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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를레방어 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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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무장척탄병사단
36. Waffen-Grenadier-Division
36th Waffen Grenadier Division
파일:디를레방어 여단 엠블럼.svg
<colbgcolor=#000> 창설일 1940년 6월 14일
해체일 1945년 5월 1일
소속 슈츠슈타펠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연혁3. 편제4. 출신 인물5. 기타
5.1.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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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main-qimg-2da003cdf35d88a399558a3668f8eaf4-lq.jpg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당시 투입된 디를레방어 여단 대원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존재했으며, 나치 독일의 친위대 상급지도자 및 무장친위대 상급대령이었던 오스카 디를레방어가 행한 전쟁범죄로 악명높은 부대였다.

2. 연혁

출처1 출처2

총기를 사용한 불법적인 사냥으로 법적인 처벌을 받고, 작센 강제수용소[1]에 수감되어 있었던 밀렵꾼들 80여명을 대상으로, 오스카 디를레방어가 1940년 5월부터 법무부[2]를 통해 부대를 창설한 것이 시초였다. SS에서 최초로 범죄자들로만 구성된 부대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때 명칭은 오라니엔부르크 밀렵대[3]로 사실상 엽병부대의 형태로 시작하려고 했다. 이들을 선발한 이유는 나치의 게르만주의에 입각하여 순수한 원시 독일 남성들에 의한 전통적인 독일 정예 엽병 목적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부대를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지원한 사람들은 디를레방어의 유일한 친구인 고틀로프 베르거와 친위대 국가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였다. 선발된 80여명 중 2개월 동안의 군사훈련을 통해 55명이 선발되었고, 나머지 탈락자들은 다시 수용소로 보내졌다. 문제는 이 부대 구성원이 지휘관부터 선발된 인력들까지 죄다 범죄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창설될 때 무장친위대부터 시작해서 슈츠슈타펠 전체가 이 부대에 대해 반발[4]이 심했지만 그 반발은 무위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승인했고 힘러가 적극적으로 주도하는데, 따지고 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1940년 6월 14일에 오라니엔부르크 밀렵대[5]는 55명의 밀렵 혐의 범죄자들과 오스카 디를레방어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부대가 창설되자마자 하인리히 힘러가 부대 구성을 위해 '징계 경력이 있는' SS 부사관 4명과 병사 20명을 추가로 증원해주면서 창설 초기부터 SS의 범죄자 부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즉 시작부터 질이 나쁜 범법자들의 집합소였던 것이다. 그리고 9월까지 반사회적인 중범죄자들과 강간범 및 정신병자, 동성애자, 사상범들이 추가로 이 부대로 증원 배치되면서 총 300여명의 대대급으로 신속하게 증편되었다. 이 시점에서 디를레방어 대대가 운용되었다.[6]

