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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05:53:14

한스 폰 보이네부르크-렝스펠트


파일:나치 독일 국장(화이트).svg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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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colcolor=#fff> 한스 폰 보이네부르크렝스펠트 제국남작
Hans Reichsfreiherr von Boineburg-Lengsfeld
파일:한스 폰 보이네부르크-렝스펠트.jpg
이름 Wilhelm Georg Gustav Botho Rudolf Hans Reichsfreiherr von Boineburg-Lengsfeld 
빌헬름 게오르크 구스타프 보토 루돌프 한스 폰 보이네부르크렝스펠트 제국남작
출생 1889년 6월 9일
독일 제국 튀링겐
사망 1980년 11월 20일 (향년 91세)
독일연방공화국 헤센
복무 독일 제국군
독일 국가방위군
독일 국방군
최종 계급 파일:Si_5a.png 육군 중장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보직 제23기갑사단장
주요 서훈 기사십자 철십자장


[clearfix]

1. 개요

한스 폰 보이네부르크렝스펠트(Hans von Boineburg-Lengsfeld)은 나치 독일 국방군의 장성이었다.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대놓고 참여해놓고도 살아남는 등, 본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정말 보기 드물 정도로 희한한 운세를 가진 장군이었다.

2. 1차 세계대전전간기

1889년 남작의 아들로 튀링겐에서 태어났고, 카셀바이마르에서 학교를 다녔다. 아비투어에 합격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에 사관생도로 독일 제국군에 입대한 뒤 1912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14년 8월에는 로렌 전선에 참가하였고, 이후 동부 전선으로 배치되어 1914년 내내 마주리안 호수 전투, 바르샤바 전투, 우치 전투 등 굵직한 동부 전선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1915년에는 중위로 진급하였다. 이후 1917년까지는 발트 전선에서 싸우다가 1918년에는 서부 전선으로 돌아와 마른 전투, 상파뉴 전투 등에 참가하였다.여기저기 많이도 끌려다녔다 전후 전간기 동안에도 그는 전역하지 않고 계속 국가방위군에서 복무를 이어갔다. 1937년 10월에는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3. 폴란드 침공

1938년 소총연대장에 임명된 뒤,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자 바르샤바 진격에 참여했다.

4. 프랑스 침공

1940년 5월 프랑스 침공전에서는 소총 여단장으로서 맹활약하였다. 벨기에군이 구축한 다일 강 방어선을 주파하는데 공을 세웠고, 북프랑스 전선에서 베튄 지역 북쪽 운하에 위치한 연합군의 진지를 격파하여 돌파구를 만들었다. 이 공적으로 1940년 7월 19일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받았다. 이 와중에 탱크로 인한 사고를 당해 허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뼈가 여러개 부러졌기 때문에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1] 전시 공적에도 불구하고 상부에서 장군 진급을 시켜주지 않자, 열이 뻗쳐서 홧김에 병가를 내버렸다가(...) 8월에 다시 군에 복귀한다.

5. 바르바로사 작전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에르빈 롬멜 소장의 제 7기갑사단 예하 소총 여단장으로 참가했다. 1941년 9월 제23기갑사단 창설 이후 사단장으로 취임했고, 10월에는 소장으로 진급한다.

6. 청색 작전, 그런데..

이후 청색 작전을 위해 남러시아 볼랸스크에 배치되어 대기하던 와중에, 하필 그의 작전 참모 요아힘 라이헬 소령이 군용기를 타고 가다가 청색 작전 관련 문건과 함께 소련 땅에 추락해버리는 바람에(...) 보직해임을 당한다.억까[2] 초대형 사고에 연루된 만큼, 까딱하면 목이 날라갈 수도 있었으나, 여러 비호를 받고 헤르만 괴링이 주재한 군사 재판 끝에 그와는 연관이 없는 것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고, 당당하게도 다시 제 23사단장으로 복직시켜달라는 요청을 한다. 하지만 이미 사단장 자리에는 다른 장성이 임명되어버렸던지라 상황이 좀 골 때리게 될 수도 있었는데, 마침 운좋게도 교체된 신임 사단장이 전사해버리며(...) 그는 다시 사단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청색 작전 이후, 남러시아 전선에서 테레크 강, 프로클라드니, 날치크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캅카스로 사단을 이끌었고, 이 공적으로 1942년 11월 중장으로 진급한다.

7. 스탈린그라드 전투

제6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포위당하자, 23기갑사단은 다른 부대들과 마찬가지로 코카서스에서 철군할 것을 명령받는다. 제6군이 나름 끈질기게 버텨준 덕분에, 그의 사단과 캅카스로 진군했던 여타 독일군 부대들은 간발의 차로 소련군의 포위를 피할 수 있었다. 이후 제6기갑사단과 함께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할 것을 명령받고 이행했으나, 12일 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소련군에 의해 저지된다. 이 와중에 자신도 1차 대전 때 입었던 부상이 추위 때문에 도져서 한동안 후방에 물러나 있어야 했다.

