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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22:50:56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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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임시 제3대
프란시스코 프랑코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토르쿠아도 페르난데스 미란다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
에스파냐 왕국 총리 →
에스파냐국 카우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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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국 제2대 총리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Luis Carrero Blanco
파일:Luis_Carrero_Blanco.jpg
출생 1904년 3월 4일
스페인 왕국 산토냐
사망 1973년 12월 20일 (향년 69세)
스페인국 마드리드
가족 마리아 델 카르멘 로자나 아베오 (아내)
자녀 5명
정당 통합 팔랑헤
재임기간 제2대 총리
1973년 6월 9일 ~ 1973년 12월 20일
최종 계급 해군 원수[1]
주요 참전 리프 전쟁
스페인 내전
서명
파일: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암살
2.1.1. 기묘한 사인
3. 기타
3.1. 카산드라 베라 사건

[clearfix]

1. 개요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 제독스페인 해군 장교이자 스페인국의 정부 수반이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절친임과 동시에 스페인 내전 내내 프랑코 총통과 함께 해왔으며, 이후 주요 실권자로서 통합 팔랑헤 내의 강경파로 활약했다.

당시 공식 후계자이긴 했으나 사실상 실권 없는 얼굴마담으로 육성되던 후안 카를로스 1세 대신 프랑코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1973년 6월 총리로 임명되었다. 프랑코 총통은 스페인 육군 장군 출신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해군 장교 집안이었고 프랑코 역시 해군에 들어갈 생각이었다가 미국-스페인 전쟁 패전으로 스페인 해군사관학교가 몇 년 폐교할 때 입학 정년기여서 포기하고 육군으로 전향한 케이스였으며, 그의 1살 위 형인 니콜라스 프랑코 또한 해군 장교로 프랑코를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돕고 집권기 내내 동생 편에 서는 등으로 프랑코와 해군은 꽤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

여섯 달 만에 ETA의 폭탄 테러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으로 카를로스 1세가 실질적인 후계자로 격상되게 됐다.

2. 생애

블랑코는 1904년 3월 4일 스페인 왕국 산토냐[2]에서 태어났다. 스페인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국민파 스페인 측의 해군으로 참전하였다.

내전이 끝난 후 프랑코에 의해 스페인 해군 작전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후에 프랑코에 의해 정계로 진출까지 하게 된다. 프랑코가 늙고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1973년 총리로 임명되게 된다.

2.1. 암살

1973년 12월 20일 바스크분리주의 단체인 ETA에 의해 암살되었다.

블랑코는 매일 마드리드의 세라노 거리(Calle de Serrano)에 위치한 산 프란시스코 데 보르하 성당(San Francisco de Borja Church)에서 미사를 보곤 했었는데, ETA 측은 이를 노리고 사건 다섯 달 전부터 지하실이 있는 아파트를 빌려 지하실에서부터 성당 근처 거리까지 땅굴을 파고[3] 정부 시설에서 훔쳐온 폭약 80kg을[4] 설치해 뒀다.

12월 20일 오전 09시 36분 미사를 보고 돌아오던 블랑코의 차량(방탄 옵션을 단 닷지 3700 GT[5])을 확인한 전기 기술자로 위장한 3명의 ETA 대원들이 스위치를 눌러 폭탄을 기폭시켰다. 얼마나 강력했는지 폭발 지점에는 거대한 웅덩이가 생겼고, 차량은 무려 20m나 날아올라 5층 성당을 뛰어넘어(...) 반대편의 2층 테라스에 떨어졌다. 사건 후 수습된 실제 차량의 모습. 차체가 찌그러지긴 했지만 놀랍게도 쪼개지지는 않았다.

블랑코는 즉사하지는 않았으나 치명상을 입었고,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으나 오전 10시 15분 사망하였다. 차에 동승하고 있던 운전기사와 경호원도 블랑코 사망 직후 사망하였다.

ETA 대원들은 사건 직후 가스 폭발이 일어났다며 고함을 지르고 군중이 혼란에 빠진 사이에 도망쳤다. 이후 1974년 01월 22일 ETA는 해당 사건이 자신들의 테러였음을 공식 선언하였다. 블랑코가 원체 강경파였다 보니 해외로 망명한 반프랑코 인사 및 일부 전문가들은 해당 사건을 두고 "ETA가 유일하게 스페인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한 일"이라는 촌평을 내리기도 했다.[6]

원래 프랑코는 블랑코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해 두었지만, 그가 사망하자 하는 수 없이 후안 카를로스 1세를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그리고 프랑코 사후에 스페인은 왕정을 복고하고 아돌포 수아레스 총리 주도하에서 민주주의까지 복고하게 되었으며, 1982년 총선에서 프랑코 반대파인 사회노동당이 승리하고. 펠리페 곤살레스 총리의 지도하에서 14년에 걸쳐 장기집권함에 따라 민주주의가 확고히 정착하였다.

2.1.1. 기묘한 사인

폭탄 테러로 입은 중상이 사인이 된 것은 맞지만 그 과정이 좀 기묘했다.