대대로 증편되는 시점인 1940년 8월 1일부터 폴란드루블린에 배치되어 경비 임무를 맡았으나, 결국은 범죄자 조직인지라 독일 국방군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슈츠슈타펠에서는 이들에게 개인화기 무기를 지급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을 경계하다 못해 매우 부적절한 존재로 간주하고 있었다.[7] 이 때문에 경봉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걸 하고서도 폴란드에서 경비 임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채 주둔 지역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는 바람에, 이 부대에 대해 즉시 해산을 요청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독일 국방군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 및 슈츠슈타펠에서는 1945년 5월 패전할 때까지 이 상황을 반복했는데 이걸 전부 고틀로프 베르거와 하인리히 힘러가 묵살했을 정도였다. 그냥 개판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약탈-강간-살인을 마음대로 저지를 정도였다. 유대인 여성들을 아예 성노예[8]로 삼아 데리고 다녔을 정도였고, 지휘관인 오스카 디를레방어는 독일군 및 SS에서 유일하게 즉결처분권이라는 특권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휘하 부하들의 범죄행위들을 방조했다. 오히려 자기가 마음에 드는 전리품을 부대원이 마음대로 취했을 경우 그 즉결처분권을 남용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레벤스라움 계획에 의거해 폴란드 루블린 지역의 가옥 철거 임무에 투입되었는데, 단순 철거현장 지원에서도 갖은 살육과 강간 및 범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독일 국방군은 물론이거니와 무장친위대와 일반 슈츠슈타펠, 심지어 나치당에서도 경악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막장 수준의 부대였으니 부대 내에서의 병영문화나 군기는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그래서 이 개판을 통제하는 디를레방어는 즉결처분권[9]이라는 걸 이용해 철저할 정도로 부대원들을 공포로 통제했다. 진짜 마음에 안 들거나 자기 훈련을 통과하지 못하면 정말 그 자리에서 죽였다고 한다. 게다가 디를레방어 자체가 중증 알콜중독자인지라 제정신이 아닌 상태인 경우가 많았으니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디를레방어는 전투시에는 진두 지휘를 할 정도였고, 휘하 병사들과 평시에는 반말로 얘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범죄자들끼리 동병상련이라도 느꼈는지는 몰라도 범죄자들을 스톡홀름 증후군 형태로 길들였다고 한다. 문제는 그러한 공포와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부대원들이 디를레방어에게 복종은 했지만 부대원들끼리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서로 사보타주와 집단 린치를 하며 파벌로 나뉘어 있었기에, 사실상 교도소 그 자체였다. 부대 내부가 이 모양이었으니 부대 주둔지 주변은 강간과 중범죄가 난무하는 그야말로 《북두의 권》현실판이었다. 이 부대는 아인자츠그루펜보다 더한 족속들이었으며, 나치즘으로 세뇌되어 있었던 독일 내에서도 디를레방어 부대는 정말 혐오받아,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었기에 나치당의 간부들조차 어떻게 해서든지 해산시키려고 안달복달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거와 힘러가 뒷배를 봐줬기에 이들은 존속되었다. 부대도 그 모양이긴 했지만 오스카 디를레방어는 해당 문서에서도 상세히 나와 있듯이, 부대원들이 하도 문제를 일으켰기에 고소 및 고발을 수도 없이 당했다. 위아래가 그냥 막장 그 자체였으니 디를레방어식의 통제 말고는 답도 없었다.
파일:main-qimg-e8510381366821f0786496c5ea50070b-lq.jpg
벨라루스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한 디를레방어 대대 대원들
파일:ETtMlbDX0AE4eLd.jpg
디를레방어 대대가 파괴한 벨라루스 마을
루블린에서의 화려한 공적(?)으로 1941년 디를레방어 특별대대[10]가 되어 강제수용소를 관리하는 부대로 잠시 있다가 독립부대로서의 역할을 시작하게 되었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이들도 당연히 소련의 벨라루스로 보내져 파르티잔 및 소련군 잔당 토벌에 투입되었다. 후방 정리나 하던 이 악귀들에게는 행운스럽게도, 벨라루스 초토화 작전을 지시하는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의 지휘 아래 있었고, 벨라루스에는 지옥문이 열리게 되었다. 벨라루스 초토화 작전에서 디를레방어 부대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마냥 난동을 부려댔다. 특히 디를레방어는 헛간에 민간인들을 몰아넣고 불태우면서 불을 피해 나오는 민간인들을 기관총으로 죽이는 방법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들은 그것을 즐겼다고 한다. 당연히 앞서 말한 강간 및 약탈은 기본이었다. 벨라루스 초토화 작전에서 이들에게 죽은 민간인만 3만~12만명이 넘었다.

