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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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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과대장 OF-8
General der Waffengattung / Admi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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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병과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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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파울 폰 레토포어베크
기갑대장
핫소 폰 만토이펠 | 발터 벵크 | 빌헬름 리터 폰 토마 | 발터 네링
포병대장
발터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 | 헬무트 바이틀링 | 에두아르트 바그너 | 에리히 마르크스 | 에른스트에버하르트 헬
통신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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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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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병대장
발터 쿤체
공군
병과대장
브루노 브로이어공수 | 오이겐 마인들공수 | 울리히 케슬러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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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카나리스 | 오토 칠리악스 | 귄터 뤼첸스
중장 OF-7
Generalleutnant / Vizeadmi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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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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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블라소프 | 보리스 시테이폰
공군
중장
발터 베버 | 아돌프 갈란트 | 테오도어 오스터캄프
해군
중장
-
소장 OF-6
Generalmajor / Konteradmi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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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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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소장
디트리히 펠츠
해군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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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브란트.jpg
이름 Karl Brandt
카를 브란트
출생 1904년 1월 8일
독일 제국 엘자스-로트링겐 뮐하우젠
(現 프랑스 뮐루즈)
사망 1948년 6월 2일 (향년 44세)
연합군 점령하 독일 바이에른주 란츠베르크 형무소
복무 슈츠슈타펠 (1934년 ~ 1945년)
독일 국방군
최종계급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중장 (집단지도자)
독일 국방군 육군 의사소장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출생과 성장3. 본격적인 만행 내역4. 몰락5. 전범 재판6. 사형 집행7.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카를 브란트 장군.jpg
친위대 여단지도자 카를 브란트
나치 독일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주치의, 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무장친위대 중장이다.

T-4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감독한 반인륜 범죄자이며, 자국민을 살해한 죄로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인물이기도 한데,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 자체가 단순히 전쟁 행위에 대한 처벌만을 하는 게 아니라 반인륜 행위를 저지른 범죄집단을 국제적으로 단죄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2. 출생과 성장

독일 제국 직할주였던 엘자스-로트링겐에 속한 알사스 지방의 뮐하우젠(현재는 프랑스령)에서 태어난 카를 브란트는 드레스덴 대학, 예나 대학, 프라이부르크 대학, 뮌헨 대학, 베를린 대학 등 여러 대학들을 전전하면서 의학을 공부해 베를린 대학에 재학중이던 1928년에 의사시험에 합격해 면허취득 후 1929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2년 3월 1일에 나치당에 입당한 브란트는 처음엔 돌격대에 입대했다. 1933년 8월 15일에 아돌프 히틀러의 부관이던 빌헬름 브뤼크너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을 때, 브란트가 그를 수술하여 그를 회복시켰다. 이 사실이 히틀러의 귀에 들어가 히틀러는 그를 개인 주치의로 임명하려고 했다.

파일:external/spartacus-educational.com/GERbrandtK3.jpg
결혼식 당시의 카를 브란트. 좌측부터 아돌프 히틀러, 아내, 본인, 빌헬름 브뤼크너, 헤르만 괴링.

1934년 3월 1일에 친위대로 이적한 브란트는 총통부 의사로 임명되어 히틀러의 측근이 되었다. 1934년 7월 29일에 정식으로 친위대 요원이 된 브란트는 1940년까지 친위대 본부에서 근무했다.최종계급은 슈츠슈타펠 중장무장친위대 중장.

1934년 3월 17일에는 독일의 수영 선수 안니 레본(Anni Rehborn)과 결혼했고 1935년 10월 4일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을 따서 카를 아돌프 브란트(karl adolf brandt)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 이후에 히틀러의 의사가 된 브란트는 히틀러의 주치의로써 활동하면서 히틀러의 연인 에바 브라운이나 히틀러의 주변 인물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하며, 히틀러와는 굉장히 신뢰하는 관계여서 히틀러는 그를 가족 같이 여겼다고 한다. 그렇게 히틀러의 측근이 된 그는 하인리히 힘러, 마르틴 보어만, 헤르만 괴링, 알베르트 슈페어와 같은 히틀러의 핵심 측근들과도 매우 많이 아는 사이가 되었고, 히틀러가 자주 가는 오버잘츠베르크 별장에서 오버잘츠베르크 서클이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갈 정도로 나치당에서 가장 위치가 높은 의사였다.
파일:external/spartacus-educational.com/GERbrandtK5.jpg 파일:external/spartacus-educational.com/GERbrandtK6.jpg
카를 브란트와 에바 브라운 카를 브란트와 아돌프 히틀러
여기까지만 요약하면 평범한 의사의 출세 이야기겠지만... 그 이후 악마가 된다.

