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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빌 체임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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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 Hon. Neville Chamberl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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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 Neville Chamberlain
출생 1869년 3월 18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웨스트미들랜즈 주 버밍엄
사망 1940년 11월 9일 (향년 71세)
영국 햄프셔 주 헥필드
재임기간 제60대 총리
1937년 5월 28일 ~ 1940년 5월 10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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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밍엄 대학교[1] (-1889년)
직업 정치인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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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총리 이전2.2. 총리 재임2.3. 퇴임 이후 : 5월 전시내각 위기의 키 포인트
3. 평가
3.1. 통설3.2. 옹호론 (수정주의)3.3. 비판론 (반수정주의, Counter-Revisionism)3.4. 처칠의 추도문
4. 매체에서
4.1. 출판물4.2. 영상물4.3. 게임

[clearfix]

1. 개요

영국 제 60대 총리. 당대엔 신흥 정치가문의 당주, 성공한 기업인, 대공황을 헤쳐간 유능한 재무관료 등으로 나름 잘나가던 정치인이었으나, 현대에서는 뮌헨 협정이라는 오판을 저지른 무능한 지도자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총리 이전

영국의 자수성가형 정치인으로 식민장관까지 올라간 정치인, 조지프 체임벌린의 차남으로서 1869년 버밍엄에서 태어났다. 부친 조지프 체임벌린은 버밍엄 출신의 자유당 계열 정치인이었으나, 자유당이 글래드스턴 자유주의+사회자유주의파들과 자유제국주의 신흥자본파로 분열될 때, 후자의 대표로서 '자유연합당'으로 분당을 이끈 거물급 정치인이다.[2] 이는 그의 두 아들[3]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1889년, 당시 아버지가 운영하던 도제 기업에서 회계사로 일하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2년 뒤 바하마와 앤틸러스 제도 등 카리브 해의 영국 식민지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을 경영하였으나 5만 파운드, 현재가치로는 대략 400만 파운드(한화로 대략 61억)를 손해 보고 실패했다. 영국으로 돌아와 가족의 도움으로 Elliot's Metal Company의 임원으로 있으면서 사업적 수완을 키웠고 금속 선박 제조회사인 Hoskins & Company를 사들여 17년 동안 Hoskins 상무이사로 있으면 회사를 번창시켜 사업적으로 성공한다. 네빌 체임벌린의 사업적 성공은 아버지도 놀라게 했다. 자기 친구에게 자기보다 사업적 통찰력이 뛰어나고, 아직 정치에 관심이 없지만 총리가 될 수 있도록 지지하겠다고 말했다.

1911년, 고향 버밍엄의 시장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로이드 조지 내각의 전시 군수지원 부분의 실무책임자로 기용되었으나 방향성의 차이로 중도에 사퇴했다.

1918년부터 버밍엄 지역구 하원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 재무장관으로 입각하며 처음으로 내각에 진출했다. 1924년에 보건장관으로 재입각, 29년까지 직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 중에 1926년 전국적 총파업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노동당과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

그가 정치적으로 가장 빛난 시기는 1931~1937년이었다. 대공황으로 경제가 붕괴하던 와중에 보수당 출신이지만 거국내각을 운영하던 노동당 출신 램지 맥도널드 내각에서 재무장관으로 기용되어, 6년여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펼치며 긴축재정과 재정 및 금융개혁을 단행하고 열강간 공조를 통한 위기극복 등을 추진, 영국 경제를 다시 서서히 회복세로 이끌어 주목받았다. 오죽했으면 소련을 방문한 낸시 아스터가 스탈린과 면담했을 때 차세대 지도자로 이 사람을 골랐을 정도였다.[4]

1934년 당시 일본 외무대신으로 재임하고 있던 히로타 고키와 접촉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해 종료된 영일동맹을 대체하는 영일불가침조약을 새로 체결하려 했지만, 영국 총리 램지 맥도널드는 이 조약이 미국에게 영일동맹의 재림으로 보일까 우려했고, 일본 역시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이권을 보장해줄 의지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 탈퇴 통보를 하면서 무산되었다.

2.2. 총리 재임

파일:attachment/네빌 체임벌린/anc-1.gif

1937년, 전임 스탠리 볼드윈의 뒤를 이어 대영제국의 총리로 취임하였다.

총리로 취임한 그의 당면과제는 역시나 나치 독일이었다. 독일은 무서운 기세로 주변국을 위협했고, 체임벌린은 독일 문제에 대해 외교적 해결책을 추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독일-이탈리아 연대의 파기 시도였다.

