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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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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tado Español (1936~1975)
에스파냐 왕국
Reino de España (1947~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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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945-1977) 국장
Plvs Vltra. Vna, Grande y Libre
보다 더 멀리. 하나되고 위대하고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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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6월 17일 ~ 1975년 11월 20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스페인 제2공화국 스페인 왕국
국가 척탄병 행진곡(Marcha Granadera)[1]
위치 오늘날의 스페인, 서사하라, 적도기니, 모로코 일부
수도 부르고스(1936년~1939년)
마드리드(1939년~1975년)
인구 27,900,000명(1950년)
정치 체제 군주제(명목상)[2]
일당독재
국가 원수 카우디요(총통)
정부 수반 카우디요(프란시스코 프랑코)
언어 스페인어[3]
종교 가톨릭
민족 스페인인
주요 사건 1936년 스페인 내전
통화 스페인 페세타
현재 국가 스페인, 적도 기니, 모로코, 서사하라

1. 개요2. 정치
2.1. 권력의 집중2.2. 파시즘 혹은 권위주의2.3. 제2차 세계 대전2.4. 민족주의2.5. 국민가톨릭2.6. 역대 국가 원수2.7. 역대 내각 수반(수상)
3. 사회
3.1. 문화3.2. 산업3.3. 민주화 운동
4. 종식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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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6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군부 세력이 스페인 제2공화국에 반대하여 내전을 일으키고 승리하여 세운 스페인의 정치 체제.

1936년부터 공식 국호로 스페인국(에스파냐국, Estado Español, Spanish State)을 썼지만 1947년에 보르본 왕조 복고를 선포하면서 스페인 왕국(Reino de España)이라는 국호도 쓰였다.[4] 일반적으로는 프랑코 치하 스페인(España franquista), 프랑코 독재정권(dictadura franquista), 프랑코 체제(régimen de Franco)라고 많이 부르는 편이다. 3년의 걸친 스페인 내전 끝에 1939년 스페인 전역을 장악했고 이후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할 때까지 일인/일당 독재[5]를 펼쳤다. 프랑코 사후 프랑코의 유언에 따라 왕정 복고가 이루어져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한 이후로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2. 정치

2.1. 권력의 집중

1938년 8월에 내전에서 승기가 굳어지자 프랑코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법률과 법령을 공포할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이어서 내전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1939년에는 통합 팔랑헤만이 유일한 스페인 내 합법 정당으로 선포되었고 1942년에는 정부 조직법을 통과시켜 모든 권력을 중앙 정부와 카우디요(Caudillo)에게 집중시킨다. 애초에 직접 선거로 뽑히지도 않았던 의회는 단순히 자문 기구로 전락해버렸고 모든 법률은 정부에 의해서 상정되었다. 기존 스페인 제2공화국이 카탈루냐, 바스크 지역에게 줬던 자치권 역시 당연히 폐지. 모든 지방 정권의 수장들은 프랑코에 의해서 임명된다.

2.2. 파시즘 혹은 권위주의

프랑코는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공공연한 도움을 받아 스페인 내전에서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했기 때문에 파시스트라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 프랑코는 1936~1939년의 대규모 유혈 사태 이후로는 질서와 안정을 원했다. 파시즘 특유의 열광은 그의 내성적인 성격에 맞지 않았다. ......

