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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4:26

나치 독일/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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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탈리아 왕국과의 관계3. 일본 제국과의 관계4. 중화민국 국민정부와의 관계5. 미국과의 관계6. 영국과의 관계7. 프랑스 제3공화국과의 관계8. 소련과의 관계9. 아르헨티나, 칠레와의 관계10. 헝가리 왕국과의 관계11. 오스트리아 연방국과의 관계12. 스페인 제2공화국 / 스페인국과의 관계13. 폴란드 제2공화국과의 관계14. 관련 문서

1. 개요

독일의 옛 국가인 나치 독일외교에 대해 다룬다.

2. 이탈리아 왕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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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는 당시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인해 제1차 세계 대전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와 영국에게 손절당했다. 이 때 독일이 라인란트 재무장을 감행하자 이미 영국과 이미 외교적 왕따가 된 이탈리아는 독일의 재무장을 지지하였고, 이로부터 독일과 이탈리아의 동맹 관계가 형성되었다.

사실 애초에 히틀러 자체가 무솔리니 짝퉁이며 파시스트의 원조는 이탈리아였다.일본이 이름만 동맹국이고 실질적인 협력은 없었던 데에 비해 이쪽은 진정한 동맹국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였다면 이탈리아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그리스를 넘보았다. 그러나 그리스의 반격으로 침공이 좌절되자 결국 나치와 히틀러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는 나치가 동진하여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를 장악하는 계기가 됐다.

진정한 의미의 군사 동맹이었지만 그 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을 보면 통 도움이 된 적이 없으며 전쟁 내내 독일의 발목만 잡아왔다. 불필요하게 그리스를 침공해서 친독일적인 중립국 그리스가 연합에 가담해버렸고, 설상가상으로 그리스를 혼자 밀어버리지도 못해서 독일에 손을 벌려 소련 침공에 올인하기도 모자랄 소중한 전력을 분산시켰다. 아프리카 전선에서도 이탈리아가 영국에게 털리자 독일이 전선 붕괴를 막기 위해 불필요하게 병력을 보내서 뛰어난 지휘관 에르빈 롬멜과 소중한 기갑전력이 아프리카에 발이 묶여버리게 됐다.

정작 연합국이 이탈리아에 상륙하자 1943년 연합국에게 제대로 저항도 안 하고 항복했고 무솔리니는 실각했다. 이후 독일군이 무솔리니를 구출해 아직 독일의 영향력이 있는 북부에 무솔리니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국인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살로 공화국)을 세웠다. 하지만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도 멸망했다.

3. 일본 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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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은 추축국의 양대 주력 국가였다. 일제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프랑스까지 침공한 것을 계기로 나치 독일, 이탈리아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며 추축 동맹을 결성했고, 각각 주변국을 침략하며 대량학살을 비롯한 다양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분명 동맹국이었지만 양국 간에는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일례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중화민국 역시 독일의 우호국이었으며 독일은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오랫동안 저울질하였다.[1] 중화민국은 1920년대부터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을 비롯한 독일의 장교단을 초빙하여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을 조직, 군대를 훈련하고 있었고 중독합작이라 불리는 독일과의 군사, 경제 협력을 통해 자국에서 난 텅스텐, 안티몬 등의 전략자원[2]과 독일제 무기와 기계류를 교환하여 근대화에 들어가고 있었다. 독일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두 나라가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1937년 주중 독일 대사 트라우트만과 주일 독일 대사 디르크젠을 통해 트라우트만 공작을 진행하여 양국 간의 화평을 중재하려 했지만 일본 제국의 폭주로 물건너가고 결국 1938년 트라우트만 대사와 팔켄하우젠 장군을 비롯한 고문단을 철수시키면서 중화민국과 우호관계를 단절했다.

