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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할더

파일:나치 독일 국장(화이트).svg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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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undesarchiv_Bild_146-1970-052-08,_Franz_Halder.jpg
이름 Franz Halder
프란츠 할더
출생 1884년 6월 30일
독일국 뷔르츠부르크
사망 1972년 4월 2일 (향년 87세)
독일 아샤우 임 키엠가우
복무 독일 제국군(바이에른 왕국군)[1]
국가방위군[2]
독일 국방군[3]
최종 계급 파일:Si_4a.png 육군 상급대장(Generaloberst)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서훈 기사 철십자 훈장

1. 개요2. 경력
2.1. 초기이력2.2. 바이마르 공화국2.3. 히틀러 집권 초기2.4. 폴란드 침공프랑스 침공2.5. 바르바로사 작전2.6. 블라우 작전2.7. 해임 이후와 체포2.8. 전후
3. 평가4. 주요 보직 내역5. 진급 내역6. 주요 서훈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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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때 활약한 독일 국방군의 육군 장군으로 최종 계급은 상급대장.

발터 폰 브라우히치, 알프레트 요들과 같은 참모장교로 특히 독일군의 리즈 시절 때였던 2차대전 초반에 육군 총참모장을 맡아 독일군의 대승에 일조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를 그리 신용하지 않아 전쟁 중반 이후로는 히틀러 반대파와 지지파 사이에서 오락가락했고, 결국 히틀러에 의해 파면당한 후 반히틀러 음모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운좋게도 미군에게 구출되면서 다른 주모자들처럼 처형되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2. 경력

2.1. 초기이력

바이에른뷔르츠부르크에서 바이에른 왕국군 장군인 막스 할더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일 제국 성립 후에도 이전의 제후국들의 군대는 기존 편제를 유지한 채로 프로이센군이 중심이 된 독일제국군에 편입되었고, 바이에른 왕국군도 이런식으로 편제를 유지하면서 독일 제국군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편제만 유지된 게 아니라 독자적인 교육기관까지 갖추고 있었다.[4] 할더도 바이에른 포병연대에서 사관후보생으로 군생활을 시작했고, 1904년에 소위로 임관하면서 뮌헨에 있던 포병학교와 참모학교를 졸업했다.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할더는 제3바이에른군단의 보급장교로 복무하였다. 이후 대위로 승진하여 여러 야전군의 참모장교로 대전기간을 보냈다.

2.2. 바이마르 공화국

제1차대전에서 독일제국이 패망한후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군의 훈련부분에서 일했다. 특히 참모의 역할을 중시하는 독일군이었기 때문에, 야전보다는 참모와 보급, 훈련쪽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서서히 승진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후 제7군관구(Wehrkrei VII)의 작전과장을 맡았고, 1931년에는 국방부 본부로 와서 훈련부장으로 일했다. 이후에도 여러 요직을 거치다가 1934년 소장(한국군준장에 해당)으로 승진하였다.

2.3. 히틀러 집권 초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2000-003-06A,_Franz_Halder.jpg히틀러 집권 이후에도 계속 승진을 거듭하여 참모와 훈련 담당을 거치면서 1938년 2월 포병대장(한국군의 중장에 해당)으로 승진했다. 1938년에 총참모장이었던 루트비히 베크가 국방군 지휘권을 침범하는 히틀러에 항의하여 사임했다. 히틀러의 가신이었던 빌헬름 카이텔은 공석이 된 육군 총참모장의 자리를 육군의 지지를 받고 있으면서도 상명하복에 철저한 프란츠 할더가 적임자라고 생각해 그를 추천했다. 이때 할더는 카이텔의 제안을 받고, 육군 총사령관으로 내정된 발터 폰 라이헤나우와 함께 일하지 않는 조건으로 수락했다.[5] 의외로 히틀러는 할더의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였고, 육군 총사령관의 자리는 카이텔의 천거로 온화한 성격의 발터 폰 브라우히치를 임명했다. 할더가 선택된 이유는 나치의 본거지인 바이에른 출신이라는 점을 좋게 본 히틀러와 그의 능력을 신망하던 군부 모두 타협하여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할더는 이보다 훨씬 전부터 베크와 함께 반히틀러 음모에 참여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1935년에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라인란트 진군을 감행했는데, 이 때문에 독일 군부의 장교들은 히틀러가 제대로 된 재무장을 하기도 전에 전쟁을 일으켜 다시 한 번 독일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험주의자 히틀러를 끌어내려야 한다고 생각한 장교들 여러 명이 음모를 꾸미고 있었고, 할더도 이 중 한 사람이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병합, 주테덴란트 병합 등의 여러 위기에서 독일 군부는 이러한 극단적 조치들을 조마조마하게 생각했지만, 히틀러의 도박은 그 때마다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히틀러의 대박을 본 군부는 히틀러를 끌어내리려는 생각을 그만두고 히틀러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기로 한다.

