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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20:03:21

전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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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전격전(電擊戰)
중국어: 闪电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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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영어[1], 체코어, 덴마크어, 프랑스어, 크로아티아어, 네덜란드어, 노르웨이어, 루마니아어, 슬로바키아어: Blitzkrieg
러시아어, 세르비아어, 카자흐어: Блицкриг
폴란드어: Wojna błyskawiczna

1. 개요2. 과거의 통설3. 재평가
3.1. 전격전이라는 가공의 이론이 등장하게 된 배경
4. 외부 동영상5. 매체에서 등장6. 기타

1. 개요

1990년대 이전까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도입하였다고 알려진 작전술 이론.[2]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개전과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군이 보여준 전략으로서 공식적으로 전격전이라 호칭된 것은 아니었고 번개(Blitz)와 같이 빠른 진격을 통한 전쟁(Krieg)이라는 뜻의 독일어 Blitzkrieg가 그대로 하나의 고유명사화 되어 전격전이란 용어가 되었다.[3] 군사 전문가가 아닌 기자들의 미사여구가 군사용어화(?)되어 역이식된 것. 번개처럼 빠른 기동으로 종심 타격을 하여 적을 마비시킨다 하여 '마비전'이라는 표현도 나왔지만 널리 쓰이지 못했다. 하지만 리델 하트가 내세운 마비전의 아종임은 분명하다.

선형 대형으로 이루어진 방어 전선에 효율적이다. 선형 대형이란 것이 말 그대로 적은 예비대만 후방에 두고 나머지는 죄다 방어선에 배치하는 것인데, 올리버 스미스 장군이 "병력을 여기저기에 배치하는 지휘관은 무능한 지휘관이다." 라고 할 정도로 선형 대형은 완벽 탐지 및 방어에 고집이 있는 모리스 가믈랭 같은 똥별장군들이 주로 써먹었고, 전격전은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한 곳에 전력을 집중하여 빠르게 전선을 돌파해 적의 빈약한 예비대가 손도 못 쓰게 하고, 방어선에 배치되어 있던 적 주력 병력들이 황급히 후방으로 복귀하는 사이 적 후방을 개판으로 만드는 전술 혹은 작전술이다.

군사학 이론으로는 가공의 이론임이 밝혀지긴 했으나, 단어 자체는 남아서 여러 매체에서 빠른 기동전으로 적을 돌파하는 경우에 전격전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

2. 과거의 통설


파일:attachment/blitzkrieg_map.jpg

이 전술의 개요는 첫 번째로 강력한 공군의 지원을 받는 제1선 돌파부대(기갑)가 빠른 속도로 적 방어선의 취약지점에 돌파구를 형성하여 후방으로 진출하고, 두 번째로 돌격부대(기계화)가 돌파구를 확장하며 적 방어선을 절단하여 적을 고립시키고, 세 번째로 뒤따르는 후속부대(보병)가 조각조각 분리되어 고립된 적 부대를 섬멸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 사이에 선두부대는 최대한 (적의) 후방으로 깊숙히 진출하는 것이 목표일 뿐, 적과의 직접적인 교전과 섬멸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말하자면 속도가 핵심인 기동전.

더 쉽게 설명하자면 전차부대, 경보병부대 같은 기동력이 좋은 부대를 내세워 적의 영역에 일단 깊게 찌르고 들어간 뒤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적의 입장에서는 소규모라고 할지라도 자기 영역 내부에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적 부대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심리적인 위협을 받으며, 사기가 위축될 뿐 아니라 평시에 미리 준비해놓았던 각종 보급선, 연락선들이 산발적으로 끊어지는 상황에 놓인다. 거기다 전격전은 1차적인 정예부대의 침투 이후 후속부대의 신속한 호응이 뒤따르므로 여기저기서 고립되어 있는 주둔부대가 각개격파될 위험이 크다. 전격전은 역사적으로 전쟁을 거는 쪽이 시도했는데, 전쟁선포하여 쳐들어가는 행위 자체가 간첩 등을 동원하여 한참 전부터 적의 부대위치, 규모 등을 파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4] 따라서 통상적으로 공격자가 방어자의 전력배치를 반대의 경우보다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전격전이 시작되어 방어국의 부대가 일단 한번 이 전술에 말려들게 된다면 망치와 모루 전술에 철저하게 박살이 나는 것.