프랑코 정권에서 팔랑헤당이 유일당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동형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의 자치적 권력도 없었다. 독일이 승전을 거듭하던 1941-1942년에 팔랑헤당은 당원수가 백만명 가까이로 늘었으며 전당대회를 여는 등 독재정권에 큰 지지가 되어주었지만 카우디요는 당에 입법권이나 행정권을 주지 않았다. ...... 스페인 내전 초기에 카리스마 넘치는 팔랑헤 지도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6]를 제거한 일은 프랑코가 기존 엘리트층과 표준 국가를 장악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프랑코는 여러 개로 나뉜 극우 정당들과 데 리베라의 뒤를 이어 팔랑헤의 지도자가 된 마누엘 에디야의 경험 부족을 이용해 파시즘의 영향력을 더욱 줄여나갔다. 그는 교묘한 수를 써 팔랑헤당을 파시스트들과 전통적 왕당파를 모두 포함하는, 특성이 전혀 없는 우산조직 '팔랑헤 에스파뇰라 트라디시오날리스타 이 데 훈타스 데 오펜시바 나시오날 신디칼리스타'(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 y de las Juntas de Ofensiva Nacional Sindicalista)로 끌어넣었다. 조직의 수장은 '프랑코 주변의 장식품이나 다름없는 무능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1937년 4월 에디야가 당의 독립성을 되찾으려 들자 프랑코는 에디야를 체포했다. 팔랑헤를 길들이고 나자 파시즘 특유의 열광을 최소화하면서ㅡ프랑코에게는 특히 이 조치가 만족스러웠다ㅡ자신의 독재 체제를 한층 전통적인 모습으로 만들어내기도 쉬웠졌다. 프랑코 정권은 1942년 이후로는 확실히 기존 권위주의 성격을 띠었지만 1942년 이전에도 그런 모습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팔랑헤는 1945년 이후 단순히 운동(the Movimineto)이라고 일컬어지는 색깔 없는 시민 연합이 되었으며, 1970년에는 그 이름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로버트 O. 팩스턴.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손명희, 최희영 번역. 339-340쪽

프랑코 정권이 파시즘 정권이었는가 아닌가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는 문제이다. 전통적으로는 파시즘 정권으로 분류되었지만 최근 들어 몇몇 스페인의 사학자들은 프랑코 정권을 파시즘으로 분류하기보다 단순히 권위주의 독재 정권으로 분류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유는 프랑코 정권이 어떤 하나의 통일된 이념을 갖춘 것이 아니라 지주/가톨릭/군부 등 다양한 세력들이 각자 다양한 목표를 가지고 결합되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프랑코 본인만 하더라도 무정부주의공산주의에 격렬한 반감을 드러냈을 뿐 그 외에 딱히 특별한 정치적 지향점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반면 통합 팔랑헤를 중심으로 모든 우익들을 결합시키고 파시즘의 많은 부분들을 채용하였다는 점에서 프랑코 정권을 파시즘 국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등에 비교해도 프랑코 정권은 일단 존속 기간이 사십년 가깝게 압도적으로 길었고, 2차대전과 함께 사라졌거나 대전 이후 새로 생긴 독재 정권들과 달리 대전 이전과 이후의 세계를 모두 겪었다. 그만큼 프랑코 정권의 성격을 '파시즘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이에 따라 부분적으로 구 내전 이전 정치적 파벌을 정리하고, 어느정도 정상적인(?) 독재 국가가 되어 능력주의에 기반한 관료 엘리트들에게 국정을 위임하기 시작한 50년대 이후로는 확실히 '권위주의 우파'정권에 가까워졌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내전 기간 도중과 나머지 유럽은 대전 중이었던 전시 직후 체제까지 프랑코 정권이 자행한 자국민의 정치적 '청소'에 가까운 대량 학살과 사상적 색출, 탄압,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정치적 반대파를 아예 마치 다른 인종인 마냥 타자화 하기 위해 동원했던 안토니오 바예호-나헤라의 유사 우생학적 이론과 그 사회적 여파까지 고려하면 정권 초기에는 소위 '오리지널' 파시스트인 무솔리니보다 확실하게 억압적이고 폭력성으로도 다른 파시스트 집단(나치 독일, 헝가리 화살십자당, 루마니아 철위대 등)에 뒤지지 않는다. 다만 1937년 2년 말라가 함락 이후로 이런 자국민 학살 규모의 폭력적 탄압이 사그라들고, 정치범도 제대로 재판을 거쳐 처리하는 방식으로 이후로 점차적으로 누그러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사례보다는 낫다고 주장할 여지도 있다.[7]

