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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08:21:02

카를 되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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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방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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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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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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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전쟁해군 최고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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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제3대 국가대통령
카를 되니츠
Karl Dönitz
[1]
파일:Karl_Dönitz.jpg
출생 1891년 9월 16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주 베를린 그뤼나우
(現 독일 베를린 트렙토-쾨페니크구 그뤼나우)
사망 1980년 12월 24일 (향년 89세)
서독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아우뮈흘레
(現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헤르초크툼라우엔부르크군 아우뮈흘레)
묘소 발트프리드호프 묘지
재임기간 제3대 국가대통령
1945년 4월 30일 ~ 5월 23일
서명 파일:카를 되니츠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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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0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에밀 되니츠
어머니 안나 베이어
형제자매 형 프리드리히[2]
배우자 잉게보르크 베버(1893 ~ 1962, 1916 ~ 1962; 사별)
자녀 우르술라(1917 ~ 1990)
클라우스(1920 ~ 1944)
페터(1922 ~ 1943)
학력 바이마르 레알 김나지움 (졸업)
뮈르빅 해군사관학교 (졸업)
종교 개신교 (루터교회)
신체 179cm / IQ 138[3] (웩슬러 벨뷰 지능검사
소속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4]
군사 경력
임관 뮈르빅 해군사관학교 (1913년 임관)
복무 독일 제국 해군
1910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 해군
1920년 ~ 1933년
독일 국방군 해군
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 원수 (독일 국방군 해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서훈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 }}}}}}}}}

1. 개요2. 약력3. 생애
3.1. 10년 이전3.2. 10년
3.2.1. 잠수함대 사령관3.2.2. 해군 총사령관
3.3. 20일
3.3.1. 대통령
3.4. 전후
3.4.1. 전범 재판3.4.2. 복역과 여생
4. 회고록5. 어록6. 기타7. 수훈 내역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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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의 제3대 국가대통령.

나치 독일의 마지막 국가원수로 유럽에서의 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는 인물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크릭스마리네유보트 함대 사령관직을 맡다가 해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했다. 독일 국방군에서 단 둘 뿐이었던 해군 원수였다.[5]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뒤 뜻밖에도 제3대 나치 독일의 대통령으로 지명되었다. 그 후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그는 그 동안 자신의 체험담 등을 《10년 20일》이라는 책으로 써서 출판했는데, 2차대전 동안 잠수함전과 독일 해군의 실체 등에 대해서 잘 알리는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목인 《10년 20일》은 히틀러 밑에서의 10년, 그리고 히틀러 사후 4대 대통령[6]으로서 보낸 20일.

2. 약력

3. 생애

3.1. 10년 이전

1891년 베를린의 엔지니어였던 에밀 되니츠와 안나 베이어 사이에서 2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네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지만 아버지의 보살핌 덕에 형인 프리드리히와 함께 부족함 없이 자랐고, 1910년 4월에 바이마르 레알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같은 달에 킬(Kiel)에 위치한 뮈르빅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한다.

사관학교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후 5월 12일에 빅토리아 루이제급 방호순양함인 헤르타에 생도 신분으로 승선하여 순항훈련을 시작했고, 이듬해 4월 1일에 순항훈련을 마치고 사관학교에 입항하여 나머지 교육을 받은 후 4월 15일에 해군사관후보생으로 임관, 1913년에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파일:external/www.lessignets.com/Donitz_WWI_U-39.jpg
1917년 U-39 당직사관 근무중인 되니츠 중위

제1차 세계 대전 때 지중해에 있다가 SMS 괴벤과 함께 오스만 제국 해군으로 편입된 경순양함 브레슬라우에서 항해장교로 근무했고, 잠수함의 함장[12]까지 진급하여 독일 해군 사상 최초의 잠수함간 연합작전을 수행했다. 1918년에 영국 해군포로가 되기도 했으며, 종전 후에는 순양함 함장도 역임하다가 재군비 선언 이후로 잠수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어 잠수함대의 재건에 힘을 썼다.

되니츠가 영국군 포로 수용소에서 출소하여 귀향하였을 때 해군 본부에서는 그의 재복무 의사를 타진하였다. 이때 그는 인사처장에게 "우리가 다시 잠수함을 보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질문했는데, 이는 바이마르 독일의 잠수함 보유를 금지한 베르사유 조약에서 장차 자유로워질 것인지에 대한 전망을 묻는 것이기도 했다. 인사처장은 "상황이 항상 이렇지는 않을 것이며, 몇 년 내에 잠수함대를 꾸릴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긍정적인 답을 주었고, 이는 되니츠가 다시 해군에 투신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되니츠는 수상함 관리 보직을 전전하며 경력을 쌓았는데, 훗날 저술한 회고록에서도 이야기하듯 '해군 장교는 잠수함과 수상함 양면에 걸쳐 정통해야 한다'는 그의 보직 이념은 바로 이 때 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잠수함 부대장으로 임명될 때의 일화가 재미있다. 되니츠가 지휘하는 순양함 엠덴에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상급대장과 동료 장교인 귄터 뤼톈스(Günther Lütjens) 대령이 방문하였을 때의 이야기이다. 훗날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기함 비스마르크와 함께 전몰하게 되는 뤼톈스 또한 당시 순양함 카를스루에의 지휘관으로서 2차 함장 보직을 수행 중이었는데, 뤼톈스는 본래 엠덴이 취항하기로 되어 있던 동방 항로를 자신이 맡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이 항해는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카를 폰뮐러 대령 지휘하에 인도양에서 전략적인 역할을 수행하다 격침된 수훈함인 순양함 엠덴의 자취를 따르는 것으로서, 바로 그 이름을 이어받은 배의 함장인 되니츠에게 있어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임무였다. 이 탓에 오랜 지기였던 두 사람이 가벼운 입씨름을 벌이는 와중에 훗날 되니츠의 감상대로 '놀랍게도' 총사령관이 끼어들어 말을 멈추게 했고, 되니츠와 뤼톈스는 졸지에 그 자리에서 새로운 보직을 맡았다.[13]