두 파시스트 국가의 연합을 막기 위해 체임벌린은 이탈리아 왕국에티오피아 병합을 사실상 묵인했으며, 스페인 내전에 대한 간섭도 막았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협상국이었기에 체임벌린의 생각이 크게 틀린 건 아니었다.[5]

체임벌린이 이런 외교적 유화책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영국의 경제상황에 기인했다. 대공황 여파로 대대적 군축을 한 상황에서 무력에 기반한 대독일 강경책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영국의 군사력은 재무장관으로서 군축을 주도한 체임벌린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았고, 1935년경부터 본격적인 재무장을 시작했지만 아직 군사력의 재건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1차대전때의 막대한 인구 손실을 기억하고 있던 전간기 영국과 프랑스는 어떻게 해서든 전쟁가능성을 피하려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고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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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good friends, for the second time in our history, a British Prime Minister has returned from Germany bringing peace with honour. I believe it is peace for our time. We thank you from the bottom of our hearts. Go home and get a nice quiet sleep.
-친애하는 여러분, 역사상 두 번째로[6]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라고 믿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집에 돌아가서셔 평안히 주무십시오.
1938년, 뮌헨 협정 뒤에 다우닝가 10번가 앞에서 한 연설
결국 이 문제는 1938년에 터지고 말았다. 아돌프 히틀러주데텐란트 요구에, 체임벌린은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뮌헨 협정이었다. 체임벌린은 뮌헨 협정을 통해 당분간 히틀러와 독일의 팽창의욕을 꺾었다고 생각했고, 여기에서 나름 유명한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Peace for our time)"라는 발언이 나왔다.[7][8]


그러나 히틀러는 6개월 만에 뮌헨 협정을 파기했고, 다시 6개월 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뮌헨 협정은 히틀러의 국내의 정치적 기반을 튼튼하게 해준 외교성과였으며, 독일 군부는 재무장이 끝나지 않은 판에 연신 영프를 상대로 도박수를 두는 나치 정부를 탐탁지 않게 여겨 쿠데타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히틀러가 오스트리아-주데텐란트-체코까지 삼연타석 외교 홈런을 치면서 큰 성과를 거두고, 국가적인 지지까지 얻자 지켜보자는 쪽으로 돌아섰고 이것이 폴란드 침공까지 갔다.

I am speaking to you from the cabinet room at 10 Downing Street. This morning the British ambassador in Berlin handed the German government a final note stating that unless we heard from them by 11 o'clock that they were prepared at once to withdraw their troops from Poland, a state of war would exist between us. I have to tell you now that no such undertaking has been received, and that consequently this country is at war with Germany.
-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에서 전달합니다. 오늘 아침, 베를린 주재 영국대사는 독일 정부에게 11시까지 폴란드에서 즉시 철수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면 양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의 최후 통첩을 보냈습니다. 허나 우리는 독일에게 어떠한 응답도 듣지 못하였고, 따라서 우리 영국은 독일과 전쟁 상태에 돌입했음을 말씀드립니다.
뮌헨 협정 파기 직후 체임벌린은 외교적 유화책을 포기하고 강경책으로 전환했으나, 폴란드가 망하는 와중에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독일에 맞서기 위한 전시내각을 수립하고 대독 강경파 윈스턴 처칠을 기용하였으나 노동당은 과거의 원한으로 전쟁내각 참여를 거부했고, 개전 이후 급격히 위세가 높아진 처칠 등 강경파도 좀 더 강경한 대응을 요구하여 국내정치적으로도 고립되었다.

체임벌린 내각이 기획한 노르웨이 전역이 1달여 만에 패배로 끝나감에 따라 전시내각은 붕괴 위기를 맞이했다. 노르웨이 침공을 강력히 주장한 처칠은 본인이 살려고 패배를 모조리 상관인 체임벌린 탓으로 돌리며 사임을 요구했고, 노동당도 체임벌린이 이끄는 전쟁내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체임벌린이 노르웨이 전역에 투입한 육군은 실전경험이 풍부한 9개사단 9만명을 배치한 히틀러에 비하면 한줌도 안되는 갓 징집한 2개 여단 3천명 병력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독일에 비해 한참 늦게 진주했기 때문에 독일군에 전략적인 거점을 모두 빼앗겨 있는 상태였고 비행장 강행착륙점령이라는 창의적이고 공세적인 돌입을 감수하던 루프트바페에 비해 영국은 공군 배치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 정도 차이의 병력 차이는 나폴레옹도 극복할 수 없다. 한편으로 영국이 일찌감치 노르웨이 개입을 준비했기 때문에 영국 해군은 독일이 상륙전을 개시할때 노르웨이 근방 작전선에 신속히 전개할 수 있었고 독일 해군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크릭스마리네는 노르웨이 전역을 마지막으로 작전능력을 영구적으로 상실했다. 해전에서의 승리와 육전에서의 패배는 영국이 동원할 수 있었던 함선과 병력의 차이인 것으로 해군이야 죽도록 지켜내어 강군을 유지했지만 육군을 쥐어짜내봐야 고작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도록 꾸준히 재무장을 반대하고 빠른 병력전개를 반대한 체임벌린의 책임은 명백했다.
You have sat too long here for any good you have been doing. Depart, I say, and let us have done with you. In the name of God, go!
- 당신은 하는 일에 비해 그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이제 그만 끝내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라!
1940년 5월 7일, 영국 하원 회의장에서 레오폴드 에이머리[9]
레오폴드 에이머리의 연설을 계기로 5월 7일, 영국 하원은 체임벌린에 대한 재신임 투표를 실시했다. 이 투표는 신임 281, 불신임 200으로 겉으론 체임벌린의 승리로 끝났으나 기존에 비하면 지지세가 확연히 줄어든 상태였기에 사실상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과에 충격 먹은 체임벌린은 직후 처칠과 만나 총리직을 사임하겠다고 밝혔고 처칠은 체임벌린의 사임을 일단은 만류했다. 5월 9일에서 10일 새벽에 이르기까지, 반 체임벌린 세력과 처칠 옹립파들은 체임벌린 내각의 전쟁 지도 및 그 내각에서의 봉직 활동을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결국 정치적으로 고립된 체임벌린은 1940년 5월 10일 사임했다. 그리고 그 날,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었다.[10]