1942년 1월부터 반공성향인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의 모병이 허용됨과 동시에, 힘러의 동의하에 무장친위대 자원병 조직으로 승격(?)되었다.[11] 덕분에 반공성향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300여명을 지원받아 병력이 증강되었고, 그해 8월 정식으로 연대로의 확장이 승인되었다. 이때부터 디를레방어 특별연대[12]로 확장되었는데, 정식으로 병력 증강이 된 건 1943년 2월부터였다. 기존 병력들은 1대대를 구성했고, 2대대는 700여 명의 군사훈련을 이수한 범죄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5월부터는 중범죄자들 한정이 아닌 모든 범죄자들로 자원병 모집 기준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해 5월에 범죄자들 중 차출되어 군사훈련을 통과한 500여 명이 증편되면서 3대대를 구성하게 되었고, 1/2/3대대로 이루어진 디를레방어 특별연대[13]가 1943년 8월 17일 최종적으로 창설되었다. 이때부터 디를레방어 연대는 이 부대의 마크와 상징으로 막대형 수류탄 2개를 겹쳐 놓은 모양의 앰블럼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렇게 벨라루스에서 학살을 벌이던 이 부대는 1943년 11월부터 중부집단군에 소속되어 소련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예비대로 투입되었는데, 전쟁 범죄에만 미쳐 있을 뿐 개판인 조직력을 갖고 있는 디를레방어 부대가 제대로 된 전투를 수행할 리가 없었으니 당연히 전투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원체 개판인 부대인데도 불구하고 오스카 디를레방어는 1943년 12월 5일, 독일 십자훈장 금장을 받을 정도로 베르거와 힘러의 비호를 받았다. 하지만 1944년 1월까지 부대원의 수는 259명으로 줄어있었다. 1,000명이 좀 넘었던 부대가 벌써 1/4로 박살이 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44년 2월까지 다시 범죄자들을 교도소에서 징집하여 원상복귀되었다. 이 시점에 들어선 "러시아인들을 믿을 수 없다"라는 판정하에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출신의 반공성향 인력이나 범죄자들은 배제되었다. 엄청난 뒷배들 덕에 디를레방어 부대는 병력이 부족할 일이 없었고, 무슨 중범죄를 저질러도 무법이었다. 그 시점에서 국방군이나 무장친위대 및 슈츠슈타펠도 각종 전쟁범죄들과 강간범죄들을 저질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디를레방어 특별연대는 그중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으며, 함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국방군이나 무장친위대 및 슈츠슈타펠에게조차 혐오를 받아 수도 없이 고소, 고발을 당했다. 끊임없이 군기문제가 지적될 정도로 이 부대는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공격받는, 다른 의미로 보면 대단한 부대였다.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나자 하인츠 라이네파르트(Heinz Reinefarth)가 이끄는 전투단에 일부 병력이 파견되어 싸우면서, 독일군에 의한 진압작전에 연대 전체가 투입되었다. 카민스키 여단, 아제르바이잔 보병 연대 등과 함께 저지른 잔혹행위로 인해 국방군과 다른 무장친위대마저 기겁할 정도였다. 이들이 이렇게 기겁한 이유는 학살의 정도도 그랬지만 정작 전투에선 허약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장교 16명을 포함하여 초기 병력은 범죄자들을 재차 증원받아 복원한 881명이었지만, 시가전에서 대차게 갈려나갔고 이후 2,500명에 이르는 병력[14]을 추가로 증원받으면서 적군과 싸워, 봉기가 끝날 즈음에는 손실이 2,733명에 이르렀다. 초기 병력의 무려 315%(...)였다. 심지어 진격로에 보드카 양조장이 있어 중간에 멈춘 카민스키 여단보다도 손실률이 컸다. 연대장인 오스카 디를레방어는 봉기 진압 이후 보직해임당했다.[15]

그러나 디를레방어의 보직해임은 유야무야되었는지 오히려 기사십자 철십자장이 수여되었고, 상급지도자로 승진하게 되었다. 1944년 10월 3일 바르샤바 봉기 진압이 끝나고 나서 연대는 드디어 여단으로 확장되었다. 이때가 흔히 아는 디를레방어 특별 여단[16], 즉 디를레방어 여단[17]이라고 불리게 되는 시점이었다.[18] 이 시점에서 여단 병력은 총 4,000여명으로 증편되었다. 물론 여단 증편 작업과 동시에 디를레방어 여단은 슬로베니아헝가리에서 좌익 계열의 파르티잔 토벌에 투입되었고, 1944년 10~12월까지 당연할 정도의 대규모 손실을 보여줌으로써 1945년 1월 병력 손실에 따른 부대 재편성을 목적으로, 다시 슬로베니아로 이동 조치되었다.[19]

