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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09:51:36

베르너 폰 프리치

파일:나치 독일 국장(화이트).svg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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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colcolor=#fff> 초대 독일 국방군 육군최고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 남작
Werner Freiherr von Fritsch
파일:Bundesarchiv_Bild_183-R16862,_Werner_von_Fritsch.jpg
이름 Thomas Ludwig Werner Freiherr von Fritsch
토마스 루트비히 베르너 폰 프리치 남작
출생 1880년 8월 4일
독일 제국 벤라트[1]
사망 1939년 9월 22일 (향년 59세)
폴란드 제2공화국
복무 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독일 제국군(1898년 ~ 1918년)
파일:Weimarwehr.png 국가방위군(1918년 ~ 1935년)
파일:나치 독일 군기(1938–1945).svg 독일 국방군(1935년 ~ 1938년, 1938년~1939년)
최종 계급 파일:Si_4a.png 육군 상급대장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수훈 기사 호엔촐레른 왕실 훈장
붉은 독수리 훈장 4급
훈일등욱일대수장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제1차 세계 대전2.3. 패전 이후2.4. 나치 집권 이후2.5. 제2차 세계 대전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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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나치 독일의 군인. 최종계급은 상급대장이며, 독일 국방군이 된 이후 첫 번째 상급대장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독일 국방군첫 장성 전사자였다.[2]

2. 생애

2.1. 어린 시절

1880년 8월 4일, 독일 제국 라인 지방에서 남작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게오르크 폰 프리치는 육군 중장이었다.
1898년에 사관후보생으로 프로이센 야포병 제25연대에 들어간 프리치는 1900년 1월 27일 소위로 임관했다. 프리치는 1902년 심화된 훈련을 받았다. 프리츠는 야심찬 군인이었지만, 승진의 기회는 드물었고, 그가 있었던 자리의 특성상, 친분을 쌓기 어려웠다.[3] 몇 안 되게 갖고 있던 친분이 바로 나중에 원수가 되는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이다. 1907년부터 3년간 베를린의 군사대학에서 공부한 후 1910년 중위로 진급하고, 1911년에 참모본부원으로 배속되었다.

2.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3년 대위로 승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참모장교로 복무하였다. 제6군에서 참모장교로 복무하였으며, 10군과 4군에서도 복무하였다. 그는 철십자 훈장과 호엔촐레른 왕실 훈장 기사 십자 훈장을 수훈받았다.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절친한 친구이자 뛰어난 장교였던 막스 바우어와 알고 지냈는데, 그에게 후원을 받았다는 설이 있다.

2.3. 패전 이후

패전 이후에도 독일 국가방위군에 남았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 체제가 좋지 않았고 한스 폰 젝트의 쿠테타를 지지한다고 요아힘 폰 슈튈프나겔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다. 또한 그는 독일이 유대인으로 인해 망해간다고 썼다.[4] 그는 베르사유 조약에도 몹시 큰 불만이 있었는데 제5조항을 파괴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그는 소련을 좋아했지만 폴란드는 극도로 혐오했다. 이후 그는 힌덴부르크에 의해 1934년 2월 1일 독일군 총사령관이 되었는데, 이는 히틀러를 견제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실패하였다.

2.4. 나치 집권 이후

파일:640px-Bundesarchiv_Bild_102-01817A,_v._Rundstedt,_v._Fritsch,_v._Blomberg.jpg
좌로부터 보병대장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중장인 베르너 폰 프리츠와 상급대장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이다.
프리치는 나치스의 큰 지지자였다. 프리치는 독일 국방군 내에서 유대인을 강제 전역시키는 명령을 아무런 불만 없이 이행하였다. 그러나 독일 국방군의 경쟁 상대가 될 만한 슈츠슈타펠의 육성에는 반대하였다.
파일:adolf-hitler-with-werner-von-fritsch-and-werner-von-blomberg-1937-FD82WT.jpg
1937년 히틀러,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원수와 함께

이후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원수 진급으로 인해 공석이었던 상급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나치당에 가입했으며, 그의 당번호는 3,805,227이었다. 프리치는 히틀러에게 1938년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가 사임당할 뻔하기도 했다.

그런데 1938년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가 강제 사임당한 후 괴링힘러는 기세를 몰아 프리치까지 사임시키려고 했다. 힘러는 하이드리히를 시켜 프리치와 관계를 맺었다는 남성을 증인으로 내세웠고, 괴링과 힘러 양자는 히틀러에게 프리치가 동성애자였다고 고발했다. 결국 1938년 2월 4일, 프리치는 강제 사임당했다. 그렇게 히틀러는 독일 국방군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괴링과 힘러의 주장은 거짓이었음이 밝혀졌지만 명예는 훼손될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이후 그는 힘러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편지를 힘러에게 전달하려고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에게 주었지만, 독일 국방군슈츠슈타펠 사이에 더 이상 불화합이 없도록 그의 편지는 폐기되었다. 이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프리치는 나치를 지지했다. 울리히 폰 하셀이 그를 반나치 음모에 참여하라고 했을 때 그는 히틀러가 독일운명이라며 거절했다.

2.5. 제2차 세계 대전과 죽음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이후 그는 다시 군에 복귀해 폴란드 침공에서 12포병연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바르샤바 전투(1939년) 중에 폴란드군의 기관총 사격 또는 저격에 의해 다리정맥이 찢어졌다. 친위대, 질서경찰빌헬름 프리츠 폰 뢰티히 이후 전사한 첫 장성급 장교이다. 독일국방군 중에는 처음. 빌헬름 카이텔히틀러에게 프리치가 참모장교와 대화하던 도중, 총알을 맞았고, 몇 분 후 사망하였다고 밝혔다. 사후 그는 국가 차원에서 장례식을 받았다.


[1] 오늘날 뒤셀도르프의 일부분이다[2] 제2차 세계 대전 최초의 장성 전사자는 개전 9일만에 사망한 친위대 여단지도자 및 질서경찰 소장 빌헬름 프리츠 폰 뢰티히이다.[3] 당시 독일제국군은 친분이 많은 게 중요하였다.[4] 그 당시 반유대주의는 그리 희귀한 사상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