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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0 23:15:09

플렌스부르크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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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렌스부르크 정부
Flensburger Regierung
임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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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파일:망한_German_Reich_(WWII).png
1945년 5월 2일 ~ 1945년 5월 23일
히틀러 사망 이전 멸망 이후
나치 독일 연합군 점령하 독일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역사
1945년 4월 30일 아돌프 히틀러 사망
1945년 5월 2일 플렌스부르크 정부 수립
1945년 5월 8일 독일 항복
1945년 5월 23일 연합군의 점령 및 멸망
지리
수도 플렌스부르크
인문환경
언어 독일어
정치
정치체제 공화국, 임시정부, 대통령제
국가원수 국가대통령
정부수반 국가수상
경제
통화 라이히스마르크(RM)

1. 개요2. 형성
2.1. 내각 명단
3. 활동
3.1. 교섭 전략의 현실성
4. 해산

[clearfix]

1. 개요

베를린 공방전이 끝나가고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한 이후,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독일 해군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을 수반으로 형성된 정부. 정부가 플렌스부르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상 플렌스부르크 정부라고 부르지만, 국가 대통령(Reichspräsident)은 되니츠 제독이, 수상(Reichskanzler)은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재무부 장관이 맡았기 때문에 되니츠 내각 혹은 폰 크로지크 내각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1945년 5월 8일 연합국에 항복한 이후로도 약 2주간 정부 기능을 유지하다가 5월 23일 연합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요인들은 체포되어 전범재판에 회부되었다.

2. 형성

히틀러는 유언에서 대통령직은 되니츠 제독이, 수상직을 괴벨스가 맡아서 자신의 총통직을 계승하라고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히틀러가 집권할 당시 수권법에 의해 총통직으로 통합된 대통령과 수상의 권한 및 직무가 형식상 다시 분리된 것.

하지만 괴벨스는 히틀러의 자살 다음날인 1945년 5월 1일 히틀러를 따라서 베를린의 벙커에서 가족과 함께 자살했고, 그 외 다수의 장관들도 베를린 공방전을 전후로 히틀러에 의해 해임되거나 사퇴한 상황이었다. 이에 5월 2일 되니츠 제독이 재무부 장관 루츠 폰 크로지크를 수상으로 임명했고, 폰 크로지크 장관을 비롯해 아직까지 직을 유지하고 있던 몇몇 내각 인사들이 참여하면서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탄생하게 됐다.

2.1. 내각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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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30,#d0cfed
국가대통령
카를 되니츠
수상 외무장관 재무장관 내무장관
루츠 슈베린 폰 그로지크 빌헬름 슈투카르트
법무장관 산업생산장관 농무장관 노동장관
오토 게오르크 티라크 알베르트 슈페어 헤르베르트 바케 프란츠 젤테
전쟁장관 교통장관 우정장관 군수장관
카를 되니츠 율리우스 도르프뮐러 카를-오토 자우르 }}}}}}}}}}}}
플렌스부르크 정부 내각 명단
직책 이름 정당
독일 대통령 카를 되니츠 무소속[1]
전쟁부 장관
국가수상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무소속[2]
외무부 장관
재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 빌헬름 슈투카르트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법무부 장관 오토 게오르크 티라크
산업생산부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
농무부 장관 헤르베르트 바케
노동부 장관 프란츠 젤테
교통부 장관 율리우스 도르프뮐러
우정부 장관
군수부 장관 카를-오토 자우어[3] 무소속

사실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각료들이 사퇴하고, 나치 독일 정부의 유력 인사들은 패전 후 있을 전범재판을 피하고자 플렌스부르크 정부에 참가하지 않고 이미 해외로 다들 도망갔다. 그래서 카를 되니츠가 장관들을 구성하는 데 매우 애를 먹었고, 결국 나치 독일 정부의 내각 중 2/3에 해당하는 직책만 임명했다. 그리고 대부분 각료들도 나치 독일에서 히틀러에 적극 협조했던 인사들이 아니라 관료들 위주. 슈페어는 원래 군수장관이었으나 산업장관으로 이동시키고, 군수장관 자리에는 교통부 차관이던 자우어를 앉혔다.

