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킬 대학에서 법률과 국학을 공부한 후 재건된 바이마르 공화국 치하의 해군에 들어갔는데 1924년부터 스비네뮌데[1]에서 근무하다가 1934년1월 31일에 해군대령으로 제대했는데, 그 전인 1923년에 나치당에 입당한 후 1926년부터 돌격대 대원이 되었다가 이후 킬 시의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인 1933년5월에 하인리히 힘러와 폴은 서로 만났는데, 힘러는 폴의 경제학 지식을 높이 평가하여 친위대 상급대령의 계급을 주어 그를 친위대로 끌어들였다. 친위대본부 관리국 소속으로 1934년2월 1일에 관리국 국장으로 취임한 폴은 산하에 친위대 특무부대와 강제수용소가 있었기에 경제담당의 입장에서 이들을 감독했다. 1939년4월 30일에 폴의 경제부분은 친위대 본부에서 독립하여 <관리 및 경제본부>로서 폴이 그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미 내무성 차관자리에도 올랐던 폴은 내무성 내의 <예산 및 건설본부>장관도 겸임했다. 그리고 친위대의 기업을 이끌며 그 경영에도 관여해 강제수용소의 인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던 1942년2월 1일에 <예산 및 건설본부>와 <경제 및 행정본부>가 통합되면서 <경제관리본부>로 만들어지자 폴은 그 본부장에 취임했다. 1942년3월 16일에 강제수용소 감독부대가 SS 작전본부 배속에서 폴의 WVHA로 배속되면서 이후 강제수용소는 WVHA의 D국이 되어 정식으로 폴의 산하기관이 되었다. 이것은 강제수용소의 관리 및 총력전 체제구축을 위한 노동력의 공급원 감시라는 면에서 중요시되었다. 폴 이하 친위대 경제반은 강제수용소 인력과 유대인 인력을 중시하여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노동력이 없는 유대인과 수용인은 절멸대상이었다. 폴의 관리하에 있던 아우슈비츠 및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엔 가스실이 설치되어 노동력이 없는 자를 살해했다. 노동력이 있는 자는 별도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철저하게 군수산업에 동원되었는데 폴은 강제수용소의 유대인들로부터 빼앗은 돈과 시계, 보석, 심지어 금니까지 모조리 뽑아 독일 제국은행에 예치했다. 1942년4월 20일에 폴은 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했는데 12월엔 첫 아내와 이혼한 후 IG 파르벤 사의 하부기업인 헤키스트 사의 창설자 미망인인 엘레오노레 폰 브뤼닝과 재혼했다.
독일의 패전후, 폴은 브레멘 근교의 농장에 작업부로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1946년5월 27일에 영국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뉘른베르크 폴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된 폴은 1947년11월 3일에 <인도에 반한 죄>와 <전쟁 범죄> 혐의로 유죄가 입증되면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3년 반 동안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폴은 수감중이던 1950년에 <신조, 나의 길은 신으로 가는 길>을 카톨릭 교회의 허가를 얻어 출판했다. 하지만 그는 1951년6월 7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