슬로베니아에 있었던 1945년 2월부터 디를레방어 여단은 사단으로 증편되었으며, 오데르-나이세 전선(Oder–Neisse line)에 투입되었다. 동시에 이 시점인 2월 17일에 오스카 디를레방어가 오델 강에서 총탄을 맞아 후송을 가면서 부대를 떠나게 되었고, 1945년 2월 14일 SS 제36 무장척탄병사단[20]으로 최종적인 승인을 받게 되었다. 4,000여명의 범죄자 부대였으나 사단 증편에 따르는 부대 확장에서 범죄자들만 존재할 수는 없었고, 이 때문에 국방군 육군 소속의 공병 여단, 척탄병 연대, 구축전차 대대가 사단 직할로 추가되었으나 당시 독일의 전황이 어려워 병력 증편은 사실상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여단급보다는 병력이 많았지만 사단급 정원은 채우지 못했다.[21] 결국 사단으로 확장되고, 디를레방어가 사단장으로 유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앞서 말한 부상으로 인해 부대를 떠나게 되면서 2월 17일 이후부터는 프리츠 슈메데스(Fritz Schmedes) 여단지도자가 맡아 부대 증편 및 초대 사단장이 되었다.

독일 측에서는 사단으로 확장되는 시점에서부터 디를레방어 여단 혹은 사단이라는 표현이 사실상 사라지고, 그냥 일반 무장친위대 사단화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사실 이 사단 증편과 디를레방어가 떠난 시점에서, 디를레방어의 이름을 단 부대 명칭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 사단이 징계경력 및 범죄경력이 있는 전과자들 위주의 부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22]
파일:z9i5yzru313d1.jpg
1945년, 다른 국방군 및 친위대원과 함께 미군에게 항복한 디를레방어 여단 대원들.[23]
사단으로 증편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맥없이 밀려났다. 그 전부터 부대는 더 개판으로 돌아갔으니 소련군을 막을 수도 없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전투 부적합부대로 평가받았던 그들은 나치 독일의 패망이 가속화된 시점에서는 사단 편제 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탈영과 약탈이 극심했다. 얼마나 심각했냐면 당시 사단 예하 73SS연대의 연대장이었던 에발트 엘러스(Ewald Ehlers) 대령[24]이 탈영병들을 잡아다가 집단으로 교수형에 처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1일 소련군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던 사단의 잔여 병력이 쓸려버렸으며, 잔존 생존자 700여명은 엘베 강을 건너 미군에 항복했다.

3. 편제

이 부대는 계속 범죄자들로 구성되어 확장되었다. 대대로 처음 구성되었을 때도 3개 중대로 구성되었으며, 연대로 확장되는 시점에서도 1/2/3대대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확장 증편이 된 여단-사단에서부터는 규모가 커지는 관계로 달라지게 되었다.

디를레방어 대대(SS-Sonderbataillon Dirlewanger)(1943년 6월 기준)
디를레방어 여단(SS-Sturmbrigade "Dirlewanger")(1944년 10월 기준)
SS 제36 무장척탄병사단(36.Waffen-Grenadier-Division der SS)(1945년 3월 기준)
편제상으로는 사단 편제화였으나 인적 자원수는 최대 6,000명을 넘은 적이 없었다.[25]