3. 활동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45-05-01GerWW2BattlefrontAtlas.jpg
4월 30일 히틀러의 자살 당시 전황. 하얀 영역이 독일의 영토였다. 붉은 영역이 독일 최후 영토인 지도는 이것을 참고.
말 그대로 희망이 없는 상황. 중간중간 연합군에 의해 영토 여기저기가 분단되어 있다. 라트비아 지역의 하얀색은 북부집단군의 잔해인 쿠를란트 집단군이 주둔하던 쿠를란트 포켓. 이 집단군은 공식적인 항복 조인 이후인 1945년 5월 12일에 항복했는데 병력이 약 20만 명에 달했다. 지도 위쪽에는 노르웨이 남단부만 나와 있지만, 노르웨이 역시 나치 독일이 마지막까지 장악한 몇 안 되는 피점령국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econd_world_war_europe_1943-1945_map_en.png
5월 8일 항복 당시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서방 연합군과의 항복 교섭뿐이었다. 교섭 목표는 영국, 미국에 항복하면서 동부전선에서는 전쟁을 지속하며 소련의 서진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5월 4일에 되니츠 대통령은 자신의 후임으로 해군총사령관에 임명된 해군상급대장 한스 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제독과 해군대장 바그너 제독을 영국 육군원수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에게 파견[4]해 항복을 교섭하게 했다. 이 날의 교섭을 통해 네덜란드, 덴마크를 비롯한 서부전선쪽의 독일군에게는 되니츠의 항복 명령이 전달됐다. 하지만 다음 날 프랑스랭스에 머무르고 있던 연합군 총사령관 미 육군 원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이 동/서부 전선 양쪽에서, 동시에, 무조건 항복만을 협상 조건으로 내걸면서 이러한 목표는 난관에 부딪힌다. 이에 되니츠는 협상을 담당하던 폰 프리데부르크 제독과 육군상급대장 알프레드 요들 장군에게 가능한 협상을 지연시켜 최대한 많은 독일 군인들을 소련군에게서 벗어나게 하고자 시도했지만, 독일군의 의도를 간파한 아이젠하워 장군이 "당장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으면 소련군 점령 지역에서 건너오는 독일군과 민간인들을 향해 발포하겠다."라고 엄포를 놓았다.[5]

결국 되니츠 대통령은 5월 7일에 요들 장군에게 무조건 항복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고, 5월 8일에 독일은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5월 8일의 항복 서명은 독일이 소련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영국, 미국에만 항복한 것이었다. 소련은 참전국 중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내며 독일 지상군(Heer)의 대부분을 상대하고 독일 영토의 절반을 점령한 상태였기에 반드시 독일의 항복을 직접 받아야 했다. 스탈린은 이 점을 이유로 8일의 항복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영국과 미국도 이를 인정했다. 그래서 소련은 다음날인 9일 베를린에서 한 번 더 항복 서명을 받았다.

3.1. 교섭 전략의 현실성

"Last year the German government put forward the demand for the Sudetenland on purely racial grounds; but subsequent events proved that this demand was only put forward as a cover for the annihilation of Czechoslovakia. In view of this experience… it is not surprising that the Poles and we ourselves are afraid that the demand for Danzig is only a first move towards the destruction of Poland’s independence."
"작년 독일 정부는 순전히 인종 분포를 이유로 주데텐란트를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뒤이은 사건을 통해 그 요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멸이라는 목표를 감추기 위한 구실일 뿐이었단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 경험으로 비추어 보아... 폴란드우리 쪽에서 단치히에 대한 요구가 폴란드의 독립을 파괴하기 위한 첫걸음일 뿐이라고 우려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핼리팩스 경, 1939년 7월 20일 주영 독일대사 디르크젠(Herbert von Dirksen)에게.[6]

되니츠 대통령은 즉시 전면 항복을 다그치는 아이젠하워 장군의 강경한 태도에 "아이젠하워, 이 사람 정말 정치 감각이 없군. 종전 후의 상황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잖아."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종전 후에 전개될 것으로 예측된 냉전 상황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연합군 측은 이미 얄타 회담에서 전후 처리에 대한 합의를 자기들끼리 끝내놓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 망해가는 독일 정부가 냉철한 척 정신승리를 해봤자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7]

당시 독일 입장에선 영-미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소련 사이의 알력을 최대한 이용하여 유리한 강화조건을 얻어내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한 긍정적인 대안이었다. 그러나 서방 연합국 입장에서는 그 대안을 받아줄 동기가 없었다. 이미 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데다가 2차 대전 개전 초기에 프랑스와 소련 서부 전선을 박살낸 위험하기 짝이 없는[8] 적을 멀쩡히 두고 갈라설 이유가 없었다. 독일이 비리비리하고 별 볼일 없었다면 모를까 21세기인 현재에도 볼 수 있듯 언제든지 유럽 강대국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국가이기 때문에[9] 영미와 소련이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의 숨통을 틔워주고 써먹는다는 선택지는 제3차 세계 대전을 유발할 수 있는 자살 행위였다. 물론 결과적으로 숨통 틔워주고 써먹기는 했지만 그건 항복을 받아내고 말 잘 듣도록 참교육을 한 다음의 일이었다.