근본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18년 독일 제국군춘계 공세에서 사용했던 후티어 전술과 다르지 않으며 차이점이라면 포병 대신 공군[5], 보병 대신 전차가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개념을 처음으로 창안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군사학자인 존 퓰러와 전쟁사학자 바실 리델 하트였다. 그러나 기동전의 개념은 당시의 연합군으로서는 쉽사리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대신 기동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독일의 하인츠 구데리안이 이 개념을 연구하고 적용 발전시킴으로써 독일 전차부대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1939~40년간 이 전술이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채 30여년이 흐른 시점에 당시와는 정반대로 엄청난 속도전이 전개되었던 덕분이었다. 폴란드군, 프랑스군, 영국군은 1차대전 당시의 진격속도를 기준으로 독일군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있었으나 독일군의 진격속도는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고 통신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탓에 적의 현재위치나 진격방향을 판단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이미 적 병력이 자신들을 지나 저멀리 달려나가는 것을 목격한 병사들은 적의 후방에 고립되었다는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다.

파일:attachment/Ju87.jpg

그러나 전격전에도 단점은 있어서 정확한 공군지원이 없이는 선두부대의 진격이 어렵고, 적 주력과의 교전을 회피하고 기동하기 때문에 적의 병력피해는 사실 크지 않아서 적이 패닉에 빠지지 않고 재정비하여 반격할 시 오히려 선두부대가 적들의 한가운데에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6]

처음에 이탈리아 왕국의 삽질로 인해 개전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2차세계대전 하면 회자되는 인기 있는 독일의 용감하고 저돌적인 장군인 에르빈 롬멜도 빠른 기동과 샘솟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넓은 지역을 점령했지만 보급선이 길어졌는데 여기에 더해 이전에 시칠리아 섬과 튀니지 가운데 위치한 해상 보급로의 핵심 거점인 몰타 섬부터 먼저 끝장을 내지 않았던 전략적 판단 실수가 발목을 잡아 독일-이탈리아 추축군의 보급 한계를 노린 영국군횃불 작전으로 인해 옆에서 치고들어오는 미군성동격서에 말려들어 결과적으로 북아프리카 전선의 패배에 일조했는데 이는 히틀러가 몰타 섬 점령에 투입할 팔쉬름예거 부대들을 이집트 공격에 투입하자는 롬멜의 편을 들어준 것도 일익을 담당했지만 이를 만회하기 위해 북아프리카로 가야만 할 물자와 병력은 독소전의 발발로 인해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 또한 컸다.

3. 재평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에서 설명된 소위 전격전이라 불리는 교리는 실존한 적이 없으며, 그 세부 사항은 실제 독일군의 전투 수행 방식에 대해 서방의 마비전과 기동전, 그리고 소련군전술적, 작전술적 개념들을 이것저것 뒤섞어 투영하여 만들어진 잡탕의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 에리히 폰 만슈타인하인츠 구데리안의 도움을 받아 만든 작전을 프란츠 할더 장군이 꽤나 도용해서 현실에 옮겼더니 나온 결과가 놀라워서 "마치 번개 같군! 이 작전을 전격전이라고 부릅시다!" 라는 경위로 전격전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사실 전격전이라는 용어는 주로 서부전역에서 독일군이 보여준 포위중심기동전을 뜻하는데, 서부전역을 일컫는 다른 말인 지헬슈니트(낫질)도 처칠이 서부전역의 결과를 보고 '흠 낫질한 것 같은 작전이다'라고 한 말에서 생겨난 것이다. 즉 처음부터 딱히 명확한 개념이었던 적이 없었다. 전격전이란 단어가 최초로 공식적으로 쓰인 것도 영국의 일간지에서였으며, 당시 독일에는 이를 지칭하는 단어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독일군은 결코 적 주력과의 교전을 회피하지 않았다. 독일군의 목표는 언제나 적 주력의 물리적 섬멸(annihilation)이었으며, 이는 19세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졌을 만큼 그 유래가 깊다. 2차 대전기 독일 국방군의 기본 교범이었던 1933년판 부대지휘론(Truppenführung)에서도 적 전력의 끊임없는 섬멸을 강조했다. 이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 독일군은 적을 심리적으로 마비시키기 보다는 물리적으로 섬멸하는 것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일례로 1933년판 부대지휘론에서는 기갑부대의 주요 과업으로 "전선이 참호전등의 진지전으로 고착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적의 포병과 예비대를 섬멸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기갑부대는 적과의 교전을 회피한다'는 개념과는 다르다. 실제로 독일군이 수행한 수많은 포위섬멸전에서 기계화부대는 돌파-돌진 이후 대규모 희생이 따라오는 전투를 마다하지 않고 섬멸에 직접 참여했다.

