리를 메우게 되었고, 보충병의 상당수와 부대의 훈련은 크게 단축된 후 사실상 신병보다 별로 나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투에 즉시 투입되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일부 부대는 전투능력을 완전상실할 정도로 손실이 심해졌다. 그나마 남은 인원들도 사기 저하, 피로, 질병에 시달리면서 실질적인 전투능력은 크게 저하되었다.

일단 개인 교체식 병력 보충은 레슬리 맥네어의 실패가 맞긴 하다. 하지만 대체제가 없고 전선에서 일선 장교들이 한 임기응변은 병력 충원만 해결했지 전체적으로 본다면 더 비효율적이었다. 애초에 대규모 손실을 적절하게 보충하는 것은 처음부터 답이 없는 문제다. 맥네어도 여러가지 개선책을 실시하기도 했고 약간의 성과도 있었지만 결국 전사하는 바람에 후속대책을 수립할 수 없었다는 비운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종합적인 평가에서는 답이 없는 문제에 대한 위대한 도전이었다 정도로 마무리되었고 일부 역사가를 제외한다면 개인 교체식 병력 보충에 대해서는 레슬리 맥네어에게 비판을 크게 가하지는 않는다.

5. 실책

업적에서도 언급했듯이 레슬리 맥네어는 공로가 큰 명장이자 훌륭한 후방사령관이다. 그러므로 전차전대전차전 및 관련 분야에서 실책을 저질렀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워낙 업적이 엄청나서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옥에도 티가 있다는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업적은 업적이고 실책은 실책이다. 미국 육군 지상군(AGF) 총사령관이라는 중책을 담당하며 공수, 기갑, 대전차, 대공포 부대 및 관련조직은 레슬리 맥네어가 혼자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조정이 가능했다. 그래서 해당 문제에 대해서 혼자 집중포화를 당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미국의 장성들도 기갑과 대전차 분야에 대해서 지식이나 사태 인식이 미흡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 따위는 레슬리 맥네어가 한방에 침묵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레슬리 맥네어의 책임이 매우 커진다.

솔직히 말해서 조지 S. 패튼 따위는 레슬리 맥네어가 눈빛만으로도 입을 닥치게 만들 수 있으며 레슬리 맥네어가 쓰라고 던져준 전차에 대해서 제대로 불평도 못하는 처지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도 레슬리 맥네어가 살아있을 때는 기갑이나 대전차 같이 레슬리 맥네어가 확보한 분야에 대해서 개입 따위는 생각도 못할 수준이었다. 육군참모총장인 조지 C. 마셜쯤 되어야 레슬리 맥네어에게 말이 먹히는데 일단 자신의 업무가 과중한 상태에서 레슬리 맥네어에게 AGF의 전권을 넘겨준 상황이므로 기갑이나 대전차 같은 세밀한 분야에 대해서는 관련 지식이 제로에 가깝다.

그래서 레슬리 맥네어가 전사한 후 관련 업무에 대해 알아보다가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M36 GMC의 긴급양산이나 미국제 셔먼 파이어플라이 도입이나 M26 퍼싱의 긴급 도입같은 각종 대책이 늦게나마 쏟아지게 된 것이다.

5.1. 원인

레슬리 맥네어의 경력과 업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실전 경험이 극히 적은데다가 그나마 경험의 대부분이 포병이나 병참에 관한 것이라서 최전선과는 연관이 먼 임무를 담당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병참, 보충, 인사처럼 후방의 업무나 포병처럼 최전선의 약간 후방에서 전투하는 분야에는 레슬리 맥네어가 최적의 효율성을 보이지만 최전선의 경험량이 극히 부족해서 최전선에서는 적을 압도하거나 최소한 저지시킬만한 중전차같은 강력한 도구나 유닛이 필요햐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효율성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임기응변에 대한 것을 일부러 무시하는 경향도 크다. 앞서 언급한 개인 교체식 병력 보충 항목도 이론상의 효율성을 너무 중시하고 문제가 터졌을 때 체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 아니라 고집을 부리면서 미봉책으로 일관한 것이 대표적이다. 포병이나 병참, 개발분야에서 말 그대로 대들보를 박살내는 수준으로 대규모 개혁을 한 것을 보면 차이점이 명확하다.

마지막으로 청각장애가 초급 장교 시절부터 조금씩 진행되었다는 점이 레슬리 맥네어의 소통 부재와 고집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초급 장교 시절부터 귀울림이 발생하여 신체 검사를 받고 전화 통화에 이상이 없으니 무방하다는 판정을 받은 상황이었으며 고위급 장교가 되었을때는 청각장애인 수준으로 질환이 심해져서 독순술을 사용해서 상대방의 입술 모양을 읽어서 몇몇 인물과 소통이 가능했고 대규모 회의나 만남행사 같은 곳에서 청각장애가 드러날까봐 참석하지 못하는 등의 불편함이 초래되었다. 그래서 1930년대 후반에 레슬리 맥네어는 청각장애로 인해 강제적으로 퇴역당할까봐 고심했고 마셜이 면제조치를 내려서 계속 현역복무가 가능했지만 제2차 세계 대전 기간동안 실전부대를 최전선에서 지휘하는 현장지휘권 대상에서는 제외되었다.

이런 점을 종합해본다면 분명 뛰어난 인물이지만 청각장애가 진전되면서 소수의 인물과만 대화가 가능해지고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리면서 서류만 중점적으로 파고들게 된 결과 경력의 말기에 들어오면 경력 초반인 1차대전 시기와는 달리 현장의 목소리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고집이 강해지며 이론상 효율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 레슬리 맥네어의 실책을 발생시킨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5.2. 효율적인 이론

M3 37mm 대전차포가 동급 대전차포 중에서는 성능이 잘 나오는 편이고 나중에 프랑스 침공에서 영국같은 우방국을 통해서 37mm 대전차포 계열로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그러면 프랑스제 야포인 1897년식 75mm 야포75mm 전차포 M2–M6 수준이면 충분하게 대응이 될 것이라고 대다수의 미군 장성들이 믿었다.

레슬리 맥네어의 의견도 위와 비슷했지만 그래도 만일에 대비해서 준비한 3인치 M5 대전차포의 관통력 판단의 기준이 타국에서는 비실전적이라고 사용하지도 않는 미국제 전차장갑 경도인 240BNH 장갑판을 상대로 90도 각도에서 정확하게 타격할 경우 750m 거리에서 M79 철갑탄을 사격시 표면경화장갑 기준으로 101mm를 관통하므로 대비책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상황을 기반으로 해서 나름대로 효율적인 기갑과 대전차 방면 대책이 나오게 된다.

일단 이 정도의 수준이라면 나치 독일군이 4호 전차 수준까지의 전차만 투입할 경우에는 충분히 승산을 노려볼 수 있다. 실제로 북아프리카 전역 초반에는 M3 리가 활약했고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는 M4 셔먼이 능력을 발휘했다.

여기에 더해서 레슬리 맥네어는 기갑부대가 제대로 대전차 역량을 갖춘 보병의 방어를 대전 초반기처럼 쉽게 돌파하거나 교전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이 견해에 따라 기갑사단의 규모를 감축하면서까지 보병사단에 전차대대를 배속하려고 했고, 이 판단은 독소전과 서부전선에서의 전반적인 과정을 관측했을때 옳은 결정이었다.

물론 나치 독일군도 8,8cm FlaK을 동원해서 장거리 저격급 사격을 개시하고 4호 전차도 7,5cm KwK 40을 장착해서 화력강화가 되었지만 전자는 견인포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고 후자는 장갑강화가 플랫폼의 한계상 더 이상은 어려워서 연합군 입장에서도 선제사격해서 명중시키면 충분히 대응이 가능했다. 하지만 나치 독일도 이미 대응을 시작했고 5호 전차 판터6호 전차 티거가 등장해버렸다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세부적인 이유도 있었다.

