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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22:09:38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

A-A선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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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khangelsk-Astrakhan line/A-A line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A-A 선
파일:AAline.png
출처: https://www.reddit.com/r/MapPorn/comments/9mxmkk/operation_barbarossa_the_axis_invasion_of_the/
계획된 A-A선과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획득하기로 계획된 영토. 붉은 선은 실제로 독일 국방군이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차지한 영토이다.

1. 개요2. 상세3. 세력의 확장, 그러나 이어지는 반격4. 결과5. 평가6. 함께 보기

1. 개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A-A선)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실행된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독일 국방군의 최종 목표로 설정되었던 가상의 선이자 목표였다. 두 A는 각각 아르한겔스크(Arkhangelsk)와 아스트라한(Astrakhan)을 의미한다.

2. 상세

1941년, 독일 국방군은 소련을 침공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당시 소련 침공 작전의 이름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정해졌으며, 자연스럽게 어느 도시를, 그리고 얼마만큼의 영토 정복을 목표로 삼아야는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그러한 논의 끝에 탄생한 것이 바로 A-A선이다. A-A선은 육군 포병대장 에리히 마르크스가 처음 고안해낸 것으로,[1][2] 그는 소련의 반격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북쪽으로는 백해의 항구 도시인 아르한겔스크, 남쪽에서는 카스피 해의 항구 도시인 아스트라한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에리히는 아르한겔스크는 소련과 연합군의 교류를 막기 위해서 점령해야 하는 곳이며, 아스트라한은 바쿠를 위시한 캅카스 지역의 유전시설 확보를 위해서[3] 점령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렇게 되면 소련의 공업과 농업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유럽 지역이 독일의 손에 넘어가기에 추가 반격의 위험을 일시적으로 덜 수 있고, 잔존한 소련 동부 지역은 루프트바페의 공중폭격으로 파괴하면 된다고 예상했다.

이후 이 계획은 공식적으로 채택되었으며, 독일군은 이 계획을 확장시키려고 시도했다.

3. 세력의 확장, 그러나 이어지는 반격

이후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었고, 대숙청으로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던 소련군은 속절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날마다 소련군이 심각한 피해를 내면서 동쪽으로 밀려나는 것을 본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는 A-A선의 서쪽에 있는 소련군은 사실상 전멸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렇게 자신감을 얻은 독일 국방군은 A-A선을 더 확장시켜 우랄 산맥까지 밀고 독일이 우랄 산맥의 서쪽, 일본이 동쪽을 차지하며 슬라브인들은 전부 멸살시키거나 우랄 산맥 동쪽으로 강제이주시킨다는 계획을 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 국방군은 수많은 악재에 부딪쳤다. 일단 예상과는 다르게 동쪽에서 일본 제국은 침묵했고[4], 힘으로 밀어붙이던 독일 중부집단군 역시 모스크바 공방전을 시작으로 한 소련의 반격에 직면했다. 게다가 아르한켈스크로 나아가야 할 북부집단군 역시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소련의 저항과 핀란드의 비협조적인 태도로[5] 대책없이 길어지며 사실상 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만다. 게다가 본래 동쪽으로 이전한 소련의 공업시설을 마비시켜야 할 루프트바페 역시 폭격기의 폭장량이나 작전거리 등 여러가지 문제로[6] 소련의 중공업 기반을 완전히 꺾는 데 실패했다.

한편 아르한겔스크의 점령이 사실상 1941년 말에 실패한 것과는 다르게 1942년 중반까지 아스트라한을 목표로 한 남부 쪽은 상황이 좀 나았다. 남부집단군 역시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들로 상당한 손실은 입은 상태였고 이후로도 세바스토폴 공방전에서 소련군의 결사저항에 직면해 상당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 세바스토폴에서는 승리하기라도 했고 당시에는 잔존 병력도 있었기에 독일 국방군은 무리하게 캅카스로 진격한다는 내용의 청색 작전을 실시했다.

