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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53b4><colcolor=#fff> 영국 하노버 왕조 제2대 국왕 조지 2세 George II | |||
출생 | 1683년 10월 30일 | ||
신성 로마 제국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하노버 호렌하우젠 궁전 (現 독일 니더작센 주 하노버) | |||
사망 | 1760년 10월 25일 (향년 76세) |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궁전 (現 영국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궁전) | |||
묘소 | 웨스트민스터 사원 | ||
재위기간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및 아일랜드 국왕 | ||
1727년 6월 11일 ~ 1760년 10월 25일 | |||
하노버 선제후 | |||
1727년 6월 11일 ~ 1760년 10월 25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1353b4><colcolor=#fff> 가문 | 하노버 가문 | |
이름 | 영어: 조지 오거스터스 (George Augustus) | ||
독일명: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Georg August) | |||
아버지 | 조지 1세 | ||
어머니 |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 | ||
형제자매 | 조피 도로테아 | ||
배우자 | 안스바흐의 카롤리네 (1705년 결혼 / 1737년 사망) | ||
자녀 | 프레더릭[1], 앤, 아멜리아, 캐롤라인, 조지 윌리엄, 윌리엄, 메리, 루이자 | ||
종교 | 성공회 (잉글랜드 국교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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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하노버 왕조 2대 국왕. 조지 1세의 아들로 영국과 하노버 선제후국의 군주였다.2. 생애
2.1. 즉위 전
하노버에서 태어났으며 4세가 될 때까지 프랑스어만 사용했다가 독일어도 배웠다. 나중에는 영어와 이탈리아어도 배웠다. 특히 영어는 외국어로서 배운 것이긴 했지만 그럭저럭 능숙하게는 했으며, 이 점에서는 아버지 조지 1세보다 훨씬 나았다.어머니 조피 도로테아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아버지 조지 1세는 그녀를 감금했다.[2] 그리고 아들이 어머니를 만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조지 2세는 아버지를 싫어했다. 대신 로버트 월폴 등과 어울렸다. 한편 그로 인해 자신의 장남인 웨일스 공 프레더릭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콩가루 집안 중 망하지 않은 사례.
음악에도 관심이 많아 헨델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특히 헨델의 작품과 관련해서는 메시아를 부를 때 할렐루야 부분에서 기립하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705년 호엔촐레른 왕가의 방계 출신인 안스바흐의 카롤리네과 결혼했다. 캐롤라인은 아름답고 총명한 여성으로 아이작 뉴턴 등 지식인들과도 교류했으며 조지 2세에게 정치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녀가 죽기 전 재혼을 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2세는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았다.[3]
그의 인생도 아버지 조지 1세처럼 하노버 선제후로 머무를 뻔했지만, 1701년 새롭게 제정된 잉글랜드의 왕위계승법에 따라 왕위 계승서열 4위가 되었고, 이후 할머니 팔츠의 조피와 앤 여왕이 죽은 이후 1714년 아버지 조지 1세가 영국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그도 따라서 영국의 왕세자가 되었다. 다만 위에서도 설명했듯 아버지와의 사이는 여전히 나쁜 상황이었기에 다툼이 꽤 있었다. 거기다 조지 1세가 영국 정치 현실에 적응을 잘 못했던 것에 비해 그는 젊은 나이였던데다 영어도 어느 정도 할 줄 알았기에 여러모로 활력적으로 활동했던 편이었다. 여러모로 서로 맞지 않았던 상황이었고 이는 조지 1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2.2. 즉위 후
1727년 아버지 조지 1세가 하노버에서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영국 국왕과 하노버 선제후직을 겸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조지 1세보다는 확실히 영국 국왕으로서의 활동을 주로 하게 되는데 1732년 조지아 식민지를 개척하는 것을 통해서 이런 점을 엿볼 수 있다.그의 재위 기간 중에 여러 중요 사건을 겪게 되는데 이게 영국의 대외 식민지를 그야말로 확장시키고 영국이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우선 겪은 전쟁은 바로 1740년에 발생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다. 신성로마황제 카를 6세 사후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 문제를 두고 유럽 한복판에서 전쟁이 펼쳐지게 되는데 조지 2세도 엄연히 신성로마황제를 선출할 권리가 있는 하노버 선제후였기 때문에 여기에 관여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바이에른 선제후였던 카를 알브레이트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신성로마황제 계승을 거부하고 스스로 카를 7세로 즉위하고 그를 뒤에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그리고 합스부르크를 지속적으로 견제하는 프랑스가 돕게 되는 구도가 되었다.