영-미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 소련 사이에 상당한 갈등의 소지가 있다는 것은 히틀러 자신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역시 몰락 직전까지도 결국 영-미와 소련의 연합 내부에서 균열이 발생할 것이고, 이를 통해 기사회생의 여지가 열릴 것이라고 믿었다.[10] 그러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윈스턴 처칠, 심지어 이오시프 스탈린조차 일단 당면한 가장 위험한 적인 독일을 완전히 무너뜨릴 때까지는 협력을 유지했다.[11]

실제로 서방 진영에서도 나치 독일을 포함한 추축국의 신뢰도는 이미 제로였다.[12] 소련이 아무리 껄끄럽고 신뢰하기 어려운 상대일지언정 적어도 게임의 룰을 완전히 박살내는 나라는 아니었으니 되니츠 혼자 백날 소련은 못 믿을 놈들이라며 나발을 불어봤자 씨알도 먹힐 리가 없었다.[13] 특히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인종청소 범죄는 동서방을 막론하고 나치 정권과의 공생=인류 보편의 최소한의 가치에 대한 포기라는 등식을 성립시켜 타협의 여지를 원천 차단했다.[14] 독일은 영불의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용해 뮌헨 협정이라는 초대박을 터뜨린 적이 있으니, 이제 그 정산의 타이밍이 온 셈이다. 기껏 자기들 손으로 혁명 일으켜서 제2제국을 끝장내놓고도 고작 몇 년 안 지나서 내부로부터의 중상 같은 헛소리를 믿으며 다시 바이마르 공화국을 붕괴시키고 나치당의 집권이라는 악몽을 초래한 민족에게 특히나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럽을 6년간 피로 물들인 나치당 정권의 남은 세력들에 대해 한번 더 존속시켜준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연합국 입장에서는 결단코 좌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영국과 미국이 되니츠와의 단독 강화를 받아들였다면 치명적인 외교적 위신의 실추를 감당했을 것이며, 두 나라에 배신당한 소련 내에 극단적인 반서방 정서가 폭발함으로써 그나마 공포에 기반한 평화를 통해 유지되어온 냉전기의 진영 갈등을 관리하기가 실제 역사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려워졌을 것이다.[15] 그렇다고 명분을 잃는 대신 세력이라도 확실히 구축할 수 있느냐 하면 일단 나치 정권의 잔당을 협상 파트너로 삼고 독일의 정부로 인정해버린 이상 연합국의 의도대로 유럽의 정세를 재편성하는 데 오히려 막대한 지장이 초래될 것이고, 단기적으로 보더라도 어차피 다 이겨놓은 전쟁에서 상대를 제대로 제압하지 않고 숨통을 틔워주게 되는 데다가, 자칫하면 일단 독일을 유지라도 하기 위해[16] 오히려 소련과 맞서야 되는 상황이 되어 단기적으로도 확실한 패착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당시의 독일이 연합군 입장에서 유효한 전략적 가치라도 가졌다면, 소련의 반응을 무시하고 협상을 이끌어 낼 일말의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독일이 독소 국경이라도 지키고 있었다면 모를까, 독일은 연합군이 서유럽에 상륙하기 이전인 1943년부터 이미 소련군에게 밀리고 있었고,[17]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수립된 5월 2일에는 이미 소련군이 수도 베를린에 진입한 상황이었다. 단순히 서방이 전쟁 안하고 물러간다고 해서 전세가 뒤집힐 수 있는 상황을 한참 전에 벗어난 것이다.[18] 서방의 지원 없이도 독일 자체의 힘으로 소련을 완벽하게 막아내고 독소 국경 라인을 방어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줘도 모자랄 판국에 이미 온 베를린이 쑥대밭이 되고 제1차 세계 대전의 노병들에 어린애들까지 끌어내 국민돌격대 같은 총알받이로 내몰 정도로 몰락해버릴 대로 몰락한 당시의 독일은 연합국 입장에서 큰 전략적 매력이 없었다.

결국 나치 독일의 유지는 무조건적으로 서방의 군사적 지원을 포함한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국제법은 장식으로 알고 세계 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을, 그것도 그 추축국의 리더인 나치 정권을 군사적/경제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감각이 전혀 없는 짓이었다. 서방이라고 어디서 돈이 펑펑 쏟아져나오는게 아니었는데 프랑스베네룩스는 전국이 나치에게 쥐여짜였고 영국은 당근에 막대 꽂아서 아이스크림 대용이라고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판이었다. 이들의 뒤를 받쳐주고 있는 미국도 일부 물자에 한해서나마 배급제를 실시하는 등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악영향을 직접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전국민 총옥쇄를 외치며 발악하는 일본까지 제대로 참교육해야 하는데, 굳이 독일 방위를 위해 병력을 유럽에 대거 남겨둘 이유가 없었다. 여기에 일본 또한 독일 사례 들고 나오면서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면 미국으로써는 뒷감당이 어려울 것이 자명했고 독일을 확실한 선례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즉, 독일과의 강화는 사실상 일본에 대한 무조건 항복 기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일본의 선공으로 중립을 깨고 참전한 미국 정부가 자국민에게 "독일 지켜주느라 일본 못 조졌다"고 하면 어떻게 될지는 답이 나온다.