그리고 일본과 독일의 전체주의 사상은 외견상의 비슷함은 있었지만 맥락면에서 상당히 이질적이었으며 독일-이탈리아와 달리 예전부터 쭉 알고 지내온 관계도 아니었다. 기술에서는 서로 협력하기는 했으나 독일이나 일본이나 둘 다 그 기술을 제대로 못 써먹었다. 제프리 메가기의 <히틀러 최고사령부>에 따르면 독일 육군참모본부에서는 일본의 무기에 대해 단 한 번의 보고서만이 존재했고, 일본은 독일이 설계도를 보내줬음에도 낙후된 기술력으로 복제조차 제대로 못했다. 독일 또한 일본이 건네준 군함 관련 기술을 써먹을 여건이 아니었다. 군사적인 면에서 제대로 된 협력은 거의 전무했으며 오히려 서로의 발목을 잡았다.

독일은 소련과의 전쟁이 힘들어지면서 소련과 국경을 접한 일본이 소련의 뒤통수를 쳐서 양면전선을 만들어 주기를 바랐으나, 일본은 불과 2달 전에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상황이었기에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을 공격했다.[3] 문제는 이렇게 되자 독일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적국을 하나 더 늘렸다. 독일 또한 일본에 딱히 도움이 된 적이 없다. 결국 이들은 1945년 5월과 8월에 차례로 최후를 맞는다.

일본은 예로부터 독일을 본받아야 할 유럽 선진국으로 생각했지만, 독일인들은 일본인을 명예 아리아인으로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유럽인들이 그랬듯이 일본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인을 명예 아리아인으로 지정했지만, 나치당원이 길거리서 만난 일본 외교관을 폭행한 것도 그 한 사례이다. 또한 '나치 독일의 일본 프로파간다'라는 책에 따르면, 나치 정권 초기 일본계 독일인들 또한 차별받는 사례가 있었다. 그래도 독일과 일본의 군사동맹을 맺고, 명예 아리아인으로 지정하면서 그 전에 비해 대우가 나아졌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나치 독일일본 제국이 사이가 별로였다는 사실을 쉽게 볼 수 있는 예시가 있다. 바로 폴란드 제2공화국 문제. 1939년 초부터 나치 독일폴란드 제2공화국한테 단치히(현 그단스크) 및 상부 슐리지엔, 폴란드 회랑을 내놓으라고 협박할 때'일본 제국폴란드 제2공화국 편을 들었다. 또한독소 불가침조약에 대해서 일본한테 언질을 주지 않는 독일의 외교술이 공개되자 일본은 독일을 거세게 비난했다. 이 때 일본에서는 진지하게 독일과 군사동맹 관계를 끊을까에 대한 여부도 고민했다.[4]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폴란드가 패망하자, 일본은 전쟁이 끝나가는 1944년 초까지 폴란드 망명 정부를 지원했다. 1944년 중반부터는 일본도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서 폴란드를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는데, 이때부터야 폴란드에 대한 지원이 멈췄다.

그리고 상하이 유대인 문제도 있었는데 1942년 당시 일본군 치하 상하이에서 나치 독일이 게슈타포를 보내 유대인 거주지를 마련해준 일본군에게 유대인이 유대교회당에 모였을 때 전격적으로 학살할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복어계획의 영향 때문인지 1937년 이후 상하이 유입 유태인만을 선별하여 지정 장소에 거주하게 하는 격리정책을 썼다.[5][6]

독소전쟁 초기에 소련에서 승승장구하던 시절 히틀러는 한편으로 일본 제국소련의 뒷치기를 해주기를 바랐음에도 또 다른 한편으로 독소전에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을 주저했다. 그 이유는 위 문단에서 알 수 있듯 독일과 일본이 추축국으로 군사동맹 관계였지만 정작 사이가 별로였던 탓이 크다.