5.2.1. 당시 대전차 자주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맥네어 준장과 앤드루 데이비스 브루스 중령은 대전차 부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각 군종별로 상이한 요구가 나왔다는 것이다. 보병부대는 방어적 용도로, 기갑부대는 기동부대로, 포병은 중포로 운용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맥네어와 브루스는 나름대로의 교리 연구를 통해 대전차 부대는 "적대적 전차의 격멸"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교리를 세웠다. 그를 위해서 대전차 부대는 군단이나 군 사령부 직할의 독립 대대로 편성되어 사령관의 결단에 따라 적 전차부대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하여 대전차 자주포는 강력한 기동성을 갖춰야 했다. 위의 모의전 조작에서 보여지듯 맥네어도 처음에는 대전차 자주포 지지자였다. 그래서 나온 게 M3 하프트랙에 프랑스제 75mm 야포를 얹은 초기형 대전차 자주포인 M3 GMC와 M6 닷지 트럭에 M3 37mm 대전차포를 얹은 M6 파고였다. 이후 1942년 9월 본격적으로 M10 GMC가 양산되기 시작해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런데 미군의 졸전으로 유명한 카세린 협로 전투에서 제2군단장 로이드 프레덴달 소장은 위와 같은 대전차 자주포 운용 교리를 전혀 지키지 않고 대전차 자주포 대대들을 중대 단위로 쪼개어 분산하여 매복시켜 버렸다. 이에 노련한 독일군 지휘관들은 대전차 자주포의 사거리 밖에서 관측경으로 매복한 대전차 자주포들을 발견하면 포격 지원을 요청했고, 장갑이 빈약한 M3 하프트랙이나 장갑이 아예 없는 M6 닷지 트럭을 바탕으로 제작한 초기형 대전차 자주포들인 M3 GMCM6 파고로 무장한 대전차 자주포 대대들은 큰 피해를 입고 만다. 게다가 미국의 대전차 자주포로는 공격적으로 나서기도 무리였다. 회전포탑이 달려있어서, 독일의 비슷한 차량보다는 전술적 유연성이 좋았지만, 빈약한 장갑과 상부가 개방된 포탑은 사실상 매복작전 외에는 해당 차량을 운용하기 힘들게 하는 주 원인으로 작용했다. 독일의 구축전차의 경우 기동성을 포기한 대신 장갑이 두터운 편이어서 매복에 실패한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버틸 수가 있었다. 다만 이것도 3호 돌격포 이상의 물건 한정이고 마르더 시리즈 같은 물건은 걸리면 삭제당하는 것은 동일하다.

그 후 전투 평가를 통해 대전차 자주포의 한계를 느낀 것은 맥네어 뿐만이 아니라서, 이탈리아 전역의 제6군단장 존 P. 루카스 소장은 대전차 자주포는 공세적 병기로는 실패작이니 퇴출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는, 오마 브래들리도 이에 동의했으며, 조지 S. 패튼까지 대전차 자주포에 불만을 표한데다, 본래 전차는 전차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던 전차 신봉자 제이콥 데버스 장군[4]은 대전차 자주포를 전차와 견인식 대전차포 조합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견인식 대전차포의 재도입은 맥네어 혼자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미국식 대전차자주포 개념의 탄생 배경도 고려해봐야 한다. 대전 초기 폴란드와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군의 대규모 전차 집중 운용에 보병들은 전차에게 무력함만을 보여주며 전격전 신화의 희생양이 된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각국은 그에 대응하는 전략을 수립했으며, 미군은 집중된 전차 앞에서 보병은 무력하며, 기동화된 대전차병기로만 상대할 수 있다고 보고, 적 전차에게서 보병은 몸을 숨기고 보전하며 집중된 전차 전력의 돌파 시도를 기동화된 대전차부대의 집중 반격으로 맞서는 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뒤이어 동부전선이 열리고 소련군 보병부대는 전차부대에 무력히 당해 독일군의 포위섬멸에 몇번이고 재앙적인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대전차 소총, 대전차포, 대전차 장애물, 대전차지뢰, 대전차 수류탄 등 보병의 대전차 전투 역량은 날이 다르게 강화되었고, 독일군에게 전처럼 전차만으로 보병을 짓밟을 수 없다는 걸 깨닫게 하였으며, 그에 따라 독일군도 보전협동을 중시하여 대규모 전차 집중 운용보다 보병과 함께 분산 운용하도록 바뀌었고, 소련군 보병부대가 구축한 깊은 종심을 가진 겹겹의 대전차 방어선은 대전 초기와 같은 포위섬멸 시도를 번번히 저지했다. 이러한 전훈을 받아들인 미군은, 다시 보병의 적극적인 대전차 전투를 강조했고, 그를 뒷받침할 견인식 대전차포와 바주카, 총류탄 등의 보병 대전차화기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반면 대전차 자주포는 독일군의 전차집단을 상대하려 만들었으나 독일군이 전차집단을 안굴리게 되었으므로 존재 의의를 의심받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막대한 전비부담으로 인한 국방부의 압력을 수시로 받고 있던 맥네어로선 일선 야전 지휘관들부터 싫어하고 전차와 비교해 가격도 큰 차이 없는 대전차 자주포 배치를 줄이고 견인식 대전차포를 재도입하는게 어쩌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M10 울버린의 가격이 40,906달러인데 M4A4 셔먼의 가격은 46,467달러에 불과했으니 차라리 견인식 대전차포를 생산한 후 절약한 비용으로 전차를 더 생산하는 게 더 도움이 될 법했다.

5.2.2. 퍼싱의 신뢰성 문제와 셔먼의 수량 확보에 대한 노력

관련 동영상(13분 32초부터 시작)

M26 퍼싱은 고위층의 오판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결함으로 늦어졌다고 워게이밍 고증자문 니콜라스 모런이 TankFest Northwest 2015에서 강연한 내용이다.

퍼싱은 1945년 1월 전까지만 해도 결함 투성이에 전투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퍼싱의 프로토타입인 T26의 최초 시제차량은 노르망디 상륙으로부터 4개월 전에야 나왔다. 그 사이에 모든 테스트를 통과하고 신뢰성 있는 양산형 모델을 대량생산하는 건 누가 해도 무리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미군의 신뢰성에 대한 기준은 T-34(엔진)과 판터(변속기)를 절망적인 구동계 신뢰성에도 불구하고 양산한 독일, 소련보다 엄격했다. 하지만 미군은 대서양을 건너 병기를 실어날라야 했으므로 당연히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수리 부속도 배로 날라야 한다! 게다가 독일과 소련은 당장 피터지게 싸우는 중이니 현장에서 '일단 빨리 보내!' 라는 비명이 쏟아지는 상황이지만, 미군은 이제 피터지게 싸우러 가는 입장이다.

퍼싱의 조종계통 자체는 우수한 편이었지만 M4A3의 포드 GAA엔진을 개량한 포드 GAF 엔진의 출력이 500마력에 불과한 것이 문제였다. 판터와 비슷한 중량에 출력이 200마력 딸리는데 최고속도는 판터와 비슷하게 조정되었으니 당연히 엔진과 구동계통 전반에 무리가 컸다. 이 신뢰성 문제는 두고두고 발목을 잡아서 양산된지 한참 후인 한국전때에도 해결이 안되었으며 이에 미국은 M4A3E8 셔먼을 재등판시키고 퍼싱의 문제점을 개선한 M46 패튼을 전쟁중에 배치하여 퍼싱을 대체한다.