뤼톈스는 빌헬름스하펜(Wilhelmshafen)의 북부 전단 사령부 참모로 전출되었다가 베를린의 해군본부 인사처장을 맡았고, 되니츠는 5일간의 대기 발령 기간을 가진 후 베디겐 전단장에 취임하여 다시 잠수함 요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와 같은 급작스런 보직 이동은 바로 독일의 U보트 보유를 재허용한 영국-독일 해군조약 타결에 의한 것으로, 전간기 초입부터 되니츠가 바라 마지않던 잠수함대 재건이 바야흐로 목전에 박도하였음을 알리는, 작지만 큰 사건이었다.

3.2. 10년

3.2.1. 잠수함대 사령관

파일:www_google_co_uk_20171030_230132.jpg
1943년 5월 10일, 타임지 표지 모델로 선정된 되니츠

독일이 본격적으로 재무장을 하고 해군을 재건하던 시기에 타국의 해군, 특히 영국 해군의 수상함 전력과의 격차는 넘사벽이었다. 이때 영국 해군이 잠수함은 한물 간 무기라고 얕보던 통에 당시 독일 해군의 전력 중 영국에 대항해볼 만한 수단은 유보트였다. 전쟁 발발 후에는 대형함들을 건설하는 게 더욱 힘들어지는 까닭에 전쟁 발발 후 되니츠의 예언대로 유보트가 실제로 주 전력이 된다. 그는 유보트 300척만 있으면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단언하고 유보트 생산에 박차를 가할 것을 요구했는데, 경험과 연구에 의해 유보트가 세 척이 있다면 한 척은 실전에 투입되고, 다른 한 척은 훈련, 다른 한 척은 수리와 보급을 해야 하기 때문에 300척이 있다는 이야기는 곧 100척의 유보트가 실전에 투입 가능한 상황을 이야기 한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밝힌다. 그 때문에 그는 유보트 함대 사령관 직은 최대한 빨리 그만두고 유보트의 생산과 배치를 관리 감독하는 지위에 가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리 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서구 군사학계에 퍼져있던 잠수함 무용론, 독일 해군 지휘부가 생각하는 전함 위주의 해군 구성에 완전히 반대되는 의견인데다, 아돌프 히틀러조차 영국과의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발언[14]을 한 마당에 조만간 영국과 전쟁에 돌입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당시 독일 해군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으므로 해군 총사령부는 그를 유보트 함대 사령관에 유임시켰고 결국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보트는 꽤나 비싼 고급 장비였다. 척당 300만 달러 정도였는데, 이것은 60대의 4호 전차와 맞먹는 가격이다. 즉, 유보트 300척이면 약 18000대의 4호 전차 가격이다. 독일이 만약 개전 전까지 300척의 유보트를 마련했다면 도리어 폴란드 육군에게 베를린이 점령당했을지도...[15]

때문에 유보트가 한참 공포와 엄청난 전과를 불러 일으키던 시절인 1939~41년은 실제로는 북대서양에서 가용 유보트가 평균 7척, 심지어는 단 1척밖에 없는 날도 많았다. 하지만 그 몇 척 안되는 유보트가 하마터면 영국을 거의 거덜낼 뻔했으니, 되니츠가 원했던 대로 그 시기에 대서양을 100척의 유보트가 매일같이 들쑤시고 다녔다면 영국은 전면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유보트의 종횡무진하는 활약에 세간에서는 처칠과 되니츠의 싸움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가 원하던 숫자만큼의 유보트가 실제로 배치된 것은 이미 대서양의 전황이 기울어 어떻게 해볼 수도 없게 된 1943년 근처로, 그나마도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뒤 히틀러와 직접 담판을 벌여서 얻어낸 성과이다. 독일 해군이 얼마나 푸대접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일화 중 하나다. 그리고 이 때문에 알베르트 슈페어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16]