조지 2세의 경우 자신의 조카인 프리드리히 대왕이 아닌 합스부르크 제국을 돕는 쪽으로 가게 되는데 이는 당시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대립 문제가 컸기 때문이었다. 특히 1744년부터 4년간 벌어진 이 식민지 쟁탈전은 평화조약으로 원상 복구되었지만, 상호 식민지 점령 속에 영국의 우세로 끝났다. 이를 그의 이름을 따 조지 왕의 전쟁(King George's War, 1744~1748)이라고 한다. 한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에는 직접 전투에 참가하면서 1743년 데팅겐 전투를 합스부르크 제국군과 연합하여 치르게 되고, 여기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참고로 몸소 전쟁터에서 군대를 지휘한 마지막 영국 군주다.
그러나 영국이 1744년부터 프랑스와의 식민지 쟁탈전에만 관심을 두게 되면서 사실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물러난 상황이 되자 가뜩이나 슐레지엔을 잃어서 화가 잔뜩 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행보가 괘씸하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영국의 조지 2세도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지부진한 영향력과 비교하여 자신의 조카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이 훨씬 강국으로 느껴지게 되었고 이쪽이 더 낫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결국 1756년 1월 16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영국과 프로이센은 서로 공수동맹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맞서 마리아 테레지아도 프랑스와의 동맹을 추진하는 동맹의 역전을 완성시키면서 7년 전쟁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7년 전쟁은 조지 2세의 사후에도 이어졌고 유럽 대륙에서는 프로이센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게 되고, 여타 식민지 쟁탈전에서는 영국이 프랑스 상대로 압승을 거두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 생기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한편 조지 2세는 제위기간 중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자코바이트 문제다. 한창 유럽과 여러 식민지에서의 전쟁으로 바쁜 1745년 제임스 2세의 손자였던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스코틀랜드로 몰래 진입하여 반란을 일으켜 순식간에 스코틀랜드를 점령하고 잉글랜드로의 진격을 시작한 것이다. 조지 2세는 유럽 대륙에서 전쟁 중이던 자신의 3남인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왕자를 런던으로 소환하여 진압을 명했고, 1746년 결국 이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하노버 왕가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자코바이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게 되면서
이렇듯 여러모로 영국과 하노버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왕으로 충분한 평가를 들을 만한 업적이 많다.
하지만 맏아들인 웨일스 공 프레더릭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프레더릭이 조지 2세에 반대하던 토리당과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프레더릭은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다. 대신 프레더릭의 아들인 조지 3세가 왕위에 오른다.
조지 2세는 1760년 10월 25일에 사망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실에 다녀온 직후 바닥에 쓰러진 것을 시종이 발견해서 침대에 옮겼으나 곧 사망했다. 부검 결과 사망 원인은 대동맥 박리였다.