퍼싱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비난받는 미군 수뇌부는 실제론 퍼싱이 전투 합격 판정을 받자마자 셔먼의 생산 라인을 즉시 퍼싱의 생산 라인으로 전환해 짧은 기간에 대규모 양산을 시작했다. 미군이 정말로 퍼싱 무용론에 심취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미군은 아프리카에서 티거가 튀어나오기 전에도 76.2mm 주포를 탑재한 셔먼을 테스트할 만큼 강력한 주포와 관통력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90mm 주포를 탑재한 M36 잭슨이 일선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생각해보자. 미군은 90mm 주포를 장착한 전차 퍼싱을 서둘러 배치하고자 하였다. 퍼싱의 결함 문제에 발목을 잡혔을 뿐 맥네어를 비롯한 미군 수뇌부가 무능해서 배치를 늦춘게 아니다. 독일의 판터를 예로 들면, 결함을 무시하고 생산한 결과 쿠르스크 전투에서 엄청난 양의 비전투 손실이 일어났다.

다만 90mm 포 탑재에 관해서는 맥네어 장군을 필두로 한 AGF의 오판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기갑국은 셔먼(전차)에 90mm를 달아서 내놓으라고 요구했는데, 병기국은 76mm에 만족하면서 T25(전차)에 90mm를 탑재할지 말지(90mm가 필요한지)로 논쟁 하다가 90mm를 대전차자주포에 장착하여 생산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길어진 논쟁으로 1944년 4월부터 생산이 시작되어 76mm 셔먼과 마찬가지로 D-Day를 놓쳤고, 실전에 투입하니 90mm를 장착하였어도 대전차 자주포의 한계로 인해 전선에서는 90mm를 장착한 전차의 요구가 쇄도하게 된다. 결국 90mm를 장착할 역량이 충분했던 셔먼은 90mm 장착 전차의 전선수요가 발생한 다음에 다시 고려되었으나, 퍼싱의 양산준비 시간이나 90mm 셔먼의 양산준비 시간이나 비슷하고, 퍼싱의 양산에 방해될 수 있단 판단이 나와버려 포기해버렸다.

또한 레슬리 맥네어가 퍼싱 대신 셔먼을 더욱 생산하려고 했던 것은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셔먼의 손실량이 비록 막대했지만, 생산량은 그 이상으로 추축군에게 죽여도 죽여도 더 많은 수가 몰려나오는 공포를 느끼게 했으며, 전차의 손실량의 비해 전차병의 인명 손실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레슬리 맥네어에겐 막대한 보병 손실이 더욱 큰 문제였고, 그는 기갑사단을 감축하면서까지 보병사단에 독립전차대대를 배속시켜 적극적으로 보병 손실을 줄이고자 하였다. 미군은 유럽전선에서 7,000여대의 전차를 손실했지만 고작 1,581명이 전사했다. 반면 보병과는 757,712명이 투입되어 142,962명 전사하는 끔찍한 피해를 입은 것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유가 성립한다.

만약 퍼싱을 x대 생산하려 한다면, 해당 생산 라인의 전환 기간 동안 셔먼의 생산은 중단되었을 것이고, 단가 역시 셔먼에 비해 퍼싱이 높을 것은 뻔하며, 지금까지 셔먼 생산에 쌓아올린 숙련도를 전혀 활용하지 못해 생산성 역시 떨어질 것이다. 또한 퍼싱의 대규모 배치는 셔먼에 비해 떨어지는 연비만큼의 연료, 새로운 탄약, 퍼싱의 중량을 감당할 수 있는 구난전차 등의 장비, 완전히 새로운 수리용 부품의 추가적인 보급까지 뒷받침되어야 하는, 방구석 밀덕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만만한것이 절대 아니었다. 즉, 퍼싱의 생산을 포기하는 것으로 그 배 이상의 셔먼 수량을 확보해 보병을 보호할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5.3. 현실은 시궁창

전간기 시절에 미군의 기갑과 대전차 분야의 후진성은 매우 심각했다. M3 37mm 대전차포 수준이면 충분한 대전차 화력이 될 것이며 만일의 경우라도 프랑스제 야포인 1897년식 75mm 야포75mm 전차포 M2–M6 수준이면 충분하게 대응이 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이것도 상당히 발전한 것인데 프랑스 침공의 결과물을 영국같은 우방국에게서 전해들은 결과로 판단을 상향조정한 것이다.

전차포대전차포의 구경도 이렇게 인식이 낮은 수준인데 관통력에 대한 것도 답이 없었다. 3인치 M5 대전차포의 관통력 판단의 기준이 타국에서는 비실전적이라고 사용하지도 않는 미국제 전차장갑 경도인 240BNH 장갑판을 상대로 90도 각도에서 정확하게 타격하는 것이다. 타국에서는 이렇게 정타를 날리는 것은 실전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고 30도 경사의 경사장갑을 기준으로 관통력을 측정하며 실제로는 이것도 모자라서 영국은 6파운더의 관통력 측정을 위해서 노획한 6호 전차 티거를 사격장에 세워놓고 실제로 사격을 실시해서 실제 관통력을 측정했다.

관통력 측정 방법도 답이 없는데 관통력 판단 기준도 답이 없다. 3인치 M5 대전차포가 앞서 언급한 한심한 측정방법 결과 750m 거리에서 M79 철갑탄을 사격시 표면경화장갑 기준으로 101mm를 관통하는데 그걸 보고 100mm 장갑판은 750m에서 관통가능 같은 헛소리급 판정을 내린 것이다. 철갑탄은 관통 후에도 장갑 내부로 들어와서 포탄이 파열하고 파편을 많이 날려야 하기 때문에 장갑 두께보다 최소 20mm 이상의 관통력이 있어야 안정적인 관통이 가능하다. 만일 100mm 장갑판에 정타를 날릴경우 101mm 수준의 관통력은 관통불가나 관통중에 포탄이 장갑에 박힌 채 멈추거나 도탄되거나 할 확률이 매우 높다. 이렇게 두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당시의 미국 장성들의 빈약한 기갑과 대전차 관련 사항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리고 대전차고폭탄에 대해서는 철갑탄보다도 대책이 없는 인식을 유지했다. 철갑탄이야 장갑을 관통하면 큼직한 탄두가 내부로 들어와서 파편을 흩뿌리며 난동을 부리고 철갑유탄이면 포탄이 장갑 관통후에 폭발하면서 말 그대로 전차를 유폭시키는 데 반해 대전차고폭탄은 관통력이 충분하지 못하면 장갑에 작은 구멍 하나 뚫는 것이 끝이다.

실제로 6.25 전쟁에서 노획한 T-34-85 전차를 대상으로 60mm M9A1 바주카를 사격하는 실험을 할 때 최대한 90도 각도로 정타를 때리도록 후방에서 사격한 경우를 제외하면 전차보다 4.5m (15피트)나 높은 곳에서 사격하는 비실전적인 실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포탑은 90도 정타로 명중한 것이 아니면 포탄이 다 튕기며 90도 정타의 경우에도 포탑에 관통구멍만 뚫고 끝났고 차체 전면장갑은 아예 관통불가 판정이 났으며 차체 후부를 정타로 명중시키거나 보기륜 사이의 차체 측면 하단을 노려야 격파가 가능했는데 그나마 후방 공격은 변속기 파손 정도로 마무리되었으며 측면 하단도 보기륜이나 크리스티 현가장치에 명중하면 관통불가 상태가 된다는 참담한 결과가 도출되었다.#1 종합하자면 60mm M9A1 바주카로 T-34-85 전차를 격파하는 것은 정상적인 교전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래서 레슬리 맥네어의 계산은 모두 무너지게 된다.