문제는 이때는 이미 영국 해군은 당할 대로 당한 나머지 유보트 탐지, 격침 전술의 달인이 되어있던 상태였다는 거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로는 역시 미국의 참전으로, 미국이 참전하기 전 영국이 가장 급한 때에 적절히 구축함50척 지원한 것부터 시작해서 열흘에 한 척씩 뽑혀 나오는 수송선, 선단 호위에 필요한 구축함과 항공기, 대잠용 호위항모 등 질과 양에서 모두 무지막지한 지원이 영국에게 가는 바람에 1943년 5월 이후 유보트는 변변찮은 전과도 하나 만들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유보트를 약화시키고 다시 부활하지 못하게 하려고 영국과 미국이 호위 항공모함을 100척이나 양산해서 바다를 도배했으며, 상당한 양의 항공 전력이 대서양에 발이 묶인 것을 생각한다면 1943년 이후에도 유보트는 밥값을 어떻게든 한 셈. 실제로 되니츠도 "전과를 기대할 수 없지만 출격은 지속해야 한다. 유보트가 출격을 안 하면 대서양에 깔린 해군 전력과 항공 전력이 몽땅 독일로 몰려들 것이다."란 언급을 한 바 있다. 결국 유보트 기지가 거의 작살나고 씨가 말라버린 1944년에 연합국이 대규모 해/항공 전력을 동원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펼치면서 이 말은 현실이 되었다.

3.2.2. 해군 총사령관

에리히 레더 제독이 비스마르크 격침해군 운용에 대해 히틀러와 갈등을 빚어 해군 총사령관에서 자진사임을 한 후 그의 뒤를 이어서 해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레더 제독은 총사령관 후보로 수상전 전문가 롤프 칼스 제독[17]과 되니츠 제독 두 사람을 추천했고, 히틀러는 되니츠를 선택했다. 이로써 해군 대장(Admiral) 계급이었던 되니츠는 상급대장(Generaladmiral)을 건너뛰어 곧바로 원수(Großadmiral)로 진급하였다.

히틀러는 유보트 함대 사령관인 그의 입김으로 대양함대를 해체하려 했지만, 정작 신임 해군 총사령관이 된 되니츠는 면밀히 검토 후, 자료를 들이대며 대형함들을 전부 해체해봤자 나오는 자원과 소득도 거의 없고, 해체 과정에서 돈과 인력만 낭비한다. 그러느니 그냥 이대로 놔두기만 해도 연합군은 이들을 두려워 할 것이라고 설득하여 결국 대형함들을 다 지켜냈다. 실제로 이 말이 맞아서 대전 당시 노르웨이에 배치된 비스마르크급 전함 2번함인 티르피츠는 출항한다는 소문 하나만으로 영국-소련간의 북극 항로의 수송 함대를 긴장하게 만들 정도로 골칫거리가 되었다. 영국 입장에선 1번함 비스마르크에 의해 영국 해군의 상징이던 순양전함 후드가 격침되었던 경험이 있어 절대 무시할 수 없었고, 미군 입장에서도 동부전선에서 히틀러를 상대로 어렵게 버티고 있던 소련을 그나마 빠르게 지원할 수 있던 항로가 위협받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대서양에 16인치 전함인 넬슨급 전함 로드니와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메사추세츠, 기타 자유 프랑스 해군의 함정 등이 묶이는 등 여러모로 연합국의 속을 박박 긁어댔다.[18] 그렇지만 그런 판단을 내렸던 것과 별개로 되니츠 제독이 그 이후에도 제일 관심을 쏟은 함선은 계속 그래왔듯이 그 이후에도 오로지 유보트였다.

보수적이고 나치즘과는 거리가 먼 해군에서 나치즘에 대해 이해를 보이는 등의 모습을 보여서인지[19] 히틀러의 신임을 받았으며 히틀러는 자살하기 전 정치적 유언으로 자신의 직위인 총통을 다시 나누어서 대통령과 총리로 분리시킨 후 되니츠를 차기 대통령 겸 전쟁장관으로 지명했다. 총리로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지명했으나, 괴벨스는 히틀러를 따라 자살하면서 사실상 되니츠의 단독 정부가 되었다.

3.3. 20일

3.3.1. 대통령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Second_World_War_1939_-_1945-_Germany-_Personalities_BU6711.jpg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업무 종결 후 영국 육군에게 체포되는 되니츠. 뒤따르는 두 사람은 알프레드 요들 상급대장, 산업생산장관 알베르트 슈페어
체포되는 플렌스부르크 정부 요인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

그의 자서전 《10년 20일》에 의하면 그가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음을 알게 된 후, 곧바로 당시 사실상 권력 2인자였던 하인리히 힘러를 불러 히틀러의 유언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되니츠에게는 힘러의 무력인 SS에 대항할 수단이 사실상 없었기 때문에 힘러를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들이기 전에 책상 위에 권총을 꺼내두고 서류로 가려둘 정도로 담판을 앞두고 매우 긴장했으나, 유언장을 읽은 힘러는 나치식 경례와 함께 "각하 밑에서 차석이 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라 외치며 그냥 버로우했다고 한다. 되니츠는 "그건 상관없다."며 허락했지만, 힘러는 곧바로 신분을 위장하고 도망치다 영국 육군에 체포당해 연행되다 자살한다.[20]

