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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Arthur Karl Greiser 아르투어 카를 그라이저 |
출생 | 1897년 1월 22일, 독일국 프로이센 왕국 포젠주 슈로다 (現 폴란드 비엘코폴스카주) |
사망 | 1946년 7월 21일, 폴란드 인민 공화국 포즈난 |
복무 | 슈츠슈타펠 (1931년 ~ 1945년) |
최종계급 | 크릭스마리네 대위 슈츠슈타펠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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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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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헤르베르트 바케, 오른쪽이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그라이저. |
2. 초기 행적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에서 태어난 그라이저는 고등학교시절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학교를 중퇴하고 1914년 8월에 해군에 입대했다. 1917년 7월에 해군소위로 임관 후 해군 조종사가 되어 비행대에서 근무하며 종군했는데 1918년 10월에 부상을 입고 1919년 봄까지 입원했다.3. 독일 사회당
전후 독일 의용군에 참가한 그라이저는 1919년부터 1928년까지 단치히의 수출업자로 일하다가 1922년에 독일 사회당에 입당했다. 1924년에 단치히의 철모단 단원이 되었는데 1928년부터 1930년에는 단치히 항구에서 모터보트 여객선의 선장으로 일했다.4. 나치당 활동
1929년 11월 1일에 나치당과 돌격대에 입대한 그라이저는 단치히 대관구의 상업부분 참모로 취임했다. 1930년 10월에 헤르만 괴링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단치히 대관구의 지도자로 임명되었지만 알베르트 포르스터가 지도자로 취임하자 그라이저는 그 대리로 일하게 되었다. 단치히 의회의 나치당 의원단장이 된 그라이저는 1931년 6월 30일에 돌격대에서 친위대로 이적한 후 1932년 10월 5일에 반정부 활동으로 엘빙크의 지방재판소에서 200마르크의 벌금과 일주일의 징역형을 받았지만 12월 20일에 은사로 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 1933년에 단치히의 외교문제 담당국장이 된 그라이저는 단치히 의회의 부의장이기도 했다.5. 제2차 세계 대전
1934년에 의장이 된 그라이저는 폴란드 침공 후 폴란드령 가운데 구 독일제국령이었던 지역의 독일복귀를 추진하여 포젠 대관구를 설치하여 1939년 10월 21일에 대관구 지도자로 취임했다. 1940년 7월 7일에 독일 국회의장이 된 그라이저는 국가 사회주의 자동차군단(NSKK)및 국가 사회주의 항공군단(NSFK)도 주관하여 각각 대장과 중장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원래부터 소속했던 해군에선 예비역 해군대위의 계급도 주어졌다.6. 홀로코스트의 주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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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테란트 대관구지도자(Gauleiter) 및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아르투어 그라이저. |
그렇게 건설된 헤움노 절멸수용소에선 가스바겐(또는 가스트럭)이 가동되어 15만 ~ 20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성으로 위장된 이 캠프에선 유대인들을 향해 나치는 샤워실로 향한다고 거짓말을 했고, 그렇게 가스바겐에 탑승한 유대인들은 자동차 베기가스에 질식해 사망했다. 희생된 유대인들은 존더코만도(유대인으로 이루어진 특별노동자)들에 의해 수습되어 숲에서 비밀리에 화장되었다. 그리고 존더코만도 역시 주기가 차면 총살된 뒤 화장되었다. 그리고 이 수용소는 1944년, 증거인멸 차원에서 폐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