이렇게 이상적인 이론과 달리 결과가 시궁창이 된 것은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5.3.1. 방어적 교리에 입각한 견인식 대전차포 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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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inch Gun Motor Carriage M10
파일:3-inch_Gun_M6.jpg
3인치 M5 대전차포

레슬리 맥네어는 대전차 자주포보다 견인식대전차포를 선호했기에 M10 GMC의 배치를 줄이고 3인치 M5 대전차포의 배치를 늘리려고 했다. 방어적 교리에 입각해서 전선에서 잠깐동안 적을 저지하는 사이에 포병과 폭격으로 처리를 하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온갖 문제가 발생했다. 일단 기초적인 군사 지식상 대전차포는 어딘가에 미리 방렬하여 방어선을 형성하거나 매복하고 기습하는 수비적인 무기체계인데 미군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격자였다. 애초에 방어적 교리 따위가 들어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나마 M10 GMC가 장비한 3인치 포[5]판터티거를 상대로 하기에는 상당히 부족했던 게 현실이니, 더 강력한 대전차포가 미군에 있다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M5 대전차포는 다름 아닌 M10이 장비한 3인치 포를 M2 105mm 견인곡사포 포가에 얹어 만든 물건이었다. 즉 다운그레이드인 물건. 독일군의 8,8cm FlaK이나 영국군의 17파운더에 맞먹는 물건을 원했던 일선 장병들에게 다운그레이드된 대전차병기를 건네준 것이다. 물론 17파운더도 초기형은 25파운더 야포의 포가를 이용했지만 그건 아직 포가가 개발되지 않아서 임시로 야포 포가와 결합한 것이며, 곧 전용포가가 개발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장 M5 대전차포는 1문당 견인차량과 그 운전병을 포함해서 10명 가까운 필수인원이 필요했다. M10 GMC가 5명의 승무원으로 운용되는 것과 비교하면 더 불편해진 셈이고, 이 때문에 일선부대는 M5 대전차포의 배치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플래툰 2011년 7월호와 8월호에 이 이야기가 언급되는데, 맥네어를 가리켜 "개념을 상실한 상관"이라며 마구 깠다. 게다가 M5는 원래 포가가 105mm 야포인 만큼 대전차포로서는 지나치게 자세가 높고 크며 무거워서 매복 및 위장도 힘들고, 유사시 접근하는 적에게 포신을 돌리기도 힘겨웠다.

여기에 대해서 소부대에 그렇게 강력한 화포를 주는 것은 운용하기가 힘들어서 부대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전선의 상황따위를 생각하지도 않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이미 나치 독일, 영국, 소련은 이미 37mm급 대전차포를 한번 갈아엎은 후에 지급하던 5cm PaK 38, 57mm 6파운더, 76mm ZiS-3 사단포의 성능한계에 경악하고 있었으며 7.5cm PaK 40, 76.2mm 17파운더, 100mm BS-3 야포를 빠르게 채용했다.

인력 운용이 불편하고 무겁고 크고 병참이 어렵고 하는 잡다한 이야기는 적 전차를 충분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전면장갑을 관통하고 격파할 수 있을 때 성립하는 이야기고 해당 현상이 해결되지 않으면 전선에서 투입가능한 모든 화포가 동원된다. 나치 독일은 나치 독일 공군이 운용하던 8,8cm FlaK도 전차를 잡는데 강제투입할 정도로 힘든 상황을 보냈고 독소전쟁 초기에 KV-1을 상대하기 위해서 군단급 평사포로 1개 군단에 6문 보유하면 많을 정도로 희귀한 10cm sK 18까지 대전차포로 전장에 투입할 정도로 유연한 사고를 했다. 소련도 마찬가지라서 122mm M-30 곡사포152mm ML-20 곡사포까지 대전차포로 투입했고 중(重)야포의 대전차 능력을 깨달은 소련이 IS-2ISU-152까지 등장시킨다. 영국도 긴급시에는 QF 3.7인치 대공포같은 저각도 직접 사격이 힘든 거대한 대공포까지 긴급동원하고 해당 대공포 기반의 32파운더까지 만드는데 미국만 한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대전차포의 화력은 상대하는 적군의 전차에 따라 결정된다. 이탈리아 왕국군의 전차인 M13/40이면 6파운더 수준의 화력도 넘치는 수준이지만 5호 전차 판터와 6호 전차 티거 및 그 이상의 전차를 상대하려면 3인치 M5 대전차포는 약해빠진 화력을 가진 덩치만 크고 무거운 쓰레기 그 자체다. 전차에도 1발 지급하기도 힘든 M93 경심철갑탄이 있어야 화력이 쓸만해지는데 그나마 견인식 대전차포에는 M93 경심철갑탄이 지급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서 3인치 M5 대전차포 같은 무용지물을 대량보급하느니 그걸 할 비용으로 90mm 대공포를 생산하고 철갑탄을 지급하는게 더 유용하며 대공화력도 챙기고 야포처럼 간접 사격과 곡사도 가능하다. 위력이 부족한 병기를 많이 지급해봤자 무쓸모하기 때문이다. 대량생산이니 뭐네 하는 이야기는 일단 병기가 적에게 이빨이 박히는 것을 확인한 후에 나오는 것이고 실제 나치 독일, 영국, 소련도 이런 원리를 따라서 크고 무겁고 비싼 대전차포를 일선에 배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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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mm M2 시험형 대전차포

게다가 이미 90mm 대공포의 견인식 대전차포 버전인 90mm M2 대전차포가 이미 프로토타입으로 완성된 상태라서 그걸 약간만 개량하거나 급하면 그대로 생산해서 3인치 M5 대전차포 대신 지급했다면 충분하게 레슬리 맥네어의 의도를 살리면서도 화력이 쓸만한 대전차포라도 지급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당대 미국의 기갑과 대전차 인식이 2류급 이하라는 것이 증명된다.

게다가 견인식 대전차포 자체는 이미 2차대전 초기부터 방어전에서나 기용하는 무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위력은 좋으나 무겁고 방열하는데 시간이 걸리며, 방어력은 0에 가깝기 때문에 적 전차가 보병과 같이 합동작전을 펼치면 추풍낙엽처럼 일방적으로 당하는 일이 많았던 것. 독일이나 소련이 견인식 대전차포도 많이 쓴 이유는 돈과 물자가 딸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대가는 현장에서 병사들의 시산혈해로 돌아왔다.

물론 소련군은 참호를 파서 대전차포만 노출시키고 대전차포 운용병을 엄폐시켜 안전하게 장전하고 사격하는 포진지를 건설하고 주변에 호위용 보병참호를 꾸미는 팍 프론트(Pak Front)전술로 사상자를 줄였다. 거기에 지원용으로 쏟아지는 스탈린의 오르간과 122mm, 152mm, 203mm 야포들은 덤이었다. 이건 나치 독일군도 비슷하게 실행했으므로 제대로 진지를 건축하고 매복한다면 그렇게까지 불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미군은 공격자다. 미군의 유럽전선이란 폭격만 미친듯이 한 다음 상륙해서 독일으로 무한전진!이었는데 이런 공격전에선 대전차 자주포도 유용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견인식 대전차포는 그야말로 무쓸모한 물건이었다. 대전차 자주포도 재빨리 대응해야 겨우 동수를 이루는게 대전차전인데, 견인중이던 대전차포를 견인차에서 끌어내고 방렬하여 전개하는건 촉박한 전투중엔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소모된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자면 적하고 눈 마주친 다음에 탄창에 탄환을 삽탄하고 장전한후 쏘라는 말이다. 그럼 이미 결과는 전멸 아니면 다른 병과가 적을 격퇴한 이후가 된다. 더군다나 독일 중전차들의 주요 전략은 정직한 전면전도 가끔 있었지만 보통은 미군이나 영연방군, 자유 프랑스군이나 자유 폴란드군 등의 연합군의 기갑중대/호송대 대열을 기습하여 탈탈 털고 항공대가 오기 전에 도주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경우에는 독일 중전차에 의해 대전차포와 조작요원이 통째로 그냥 갈려버린다.

