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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7 04:13:49

최고 국가 재판


언어별 명칭
<colbgcolor=#f5f5f5,#191919> 폴란드어 Najwyższy Trybunał Narodowy
영어 Supreme National Tribunal
독일어 Oberstes Nationales Tribunal Polens
러시아어 Верховный национальный трибунал

1. 개요2. 배경3. 재판부4. 피고 및 형량5. 재판받지 않은 자들6. 별개의 재판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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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시행했던 전범 재판으로, 폴란드 영내에서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나치의 전범과 그 부역자들을 처벌했다.

2. 배경

1943년 연합국은 모스크바 선언을 통해 전쟁범죄 혐의로 유죄를 받은 독일인은 그 독일인이 범죄를 행했던 국가로 송환되어서 분노한 피해국 국민들의 심판을 받도록 명시했다.

폴란드는 가장 먼저 나치 독일에게 군사적으로 침략당한 국가이며 60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나치의 잔악행위의 아래에 목숨을 잃었던 만큼 전쟁이 끝나자 나치의 전범들을 국내로 송환해 단죄하고자 했다.

사실 전쟁 기간에도 폴란드 지하국은 자체적인 특별 법원을 갖추고 일부 독일 전범들을 생포해 와 형을 선고했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은 폴란드 지하국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나치 전범들에게 자비를 보일 의향은 전혀 없었다. 교황 비오 12세아르투어 그라이저와 같은 일부 나치 전범들에 대한 선처를 호소했지만 폴란드는 아예 무시했다.[1]

이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절멸 수용소들을 비롯한 홀로코스트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지역도 폴란드였고, 훼손된 인류의 존엄성을 회복시키려는 취지도 있었다.

이에 따라 1946년 1월 22일, 폴란드 영토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른 전범들을 처벌하기 위해 최고 국가 재판소가 설립되었다. 판결은 단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항소는 없었다.

폴란드를 지배하며 가혹한 통치를 일삼았던 한스 프랑크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이미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당했기 때문에 기소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폴란드 라돔의 주지사였던 에른스트 쿤트 역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사형당했기 때문에 기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폴란드에 위치한 절멸수용소에서 잔악한 생체실험을 했던 나치의 의사들은 이미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으로 단죄되었기 때문에 역시 기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3. 재판부

판사
배심원단
검사

4. 피고 및 형량

4.1. 사형(교수형)

파일:그라이저1.jpg
* 아르투어 그라이저 -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대장), 바르텔란트 대관구 지도자. 사형 선고. 1946년 7월 21일에 형 집행.
파일:아몬 괴트 얼굴.jpg
* 아몬 괴트 - 친위대 최상급돌격지도자(대위), 크라쿠프-프와슈프 강제 수용소 소장. 사형 선고. 1946년 9월 13일에 형 집행.
파일:마이징거ss.png
* 요제프 마이징거 - 친위대 연대지도자(대령), 아인자츠그루펜 IV 부사령관. 사형 선고. 1947년 3월 7일에 형 집행.
파일:루돌프 회스.jpg
* 루돌프 회스 - 친위대 상급돌격대지도자(중령),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소장. 사형 선고. 1947년 4월 16일에 형 집행.
파일:Bühler_Josef.jpg
* 요제프 뷜러 - 친위대 여단지도자(소장), 총독부 차관. 사형 선고. 1948년 8월 22일에 형 집행.
파일:포르스터1.jpg
* 알베르트 포르스터 -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대장), 단치히-서프로이센 대관구 지도자. 사형 선고. 1952년 2월 28일에 형 집행.