이에 더해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는 본인이 직접 통치를 하기보다[8] 내각 관료들이 전면적으로 개혁을 주도했다. 이념에 대해서도 결과적으로는 더 유연해져서 1967년에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고 73년에는 동독[9]이나 중화인민공화국과도 수교할 정도에 이르렀다. (나머지 유럽과 세계 정세 변화에 맞물린) 프랑코 정권의 성격 변화는 파시즘 자체의 정의 문제와는 별개로 파시스트라 부를 만큼 폭력적 대중동원, 사상적 과격화를 했냐 안 했냐를 판단함에 있어 의미 있는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프랑코 정권은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벌였다. 모든 정치적 결사와 노동 조합은 폐쇄되었고 좌파인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은 모조리 투옥되었다. 표면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현대 독재 정권과 달리 프랑코 정권은 서구식의 민주주의를 부정했고[10] 그래서 민주주의를 옹호했다가 체포된 사람까지 있었다. 표현의 자유 역시 존재할 리가 만무했다. 언론이 정부를 조금이라도 비판했다가는 바로 폐간되고 신체와 생명의 위협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여기에 프랑코가 직접 조직한 비밀경찰이 사회 곳곳을 감시하면서 반정부적인 움직임이 나타나는지 안 나타나는지를 감시하기까지 했다. 물론 이런 권위주의적인 철권 통치의 위력은 정권 내에서 전향적인 개혁파들의 목소리도 커졌고[11] 경제가 성장하고 서방권과 교류하면서 점차 완화되어가는 사회 분위기[12]의 영향을 받아 점차 완화되었다. 더 나가서 1960년대만 되어도 이미 대학가에서는 반정권 성향의 지식인들이 강단학계를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코는 집권 과정에서 나치 독일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집권 후에도 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스페인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립을 선언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프랑코의 스페인에 참전을 꼬드겼지만 프랑코는 추축국에 낄듯말듯 간보다가 결국 중립으로 남았다.

스페인이 참전을 하지 않았던 것은 이유가 다양하다. 우선 당시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내전으로 인해 경제가 완전히 망가졌기 때문이다. 내전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해야 참전이고 대중동원이고 뭐고 할수있었다. 프랑코는 경제가 복구되고 국가가 재건되면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물론 복구비용이 천문학적인 비용이라 히틀러가 거부하였다. 1940년대에는 내전으로 망가진 국가를 재건해야해서 참전을 하지 않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경제가 겨우 복구되었다. 이 외에도 이 당시 스페인은 당시 국경을 맞대게 된 독일의 영향을 물론 강하게 받았지만 그 외에도 영국과 미국의 영향도 강하게 받았고 실제로 정권 내 인사들도 친독파와 친영미파가 섞였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한 쪽 편을 들 수 없었다.

2.4. 민족주의

프랑코는 '하나의 스페인'을 만드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페인의 각 지역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심히 못마땅했던 프랑코는[13] 기존의 제2공화국이 각 지역에게 부여했던 자치권을 뺏은 것은 기본이고 바스크어, 카탈루냐어 같은 지방의 토착어까지도 '비스페인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철저히 탄압했다.[14] 반대로 '스페인적인 것' 혹은 스페인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투우플라멩코는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줬다.

프랑코의 40년 독재를 겪은 이후 스페인에서 '민족', '국가'보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정치체, 정부 등 기관의 역할을 강조하는 의미로 쓰이는 국가라는 뜻의 단어인 Estado[15]는 금기시되어 현대 스페인에서도 자국의 국체를 표현할 때 일부러 País[16], Nación 같은 더 애매모호하지만 덜 권위주의적인 단어를 쓰게 되었다. 물론 아예 안 쓰이지는 않는데, 미국을 뜻하는 표현은 los Estados Unidos (EU)이다. 말 그대로 the United States. 그 외 멕시코도 정식 국명은 Estados Unidos Mexicanos로 Estado가 들어간다.

2.5. 국민가톨릭

프랑코 본인의 신앙심은 논란이 되고 있지만 통합 팔랑헤 당원들 대부분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그들에게는 가톨릭이야말로 스페인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지주/가톨릭 교회/군부 등등 온갖 다양한 세력이 이합집산한 통합 팔랑헤에서 가톨릭이야말로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프랑코 정권은 굉장히 교회에게 우호적인 제스쳐를 취해 준다. 결혼과 이혼은 무조건 교회의 성사를 통해서 진행되어야 했고 제2공화국 시기 몰수된 교회의 재산을 반환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금 가톨릭 사제들이 스페인의 공교육을 담당하는 것까지 허락하는 파격적인 정책을 취하는 것도 모자라서 막대한 금전적 지원까지 했다. 1953년에는 교황청과도 협상을 체결해 교황청이 직접 스페인의 주교를 임명하는 정책을 재개하기에 이르렀다. 단, 단일 신앙으로서 국민가톨릭은 60년대들어 종교의 자유 승인으로 그 색이 퇴색된다.