게다가 소련과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봐도, 이렇게 명백한 전범인 독일 나치정권을 살려주고 지원까지 하게 되면 이후 중동, 북유럽 지역에서 친서방 여론은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고 친소파가 득세할 구실만 제공하게 된다. 나치도 나치지만 서방 역시 뮌헨 협정체코슬로바키아 병합, 폴란드 침공 당시 서방의 가짜 전쟁 등등 중부 유럽 국가들 통수 친 건이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만일 서방이 정말 나치와의 강화 같은 짓을 벌였다면 이후 동구권에서 벌어진 1956년 헝가리 혁명이나 프라하의 봄, 동구권 붕괴와 같은 반소 움직임은 어림도 없었다. 소련과 그를 위시한 공산주의의 발호를 견제하기 위해 나치를 살려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일삼은 건, 그야말로 제대로 된 친구 하나없이 오로지 파괴와 정복과 기만으로만 점철된 나치 정권이나 할법한 발상이었다.

만약 독일 내에 쓸만한 대안이 없이 우파는 나치 뿐이고 그 외에는 죄다 친소 빨갱이인 상황이었다면(혹은 그렇게 인식했다면), 울며 겨자먹기로 나치 정권을 유지할 동인이 조금이라도 있었을지도 모르나 당시의 상황은 절대로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나치가 독일 중앙 정치를 장악한 시기는 기껏해야 12년에 불과했고, 당연히 가톨릭 중앙당이나[19] 독일인민당 등 나치에 비해 훨씬 정상적이고 소련에도 적대적인 우파 정치인들이 한가득이었다. 이들이 연합군에게 고분고분하진 않았다지만 적의 수괴인 나치와는 달랐다.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이런 현실을 호도하기에는 영불이 독일과 알고 지낸 세월도 워낙 길었고, 이미 독일 서부 전역이 연합군에게 점령되어 각지에서 기성 비나치 정치인들이 활동을 재개한 상황이라 씨알도 먹힐 리가 없었다. 당장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항복 교섭을 시작한 5월 4일, 쾰른에서는 콘라트 아데나워가 시장으로 임명되면서 정계에 복귀했다. 게다가 사회민주당이라고 딱히 연합국에게 배척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영국만 해도 노동당 애틀리 정권 시절이라 이들에 대한 무지성 빨갱이몰이 따위는 결코 통하지 않았다.

결국, 이 당시의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가능해진 현대인의 시선에서 평가하자면, 1) 연합국의 입장에서 되니츠의 복안에 따를 경우 아무 이득 없이 손실만 보게 될 가능성이 높았으며 2) 정작 미국은 마셜 플랜 등을 통해 되니츠가 말한 전후의 상황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고려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아이젠하워가 되니츠의 주장에 동조한다고 해도, 아이젠하워는 이 정도의 일을 독자 결정할 만큼의 권한을 갖지 못했다. 이 정도의 일은 트루먼과 그의 행정부의 권한인데 반공주의자였던 트루먼도 확실하게 독일을 무릎꿇리고자 했고, 처칠, 드골, 스탈린은 아이젠하워나 트루먼보다도 더 독일을 싫어했으므로 말할 필요가 없다. 또 이미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이탈리아와의 형평성 문제도 고려해야 했다. 명백한 나치 정권인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멀쩡히 살아남는 마당이니 이탈리아는 아예 승전국 지위를 요구했을지도 모른다.[20] 결국 되니츠의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내놓은 대안은 간단히 목을 내줄 수는 없으니 두 세력 사이의 갈등을 최대한 이용하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함으로서 그나마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최선의 방책이었을지도 모르나 현실적으로는 망상에 불과했다. 물론 히틀러도 자살하고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세계 공공의 적으로 전락해, 궁지에 몰릴대로 몰린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그것 하나뿐이었다. 소련과는 달리 서방측과의 전쟁은 기존에 하던 정치의 연장선 상의 전쟁으로 여겨 타협의 여지가 있다는 관점은 나치 독일이 건재하던 시절부터 있었지만, 정작 서방조차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막장 행보를 이어간 데다가 협상마저 베를린 전투가 끝나고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수립되고서야 겨우 적극적으로 시작한다.[21][22]

초기 나치 독일은 베르사유 체제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 과제였는데 베르사유 체제는 협상국이던 미영불과 맺어진거라 그들과 충돌하는건 필연적이었지만, 프랑스를 확실히 꺾어놓고 너무 가혹한 조치를 취해 타협의 여지를 없애버리고 충돌을 오래 끌어버린 것은 나치 독일 자신들이 문제였다. 전쟁을 통해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를 풀어버리는 선에서 끝내고 좀 더 일찍 손을 내밀었더라도 전쟁 초창기 완전히 패배해버린 영국과 프랑스는 궁여지책으로라도 고려해봤을지도 모른다.[23] 하지만 이미 잿더미뿐인 독일에 아쉬운 것은 없기에 어떠한 협상의 여지도 없었다.