4.2. 아우슈비츠 재판

피고인 직위 판결 비고
아르투어 리베헨셸(Arthur Liebehenschel) 친위대 상급돌격대지도자(중령)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소장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 소장
사형
(교수형)
1948.1.24 집행
한스 아우마이어(Hans Aumeier) 친위대 돌격대지도자(소령)
바이바라 강제수용소 소장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부소장
막시밀리안 그라브너(Maximilian Grabner) 친위대 하급돌격지도자(소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게슈타포 국장
카를 뫼켈(Karl Möckel) 친위대 상급돌격대지도자(중령)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행정 관리자
마리아 만들(Maria Mandl) 친위대 수석감독관(Oberaufseherin)[2]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여성 수용소 책임자
프란츠 크사버 크라우스(Franz Xaver Kraus) 친위대 돌격대지도자(소령)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정보관
루트비히 플라게(Ludwig Plagge) 친위대 상급반지도자(상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보고관
프리츠 분트로크(Fritz Buntrock) 친위대 하급반지도자(하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보고관
빌헬름 게르하르트 게링(Wilhelm Gerhard Gehring) 친위대 본부반지도자(원사)
부속수용소 소장
오토 레치(Otto Lätsch) 친위대 하급반지도자(하사)
부속수용소 부소장
하인리히 요스텐(Heinrich Josten) 친위대 상급돌격지도자(중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경비대 사령관
요제프 콜머(Josef Kollmer) 친위대 상급돌격지도자(중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경비대 사령관
에리히 무슈펠트(Erich Muhsfeldt) 친위대 상급반지도자(상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화장터 관리자
헤르만 슈마허(Hans Schumacher) 친위대 상급반지도자(상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행정관
한스 슈마허(Hans Schumacher) 친위대 상급반지도자(상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식량 공급 담당자
아우구스트 보구슈(August Bogusch) 친위대 반지도자(중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행정관
테레제 브란들(Therese Brandl) 친위대 여성감독관(Aufseherin)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감독관
파울 슈츠추레크(Paul Szczurek) 친위대 하급반지도자(하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구역 담당자
파울 괴체(Paul Götze) 친위대 분대지도자(병장)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구역 담당자
헤르베르트 파울 루트비히(Herbert Paul Ludwig) 친위대 상급반지도자(상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구역 담당자
쿠르트 후고 뮐러(Kurt Hugo Müller) 친위대 하급반지도자(하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구역 담당자
요한 파울 크레머(Johann Paul Kremer) 친위대 상급돌격지도자(중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의사
사형(무기징역으로 감형) 조기 석방
아르투어 브라이트비저(Arthur Breitwieser) 친위대 하급반지도자(하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행정관
데틀레브 네베(Detlef Nebbe) 친위대 돌격반지도자(선임원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경비대원
종신형
카를 조이페르트(Karl Seufert) 친위대 본부반지도자(원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구역 담당자
한스 코흐(Hans Koch) 친위대 하급반지도자(하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소독관 및 가스실 운용관
루이제 단츠(Luise Danz) 친위대 여성감독관(Aufseherin)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경비대원
아돌프 메데핀트(Adolf Medefind) 친위대 하급반지도자(하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경비대원
안톤 레흐너(Anton Lechner) 친위대 분대지도자(병장)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경비대원
프란츠 로마이카트(Franz Romeikat) 친위대 하급반지도자(하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행정관
징역 15년
한스 호프만(Hans Hoffmann) 친위대 분대지도자(병장)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게슈타포 부대원
힐데가르트 레헤르트(Hildegard Lächert) 친위대 여성감독관(Aufseherin)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경비대원
알리체 오를로프스키(Alice Orlowski) 친위대 여성감독관(Aufseherin)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경비대원
요하네스 베버(Johannes Weber) 친위대 돌격병(상병)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조리병
알렉산더 뷜로(Alexander Bülow) 친위대 돌격병(상병)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경비대원
에두아르드 로렌츠(Eduard Lorenz) 친위대 하급반지도자(하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경비대원
리하르드 슈뢰더(Richard Schröder) 친위대 하급반지도자(하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행정관
징역 10년
에리히 딩에스(Erich Dinges) 친위대 돌격병(상병)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경비대원
징역 5년
카를 예슈케(Karl Jeschke) 친위대 상급반지도자(상사)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경비대원
징역 3년
한스 뮌히(Hans Münch) 친위대 하급돌격지도자(소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위생연구소장
무죄

한스 뮌히는 요제프 멩겔레와 달리 반인륜적인 생체 실험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유대인들을 치료해 주는 일만 한 덕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직원들 중 유일하게 무죄 선고를 받았다.

4.3. 징역형

5. 재판받지 않은 자들

헤르베르크 랑에 베를린 전투에서 전사
한스 보트만 기소 전 자살
막스 쾨겔
율리안 셰르너 기소 전 사망
오스카 디를레방어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기소되지 않음
하인츠 라이네파르트 서독의 신병인도 거부
구스타프 바그너 브라질의 신병인도 거부
1980년, 사망한 채 발견[4]

폴란드 점령 기간 동안 공범이 되어 이득을 본 독일의 전범기업 관계자들도 있었지만 냉전이 도래하고 미국과 서구권의 반공주의 논리에 따라 이들의 죄가 사면되면서 폴란드 측에서 기소해 처벌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6. 별개의 재판


청산되지 못한 폴란드 내 절멸수용소 관계자들에 대한 심판은 1960년대에 서독 재판부에서 별개의 재판으로 심판했다.

21세기에도 폴란드 사법부는 나치의 전범이나 그 부역자가 노인이어도 실형을 선고하는 것을 원칙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는 나치 전범에 대한 무관용을 원칙으로 삼은 독일 사법부의 원칙과 다를 바 없다.

2009년에 폴란드 사법부는 독일 사법부와 오스트리아 적십자사의 협조로 아직 생존해 있던 디를레방어 여단 대원 11명에 대한 기소를 준비했다. 디를레방어 여단은 집단강간과 고문 그리고 학살을 저지른 악명 높은 무장친위대 부대인 데다 바르샤바 봉기를 무참히 진압했으므로 폴란드는 이들을 기필코 단죄하려고 했다. 하지만 기소하기엔 증거가 불충분했고 안타깝게도 기소에 성공하지 못했다.#[5]

7. 관련 문서


[1] 폴란드는 국민의 대다수가 가톨릭을 믿는 가톨릭 국가이다. 그 정도로 가톨릭에 대한 믿음이 큰 국가가 교황의 간청을 무시할 정도로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2] 강제수용소의 여성 경비원들은 일반 친위대와 별개의 계급이 부여되었다.[3] 바르샤바의 주민들에게 유화정책을 펼치는 몇 안 되는 나치의 고관이었기 때문에 이 점이 정상참작되어 징역형으로 그쳤다.[4] 바그너의 가슴에 칼이 꽂힌 채 발견되었는데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나치 전범들을 암살할 때 사용하던 주 수법이라 모사드가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다.[5] 당시 디를레방어 여단의 대원들도 다른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고령이었기 때문에 2024년 기준으로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도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