만약 프랑스가 드골의 생각처럼 기동방어종심방어 + 공세적 방어를 취했다면 독일군의 전격전이라 불리는 기동전은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애석하게도 프랑스는 마지노 선을 중심으로 한 고정방어 + 수세적 방어 전략을 취했다. 프랑스군의 전차들은 분명 1930년대 독일 전차들과 비교하면 월등히 우수했고(그러나 무전기 미탑재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이 산재해있었다), 더군다나 방어선에 차려진 요새들 역시 독일군이 뚫기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단단했던 것은 매한가지였으며, 벨기에 지방은 에반-에마엘 요새의 존재로 인해 뚫리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에반-에마엘 요새는 공수부대에게 너무나 빠르게 무너졌고[7] 전차의 기동전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었던 기동방어나 공세적 방어 역시 전혀 실시되지 않으면서 프랑스는 패배하고 만다.

파일:attachment/1024780021.jpg
프랑스 B1 전차 승무원이 두 손을 들고 항복하고 있다.

소위 전격전의 사례로 나열된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러시아 침공 중 심리적 마비가 일어난 것은 오로지 단 한번, 프랑스 전역에서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전역에서의 심리적 마비는 독일군이 연합군 주력을 물리적으로 포위섬멸하기 위해 기동부대를 연합군 후방으로 돌진시키면서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 부수적 효과였을 뿐이다. 이것은 1941년 초기 러시아 전역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키예프, 뱌지마, 비알리스토크, 브랸스크, 스몰렌스크, 민스크 등에서 일어난 수차례에 걸친 대규모 포위섬멸전(Kesselschlacht)에서 소련군은 심리적으로 마비, 붕괴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으며, 독일군 역시 이들을 회피하지 않고 격전 끝에 수십만명의 포로를 잡으며 물리적으로 소련군을 섬멸하면서 진격했다.

현재 알려진 전격전의 개념에 가까운 작전이 벌어진 사례 중 하나가 초창기 소련 침공인데, 기습이라는 걸 감안해도 바르바로사 작전의 손실비는 독일 1 : 소련 20이었으니 단기 전술적 성과는 독일이 확실히 앞서긴 했다. 그러나 막상 여기서는 결과적으로 독일군이 예상한 전략적 달성에 실패하고 아프리카, 프랑스 등에서의 승리를 통해 축적된 군사적 우위를 잃어버렸다. 당시 독일군의 전술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은 이 문서를 참조.

파일:attachment/Himmler_visting_a_POW_camp_in_Minsk.jpg
민스크에서 잡힌 포로를 살펴보는 힘러.

영국의 J.F.C. 풀러나 바실 리델 하트의 저작이 독일군의 전격전 교리 성립에 크게 기여했다는 통설 역시 완전한 허구이다. 풀러의 Plan 1919가 독일과 소련에서 주목을 받기는 했으나 그것은 전적으로 대규모 기갑부대 운용을 실제 야전훈련과 부대편성으로 현실성있게 구현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은 것뿐이지 그 사상이 무슨 대단히 혁신적이고 선구적이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 정도의 이론은 세계 각국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리델 하트의 저작은 아예 평균 이상의 주목을 받았다는 사료적 근거가 거의 없다.[8][9] 그리고 소련은 1차 대전 이후 적백내전을 겪으면서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주도로 독자적인 교리를 거의 완성해나가고 있었으며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동안 잠시 부정되었지만 결국 그것을 다시 부활시켰다. 이를 종심작전[10]이라고 하며, 독소전쟁 후반기에 소련이 써먹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 때문에 종심작전이론을 "소련식 전격전 이론"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소련이 독일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전격전 전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던 이론이다.