2.3. 퇴임 이후 : 5월 전시내각 위기의 키 포인트

비록 퇴임했으나, 총리로 오른 처칠이 독불장군 스타일에 자기계파가 여실히 부족했던 관계로 체임벌린은 여전히 보수당 범주류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재신임 투표 결과에서 알 수 있듯 총리 취임 당시보다 지지세가 크게 줄어든 것은 명백했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보수당의 주류로서 상당한 막후 영향력이 있었다. 우선 총리직에서 물러났음에도 여전히 보수당 당 대표는 체임벌린이었다. 노동당의 비토 때문에 거국 전시내각을 위해 총리직에서 물러났을 뿐 보수당 범주류의 지지 속에 당 대표직은 유지하고 있었고, 처칠은 체임벌린을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처칠도 이를 고려하여 체임벌린을 전시내각의 최고자문기구인 추밀원 의장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결정적 위기 상황에서 처칠에 도움이 되어 돌아온다.

1940년 5월 영국 전시내각 위기에서 체임벌린은 초창기에는 일단 온건강화파인 외무부장관 핼리팩스의 의견에 동조했지만, 독일과의 협상 및 이탈리아의 중재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핼리팩스와 달리 체임벌린은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믿지 않았다. 체임벌린은 단독으로 독일과 싸워 이길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탈리아와 무솔리니가 영국에 호의적 입장에서 중재를 해줄 것이라고도 믿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리품을 노리고 이탈리아가 독일 편에 서서 참전할 것이라 예측했다. 뮌헨에서의 경험으로 히틀러도 무솔리니도 믿을 놈이 못된다는 걸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전시 내각에서 처칠 중심의 강경항전파, 핼리팩스 중심의 범주류 온건협상파의 갈등이 일어날 때 체임벌린은 범주류에 속했음에도 최종적으로 처칠의 손을 들어주었고 영국은 협상대신 항전의 길을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후 급격한 건강악화로 인해 공적 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11] 영국 본토 항공전의 와중에 계속된 공습으로 사무소와 피난소를 옮기는 악조건 속에서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처칠에게 당 대표직 사임 및 대표직 이양을 제안한다. 처칠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12] 체임벌린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이를 수락, 10월 9일 체임벌린은 당 대표직에서 사임하고 처칠이 이 직위를 이어받는다. 1939년-1940년 초의 적대관계가 죽음 앞에서 해소된 것.[13] 사임 직후 가터 훈장을 수여받을 수 있었으나 이를 사양했다. 10월 14일에는 전쟁 와중에도 조지 6세 부부가 직접 문병을 오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11월 9일 사망한다.

장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으며, 그의 관은 현직 총리인 처칠과 외무부장관 핼리팩스가 운구했다. 처칠은 하원에서의 추모연설에서 "역사가 뭐라 하더라도 체임벌린은 그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고, 그의 노력덕에 현재의 위기에 맞서 싸울 수 있다"며 체임벌린을 극찬했다.

3. 평가

3.1. 통설

정치인 체임벌린에 대한 평가는 뮌헨 협정에 대한 평가와 강하게 맞물리며, 뮌헨 협정이 실패하면서 체임벌린에 대한 평가도 추락했다.

1938년에 체임벌린은 뮌헨 협정을 통해 나치 독일과 히틀러에게 굴복했고 그 결과 유럽 대륙에서 일어날 지도 모를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만 먹고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고 곧바로 체코슬라비키아를 침공했지만 영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히틀러는 영국이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 여겨 끊임없이 영국의 경고를 무시했고 결국 폴란드 침공을 계기로 영국은 전쟁에 빠져들게 되었다. 체임벌린이 말한 '우리 시대의 평화'는 몇달도 못 갔고, 그 뒤로 뮌헨 협정은 '어줍잖은 평화주의가 초래한 비극적인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당대에도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만 먹고 만족할 사람이 아니니 강경책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정치인은 있었다. 윈스턴 처칠 등이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임벌린은 결국 독일을 달래기로 결심했는데 이는 독일이 군사적 행동에 들어갈 경우 대공황을 맞아 약화된 영국의 군사력이 독일을 막을 수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독일의 군사력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나온 오판이었다. 당시 독일은 영국 이상으로 군사력 재건이 안 되어 있었고, 히틀러의 허풍과는 달리 영국이 강경하게 나올 경우 군사적으로 맞설 능력이 없었다.[14][15] 게다가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치명적인 오판을 한 셈이었다.