자서전에 따르면, 되니츠 스스로는 히틀러가 전쟁 초반을 제외하고서는 그를 별로 특출나게 평가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계자로 지목된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하며 나중에야 히틀러가 자신이 죽은 후 최후까지 독일군을 싸우게 할 사람으로 그를 지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영화 《다운폴》에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듯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패전을 기점으로 권력의 최측근들 및 독일 국방군(특히 육군) 수뇌부에 극도의 불신을 갖고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떨어져 임무에 충실했던 되니츠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프로이센의 귀족이나 왕당파들이 포진한 육군은 예전부터 히틀러와 좋은 관계라고 하기 힘들었고, 공군은 헤르만 괴링의 배신에 가까운 행위로 신뢰를 잃었으며[21], 마찬가지로 국방군은 아니지만 SS 또한 하인리히 힘러의 사실상의 배반으로 인해 히틀러에게 단단히 찍혀버린 후였다. 해군은 육공군이나 친위대에 비해 정치적인 힘이 미약했고 해군 수뇌부 사이에서 군이 정치에 크게 개입하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점으로 인해 전쟁 말기에 히틀러가 군 세력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조직이라고 생각했던 탓도 있다.

또한 맨 위의 어록에서 나오듯 정치적 활동보단 국가에 충성하며 명령을 수행하는 군인적인 모습 때문에 아마도 전쟁을 지속할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되니츠는 히틀러의 기대와는 달리 자멸적인 최후의 항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되니츠는 총통의 권한을 이어받은 후 동부 전선에서 민간인과 병력을 철수시키고, 영미군에게는 항복하지만 소련에게는 항복하지 않고 계속 싸워서 그들의 진격을 막아내는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을 바랐다. 하지만 이에 소련이 자신들도 항복 협상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서방 연합군 또한 되니츠의 구상을 받아주지 않았다. 이때 그는 무능한 빌헬름 카이텔 육군 원수 대신 사석에서 대화 중 자신과 전략적 견해가 비슷한 것을 알게 된 에리히 폰 만슈타인 예비역 육군 원수를 불러들여 해당 직책을 맡기려고 했으나 연락이 되질 않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 페도어 폰 보크 예비역 육군 원수는 되니츠와 연락이 닿았지만, 가족과 함께 전용차 편으로 이동 중 영국 공군 전투기의 공격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합류는 무산된다.

협상 초기에 그는 협상가들로 주 전장을 이끈 육군 장성들이 아닌 한스 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제독 등 해군 제독들을 뽑아 연합군에 내보냈는데, 이는 일찌감치 해상에서의 승패가 결론이 난 데다가 협상의 주역이 될 연합군 장성들이 주로 지상군 및 항공 세력과 싸우느라 해군에 대해 적대감이 덜해서 제독들이 찾아가면 보다 협상 분위기가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3.4. 전후

3.4.1. 전범 재판

파일:Defendants_in_the_dock_at_the_Nuremberg_Trials.jpg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피고인 신분으로 출두 당시 모습
(괴링 바로 뒤의 양복 차림의 인물이 되니츠이다.)

독일의 항복 뒤 플렌스부르크 업무 종결 이후 전쟁범죄자로 체포되었다. 이 때 소련의 강력한 반대로 군인 피고들의 군복 착용시 계급장훈장 등 일체의 부착물 부착을 금지당했는데, 이 때문인지 다른 군인 전범들인 괴링, 알프레드 요들, 빌헬름 카이텔은 부착물 없는 군복을 입고 재판에 임했으나 되니츠는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사복 정장 차림으로 재판 출석 및 구치소 수감 생활을 했다.

그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한 발언으로 "저보고 그 일을 다시 하라면 할 것입니다."가 있다. 실제로 죽는 날까지 그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절대 뉘우치지 않았는데, 자신의 나라에 대한 충성을 저버린 군인은 적군에게도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만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군인으로서의 신념을 보여주는 발언으로도 유명하지만, 반성하지 않고 그 행위를 다시 하겠다는 발언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도 많다. 되니츠의 이러한 발언은 발터 모델이 죽기 전날 남긴 '진정으로 내가 범죄에 종사해 왔음을 믿게 되었네. 나는 양심적으로 부하들을 이끌었지… 하지만,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어.'라는 말과 대조적이다.

재판에서 되니츠는 2가지 항목에서 유죄 판결을 받게 되는데, 하나는 <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한 죄>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법 위반>이다.[22]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독일의 침략전쟁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것이 유죄로 인정된 것이다. 본래는 반인륜적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로도 기소할 예정이었으나 강제노역은 주장했어도 학살 범죄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판단되어 반인륜적 범죄로는 기소되지 않았다.[23]

이중 '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한 죄'에 대해서는 이래저래 말이 많았고, 연합군 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이었던[24] 해군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되니츠의 행동에 대한 검사단의 질의에 되니츠를 전폭적으로 옹호하는 답신을 보내는 등 한 때 그의 적이었던 영미 해군에선 전반적으로 그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어떤 영국 제독은 "되니츠가 10년형이면 해리스는 종신형."이라고까지 평했다.[25] 그러나 알베르트 슈페어도 되니츠식의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며 이를 스스로 인정했다.