할더 또한 이런 위기에서 한때는 히틀러를 친견할때 자신이 직접 권총으로 암살할 계획을 생각하기도 했지만, 히틀러의 정책이 계속 성공하는 모습을 보자 반히틀러 운동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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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폴란드 침공프랑스 침공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를 전투 한 번 없이 손에 넣은 히틀러는 폴란드단치히 회랑을 내놓으라고 협박했지만, 폴란드는 앞선 두 병합 때와 달리 히틀러의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 이 단치히 회랑은 원래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였고,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토를 갈라놓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든 비나치든 독일 국수주의자들에게는 반드시 되찾아야할 땅으로 인식되고 있었다.[6] 이 때문에 할더도 그동안 히틀러의 도박적인 노선을 반대했지만, 폴란드에 대한 태도에서는 히틀러와 의견이 일치했다.

할더와 독일 국방군은 이런 맥락에서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계획에 적극 협력했다. 물론 이들도 폴란드와 전쟁을 벌일 때 영국군프랑스군이 독일의 서부로 침공해 맞불을 놓으면 독일은 또 다시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폴란드와 전쟁을 시작하기 직전 독소 불가침조약이 맺어지자 조금은 안도하여 폴란드를 목표로 한 전쟁 준비에 전념하게 된다. 총참모장이었던 할더는 빈틈없는 계획을 짜서 폴란드군을 분쇄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39년 9월 1일 개전된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군은 한 달 만에 강한 육군을 갖고 있었던 폴란드를 간신히 제압하고 9월 17일 동부에서 침공해온 소련군과 함께 폴란드를 반분하였다. 다만 할더의 우려대로 폴란드 침공에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영국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히틀러는 다시 프랑스 정복을 위해 1939년 11월 중 X-day를 발동해 공세를 시작하려고 했고, 할더와 음모자들은 이 직전에 히틀러를 제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갑자기 X-day의 무기한 연기를 지시했고, 다시 반히틀러 음모는 길을 잃고 말았다.

그동안 할더는 뒤로는 히틀러에 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서유럽 침공계획의 세부 작전을 수립하고 검토하였다. 어쨌든 할더를 위시로한 총참모부는 어떻게든 히틀러를 막아보고자 1차 대전 슐리펜 계획을 거의 그대로한 계획안을 제출했지만 만슈타인이 낫질작전안을 계획하며 방해공작이 뒤틀어졌다. 철두철미한 성격의 할더는 만슈타인의 계획안을 불신했다. 기갑부대의 저력을 역설하는 만슈타인에게 기갑군이 그정도 전력이 되는가? 기갑군이 돌파를 성공했을 경우 필연적으로 보병제대와의 간격이 발생할 것인데 이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실패하였던 프랑스 침공 계획인 슐리펜 계획을 반복할 수 없기에 1940년 2월 경에는 만슈타인의 계획안을 다시 검토해보는기도 하였다.

할더를 비롯한 전통주의 독일군 장교단의 우려와 달리 1940년 5월의 프랑스 침공 6일만에 아르덴 숲을 돌파한 A집단군은 프랑스 영내를 휘저으면서 벨기에에 몰려있던 연합군을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할더는 이때 개전이전 보이던 회의주의 성향에서 오히려 더 만슈타인 다운 기동전을 주장하는데 연합군이 기갑제대와 보병 제대 사이를 역습할 것이라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히틀러에게 지금이야말로 과감한 기동으로 적을 포위섬멸해야한다고 역설했다. 그 결과 독일군은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단 6주만에 프랑스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히틀러의 모험주의 때문에 독일이 또 패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없어졌고, 반히틀러 세력들의 영향력은 매우 약화되었다. 심지어 할더는 대놓고 이런 음모가들에게 "나는 이 계획에서 발 빼겠다"고 선언해 버렸다.[7]