소위 전격전은 사실 따지고 보면 기계화부대와 항공기라는 신무기를, 그 뿌리가 프로이센 왕국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전적 독일식 기동전에 성공적으로 접합한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도 설명되었듯 독일군의 '섬멸'과 '포위', 그리고 '기동'에 대한 집착에서도 아주 잘 드러난다. 사방이 적국에 둘러싸인 프로이센, 그리고 독일의 지정학적 특성상 독일군은 언제나 자군보다 강력한 적과의 양면전쟁, 혹은 다면전쟁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세 가지 원칙을 집요하게 발전시켰다. '기동'과 '포위', '섬멸'이다. 말하자면, 신속하게 '기동'해서 우선 하나의 적을 '포위', '섬멸'하여 전열에서 완전히 탈락시키고, 다시 신속하게 '기동'해서 또 하나의 적을 '포위', '섬멸'하는 방식으로 1:2의 절대열세를 두 차례의 대등한 1:1 전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까지 거슬러 올라가는[11] 유구한 역사의 독일식 기동전은 1차대전기에 화력 팩터가 기동 팩터에 대해서 결정적 우위를 잡으면서[12] 잠시 사라졌으나, 기술적 발전으로 다시 기동 팩터가 우위를 잡자 1940년대에 화려하게 부활한다. 이런 수백 년에 걸친 역사의 독일식 기동전을 누군가가 가르쳐 줬다거나 기발한 새로운 전술이라거나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결국 전격전은 2차대전 독일군의 전쟁 수행방식이 아니라 영미 군사학계의 가공의 개념일 뿐이었다. 결국 현재 전격전이 2차대전 때 존재했던 전쟁수행방식이라는 통설은 깨졌고 애초의 민간인 기자의 의도대로(?) 화끈한 기동으로 전과를 확대한다 정도의 일반 명사로만 남아있다.
(…) 전격전은 어떤 정책도, 경제적 수단도 아니었으며, 군사 교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 전격전은 하나의 결과, 또는 아마도 그 결과의 사후 기술에 지나지 않았다. 전격전은 전술적이거나 작전적인 하나의 체계가 결코 아니었다.
-전격전이란 무엇인가? Hughes, Daniel J. 1996. Blitzkrieg. (ed.) Franklin D. Margiotta. Brassey's Encyclopedia of Land Forces and Warfare. Dulles : Brassey's Inc., 1996, pp. 155-162.
전 세계 국가들이 독일군의 새로운 전쟁수행방법(전격전)을 연구하고 있으나, 그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전쟁이란 항상 임기응변으로 수행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전역 종결 직후 독일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 장군, 일조각, 카알 하인츠 프리저 저, 진중근 역, 2007, <전격전의 전설> 29쪽에서 재인용.
관심이 있다면 칼 하인츠 프리저가 쓴 전격전의 전설이라는 책을 참고하면 좋다.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 국내에서 전격전이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논지들은 이 책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물론 해당 책에도 일부 사실적 오류가 존재하며, 다른 의견도 엄연히 있다는 점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최종적으로 요약한다면 독일군의 기갑 전력이 적들의 기본 방어선을 격파하거나 우회하여 후방을 격파하고 움직이는 기동, 그리고 그 돌파된 부분으로 보병들이 밀어닥치는 마무리 방식 자체는 실제로 역사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독일군이 의도한 것도, 계획한 것도 아니었으며, 애초에 계획이나 교리라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부터 의문을 표해야 할 상식적인 움직임일 뿐이었다. 즉 전격전이라는 것은 독일군이 자랑하는 하인츠 구데리안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정립한 전차 교리가 만든 일종의 현상일 뿐, 실제로 계획된 것도,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으며, 독일군이 갖고 있는 교리는 기갑 전력이 선행하여 적들의 방어선을 비집고 들어가 구멍을 낸다는 것뿐이었다. 구멍이 생겼으니 거기로 보병이 진입하는 것은 계획하거나 작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벌어질 수밖에 없는 현상이었고, 일단 안으로 비집고 들어간 기갑부대는 놀고먹을 수 없으니 그냥 돌아다니며 보이는 대로 교전을 벌인 것 뿐이었다. 즉, 전격전은 기갑의 기동 전략이 낳은 하나의 현상일 뿐, 실제로 존재했던 교리도 아니었고 독일군이 이런 걸 고려한 것도 아니었다.