4. 출신 인물

파일:디들레방어 상급대령.jpg
여단장 디를레방어 상급대령

5. 기타

파일:디를레방어여단 칼라장.jpg
디를레방어 여단 전용 칼라장
제3SS기갑사단이 백골이 그려진 칼라장을 채택한 것과 마찬가지로, 디를레방어 여단도 SS를 상징하는 시겔 룬 문자 대신 독자적인 칼라장을 채택했다. 이들이 초기에는 엽병부대로 시작한 것을 상징하듯, 엽총이 십자로 교차되어있으며, 그 밑에는 막대형 수류탄이 그려져 있었다.
파일:2ojydn97lp131.jpg
전쟁 말기, 안면 마스크를 착용한 디를레방어 여단 대원들
바르샤바 봉기 진압 이후에는 안면 마스크를 착용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위장이 목적이 아니라 연합군의 체포에 대비해 자신의 신변을 가리기 위해서였다.[27] 물론 이들은 소련군의 포화 앞에서 무참히 찢겨나갔으므로 사실상 무의미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대에는 아인자츠그루펜처럼 유대인들에게 독극물인 스트리크닌을 주사하여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만 존재하는 대원도 있었다. 개개인 범죄자들에게는 사실상 살인할 수 있는 임무병과가 있었다.

그 막장인 SS조차 여러 차례 이들을 구속 기소하려 했고, 부대 해체 및 처벌을 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이유는 단순히 두 명의 빽들 덕분이 아니라 이 부대의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었다. 즉 이 부대가 없어지지 않은 이유는 나치가 규정한 범죄자 및 제거 대상들의 저항을 진압함과 동시에, 그 저항자들이 도주시에 추적하며, 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현지 민간인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심어주는 것에 있어 성과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 부대의 힘은 잘 훈련된 군인들이 아니라, 일말의 공감이나 도덕적인 인식 자체가 결여된 존재들이었다. 실제로 구성을 계획하는 단계에서부터 범죄자들을 이용하자는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나, 부대를 구성하고 난 뒤 첫 번째 임무가 레벤스라움 계획에 따른 용역 업무였던 것이나, 계속해서 현지 주민들을 못살게 만들어버리는 반사회적인 행동들을 다발적으로 실행한 것 등을 고려해보면 디를레방어 부대의 임무는 나치 지배하의 동유럽 전역을 현지인들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현지인과 함께 소멸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자 존재가치였다. 어차피 통제가 불가능한 강력 범죄자들이었기에 이런 더러운 일에 쓰다버리면 그만인 부대였다.

바꿔 말하자면, 만약 나치 독일의 레벤스라움 계획이 실현되었다고 가정한다해도, 이들은 같은 나치들이 보기에 경악할 수준의 각종 범죄행위로 인한 책임을 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존재였다는 것이다.

5.1. 미디어

<쉰들러 리스트> 및 <바르샤바 1944>에 이 여단 소속 인물들이 등장한다.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서러시아 전쟁 시기 독일에서 친위대 쿠데타에 협조했다가 실패해 도주하여 남우랄의 오르스크에 자리를 잡았다. 플레이가 가능한 세력이며, 도적단으로 변질되었다보니 광범위한 약탈이 가능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여단 특유의 디를레방어에만 의지하는 특성 때문에 디를레방어가 죽으면 아예 점령지대가 무정부 상태로 변하고, 무기 하나 연구하는데도 2년 넘게 걸린다.

영화 <컴 앤 씨> 후반부에 등장하는 독일군 부대의 부분적인 모티브로, 비정상적이며 군기가 잔뜩 빠진 행동거지와 더불어 실질적인 파르티잔과의 전투에선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오합지졸인 모습이 판박이다.