2.5. 바르바로사 작전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러시아라는 거인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전형적인 전체주의국가인 소련은 전쟁 준비에만 매진해왔다...(중략)...전쟁 개시시 적 사단은 200개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미 확인 된 것만 360개이다. 이 사단들은 우리 같은 수준의 장비를 갖추지 못한채 미숙한 지휘를 받고 있지만 아군이 적 12개 사단을 섬멸하면, 적은 그냥 12개 사단을 새로 투입한다. 전선이 점점 소련 한복판으로 이동하면서 시간은 적들의 편이 되었고 우리는 점점 본국에서 멀어지고 있다. 우리 병력들은 지나치게 광대한 전선에 엷게 분산되어 적 공격에 노출되고 있다. 너무나 많은 공간이 열린 채로 방치돼있으므로 적의 공격은 때로는 성공적이다. 아군은 표류하는 난파선의 조각 처럼 전선 여기저기를 떠돌고 있다"
1941년 8월 11일, 자신의 일기에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H27722,_Franz_Halder_und_Walther_v._Brauchitsch.jpg
▲프란츠 할더(左)와 발터 폰 브라우히치(右)
히틀러는 프랑스를 정복한 직후 영국 본토 항공전을 시작해 영국을 정복하려고 했지만 영국 공군에 참패했고, 해군과 육군을 동원해 대규모로 진행될 예정이었던 영국 상륙 작전인 제뢰벤(바다사자) 작전은 무기한 연기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영국 본토 항공전 이전에 벌써 소련 정복을 염두에 두고 참모본부에 계획을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할더 뿐만 아니라 구데리안, 만슈타인, 룬트슈테트 등 독일군 고참 장성들 대부분이 영국과의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소련과의 전쟁을 할 필요가 있는가 회의적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들도 막상 전쟁에 돌입해서 독일군이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회의적이었다는 주장 자체도 거짓이었을 가능성이 커진 상태다.[8] 여하튼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인해 미국이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를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할더는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렸다. 그래서 그런 왜곡적인, 장밋빛 환상에 젖은 작전계획이 수립될 수 있었던 것.[9] 시간이 날 때마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해서 "수학 교수"라는 별명이 있었던 할더조차 이럴 정도였으니 히틀러의 의지는 꺾을 수 없었고 참모본부는 소련을 10주 안에 정복할 수 있다는 작전 계획안을 내놓았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었고, 독일군은 소련군 600만명을 섬멸하는 등 초반에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런 대패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소련의 거대한 잠재력에 독일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특히 1941년 12월에 벌어진 모스크바 전투에서 진 독일군은 처음의 기세를 잃었으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배로 전세는 독일에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할더는 일단 병력을 후방으로 후퇴시켜 전투력을 보존하기를 원했으나 히틀러는 현 진지에 대한 고수를 고집했고, 결국 이 견해 차이는 할더에 대한 히틀러의 신임이 떨어지기 시작한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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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블라우 작전

1942년 봄철이 되고 해빙기가 찾아오자 전선은 소강 상태에 이르렀고, 다시 해빙기를 지나자 독일군은 다시 공세를 준비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를 직접 공략하기 보다는 소련의 남부 캅카스 방면으로 진격하여 소련의 유전 지대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독일 남부집단군을 두 갈래로 나누어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원수가 지휘하는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지휘하는 A집단군은 바쿠 방면으로 진격하는 블라우 작전을 세웠다.

6월 부터 벌어진 블라우 작전에서 A집단군의 진격은 순조로웠지만, B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과 일진일퇴의 소모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점령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많은 사단을 스탈린그라드에 밀어넣었고, 이들 부대들은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도 못한채 불지옥에서 하나하나 박살이 났다. 할더는 이런 소모전이 의미없다고 생각하고 볼가강의 운송 능력만 끊어놓자고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했다.

이런 독일군의 축차투입을 본 소련군은 대규모 양익 포위를 통해 전세를 뒤집으려고 했고, 이 움직임은 할더의 정보망에 포착되었다. 할더는 히틀러에게 스탈린그라드 양익에 대규모의 소련군이 집결하고 있다고 보고를 했다. 할더는 히틀러가 안믿을까봐 사단을 여단으로 축소 보고하기까지 하면서 소련군의 대규모 병력 투입을 경고했지만, 히틀러는 "그런 미친 소리는 개도 안믿겠다"며 비웃고, 제1차 세계 대전 때 전상장 흑장을 딴 자기 앞에서 최전선의 병사들 걱정을 하냐며 할더를 매도했다.