4. 중화민국 국민정부와의 관계

원래같으면 서로 적국이었겠지만 사실 상당히 우호관계였다. 중화민국의 장제스가 독일제 무기를 도입하였고 독일의 장군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으로 파견되어 일본군은 몇몇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독일과 중국의 군사협력은 나치 독일 이전부터 공산주의의 확장을 방지하기 위하여 진행되었고, 히틀러의 집권이 시작하고 나서도 이어졌다. 중국은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중국에서 사용하던 무기의 80%가 독일제였고 중국은 독일에 텅스텐과 안티몬 등 무기생산에 필요한 물질들을 대가로 주었다.#[7]

그러나 일본이 독일의 방공 협정에 가입한 이후부터 독일과 일본은 시간이 갈수록 친밀해졌다. 급기야 독일은 일본, 이탈리아, 헝가리 등과 같이 삼국 동맹 조약을 맺으며 추축국을 결성하고 그로 인해 중국의 국민정부는 독일의 적국이 된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독일이 일본과 친선을 유지하지 않고 꾸준히 중국을 지원해 줬다면, 미국의 유럽 전선의 참전을 방지하거나 더 늦출 수 있었다. 당시 히틀러가 일본과 친분을 유지한 이유로는 소련과의 전쟁에서 일본 또한 참전하여 양면전선을 꾀한 것이었는데, 일본은 이런 히틀러의 기대를 저버리고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침략했고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미국 또한 2차 대전에 참전했다. 한편 1940년 이후 중국에는 일본 제국괴뢰 정부이자 '중화민국'을 자칭한 왕징웨이 정권이 들어섰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은 1941년에 국민정부와 완전히 단교하고 왕징웨이 정권과 수교했다.[8] 하지만 거리가 워낙 멀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교전은 전무했고 어제는 우방,오늘은 적으로서 나치 독일이 중화민국에 간접적으로 피해를 끼쳤다.

5. 미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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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1938년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와의 강제 병합, 이듬해 폴란드 침공이나 프랑스를 침공하고 그 이후로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등 발칸반도 지역까지 나치가 장악하였던 와중에만 했어도 미국은 그 당시 중립을 고수하던 입장이라 나치와는 적대관계로 있지 않았다. 그 당시 미국은 뉴딜 정책대공황 등으로 경제와 사회가 혼란에 빠진 상황이라 이 때까지만 해도 제2차 세계 대전에 직접적으로 참전할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유럽 내부의 문제라는 이유 때문에 별다른 관심도 없는 형편이었다.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연합국 편에 서지 않고 중립을 고수했던 데에는 자국 국민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독일계 미국인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20여년 전의 제1차 세계 대전 때도 초기에는 중립을 유지한 이유였다. 나치 독일의 반인륜적 범죄가 일어나기 이전에 미국에서는 급격한 산업 성장과 당시 공산의 위협을 철저하게 차단한 나치 독일을 오히려 선망하였다.

1941년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 제국이 하와이 진주만기습을 하자, 독일은 이제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면 일본도 소련에 선전포고를 해서 독소전을 도와줄 것이라 착각하고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끝까지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미국이 영국과 연합국 편에 참전하면서 나치와는 이 때를 계기로 완전한 적대지간이 되었다. 미국은 1943년 나치의 동맹국인 이탈리아를 굴복시키고 2년 후인 1945년 5월 나치 독일을 패망시켰다.

독일은 미국과 적대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일본군의 공습이 없었다면 좀 더 오랫동안 중립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연합국을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지원하고 있었고, 나치 독일이 유럽을 장악한다면 미국 또한 위협받을 것이 분명했기에 미국은 언젠가는 나치 독일을 저지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이 추축국의 유럽에서의 확장을 방지했던 예로 스페인이 있다. 물론 미국의 지원이 전혀 없고 일본과 독일이 함께 소련을 공격했다면 당장 소련이 패배할 수는 있었겠지만, 차별적이고 부도덕한 이념의 나치 독일은 이어지는 미국과의 냉전 관계에서 결국에 패배했을 것이다. [9]

6. 영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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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처음에는 독일과의 전쟁을 두려워하여 독일의 오스트리아와 체코 주테텐 지역에 대한 합병을 묵인했으나, 이어지는 폴란드 침공에서는 결국 전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네빌 체임벌린 등의 온건파가 물러나고 강경한 윈스턴 처칠이 집권하게 되고, 심지어 프랑스마저 점령되면서 영국과 독일의 평화협상 가능성은 완전히 물 건너간다.