2.6. 역대 국가 원수

2.7. 역대 내각 수반(수상)

3. 사회

3.1. 문화

스페인 내전을 거치면서 재능있고 명망있던 예술인들 대부분이 살해당하거나 박해를 피해 해외로 망명을 떠났다. 파블로 피카소, 아메리코 데 카스트로, 클라우디오 산체스 알보르노즈, 가르시아 로르카, 미겔 에르난데스, 안토니오 마차도, 루이스 부뉘엘, 페드로 살리나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등의 예술가와 문예가들이 활동했던 스페인 제2공화국 시절은 스페인 현대 문화의 황금기 중 하나였지만 프랑코 정권 하에서 종말을 맞았다.

그리고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심각한 문화적 공백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것을 메꿔준 것이 바로 스페인식 3S 정책, 그 중에서도 영화와 축구였다. 프랑코 정권은 많은 수의 영화관을 건설했고 그 결과 1950년대 후반에 이르면 스페인은 미국 다음으로 영화를 많이 소비하는 국가가 된다.

TV방송도 1956년에 시작했고, 1960년대 중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에 걸쳐 대중화되면서 스페인 사람들의 일상을 어느정도 뒤바꾸어놓았다.

그러나 독재였던 만큼 정권의 구미에 거슬리는 내용이 있으면 여지없이 가위질을 당해야 했다. 아울러 프랑코 정권은 가톨릭 교회에도 검열권을 줬기 때문에 가톨릭의 심기에 거슬리는 내용이면 또 검열되었다. 대표적으로 루이스 부뉴엘비리디아나가 있다. 이 영화는 프랑코 정권하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첫 부뉴엘 영화였고 공화국 천재 예술가가 프랑코 정권에 마침내 승복했다고 홍보하려고 했다. 하지만 부뉴엘의 반골 정신은 어디 가지 않아 가톨릭을 대차게 까는 내용이 되었고 뒤늦게 알아차린 프랑코 정권과 가톨릭 교회에서 길길이 날뛴 끝에 끝내 상영금지 처분을 받은 걸로 알려져 있다. 그나마 루이스 가르시아 베를랑가 나 하비에르 바르뎀의 삼촌인 후안 안토니오 바르뎀 같은 감독들이 탄압을 받아가면서 스페인 영화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워낙 이 시절의 트라우마가 컸던지 스페인 영화는 상당히 강경한 세속주의 성향을 보이고 프랑코 정권 온건파와 좌파가 타협해 세워진 현 스페인의 정치체제에도 비판적이다.

이 시절 언론, 문화 탄압 과정의 일부로 스페인에 들어오는 모든 해외 영화는 혹시나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시민이 '위험한 사상'을 접할 가능성이 있는 자막이 아니라 소위 그 '위험한 내용' 자체를 아예 원천적으로 검열할 수 있는 더빙만 강제했다.

축구 역시 프랑코 정권에 이용당했다. 레알 마드리드 CF가 대표적으로 이 시기 레알 마드리드 CFUEFA 챔피언스 리그를 5연패하는 기염을 토해내면서 스페인 대중들에게 암울한 정치 현실을 잊게 해주는 환각제로 노릇을 하여 프랑코 정권의 정당성에 이용되었다.참조하기 좋은 글

3.2. 산업

20세기 이후로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프랑코가 정권을 잡았을 당시 스페인의 상황은 엉망진창이었다. 특히나 3년에 걸친 내란은 스페인의 국력을 추락시켜 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스페인의 산업과 특히나 식량은 최악의 상황에 놓였고 배급제가 시행되었다.

이러한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프랑코 정부가 처음에 채택한 정책은 바로 '국가 주도의 산업 정책을 통한 자립'이었다. 관세를 높여서 국내 산업을 보호하는 한편으로 무역과 환율 역시 시장의 원리가 아니라 국가의 통제 하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스페인의 기술력이 낙후된데다가 인재들도 국외로 유출되고 있던 상황에서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1950년대 초반까지 스페인은 암시장이 판치는 등 경제는 낙후되었다.