결국 할더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한창이던 1942년 9월에 작전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육군 총참모장 직책에서 해임당해 사실상의 예편 조치인 대기발령 명령을 받았고, 후임에는 47세의 쿠르트 차이츨러 소장[10]이 보병대장으로 2계급 승진하여 임명되었다. 하지만 할더가 경고한 대로 소련군은 11월 21일에 스탈린그라드 방면의 독일군을 포위했고, 결국 독일군은 역사상 미증유의 대패를 당했다.

2.7. 해임 이후와 체포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배 후 점차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지던 전쟁 후반이 되자, 할더는 히틀러를 가만히 내버려 두다가는 독일이 망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다시 반히틀러 음모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할더는 이러한 반히틀러 세력의 시도가 절정에 달했던 1944년 7월 22일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전혀 없었다.

어쨌든 이 암살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게슈타포는 관련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게슈타포는 용의자들을 고문해 결국 할더가 일련의 히틀러 제거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을 밝혀냈고, 할더도 체포되어 강제 예편당한 뒤 사형을 선고받고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다. 전쟁 최후반기였던 1945년 4월에 다하우도 함락 직전까지 가게 되자 친위대에 의해 티롤 지방으로 후송되었는데, 도중에 친위대원들이 이들[11]학살하려고 하자 이를 제지하던 독일 국방군에 의해 구출되어 미군 측에 넘겨졌다.[12]. 할더는 이후 미군의 포로 수용소 캠프에서 지내게 된다.

2.8. 전후

할더는 미군에 적극 협조하여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 1950년대에는 주독미군의 전사(戰史) 연구관으로 일한 공적으로 훈장을 받기도 했고, 전후 새롭게 편성된 독일 연방군(서독군)의 재건에도 깊숙히 관여했다. 그렇게 노년기를 보내다가 1972년에 독일 바이에른에서 사망했다.

3. 평가

다른 장성들과 달리 야전 지휘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노련한 참모장교로 활약한 만큼 독일군의 초기 승리에 크게 이바지한 장성들 중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본질적으로 히틀러를 싫어했고 히틀러 제거 음모에도 관여했지만, 히틀러의 침략 전쟁에 적극 참여했으며 무고한 사람도 아니다. 그는 히틀러의 절멸전쟁이 무엇인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이들 중 하나였다.
히틀러는 매우 의미심장한 어투로 이날[13] 장군들에게, 향후의 전쟁이 서부와 북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통상적인 전쟁'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공표했다. 과거 나폴레옹이 시도했듯 유럽에서 러시아의 패권국가로서의 위상을 무너뜨리고 영국에게서 대륙에서의 주도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소련을 붕괴시키고 나아가 소련의 주민들을 말살 또는 노예화하는 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이 목표는 앞으로 다가올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전쟁 목표, 즉 사상적인 '불구대천의 원수', 볼셰비즘과 유대교를 지구상에서 소멸시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언급했다. 휘르터Hürter의 말처럼, 바야흐로 '적군의 섬멸을 지향하던 군사적 개념이 한 국가와 사상의 소멸이라는 정치적 개념으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이에 히틀러는 장군들에게 유럽에서의 전쟁수행에 있어서 지금까지 적용된 전통적인 준칙과 규칙들을 폐기하라고 지시했다. 장군들은 곧 벌어질 전쟁이 인종적, 사상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히틀러의 요구가 지나친 것이었음을 인지했다. 할더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번 전쟁의 양상은 서부 전역과 매우 다를 것이다. 동부 전역은 매우 혹독할 것이며 미래를 위해 이를 참고 견뎌내야 한다." 물론 히틀러가 자신의 계획을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폴란드 점령정책을 시행했던 친위대의 행동을 목격한 이들은 당시 생활권 확보를 위한 히틀러의 전쟁이 어떤 것이었는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 독일 연방군 게하르트 P. 그로스 대령의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329p ~ 330p에서 발췌
게다가 히틀러에 대한 반대와 지지 사이에서 오락가락한 기회주의적 면모까지 보여주었다. 할더는 전후 포로 심문 과정에서 자신이 반히틀러 음모에 가담했다는 과거를 강조하면서 미군에 적극 협조했고, 양심적인 군인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전쟁사 조사 과정에서 독소전쟁유대인이나 정치장교, 빨치산을 사살하라는 전쟁 범죄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전사학자로 활동했던 경력도 문제가 되는데, 할더가 '히틀러의 간섭 때문에 무적의 독일군이 그 장점을 발휘하지 못했고, 동장군과 무식한 소련군의 인해전술 때문에 독소전쟁에서 패했다'는 식으로 서술했기 때문에 자신을 비롯한 독일군 장성들이 벌인 잘못을 이게 다 히틀러 때문이다는 식으로 묻어버렸고,[14]게오르기 주코프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같은 소련군 장군들의 유능한 전쟁 수행 능력을 지나치게 과소 평가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물론 할더뿐 아니라 살아남아 회고록을 남긴 독일 장군들의 전반적인 특징이긴 하다.[15]