이러한 착각은 이미 싹수가 보여서 히틀러도 1945년 봄에[24] 과거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에 대해 듣고, 눈물이 고였다고는 하지만 정작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한 흔적은 없었다.[25][26] 정작 히틀러 본인은 전쟁 말기 내내 아무것도 안하면서 온갖 전쟁범죄는 다 저질러 서방으로 하여금 협상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은 당시에 러시아는 문제가 있긴 해도 선전하고 있는데 나머지 국가들은 졸전하거나 소극적이었다. 그러니까 전쟁을 더 유지한다면 프로이센은 작살낼 수 있지만 러시아는 피해가 누적되고 또 전쟁에서 완전승리하면 가장 이득을 보는 건 오스트리아여서, 근대부터는 이 갑작스런 전쟁 중단이 외려 러시아 입장에서는 외교상으로는 실용적인 판단이었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두고두고 표트르 3세가 욕먹는 것은 수세에 몰린 프로이센 왕국의 상황을 활용해 지금까지 전쟁으로 얻은 이익을 그대로, 혹은 일부라도 가져가는 대가로 화평을 맺은 게 아니라 그냥 얻은 이익까지 고스란히 돌려주며 화평을 맺었기 때문이다. 화평을 맺는다는 것 자체는 납득할 만한 상황이였지만, 단지 표트르 3세의 화평 방식이 조국의 이익따윈 안중에도 없는 개차반이여서 욕을 먹는 것이다. 반면 히틀러의 경우 그의 적국들의 입장에서는 화평을 맺는 것조차 비웃음을 살 행위가 되어도 무방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27]

히틀러뿐 아니라 나치 수뇌부도 마찬가지인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전쟁 도중 사망하자, 괴벨스가 히틀러에게 "여제가 죽었다."며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죽음을 옐리자베타 여제의 죽음에 빗대었지만, 역시나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볼 노력은 없었다. 물론 베를린 공방전이 벌어질 시기쯤 되면 그런 노력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나치 독일은 44년도부터 답이 없어지고 있었기에 제대로 노력을 하고자 했다면 차라리 44년도에 아르덴 대공세 같은 삽질 대신에 동부전선에 병력을 더 투입하는 한편 서부전선을 맡은 주력 국가인 미국과 프랑스, 영국 등에게는 지속적으로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며 그걸 어필했어야 했다. 어쩌면 나치 수뇌부가 서방과 소련의 관계가 파탄나리라 믿고 자신들이 뭘 해도 헛된 희망을 품었기에 그랬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나치 독일은 서쪽에서는 라인란트 재무장, 루르 점령, 베르사유 조약 파기, 안슐루스, 뮌헨 협정을 다 동의해줬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서쪽으로는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침공에다가 남쪽과 동쪽에서는 그리스 침공유고슬라비아 침공, 크라구예바츠 대학살 사건, 독소 전쟁, 리디체 마을 학살 사건, 바르샤바 봉기 과정에서의 폴란드 민간인 학살 등 온갖 전쟁범죄 만행으로 이미 서방과의 관계가 파탄난 상태였으며 동서유럽의 각 피해국들을 막론하고 이들 나라 내부에서도 나치 독일군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또한 서부전선 연합원정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의 정치 감각은 되니츠가 우습게 볼 정도로 떨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탁월한 편이었다. 그는 전후 세계 최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대통령직을 8년 간 수행하며 자국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미국 내 인종차별 문제 해결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지나치게 비대해진 군산복합체와 국방 예산을 효과적으로 축소하고, 사회보장제도를 크게 확충하는 동시에 제국주의 시기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다시 제3세계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영국, 프랑스와 양대 열강으로서 세계의 패권을 두고 다툰 소련 등 냉전 당시의 3강들을 동시에 효과적으로 견제함으로써 충분히 증명되었다. 오히려 아이젠하워는 국내 여론 분열이 극심한 2020년대의 미국 반대편의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마지막으로 (초당파적으로, 나라 전체를 위해) 훌륭했던 공화당 정권'으로 높게 평가받고 역대 미국 대통령 순위에서도 5~10위 내에 넉넉히 안착할 만큼 정치인으로 전향한 군인들 중 독보적으로 성공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협상의 여지도 없는 협상 테이블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

4. 해산

체포되는 플렌스부르크 정부 요인들. 1분 22초부터 요들, 되니츠, 슈페어의 모습이 나온다.