윈스턴 처칠은 2차대전이 끝난 후 회고록을 펴내며 체임벌린을 "선의는 있지만 나약하고, 히틀러의 위협에 둔감했으며, 유럽 국가들이 힘을 합쳐 히틀러를 제거할 수 있음을 몰랐다"고 평가했다.

그리하여 체임벌린에 대한 평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BBC 히스토리 매거진에서 평가한 20세기 총리들 중에서 앤서니 이든과 함께 0점을 받으면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다.

3.2. 옹호론 (수정주의)

그러나 전후 통설과는 반대로 90년대까지 체임벌린에 대한 옹호론 내지는 동정론이 학계를 지배해왔다. 즉 전통주의적 관점에 대항하는 이른바 수정주의적 관점이다. 이는 A.J.P. 테일러로 대변되는 역사적 수정주의가 대두되는 가운데 영국 정부의 전전시대 문건들이 60년대에 일제히, 일시에 공개되면서 역사적 수정주의를 뒷받침하면서 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던 까닭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공식문건들의 홍수 앞에서 학계는 유화정책의 판단근거, 즉 체임벌린이 마주했던 경제적 및 여론적 제약에 대해 반론하는데 실패했고 그 결과 "해석적 항복" (interpretative surrender)을 하기에 이르렀는데,[16] 그 결과 90년대 초에 이르르면 체임벌린을 둘러싼 히스토리오그래피는 수정주의에 "독점"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17] 전후 형성된 체임벌린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컨센서스가 도출되었다.
미국의 경우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반복되어서는 안 될 실수였다는 견해가 팽배했는데, 현재 대중들의 믿음인 또 다른 베트남을 피해야 한다는 것보다 그 견해는 당시에 훨씬 더 광범위하고 열렬히 개최되었다.

프랑스의 경우는 그 전쟁에서 프랑스가 겪었던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는 비례하여 주요 참가자 중 가장 큰 것이었으며 군사 계획과 준비를 제한했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와 대중의 사고를 지배했다. 1938년 7월 프랑스 정부가 프라하에 보낸 메시지는 프랑스가 싸우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 그리고 영국이 전쟁을 한다면 프랑스가 착수할 유일한 주도권은 튀니지에서 이탈리아 식민지인 리비아를 침공하는 것이라는 정보, 두 의사 소통이 당시에 비밀로 유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프랑스 감정의 실질적인 의미를 강조한다. 사실,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영국 정부가 발표했을 때 파리의 패닉 때문에 네빌 체임벌린은 첫번째로 독일행으로 택해 날아갔다.

이것은 영국인의 태도에 대한 고려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뮌헨에 대한 회고적 논의는 국내외의 정치적 현실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영국 내에서 체임벌린 정부에 대한 주요 야당은 체임벌린 정부가 너무 군국주의적이고 평화주의자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가장 최근의 선거에서, 1935년 노동당 반대파의 정치 포스터에서 체임벌린은 전쟁광이었다. 1935년까지 노동당은 의회에서 영국 해군이나 공군 등, 군대에 반대하는 투표를 했다. 그리고 1936년에는 스페인의 공화당 측에 무기를 보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군사 예산에 대해 반대표를 던지는 대신 기권이라는 용감한 입장으로 돌아섰을 뿐이었다. RAF(영국 공군)를 현대식 전투기, 나중에 유명한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 등으로 재건하기 위한 체임벌린의 프로그램은 뮌헨 이후에 군대를 창설하기 위한 징병제 도입과 마찬가지로 뮌헨 이전의 노동당에 의해 만장일치로 반대되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면, 윈스턴 처칠이 왜 그랬는지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보수당이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에 큰 양보를 하려는 의지를 보이자 처칠은 그에 반대하여 정치적으로 황무지였으나 베네스의 친구인 휴버트 립카(해설: 체코슬로바키아, 에드바르트 베네시의 고문)가 1938년 6월 런던을 방문했을 때, 처칠은 본인이 정부에 있었다면 체임벌린과 같은 정책을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처칠의 의회에서의 성대한 비판과 회고록에 쓴 비판으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하지만 그는 그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정직하게 경고할 만큼 충분히 책임감이 있었다.

인명과 부에 막대한 희생을 치른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억이 영국 대중을 무겁게 짓누르고 이러한 맥락에서 체임벌린은 일반적으로 반대라기보다는 너무 호전적이라는 공격을 받았고, 외부 제약도 런던 정부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의 군사적 유대의 성격이 극적으로 반전되는 것을 목격했다. 식민 제국을 보호하고 확장하기 위해 영국에서 파견된 군대 대신에, 독일의 손에 패배할 위험으로부터 영국을 방어하기 위해 유럽과 중동의 전장에서 제국의 군대가 필요했다. 호주와 뉴질랜드의 안작 데이와 오타와의 팔러먼트 힐에 있는 비미 릿지기념비는 지난 전쟁과 미래의 주요 전쟁에서 군사 상황의 180도 변화를 상징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고 민족주의적 선동으로 황폐해진 인도에서 또 다른 거대한 자원 봉사자 군대가 증원될 경우 자치령이 그들 자신의 자유 의지로 영국에 합류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었을까?