사실 1940년 맥네어는 프랑스 침공의 전훈을 바탕으로 견인식 대전차포를 퇴출시켰다. 그런데 나중에 그는 튀니지에서 벌어진 메드닌 전투에서 6파운더 대전차포가 괄목할만한 전과를 올렸다는 영국군 보고서에 주목하여 견인식 대전차포의 재도입을 주장했다. 이에 일부 일선 지휘관들을 비롯한 반대파는 견인식이 공간(포외에 견인차량까지 포함하면 수송선내에서 차지하는 공간이 훨씬 커진다)을 더 많이 차지하고 트럭을 사용해야 하기에 보급을 위한 추가 트럭을 배치해야 하며, 방호력과 대응능력도 떨어지고, 필요인원도 훨씬 많아진다고 반대했지만, 맥네어 장군이 최상급자이었기에 버틸 수가 없었다.

이는 사막이라는 개방된 곳에서 6파운더를 막아낼 방호력이 없는 3, 4호 전차가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지형이 전차에게 불리한 상황에서의 활약이였다. 하지만 M5 견인식 대전차포가 활약할 유럽은 시가지와 보카주 지형 등이 많아 전차가 몸을 숨기기 좋고 상대도 5, 6호 전차로 훨씬 방호력이 좋았다. 물론 전차만 숨으란 법은 없으므로 M5도 매복공격을 가해보기는 했지만 아르덴 대공세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손해가 막심했고 그나마 격파한 전차도 4호 전차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미군은 어쩔 수 없이 견인식 대전차포를 배치해야 했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부터 아르덴 대공세에 이르기까지 미군 대전차포 부대는 무력화 되었다. 예를 들어 아르덴 대공세 때는 독일군의 공격을 한번만 받은 경우라도 대전차포 부대가 모든 견인식 대전차포를 방기 및 망실하여 그냥 보병부대로 전락해버린 경우까지 있었다. 그래도 이들은 운이 좋은 경우이고, 대전차 자주포를 장비한 부대의 몇 배나 되는 사상자를 내는 게 일상이었다. 참다 못한 지휘관들이 M5 대전차포를 야포로 취급해서 보병지원용으로 써먹을 정도였다

나중에 90mm 대전차포가 개발되긴 하지만, 대공포인 물건을 만능포화해서 배치한데다가 확실하게 연합군이 제공권을 잡는 바람에 대공포 부대가 할 일이 없어서 대전차전도 할 때 주로 사용한 경우며, 성능은 좋았지만 대전차포 부대가 주력으로 쓰기에는 무겁고 복잡해서 제대로 보급되지도 않았다.

5.3.2. M4 셔먼 만능주의

파일:M26_pershing_Thumbnail.jpg
M26 Pershing

레슬리 맥네어는 "우리 미군은 M4 셔먼 중형전차의 생산에 집중해야 하며, M26 퍼싱 같은 중전차는 필요없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는 AGF의 총사령관이라는 매우 높으신 분이었기에 그 주장을 실행할 권력을 갖고 있었다. 1943년 9월 13일에 M26 퍼싱 10대가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맥네어 때문에 퍼싱을 500대 생산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게 던져진 말이 가관이다.
"타이거는 별로 많지도 않을 것이고, 뭐 나머지 독일 전차들 따위는 셔먼으로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하다. 적군의 전차는 대전차 자주포가 상대하면 된다."

얼핏 보면 맞는 말 같아 보인다. 티거의 총 생산량은 셔먼에 비하면 처참한 수준이었고 동부전선에도 다수가 투입되었기에 미군이 상대해야 하는 물량은 그보다도 적었다. 4호와 3호 전차 등 다른 전차들도 셔먼의 상대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문제는, '나머지 독일전차들' 중에 5호 전차 판터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 기종은 4호 전차의 뒤를 이을 독일 국방군의 차기 주력으로 낙점된 더 크고 강력한 중형 전차였으며 나치 독일 기준으로 대량생산이 이루어졌기에 숫자도 많아서 초기형 셔먼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독일군의 중전차와 구축전차의 숫자도 의외로 많았다. 호랑이의 수도 미군의 예상보다 많은데다가 덤으로 그 호랑이를 능가하는 더 강력한 호랑이나 다른 '맹수'들을 만나버려서 재수 없는 몇몇 미군들은 4호 돌격전차, 야크트판터, 엘레판트같이 장갑이 만만치 않은 적을 상대해야 했고 심지어 슈투름티거같은 시가전용 전차나 자주포들을 만나서 무진장 고생하기도 했다. 슈투름티거든 브룸베어든 공통적으로 '포 한 번 쐈는데 셔먼 둘이 터져나갔다' 같은 무용담이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6]

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75mm 탑재형 M4 셔먼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전차들(판터, 티거, 티거 2, 슈투파, 슈투름티거)을 잡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 하다못해 레슬리 맥네어가 치하 같은 고물덩어리가 굴러다니는 태평양 방면의 지휘관이었더라면 종전까지 셔먼으로 밀고나갈 수 있었겠지만, 유럽방면에서 셔먼으로 밀고나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벌어졌고, 그 이후에 벌어진 벌지 대전투에서 연합군은 큰 손해를 안아야 했다.

여기서 항상 나오는 이야기가 M26 퍼싱을 도입하면 발생하는 막대한 비효율인데 그건 M26 퍼싱으로 전차의 주력을 교체할 때 나오는 이야기고 실제로는 중전차 운용법에 따라 소수의 M26 퍼싱을 해결사로 전선에 투입하면 그만이다. M26 퍼싱이 소량만 있더라도 기존의 M4 셔먼과 협력해서 나치 독일군의 중전차를 잠깐이라도 성공적으로 저지한다면 그 후에는 미군이 포격과 폭격으로 나치 독일군을 박살내기가 쉽게 되고 미군의 희생자도 별로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건 이미 레슬리 맥네어도 포병에서 입증해놓았다. M4 셔먼 중형전차 생산에만 집중한다는 논리를 포병에 적용하면 포병이 인력으로도 운용하기 편한 M2 105mm 곡사포를 대량양산하고 거포나 중포는 효율성과 병참을 위해 대양을 건너서 보내지 말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M114 155mm 곡사포도 엄청나게 보낸 것과 함께 M115 8인치 곡사포M59 155mm 평사포같은 군단급 거포중포도 서유럽 전선이나 태평양 전선에 모두 대량으로 보내서 현지에서 다수 운용했다. 거포나 중포는 가볍고 전차만 무거운 것이 아니며 포병은 저렇게 다양한 종류의 화포와 포탄과 부품을 바다를 건너서 운용가능한데 전차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소리는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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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4A3E2 "Jumbo Sherman"