독일은 소련을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들과 동맹을 맺거나 점령하거나 친 독일적인 중립으로 두게 되면서, 사실상 영국은 유럽 내의 유일한 독일의 적수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빈약한 해군력과 영국 본토 항공전의 참패로 독일이 영국을 직접적으로 정복할 가능성은 사라졌고, 독일과 가끔 폭격을 당하며 아프리카 전선에서만 붙는 소강 상태로 버티게 된다.

이후 독일이 소련에게 밀리고 전세가 뒤집어지자 미국, 자유 프랑스 등 연합국들과 함께 유럽 대륙에 상륙하여 1945년 나치 독일을 멸망시킨다.

7. 프랑스 제3공화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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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나폴레옹의 독일 정복과 더불어 프랑스는 나치와 히틀러에게 있어서는 눈엣가시였다. 처음부터 당장에 침공할 계획은 없었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침공을 무시했어도 언젠가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은 불가피한 운명이었다. 프랑스는 개전 초기까지만 해도 독일과 싸워 절대 밀리지 않을 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여러 차례의 이어지는 캐삽질과 이에 대비되는 독일의 뛰어난 참모진의 활약으로 침공 개시 6주만에 항복했다.

이후 페탱 원수의 귀국으로 비록 추축국은 아니지만 나치 독일의 간섭을 크게 받는 반-괴뢰국인 비시 정부가 수립되며 북프랑스는 독일에게 완전히 합병되고 남프랑스만을 영토로 보전한다. 이 때의 프랑스는 비록 독일을 탐탁지 못하게 여겼지만 독일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기에 이런 저런 수탈을 당한다. 그나마 남아있던 남프랑스도 연합군의 침략이 임박하자 독일군의 안톤 작전으로 완전히 합병되어버리며, 이후 1945년 다시 태어난 프랑스는 비시 정부가 아닌 저항 세력 자유 프랑스의 뒤를 잇는다.

8. 소련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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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이 비록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 등과도 적대관계였지만 소련과의 적대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상대 인종 자체를 말살하려는 목적의 전쟁은 과거에는 종종 있었으나, 근대 이후에는 사실상 독소전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은 100만 명도 죽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베네룩스 국가는 물론 프랑스까지도 6주만에 항복을 해버려서 매우 짧은 기간이라 사상자가 적은 것이기도 하다. 불가침 조약마저 어기고 자국을 침략한 독일에 대한 소련의 증오와 적개심은 종전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며 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말할 필요도 없어, 전장에서의 전세가 역전되고 나치의 패망이 확정된 후 독일인들은 소련군에게 마구잡이로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포로들 역시 사람 대접도 받지 못한 채 학대당하는 것으로 보복당했다. 이런 이유로 독일군들은 소련군에게 항복하느니 그나마 포로대우, 인격대우도 해줬던 서방연합군에게 항복하기 위해 서쪽으로 퇴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9. 아르헨티나, 칠레와의 관계

나치 독일이 존재했을 때는 눈엣가시였으나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 나치 전범들의 도피처가 된 아이러니한 국가들이다.

아르헨티나, 칠레는 1933년이 나치당이 집권하기 이전에도 독일과는 우호적이었지만 정작 나치 독일은 이 나라들을 엄청나게 싫어했다. 그 이유는 나치 독일은 징병제 국가였으며 병역기피자를 처형할 정도로 철저했는데, 문제는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병역을 기피한 독일인들이 대거 도주한 곳이었다.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 자국의 병력을 뽑아야 하는데 병역을 기피하려고 이 두 나라로 이민 가려는 독일인 남성들 때문에 징발할 병력들이 줄줄 새었으며 여기에 더해 나치가 멸절의 대상으로 삼던 독일내 유태인과 집시인들까지 살아남으려고 아르헨티나와 칠레로 도주했으니 당시 나치의 입장에서는 정말 거슬리는 나라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나치 독일이 패망한 이후에는 상황이 정반대가 된다. 아돌프 아이히만, 안테 파벨리치,[10] 요제프 멩겔레, 에두아르트 로슈만, 파울 셰퍼, 발터 라우프 등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등 과거 추축국에 속해 있던 유럽 패전국의 여러 전범과 정치범들이 남미행 배를 타고 대서양, 태평양, 남극해 바다를 건너 아르헨티나와 칠레로 도망쳤고 이에 당시 아르헨티나 후안 페론 전 대통령과 칠레 가브리엘 곤살레스 전 대통령은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를 포함한 구 추축국 출신 전범들의 자국 입국과 거주를 허용해 주었다.[11]