알베르트 슈페어 산업생산부 장관을 비롯해 일부 내각 구성원은 이제 해산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되니츠 대통령은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임시정부로서 존속할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이를 거부했다. 아주 틀린 기대도 아니었던 게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이 항복이 되니츠 국가원수에 의해 독일에서도 승인받았다'고 종전 직후 대국민 연설에서 밝히면서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덕분에 종전 이후 2주 동안 연합군과 독일군이 같이 치안을 담당하는 기묘한 상황도 벌어졌다. 하지만 5월 16일이 되자 소련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인정하는 영국미국을 거세게 비난했다. 플렌스부르크 정부 구성원들은 이 시점에 자신들의 처지를 직감했다.

5월 23일 소련군과 서방 연합군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해산하고 되니츠 제독 등 내각 구성원들을 체포했다. 이후 서독동독 정권이 성립될 때까지 약 4년 4개월의 시간 동안 독일은 연합군의 군정 상태에 놓이게 된다.


[1]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명예당원[2] 일부 자료들에서는 크로지크가 나치당에 입당했다고 하나 크로지크의 나치당 입당 여부에 대해서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도 밝혀지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본인의 동의가 없는 형식적인 수준의 입당이었거나, 아예 이 정도도 하지 않았다는 설이 강하다. 어쨌거나 플렌스부르크 정부 시점에서 크로지크는 당적이 없는 무소속이었다.[3] 군수부 차관으로 히틀러의 유언에서 슈페어를 대신해 군수부 장관으로 지명되었으나 카를 되니츠는 이를 무시하고 군수부를 대신하는 산업생산부를 신설한 뒤 슈페어를 장관직에 앉혔다.[4] 되니츠 제독이 프리데부르크 제독과 바그너 제독을 협상 대표로 보낸 것은 육공군보다 앞서 일찌감치 무력화된데다, 연합국 육군 장군들이 직접 싸운 일이 거의 없어 적개심이 덜할 해군 제독들이 육공군 장군들보다 이들을 설득하기 쉬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5] 물론 아이젠하워의 성향상 실제로 발포를 명령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도망쳐온 독일군 포로들을 소련측에 인계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고 일부는 실제로도 이루어졌다.[6] 역사가 게르하르트 와인버그의 저서 "The Foreign Policy of Hitler's Germany Starting World War II"에 인용된 말이다. 즉 이미 2차대전을 일으키기 전에도 독일은 서방 세력에게 신뢰를 완전히 잃었던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1939년 당시 영국은 독일에게 조심히 굴 수밖에 없었지만, 1945년 미국은 다 털린 독일에게 똑같이 굴 필요가 없었단 것이다.[7] 이 당시 상황을 되짚어보면 나치 독일 아니, 독일의 심장인 베를린은 함락당했고 히틀러괴벨스는 자살했으며 독일 사방팔방에 연합군과 소련군 병력이 밀고 들어왔다. 여전히 자국이 장악한 지역이 많기는 하나 그 영토들도 다 난도질 당한 상태고 연합군이 추가로 밀고와도 막을 병력이 없다. 그 이유야 당연히 전쟁으로 다 날려먹었기 때문이다. 즉 이미 나치 독일은 자국의 역량으로 영토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고 이 상황에서 굳이 연합군이 나치 독일의 숨통을 붙여줄 이유는 없다. 그럴 가치가 이들에게 없기 때문이다. 되니츠 생각대로 어떻게든 연합군과 강화하려고 해도 무엇을 조건으로? 후술하듯 신뢰도도 바닥이지만 신뢰를 해도 당장 박살난 독일군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치 독일과의 강화는 그대로 소련과의 전쟁을 의미하는데 박살난 독일군 수준을 생각하면 그냥 연합국 VS 소련인데 이러면 나치 독일을 살려준 의미가 없어진다. 독일의 역량이 그나마 독일이 강화조건으로 내세울 수 있긴 한데 그건 연합국이 나치 독일 대신에 자신들의 말 잘 듣는 정부를 세워서 활용해도 충분하다. 아무리 좋게 봐도 베를린 전투에서 진 시점에서 나치 독일은 강화조건으로 내세울 것이 없었다. 강화협상을 하려고 했거든 차라리 벌지 전투 이전부터 협상을 시작하고 벌지 전투 같은걸 벌이지 말았어야 했다. 즉 문제를 총합하면 1: 협상에 대한 아무런 시그널이 진작부터 없었고 2: 그 와중에 감점 요소만 벌였으며 3: 협상용으로 내세울 카드가 하나도 없게 된 시점에서야 협상 얘기를 시작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8] 더욱이 조금 방심한 면도 있었지만 서부전선에서는 프랑스를 단 6주만에 박살냈고 동부전선에서는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모스크바 인근까지 밀고 들어오기까지 해서 프랑스나 소련 입장에서는 뭐가 되었든 독일을 그냥 유지시켜줄 수는 없었다.