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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칠레는 여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거치며 스페인어와 가톨릭이 보급되었으며, 스페인인들이 정착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식민지 개발 과정이나 스페인인 이민 진행은 여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차이점이 많았다. 이는 칠레에서 사용되는 스페인어가 라틴아메리카 여타 지역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점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슬레이어의 보컬 겸 베이시스트 탐 아라야[1] |
2. 이민사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정복한 이후 오늘날 칠레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은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오늘날의 칠레는 페루 부왕령의 남부 해안지대 일부에서 기원한 국가로, 스페인 제국 시절 당시에는 식민지 중 변방 취급을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페루 부왕령부터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망률이 비교적 낮아서,[2] 상당기간 원주민 인구가 백인 혼혈인 인구를 훨씬 상회하던 상황이 유지되었다. 칠레의 중부와 남부에는 상당히 비옥한 땅들이 많았으나, 스페인 정부는 어차피 식민지에 땅도 남아도는 마당에 칠레 남부의 마푸체 등 호전적인 원주민들을 굳이 비싼 비용을 들여 전쟁할 이유도 부족했다. 스페인 제국 측은 전쟁 대신 선교사들을 파견하여 원주민들에게 명목상의 통치권을 행사하고 이들이 식민 도시들의 약탈을 예방하는데 만족하였다.그러나 18세기 들어서 페루 부왕령의 재정의 근간을 이루던 포토시 은광의 채굴량이 감소하자, 스페인 식민주의자들 역시 줄어든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일단의 개혁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보르본 왕조 시대 스페인 제국 정부는 페루 부왕령으로부터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을 분리시켰으며,[3] 이 외에도 페루 부왕령 남부를 개발하는 계획을 세우고, 스페인 북부 나바라와 바스크, 갈리시아 지역으로부터 상당수의 이민 지원자들을 받아 식민시켰다. 비교하자면 멕시코의 경우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나 중부 카스티야, 푸에르토리코는 카나리아 제도 출신 이민자들이 많았던 가운데 칠레의 경우는 유독 바스크계 이민자들이 많았는데, 이는 당시 스페인령 아메리카 식민지 중 칠레의 기후가 이베리아 반도 북부와 나름 유사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북부 출신 이주민들이 새로이 대거 유입되며 18세기 말이 되면 오늘날 칠레에 해당하는 지역 주민 중 30%가 페닌술라르 이민자로 채워질 정도였다.이렇게 페루 부왕령 남부 오늘날 칠레에 해당하는 지역에 정착한 스페인 북부 출신 식민자들은 남쪽의 원주민들을 쓸어버리고, 원주민들이 생활하던 비옥한 토지를 개간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으나, 스페인 측은 변방지대 주민들의 희망 사항에 그닥 관심은 없었다. 이는 현지 크리오요들의 불만 사항으로 연결되었다. 한 편 바스크인들의 경우 원래 프랑스 국경 지대 출신인 것도 있고, 여타 스페인들과 비교해서 해외와의 교류 경험도 풍부했던 편이었다. 바스크인 출신 크리오요들은 상업 수완을 발휘하며 칠레 사회의 부유층으로 떠오르는데, 이들을 “카스티야-바스크 귀족(Aristocracia castellano-vasca)“이라고 부른다.
3. 카스티야-바스크 귀족
호세 데 산 마르틴이 남아메리카 각지에서 반스페인 반란을 지휘했을 당시, 오늘날 페루에 해당하는 쿠스코와 리마의 크리오요들은 스페인 제국 충성파였다면 산티아고의 카스티야-바스크 귀족 크리오요들은 독립을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 결과 칠레는 페루보다 더 빨리 독립되었고, 이는 과거 페루 부왕령에 속하는 지역이 페루와 볼리비아, 칠레로 쪼개지는 결과로 이어졌다.스페인 식민지에서 독립한 백인들 사이에서 스페인 전통에 대한 의견은 분명하게 나뉘어졌다. 대다수 히스패닉들은 자기들이 가진 모든 악폐의 근원은 스페인에 있다고 규탄했다. 즉 식민 모국인 스페인은 종교의 자유에서부터 경제적 부, 정치적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근대 유럽이 대표하는 모든 것을 식민지에서 박탈했던 것은 아닐까? ... "스페인 군대는 더 이상 우리를 억압하지는 않지만, 그 군대의 전통은 여전히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라틴아메리카 사회가 해방되기 위해서는 스페인의 유산과 절연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 카를로스 푸엔테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 카를로스 푸엔테스
칠레가 독립한 이후 자유주의 사상에 감화되었던 이들 카스티야-바스크 가문들이 칠레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칠레의 국가 시스템은 여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하게 된다. 스페인 식민 시절 아메리카 식민지의 중심이었던 멕시코[4]나 콜롬비아 등에서는 기존에 식민지 시절 물려받은 유산을 가꾸고 개발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던 반면, 식민지 시절 변방이었던 칠레 등에서는 스페인계 정체성, 스페인 문화 모두가 타도 대상이 되었다. 스페인 제국으로 독립한 이후 칠레는 당시 유럽의 2류 국가로 전락한 스페인 식민 지배의 유산이 라틴아메리카의 후진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판단 하에 스페인 문화와 단절을 결정하고, 대신 영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유럽의 신흥 강국으로 떠올랐던 프로이센 왕국의 군사/사회 시스템을 모방하는데 집중했다.