3. 본격적인 만행 내역

나치 독일의 생체실험
브란트는 1939년 10월 T-4 프로그램의 감독관으로 임명된다. 임명된 이후 한 일은 유대인 및 정신질환자, 장애인을 대상으로 안락사 실험이었다. 그는 불운한 생명체에게 자비로운 죽음을 부여한다는 목적으로 실시했고, 자신이 이들에게 구원자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편안하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정의였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스를 이용한 죽음이 가장 인도적인 방법이라면서 적극적으로 가스 학살을 지지했고, 실험자들을 강제로 살균시키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장애인들이나 노인들을 가스실에 밀어넣은 후 살해했으나 나중에는 악질적이게도 생체 실험을 하고 실험 성과를 얻은 다음에 죽였다.

심지어 몰래 1차 대전 참전자와 2차 대전 참전자 중 중증 부상으로 영구적 장애를 얻은 이들 몇몇을 대상에 포함시켜 생체실험에 이용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히틀러의 명령으로 T-4 프로그램은 중지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T-4 프로그램에 관여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고, 안락사 프로그램이 중지된 이후 라벤스브뤽(Ravensbrück)과 아우슈비츠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와 나츠바일러(Natzweiler) 수용소를 비롯한 수많은 강제수용소에서 직간접적으로 나치 독일의 생체실험을 지원하고 참여하는 미친 짓을 저질렀다. 관여한 생체실험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러한 실험의 내용은 아마도 극히 일부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들이 전후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게 되면 무슨 일이 있을지를 뻔히 알았던 관계로 철저하게 자료들을 파기해 버렸고, 생존자들을 죽여버렸기 때문에 많은 사실들이 묻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죄들이 전부 묻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이러한 나치 독일의 생체실험이 하나하나 해외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악질적인 생체실험은 나치의 전쟁범죄로 분류되어 전후 생체실험 혐의로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 회부된 23명의 의사에 대한 재판의 명칭이 'Karl Brandt et al.(카를 브란트 등.)'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4. 몰락

1944년 10월 5일에 한스 카를 폰 하셀바흐(Hans Karl von Hasselbach)와 함께 테오도어 모렐 의학박사가 히틀러에게 처방한 약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내는 바람에 신망을 잃어 마르틴 보어만으로부터 총통부 의사직에서 해임되고 말았다. 모렐은 히틀러를 마약 중독자로 만든 돌팔이로서 비록 히틀러의 주치의였긴 했지만 이 사람은 민족 학살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가담하지 않았고, 생체실험은 의사로서 할 짓이 아니라며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그럼에도 워낙 이 돌팔이의 처방이 효과만큼은 쩔어주게 잘 들어서(장기적으로는 독이었지만) 히틀러가 매우 신임했고, 결정적으로 이 의사양반은 전후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 카를 브란트가 사형 집행되기 일주일 전에 침대에 누워 편히 세상을 떠났다.

카를 브란트는 이제 총통부 의사직에서 해임된데다 전황이 아무리 봐도 불리해지는 상황에 이르자 자신과 자신의 아내와 아들이 소련군에게 체포될 것을 우려한다. 그래서 우선 연합군이 있는 쪽으로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미군 쪽으로 보냈지만, 이것이 히틀러에게 들통나버리고 말았다. 히틀러는 자신과 매우 가깝게 지냈던 카를 브란트의 배신에 매우 분노한다. 결국 카를 브란트는 1945년 4월 16일에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다음날 사형선고를 받았고 교도소로 들어간다.

이 때 그와 친분이 있었던 알베르트 슈페어하인리히 힘러가 그가 총살되지 않도록 도왔다. 카를 브란트의 아내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아내와 굉장히 친했고 알베르트 슈페어 본인도 카를 브란트와 꽤나 친했기 때문에 석방시켰다.

그리고 히틀러가 자살하고 며칠이 지난 1945년 5월 2일 카를 브란트는 이제 석방되었으나 1945년 5월 23일에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 회부된다.