결국 1950년대에 이르면서[19] 저임금과 물가상승, 가혹한 노동조건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파업이 일어나는 사건이 여러번 벌어졌고, 미군 기지를 설치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를 받아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국제수지의 적자로 인해 1950년대 말에 외환 보유고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노동자들의 불만은 가득해있었다. 프랑코 정부는 이걸 이전처럼 가혹하게 진압했다가 정권이 상실될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완전히 전환시켜 국가 주도의 정책을 포기하고 시장 원리에 맡기는 한편으로 고립주의를 포기하고 적극적으로 해외 투자를 유치하기 시작했다.

이는 1950년대부터 스페인 국내외 환경 변화에 따라 이루어졌다. 대외적으로는 물론 미국이 거부했지만, 스페인이 한국 전쟁 참전을 시도하면서 미국도 스페인이 중요함을 인식하여 마셜 플랜에서는 제외했지만, 그에 준하는 원조 지원을 하면서 동시에 미군 주둔과 시장 개방을 요구한 점이 요인으로 작용했다. 대내적으로는 스페인 내전을 주도한 팔랑헤계의 일원들이 나이가 들고 외국의 눈치가 보여서 점차 인기를 잃어갔고[20] 그 자리를 오푸스 데이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평신도 중산층 테크노크라트들이 대체하면서 훨씬 외국과 무역하기나 민주화에 대해서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기 때문이다.[21]

이 당시 경제성장률은 부침이 있었지만 정책전환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물가가 안정화되고 경제성장률이 높아졌던 것이었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는 10%대를 기록하기도 했고,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경제성장률이 둔화되기는 했지만 연 6% 이상을 기록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66년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 말 즈음이 되면 상당수의 중산층들이 형성되는데 성공했고, 중산층들도 자동차를 보유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또한 빠르면 60년대, 늦어도 프랑코 정권이 끝난 1975년까지 스페인은 1인당 GDP에서 내전 후부터 20세기 중반까지는 줄곧 밀렸지만 이 시기에 소련물론이고 최초로 구 공산권에서 최고 선진지역인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능가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경제면에서는 프랑코 정권이 할 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코의 경제정책과 복지정책을 포함해 경제사회적 제도개선이 이루어지면서 충분한 수의 중산층이 형성되었고 이들 중산층은 프랑코 사후 스페인이 제2공화국시절에 비하면 훨씬 안정적으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스탠리 페인은 유럽의 가장 중요한 독재자로 4인을 제시했는데 히틀러, 무솔리니는 전쟁으로 잿더미만 남기고 패망했고 스탈린은 살아남았지만 스탈린의 소련은 이후 경제적으로 패망한 반면 프랑코는 훨씬 경제적으로 성공적인 체제를 이후 세대에 물려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았다.[22] 단순히 경제만 성장한 게 아니라 이 당시 본격적으로 시행된 사회보장제도는 큰 틀에서는 민주화 이후에도 지금까지 시행될 정도로 그 영향력이 크며 그냥 프랑코 지지자들은 이러한 사회보장제도가 시행되어 뿌리내렸다는 점을 정권의 업적으로 대놓고 거론한다. 특히 보건복지는 프랑코 시절에 처음 도입된 제도를 기원으로 한다.[23]

이 경제성장의 수혜를 입은 대표적인 지역은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빌바오 같은 전통적인 선진 지역들인데 이 세 지역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에 맞서 가장 격렬히 저항한 지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중 마드리드는 시간이 지나면서 우경화되었지만 나머지 둘은 프랑코 생전에도 그랬고 프랑코 사후에도 분리주의가 강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스페인 지역은 서유럽보다는 가난했어도 러시아 제국령보다는 더 잘사는 곳이었다.# 오히려 소련 때 일시적으로 추월당했다가 원상복귀된 것이다. 대신 특히 전통적으로 동구권 최선진국이었던 동독, 체코슬로바키아를 역전한 것은 특기할 수 있다. 사실 스페인 내전 전까지는 일본보다도 1인당 GDP가 높았다.[24] 그리고 1인당 GDP도 1962년에야 세계 평균을 겨우 넘기던 것에서 고작 11년 뒤인 1973년 세계 평균의 2배를 넘기며 사실상 선진국 수준 경제력에 도달했다.

특히나 관광업의 발달이 눈부셔서 프랑코의 사망 즈음에는 해마다 3천만 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스페인을 방문해 관광업은 스페인 경제에 있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자리잡는다.[25] 보잉 747도 1970년 세계 6번째[26]로 도입했다.