[9] 제1,2차 세계대전으로 알자스-로렌 지역과 리에주 동부, 오데르강 이동 지역의 동부 영토들의 영유권을 대부분 패전으로 잃고, 냉전으로 나라가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고 한 나라 내에서 정부 체제와 이념의 차이까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침내 통일을 이룩하였고, 동서독 통일 이후에는 EU를 주도하는 국가로까지 성장했다. 영국은 상대적으로 북쪽에 위치한 섬나라라는 국토 환경의 한계가, 프랑스는 19세기 내내 지속된 고질적인 인구 정체에 더해 1차 대전으로 인한 인구 상실로 이미 국력의 한계가 명확했고, 독일의 인구, 기술, 영토적 우위는 그 혹독한 베르사유 체제에서의 제재로도 어떻게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님이 입증되었다.[10] 그래서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서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을 경험한 프리드리히 2세의 얘기를 했다고 한다.[11] 처칠을 위시한 일부 연합군 인사는 플렌스부르크 정부와 비슷한 발상을 하긴 했다. 그럼에도 실행되지 않은 것은 서방 세력의 정치적 결정을 처칠 혼자만 하는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계획은 이미 소련도 알고 있었는데 당연히 소련은 이를 비웃었다. 한편 되니츠는 독일 국방군 내에서는 그래도 개념이 있는 축에 들어갔지만 국제법을 무시하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강행한 전범이었다. 국제법을 장식으로 아는 히틀러조차도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하지 말라고 되니츠에게 촉구한 바 있었다.[12] 뮌헨 협정, 독소 불가침조약, 폴란드 침공,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진주만 공습, 홀로코스트 등. 참고로 홀로코스트는 전후에 각잡고 판 후에 그 진상이 확인되었으나 이미 2차 대전 이전부터 나치 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피해 많은 수의 유대인과 집시들이 미국이나 영국, 캐나다, 남미 등지로 도망가고 있었고, 1945년 중반에 이르면 독일 영내에 진입한 서방 연합군은 절멸수용소가 설치된 동부전선 수준은 아니어도 점령지 곳곳에서 강제수용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13] 사실 진짜 못 믿을 이들은 나치 독일이었다. 실제로 되니츠가 아무리 소련은 못 믿을 작자라고 서방 연합국에게 어필해도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진영 연합국들의 입장에서는 "로카르노 조약을 멋대로 파기하고 라인란트를 재무장하고 20년간 금지하기로 한 오스트리아 합병을 추진하고 뮌헨 협정으로 주데텐란트 먹게 해줬더니 그것도 깨고 체코 먹더니 폴란드를 침공하고 독소 불가침조약 깨고 소련을 침공한 놈들이 뭐 어째?"라는 말만 나올 것이다. 되니츠의 생각이 어쨌건 서방 측 연합국은 나치를 믿어주고 싶어도 그간의 행적을 생각하면 불가능했다.[14] 따지고 보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유럽 사회에서 뿌리깊게 이어져오던 반유대 감정의 폭발이라 할 수 있으나, 타 유럽에서도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넘어 국가권력에 의한 정책적 학살이라는 만행에 이른 적은 없었다. 유럽 사회가 괜히 홀로코스트에 경악한 것이 아니며 나치 정권도 자국민들에게 이걸 괜히 숨긴 게 아니다. 아무리 독일에 반유대주의가 만연해 있어도 정상인들은 그렇다고 유대인을 지구에서 지워버리자는 발상을 하지는 않았다.[15] 버트런드 러셀은 이후 냉전기 영미의 대 동방(대 소련) 정책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소련의 권력자들이 극히 비이성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인물들이라고 선전하고 있으나, 실상은 소련의 지도부가 극히 이성적이고 조심스럽게 위기를 회피할 것이라는 전제 하에 짜여져 있다고 평가했다. 상대 역시 죽기는 싫을 테니 굳이 공멸의 길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냉전이 열전으로, 더 나아가 인류 멸망으로 번져나가지 않게 한 최소한의 기반 중 하나였다는 것. 그런데 만약 영미가 되니츠의 복안을 받아들였다면 이는 소련 입장에서는 명백한 배신이고, 따라서 소련 정치인들이 어차피 자본주의 돼지들은 믿을 수 없다. 또 뒤통수를 맞기 전에 차라리 선제공격하는 게 낫다고 판단할 중요한 근거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또한 국제적 신뢰도가 떨어지는 걸 넘어 아예 자기네들끼리도 신뢰가 하락할 지도 모른다.[16] 소련의 공격으로 독일이 완전히 무너지거나 너무 약화되면 견제수단으로의 의미도 없어진다.