4. 결과

이후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이끌었던 A집단군은 보급의 부재 및 소련군의 맹렬한 저항 등 수많은 악재 속에서도 기어어 캅카스 지역으로 꾸역꾸역 밀고 나갔으나, 정작 A집단군의 후방을 보조해줘야 할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의 B집단군과 그 휘하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6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대참패를 당하며 발이 묶였고, 이미 보급의 한계에 도달했던 클라이스트와 A집단군은 간신히 포위섬멸을 면하며 캅카스를 탈출한다. 이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독일 국방군의 아스트라한과 캅카스 점령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이후로는 전선이 고착되고 1943년 최종적으로 독일군의 마지막 동부전선 대공세였던 성채 작전이 실패, 전세가 독일에서 소련군으로 넘어가며 A-A선의 달성은 영원히 불가능해지게 된다.

5. 평가

현대 역사가들은 당시 독일군의 수준으로는 이 선에 도달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일본의 참전이나 핀란드의 적극적 협조 등 수많은 변수를 물리치고 단순하게 생각해 보더라도 독일군은 소련은 짧으면 9주, 길면 17주 안에 무너진다고 생각했기에 월동 장비조차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하며 발이 묶였을 때부터 사실상 A-A선의 달성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스크바에서 패배했어도 레닌그라드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스탈린그라드에서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또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는 알 수 없긴 하다.

게다가, 만약 저 지역을 전부 점령했다 하더라도 파르티잔이나 게릴라 등의 저항군 문제로 작전 수행에 큰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도 높다.

A-A선을 점령하면서 얻는 영토는 나치 독일의 3배나 될 정도로 매우 넓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독일군은 이에 훨씬 못 미치는 지역만을 점령했음에도 소련군 파르티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들에 시달렸다.[7] 이러한 저항군 문제는 독일군이 반소련 세력을 규합하는 등의 현지인 유화 정책을 폈더라면 상당부분 완화되었을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8] 독일은 무차별적인 학살로만 대응했고 현지의 적들을 명확히 굴복시킬 수 있는 정책을 내놓지 않는 등의 오판을 내리면서 상황을 악화시켰다.

결국 더 많은 영토를 점령할수록 더 많은 병력이 현상 유지를 위해 후방에 묶여있어야 하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독일군이 A-A선 영역을 모두 점령했다 하더라도 기초적인 점령 정책을 바꾸지 않는 이상 여러 문제에 부딪혔을 것이다. 따라서 나치 독일의 레벤스라움 계획은 점령 이후에도 난항을 겪을 것이다.

6. 함께 보기



[1] 그래서 A-A선은 마르크스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2]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와는 전혀 친족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흔히 아는 마르크스는 Marx, 이 마르크스는 Marks를 쓴다. 빌헬름 마르크스는 똑같이 Marx이나, 친족 관계가 아닌 것은 동일하다.[3] 당시 독일의 석유 수입원은 불안한 관계의 중립국이었던 터키와 생산량이 좀 적은 헝가리, 루마니아가 전부였기에 안정적이고 다량의 연료를 생산할 수 있는 유전시설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들은 캅카스를 점령하면 적게는 70%, 많게는 86% 정도의 연료 소모를 충당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4] 바르바로사 작전 종료 다음 날에 진주만 공습을 했다.[5] 만네르하임을 위시한 핀란드군은 자신들에게 "침략자" 이미지가 씌워지는 걸 절대 원치 않았기에, 독일의 침공 정책에 협조하기보다는 겨울전쟁 당시 빼앗긴 카렐리아 수복에 힘을 쏟았고 대부분의 병력도 거기로 돌렸다. 그나마 명목상 핀란드군이 독일을 돕기 위해 레닌그라드에 파견한 소수의 병력은 전황을 뒤엎기에는 모자랐다. 하여튼 이 때문에 독일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점령에 실패하나, 핀란드는 추축국에 가담했다가 전후 소련의 위성국이 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꼴이 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6] 이는 루프트바페가 기본적으로 전략공군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프트바페 문서 참조.[7] 그리고 연합국은 이들을 독일군의 정보망들을 유린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이용했다.[8] 특히 우크라이나에서의 실책이 컸다. 당시 우크라이나인들은 홀로도모르로 소련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이 대단히 큰 상황이었고 따라서 전쟁 초기에는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지만, 독일은 이들도 슬라브 민족으로 분류해 학살했고 결국 이들은 독일에 등을 돌렸으며 무장투장으로 대응하는 결과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