그렇지만 프랑코 정권 말기부터 스페인의 경제는 오일쇼크의 여파로 연료수입이 많은 산업을 중심으로 침체를 맞게 되었다.[27] 경제 성장률이 급감하고 물가상승이 고착화되었으며, 또한, 이때부터 실업문제가 심각해지게 되었다. 프랑코 말기부터 시작된 경기침체는 펠리페 곤살레스 정권 초기인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3.3. 민주화 운동

프랑코의 철권 통치 하에 1950년대까지 각종 민주화운동노동 운동은 스페인 내에서 거의 일어나지 못했다. 이 시기 반체제 운동은 대부분 망명객들이 외부에서 조직한 제2공화국 망명 정부가 주도한 반체제 운동 아니면 반대로 외부와 연계나 구호의 가능성 없이 북부 지방의 산맥이나 대도시의 구석에서 고립되어 소규모로 반프랑코 파르티잔 활동을 하다가 하나둘씩 격파 당했다.

하지만 195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프랑코 내각은 좌익이 하도 작살나서 우파 진영 내 일체감이 약해진 탓인지 처음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대표되는 새로운 가톨릭 교회의 개혁 운동에 긍정적인 사제들과, 총통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교회가 더 중요한 카를리스타, 제2공화정과 내전 시대의 치열한 이념 대립의 경험이 없어 전투적 반공주의라는 점에서 정권의 지도층과 온도 차이가 뚜렷했던 젊은 테크노크라트들을 중심으로 우파 내 프랑코에 대한 일괄적인 지지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후 사회 곳곳에서 각종 정치적인 운동이 활발히 일어난다.

그리고 이 틈을 타 국외에 머무르던 공산당,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좌파 정당, 노조가 재침투하여 다시 영향력을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스페인이 본격적으로 성장을 시작한 1960년대부터 다시금 노조가 비밀리에 결성되어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고 학생들 역시 반 프랑코 운동의 선두 주자로 나서기 시작한다. 심지어 1969년에는 프랑코의 동상이 시위 중이던 대학생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1972년에는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와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프랑코의 절대 권력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프랑코를 가장 분노하게 만들었던 것은 믿었던 가톨릭 교회의 배신이었다. 물론 기존의 기성 사제들이야 변함없는 프랑코의 지지자[28]였지만 젊은 사제들은 적극적으로 사회 변혁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대놓고 표출하는가 하면 노조나 학생 단체와 함께 민주화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바스크 지역에서는 바스크 출신 사제들이 ETA에 가입하는가 하면 미사바스크어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29]