10. 헝가리 왕국과의 관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부터 같은 동맹국으로서 독일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오헝제국 해체 이후에도 독일과 헝가리는 패전국이라는 슬픈 역사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두 국가의 관계는 유지될 수 있었다. 1930년대호르티 미클로시 치하의 헝가리 왕국은 나치 독일과 경제 협력을 늘리며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독일은 외교적으로 트리아농 조약[12]을 무효화 시키는 것을 도왔다. 또 제2차 세계 대전이 당시 추축국 설립 아이디어를 낸 국가가 헝가리였다. 이후 헝가리는 독소전쟁유고슬라비아 침공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그러다가 소련군이 진군하여 1944년 패배가 확실해지자 호르티 미클로시는 소련과 단독으로 강화를 맺으려 하였다. 그것을 알게 된 독일은 독일군을 헝가리로 진주시켰고 호르티 미클로시를 납치한다. 또한 친독 파시스트살러시 페렌츠의 쿠데타를 지원해 국민단결정부가 수립되었다. 1945년이 되자 헝가리 왕국은 일본 제국과 함께 독일의 마지막 동맹국이 되었다. 결국 헝가리는 부다페스트 포위전에서 패배해 소련에 의해 점령당한다. 이때 독일 친위대원들은 헝가리인들을 소련군으로부터 보호하려 애썼다고 한다. 현대에도 헝가리는 독일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1. 오스트리아 연방국과의 관계

위의 헝가리와 비슷하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는 같은 동맹국으로서 독일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다만 헝가리와는 달리 오스트리아는, 도이췰란트와 똑같은 민족, 핏줄을 공유했던것때문에 도이췰란트와의 통일에 동조하였으며, 결국, 편법으로 말미암아 도이췰란트에 병합되게 된다. 마침 히틀러 또한 오스트리아사람이였던 것도 그렇고.

몇몇 가톨릭 보수주의자들과 불법화되어 지하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일부를 빼면, 오스트리아 주민다수가 독일과의 통일을 지지했다. 가톨릭 보수주의자들 쪽은, 오스트리아고유의 가톨릭 정체성이 훼손되는 것 때문에 반대했으며, 좌파들은 나치정권의 영향력 확장이라는쪽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좌파인사 가운데 병합 당시 투옥되어 있었던 사회민주당정치인 카를 레너조차도, 나치는 싫지만, 통일 자체는 필요하다고 발언한 적이 있을 정도로 병합찬성 의견은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다만, 카를 레너는 어디까지나 민주주의 체제로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병합을 원한 것이지, 나치당이나 독재정권 아래서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는 것을 원한 건 결코 아니었다.

이 합병은 2차대전 이후로 도이췰란트가 패망하고 없던 것이 되었는데, (1943년 모스크바 선언에서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은 무효라고 선언되었다. ) 주민들의 의견이 어떻든 승전국인 연합국 측에서 무효라 정한 이상 2차대전의 패전 이후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계속 합병된 상태일 일은 없게 되었다. 연합국의 승전과 함께 오스트리아 병합은 그 자체가 흑역사화 된 셈이다.

그렇기에, 오스트리아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4개국으로부터 분할통치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과의 통일금지, 영세중립국으로 남는다는 조건 아래에 1955년 독립하였다.