[17] 물론 이 같은 성과는 미국의 랜드리스에 힘입은 것이었기 때문에 100% 소련의 자력은 아니었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지금까지 랜드리스로 지원해주던 소련과 이제부턴 전쟁에 들어갑니다~"라고 발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18] 애초에 온갖 국제법과 합의는 죄다 씹어먹고 전쟁을 벌인 국가가 항복을 제의한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판을 바꿀 방도가 안 나온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정작 외교적 감각이 없었던 것은 되니츠와 플렌스부르크 정부 측 인사들이었다.[19] 서독 초대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가 여기 소속이었다.[20] 이탈리아는 빠른 항복 및 연합국 가담(살로 공화국 제외), 그리고 국민들의 (살로 공화국의 잔당이었던) 전범 처단을 통해 적국 지위를 면하고 오스트리아, 태국과 같은 특수지위국 지위로 전쟁을 마무리했다.[21] 히틀러의 마지막 공세인 아르덴 대공세마저 동부전선이 아니라 서부전선에, 그것도 동부전선의 병력을 빼가며 가한 일이었다. 서부전선에서 만회를 통해 연합군 측에 독일의 건재함을 알려 연합군을 협상으로 끌어내려 했겠지만, 공세는 실패하고 서부전선마저 구멍이 뚫렸다. 정작 그 공세를 위해 동부전선 병력을 차출해 소련이 더 잘 밀고 온 셈인데, 이제와서 소련 막자고 징징대는 꼴이다.[22] 추축국 간에도 서로 멋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행동을 저지르기 일쑤라 히틀러는 독소전쟁을 일으키며 일본이 뒤치기 해줄 거라고 기대했고, 일본은 반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독일이 미국을 뒤치기해줄 거라고 기대했다. 물론 서로 기대한 것과는 달리 일본은 끝끝내 소련에게 선전포고조차 안 했고, 그나마 독일은 미국에게 전쟁을 걸기는 했지만 미국 본토는 고사하고 함대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말 그대로 서로에게 했던 행복회로를 이번엔 서방에도 한 것이다. 그나마 독일과 일본은 서로 동맹국이었지만 서방은 적국이었다. 차라리 버티고 버티다 천황제를 유지하고 일제 시기에 확보해놓은 대만, 한반도, 남사할린 등 해외 식민지들의 점유권만 상실하고 비교적 본토를 덜 잃은 일본이 더 협상은 잘 했다고 해도 좋을 지경.[23] 물론 독일 스스로도 이미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에 이어 프랑스까지 국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전쟁질을 벌이고 다녔던 탓에 이렇게 점잖은 마무리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이는 추축3국이 공통적으로 직면했던 문제로 당장 일본 제국만 해도 청일전쟁까지야 따갚되가 어느 정도 되었고 조선이나 청에게도 나름대로는 신사적으로 굴었던 편이었지만 러일전쟁으로 국가재정이 파탄 상태에 이르자 이후로는 거의 카드깡 수준으로 재정구멍을 메우기 위해 침략을 하고 또 전비지출을 메우기 위해 침략을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24] 바로 이 해 5월 9일에 빌헬름 카이텔이 나치 독일 대표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뒤이어 일본도 9월 2일에 전함 미주리에서 항복 조약에 서명하면서 2차 세계 대전은 추축국의 패배로 종결되었다.[25]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은 어디까지나 새로 즉위했던 표트르 3세가 중증 독일(정확히는 프리드리히 2세)빠+신체와 정신적 장애+전제군주정의 요소가 맞물리며 발생한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차르처럼 말 한 마디에 모든 걸 할 수 있는 지위도 아니니, 미국 대통령(당시는 트루먼)이 표트르 3세 수준으로 극도의 독일빠에 지적장애가 있어도 불가능하다. 하물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이 그런 사람을 부통령으로 뽑을 리도 없다.[26] 비슷하게, 중동•북아프리카 전선에서 괜히 이탈리아 눈치보느라 무슬림을 포섭하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이미 이븐 사우드는 상황을 눈치채고 말로만 중립을 유지하고 영미 연합국 측에 붙었지만.[27] 소련을 막는다는 것은 서방도 얼마든지 대신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렇다고 연합군 측이 독일과의 전황이나 소련과의 관계에서 꿇리는 상황도 아닌데다 되려 영국이나 프랑스는 독일에 갚아줄 빚만 잔뜩 쌓여 있었다. 하다못해 히틀러가 자기가 쥐었다고 믿은 패를 활용하려는 시도라도 했다면 모를까, 절체절명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주제 파악도 못했는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힘러 같은 인물은 자기가 나서서 자기 살 길을 모색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행복회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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