19세기 칠레 역사는 독일인이나 크로아티아인들의 이민을 장려하고, 칠레 남부의 원주민들을 정복, 소탕하면서 영국과 교역을 늘려나가는 방향으로 진행되는데, 이는 당시 카스티야-바스크 엘리트들의 자유주의-친유럽주의 성향과 연관되어 있다.
4. 현황
상술한 이유로 칠레 사회에서는 스페인계 혹은 스페인계 칠레인 같은 주제 관련한 논의가 다소 제한되는 편이다. 다만 오늘날 칠레인들은 자신들이 바스크인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취사선택하여,[5] 칠레 국가정체성이나 민족주의 담론으로 삼는 편이다. 이를 두고 20세기 초 살라망카 대학교의 총장이자 바스크인 출신이었던 미겔 데 우나무노는 "La Compañía de Jesús y la República de Chile son las dos grandes hazañas del pueblo vascongado(바스크 민족의 두 가지 위대한 업적으로 예수회와 칠레 공화국을 꼽을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던 바 있다.칠레는 인구가 비교적 적은 국가임에도 불구, 바스크계 인구 비중이 비교적 높아서 통계에 따라 바스크인이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
위대한 칠레인을 뽑는 설문조사에서 1위로 선정되었던 살바도르 아옌데 전 칠레 대통령과 이후 쿠데타로 집권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그리고 왕좌의 게임에서 오베린 마르텔 역을 맡으면서 유명해진 페드로 파스칼이 상술한 카스티야-바스크 엘리트 가문 출신이다. 참고로 파스칼이라는 성씨가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 흔한 성씨이긴 한데, 파스칼은 외가 쪽 성씨이고 해당인의 부계 성씨는 발마세다(Balmaceda)이다. 상단 사진에 나온 탐 아라야의 성씨도 바스크계 성씨로 영어/스페인어 표기는 Araya이지만 바스크어로는 Araia라고 표기된다.
5. 관련 문서
6. 외부 링크
- 한국대외정책 연구원 : 중남미 엘리트 집단 특성에 관한 연구 - 카스티야-바스크 지주귀족 엘리트 가문 관련한 설명 참조.
[1] 칠레식 스페인어는 말이 엄청나게 빠른 걸로 유명한데, 스페인어에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는 사람들 중에서도 미국 내 유명 헤비메탈 밴드 슬레이어(밴드)의 보컬 겸 베이시스트 탐 아라야 (Tom Araya)를 예를 들면 "아 맞다." 하면서 무릎을 치는 경우가 많다. 슬레이어는 미국 밴드인 관계로 가사는 비록 스페인어가 아니라 영어이지만, 그래도 보컬은 칠레식 액센트의 특징을 상당히 잘 살린 편이다.[2] 가축을 거의 키우지 않던 아메리카 대륙 서부의 원주민들의 경우 스페인인들이 데려온 돼지나 개가 옮긴 질병에 떼죽음을 당하곤 했으나, 기니피그나 라마 같은 가축을 키우던 남아메리카 동부 일대 주민들은 수인성 질병에 면역력이 있던 편이었다.[3] 이는 후일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등으로 이어진다.[4] 스페인-멕시코 관계 문서 참조[5] 여기서 바스크인들은 칠레에 정착한 스페인 식민자들 중에서 비교적 소수였다는 점은 간과되고는 한다.[6] 바스크인 이민자가 비교적 많았다 뿐이지 다수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