쓸데없는 질문이 아니었다. 1938년 런던의 누구도 1942년 10월-11월에 엘 알라메인에서 영국 지상전의 결정적인 전환이 일어날 때 관련된 영국군 대부분이 영국이 아니라 제국과 영연방에서 올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일반적인 지표가 있었다. 1938년에 영국 편에서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치령의 경고는 전투에 대한 어떤 결정도 매우 어렵게 만들었으며, 그리고 캐나다가 기권하기로 결정한 유럽 전쟁에 대하여 미국의 정책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광범위한 맥락에서 독일의 선전 방식은 주데텐 독일인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자결권에 대한 열망을 강조하는 기발한 접근 방식이었다. 우리는 이것이 모두 핑계였다는 것을 오늘날과 그 당시 일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국가를 파괴하기를 원했고 그 안에 체코인의 존재를 독일은 슬라브 인구를 독일화, 살해 또는 추방함으로써 해결할 문제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에는 결코 그렇게 명백하지 않았으며 대중에게 현실을 분명히 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마도 1938년 5월 위기 직후 프라하가 제안한 매우 광범위한 양보의 주도권이다. 당시, 그러한 양보는 나약함의 표시로 해석되지 않았으며, 베를린의 지시에 따라 주데텐 독일인이 거부했으면 독일 정책의 가장된 목표가 아닌 실제를 조명됐을 것이다. 국내 내부적 요인으로 인해 그러한 조치가 불가능했을 것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취해지지 않았다.
Gerhard L. Weinberg, “Reflections on Munich after 60 years”, Diplomacy & Statecraft, vol.10, no.2-3 (1999), p.5-7. DOI: 10.1080/09592299908406123 재인용
선의를 가진 합리적인 인물로서 체임벌린이 퓌러에게 속은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체임벌린의 순진함과 히틀러의 음흉함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것이 작동하고 있었다. 유화정책은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에 반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했다. 만일 처칠이 1936년 초와 1938년 말 사이에 총리 자리에 있었다면, 그도 자신이 나중에 했던 방식으로 국민들을 결집할 수 없었을 공산이 크다. 처칠이나 다른 어떤 총리도 여론을 무릅쓰고 나라가 전쟁에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영국 장성들의 심각한 경고를 무시하면서까지 히틀러에 대한 군사행동을 취하려고 했다면, 아마도 의회에서 불신임을 받거나 자리에서 내쫓겼을 게 거의 틀림없다.
처칠은 타협적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영국이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확보한 뒤에야 나라를 한데 결집할 수 있었다(그는 1940년 5월 10일 총리에 취임했다). 심지어 그때도 그가 얻은 지지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것보다는 미약했다. 1939년 이전에 처칠은 거의 정치적 주변인, 즉 아주 명민하기는 하되 일찍이 파국적인 군사적 결정에 자주 연루된 성급한 도박가에 가까웠다.
앨버트 S. 린드먼, 현대 유럽의 역사(장문석 역, 삼천리, 2017), 601쪽재인용

그리고 한발 나아가 유화정책이 단순히 영국이 처한 상황 때문에 부득이 취했던 차악의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해석도 등장하게 된다. 이를테면 아래와 같은 서술들이다.
사람들은 1938년의 뮌헨 협정을 독일의 승리이자 침략행위 앞에 무릎을 꿇었던 굴욕적 사건이라 생각하지만 정작 히틀러는 뮌헨 협정 당시 크게 실망했으며, 이후 협정의 결과를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큰 실수로 여겼다.(미주 22)[18] 당시 히틀러는 계획대로 전쟁을 시작하지 못했고, 1939년이 되어서야 체코슬로바키아의 남은 지역들을 정복한 뒤 1938년에 자신을 좌절시켰던 요소들을 모두 배제하며 전쟁을 향해 나아갔다.

제러드 L. 와인버그, 2차세계대전사, 홍희범 옮김 (과천 : 길찾기 : 이미지프레임, 2016), 57~58재인용
1945년 2월 21일 히틀러는 1938년 뮌헨 협정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의 부관이자 개인 기록 보관인인 마르틴 보어만에게 설명했다. '우리는 1938년에 공격했어야 했다. 그것이 전쟁을 국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히틀러는 단지 '짧은 전쟁'이었을 체코슬로바키아의 침공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은 자신을 꾸짖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정치적 자산이 무너진 채 소극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히틀러가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얻었어야 했고 앞으로 몇 년 동안 세계 대전을 연기했을 것이다." 히틀러의 관점에서 가장 큰 범인은 바로 네빌 체임벌린이었다, 그의 의도는 약속을 통해 히틀러의 눈을 멀게 하여 1938년 9월에 영국이 무자비한 전쟁에 준비할 시간을 버는 것이다.
Richard Overy "Germany and the Munich crisis: A mutilated victory?.", Diplomacy & Statecraft, vol.10, no.2-3 (1999), p.191. #
Diplomacy & Statecraft(Web of Science)Historian(Web of Sciencen)[19]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사가들이 체임벌린을 어떻게 보는가가 아니라 그의 주요 적수인 아돌프 히틀러가 그를 어떻게 보았는가이다. 역사가 휴 트레버-로퍼에 따르면, 1945년 2월 독일이 폐허로 변하고 패배가 임박했을 때 히틀러는 뒤돌아보면서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 의아해했다. 독일은 어디에서 전쟁에서 패배했나? 답: 뮌헨. 그는 “우리는 1938년에 전쟁에 나섰어야 했다”고 말했다.