'전쟁법 위반'의 경우 확실한 죄명으로는 제네바 협약을 위배하고 잠수함을 건조하기 위해서 강제노역을 허가한 것과[26] 무제한 잠수함 전쟁의 실행 과정에서 중립국 선박에 대한 공격을 묵인한 것, 히틀러가 선포한 연합군 특수부대 포로에 대한 무조건 총살 명령을 승인한 것이었다. 되니츠는 이에 자신 휘하의 인원들은 그러한 지시를 실제로 이행한 적이 없다고 반론하였으나, 그 명령을 승인한 이상 시행하지 않았다고 면책되는 건 아니다.

이 죄목 중 중립국 함선에 대한 공격 묵인으로 인해 주로 피해를 본 선박 대부분이 1941년 12월 이전의 미국 선박이었는데, 당시 미국 선박 공격은 히틀러조차도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무제한 잠수함 전쟁은 당시 기준으로도 국제법 위반이었는데, 되니츠는 처음부터 국제법 위반을 각오하고서라도 무제한 잠수함 전쟁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서 이런 생각은 되니츠만이 아니라 적국인 미국과 영국도 하고 있었고,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는 점에서 피장파장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둘은 분명히 다른 문제다. 독일은 중립국 선박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가한 것인데, 국제법에 의하면 중립국 선박이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의심이 들더라도 중립국 선박이면 정선 및 수색 후 근처 항구로 인도[27]하여 판결을 받도록 해야지, 임의로 공격하거나 나포할 수 없다. 반면에 미국은 적국인 일본의 선박을 군함인지 민간선박인지 가리지 않고 공격한 것 뿐이다. 미국이 군함인지 민간선박인지 가리지 않고 씨를 말렸다 해도 독일은 중립국 선박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한 것이므로 같은 수준의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되니츠를 곧장 악당으로 몰아붙일 수 없었는데, 되니츠가 무제한 잠수함전을 펼칠 생각을 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미국이 중립을 표명하면서도 1941년 12월 7일의 선전포고 전부터 대서양 전역에 참전해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1939년 9월 5일 미국은 유보트들로부터 자국 선박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자국 동해안에서 대서양 중앙까지를 '보호 구역'으로 선언하여 자국 군함들로 하여금 연합군 상선들을 보호하도록 지시했고, 이 때문에 수 차례 유보트와 미국 군함 간의 충돌이 일어나 이미 양국의 관계는 급격히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1년 6월 21일에는 미국이 '즉각 사살' 지시를 내려 본격적으로 유보트를 격퇴하고자 하였고 되니츠는 이를 구실로 미국 동해안을 습격할 계획을 본격적으로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미국 측에서도 되니츠를 무작정 처벌하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없지 않았고 자신들 역시 태평양에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벌였으며, 독일 측에서 나중에라도 꼬투리를 잡으면 난처할 수 있었던 것. 전후 전범재판에서 미국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자국(미국) 잠수함대도 독일과 같은 종류의 무제한 잠수함전을 벌였다고 증언해 되니츠를 옹호하기도 하였고 때문에 무제한 잠수함전에 대해서는 유죄는 인정되었으나 처벌은 면제된다. 되니츠가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받은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3.4.2. 복역과 여생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는 되니츠
1976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에서의 모습. 생전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파일:말년되니츠.jpg
말년의 모습

최종적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고, 1956년에 형기가 만료되어 출소했다. 2년 후인 1958년 자서전 《10년 20일》을 집필하며 2차 대전 당시 독일 해군과 전황에 대해서 분석하였다. 이는 이후 전세계 해군 관계자들에게 찬사를 받게 된다. 1960년엔 상관이었던 레더 제독의 장례식에 참석해 조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90에 가까운 나이까지 꽤 장수한 편이라, 서독 해군 장교들 사이에서 일종의 큰 어르신, 원로 대선배에 가까운 예우를 받으며 조용히 지냈다. 상술한 바와 같이, 국방군 내에서도 나치색이 옅은 편이었던 해군에다가[28] 본인의 신념 또한 나치가 아닌 독일이란 국가 그 자체에 충성했던 행적 덕분이었다.[29]

198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독일 연방군의 금지 훈령에도 몇 명의 해군 장교들은 정복을 입고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1990년대 후반의 독일 국방군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되니츠의 가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말년의 되니츠는 오랜 시간 자신이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워 했던 전후 서독 사회의 새로운 물결을 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한다. 되니츠의 세 남매 중 아들 클라우스 되니츠(1920 ~ 1944)[30] 와 페터 되니츠(1922 ~ 1943)[31] 모두 2차 대전 중 해군에서 복무하다 전사했고, 딸인 우르술라(1917 ~ 1990)만이 1990년까지 살았다. 참고로 우르술라와 결혼한 되니츠 제독의 사위인 귄터 헤슬러(1909 ~ 1968) 해군 중령 역시 U-107 함장을 지낸 잠수함 에이스였고, 소령 진급 이후론 주로 잠수함사령부의 참모로 근무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4. 회고록