5. 전범 재판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에 회부된 카를 브란트는 냉동실험, 말라리아 실험, 독가스 실험, 술폰아미드 실험, 근육 및 신경 재생과 뼈 이식 실험, 바닷물 주사 실험, 전염병 황달 실험, 살균 실험 및 발진티푸스 실험의 실행 및 계획 혐의로 기소됐다. 나치 독일의 T-4 프로그램에서의 안락사 실험과 프로그램 계획 및 SS에서 침략전쟁에의 협력, 전쟁범죄 및 비인도적인 범죄혐의로 유죄를 판결받았고 사형이 언도되었다. #
파일:external/40.media.tumblr.com/tumblr_npfs4ivMSb1unf6bto1_500.jpg
1947년 8월 20일 전범 재판장에서의 카를 브란트

그는 재판에서도 자신은 잘못한 점이 조금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실시했던 안락사 프로그램의 유용성과 효율성을 주장하며 재판관을 설득하려 했으며 안락사 프로그램이 얼마나 인도적인 방법인지를 주장하는 미치고 말 같지도 않은 발언을 일삼았다. 위의 포로가 했던 말을 보면 얼마나 설득력 없는 설득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더 안락하게 죽일 수 있는데도 더 끔찍하게 죽였다[1]

심지어 나치의 의사들이 실시한 의사실험은 힘러의 지휘 아래 있었으며, 힘러가 시켰으면 그 의사들은 그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며, 자신과 나머지 의사들이 저지른 생체실험은 모두 하인리히 힘러가 명령해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2]

6. 사형 집행

파일:external/41.media.tumblr.com/tumblr_lwm0237leJ1r4iu6oo1_500.jpg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는 카를 브란트
재판 이후 카를 게프하르트와 카를 브란트 두명은 사형 집행 전날까지 얼굴을 제외하고 동료 수감자와 연합군 헌병(군사경찰)들에게 얻어터진 다음 (파울 하우서 문서의 종전 부분 참조.) 1948년 6월 2일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는 처형 직전까지도 자신이 저지른 만행들을 부정하는 등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였으며, "나는 발판에 서 있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아... 이것은 정치 보복일 뿐이야... 나는 내 조국을 위해서 일했다."("Es ist keine Schande. auf dem Scaffold zu stehen. Das ist nichts anderes als politische Rache. Ich habe meinem Vaterland ebenso gedient wie anderen vor mir.")라는 말을 하며 정신승리를 했다.

여기서 더 말하려고 했으나 교수형을 집행하는 군인이 짜증이 났는지 그냥 더 두들긴 다음 그냥 교수형을 집행했다고 한다. 이미 얼굴 제외 만신창이 상태로 저항도 못하고 목매달렸기에 데드맨 워킹 중에 한 망언이 곧 유언이 되었다.

7. 기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10px-Anni_Rehborn.jpg
카를 브란트의 아내 아니 레본(Anni Rehborn) (1904년 8월 25일 ~ 1986년 1월 15일)

아니 레본은 카를 브란트의 아내가 된 이후 1935년 10월 5일에 아들 카를 아돌프 브란트를 낳았고, 남편이 친했던 만큼 히틀러의 주변 인물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에바 브라운알베르트 슈페어의 아내 마르가레테 슈페어와 친하게 지냈으며, 전쟁 범죄와는 연관이 전혀 없었기에 간단한 조사를 받은 뒤 석방되었다. 이 점은 히틀러의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 뒤 평범하게 살다가 80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오히려 그녀는 "나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남편이 했던 만행까지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그녀의 오빠인 율리우스(Julius Rehborn, 1899. 12. 30~ 1987. 11. 27)와 여동생 하니 레본(Hanni Rehborn, 1907. 11.20 ~ 1987.11.30)도 수영 선수였다고 한다.


[1] 당초에 이런 인간 말종들이 실행한 실험들은 알고 보면 그 성과는 딱히 대단하지 않기 일쑤였다. 예를 들어 동시기 일본이 운용한 731 부대 역시도 연구 목표가 세균전, 화학전이었기에 세균전, 화학전 분야라면 모를까 의학에서의 성과는 미비했다. 즉, 이들의 실험은 사람 죽이기 위한 유용성이라면 모를까 사람 살리기 위한 유용성과 효율성은 커녕 사람 죽이기 위한 효용성에도 별다른 가치가 없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한 유용성과 효율성이라는 분야라면 차라리 아우슈비츠 같은 곳이 더 낫다. 거기는 진짜로 많은 인명을 빠르게 살상하기 위해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 물론 당초에 분야 자체부터가 잔악하기 짝이 없기에 그걸 배워간 이는 없었다.[2] 이 논리도 중견급이 많이 써먹던 논리로, '난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오' 식의 말로 자기 죄를 면하고 딴 사람들한테 책임전가를 하려는 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