12. 스페인 제2공화국 / 스페인국과의 관계

스페인 제2공화국 시기에 프란시스코 프랑코반란을 일으키자 반독 성향을 가진 좌파가 집권한 스페인 공화국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독일은 반란군 측에 무기를 지원하고 '콘도르 군단'이라는 이름하에 독일 군인들을 보냈다. 스페인 공화파령이던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하기도 했다. 결국 스페인 반군이 승리했고 스페인에는 전체주의 독재 정권이 세워진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스페인은 독일에게 '전후 복구를 도와주면 즉각 참전하겠다'고 밝혔으나, 이 복구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독일이 거절했고 결국 스페인은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이걸 중립이라 할 수 없는게 독일-일본이 주축이 된 방공 협정에 가입하고 독소전쟁청색사단을 보냈다. 히틀러는 적극적으로 협력한 자신과 달리 이런 어정쩡한 태도로 협력하는 프랑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령인 지브롤터를 침공하는 펠릭스 작전도 지브롤터가 스페인에 양도된다는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요구[13]를 하는 스페인 때문에 시행되지 못했다. 1942년 독일은 스페인을 침공하는 이사벨라 계획까지 검토하는 등 사이가 매우 나빠진다. 그러나 독일이 패망하자 전범들이 스페인에 얹혀살거나 남미로 도주하는 징검다리로 삼기도 했다.

13. 폴란드 제2공화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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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관련 문서



[1] 일본 제국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에는 독일의 적국인 영국, 프랑스 등과 우호적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그만큼이나 미국의 경제 대공황이 세계에 미친 영향이 어마무시했음을 알 수 있다.[2] 중국의 자원량이 풍부하고 런던 시장의 간섭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에 유리한 공급처였다.[3] 중국과 일본을 모두 우호국으로 두어 중일전쟁 초 양국 간의 화평을 중재하려 했던 독일과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스스로를 독일과 소련의 우호국으로 보았기 때문에 독소전쟁 기간 동안 양국의 화평을 중재하려 했다. 독일과 일본이 가장 많은 대량학살을 저지를 정도로 주적이었던 국가가 각각 소련과 중국임을 생각하면 두 추축국의 궁합은 동맹이 맞나 싶을 정도로 최악이었다.[4] 일본의 정치인 내각은 독일을 손절하는 걸 생각했지만 일본 군부가 이미 정권을 잡은 상황이었고 일본 역시 추축국을 제외하면 딱히 우호국이 없는 신세였기 때문에 결국 독일 손절은 실패했다.[5] 여담으로 아시아의 쉰들러라 불리는 스기하라 지우네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일본 비자를 받은 유대인 난민 6,000여 명은 무사히 시베리아를 건너 일본을 거쳐 상하이나 미국으로 대피시켰다. 그럼에도 스기하라는 일본 제국 당시 처벌을 받지 않고 괘씸죄가 적용되었는지 전후에 외무성 직원의 정리해고 과정에서 면직되었다.[6] 반면 하얼빈의 러시아인 공동체에서는 일제의 지원을 받은 파시스트 공동체가 하얼빈 내 러시아계 유대인 대상으로 폭력을 일삼았다.#[7] 장제스 정권을 파시즘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1930년대 독일 나치즘에 영향을 받는 부분에 주목한다.[8] 독일 외에도 대다수의 추축국 가입국들이 이런 행동을 취했다.[9] 미국은 민주주의와 선거 덕분에 권력 갈등이 통제되지만, 나치 독일은 '라인'을 타야 성공할 수 있는 사회였다. 시간이 갈수록 권력을 잡기 위한 다툼이 심화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서 드러났다.[10] 아르헨티나로 도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칠레로도 도피처를 옳겨다닐 정도였다.[11] 하지만 후안 페론과 가브리엘 곤살레스는 제2차 대전 직후 자국으로 도피해오는 나치 전범과 독일군 패잔병들을 숨겨주긴 했지만 히틀러와 달리 반유대주의 성향이 없었기에 아르헨티나, 칠레 대통령 재임기간 중에 이스라엘과도 수교를 맺고 유대인 이민자들의 이민, 국적 부여도 받아들였으며 제2차 대전의 연합국인 미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게다가 이들이 이스라엘의 모사드에게 발각되어 압송되어도 별다른 보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12] 1차대전 후 헝가리-협상국간의 강화 조약. 헝가리는 영토의 절반 이상을 잃음.[13] 독일의 괴뢰 정권비시 프랑스 치하의 프랑스령 모로코알제리 일부를 할양, 석유, 무기, 식량 공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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