그리고 점보 셔먼의 경우를 보면 임시조치라도 어느 정도 전장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된다. 애초에 땜빵용으로 방어력을 증강했기 때문에 차체를 유용하고 포도 기존과 동일한 75mm를 사용해서 254대를 만든 것이 점보 셔먼이었는데 실제로 걱정한 것과는 달리 전선에서 활동한 결과 기동력이나 험지 돌파력이 약간 떨어지는 대신 독일군의 강력한 화포를 방어할 이동식 방패로 충분히 사용이 가능했던 것이다. 수량이 부족한 이유는 어차피 땜빵이었고 M26 퍼싱이 등장하면 쓸모가 없어지니 딱 대타수준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셔먼 계열중에서 평가가 좋았고 전선에서 주포를 76mm로 교체하기도 했으며 전차의 기동성을 너무 중시하던 조지 S. 패튼도 지급을 요청했으나 받지 못해서 현지에서 일반 셔먼을 개조해서 투입할 정도였다고 한다. 임시변통으로 만든 파생형도 전선에서 돌아다니고, 그것도 모자라서 현지개수형도 전선에서 돌아다니는 판국에 소수의 M26 퍼싱을 미국의 보급이 감당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M26 퍼싱의 완성도 문제도 일단 전선에서 시제품을 굴려봐야 빠른 해결책이 나온다. 시험장에서 정해진 규정대로 움직이면 의외로 문제를 잡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2차대전이라는 대규모 총력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한가롭게 미국 본토에서 문제점을 모두 파악해서 전부 고친 후에 완벽한 물건을 전선에 보낸다 같은 방식은 통용되기 어렵다. 실제로 M6 전차가 그런 식으로 미국 본토에서만 놀다가 문제점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양산되지 못하고 취소된다. 영국이고 소련이고 나치 독일이고 간에 그런 식으로 전선의 요구나 심대한 피해를 무시하고 무기와 장비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일단 프로토타입이라도 전선에 보내놓고 실전 경험을 통한 피드백을 받아서 빠른 개선을 함과 동시에 현지에서는 임시개조를 통해서 일단 문제를 해결한 후 무기와 장비를 굴리는 길을 선택한다.

일례로 나치 독일이 5호 전차 판터의 극초기형을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한 결과 정지한 상태에서도 혼자서 불이 나는 등 대규모 비전투 손실이 발생했으나 판터를 투입한 것 자체는 전혀 비판받지 않았고 독일의 장군부터 말단 졸병까지 판터의 완성도가 매우 부족하다고 할 뿐 일단 주면 감사하게 받고 필사적으로 전선에서 어떻게든 굴려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동력기관 문제로 인해 장거리 주행같은 것이 어렵다면 6호 전차 티거처럼 철도로 수송하고 전투현장에서 단거리 운용만 하며 지원부대를 붙여주는 등의 노력을 추가하면 된다. 나치 독일도 가능했는데 미국이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

여기에 더해서 중전차가 공습등에 취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전성기 그 자체였다. 중형전차로 중전차를 잡는다는 것은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맨앳암즈같은 중보병으로만 잡겠다는 것과 같이 전장에서 중전차를 저지하는 것만 해도 막대한 희생을 가져온다. 그래서 나치 독일이 티거 계열로 설명되는 중전차를 운영하고 소련도 KV-1이나 IS-2, IS-3을 운영했고 영국도 A22 처칠같은 중전차급 중(重)보병전차를 운영하는 상황에서 미국만 중형전차로 때운다는 발상은 당시 기준으로 시대착오적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중전차가 쇠퇴하고 중형전차 강화형으로 주력 전차가 나오며 레슬리 맥네어의 M4 셔먼의 집중은 주력 전차의 여명기라고 표현할 수 있고 시대를 앞섰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당대 목적을 충족하지 못하는 미래개념은 결국 쓸모가 없다. 나치의 비밀 무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참신한 발상과 적용된 기술이 미래에 영향을 준 것은 같으나 결국 무기 자체로는 나치 독일의 패전을 막지 못했다면 쓸모가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전차가 없는 상태에서 중형전차의 손실이 많아진 결과가 끔찍하다. 미군은 유럽전선에서 7,000여대의 전차를 손실했지만 고작 1,581명이 전사했다. 반면 보병과는 757,712명이 투입되어 142,962명 전사했는데 데이터만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전차 승무원의 피해는 매우 적은데 보병의 피해가 매우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레슬리 맥네어의 생각과는 달리 보병과 같이 배치된 중형전차인 M4 셔먼이 나치 독일 중전차의 공격에서 보병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M26 퍼싱 중전차 1대나 몇 대만 전선에 있더라도 M4 셔먼과 협동해서 나치 독일군의 공격에 대응이 가능하므로 전투상황이 가벼운 습격과 방어 완료 및 지원화력의 대규모 보복 수준에서 끝날 문제가 전선이 돌파당하고 보병이 도륙나는 상황에서 M4 셔먼은 여러 대의 전차가 견제용으로 배치된 나치 독일군의 중전차 1대나 몇대를 견제하는 것도 어려워서 희생이 막대한 가운데 보병을 돕지 못하고 발목이 묶이니까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M4 셔먼의 견제도 사실상 졸렬하게 진행될 수 밖에 없다. 일단 숫자의 우위를 달성해야 하므로 전차를 집결하는 과정에서 아군 보병을 버려야 하며 반포위나 우회를 통해서 진형을 갖추고 대응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형상 우회가 어렵거나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많고 나치 독일군이 견제용으로 보내놓은 1대에서 소수의 중전차들도 가만히 있지 않으므로 특히 정면에서 견제작업을 하는 M4 셔먼의 손해가 막대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우회하던 전차들도 도랑에 빠지거나 우회길에 배치된 나치 독일군 보병의 라케텐판처뷕세판처파우스트를 상대해야 하므로 역시 손해가 발생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서 지원으로 온 M10 GMC도 76.2mm 주포의 화력 부족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격파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90mm 주포를 갖춘 M36 GMC가 올 때까지 M4 셔먼이 다시 견제작전에 돌입해야 한다. M4 셔먼의 손실량이 매우 많은 것이 이런 문제 때문이다.

그리고 전차가 약간의 손상을 입더라도 기동불능이 되는 순간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전차병이 모두 탈출해야 하며 M4 셔먼의 특성상 당대 전차에 비해서 해치가 빠르게 열리므로 탈출이 쉽다는 장점이 있어서 유사시 전차 승무원들이 빠르게 탈출이 가능하므로 전차 손실량이 막대한 데 비해 희생자가 적게 나온 것이다.

물론 전략적으로는 나중에 동원하는 포병과 폭격으로 적을 갈아버리면 되니 별 문제가 없다. 위에서 예로 든 참패인 카세린 협곡 전투에서도 전차를 앞세운 독일군의 역공을 압도적인 포병화력으로 갈아버렸으며 2차대전기 전차를 잡은 1위가 야포, 2위가 전차, 3위가 항공폭격이다.

하지만 이렇게 일이 돌아가는 동안 벌어지는 희생이 너무 막대한 것이 문제다. 보병 희생이 너무 커서 개인 교체식 병력 보충 시스템이 붕괴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보병은 희생자가 많아서 병력의 숙련도가 올라가지 않고 전차 승무원은 제대로 된 전차전을 치루는 것이 아니라 숫적 우위를 바탕으로 해서 견제만 하게 되므로 전투 경험이 잘 쌓이지 않고 쌓일만 하면 나치 독일군의 중전차의 공격이나 맞고 희생자가 발생한다. 따라서 병력의 숙련도가 향상되지 않으니 보병이건 전차 승무원이건 나치 독일의 전차를 구분하지도 않고 모두 티거라고 부르는 개막장 사태가 반복되는 것이 바로 이런 일 때문이다.

결국 소수의 중전차만 투입해도 상당한 수준으로 기존의 전투상황이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고 만일 M26 퍼싱이 폐급이라고 해도 레슬리 맥네어가 욕을 먹을 일은 위에 언급한 판터를 보더라도 사실상 없을 것인데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서 M26 퍼싱 도입이나 M4 셔먼의 90mm 주포 장착건을 모두 막았으니 레슬리 맥네어가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다.

5.3.3. 모의전 조작

애초에 레슬리 맥네어가 점점 본인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전간기 말기부터였다. 이 과정에서 조작질하는 것은 기본으로 하는 행위도 저질렀다.

일단 초기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전차 자주포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대전차부대 vs 전차부대의 대결을 통해 대전차자주포가 전차보다 우수한 무기임을 증명했다. 헌데 조작경기. 맥네어가 지지하는 청군은 사실상 한등급 높은 편제의 제병협동군으로, 항공기와 전차와 포병까지 있을건 다 있었다. 전차부대는 오직 전차뿐이었다.

