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노 고지의 역임 지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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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리노 파시스트당 당수 | ||||
줄리아노 고지 |
산마리노 공화국의 제1집정관 산마리노 파시스트당의 초대 당수 산마리노 공화국 파쇼의 초대 당수 | |
본명 | <colbgcolor=#ffffff,#191919>Giuliano Gozi 줄리아노 고치 |
출생 | 1894년 8월 7일 |
산마리노 산마리노구[1] | |
사망 | 1955년 1월 18일 (향년 60세) |
산마리노 산마리노구 | |
정당 | 산마리노 파시스트당 (1923 ~ 1943) 산마리노 공화국 파쇼 (1944) |
시민권 | 산마리노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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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마리노의 정치인, 산마리노 파시스트당의 당수로, 1923년부터 1943년까지 제1 집정관 및 외무-정무장관을 지냈다.[2][3]2. 생애
볼로냐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졸업하였다. 1915년 이탈리아 왕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고지는 이탈리아 왕국군에 입대하여 참전하였고, 이후 전투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메달리아 도로 동장을 수여받았다. (Medaglia di bronzo al valor militare)1년 뒤인 1916년 중위로 승진하였다. 이후 1917년 여름 토리노에서 있었던 반전시위를 진압하는 데 관여했다.
이후 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이 패전했고, 이후 몬테그라파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종전 후 메달리아 도로 훈장, 이탈리아 적십자에서 은장, 산마리노 은장, 협상국 승리 포장을 수여받았다. (Medaglia interalleata della vittoria, 혹은 Medaglia della vittoria commemorativa della grande guerra per la civiltà)
2.1. 정치인 생활
산마리노 대평의회는 이후 고지를 외무·정무장관으로 임명하였고, 1943년까지 이 직위를 유지하였다.2.2. 파시스트 국가의 지도자
1922년 8월 10일 고지는 산마리노 파시스트당을 창당하였고, 다음 해인 1923년 총선 때는 파시스트당이 유일 합법 정당이 되었다. 국가지도자로서 고지는 1939년 3월 31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산마리노-이탈리아 친선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만은 이탈리아가 공화국이 된 현재까지도 유효하다.해당 조약1942년 9월 17일에 고지는 인종법을 발효하여 산마리노인과 비산마리노인, 유대인의 결혼을 불법화하였으나, 유대계가 아닌 이탈리아인과의 결혼은 허용되었다.
이후 1944년 11월 16일까지 산마리노 파시스트당의 당수직을 지내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하면서 파시스트당도 해산되었고, 그도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후 1955년 1월 18일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 산마리노에서 태어난 사람만이 산마리노의 집정관이 될 수 있다.[2] 산마리노의 국가원수는 집정관이며, 6개월마다 두 명이 선출된다. 제1집정관과 제2집정관은 서로 다른 두 정당에서 한 명씩 선출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두 정당이 나눠가질 때도 있고, 야당을 배려하기 위해 두 집정관 중 한 자리를 야당에 양보하기도 한다. 임기가 6개월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집정관을 지낸 사람들의 수도 매우 많아서 '제X대 집정관'과 같이 대수를 붙이지 않으며, 두 집정관의 권한은 같다.[3] 외무-정무장관은 산마리노의 행정부에 해당하는 국무회의(내각)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직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