"1938년 9월이 가장 유리한 날짜였을 것이다... 우리는 그때 무력으로 분쟁을 해결했어야 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독일의 멸망을 누구 탓으로 돌렸을까? 처칠도, 미 공군도, 소련군도 아니었다. 오히려 "기만적인 우산을 손에 들고 있는 대자본가 부르주아, 체임벌린"이었다.
Brent Dyck, "Neville Chamberlain: Villain or Hero?." Historian, vol.112 (2011), p. 15. Historian(Web of Sciencen)[20]

3.3. 비판론 (반수정주의, Counter-Revisionism)

수정주의의 해석적 "독점" 내지 "항복"은 그러나 90년대에 들어 붕괴하게 된다. 특히 수정주의에서 강조되었던 대안의 부재성에 대해서는 일정한 이해와 함께 반박도 동시에 이루어졌다.

가장 선두에 서서 포문을 열었던 것은 반수정주의자(counter-revisionist)를 자처한 R.A.C. 파커로 그의 요점 또한 체임벌린에게 다른 대안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유화정책의 근저에는 영토적 동질성 회복이라는 독일 민족의 열망을 허락하는 대신 독일에게서 균형적 세계질서에 대한 동조를 받아내는 기브 앤 테이크적 발상이 존재했고, 다시 말해 체임벌린은 "오만방자"[21]하게도 영국에게 유럽 내의 이익충돌과 이권분배를 직접 조율할 국력이 있으며 평화를 유지할 억제력이 있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한 대안은 당연하지만 다른 국가와 손을 잡아 독일을 고립시킨다는 집단안보적 선택이며 또 실제로 이를 주장한 정치세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체임벌린은 프랑스와 영국의 분열을 책동하던 히틀러의 의도에 대항하여 프랑스와의 군사적 관계를 격상시킨다든지, 이중전선을 형성해줄 수 있는 소련에 진지하게 접근하려는 발상도 없었다. 특히 뮌헨협정 이후에는 그 이전까지 명백히 유화정책을 지지했던 여론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또 독일의 야심이 생각보다 통제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하였으므로 노선 변경 내지는 수정을 가할 공간이 충분히 존재하였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뮌헨협정의 성공에 취하여 정책의 재검토를 거부했다. 즉 체임벌린에게는 (특히 뮌헨협정 이후) 유화정책 이외의 대안이 존재하였으며, 여기에서 그 지속을 선택한 것은 분명히 체임벌린의 판단과 책임에 의한 것이었지 대안의 부재가 아니었다는 것이 파커의 논점이다.[22][23]

파커 이후 체임벌린를 둘러싼 히스토리오그래피는 전면적인 재검토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파커의 반수정주의는 결국 전통주의적 시각으로 회귀하려는 것이었기에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으켰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복권된 전통주의적 시각은 처칠이나 노동당의 정치적 공격으로 형성되었던 40년대와는 달리 구체적인 근거와 반세기의 연구가 뒷바탕되었기에 학술적인 복권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 결과 수정주의는 후퇴하고 반수정주의론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게 된다.
예를 들어, 시드니 애스터 -반수정주의를 "유죄인 논점"으로의 회귀라고 보는데에 있어 파커보다 더 적극적인- 는 1973년에 내놓았던 수정주의적 1939년 연구를 뒤집고 진영을 바꾸었다. 다른 연구들도 완전히 같은 해석은 아니지만 부흥하는 반수정주의 학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브라이언 맥커처는 유화정책을 적극적 동맹외교를 통해 대륙의 균형을 지킨다는 영국의 전통을 포기한 비현실적이고 재앙적 이탈이라고 비판했다. 즉 '현실정치에 기반하지 않았던' 체임벌린식 유화정책은 '있을 수 없는 타협점을 찾으려고 아둥바둥했다'는 것이다. 그렉 케네디는 체임벌린을 가리켜 '오만불손하고, 시야가 좁으며, 집착적인 사람' - 그래서 '작은 독재자'에 가까웠고 - '영국과 대영제국의 필요를 수호는 커녕 이해할 능력도 없었던 것에 책임이 있다'는 쓰라린 판결을 내렸다. '체임벌린의 목적은 유화정책을 통해 영국이 충분한 수준의 재무장을 할 시간을 벌어내든가 아니면 침략국가들의 마지막 요구사항까지 들어주고 유럽 내에서 "보통"국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어느 쪽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에릭 골드스틴은 뮌헨에서 체임벌린의 '본디의 이상주의적 행동과 용기가 허세가 되고, 심약함이 되고, 마지막으로 진상은폐에 도달'한 과정을 탐구했다. 대서양 양 끝의 학자들이 서술한 총괄서들은 비슷한 비판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세부적인 연구서들도 같은 맥락을 따라가면서 여태껏 정책결정자들을 옭매었다고 주장되었던 제약들을 해체하고 체임벌린식 유화정책에 대한 대안들을 밝혀내고 있다. 영국 국방정책에 대한 재해석들은 영국 경제가 재무장을 버틸 수 없었다는 관점에 반박하면서 '체임벌린 정권은 재무장을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을 원했다는 외교적 구속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에 대한 반발감이 정부의 국익에 대한 인식을 흐리고 대히틀러 봉쇄를 위한 의미있는 영소협력의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닫은 것이 아니냐는 학자들에 의해 의문시되고 있다. 반대로 당시 외무차관이었던 로버트 밴시터트가 구상했던 '동맹외교에 기반한 세계전략'과 더 나아가서 종래적 억지책 등 1930년대에 실제로 떠올랐던 정책적 대안들이 가능했던 선택지로 복권되었고, 이와 함께 체임벌린이 집권하면서 이 대안들이 어떤 방식으로 후퇴되었는지 밝혀졌다. 심지어 반수정주의의 좌파적 일종도 등장하여, 유화정책이 타락한 지배계급의 사악한 자본주의적 음모의 결과라고 주장했던 초기의 사회주의적 비판으로 회귀했다.
Finney, P., (2010) Remembering the Road to World War Two: International History, National Identity, Collective Memory, Routledge, pp.211-212