4. 종식

1975년 82세의 나이로 프랑코가 사망한 이후 프랑코주의가 계속 유지될지 아닐지에 대해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프랑코 사망 직후에는 비밀 경찰들이 계속해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반대파들을 투옥하는 모습을 보여서 독재가 지속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팽배했지만 국왕으로 즉위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주도 하에 아돌포 수아레스가 총리로 임명되고[30] 수아레스 내각이 정치범 석방, 다당제 허용, 공안 재판부 폐지, 바스크·카탈루냐 지방의 자치 허용과 같은 정책을 실시하면서 서서히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의회 군주제와 민주적 법치 국가', '스페인 전역의 자치권 허용'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헌법이 1978년에 통과되면서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최종적으로 안착된다. 1981년에 극우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시도하는 23-F 같은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현명한 대처 덕에 무난히 진압되어 민주주의가 정착될 수 있었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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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의 스페인 국가인 왕의 행진곡이다. 프랑코 정권 시기에는 척탄병 행진곡으로 곡명을 바꿨다.[2] 1947년에 공식적으로 왕정 복고를 선언했다. 하지만 1969년 공식적으로 후안 카를로스가 계승자로 지명되기 전까지 군주가 없는 군주제였다.[3] 단순히 공식 언어로 스페인어를 지정한 것이 아니라 카탈루냐, 바스크 지방에서 쓰이던 토착 언어(카탈루냐어, 바스크어)를 철저히 탄압했다.[4] 프랑코 정권 시절에는 헌법이 없었기 때문에 공식 국호에 대해서 명확한 성문법적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5] 프랑코가 수장으로 있는 통합 팔랑헤만이 유일한 정당이었다.[6] 발췌자 주석: 팔랑헤 에스파뇰라의 창시자. 정부에 체포되어 감옥에 있다가 1936년 11월 총살되었다.[7] 탄압의 강도가 딱 한 번 증가한 시기가 있었는데 1939년 내전 종식 후 범죄 혐의가 있다는 사람들 수십만 명을 조사 후 그 중 거르고 거른 끝에 28,000~35,000명 가량을 처형한 적이 있다. 대부분은 조사 후 방면되거나 수개월, 아무리 길게 잡아도 감형 등을 통해 징역을 살게 한 후에 내보냈다.[8] 이에는 취미 활동 중 얻은 부상을 포함해 프랑코 개인의 건강 문제도 있다.[9] 중화인민공화국은 이역만리 타국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동독은 차원이 다르다. 독일 공산당에른스트 텔만 같은 주요 거물들이 스페인 내전에 국제여단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스페인 내전은 동독 입장에서 이른바 건국신화의 주무대이다.[10] 대전기까지는 정말로 민주주의를 대놓고 부정했다. 그 이후로는 서방의 눈치를 봐서 자신의 체제를 유기적 민주주의라고 우기기는 했으나, 오늘날 스페인에서는 유기적 민주주의를 기만적인 것으로 여긴다.[11] 이들은 물론 정권 하에서 관료로 일했기 때문에 독재정권 타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안에서 그나마 국민들의 권리를 챙기는 식의 개혁에는 관심이 많았다.[12] 특히 1970년대에 가면 1940년대와 달리 정권 이빨도 빠질대로 빠져서 대놓고 공식적인 석상에서 정권 욕은 못해도 음지까지는 아니고 그것보다는 다소 공개적인 영역에서 정권 욕을 당당히 하는 수준까지는 되었다.[13] 스페인 내전때 국민파가 써먹은 레파토리 중 하나가 지방자치 허용은 스페인의 전통을 훼손하는 것이란 주장이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과거의 영광스러웠고 하나되었던 스페인 제국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과도 연결되는데, 웃기게도 스페인의 지방자치 전통은 스페인이 가장 빛나던 이 시절부터 유래한 것이다. 정작 자기들이야말로 스페인의 전통을 훼손하고 있던 셈. 그래서 일부 카탈루냐나 바스크 등 지방의 자치주의자들은 지방자치야말로 스페인의 전통이라며 국민파의 주장에 반발하곤 했다. 굳이 정확히 따지자면 스페인 제국 중 합스부르크 시절은 지방자치가 일반적이었지만 부르봉 왕조가 도입되면서 중앙집권화가 강화되었다.[14] 재밌게도 프랑코 본인도 갈리시아어를 쓰는 갈리시아 페롤에서 태어났다. 다만 프랑코 가문은 그 뿌리가 안달루시아에 기반하고 있으며 나중에 갈리시아로 이주했다. 프랑코는 갈리시아어도 잘 구사하지 못했다. 