《10년 20일》은 현재 한국에도 정식 출판되어 있다(삼신각, 1995). 역자는 대한민국 해군 예비역 준장안병구대우조선해양 사외이사로, 안 제독은 국내 제1호 잠수함장보고함의 초대 함장도 역임했다. 독일어 읽는 방법을 모르는지 만슈타인을 맨스타인 식으로 번역했다. 한국의 현역군인들이 번역한 책이 대개 그렇지만 말이다. 안병구 제독 등 한국 해군의 잠수함 인수요원들은 독일에서 독일 해군 장병들과 함께 지내며 크릭스마리네와 되니츠에 대한 이야기들을 접했는데, 이들은 귀국 후 크릭스마리네와 되니츠 제독 등에 대한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국내 여론을 조성하는 데 한몫을 했다.

이 회고록은 대서양의 잠수함전에 대한 귀중한 사료이지만, 만슈타인이나 구데리안 등의 나치 고위 군인들의 회고록과 비슷한 논조를 가지고 있다.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계에선 히틀러와 나치즘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다는 점을 문제시하고 있다. 당시 독일군 출신들(육군, 친위대, 공군, 해군 모두 포함)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대부분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선 긍정적이지는 않지만 부정적이지도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히틀러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선 서로 암묵적으로 합의라도 한듯 별로 비판하지 않았다. 되니츠 또한 히틀러의 각종 오판과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전쟁범죄에 관해서 부정하지 못하면서도 은근슬쩍 히틀러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자기 변명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되니츠는 회고록에서 이들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전후 등장한 네오나치에 대해서 쓸모 있다고 평하는 등 나치즘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2014년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구데리안의 회고록의 15쇄 서문을 아들인 독일 연방군 육군 소장 하인츠 귄터 구데리안 장군[32]이 집필했는데, '그 시대를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국가에 대한 충성이 의무였던 군인들의 입장을 고려하길 바란다'는 논조로 마무리하고 있다.

5. 어록

군인이란 모름지기 독일이라는 나라가 어떤 체제 하에 있든 조국을 등지려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체제와 다르다고 해서 조국을 등지는 일은, 자신을 희생하며 봉사하는 독일-프로이센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카를 되니츠

6. 기타

자신이 손수 히틀러와 담판지어 육성한 U보트 부대원들에게 매우 지극정성이었다고 전해진다. 웬만한 일이 있지 않는한 되니츠는 작전을 수행하고 복귀한 유보트 승조원들을 직접 맞이하여 격려했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은 헤르베르트 A. 베르터의 자서전 강철의 관에서 자주 확인 할 수 있다.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를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이유는 포르노 유포자에 유대인 박해자라고... 영화 뉘른베르크 (2000)에서도 이를 반영하여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는 역겹다며 포르노 유포자에 유태인 박해자라면서 이런 자와 같이 있기가 싫다고 하자 특별 대우는 없다고 한다. 슈트라이허가 감방 앞에서 피고 모두에게 영국 검사놈은 유대인이라고 주장하자 닥치라고 욕을 퍼붓는다.

히틀러의 전기로도 유명한 영국의 역사학자 이언 커쇼는 자신의 저서에서 '되니츠는 누구보다도 친 나치적인 제독이었으며, 최후까지 항전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도 적극 동의하였고, 히틀러의 권력을 승계한 뒤에 항복한 것은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 뿐, 결코 비정치적인 군인은 아니었다(Kershaw, The End:Germany 1944-45, p. 400.).'고 주장했다.

되니츠가 그렇게 자리를 지킨 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했는가는 다소 의문스럽다. 되니츠의 행적은 전범 재판 이후의 서독 사회에서 일부 참전 군인들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된다. 종전이 가까워지자 해군 자살 특공 부대를 조직하였는데, 이러한 비합리적인 임무를 거부하고 탈영한 장병들을 즉결 처형한 것과[33] 1944년의 해군 원수 연설에서 유대인에 대한 가혹한 조치를 선동하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으며, 석방 후에도 되니츠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발언만을 일관했을 뿐 자신의 죄책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유보트 승조원들과 달리 수상함 등에서 근무한 퇴역 해군 장병들이 되니츠에 비판적인 진술을 거듭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34]

서독 연방정부는 그의 장례식에 서독 연방군 장병들의 참석을 명시적으로 금지했으나, 선술했듯 몇몇 해군 장교들은 이를 무시하고 정복을 착용하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레더 제독과 달리 해군의 지원하에 장례식을 치르지 못한 이유는 상기 이유보다는, 레더 제독은 전후 자체적인 나치 시절에 대한 반성 기조가 나오기 전인 1960년에 사망한 반면 되니츠 제독은 서독 정부의 반나치 기류가 명백해진 지 오래인 1980년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되니츠가 만약 레더와 비슷한 년도에 일찍 죽었다면 그 역시 비슷한 모습으로 장례를 치렀을 것이다.