블랑코는 폭탄 테러 당시 방탄차량에 타고 있었고, 사용된 폭약이 군용이 아닌 산업용이라 블랑코를 차량과 함께 산산조각내기에는 파편량이나 위력계수가 좀 부족했다. 대신 발파용 폭약 특유의 압도적인 토크가 차량을 20미터 높이로 날려버렸다. 파편이나 폭압에 직격당하지 않았으니 폭사도 아니고, 지면에서 날아가 2층 테라스에 떨어졌기에 추락사도 아닌, 그야말로 발사로 인한 사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쉽게도(?) 사건 당시 차량이 하늘로 날아가는 장면은 카메라에 담기지 않았지만, 해당 사건을 다룬 1979년작인 스페인-이탈리아 합작 드라마 오퍼레이션 오우거(Operación Ogro)에서 재현된 장면[7]이 스페인 등지에서 짤방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블랑코 또한 "스페인 최초의 우주비행사", "높이뛰기 챔피언"이라고 불리는 등 지금도 고인드립을 당하고 있다. 레딧의 관련 페이지: He took "Arriba España" too seriously[해석] 실제로 당시의 반정부 성향 언론사에서 '블랑코 제독이 번지점프 세계기록에 도전했다가 죽었다'는 등의 드립을 쳤다가 프랑코 정권에 작살나기도 했다.드립 모음

3. 기타

3.1. 카산드라 베라 사건

2014년부터 스페인 경찰은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중심으로 소셜 미디어에 범람하는 테러리즘 관련 게시물에 조치를 취하는 일명 "거미 작전"(Operación Araña, 오페라시온 아라냐)을 시행하였는데, 작전 시행 중 블랑코의 죽음에 대하여 트위터고인드립을 쳤던 스페인 코미디언 카산드라 베라(Cassandra Vera)를 테러리즘을 옹호한 혐의로 고발하였고, 베라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9] #

보도에 따르면 베라는 해당 사건에 대해 "카레로 블랑코도 자기 차를 타고 과거로 돌아갔을까?"(¿Carrero Blanco también regresó al futuro con su coche? #RegresoAlFuturo) 및 "ETA가 관용 차량의 사적 이용 제한 정책을 우주 탐사에도 적용하였다"(ETA impulsó una política contra los coches oficiales combinada con un programa espacial.) 등 13개의 고인드립성 트윗을 올린 혐의를 받았다.

블랑코의 손녀 루시아 카레로 블랑코(Lucia Carrero Blanco)는 이를 두고 "나는 표현의 자유가 아무리 유감스럽더라도 감옥에 갈 수 있는 사회가 두렵다"고 반응했다. 그녀는 베라의 트윗에 대해 "저급하다"면서도, 징역형은 "비정상적"이고 "끔찍하다"고 베라에 대한 유죄 판결을 비판했다. #

결국 많은 논란 끝에 이듬해인 2018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


[1] 정확히는 Capitan General(of the Navy)로 사후 추서되었으며, 생전 최종 계급은 대장(Admiral general)이다. 해당 계급은 전통적으로 스페인 국왕이 겸했고 지금은 서방권의 원수와 동격 대접을 받는다. 물론, 이전에도 국왕이 아닌 원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특히 해군 원수의 경우 아마데오 1세 이전에는 국왕이 겸직한 적이 없다.), 프랑코 시절에는 프랑코가 공신들에게 이런 원수 자리를 대체로 사후 추서나 명예직 형식으로 뿌렸다. 특이한 것은 스페인군은 의외로 계급디플레가 심했던 군대라 제2공화국 시기에는 소장이나 그냥 장군(공화진영 한정)이 최선임이었고 내전이 끝나고 겨우 중장직이 원수 빼고 최선임이었다.[2] 빌바오에서 서쪽으로 약 40km 떨어져있는 크지 않은 도시[3] 집 주인에게는 자신들이 조각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둘러대어 땅굴에서 나온 버럭을 처리했다고 한다.[4] 당시 사용한 폭약은 질산암모늄니트로글리콜이 주성분인 고마-2(Goma-2)로, 1980-90년기 ETA에서 즐겨 사용했다.[5] 닷지 다트의 해외수출 버전. 크라이슬러 유럽 소속의 바레이로스가 닷지 다트를 비롯한 크라이슬러 계열사 차종들을 현지생산했으며, 당시 이들을 생산하던 비야베르데 공장이 스텔란티스 산하에서 계속 운영중이다.[6] 출처: Edles, Laura Desfor (1998). Symbol and Ritual in the New Spain: The Transition to Democracy after Franco.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128. ISBN 978-0521628853.[7] ETA에서 블랑코 암살 계획을 "오우거 작전"이라고 불렀다.[해석] 아리바 에스파냐(Arriba España)는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측의 구호로, "에스파냐여 일어나라!" 정도로 해석되지만 직역하면 "에스파냐의 위로"로 읽을 수도 있다. 즉 저 구호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정말로 에스파냐의 "위"로 올라가 버렸다는 드립.[9] 다만, 징역 2년 이하의 비폭력 범죄라서 실제로 수감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