또한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의 탄탄한 공업과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을 토대로 하나의 거대한 정치 운동으로 발전한 저 두 지방의 지방주의와 달리 갈리시아는 예나 지금이나 목가적인 어촌 중심에 개발도 별로 안 되었고 산티아고 순례길이 위치한 곳으로 정치적 근대주의와 소원한 지방이다 보니 중앙 국가에 도전할 만한 지방 민족주의가 굉장히 약했다. 경제적 역량은 떨어지고, 애초에 우파적 중앙 민족주의자들이 추종하는 민족카톨릭주의 사관 내에서 산티아고 마타모로스 신앙과 성지 같은 종교적 커넥션을 통해 갈리시아 지방의 지분이 어느 정도 보장이 되니 갈리시아인들 입장에선 굳이 독자적 지방 민족주의를 주장할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15] 동사 Estar의 과거분사형도 동일하게 Estado이나 쓰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하다.[16] '나라'라는 뜻으로 영어의 Country와 비슷하게 정치적 의미가 덜하다.[17] 두 번 다 프랑코가 위독해지면서 임시 국가 원수 대행을 맡았다.[18] 이후 스페인 왕국 체제에서 수상직을 유임하지만 1976년 7월 1일 후안 카를로스의 압박으로 사퇴한다.[19] 1959년의 국가경제안정법을 공식적으로 전면적인 개혁이 이루어진 시점으로 본다. 물론 이런 전면적인 개혁이 1959년에 갑툭튀한 것은 아니고 57년 카레로 블랑코의 지지를 받아 알베르토 우야스트레스 등 일군의 가톨릭 평신도 테크노크라트들이 기존의 팔랑헤 투사들을 대신해 장관이 되면서 단편적으로나마 실현되었다. 물론 그 이전 1950년대 초 이래 미국이나 유럽과의 관계가 이전보다는 개선되었고 특히 미국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51년 이래 1인당 GDP 기준으로 5%의 경제성장률을 보여왔다. 총 GDP 성장률은 그것보다 높았다.[20] 단적으로 1950~60년대에 기존 팔랑헤 계열 대학교 조직은 해체되었다. 반대로 숫자로 보면 옛 국민진영에서 팔랑헤 계열 다음으로 숫자가 많았던 카를로스파 계열의 대학 조직은 현대화 과정을 거친 덕에 오늘날까지도 적어도 간판은 달고 있다.[21] 이때 즈음 되면 한 때 스페인 내전에서 국민진영의 한 축이었던 가톨릭과 카를로스파도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22] 그냥 긍정적으로 본 수준이 아니라 스페인 근대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식으로도 높게 평가한다. 스탠리 페인은 프랑코를 볼 때 내전 과정에서 저질러진 만행에 대한 과오는 있지만(내전을 일으켰다고 하는게 아니다. 내전은 당시 상황 측면상 절반 정도는 강요된 면도 있었고 내전을 전반적으로 계획한 건 프랑코가 아니라 몰라였다.) 이후 근대화에 대한 공도 인정한다.[23] 당시 제2공화국에서는 원래 제대로 된 보건복지가 법제화되지 않았기 때문에(내전 직후 7월에 법제화가 되긴 했는데 공화파의 경제가 파탄나버린 관계로 제대로 수행되지 못했다.) 정권 전체 차원에서는 이런 보건복지를 체제선전의 목적에서 더 적극적으로 밀었다. 거기에 2차대전이 끝나고 당 내 진성 파시스트 세력들 입장에서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세력 간 제3의 위치라는 자기들의 마지막 존재 이유(사실상 마지막 밥줄)도 걸려있었기 때문에 이런 보건복지에 사활을 걸었다. 하도 정치적인 이슈다보니 비록 효과적 운용 과정에서 제도상의 결함은 있었지만(예를 들어 정부에 보건복지부같은 부처는 없었고 그냥 다른 부처들이 저마다 다른 보건복지 정책을 수행했다.) 경제성장과 맞물려 보건복지 인프라나 서비스 수준 자체는 꾸준히 향상되었다.[24] 물론 이는 일본이 당대 열강 중 경제력이 최하위권이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25] 여담이지만 외국 관광객들이 비키니를 입고 스페인 해변을 놀러다니자 가톨릭 주교들이 프랑코에게 '우리 스페인에서는 저런 모습 절대 허용할 수 없다'라고 거세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26]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스페인[27] 박정희 정권과 미묘하게 공통되면서도 다른 점이 있는데 둘 다 오일쇼크로 경제적 위기를 맞기는 했지만 프랑코 정권은 1차 오일쇼크 때 흔들렸고 박정희 정권은 1차 오일쇼크때는 아직 산업화가 덜 되어서 타격을 별로 받지 않았지만 2차 오일쇼크 때는 산업화가 일어나서 10.26.의 원인이 되기도 할 지경이었다는 데서 비슷하기도 하면서도 묘하게 다르다.[28] 사실 이 기성 사제들도 스페인 내전의 여파로 살기 위해 프랑코를 지지했지 개별 정책에 따라서는 어차피 정권이 덜 건드리기 때문에 미사에서의 지역 언어 사용과 같은 다소 가벼운 수준의 분리주의 성향이라던가, 빨갱이를 때려잡는 건 동의하지만 너무 지나치다는 이유로 자기가 볼 때는 괜찮은 지인들을 살려주는 식으로 삐딱선을 타긴 했다. 이는 심지어는 정권 개국공신라 할 만한 이시드로 데 고마 추기경같은 이들도 그랬다.[29] 이때 프랑코가 반정부 성향의 사제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하면서 '나는 하느님에게 책임을 지지 교회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적도 있다.[30] 하지만 아돌포 수아레스 역시 프랑코 정권 시기 국영 방송사 사장직을 지내던 고위 관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