8. 행운의 정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프랑스 주둔군 사령관 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대장 휘하의 제325 방어사단의 사단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모의 당시 그의 상관이던 슈튈프나겔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발키리 작전이 시행되자 파리의 카를 오베르크를 포함한 친위대 고위 장교들을 체포하고 게슈타포 및 친위대 휘하 부대들을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대략 1200명의 친위대 및 산하 보안대 병력을 붙잡아두고 있었다. 이후 히틀러의 생존이 확인되고 체포된 친위대 고관들이 풀려나자, 그는 이것이 "작전 연습"이었다고 둘러댔고(...)[3] 놀랍게도 그는 사건에 연루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선 슈튈프나겔이 그의 참여에 대해 함구하였고, 한스 슈파이델 중장과 귄터 폰 클루게 원수도 그가 참여하지 않았다고 증언했기 때문. 더 놀라운 것은 보이네부르크-렝스펠트에게 체포당한 당사자 카를 오베르크마저도 이를 문제삼지 않고 그냥 넘어가줬다.[4] 당시 사건에 참여해놓고 생존한 사람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극히 드물었는데, 천운이 따른 경우라고 할 수 있었다.

9. 서부 전선

일단 그의 연루가 무사히 덮어지긴 했지만, 히틀러와 수뇌부의 입장에서 어쨌거나 친위대 병력을 붙잡고 간부들을 체포한 그를 파리에 그대로 냅둔다는 것은 무언가 좀 맞지 않는 상황임에 틀림없었고, 그는 이윽고 최고사령부로 옮겨졌다가 1944년 9월 23일에 서부전선 총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의 참모로 이동하게 된다. 이루 11월 1일부터 12월 15일까지 프라이부르크 방어시설의 사령관을 맡았다가 1945년 2월 20일에 뤼네부르크의 군사 훈련 시설의 사령관에 임명된 뒤 종전을 맡이한다.

10. 전후

항복 이후, 1946년 5월 30일까지 미군에 의해 억류되어있었다. 그는 석방 이후 헤센의 16세기 이래로 쭉 그의 가문이 소유해온 그의 사유지를 가꾸고 농사를 지으며 여유로운 여생을 보냈고, 사유지가 좀만 오른쪽에 있었더라면 1980년 9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11. 평가

프랑스 전역에서 특출난 군공을 세우고 기사십자 철십자장까지 수훈 받은 것을 보면 분명히 군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년배 기수에 비해 진급이 잘 풀린 편은 아니었다. 프랑스 전선 이후 어째서인지 상부는 그를 진급시켜주지 않았고, 이에 홧김에 3달 간 병가를 내버렸던 것이 오히려 진급에 지장을 주었을 수도 있다. 복귀 이후에는 순탄히 진급하고 잘 나가나 싶었지만 참모가 청색 작전 명령서를 든 채로 그대로 소련 땅에 불시착해버리는 초대형 사고를 쳐버리면서 또 다시 진급에 걸림돌이 된다. 이후에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참가해버리며 목숨만 건지고 한직에 머물다가 종전을 맞이한다.

하지만 바꿔서 말하자면, 저런 특급 악재들에 엮였음에도 불구하고 처형당하거나 구속되기는 커녕 끈질기게 예편당하지 않고 명예롭게 중장으로 군문을 마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두차례의 대전쟁에서 입었던 수많은 불치된 부상들과 이를 악화시키는 거지 같은 러시아의 겨울 기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준으로도 장수한 나이인 91세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심지어 전쟁 범죄에 연루된 것도 없었는지, 연합군의 군사 재판이나 서독 사법부의 기소도 피했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참가했었다는 명예와 함께 그의 가문 소유 땅에서 풍요로운 말년을 보낼 수 있었다. 수많은 독일군 장성들이 전후에 재판에 기소되어 불명예스러운 말년을 보내거나, 그들의 재산이 동독 지역이나 폴란드에 위치해 압류당하고,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경우처럼 소련에 억류되어 가족도 만나지 못하다가 타지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사례를 보면, 진정한 최후의 승리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 영문 위키에는 이 부상을 독소전에서 얻은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틀린 것으로 독어 위키에는 이미 그 이전에 얻은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2]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이, 놀랍게도 소련군은 이를 일부러 독일군이 흘린 가짜 정보로 판단하고 아무런 대책도 준비해놓지 않아서 청색작전은 성공적으로 개시될 수 있었다.노답[3] 발키리 작전 자체가 일단 이미 존재하던 반란 대비 군사 작전이기는 했다. 반란 대비 작전을 반란에 써먹었던 것.[4] 왜 그랬는지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항목- 사건 이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