그의 조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청군 보급차량에 무적 판정을 내렸다. 덕분에 청군은 무적 밥차로 정찰을 아주 쉽고 편하게 했을 뿐 아니라 덤으로 무적 밥차를 방패로 써서 적군 방어선을 몰아쳤다.

더 웃긴건 이렇게 조작으로 떡칠해놨음에도 청군의 주요 성과는 매복에 기인한 것이다. 조작을 했는데도 조종을 해야 대전차포는 전차를 이길 수 있었다.[7] 그야말로 일본군도상연습(워게임)과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해서 대전차 자주포를 억지로 최고라고 해놓았으면서 나중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보다 견인식 대전차포가 더 낫다고 생각을 바꿔 버린다.

해당 연습건은 무능한 장교를 추려낸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작용했으나 이건 부수적인 결과에 불과하다. 레슬리 맥네어가 점점 하급자나 타인의 말이나 항의를 받지 않고 스스로가 설정한 기준에 맞추어서 결과를 뒤집는 것이 문제였다.

앞서서 몇번을 이야기한 효율성 문제가 대표적이다. 효율성은 물론 중요한 것이며 대규모의 무기 생산 및 보급과 지원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소련군의 경우를 보더라도 '포병은 전장의 신이다'로 대표되는 널리 퍼진 이미지와는 달리 소련군 사단포병 화력은 상당히 부실했다. 이는 전쟁 초반 소련군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이 과정에서 소련 포병의 인적, 물적 피해 또한 극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족한 포병 전력을 그나마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 사단포병을 감축하는 대신 군단포병으로 배속하였다. 숙련된 장교가 부족하여 주요 참전국중 유일하게 TOT 포격이 불가능했으며 정찰, 연락 자산이 매우 부실하여 공세시에 적재적소에 화력을 지원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공격 전에 미리 포격 스케쥴을 수립하고 현장에서 필요한 화력은 76.2mm 사단포를 포병이 직접 끌고다니며 자급하도록 하였다. 이는 독일군이 진형을 변경하였거나 예상 외의 요소로 작전 스케줄이 틀어지면 전체 작전이 틀어지게 되며 직접 76.2mm 포를 끌고다니던 포병의 사상자가 보병 못지않게 발생하게 되었다.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전략적 승리를 달성하여도 도리어 큰 사상자를 내던 주요 원인은, 항공, 포병 등 지원세력의 부실함이었다.

당장 독일군이 산업력도 자원도 인력도 부족하지 않았지만 중구난방한 생산체계로 만성적인 장비부족에 시달리며 노획품까지 닥닥 긁어모아 정식 명칭까지 붙여가면서 대전 내내 운용했으며, 소련군의 경우 기존 보병부대의 대전차 전력 부족의 중요성을 통감하여 대폭 증강한 대전 후기에도 소련군 보병사단의 대전차포 편제수량이 미군 보병연대 대전차포 편제수량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레슬리 맥네어가 효율성을 극도로 중시한 것도 이유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미국인이면서도 미국의 저력을 너무 무시했다. 참전 초기인 1942년의 미국과 참전 중기인 1943년의 미국과 참전 후반부에 접어드는 1944년의 미국은 국력이나 생산력 측면에서 완전히 다른 나라라고 해도 무방하다. 레슬리 맥네어는 1942년 시점의 돈없고 가난하며 물자가 부족한 미국을 대상으로 계획을 작성했으나 해당 계획은 이미 1943년에는 대폭적으로 수정해야 했고 1944년에 이르면 물자와 생산력은 충분한데 인력이 부족한 것이 미국이 되었으므로 비효율성을 감수하고서라도 전쟁의 빠른 승리와 미국 병력 보호를 위해 생각을 전환해야 하는데 고집을 부려서 산통이 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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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mm Gun Motor Carriage M36

실제로도 76mm M1 전차포 항목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레슬리 맥네어가 전사한 후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비롯한 미군 수뇌부들이 M4 셔먼이 터져나가는 전선의 비참한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미국 병기국이 주장하는 탁상공론 수준의 이야기의 진실을 깨달은 후 M26 퍼싱의 개발속도 증강 및 빠른 등장, M4 셔먼에 90mm 주포를 장착, M4 셔먼에 M26 퍼싱의 포탑을 올리기, M10 GMC를 빠르게 M36 GMC로 개조, 미국제 셔먼 파이어플라이 도입등 실행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 정신을 아직 못차린 장성도 있었으나 벌지 전투에서 나치 독일군의 전차 맛을 톡톡히 본 후에는 아이젠하워의 생각에 찬동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서 실제 노획 전차를 목표로 사격하는 실전적인 성능 테스트도 빠르게 진행한다. 1944년 5월 23일에 소련군이 노획해서 보내준 5호 전차 판터에 대한 사격시험인 이시그니 테스트(Isigny test)에서 미국제 6파운더로 영국제 분리철갑탄(APDS)를 장전해서 사격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는 정상적으로 사용가능(normally available) 정도로 매우 미묘한 판정을 했지만 같은 실험에서 사용한 M116 75mm 경야포가 사용하는 75mm 구경의 M66 대전차고폭탄(HEAT)는 대단한(special) 성능이라고 극찬급의 평가를 한 것이다.예시

그리고 3인치 M5 대전차포를 그나마 쓸만하게 만들어주는 M93 경심철갑탄도 T4라는 실험용 명칭을 단 상태로 최대한 빨리 양산에 돌입한다. 이렇게 서두른 결과 1945년 3월까지 약 18,000발 수준의 매우 적은 양이라도 M93 경심철갑탄을 공급해서 전차당 1발이라도 지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대응을 본다면 레슬리 맥네어가 살아있을 때 얼마나 자신의 분야에 대한 비밀엄수를 유지하고 다른 장성들이 개입을 못하게 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기갑과 대전차 분야에서도 개발부터 생산, 보급, 배치까지 모두 레슬리 맥네어의 관할하에 있으므로 심지어 아이젠하워조차 3인치 M5 대전차포의 90도 각도에서 정타를 때리는 방식같은 답없고 탁상공론 수준의 관통력 실험결과를 진짜로 실전에 통하는 것으로 믿고 전략과 전술을 짰다가 레슬리 맥네어가 죽은 후에나 관련 정보와 내막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하며 진실을 깨닫고 긴급대처를 한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다.

따라서 포병등 다른 분야에는 레슬리 맥네어의 생각이 먹혀들어갔고 성과도 좋았으나 본질적으로 근접전의 성격과 직접 사격 및 전장의 탱커 유닛을 담당할 강력한 성능의 중전차가 필요한 기갑, 대전차 분야에서는 시대에 뒤쳐지면서 실책을 범하게 된다. 비록 저렴한 견인식 대전차포를 대량으로 보급해 전선의 대전차 병기 수요를 충당했으며 셔먼의 생산량을 최대한 확보해 보병 손실을 최대한 줄이고자 한 의도가 있었지만 전쟁은 결과가 우선인지라 해당 분야에 대한 평가를 반전시킬 수는 없다.

6. 평가

레슬리 맥네어는 미육군 지상군 구성군 사령관으로서 미육군의 보병사단을 비롯한 기본 조직구조를 구성하고, 총사령부 직할 독립전차대대, 대전차자주포대대, 전투공병대대, 독립포병대대를 비롯한 지원부대 Pool의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서 소규모의 3류 군대에 불과했던 미군의(대전 발발 시점에서 루마니아군이 20만 이상인데, 미군은 10만 수준이었다.) 재조직을 부족한 실전경험 하에서도 이뤄낸 2차대전 기준으로 비견할 만한 대상이 없는 조직가라고 할 수 있다.