3. 가족 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조지 2세 (George II) | 조지 1세 (George I) | 하노버의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Ernest Augustus, Elector of Hanover) |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George, Duke of Brunswick-Lüneburg) | |||
헤센-다름슈타트의 앤 엘레노어 (Anne Eleonore of Hesse-Darmstadt) | |||
팔츠의 조피 (Sophia, Princess Palatine of the Rhine) | |||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Frederick V, Elector Palatine) | |||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Elizabeth Stuart) | |||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Princess Sophie Dorothea of Celle) |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빌헬름 (George William, Duke of Brunswick-Lüneburg) |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게오르크 (George, Duke of Brunswick-Lüneburg) | |||
헤센-다름슈타트의 앤 엘레노어 (Anne Eleonore of Hesse-Darmstadt) | |||
엘레오노르 마리 드미에 돌브뢰즈 (Éléonore Marie Desmier d'Olbreuse) | |||
올브뢰즈 영주 알렉상드르 드미에 (Alexandre Desmier, Seigneur of Olbreuse) | |||
바방드레와 생마르크의 자케트 푸사르 (Jacquette Poussard du Bas-Vandré et de Saint-Marc)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웨일스 공 프레더릭 (Frederick, Prince of Wales) | 1707년 1월 31일 | 1751년 3월 31일 |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 공녀 슬하 5남 4녀[4] |
1녀 | 오라녀 공비 아나 (Anne, Princess of Orange) | 1709년 11월 2일 | 1759년 1월 12일 | 오라녀 공 빌럼 4세 슬하 1남 2녀 |
2녀 | 아멜리아 공주 (Princess Amelia) | 1711년 6월 10일 | 1786년 10월 31일 | |
3녀 | 캐롤라인 공주 (Princess Caroline) | 1713년 6월 10일 | 1757년 12월 28일 | |
2남 | 조지 윌리엄 왕자 (Prince George William) | 1717년 11월 13일 | 1718년 2월 17일 | |
3남 |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왕자 (Prince William, Duke of Cumberland) | 1721년 4월 26일 | 1765년 10월 31일 | |
4녀 | 헤센카셀 방백비 마리아 (Mary, Landgravine of Hesse-Kassel) | 1723년 3월 5일 | 1772년 1월 14일 | 슬하 4남 |
5녀 |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왕비 루이세 (Louisa, Queen of Denmark and Norway) | 1724년 12월 18일 | 1751년 12월 19일 | 프레데리크 5세 슬하 2남 3녀[5] |
4. 여담
영국 국왕은 실제 생일과 관계없이 6월 두번째 토요일에 공식 생일 행사와 군기분열식을 하는데, 조지 2세부터 시작된 전통이다. 11월생인 조지 2세는 11월은 너무 춥고 칙칙해서 행사하기 좋은 계절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름철로 공식 생일 행사일을 지정했다.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에 나오는 영국 국왕이 바로 이 조지 2세이다. 실제로 대항해시대 말기 카리브해의 해적 토벌에도 열정적이어서 우즈 로저스를 바하마 총독으로 임명하여 나소에 자리 잡은 해적 공화국을 제거하도록 명령했던 전적도 있다.
마지막과 관련된 기록이 많은 영국 국왕이다. 마지막으로 영국 국외에서 태어난 국왕이자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마지막 영국 국왕이다.[6] 또한 상술했듯 마지막으로 전투를 직접 지휘한 영국 국왕이다.
조지 2세의 장남 웨일스 공 프레더릭의 유복녀, 즉 조지 2세의 손녀 캐롤라인 마틸다는 15세 때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7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으나 왕의 주치의였던 독일인 요한 슈트루엔제와의 불륜설로 인해 이혼당하고 궁에서 쫓겨났다. 이후 23살의 나이에 성홍열로 독일에서 사망했다.
[1] 조지 3세의 아버지[2] 조지 1세는 한술 더 떠서 애첩이 여러 명이었는데 이를 두고 아내가 항의하자 폭행했다. 심지어 애첩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아내를 폭행하기까지 했다고. 당시 유럽의 시대상으로는 귀부인이 애인을 두는 것은 쉬쉬해야 할 부끄러운 비밀이지만, 귀족 신사의 경우 거의 공식적으로 애첩을 두어도 이상한 것이 아니긴 했다. 그러나 이것이 과장되어서 아무런 흠이 되지 않았다거나 애첩이 없으면 고자 취급을 받았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있는데, 엄연히 '공공연한 비밀' 정도였지 엄청 바람직한 일로 여겨진 건 아니었다. 너무 심하게 난봉꾼 노릇을 하거나, 상식선에서 본처를 존중하지 않고 혼인이 파탄 상태에 이르면 본격적인 명예의 실추를 감수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조지 1세의 아내 취급은 당대 기준으로도 정상적으로 여겨지기 힘들었다.[3] 다만 애인들은 있었다.[4]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부인 아우구스타, 조지 3세, 글로스터와 에든버러 공작 윌리엄 헨리 왕자, 컴벌랜드와 스트래선 공작 헨리 왕자,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비 카롤리네 마틸데 등[5] 스웨덴의 왕비 소피아 막달레나, 크리스티안 7세 등[6] 조지 2세 이후의 영국 국왕들은 모두 영국에서 태어났고, 사후 윈저 성(성 조지 예배당 또는 프로그모어 영묘)에 안장되었다.