위 책과는 상관없지만, 보통 생각하는 전격전 비슷한 것을 가장 잘 구사했던 건 다름 아닌 당시 미군이다. "선두부대는 최대한 후방으로 진출하는 것이 목표일 뿐, 적과의 교전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말하자면 속도가 핵심인 기동전"이라는 위의 언급은 오히려 당시 미군 기갑부대 교리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고, 이는 44년 이후 서부전선에서 조지 S. 패튼의 진격에서 전형적으로 전개된다. 패튼이 어찌나 이 교리에 충실했던지 교전을 회피하다 못해 적을 그냥 방기하는 게 아니냐는 평가까지 있었을 정도. 오히려 역으로 이 때문에 그 뒤를 따르는 연합군 보병부대의 뒤치다꺼리는 뒤치다꺼리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 치열한 소탕전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13] 지구 반대편의 태평양 전역에서의 미 해군 역시 중요한 섬만 점령하고, 나머지 섬들은 보급선만 틀어막고 방치해버리는 양상으로 해역을 점령해나갔다. 이쪽에서는 보급선을 틀어막은만큼 일본군은 굶어 죽거나 현지에서 둔전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14]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이런 전략을 펼칠 수 있는 건 전역을 빠르고 넓게 기동하면서도 탄탄한 보급선을 유지해주는 능력 덕분이었고, 그럴 형편이 되지 않는 나라들은 힘든 일이었다.

21세기에 들어서는 전격전이 실존하지 않았다는 것이 통설로, 가장 유명한 출처는 아래 언급되는 칼 하인츠 프리저의 전격전의 신화이며 2000년대 이후 대부분의 군사학자가 전격전이 허구라는 것을 인정한다. 예를 들면 "Despite the wealth of information about Blitzkrieg, much of our common knowledge pertaining to the 1940 campaign and to the concept of a Blitzkrieg is pure myth." 출처는 미국 육군대학원 산하 전략연구원(SSI) MYTH OF THE BLITZKRIEG p57-p58 저자: Robert A. Doughty 그 밖에 "Contrary to the beliefs of the Allied military establishment of the day, however, blitzkrieg was not a brand-new way of waging war. In fact, although it is a German word, the term itself was created by an English newspaper sometime in 1939." 출처 영국 BBC 홈페이지# 작성자는 킹스 칼리지 런던 대학 국방학 교수 Robert Foley.

3.1. 전격전이라는 가공의 이론이 등장하게 된 배경

전격전이라는 말이 작전술상의 전격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어 자체는 1920년대부터 존재하기는 했다. 폴란드 전역이 있은 1939년 9월 타임지가 전격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널리 알려진 단어는 아니었다. 1939년 이전에는 전격전이라는 말은 독일군부내에서는 거의 사용된 적이 없고, 하인츠 구데리안은 이 단어를 연합군이 만들어낸 단어라고 말했다.

전격전이라는 말이 알려지게 된 이유는 프랑스 전역 때문이다. 총력전이 등장한 19세기 이후 철도를 통해 병력과 물자를 전선에 보내는 속도가 그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라지면서, '국가의 군사력 = 국력(국가의 경제력, 기술력, 인구등)'이라는 것은 군사학계의 상식이 되었다. 2차대전도 프랑스 전역을 제외하면 이 원칙은 거의 들어맞았다.