사실 연합군의 2차대전 전사학에서 소련 측 자료의 경우 소련 정부와 군 당국이 서방측 학자들에게 거의 정보 공개를 하지 않아 연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 공백을 메꾸는 데 사용한 자료들은 대부분 독일군 장성들의 회고여서 승자와 패자 간에 얽힌 편파적인 입장이 섞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러한 미군 관점의 전사 편찬에서 광범위하게 관여한 인물이 할더였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소련이 붕괴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러시아 정부에 의해 2차대전 당시의 자료가 공개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양측의 사료를 바탕으로 한 교차검증이 가능해졌고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니 할더나 독일군 장성들의 관점에서 서술된 전쟁사는 점차 권위를 잃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자기 변명쯤으로 치부되어 현재로선 참조만 할뿐 그 이상의 가치는 없다. 다만 할더의 저서들과 일기는 독일 측에서 여전히 구데리안과 만슈타인의 회고록과 함께 독소전쟁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 꼽히고 있다.

전술적인 면에서는 세심한 관리, 안정적인 전선운영, 전통적 교리 중시 성향을 보였다. 이 때문에 보수파 장교로는 최고봉이었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만큼은 아니지만 만슈타인, 구데리안, 롬멜, 클라이스트와 같은 과감한 기동을 선호하는 이들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4. 주요 보직 내역

5. 진급 내역

6. 주요 서훈 내역


[1] 1902년 ~ 1918년[2] 1918년 ~ 1935년[3] 1935년 ~ 1945년[4] 그래서 독일군 장교의 출신 군사학교는 한 군데가 아니라 프로이센, 바이에른, 작센, 뷔르템베르크 등 여러 군데에 있었다.[5] 할더가 라이헤나우를 거부한 이유는 라이헤나우가 직선적인 성격이라 협조관계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란 게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질적으론 라이헤나우가 나치정권에 빌붙어 육군의 반발을 사고 있었던 게 진짜 이유였다,[6] 폴란드 회랑은 1772년 폴란드 1차 분할 이전에는 폴란드 영토였다.[7] 당시 독일군 장교단은 강력하고 꼼꼼한 프랑스와 영국을 절대 이길수 없다고 확신했지만 단 6주만에 프랑스를 격파한 히틀러에 대해 독일군 장교단은 군사적 지식은 한심하지만 정치적 결단력에 대해서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이는 독일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8] 독일 국방군 장성들의 회고가 대체로 히틀러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경향이 크다.[9] 《히틀러 최고사령부 1933~1945년》, p. 246 - 247[10] 후에 원수로 진급한다.[11] 미군에게 구출될 당시에 할더와 같이 있던 수용자들은 나치 독일이 유럽 각국을 점령하면서 생포한 피점령국의 고위 장성/장교와 정치인들, 왕국의 왕족과 귀족들이 있었다.[12] 전쟁 말기 독일군은 나치당에 충성하는 충성파와 항복을 받아들인 항복파로 나뉘어져있었다. 충성파는 항복에 동조하는 자국민을 학살하고 다녀 하이젠베르크의 회고에 따르면 밖에 나가는게 위험할 정도였다고. 20세기 최후의 공성전인 이터 성 전투가 바로 충성파 무장친위대와 항복파 국방군의 충돌사례이다.[13] 1941년 3월 30일.[14] 대전략관의 부재로 소련을 우습게 보고 소련 침공 작전 입안에 적극 참여했기는 할더 등 독일 군부도 마찬가지였다.[15] 보통 독일계 회고록에서 무식하지만 용감하고 우직한 소련군, 수는 적지만 잘 싸우는 영국군, 정신력은 없고 물량에만 의지하는 나약한 미군과 같은 류의 변명이 흔히 관찰된다. 게다가 대부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히틀러에게 떠넘기거나 반대한 상대방을 맹비난하는 쪽으로 수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