특히 반수정주의적 관점에서는 유화정책의 배경을 놓고 기존의 수정주의론에서 강조하였던 현실주의적 관점, 즉 영국의 경제적, 군사적, 여론적 약화로 인한 제약이 유화정책을 불러냈다는 주장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오히려 영국이 저무는 국가라는 것이 상정조차 되지 않은 인지부조화적 사고와 자기객관화 실패를 원인으로 지목하며, 그 결과 세계대전의 발발을 막을 가능성을 제약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3.4. 처칠의 추도문

인간에게는 사건의 추이를 앞질러 예견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걸 다 안다면 세상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시기에선 옳은 것처럼 보이고, 어떤 시기엔 틀렸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몇년이 지나, 그때를 돌아보는 관점이 길어졌을 때 모든 것이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되죠.
윈스턴 처칠, 1940년 11월 12일 네빌 체임벌린의 추도사 中

처칠은 체임벌린의 뮌헨 협정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했지만, 그의 행동은 그저 "실수"와 "오판"이지 "악의"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체임벌린이 좌절을 겪었던 이유는, 큰 위협을 무릅쓰면서도, 또 인기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상관없이 인간의 가장 자비로운 마음인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체임벌린 그 자신의 능력과 권위를 다 썼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4. 매체에서

4.1. 출판물

4.2. 영상물

4.3. 게임



[1] 당시에는 메이슨 대학교.[2] 이후 이들은 보수당으로 당 자체가 흡수합당되었으며, 조지프 체임벌린도 보수당으로 전향한다.[3] 배다른 형제이다. 그래도 사이는 친했던 듯하다.[4] 여담으로 낸시 아스터는 처칠에 대해 질문받자 "그는 이미 끝났다."라고 평가했다. 물론 두 사람의 사이가 매우 나빠서 아스터가 처칠에게 자신이 처칠의 부인이라면 처칠의 차에 독을 탔을 거라고 하자, 반대로 처칠은 (낸시의 남편으로 살 바에야) 그 차를 마셨을 거라고 응수한 일화도 있을 정도이니 중립적인 평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단순히 악감정 때문에 나온 평가는 아니다. 저 시기 처칠은 실제 한물 간 정치인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2차 대전이 아니었으면 오늘날 처칠은 그냥 평범한 옛 정치인 정도로 기억되거나 갈리폴리의 참사를 불러온 해군 장관이란 오명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인생은 타이밍.[5] 실제 이탈리아는 2차 대전 발발 직후, 영국에 연합국으로 참전할 수 있다는 의사를 타진한 적도 있다. 다만 그 전제조건이 이탈리아 지상군 전부를 현대화할 정도의 장비 요구라서 현실성이 없었다. 당장 영국도 대전 발발 후 본격적으로 육군력을 기르고 미국발 물량이 오기 전까지는 지상군이 굉장히 부실한 상태였다. 여러 현실적인 이유들 탓에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탈리아는 1차 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을 시종일관 방해했으며 실제로 1934년 오스트리아 병합을 저지했다.(물론 히틀러는 나중에 한번 더 병합을 시도해 성공했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명분 없는 식민전쟁을 벌여 국제사회에서 고립당하자 손을 잡을 나라가 독일밖에 없었다.[6] 첫번째는 1878년 베를린 회의를 마치고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다우닝가 10번가 앞에서 한 연설이었다.[7] 의미가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Peace in our time'라는 표현으로도 잘 알려졌는데, 어느 쪽이던 긍정적으로는 쓰이지 않는다.[8] 몬티 파이선의 '세계에서 가장 웃긴 농담'에서는 나레이터가 '신형 농담은 영국의 전쟁 전 농담보다 6만 배는 더 강력했다.'라고 설명할 때 이걸 보여주면서 은근히 깠다.[9] 처칠과 마찬가지로 대독 강경론자였으며 인도-버마 식민지의 전문가였다. 