그런데 2차대전 당시 프랑스의 국력이 독일보다 아래였던 것은 사실이나 6주만에 항복할만큼 국력이 형편없는 국가는 아니었다. 게다가 프랑스 전역에서 독일은 프랑스와 1:1로 싸운 것이 아니라 영국 파병군(BEF), 벨기에군, 네덜란드군과도 싸웠다. 1차대전 당시 5년간 그 잘 싸우던 프랑스가 어째서 2차대전 때는 겨우 6주만에 항복했는가? 1차대전 당시 프랑스-독일의 국력 차이와 2차대전 당시 프랑스-독일 국력차이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는데 어째서 프랑스는 1차대전때는 5년간 치열하게 싸워서 승리할 수 있었고, 2차대전때는 겨우 6주만에 항복이라는 결과가 나왔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전역은 '군사력=국력'이라는 원칙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것이 20세기 군사학계의 최대 미스터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프랑스가 6주만에 항복한게 현실이니 군사학자들로서는 뭔가 분석을 해서 답을 내려야 했다. 그래서 주목한 것이 마침 기자들 사이에서나 쓰이던 말인 전격전이다. 즉, '전격전이라는 새롭고 놀라운 작전술을 도입한 독일군에게 1차대전식 참호전 교리에 집착한 구태의연한 프랑스군 수뇌부는 철저하게 농락당했고 그 결과 프랑스가 항복했다'고 설명하는 것이 전격전이라는 이론이 등장하게 된 원인이다. 영미권 학자들이 완전히 허구에서 만들어낸 것은 아니고 기존에 존재하던 단어, 독일군의 프로파간다, 구데리안의 증언 등등을 짜깁기 해서 만들어낸 이론이다. 그 학자들이 만들어낸 허구적인 전격전의 구체적 내용이 이 문서 2번 문단의 내용이다. 어쨌든 이것은 꽤나 그럴듯하게 들리기에 50년간 군사학계의 통설이었다.

그런데 1995년 독일 연방군 육군 대령인 칼 하인츠 프리저가 전격전의 전설(Blitzkrieg-Legende)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이 통설은 산산히 깨지고 만다.[15] 이 책은 6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전격전이라는 개념이 실제 독일군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프랑스 전역의 승리는 몇가지 우연적인 요소가 겹쳐서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학계에서 통설이란 그 분야의 최고전문가들인 학자들이 대부분 인정하는 견해이므로 현대에 책 한권으로 기존 학계의 통설이 완전히 뒤집히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나 기존의 군사학자들은 전격전의 허구를 주장하는 이 책에 어떤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격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가공의 개념이라는 것이 현재의 통설이 된 것이다. 전격전은 프랑스 전역을 설명하기 위해 알려지게 된 개념이므로 '전격전의 전설' 역시 책 분량의 90%쯤을 프랑스 전역을 설명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이후에 다른 군사학자들도 연구해서 역시 전격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러 방면에서 증명되었다.