[1] KZ Sachsenhausen[2] 히틀러의 명령하에 1940년 3월 23일부터 사면령을 운운하면서 인력 선발이 시작되었다.[3] (독)Wilddiebkommando Oranienburg. (영)Oranienburg Poacher's Unit[4] 이때는 1942년 이후처럼 외국인들까지 무작위로 집어넣던 시기가 아니라 독일인 내에서도 엄격하게 가리고 가려서 뽑는 정예 엘리트들만 무장친위대와 슈츠슈타펠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런 자부심으로 뭉쳐있는 그들이 같은 군복에 같은 소속으로 범죄자들과 동류가 된다는 것에 반발하는 건 당연했고, 기본적인 인식도 범죄자들과 동류가 된다는 것에 부정적인 건 당연했다.[5] (독)Wilddiebkommando Oranienburg. (영)Oranienburg Poacher's Unit[6] 사상범들이 들어가긴 했으나 사상범들은 극소수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잘못하면 반란이나 쿠데타 가능성도 있었으니까...[7] 범죄 전과로 인해 징집 및 모병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들로 구성되었으니 독일 육군이 이들을 어떻게 봤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8] 지금이야 "성노예를 데리고 다닌" 행위 자체가 범죄 행위에 포함되지만, 당시 독일에서는 성노예든 아니든 "유대인과의 성관계"가 더더욱 엄격하게 금지된 범죄행위였다. 왜냐하면 '우수한' 게르만족이 '더럽고 하등한' 유대인과 몸을 섞는 건 안 될 일이기 때문이었다. 비슷하게 독소전쟁 당시에도 '열등한' 슬라브인, 즉 소련인들과의 성관계는 불법이었다.[9] 참고로 독일군이 즉결처분권이 가능해진 건 1943년 이후였다. 즉 오스카 디를레방어는 어떤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 지휘관들도 받지 못했던 특권을 부여받았던 것이다.[10] (독)Sonderkommando Dirlewanger. (영)Special Unit Dirlewanger. SS-Sonderbataillon Dirlewanger[11] 말이 좋아 자원병 조직이었지, 중범죄자들 한정 자원병 조직이었다.[12] Sonderregiment Dirlewanger[13] Sonderregiment Dirlewanger[14] 이들 대부분은 당연히 강제수용소를 포함한 형무소에서 징집된 중범죄자이거나 탈영병들이었다. 특히 이 2,500여명 중 단치히-마츠카우(Danzig-Matzkau)에 있었던 SS수용소 출신의 독일인 죄수 1,900여명이 주축이었다.[15] 이때 영화 <다운폴>에서 자주 언급되어 알려진 헤르만 페겔라인이 히틀러에게 직언하여, 디를레방어의 보직해임과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의 암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16] (영)SS Special Brigade Dirlewanger. (독)SS-Sonderbrigade Dirlewanger[17] Dirlewanger Brigade[18] 정확하게는 12월, 'SS-Sturmbrigade Dirlewanger'라는 명칭하에, 무장친위대 전투여단으로 재편성되었다.[19] 사실 여단으로 확장되었던 시점부터 디를레방어 부대에서 탈영병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는데, 나치 독일의 패망 시기이다 보니 범죄자들 특유의 이기적인 생존본능이 더욱 발현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20] 36. Waffen-Grenadier-Division der SS[21] 최대 6,000명까지 확장되었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22] 당장 연대장급부터가 부정부패 등의 범죄로 인해 좌천된 놈들 투성이었고, 초대 사단장이었던 프리츠 슈메데스(Fritz Schmedes)도 힘러에게 찍혀서 좌천성 인사를 당한 인물이었다. 사단장과 연대장들이 그 수준이었으니 아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사단으로 증편된 시점에서 이 부대는 횡령은 기본이고, 군기는 그 어떤 독일군보다 막장인 사상 최악의 교도소 집단이었을 뿐이었으며, 여단으로 증편된 시점에서 급증했던 탈영병들은 사단으로 확장된 시점에서는 더더욱 기승을 부렸다.[23] 면모를 쓰고 위장패턴이 그려진 우의를 입은 국방군 병사의 뒤에 있다. 칼라장이 다른 친위대와는 다르며 훈장도 착용하고 있다.[24] 수용소에서 물자 착복을 하다가 걸려서 부패혐의로 처벌된 뒤, 이 부대로 온 범죄경력이 있는 놈이었다. 게다가 전쟁범죄 전과까지 추가된 상태였다.[25]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군의 보병사단 편제는 10,000명이 정원 기점이었기 때문에 사단 정원이 40%나 미달이었다.[26] 독일측 자료로는 제72SS연대였다고 함[27] 비슷한 예시로 전쟁 말기가 되면, SS 대원들은 독약을 소지하고 다녔다. 연합군이 체포하기 전에 자살하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실제로도 적지 않은 SS 대원들이 체포되기 직전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하인리히 힘러도 이렇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