이 연설은 올리버 크롬웰의 명언을 인용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에이머리의 이름은 두고두고 영국사에 이름이 남는다. 그러나 처칠과의 의견차이, 특히 인도 식민지 운영에 대한 견해차이로 전쟁내각에 기용되지 못했고, 전쟁 기간 인도 및 버마 식민지의 국무장관을 맡아야 했다. 독일 항복 직후인 1945년 7월 총선에서 낙선하고 세습귀족 임명 및 상원의원직을 제안받았으나 거부하고 정계를 은퇴했다.[10] 체임벌린으로서는 매우 운이 없었다. 아무리 노동당이 체임벌린을 싫어한들, 전 유럽에서 독일에 맞설 나라가 영국 하나뿐인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면 절대 비토하지 못했을 것이다. 체임벌린 내각 시기에는 아직 프랑스가 건재했기에 노동당도 체임벌린 밑에서는 전시 내각 참여 안 한다고 뻗댔던 거다. 실제 총리가 누구냐를 떠나 전시내각 참여 자체를 계속 반대하던 소수파들은 프랑스가 항복한 후 일제히 버로우했고 극소수가 종전 이야기를 꺼내긴 했으나 거국내각 부총리로 입각했던 노동당 당수 클레멘트 애틀리가 진압해버렸다.[11] 대장암이었는데, 전쟁 이후 스트레스로 병세가 더 급격히 악화되었다.[12] 5월 위기 이후 체임벌린의 지지로 처칠 내각은 안정을 찾고 있었으나 여전히 당 대표는 체임벌린인 상황에서, 체임벌린이 물러날 경우 설령 처칠 본인이 당 대표가 되더라도 그동안 잠잠해있던 온건파의 공격으로 처칠 내각이 흔들릴 우려가 있었다. 때문에 처칠은 후일은 몰라도 당장에는 자신이 총리를 맡고 자신을 지지해주는 체임벌린이 당 대표직을 맡아 당 온건파의 공격에서 비껴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결국 체임벌린 사후 예상된 온건파의 반발은, 주미대사의 사망을 틈타 온건파 수장 핼리팩스 외무부장관을 주미대사로 보내는 것(...)으로 해결한다.[13] 처칠 입장에서도 1940년 5월 서부전선의 패전 와중에 체임벌린이 자신을 지지해준 것이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14] 독일은 1939년 세계대전을 개전할 당시에도 군 재건이 완료되지 않았다. 가장 기본적인 군복과 보병화기조차 부족해 징집된 청년들에게 군인신분임을 증명하는 완장 하나만 준 채로 집에서 들고 온 삽 하나 메고 있는 병사들도 꽤 있었을 정도로 재군비가 아직 한창 진행 중이었다. 해군 재건속도에 맞춰 충분한 시간을 들여 각 군의 재무장을 완료하고 개전하기로 한 초기 구상에선 개전 날짜가 1945년이었다. 우리가 아는 역사는 히틀러의 벼랑 끝 외교가 양날검이 되어 애초 계획보다 무려 5년이나 당겨진 결과이다.[15] 특히 뮌헨 협정으로 인해 체코를 넘겨주었는데 당시 체코는 병기 생산을 위한 중공업이 발달한 국가였고 나치 독일은 체코를 통해 자신들에게 필요한 군사 장비를 전부 얻을 수 있었다. 즉, 우리 시대의 평화라던 뮌헨 협정이 오히려 전쟁을 앞당긴 것.[16] Parker, R.A.C., (1993) Chamberlain and Appeasement: British Policy and the Coming of the Second World War, Macmillan, p.343[17] Sidney Aster (2008) Appeasement: Before and After Revisionism, Diplomacy and Statecraft, 19:3, 443-480, DOI: 10.1080/09592290802344962[18] 353쪽의 미주 22에 "그 증거는 weinberg, Foreign Policy 1937-39, pp. 462-463에 언급되었다"고 언급.[19] https://m.dcinside.com/board/rome/841311 재인용[20] https://m.dcinside.com/board/rome/841311 재인용[21] Parker p.218[22] Parker p.347[23] 실제로 2차대전 참전 라디오 방송에서 체임벌린은 본인의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강변한다.(Yet I cannot believe that there is anything more or anything different that I could have done and that would have been more successful.) 대안이 있었다고 해도 선택하지 않았을 거란 말이다.[추정] 체임벌린→쳄벌린→탬버린. 실제로 과거에 쓴 기사들을 보면 "네빌 벌린"이라 쓴 기사들이 몇몇 있다.1, 2[25] 사실 체코 민족주의자에게 독일 고위 외교관이 암살되는 바람에 히틀러가 협정 파기 후 체코 침공을 결의한 이유가 더 크다.[26] 실제 역사에서도 뮌헨 협정 전후에는 대부분 체임벌린을 두둔하고 처칠은 한물 간 고집스럽고 늙은 전쟁광으로 평가했다.[27] 가진 돈이나 식민지를 다 내놓으라는 식의 정상적인 플레이에선 절대 이뤄질 수 없는 무리한 요구까지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