4. 외부 동영상

5. 매체에서 등장

6. 기타


[1] 'Lightning War'이라고도 한다.[2] 다만 현대에는 실재 여부가 부정되고 있다. 독일군이 만든 이론이 아니라 영미 군사학계가 만들어낸 가공의 이론이라는 것이 정설이다.[3] 이탈리아 기자가 처음 썼다는 출처도 있다. 베네룩스 3국 전선과 프랑스 전역을 순식간에 쓸어버린 독일군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 기동방법을 묘사하기 위해 썼다고 한다(출처 - 제2차 세계 대전, 플래닛미디어).[4] 전쟁론 참고. 서로 국력, 군사력이 비슷한 두 개의 나라가 있고 산발적인 국지전 없이 바로 일방적인 선전포고후 전면전이 발발한다고 가정한다면 전쟁개시 시점을 기준으로 공격자는 방어자보다 항상 보급, 정보면에서 유리하다.[5] 포병으로는 기갑선봉대의 기동속도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공군이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6] 이렇게 되면 공격자 입장에서는 단순히 전선을 돌파한 것에서 끝나게 되는데 전선을 돌파한 것 자체만으로는 아무 성과가 없으며 거기서 끝나게 되면 오히려 위험해진다. 돌출된 위치로 삼면의 적에게 스스로 둘러싸여주는 꼴이기 때문.[7] 여기에는 에반-에마엘 요새를 설계한 회사들 중 독일 회사가 있었던 것도 한몫했다. 이로 인해 요새의 설계도와 내부구조가 전부 독일측에게 넘어가 버렸고, 이 귀중한 정보를 바탕으로 독일군 공수부대는 에반-에마엘 요새와 비슷한 구조물에서 여러차례 모의훈련을 한 후 공격했기에 독일군은 손쉽게 요새를 장악할 수 있었다.[8] 사실 나무위키의 전격전 문서와 해당 인물 문서에서 헛소리꾼 정도로 평가 절하되고 있지만 많은 군사 전문가나 군인들 사이에서 군사 이론가로의 리델 하트의 지위는 확고하다. 물론 당대에도 매우 유명했다. 전격전의 전설 책 발매 이후 거품 드립과 함께 반작용으로 까이고 있긴 하지만.[9] 상술했듯 기동전에 전차를 적용시키는건 아무나 했지만, 그걸 이론에서 현실로 이끈건 분명 그와 그의 저작이 가지는 큰 공이다.[10] 번역에 따라 '종심전투이론', '종심전투교리'라고도 한다. 당장 위키에서만 봐도 각 문서에 따라 세가지 용어가 혼재되어서 사용되고 있다.[11] 그러나 현재의 전격전 항목에서도 전격전 자체가 하나의 허구 또는 가공의 개념으로 까이는 것처럼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쟁수행 방식에 있어서도 논란이 있다. 20세기 초반까지 독일 군사학계에선 프리드리히 대왕이 "섬멸"에 집착하여 기동전을 구사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이때만 해도 프리드리히 대왕이 섬멸이 아니라 '소모전'을 추구했다는 주장이 나오면 비군인 아마추어의 주장이라 씹혔지만 현재에 와서는 그 평가가 뒤집어지고 있다. 애초에 전쟁수행 방식을 하나로 평가하여 비결을 알아내려는 것은 일종의 신화에 가깝다.[12] 1차대전 중기까지는 철조망기관총으로 보호되는 적군 방어선을 돌파할 기동수단이 전무했다. 포병의 발달로 고전적 기동전의 핵심인 기병은 무력화되었으나, 이를 대체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고착화된 참호전과 무제한 소모전으로 흐른 것이다. 한때 독가스가 이런 교착 상태를 타개할 수단으로 각광 받았으나 기술적 불안정과 상대방도 독가스 뿌려버리면 된다는 점 때문에 현대전의 끔찍한 악몽과 같은 모습만 남겼지 실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이 상황을 타개한 것은 전쟁 말기 등장한 현대판 기병인 전차와 항공기이다.[13] 그래서 2차 세계 대전 후기 서부전선 기록을 읽어보면 분명 큰 작전이나 전투는 하나같이 다 미군이 이기는데, 소대급이나 중대급의 소규모 소탕전 전투에서는 미군이 고립된 독일군에게 괴멸당했다는 기록도 자주 발견된다.[14] 이론상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해군이 나서서 보급선을 뚫어줘야 하나,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은 미 해군에게 신나게 털리고 있던 터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 육해군 대립도 심각했기에 해군이 육군을 돕는 상황 자체가 잘 안 일어났다.[15] 정확히 말하면 통설이 뒤집힌건 독일어로 된 이 책이 영어로 번역된 2000년대 초반 이후이다.[16] 다른 지상유닛은 적 영토에 진입하면 남은 이동력과 상관없이 무조건 멈춰야 한다.[17] "대형 (돌격용) 충차 36대가 있다. 당랑(사마귀)처럼 (용맹한) 무사 3명을 태우고, (적진을) 종횡으로 공격하여, 강한 적을 물리칠 수가 있다. (이를) 치차기구, 일명 전차(電車)라고 하며, 병법에서 전격(電擊)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적의 진지를 무너트리고, 보병과 기병을 격파한다."(大扶胥衝車三十六乘, 螳螂武士三人共載, 可以擊縱橫, 敗强敵. 輕車騎寇, 一名電車, 兵法謂之電擊. 陷堅陣, 敗步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