전범 재판 당시 IQ 테스트 결과에 의하면, 되니츠의 IQ는 138로, 이건 재판에 회부된 전범 중 세 번째로 높은 수치이다(표준편차 24로는 160). 후에 무죄로 풀려나게 되는 제국은행 총재 얄마르 샤흐트(143)와 네덜란드에서 공포정치를 펼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141)에 이어 세 번째. 헤르만 괴링도 138로 공동 3위를 기록했다. 참고

2000년작 영화 뉘른베르크에서는 레이먼드 클루티에가 분했다. 큰 비중은 없고,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를 역겹다고 대령한테 말하는 모습이나 변호사에게 부하 해군 장교들을 증인으로 부를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모습, 닥치라고 욕하는 장면과 판결 장면에서 10년형을 선고받는 모습 등이 전부다. 그리고 계급장이 견장이 아니라 재봉 안 뜯으면 못 떼는 수장이라서 카이텔과 요들과 달리 미 육군 대령에게 계급장 뜯기는 수모를 면한다.

특전 유보트에서 기묘하게 까이는데 적을 찾지 못해 지루해 하는 함내, 함장 침대가 있는 벽면에 걸려있는 카를 되니츠의 초상화에 클로즈업하는데 되니츠의 코 위에(...) 파리가 앉아 있는 방식으로 은근슬쩍 돌려서 까인다.[35]