레슬리 맥네어가 주도한 미군의 조직 및 편제개편은 실전경험이 풍부했던 독일군이나 소련군을 오히려 능가하는 이상적인 제병협동 조직으로서의 보병사단 및 이를 지원할 수 있는 독립 대대를 구축했다. 그리고 레슬리 맥네어는 1차 대전 수준의 미 보병사단을 연대전투단에 기반한 제병협동조직의 구성과 증강이 가능한 보병사단으로 개편했고, 강력한 미군 포병을 가능하게한 군단포병 및 야전포병단 편제를 도입했다. 또한 표준화되고 자립가능한 대대단위 총사령부 직할 지원부대 Pool을 구축했다.

이런 점에서 레슬리 맥네어는 명장이자 훌륭한 후방사령관이다. 실책이 있지만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며 옥에도 티가 있다는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공적이 아무리 높더라도 실책을 가릴수는 없다. 사실 공적이 워낙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실책이 작아보이는 것이지 기갑과 대전차 분야에서 레슬리 맥네어의 실책은 크다. 그리고 다른 장성들과는 달리 AGF의 수장으로서 해당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해당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자업자득으로 죽었다는 점에서 인생의 비극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만일 중전차에 대해서 좀 더 유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중형전차만 존재해서 최전선을 돌파하지 못하는 지상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도시나 시설에 전략폭격을 하는 임무용이라 명중률이 크게 떨어지는 중폭격기대가 무리하게 근접항공지원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레슬리 맥네어도 무사히 전선시찰을 마치고 귀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지 C. 마셜 수준으로 공적이 높고 레슬리 맥네어와 친밀하며 기갑과 대전차 방면의 지식이 풍부한 미국 육군의 장성이 존재했다면 레슬리 맥네어를 잘 설득해서 한계점을 보완하고 그야말로 완전한 영웅인 레슬리 맥네어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7. 매체에서의 등장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 주인공인 유진 킴의 동료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미래 지식을 활용해서 엄청나게 노력한 끝에 1차 대전부터 전차의 아버지가 된 유진 킴이 워낙 탄탄한 입지를 마련해놓았는지라 레슬리 맥네어는 기갑 쪽은 포기하고 포병과 편제 및 병참 쪽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첫 만남부터 비즈니스적으로 만난 후에 예의범절은 차리지만 업무 관계로 서로 만나서 자주박격포는 포병 관할이니 내놓으라는 식의 관할권 싸움을 벌이는 등 티격태격하며 심심치 않게 서로간에 엿을 먹이는 관계가 된다.

그러나 서로를 유능한 인재라고 평가하고 중요한 이야기는 귀담아 듣기 때문에 유진 킴이 지속적으로 전장에서는 숫자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많다. 라던지 앞으로 발생할 전투에서 좁은 진격로에 나치 독일의 중전차가 매복하면 어떻게 할거냐? 식으로 필사적으로 레슬리 맥네어의 중전차 무용론을 분쇄하여 결국 M26 퍼싱이 원래 역사보다 매우 빠른 1940년에 개발된 후 일찍 전선에 투입된다.

그리고 대전차 관련 분야에 대해서는 유진 킴의 의견을 의외로 선선히 받아들이는 것이 레슬리 맥네어이므로 그냥 처음부터 90mm 대공포 기반 전차포를 탑재한 M10 잭슨이라는 것을 출시해서 대전차 자주포 무용론도 잠재워버린다. 오히려 아직까지 17파운더를 개발하지 못한 영국이 M10 잭슨을 부러워할 정도다. 그 외에도 전차 개발에 방해가 될까봐 유진이 말하지 못한 바주카를 전쟁 긴급 소요 제기로 개발부서에 압박을 줘서 순식간에 제조 및 공급을 완료할 정도로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위에 언급한 실제 역사에서 문제가 될만한 부분을 모조리 유진 킴이 선제조치와 적극적인 설득으로 해결해놓았으므로 레슬리 맥네어는 결점이 없는 매우 유능한 후방사령관 겸 명장으로 역사에 남았으며 아이젠하워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도 역임했다. 이런 와중에도 깐깐함 + 퇴역을 앞둔 대장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이미 대원수가 된 유진 킴을 사무실에서 압박하며 뭔가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것 같은데 그러면 부하들을 굴릴 필요 없이 합참의장인 유진 킴에게 직접 압박을 가해서 정보를 빼내고 아이디어를 완성해서 보고서를 만들면 효율적이라고 선언한 후 유진 킴과 같이 야근에 돌입하는 물귀신 정신을 보여주었다.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대장계급의 연령제한까지 성실하게 근무한 다음 정상적으로 퇴역한 후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고 유진 킴이 국무장관까지 올라가는 것을 본 후에 노환으로 별세한다. 원래 역사보다 6년을 더 살았으나 1938년에 2차대전이 터지고 1942년에 끝나는 등 역사가 실제보다 빠르게 압축적으로 전개되는 바람에 전후를 나름대로 즐기며 미국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것을 본 후 세상을 뜬다. 레슬리 맥네어의 사망 소식을 들은 유진 킴은 가든 파티를 하던 동료들과 같이 전용 비행기를 타고 긴급조문을 가서 위대한 동료인 레슬리 맥네어의 죽음을 애도했다.

8. 외부 링크



[1] 펠햄 D. 글래스포드(Pelham D. Glassford)가 레슬리 맥네어와 같은 시기인 1918년 10월에 전시 준장으로 진급했는데, 웨스트포인트 동기지만 글래스포드의 생일이 1883년 8월 8일이라서 맥네어의 생일인 1883년 5월 25일보다 2개월 정도 차이가 나므로 간발의 차이로 글래스포드가 당시 최연소 육군 장군의 타이틀을 따냈다.[2] 괜히 독일군이 전차 잡아보겠다고 폭격기에 대전차포 달고 생쇼를 한게 아니다.[3] 전시 사망한 중장은 이들 외에도 프랭크 맥스웰 앤드루스 육군 항공대 중장, 밀러드 하먼 육군 항공대 중장이 있다. 이 둘은 각각 아이슬란드와 태평양에서 항공기 사고로 사망했는데, 공교롭게도 사고 당시 탑승기가 모두 B-24 리버레이터였다. 아군 오사를 제외한 순수한 적 포화에 의한 전사자로는 버크너 중장이 미군의 유일한 중장 전사자이자 최고위 전사자이며, 유럽전선으로 한정하면 제3기갑사단장 모리스 로즈 소장이 최고위 전사자이다. 101사단 부사단장 돈 프랫 준장 또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 중 전사한 기록이 있다. 연합군 전체로 범위를 넓히면 말레이 해전에서 전사한 영국 해군의 톰 필립스 제독이다.[4] 제6집단군사령관으로, 서열이 그 패튼보다 높고 브래들리와 동격인 유럽전선의 최고위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정작 데버스 병과는 기갑이 아니라 포병이었다. 레슬리가 중위로 와이오밍에 근무하던시절 데버스가 그의 부하였다.[5] 1918년에 나온 구식 대전차포였기 때문에 성능에 비해 무겁고 컸다. 때문에 이 포를 경량화하여 전차 장착형을 만들어 셔먼과 헬캣에 장착한다.[6] 380mm 고폭탄은 직격시 현대의 3세대 전차도 고철로 만들기 충분하지만 이 녀석의 거지 같은 장전 속도와 형편없는 탄도와 사거리, 느려 터진 기동성과 막장 구동부 신뢰도를 생각하면 일반적인 전차 입장에서 야전이라면 큰 위협은 아니었을 것이다.[7] 대전차 자주포는 수비에 적합한 차량으로 단순히 전차와 1:1로 붙는다면 이길 수 있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