7. 수훈 내역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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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oenitz로 쓰기도 한다.[2] 카를과는 두 살 차이.[3] 지능 지수 상위 1%, 독일 고위직 2위, 얄마르 샤흐트 그 다음 간다.[4] 무소속이나 나치당의 명예 당원이다.[5] 다른 1명은 에리히 레더이다.[6] 국가의장(Reichspräsident). 총통인 Führer가 아니다.[7] 이 순양함은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의 선포에 의해 오스만 제국 해군에 공여되었고, 이름도 브레슬라우에서 미딜리로 바뀌었다.[8] 독일국방군 해군의 준장은 정식 제독 계급이 아니었다. 소매 띠는 현재와 같은 넓은 금테 장식으로 변경되지만, 견장은 대령과 마찬가지였다. 준장 계급은 해군과 SS에만 존재했으며, 정식 장성은 아니더라도 큰 범주에선 장성으로 분류됐다.[9] Oberbefehlshaber der Kriegsmarine / Oberbefehlshaber는 최고지휘관, 총사령관 양자 모두로 번역할 수 있다.[10] 전쟁해군 최고사령관으로서 겸임하다가 빌헬름 마이젤 대장에게 이임[11] 이때 되니츠의 지휘부가 있던 플렌스부르크로 독일 정부의 일부 기능들이 이전한다.[12] 대위 계급이었던데다, 독일 해군의 함종 분류상 유보트는 함(Schiff)이 아니라 정(Boot)이므로, 정확히 말하면 정장이다.[13] "제군, 입씨름 그만두게! 두 사람 모두 함장 직을 그만두고 새로운 보직을 맡아 주어야겠네." 레더 제독은 냉담하고 간결한 어조로 두 사람에게 즉각 인사 이동을 명했다고 되니츠는 기술하고 있다.[14] 사실 이는 비단 히틀러 뿐만 아니라 나치당 대부분이 가진 생각으로, 당시 당의 2인자라 불리던 루돌프 헤스는 영국이 선전포고를 하자 당황하여 영국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협상을 하려 했을 정도였다.[15] 물론 당시 독일 해군이 추진하던 건함 프로젝트인 Z 계획에 비하면 몇십 배는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생각이었다. 해상장비는 기본적으로 배수량이 몇천 톤 이상이고 4호 전차는 고작해야 20톤 언저리인데 당연히 4호 전차 60대 이상의 가격을 해야 정상인 것이다. 그리고 Z 계획으로 건조되는 함선들은 전함, 항공모함 등 유보트 몇십 척의 단가와 비슷한 대형 함선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독일 해군은 그걸 1945년까지 건조할 생각이었으니(...)...[16] 슈페어는 자서전에서 엄밀히 말해 되니츠는 2대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디스했는데, 그의 자서전에서는 제3제국의 헌법상 오직 선거를 통해서만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기록했기 때문이다.[17] 1885.5.29 ~ 1945.4.15. 최종 계급 상급대장.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자.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 증기선을 정선시킨 스페인 군함에 맞서 출격한 포켓 전함 전대의 지휘관으로, 전역 내내 강경한 지휘를 했다. 1943년 3월 1일까지 북부 해역 사령관을 맡았고, 총사령관 인선에서 탈락한 후 예비역이 되었다가 종전 전에 연합군 공습으로 사망했다.[18] 항해 중이던 영국 수송함대 PQ-17이 "티르피츠가 떴다!!"라는 이야기가 퍼지자 바로 산개했는데, 얼마 안 가 잠수함들과 슈투카들이 몰려들어 결국 각개격파당하며 먹이가 된 역사가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때 티르피츠는 출항한 적 없었고 그냥 본진에 박혀 있었다는 거다. 되니츠의 말대로 대형함들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충분히 있었던 셈이다. 이후로도 티르피츠는 별다른 출항도 없이 이 항구 저 항구만을 전전했지만, 영국군은 이 티르피츠 하나 때문에 계속 똥줄이 타들어갔다.[19] 그의 전임자 에리히 레더는 나치를 싫어하였다. 다만 나치 정권의 해군 재건 계획만큼은 강력하게 지지했다. 되니츠 이전의 해군이 나치즘과 거리를 두었던 건 전임자 레더의 성향을 고려하면 당연했던 것.[20] 되니츠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힘러와의 만남을 '대결'이라고 표현했으며, 힘러의 요청을 허락한 데 대해 "그를 쓸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관직을 주어 등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 수반으로서의 자신의 활동에 방해되지 않게 하려는, 일종의 방임이었다. 애초에 뇌가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다 진 전쟁에서 힘러같은 심각한 요주의 인물을 등용하면 안된다는 걸 알겠지만 말이다.[21] 다만 헤르만 괴링 문서에도 적혀있듯이, 마르틴 보어만이 함정을 판 것이었다.[22] 다만 되니츠는 온건한 편이어서 초기 독일 해군 제독들과 같이 침몰한 배의 포로들을 구출했었다. 또한 잠수함으로 상선을 격침 후 상선의 선원들을 구조하는 구축함을 공격하지 말라는 명령도 하달했다. 이 덕분에(?) 영국 해군이 잠수함을 추격하여 부상시키든, 파괴하든, 일단 포로를 잡으면 독일 국방군보다는 훨씬 나은 포로대접을 해주었다. 다만 전쟁이 깊어지며 영국 공군이 포로를 태운 구명보트를 예인하며 적십자기를 내건 채 가까운 항구로 가고 있던 독일 유보트를 공습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결국 되니츠는 이후에 포로 구출을 금지하였다.[23] 공군 담당이었던 군인 피고들은 반인륜적 범죄에서 유죄 판결이 내려지고 사형을 언도받은 반면 반인륜적 범죄로 기소되지 않은 해군 제독 둘은 사형을 피해갔다.[24] Commander in Chief, Pacific Ocean Areas(CinCPOA). 미 해군뿐 아니라 태평양 전역의 연합군 육상, 해상, 항공 세력을 총지휘하는 자리였다. 같은 시기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남서태평양 해역군 사령관을 맡았다.[25] 해군의 경우 지상포격을 하거나 대놓고 민간선박을 공격하지 않는 이상 민간인 피해와 거리가 먼 군종이고, 그 민간선박조차 전시 징발된 경우에는 위법성 조각사유가 된다. 따라서 이런 함선간의 교전만 일어난다면 일본 해군처럼 탈출한 선원이나 조종사를 고의로 사살한 경우나 제3국 또는 중립국 함선을 공격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상황 자체가 드물어진다. 반면 해리스의 경우 도시를 폭격하는 등 민간인 피해를 입혔고, 심지어 그에 대해 정당성을 주장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저런 이야기가 나온 것.민간인 상대로 폭격한 걸 먼저 시작한게 독일인 건 넘어가더라도 또 연합국에는 이 분도 있었긴 하다.[26] 포로를 노동에 동원하는 건 가능하지만 어디까지나 비군사적인 노동에 한정되어야 한다.[27] 잠수정 전단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28] 되니츠는 나치즘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했지만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에 참여하진 않았고, 전임자였던 레더는 해군 재건 계획만 지지했을 뿐 나치즘은 싫어했었다.[29] 출소하고도 죽을 때까지 본인은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싸웠을 뿐이라고 하면서 본인의 행적에 대해 뉘우치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Cowley, Robert; Parker, Geoffrey (2005). The Reader's Companion to Military History. Houghton Mifflin Harcourt.[30] 1944년 어뢰정 S-141의 정장으로 재직 중 어뢰정이 자유 프랑스 해군 구축함에 의해 격침되어 전사했다.[31] 1943년 자신이 지휘하던 U-954가 영국 해군 호위함에 의해 격침되면서 승조원 전원과 함께 전사한다.[32] 1914.8.23~2004.9.25. 기사 철십자 훈장, 연방 공로 대십자 훈장 수훈자. 하인츠 구데리안 육군 상급대장의 아들이며 1942년 장군참모학교 졸업 후 종전시까지 116기갑사단 참모장교로 종군했다. 종전 후 신생 연방군 육군에 합류, 육군 제3기갑대대장, 14기갑여단장을 거쳐 기갑총감에 올라,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33] 당시 생존한 해군 장병들의 증언과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준 지역 주민들의 인터뷰에 따르면 되니츠 제독의 명령을 받고 즉결 처형을 집행한 독전대SS보다 더 잔혹했다고 발언하였다.[34] ZDF 역사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귀도 크놉의 저서 《히틀러의 뜻대로(Hitlers helfer) - 히틀러의 조력자들》 후계자: 되니츠[35] 괴링은 아예 대사로 우리 정찰기는 어디 있는거죠? 헤르만 괴링 각하?라며 대차게 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